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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 상징, 신화의 세계와 대중 소설에 깊이 빠져든 2001년-
변화의 당위성을 생쥐와 꼬마인간에 빗대 이야기한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 서바이벌을 화두 삼아 온갖 과학상식을 제공하는 아동 대상 지식책 [로빈슨 크루소 따라잡기], 동물들의 표정을 통해 자신의 슬픈 자화상을 반추케 하는 [The Blue Day Book] 등은 단편적인 지식보다는 감동적인 서사를 중시하는 책이다. |
2000년은 아날로그 시대에서 디지털 시대로 넘어가던 단경기(端境期)였다. 광속으로 변하는 세상에 현기증을 느끼던 시기에 등장한 이 책은 “새로운 길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힘으로 개척해야만 한다. 그 자신의 인생은 아무도 대신 살아줄 수 없다. 조언은 할 수 있지만, 받아들이는 것은 그 자신의 몫”이라거나 “편안한 곳에서 외부와 격리된 삶을 사는 것보다 스스로 선택하는 삶을 사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라고 말하며 너무 빠른 변화에 공포를 느끼는 사람들에게 불안감을 안겨주었다. 그런 불안감이 이 책을 지구촌 최대의 베스트셀러에 올려놓았으며 국내에서도 광고 한 번 하지 않고 밀리언셀러가 될 수 있었다. 국내에서 소개되기 이전에 이미 세계 최대의 온라인서점인 아마존의 비즈니스 부문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다. 또 <이코노미스트>, <뉴욕타임스>, <월 스트리트 저널> 등 서양언론에서 일제히 필독서로 추천했으며, 세계적인 기업들이 생존의 매뉴얼로 채택했다. 하지만 인간은 환경의 변화에 순응할 수도 있지만 환경을 변혁하기도 한다. 인간이 개나 고양이 같은 동물과 다른 점이 바로 그것이다. 아무리 놀라운 기술이 등장해도 그 기술에 매몰되지 않고 곧 수용해 자기 능력을 업그레이드한다. 환경 순응의 철학을 가르치는 이 책에 수많은 대중이 맹목적으로 빠져든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변화의 진정한 의미를 깨우쳐주어야 할 지식인이나 저널리스트까지도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대척점에 분리해놓고 ‘디지털’을 선택하면 안전하다는 이분법적 사고의 전거로 이 책을 들었다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 “전 세계가 ‘신자유주의’라는 새로운 경제 질서의 등장으로 전 세계의 시민을 네트워크 속으로 옭아매려 들더라도 우리는 그 질서의 진정한 의미를 제대로 깨우치고 변화의 방향을 정확하게 잡아야 한다.”는 당시의 비판은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은 이후에야 제대로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일개 점원에서 동양 최고의 거상이 된 임상옥이 펼치는 인간의 길, 상업의 길.” 최인호의 장편소설 [상도]에서 초기에 일관되게 쓰인 헤드카피다. 작가는 조선 후기에 실존했던 무역상인 임상옥을 본받아야 할 진짜 장사꾼으로 소개했다. “이데올로기도 사라지고 국경도 사라진 21세기, 밀레니엄의 새로운 미래가 열리는 지금이야말로 경제의 세기이며 이에 따른 경제에 대한 신철학이 생겨야 한다.”는 생각에 이 소설을 썼다고 밝힌다. 소설은 작중 화자인 작가가 돌발 사고로 죽은 기업인 김기섭 회장의 지갑에 숨겨져 있던 열 자의 한문 “財上平如水 人中直似衡(재상평여수 인중직사형)의 출처를 밝히려는 것으로 시작한다. ‘재물은 평등하기가 물과 같고 사람은 바르기가 저울과 같다’는 뜻의 이 말이 작가가 말하는 경제의 신철학을 집약하고 있다. 임상옥은 석숭 스님이 내려준 세 가지 비결, 즉 스스로 죽을 각오를 해야만 위기를 물리치는 ‘사(死)’, 부와 권력과 명예는 솥의 세 발처럼 균형을 이뤄야 한다는 ‘정(鼎)’, 가득 채우면 잔속의 술이 사라져 버리고 오직 팔 할 정도만 채워야 온전한 술잔 노릇을 하는 ‘계영배(戒盈盃)’의 세 활구(活句)를 실천하면서 일생일대의 위기를 벗어난다. 베이징 상인들의 인삼불매동맹에 인삼을 태우는 방법으로 대응한 것이 첫 번째이고, 풍운아 홍경래의 유혹에 맞서 정(鼎)의 비의를 타파함으로써 혁명의 와중에도 온전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것이 두 번째이며, 스스로 만족하는 자족이야말로 최고의 상도임을 깨달고 사랑하는 여인 송이를 떠나보내고 은둔생활을 하는 것이 세 번째이다. 결국 작가가 말하는 상업지도(商業之道)란 “장사란 이익을 남기기보다 사람을 남기기 위한 것이며, 욕망의 유한함을 깨닫고 그 욕망의 절제를 통해 스스로 만족하는 상업윤리야말로 하늘아래 최고의 거부가 되는 길”을 말한다. 출간 7개월 만에 밀리언셀러에 오르고 10년 동안 모두 400만 부가 판매됐다. 중국에서는 회사원들 사이에서 처세서로 소문나면서 소설 1위에 오르며 40만 부 이상 판매되었다. 정가의 3분의 1인 불법복제본이 실제보다 10배 이상 팔리던 시절이었으니 중국에서의 인기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짐작해볼 수 있다. 일본과 대만에서도 출간됐다.
