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자료는 미국 예일대학의 "캄보디아 학살연구계획"(Cambodian Genocide Program: http://www.yale.edu/ cgp/thiounn.html)에서 공개하고 있는 티오운 쁘라싯(Thiounn Prasith)의 자필 이력서 내용을 "크메르의 세계"가 한국어로 번역한 것이다. 티오운 쁘라싯은 크메르루즈(Khmer Rouge) 정권에 의해 UN 주재 캄보디아 대표로 임명되었고, 1979년 1월 베트남의 침공으로 "민주 캄푸치아" 정권이 몰락한 직후에도 UN 주재 대표직을 유지하여 이후 3파 연합 측의 의석으로 계승시킨 인물이다. 현재 예일대학 "캄보디아 학살연구계획"이 공개한 자료는 "영어로의 번역"이라고 밝히고 있어서 원래 이 자료가 영어로 쓰여지지 않았음을 밝히고 있지만, 원어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다만 크메르루즈가 정권을 잡은 후인 1976년경 티오운 쁘라싯이 당에 제출한 소명자료이기 때문에 원어가 크메르어였을 개연성이 무척 높은 것으로 판단된다. |
티오운 쁘라싯의 자필 이력서 (상편)
Autobiography of Thiounn Prasith
티오운 쁘라싯(Thiounn Prasith)은 전 UN 주재 크메르루즈 대사를 역임했다.
이 자필 이력서는 1976년 12월 25일에 작성된 것으로, 영어로 번역한 것이다.
좌측사진은 "크메르의 세계"가 첨가한 것이다. (사진출처: Khmerization) |
이력서
본인에 대하여 계급적 반동분자라는 고발이 있었다는 사실을 관련 당원이 전해주었기에, 본인은 엉까(Angkar: 조직, 당) 앞에 솔직하고 진심어린 마음을 담은 자필 이력서를 적어 제출하고자 한다.
1. 가족관계
본인: (본명) 티오운 쁘라싯
(혁명가명) 산(San)
(성별) 남성
(국적) 크메르(Khmer=캄보디아)
(생년월일) 1930년 2월 3일 프놈펜 출생.
배우자: (성명) 크리스틴 고우레(Christine Gouret)
(국적) 프랑스. 프랑스에 거주 중.
자녀: 2남 1녀.
- 장녀는 21세로 이미 혁명전선에 참여 중임.
- 2명의 아들은 아내와 함께 프랑스에서 거주 중.
조부: (성명) 티오운(Thiounn).
(계급) 봉건적 보수주의자(Feudalistic conservative).
조국을 배신하고 프랑스 식민주의자들에 봉사함.
부친: (성명) 티오운 하이(Thiounn Hal)
(계급) 봉건적 보수주의자. 프랑스식민주의자들에 봉사함.
1952-1953년 사이에 사망.
모친: (성명) 분쩐 몰리(Bunchan Moly).
(계급) 봉건적 보수주의자. 프랑스식민주의자들에 봉사함.
현재 생존 중. 정확한 연령은 알 수 없고 70대일 것으로 추정함.
형제: (형) 티오운 티오은(Thiounn Thioeun): 보건부 장관.
(누나) 티오운 쪼음(Thiounn Choeum): 매판 자본가 치언 왐(Chhean Vam)의 아내.
이 부부의 정치적 성향은 알 수 없으며 수년간 만나지 못함.
(형) 티오운 쭘(Thiounn Chum): 매판 자본가. 정치적 성향을 알 수 없고, 오랜 기간 못 만남.
(형) 티오운 뭄(Thiounn Mumm): 1951년부터 혁명활동에 가담. 현 산업부 장관.
(본인) 막내임.
2. 1930-1949년
(1) 1935(혹은 1936)-1941년: 6학년까지 프놈펜의 프랑스어 학교를 다님. 6학년이 되었을 때, 한 프랑스인 여성이 내 성적이 나쁘다는 이유로 더 이상 "리셰 시소왓"(Lycee Sisowath)에서 공부할 수 없도록 조치함. 따라서 본인의 부친이 나로 하여금 베트남 쁘레이 노꼬(Prey Nokor: 사이공, 현 호치민시)로 유학을 보내 "샤스룹-로바"(Chasseloup-Laubat)[중고교]에서 공부하였음.
