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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장엄한 항쟁
제1장10일간의 항쟁
2.첫격돌
"가로수에 학생 묶고 곤봉으로 두들겨"
7공수33.35대대 전대.조대등 투입돼
공수부대 진압방식 경찰도 "아연실색"
이민족 침략과도 같은 폭력진압...학생.시민들 "저항권 일제히 폭발"
5월18일 아침광주.
지난 새벽 공수부대 진압과 함께 전남대등 대학구내에 몰아 첬던 이민족의 침략과도 같은 야만의 폭풍,
그 흔적은 외견상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18일 전남대와 조선대 등을 찾은 일부 학생들은 지난밤 TV 등을 통해 접한 [계엄령확대]소식이 얼마만큼 엄청난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를 확인한다.
혹시나 하는 불안감을 안고 전남대 정문앞에 당도한 몇몇 학생들은 M16소총을 비껴 멘 공수부대원들을 목격한다.
80년 당신 전남대 서클연합회 홍보부차장을 맡고 있던 이광호씨(35.샘물출판사대표,당시 사회학과3년)는 18일 교문앞에서 느꼈던 당혹감을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학내진입 허용요구
[함께 일하던 동료가 연행됐다는 소식을 접하고 학교앞에 당도한 시각이 아침8시께였다. 정문을 통해 교내에 진입하려 했으나 공수부대원들의 제지로 갈 수 없었다.
휴교사실을 모르고 도서관을 찾은 학생, 휴교령이 내릴 경우 학교에 모이자는 총학생회의 결정을 기억하고 등교한 사람등이 교문앞 다리에 앉아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분위기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학교진입을 막는데 대한 불만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당시 전남대에 진입한 군병력은 7공수여단 제33대대.
3백66명의 부대원중 주력이 전남대에 남고 일부는 광주교대에 진입, 학내를 수색하는 한편 18일 아침 학생들의 학교출입을 일체 통제한다.
7-8명의 병력을 교문에 배치, 학생들의 출입을 막고 있던 군병력은 학생들의 불만이 고조되자 첫경고 방송을 내보낸다.
학생들은 학내진입 허용을 요구하며 노래를 선창한다.
일부에서는 구호를 외치는 한편 3-4명 돌멩이를 던지는 학생들이 나타나자 분위기는 급변한다.
전남대2학년에 재학중 전남대정문앞 독서실을 가기위해 나섰던 김수영씨(32)의 증언.(학국현대사료연구소, 광주오월민중항쟁사료전집) [학생수가 불어나고 일부 투석이 시작되자 두 번째 경고 방송이 나왔다. 이미 교문은 굳게 닫히고 교문앞에는 20명가량의 공수부대원들이 지그 쟤그로 도열해 있었다. 갑자기[돌격 앞으로]라는 명령과 함께 최루탄이 터지면서 교문앞에 있던 공수부대원들이 학생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돌멩이가 날아갔으나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전10시30분께 공수부대원과 학생들은 투석과 최루탄, 그리고 곤봉이 맞서는 첫격돌을 경험한다.
그러나 이날의 시위는 학생들이 그동안 경험해오던 시위와는 근본적인 차이를 보인다.
공수부대원들의 진압방식이 경찰들의 그것과 얼마만큼의 차이를 보이는가는 오래지 않아 확인된다.
[공수부대원들은 순식간에 학생들 대열 사이로 뛰어가 곤봉으로 때리고 군화발로 차면서 진압하기 시작했다. 전남대 사거리 쪽으로 도망가는데 앞선 공수부대원들은 대열을 따라잡아 아수라장을 만들었다. 한 대학생이 도망가다 자전거에 걸려 넘어졌다. 뒤따라오던 공수가 발로 머리를 걷어차고 손으로 자전거를 들더니 학생에게 그것을 던졌다.]
이 광경을 목격하고 독서실내로 피신한 김수영군은 독서실에까지 쫓아와 고교3년생의 머리를 곤봉으로 내리쳐 피투성이로 만드는 공수대원을 목격한다.
18일 아침 학교내에서 숙식을 해결하던 친구를 따라 전대정문앞을 찾은 이수범씨(38.나주군 다사면에서 개인택시사업, 80년5월21일 전남도청앞에서 총상)는 우연히 진압장면을 목격하곤 국민의 군대에 대한 배신감을 뼈저리게 느낀다.
[군에서 제대한지 얼마되지 않은 상황이어서 군인들의 사정을 이해할 수 있는 시기였지만 잠시 시위상황을 지켜보면서 이래서는 안된다는 안타까움을 떨칠수가 없었다. 도대체 왜들 저러는가. 무엇 때문에 저들이 저렇게 잔인하게 변해 있는가. 학생들과는 조금 떨어진곳에서 진압장면을 지켜보면서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진압을 피해 3층건물로 피신한 학생들까지 끌어내 구타하는 것을 보면서 뭔가 단단히 잘못돼가고 있구나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전남대 정문앞에서 공수대원과 학생들간에 치열한 공방이 계속되고 있을 때 전남대후문과 조선대, 광주교대에서는 공수부대원들의 일방적인 폭력이 목격된다.