IMF구제금융 이후 가족해체가 급격하게 진행되던 시기에 출간된 [국화꽃 향기]는 리얼리티가 부족하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가족애의 소중함을 일깨우면서 순수한 사랑을 갈망하는 독자들의 욕구에 부응했다. 한 권의 책에 대해 찬반양론의 공개 토론을 하던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비판적으로 말하기로 예정됐던 한 페미니스트가 소설을 읽다가 엉엉 울어버렸다고 이야기하는 바람에 제대로 된 토론이 이뤄지지 못할 정도였다. 또 열여섯 가출 소녀는 이 소설을 읽고 귀가한 다음 작가에게 절절한 사연을 담은 메일을 보내기도 했다. 이 작품이 인기를 끌자 작가는 2002년에 [국화꽃 향기 그 두 번째 이야기]를 내놓았다. 2003년에는 이정국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어 중국에 수출되기도 했다. 당시 영화나 드라마의 원작소설은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에 조건 없이 팔렸는데, [국화꽃 향기]도 한류열풍의 흐름을 타며 중국, 일본, 대만, 베트남, 필리핀 등 동남아 전역으로 팔려나갔다. 중국에서는 소설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르며 공식적으로만 40만부가 판매됐다. 소설 제목으로는 ‘내안의 너’와 ‘국화꽃 향기’가 마지막으로 경합했는데 가을이라는 계절적 분위기에 맞는 ‘국화꽃 향기’가 선택되었다.
The Blue Day Book -누구에게나 우울한 날은 있다
브래들리 트레버 그리브 바다출판사이 책의 왼쪽 페이지에는 단 한 줄의 사진 설명이 있고 오른쪽 페이지에는 거기에 해당하는 사진이 있다. (개정판은 원서처럼 사진 설명을 캡션처럼 사진 밑으로 배치했다.) 이미지가 무게의 중심이고 문자는 보조 역할을 하는 이 책의 사진 설명을 쭉 이으면 ‘서사적인 스토리’가 있는 한 편의 시처럼 읽힌다. “누구에게나 우울한 날이 있지요/ 자신이 하찮고 비참해지는 날/ 심술도 나고/ 가눌 수 없이 외롭고/ 완전히 맥 빠져서/ 몹시 보잘것없이 느껴지는 날/ 뭐든 손에 닿을 듯 말 듯 멀어서/ 모처럼의 기회도 놓치고 맙니다./ 어떤 일을 시작하기도 힘들어/ 다들 나만 괴롭힌다는 망상까지 들고/ 욕구불만에 불안까지 쌓여……” 사진 속에는 사진의 설명과 잘 어울리는 갖가지 ‘상징적인’ 동물들이 과장이나 꾸밈없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 책의 코드는 ‘우울’과 ‘유쾌’이다. 책을 본 회사 내 다수의 젊은 기획자들의 극찬에 출판사의 기획실장과 대표가 그 의견을 존중해 출간을 했다고 한다. 사진가이자 시인인 신현림을 역자로 선택한 것도 주효했다. 영화 [매트릭스]의 성공 이후 인간의 모습을 닮은 기계보다 피가 흐르는 우직한 동물에 편안함을 느끼는 감정이 고조되던 시점에 출간되어 타이밍도 좋았다. 책을 보기만 하고 사지 않을 독자의 구매 욕구를 이끌어내기 위해 저가로 제작하고, 티셔츠를 만들고, 책 속의 사진을 확대해 서점순회 동물사진전을 열면서 대형동물 사진을 증정하는 등의 이벤트를 벌였다.
