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문경새재, 시간을 거닐다
겨울의 문경새재는 마치 시간의 경계선을 넘어선 세계 같았다. 한국의 깊은 역사를 품고 있는 이곳은 나에게 처음이었지만, 그곳에 도착하는 순간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곳처럼 느껴졌다. 사관학교 교수님들과 서울에서 만나 차를 몰고 문경에 도착했을 때, 친구의 추천으로 오게 된 이 여행이 단순한 방문이 아니라 마음의 여정을 선사할 것임을 어렴풋이 느꼈다.
호텔에 짐을 풀고 문경새재의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입구에서 어디로 향할지 고민하던 순간, 한국 고유의 정취가 주위에서 손짓했다. 돌로 쌓은 토성 성벽은 오랜 세월의 흔적을 간직한 채 육중한 웅장함으로 우리를 맞았다. 성벽의 돌 하나하나에 새겨진 세월의 깊이는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압도적이었다.
문경새재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소 중 하나는 고려 태조 왕건의 대하드라마 촬영지였다. 겨울의 찬바람과 소복이 쌓인 눈 속에서 한국의 전통가옥은 과거로의 문을 열어주었다. 태조 왕건이 새로운 나라를 세웠던 918년, 그 웅장하고도 격동의 시간이 눈앞에 펼쳐지는 듯했다. 주변엔 감나무 가지에 매달린 감들이 마치 우리의 눈길을 끌려는 듯 드문드문 보였다. 나는 그 감들을 바라보며, 까치가 감을 물고 씨앗을 멀리 떨어뜨려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는 자연의 순환을 상상해 보았다.
산속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청명한 물소리는 우리의 마음을 맑게 해주었다. 이 겨울의 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자연은 따뜻한 숨결을 품고 있었다. 얼어붙은 나뭇잎과 뿌리 아래에서 생명의 기운이 잠자고 있는 모습은 신비로움을 더했다. 한참을 걷다 보니 요즘 방영 중인 사극 드라마의 촬영 현장도 마주쳤다. 추운 날씨 속에서 열연을 펼치는 배우들을 보며, 보여주기 위한 삶이 얼마나 헌신적인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산 정상에 오르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서쪽으로 기울어 가는 해와 더욱 매서워지는 겨울 바람은 우리를 다시 아래로 이끌었다. 저녁엔 호텔 근처의 식당에서 따뜻한 한국 정식을 맛보며 하루를 정리했다. 그리고 밤이 깊어지자 숙소로 돌아와 막걸리 한 잔으로 오늘을 마무리했다. 산 정상에 걸린 그믐달은 우리를 조용히 응시하며 하루의 끝을 비추고 있었다.
다음날, 나는 새벽 공기를 마시며 어둠 속 문경새재의 풍경을 감상했다. 아직 해가 뜨지 않아 주위는 고요했고, 상점도 닫혀 있었지만, 그 차분한 적막이 오히려 마음을 어루만졌다. 어제 미처 보지 못한 곳들을 돌아다니며 문경새재의 또 다른 얼굴을 발견했다. 차갑지만 따뜻한 공기는 자연과 사람, 그리고 삶의 조화로움을 느끼게 해주었다.
아침을 마친 뒤 우리는 다음 목적지인 단양팔경으로 향했다. 차가 문경을 벗어나는 순간, 나는 스스로 다짐했다. “언젠가 다시 와서 이 산의 모든 길을 걸어보리라.” 겨울 문경새재에서 보낸 시간은 나에게 자연과 역사의 숨결을 느끼게 해주었고, 그 안에서 내가 한층 더 깊어지는 경험을 선물해주었다.
문경새재, 당신은 내게 한국의 겨울을 넘어선 시간 여행을 선사해주었다. 다시 만날 때, 나는 더 깊이, 더 오래 머물러 당신의 비밀들을 마주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