(2) 1941-1945년: 1941-1944년 사이에 본인은 쁘레이 노꼬에서 학업을 계속하였음. 미 제국주의자들이 쁘레이 노꼬에 대한 폭격을 개시하자, 본인의 부친이 1944년 9월에 본인을 베트남 남부 달랏(Dalat)으로 전학을 보냈음. 하지만 1945년 3월 9일 일본 전체주의자(파시스트)들이 쿱테타를 일으킨 후, 본인은 4월에 프놈펜으로 돌아왔음.
(3) 1945-1949년: 프놈펜으로 돌아온 후 다시금 "리셰 시소왓"에서 1949년 7월 졸업할 때까지 수학하였음. 당시 본인은 처음으로 조국을 사랑하는 길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함. 이 시기는 사실상 처음으로 캄보디아에 본격적으로 살기 시작한 셈이며, 동포들과 함께 생활하는 경험이 생기게 된 것임. 1949년 7월 본인이 졸업을 하자, 크랑스 식민주의자들이 본인으로 하여금 더 교육을 받고 본인의 조부나 부친과 마찬가지로 프랑스 식민당국을 위해 봉사할 기회를 제공할 것이란 희망을 불어넣었음. 그리하여 그들은 본인에게 여객선을 타고 필리핀의 마닐라와 홍콩을 여행할 수 있는 상을 주었음(1949년 7-8월).
3. 1949년 9월 -1955년 12월
본인은 1949년 9월에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는데, 절반의 국비장학금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이유였음. 하지만 1952년 본인이 반정부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캄보디아 왕국정부는 더 이상의 장학금 지급을 중단하였음. 최초에 본인은 치의학을 공부하러 갔지만, 현지에서 약학으로 전공을 바꿨음. 2년간 약학을 공부한 후 1954년 유학을 마칠 때까지 통상(무역)-커뮤니케이션으로 전공을 바꿔 공부했음.
학업을 마치자 왕국정부는 철도국 공무원으로 발령하고, 프랑스 철도청에서 6개월 간의 연수기회를 제공하였음. 프랑스에 체제하는 6개월간 본인은 애국주의(patriotism)를 자각하기 시작함. 본인은 프랑스 식민주의자들에 대항해 캄보디아 독립운동에 참여했고, 캄보디아의 공산화를 원했음. 1951년에 본인은 폴 포트(Pol Pot) 형제 동지(Comrade Brother), 완(Van) 형제, 키우(Khieu) 형제 등이 설립한 맑시스트-레닌주의자 서클에 동참했음. 1955년까지 본인은 모든 활동에 적극 동참하였음. 1953년 상기 형제들과 상담하여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하였음.
동년인 1953년 프랑스 보안경찰이 본인을 체포하여 구금한 후, 당시 인민을 배반하고 있던 시하누크(Sihanouk)에 저항하기 위해 결성된 "크메르학생연합"에 대해 하룻 동안 취조를 하였음.
당시 본인의 자각은 오직 조국을 사랑하겠다는 일념 뿐이었고, 계급을 사랑한다는 자각은 아직 없었음. 또한 본인의 민족정신 역시 높은 수준이 못되었는데, 그것은 조국을 사랑하는 것과 국제주의를 사랑하는 것 사이에서 혼란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발생한 것임. 이러한 연유로 1954년 본인은 프랑스 여인과 결혼하였음. 이 결혼 역시 봉건주의적 착취와 식민주의적 교육의 영향 때문이었음. 이러한 잘못된 결정은 현재까지도 본인의 심경을 복잡하게 만들고 있음.
본인이 프랑스에서 공부할 때, 맑시스트-레닌주의 서클의 동지들 외에는 별다른 친구들이 없었음. 그 외에는 오직 프랑스인 친구 한 명이 있었을 따름인데, 현재까지도 절친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음. 이 친구는 예전에 "프랑스공산당"에서 잠시 활동한 후, 오래 전에 당을 탈당하였음. 그는 또한 작고한 찌엇(Cheat) 동지의 친구이기도 했음. 현재 이 프랑스인 친구는 일반인으로서 무역에 종사하고 있음. 본인이 그 친구를 만날 때는 이미 공표된 뉴스 말고는 캄보디아에 대해 대화를 나눈 적이 없음. 그 또한 본인에 대해 더 이상 묻거나 하지 않았음. 그는 단지 유유자적하며 행복하기만을 바랬음.