200여 권을 번역한 번역가이자 [나비 넥타이] 등의 문제작을 발표한 소설가 이윤기가 신발, 나무, 홍수, 뱀, 술, 뿔 등의 12가지 열쇳말을 가지고 신화의 세계를 흥미롭게 이야기하는 신화입문서이다. 테세우스의 신발 한 짝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달마 대사를 거쳐 신데렐라로 연결되고, 이름 모를 나무 한 그루에 담긴 신들의 이야기로 자연에 대한 경외감을 깨닫게 하는 등 서양의 신화를 일방적으로 들여온 것이 아니라 서양 신화를 우리 정서와 상상력으로 소화해낸 거의 최초의 대중신화서이다. 신화가 서구 문화 전반에 어떻게 녹아들고 차용되었는지를 보여주는 그림, 조각과 신화의 장소들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컬러도판을 적극 활용하여 텍스트와 비주얼의 결합으로 상상력을 키우겠다는 ‘보급판’ 기획의도가 적중했다. 1999년 3월부터 10월까지 <문화일보> 후원으로 그리스와 소아시아를 중심으로 한 에게해를 여행하며 찍은 1만 컷의 사진과 그 밖의 수많은 이미지 가운데 신화와 관련된 이미지 200여 장을 활용했다. 기획 당시의 책 제목은 ‘아리아드네의 실타래’였지만, <문화일보> ‘새 천년을 여는 신화 에세이’ 연재와 EBS-TV <이윤기의 신화여행> 이미지를 활용해 이윤기가 곧 신화라는 점을 부각할 수 있는 지금의 제목이 선택되었다. 웅진출판의 청소년용 논술전집에 특별 부록으로 나왔다가 전집 판매가 부진하자 단행본으로 다시 출간해 130만 부 이상 판매하는 쾌거를 이뤘다. ‘사랑의 테마로 읽는 신화의 12가지 열쇠’, ‘신들의 마음을 여는 12가지 열쇠’라는 부제가 붙어있는 2,3권이 2002년과 2004년에 차례로 출간되었다.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떠나는 이들의 손에는 어김없이 이 책이 손에 들려질 정도로 정평을 얻었다.
“진정한 ‘나’는 우리 내면에 있는 순수한 영혼의 불꽃, 바로 ‘신성(神性)’이다. 모든 인간의 참 의미와 삶의 참 목적은 이 신성을 깨닫는 데 있다. 우리는 깨닫기 위해 인간의 몸과 마음을 빌어 이 지구에 태어났다.” [힐링 소사이어티]의 저자 이승헌은 ‘홍익인간’, ‘율려’ 등 한국의 정신문화와 철학을 바탕으로 개인의 깨달음에서 집단의 깨달음, 나아가 인류의 깨달음이라는 구체적인 비전을 제시한다. 깨달음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상식이며, 현실 그 자체이며, 누구나 선택하기만 하면 깨달을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런 깨달음을 위해 단학의 도인(導引)체조, 호흡법, 명상법 등의 정신수련법을 일상생활에서 활용해 몸과 마음의 균형을 단계적으로 회복할 것을 제안한다. 깨달음의 ‘추구’에서 깨달음의 ‘실천’으로 영성의 트렌드가 바뀌어야 한다는 주장이 담긴 이 책은 영문판이 한국어판보다 세 달 먼저 출간됐는데, ‘한국인 최초로 아마존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른 책’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주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한국어판은 출간 즉시 베스트셀러에 올랐으며 저자의 순회 강연회에 힘입어 순조롭게 판매되면서 출간 두 달 만에 10만 부, 6개월 만에 25만 부가 판매되었다. 일본, 프랑스, 러시아, 그리스, 불가리아 등에 판권이 수출되었다.