전남대앞 치열한 공방
이날 오전10시께 10번 시내버스를 타고 전남대후문을 지나던 범진염씨(36.광주시 북구 생용동)는 영문도 모른채 전남대구내로 끌려간다.
[공수부대원들이 버스에 올라오더니 무차별적으로 사람들을 때리기 시작했다. 그런후 젊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끌어내렸다. 나를 포함해 20명가량이 전남대후문담쪽으로 끌려갔다. 담벽에서서 또한번 구타를 당한 뒤 구내로 들어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처박고 있었다. 잠시 후 학생이 아닌게 확인돼 풀려 났으나 후문을 빠져나오면서 또 한차례의 구타를 당했다.](광주오월민중항쟁사료전집증언)
한편 이날부터 27일까지 전남대 문학부 건물에서 생활한 전능산씨(55.현재 전남대사대부고 서무과 근무)는 18일 상당수의 젊은 이들이 학교구내로 끌려와 구타당하는 모습을 목격한다.
[대학원 건물에서 종합운동장쪽을 내려다보니 50-60여명의 젊은이들이 끌려와 토끼뜀과 구타당하는 장면을 목격하고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것은 짐작했지만 바깥상황을 알수는 없었다.]
7공수 제35대대가 진주한 조선대의 18일 아침은 삭막했다.
아침 8시께 평소처럼 체육관으로 출근하던 최규막씨(57.조선대체대 기구관리실근무, 당시 체육관근무)는 공수부대원으로부터 강한 제지를 받는다.
[아무리 시국이 어수선하다해도 임무는 수행해야 하는 것 아니냐며 일단 체육관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잠시 후 찾아온 공수부대원들은 도대체 학교에서 무슨 할 일이 있다고 남아있느냐 귀가하는게 좋다. 학교는 우리가 지키고 있으며 그림자 하나도 들어올수 없다고 종용해 오후3시께 퇴근하고 말았다. 그렇게 위압적인 상황은 생전 당해 본일이 없었다.]
그러나 조선대정문앞에서는 학내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상황이 벌어진다.
전남대 독문과에 재학중이던 임락평씨(37.광주.전남환경운동연합사무국장)는 광주시 서구 주얼동에서 전남대로 향하던중 돌발적인 상황을 목격한다.
[시내버스가 조선대앞에 이르렀을 때 주민들이 모여있는 것을 보고 버스에서 내렸다. 정문에는 대위의 지휘를 받는 공수대원들이 포진해 있었다. 조금 안쪽을 보니 학생1명이 가로수에 묶여 있었다. 군화발로 채이고 곤봉으로 구타당하는 모습을 지켜보다 못한 주민들이 거세게 항의 했다. 절뚝거리며 나오는 학생을 자취방에까지 안내해줬다. 자신말고도 여러명의 학생이 영문을 모르고 등교하다 곤욕을 치렀다는 얘기를 들었다.]
전남대에 진주한 33대대 가운데 일부병력이 투입된 광주교대앞 상황도 전남도, 조선대와 같은 양상을 보인다.
당시 광주교대앞에 거주하던 전규량씨(광주시의회의원)의 증언.
[오전 10시께 젊은 학생이 교대쪽으로 오자 공수부대원3명이 그를 잡기 위해 쫓아갔다. 도망가던 학생이 멈춰서자 그들은 다짜고짜 진압봉으로 뒤통수를 내리쳤다. 쓰러진 학생의 어깻죽지를 내리친 뒤 학생을 인근 공터로 끌고 가더니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개머리판등으로 구타한다음 트럭에 싣고 어디론가 떠나는 것을 보았다.]
상상외의 진압방식에 조선대, 광주교대정문앞이 아수라장으로 변할 당시 1시간가량 투석전을 전개하던 전남대정문앞 상황도 진압된다.
8시부터 전남대 정문앞을 지키며 교내진입을 시도했던 이광호씨등은 더 이상 정문앞에 머물러있다는 사실이 무의미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동료들에게 광주역에 재집결, 시내일원으로 진출할 것을 권유한다.
[3차례정도의 밀고 밀리는 공방이 벌어지긴 했지만 부상만 늘어날 뿐이었다. 11시를 조금 넘은 시각 당시 함께 시위에 참여했던 조길영(현 김상현의원비서관) 문광일씨(당시 전남대 독문과3년)등과 협의, 시내진출을 결정하고 일단 광주역앞으로 이동키로 했다. 당시 학생숫자는 3백명가량으로 불어났다.]
광주역앞으로 이동하던 학생들은 공수부대의 진압방식에 분노를 표시하며 전남대앞에서 벌어진 상황을 그대로 시민들에게 알려야 한다며 발길을 재촉한다.
그러나 공수부대와의 첫격돌을 마치고 이동하는 그 발길이 목숨을 건 10일항쟁의 첫걸음인줄은 어느 누구도 예상치 못한다.
<이영규기자>
첫댓글 고만습니다. 잘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