4. 1956-1963년: 내적 갈등의 시기
(1) 본인은 1955년 12월 말에 귀국하여 철도국에서 근무했음. 당은 본인으로 하여금 철도국 내에서 노동자와 직원들을 교육시킬 새로운 지구당을 건설토록 지도했음. 당시 본인은 지속적으로 당의 지도를 받고 있었음. 본인은 철도국 지구당 서기를 맡아 일부 노동자들의 교육을 담당했고, [키우 삼판이 편집장이던] 신문 <관찰>(L'Observateur)의 기고자로 참여하기도 했음.
(2) 철도부의 결정과 더불어 당의 결정을 존중하여, 1958년 11월부터 1959년 4월까지 본인은 일본 철도부에 인턴십 연수과정을 떠났음. 당시 본인은 삼 사리(Sam Sary)와 덥 추온(Dap Chhuon)의 반란 사실을 뉴스로 접하였음.[참조☞ "방콕모의"] 또한 일본에 유학 중이던 크메르인 유학생들로부터 타다토마(Tadatoma)라는 일본인 첩자의 활동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전해들었음.
(3) 일본에서 귀국한 후 본인은 1961년 6월까지 철도국 지구당 당원으로 남아 있었음. 바로 이 시기에 시하누크는 본인에 대한 강력한 공세를 취했는데, 이 계급의 적은 당시의 철도국 노동자들의 운동이 대단히 강성해졌기 때문에 그리했던 것임.
(4) 당은 본인과의 접촉을 단절했음(거의 1년간). 착취계급의 정부는 본인을 "공공사업부"(Public Works Ministry)로 전출을 보냈음. 1962년 당은 본인에게 정보활동 분야로 옮기도록 함. 당시의 임무는 권위주의 계급과 외국인을 탐문하는 것이었음. 당시 본인은 마레(Marré)라는 이름의 프랑스군 대위를 알게 됐는데, 이 관계를 통해 약간의 정보들을 수집하곤 했음. 하지만 (훗날 본인은 그가 프랑스 제2청[French Second Office]의 첩자로) 그 역시 본인을 통해 정보를 수집하려 했음을 알게 되었음. 그러나 본인의 기억으로는 그에게 비밀을 누설하지는 않았다고 생각됨.
(5) 1963년 "34인 사건"(시하누크가 34명의 좌파명단을 발표한 사건) 이후, 당은 본인에게 잠시 프랑스로 피신해 있을 것을 지시함. 처음에 본인은 프랑스에서 어떻게 먹고 살지가 걱정되어 주저했으나, 사태가 너무나 심각하여 당에 대해 프랑스로 간다고 신고하였고, 당도 동의하였음. 처음에는 이 도피가 너무도 많은 장애를 갖고 있었음을 알았지만, 내 자신에 대해 면밀히 검토한 후 내 자신과 가족을 위해서 이 도피가 가장 적절한 것이라 판단함.
(6) 1963년 6월, 착취계급 정부에 두 달 동안 비자신청을 요구하여, 본인의 장녀와 함께 프랑스로 떠났음. 아내와 두 아들은 1963년 12월에 합류하였음. 당시 본인은 체코의 프라하(Prague)를 경유해 프랑스로 갔는데, 사회주의라 불리는 국가의 도시를 보고 싶었기 때문임. 파리로 갈 비행기를 기다리는 두 달 동안 본인은 프라하에 머물렀음.
(7) 과거 7년간 본인은 수많은 당의 지도를 받고 자본가와 권위주의 계급에 대항하는 여러 활동에 참여하였음. 본인은 노동자들 및 지식인들로부터 경험을 배우고 축적하였음. 비록 적들이 본인을 수사하고 일부 활동을 탄압하긴 했지만, 본인 자신은 항상 행복하고 굳건한 인내를 견지할 수 있었음. 하지만 당시에 본인은 여전히 강력한 관념론에 사로잡혀 있었고, 계급적 관점 역시 명료하지 못하여 때때로 착취계급과 유사한 삶을 살기도 했음. 당시엔 수정주의(revisionism)가 유행하던 시기라(1958-1960), 본인은 명료하게 보질 못했고 상황에 대한 냉철한 인식도 견지하지 못했음. 하지만 "민족을 먼저 생각하라, 캄푸치아의 문제를 제1의 문제로 여기라, 캄푸치아 혁명이야말로 가장 의미있는 민족의 이익임을 생각하라"는 당의 조언을 존중하며 따랐음.