[창가의 토토]는 일본 방송계의 스타이자 괴짜로 알려진 구로야나기 데츠코가 자신의 어린 시절을 돌이키며 써내려간 자전적인 소설이다. 학교에서 문제아로 찍혀 퇴학당한 토토는 자신이 퇴학당했다는 사실도 모른 채 엄마의 손에 이끌려 도모에 학원에 들어간다. 도모에 학원은 폐차된 전철 여섯 칸을 연결해 교실로 쓰고 있었다. 2차 대전의 광기에 휩싸였던 시절에 도모에 학원에 모여들었던 50여 명의 학생들은 ‘정상적인 사회’가 내친 아이들이었다. 이 책은 책상머리 수업이 아닌 주변 숲이나 절 산책하기, 농사짓기, 음악에 맞춰 춤추기, 온천이 나오는 바다로 여행하기, 계곡에 가서 밥 지어먹기 등 생활교육을 받으면서 “넌 사실은 착한 아이란다”는 말을 들으며 자라는 토토, 아이들을 진정 믿어주며 꿈을 키울 수 있는 교육을 실천한 고바야시 소사쿠 교장선생님의 교육철학이라는 두 개의 축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국내에서 여러 출판사에 의해 번역 소개된 적이 있지만 크게 재미를 보지 못했다가 일본어를 공부하는 이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다는 사실을 안 1인출판사 프로메테우스가 리메이크해 내놓았다. 온라인서점 알라딘에만 책을 공급하는 바람에 초기에는 창고에 쌓여 있다가 알라딘의 호의적인 반응으로 메인 화면에 책이 소개되기도 했다. 알라딘의 독자 서평을 보고 책의 존재를 안 <동아일보>의 정은령 기자가 출판사를 수소문해 6월 17일에 이 책을 크게 소개했다. 다른 신문에서 먼저 소개한 책은 다루지 않는다는 관례를 깨고 <조선일보>가 6월 24일자 북섹션 프론트에 이상희 시인의 서평을 소개하는 등 언론에서 줄지어 대서특필되는 바람에 광고 한 번 없이 45만 부 이상 팔렸다. 1981년 일본에서 출간돼 첫 해에만 450만 부가 팔렸고 31개국 이상에서 번역출간 됐다. 반전 인권운동가이자 어린이를 생애의 테마로 삼았던 저명한 수채화작가 이와사키 치히로의 삽화로 인기를 얻기도 했다.
[풍경]으로 인기저자가 된 원성의 신작 그림 130여 점과 이야기를 담은 두 번째 책이다. [풍경]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동심을 자극하고 어린 시절에 대한 추억을 일깨워주는 동화와 같은 책이다. [거울]에는 수행의 어려움과 산사의 정경이 아니라 인간다운 삶을 다룬 다양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어 독자들이 편하게 읽을 수 있다. 도반에 대한 애틋한 감정, 도반과 함께 떠난 무전여행, 삼경이 지난 깊은 밤에 몰래 나와 어머니에 건 전화, 용꿈을 꾸고 한 스님의 위협과 애원에 못 이겨 천 원에 꿈을 판 일, 염불을 하다 두 소절을 빼 먹어 삼천 배 참회를 한 일, ‘오리 주댕이’ 때문에 어린 시절에 왕따를 당한 일 등의 에피소드는 인간다움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한다. [거울]에는 또 원성의 눈에 비친 다양한 풍경들이 그림과 함께 담겨 있어 자연과 합일하는 듯한 느낌을 갖게 만든다. 소녀 취향의 팬시 기호를 잘 반영한 비주얼의 힘이 크게 작용한 이 책은 55만 부가 넘게 팔린 [풍경]처럼 독자들에게 페티시즘의 욕구를 자극해 25만 부 이상 팔렸다.
[아주 오래된 농담]은 크게 두 개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Y건업의 장남 송경호 죽음과 그 죽음 뒤에 남겨진 가족들의 돈을 둘러싼 암투다. 송경호는 자신이 암에 걸린 지도 모른 채 죽어간다. 송 회장이 아들의 병명을 속인 것은 유산상속에서 아들의 결정권을 배제하기 위해서다. 송 회장은 아들의 장례식을 찍은 비디오를 보면서 어떤 인사가 조문을 왔으며 장례식이 얼마나 화려하게 치러졌는가를 과시한다. 다른 하나는 요절한 송경호의 아내인 영묘의 오빠이자 호흡기 내과 의사인 심영빈과 그를 둘러싼 이들의 이야기다. 예쁜 두 딸을 둔 영빈의 아내 수경은 아들을 낳을 욕심으로 계획된 출산을 준비한다. 남편의 친구인 산부인과 의사의 도움을 받아 두 차례나 딸을 유산하고 결국 아들을 임신하는 수경의 처절한 노력은 아들을 낳아야만 아내의 자리가 확보된다는 믿음에서 나온 행동이다. 영빈은 아내가 자신의 친구와 아내가 공모해서 만들어낸 아들에 대해 속아주는 척하지만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와 장삿속의 무참한 야합을 발견하고는 혐오의 감정을 느낀다. 영빈은 우연히 초등학교 동창인 현금을 만나 불륜관계를 맺는다. 이혼녀로 자유분방하게 살던 현금은 영빈과의 만남에서 처음으로 아이를 갖고 싶다는 열망을 품지만 자신이 불임임을 확인한다. 작가는 죽음과 탄생으로 압축되는 우리의 삶이 자본의 속물성이나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의 강고함에 의해 한순간에 추락하는 현실을 예리하고 섬세한 필체로 그려낸다. 마흔의 나이에 등단해 11권의 중단편집과 15권의 장편소설을 펴낸 바 있는 작가는 2000년에 고희와 등단 30주년을 맞이했다. 하지만 문단의 기념행사 제의를 모두 거절하고 이 소설의 출간으로 고희 축하를 대신하기 위해 <실천문학>에 1년 동안 분재한 다음 단행본으로 출간했다. 초판 5만 부가 한 달도 안 되어 팔려나가고 6개월 만에 25만 부를 넘겨 박완서라는 작가의 시장성을 다시 한 번 증명했다.
[호밀밭의 파수꾼]은 뉴욕 맨해튼에 사는 부유한 집안의 둘째 아들인 16세 소년 홀든 콜필드가 2박 3일 동안 겪는 방황의 기록이다. 홀든의 아버지는 대기업 고문변호사이며 착한 여동생 피비는 자신이 지켜주어야 할 순수함의 상징, 시나리오 작가인 D.B 형은 재능을 돈과 맞바꾼 어른이다. 홀든은 명문 사립학교인 펜시고등학교에서 네 과목이나 낙제점수를 받아 또다시 퇴학을 당한다. 하지만 그것은 표면적인 이유일 뿐 본질적으로는 기존의 사회코드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매우 위태로운 방황 때문이다. 자기 얘기를 전혀 들어주지 않으려는 친구들, 상류층이나 명사가 아니면 상대도 하지 않는 속물, 자신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여자친구, 동성애를 시도하는 옛 스승 등 홀든이 만난 사람들은 한결같이 실망만 안겨줄 뿐이다. 홀든은 현대 사회의 허위와 위선에 대해 가차 없는 증오를 보낸다. 결국 홀든은 동생에게 법률가가 되는 대신, 넓은 호밀밭에서 노는 데 정신이 팔려 벼랑에서 떨어지는 줄도 모르는 아이들을 붙잡아주는 파수꾼이 되고 싶다고 말한다. 1951년 미국에서 출간된 [호밀밭의 파숫꾼]은 처음에 동성애와 혼전 성관계 등의 사회성 짙은 소재와 거침없는 비속어 때문에 많은 중고등학교에서 금서로 지정받았다. 하지만 1950년대 미국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자 청소년들의 고뇌를 잘 대변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으며 출간 당시부터 엄청난 논쟁과 함께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지금도 미국에서만 해마다 40만 부 이상 팔리는 스테디셀러가 되었다. 국내에서는 1963년 평화출판사에서 처음 번역판이 나왔지만 곧 절판되었고, 1985년 문예출판사에서 이덕형 번역으로 내놓아 좋은 반응을 얻었다. 한때 한해 7만 부 이상 팔리던 이 책은 2001년 신학기에 ‘책으로따뜻한세상을만드는교사들(약칭 책따세)’이 추천한 ‘아이들이 읽으면 좋을 성장소설’에 포함되었다. 출간 50주년을 기념해 벌인 각종 이벤트와 단 한 편의 걸작을 남기고 은둔생활을 하는 샐린저를 모델로 한 영화 [파인딩 포레스터] 개봉에 힘입어 6월 하순에는 [해리포터] 시리즈를 제치고 외국소설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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