5. 1963년 6월 - 1970년 3월
(1) 본인은 당으로부터 프랑스 내 [크메르] 학생 당원들에 대한 정보를 얻은 상태로 갔고, 수정주의자들과 중국 사이의 갈등에 대한 당의 지침을 확고히 전달하고자 했음. 이 갈등은 수정주의와 혁명 사이의 갈등이었음. 당의 지침은 당시 혼란을 겪고 있던 학생들이 가진 일부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었음.
(2) 본인의 프랑스 체류는 거의 7년 동안이었는데, 이 기간 중 본인의 활동은 학생연맹과 일부 캄보디아인들 사회에만 국한되었음. 또한 함께 공부했던 프랑스인 친구를 다시 만났고, 프놈펜에서 알게 되었던 프랑스군 대위 마레도 다시 연락을 해왔음. 하지만 마레는 본인의 거주지역과 너무 멀리 떨어진 곳에 살고 있었으므로 자주 만나지는 못함. 게다가 1970년의 쿱테타가 발생한 직후, 마레가 반역자 론 놀(Lon Nol)에 대해 너무 확고하게 변호하려 했기 때문에, 1971년 초부터는 그와의 접촉을 끊어버렸음.
그리고 본인은 여타 외국인과도 접촉하지 않았고 그들의 활동에 참여하지도 않았음. 심지어는 파리에서 학생 당원들이 접촉했던 베트남인들조차 본인과는 서로 알지를 못했을 정도임. 또한 "프랑스공산당"과도 접촉을 하지 않았음. 본인은 내 자신과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시간을 보내야 했음.
(3) 관념적으로, 본인은 당이 다시금 본인을 불러줄 날을 기다리며 지내고 있었음. 그 시간 동안 "크메르학생연맹"(Khmer students' union)의 학생 당원들의 활동에 참여하였음. 또한 본인의 능력 한도 내에서 일부 학생들에 대한 교육을 담당하기도 했음. 이 7년간 본인은 당과의 접촉이 완전히 끊긴 상태였음.
(4) 본인이 프랑스에 체제하는 동안, 모친으로부터 송금을 받기도 했음. 특히 1968년에는 5만 뜨라나옷(Tranaots)을 받았음.
(5) 1965-1968년 사이에는 한 석유회사(석탄 및 석유)에서 일했고, 1968년에는 파리공항에 취업이 되었음.
(6) 프랑스에 체제하는 동안 본인은 삶의 방식과 관점에 있어서 자본주의적 영향을 많이 받았음. 비록 본인이 당의 부름을 받기를 기다리고 있었고 조국의 상황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머물긴 했지만, 본인의 혁명적 관점이 많이 약해진 것도 사실이었음. 본인의 혁면적 관점은 불명료했음. 오직 자신의 행복 뒤에 숨어 있었고, 가족과 자식들의 안위만을 생각했음. 본인은 자식들을 캄푸치아에 대해 의식하고 접근토록 만들지 못했음. 당시에는 생계 문제도 본인에게 상당한 영향을 주었는데, 당시 이러한 생각이 바로 수정주의자들의 관점임을 자각하지 못했음. 1970년 쿱테타 이후 바로 이러한 관점이 수정주의자들의 관점임을 이해하고, 자신을 훈련시키기 시작하였음. 만일 쿱테타가 없었고 쿱테타 직후 당이 본인을 베이징으로 파견하지 않았더라면, 이러한 자각의 기회를 얻지 못했을 것임. 그 경우 본인은 아마도 영원히 파리에 머물렀을 것이고, 민족정신을 상실한 채 프랑스 자본주의자들을 위해 봉사했을 것으로 생각됨. 당은 본인을 잘못된 길에서 끌어내 잘 닦인 길로 인도해주었음. 많은 것을 포기해야 된다는 점에서 당이 제시해준 길은 복잡한 성격을 지닌 것이었지만, 그러나 의미있고 명예로우며 명료한 길이었음.
(7) 본인은 언젠가 당이 다시금 불러주길 기다리고 있었고 가족과도 헤어져야 함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한 본인의 가족이 현금 및 생계에 잇어서 자립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주고자 최선을 다하였음. 그런 연유로 모든 은행예금을 아내의 명의 혹은 아내와 본인의 공동명의로 하였던 것임. 자본주의적 영향으로 인해 본인은 월급을 받아 주택을 구입하였음.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임대하는 것보다 더 저렴한 비용이 들었고 더 나은 방식이었음. 주택을 구입한 것은 1965년이었음. 1969년 본인이 파리공항에서 근무하게 되자 기존의 집이 너무 멀었기 때문에, 집을 이사하기로 결정하고 옛집이 팔릴 동안만 "파리공항" 측에서 대출을 받아 새로운 주택을 구입하였음. 모든 행동들이 자본주의 사회에 깊이 젖어들어 발생한 것임. 당시 "파리공항"의 규정을 보면 직장을 그만두기 3개월 전에 사전에 통보해야 했으므로, 당이 본인에게 베이징으로 가라고 명했을 때 [대출 등의 사안에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그 실행을 3개월간 늦추어야만 했던 것임.(역주)
(역주) 1970년 4월 론 놀의 쿠테타 직후, 베이징에 머물던 시하누크 국왕은 크메르루즈와 연합하여 임시정부인 "캄푸치아민족통일왕국정부"(GRUNK)를 결성했다. 아마도 당시 크메르루즈는 바로 티오운 쁘라싯에게 GRUNK 관련 일을 맡겼던 것으로 보인다. |
(8) 본인의 사유재산에 관한 현 상황은 다음과 같음.
- 주택 : 1970년부터 본인의 가족들이 사망 시까지 거주할 수 있도록 양도함. 본인은 집에 관하여 분명히 해두려 했는데.... (문서 소실) ... 본인과 아내가 공동 출자해 마련했고 ... (문서 소실) ... 3분의 1 사이를 가지고 있음.
- 은행잔고 : 공동명의로 되어 있고, 지난 6년간 본인이 떠나 있는 상태로 현재 상황을 알 수 없음. 본인 명의로 된 도다른 계좌는 아내로 하여금 인출이나 입금할 수 있도록 권리를 양도하였음. 지난 5월 이 계좌에 대한 소식을 들었는데, 아직도 2,700 뜨라나옷이 예치되어 있다고 함. 하지만 현재 본인의 아내가 인출했는지 혹은 더 많은 금액을 예치했는지에 대해선 알 수 없음.
이 모든 문제는 본인의 복잡한 심경에서 비롯된 일임. 본인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방안을 찾지를 못했음. 집을 팔려면 우리 부부가 이혼을 해야함. 프랑스 법률에 따르면, 양자가 합의했을 경우 이혼 절차는 오래 걸리지 않음. 그러나 어느 일방이 불응할 경우 이혼은 불가함. 실제로 본인이 가진 해결방안은 양자택일해야 하는 상황임. 즉 아내를 포함한 모든 가족을 캄푸치아로 데려오거나, 아니면 이혼을 하게 되면 모든 문제가 명료해짐. 파리에서 "전선"(Front: "캄푸치아 민족통일전선"[FUNK]으로 추정됨) 당원 한 사람이 자신의 주택을 .... 당에 헌납했을 때... (문서 소실) ... 본인은 매우 수치심을 느꼈음. 하지만 어지해야 할지를 몰랐음. 현재 본인은 그 상황의 덫에 걸려 있음.
본인의 아내에 대하여 : 그녀는 오를리(Orly) 구에서 일하고 있음. 오를리 구청장은 공산주의자임. 본인이 알기로 아내는 가족계획상담자(conseillère planning familiale)이기 때문에 2-3개 지역에 걸쳐 일하고 있음. 그녀가 얼마나 받는지는 알 수 없지만, 봉급으로 생활하리라 추측됨. 그녀는 1970년에 "프랑스공산당"에 가입했지만, 많은 면에서 당의 노선과 맞지가 않았음. 그녀는 대체로 이익을 추구하고 편안한 삶을 바라는 여성으로, 정치적이지 못함. (하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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