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바둑 즐기려고 마라톤도 하고 아코디언도 배웠죠 한국 여성 최초 9단, 프로 바둑기사 박지은
바둑에서 9단의 또 다른 이름은 ‘입신(入神)’이다. 바둑에 관한한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뜻이다. 그만큼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2008년 1월, 스물여섯의 박지은 기사는 바로 그 일을 해냈다. 한국 바둑계는 “바둑 역사를 새로 썼다”며 기뻐했다. 한국 최초이자 세계에서는 세 번째인 여성 9단의 탄생. 개인의 영광을 넘어 모든 이들의 자랑이 된다는 건 큰 기쁨이다. 가로 19줄, 세로 19줄, 361칸의 바둑판은 예로부터 우주라 불린다. 흑돌과 백돌이 놓아지면서 펼쳐지는 다양하고 오묘한 승부의 세계를 두고 사람들은 인생에 비유하기도 한다. “바둑을 통해 세상과 만나고 삶을 배워가고 있다”는 박지은 9단, 바둑돌을 쥐면 신이 되는 젊은 그녀의 마음이 궁금했다.
스물여섯, 입신(入神)의 경지에 오르다 2008년 1월 15일 중국 베이징. 제1회 원양부동산배 세계여자바둑선수권 대회 결승전의 첫 번째 대국이 펼쳐지고 있다. 한국의 박지은 8단과 세계 최강이라는 중국의 루이나이웨이 9단의 대결. 심사숙고 끝에 한 수 한 수를 두는 두 선수의 팽팽한 긴장감은 보는 이들의 마음까지 조여왔다. 결과는 박지은 기사의 반집패.
반집이라는 최소의 차이로 박선수가 지고 만 것이다. 세 번의 대국 중 두 번을 이겨야 우승하는 경기. 아직 박지은 선수에게도 기회는 있었다. 그녀는 한 번의 패배에 연연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스스로에게 ‘할 수 있다’고 ‘자신감을 잃지 말라’고 말해주고 글로도 썼다. 평소 좋아했던 책도 보면서 마음을 편안히 하려 했다. 모든 상황을 긍정적으로 생각하자는 것, 그것이 그녀의 다음 대국 준비였다. 그리고 제2국과 제3국에서 승리한 박지은 선수는 2대1로 역전승을 거둔다. 한국의 바둑계는 환호했다. 그녀의 우승은 여러 가지로 큰 의미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계대회에서 우승함으로써 1단 승단을 한 그녀는 한국 여류기사 최초의 9단이 되었다. 그것은 1945년 한성기원(한국기원 전신) 설립 후 63년 만의 쾌거이자 세계에서는 중국인 루이나이웨이와 펑윈 9단에 이은 세 번째 여류 9단 탄생이었다. 박선수 개인에게는 8단이 된 지 6개월 만에 9단이 된 전례 없는 초고속 승단이었다.
“공항에 딱 내렸는데, 막 인터뷰를 하자 하고 언론에서 집중보도를 하셔서 너무 놀랍고 부담스럽기도 했어요. ‘잘했다’고 칭찬해 주시니까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도 많이 들었구요.” 바둑에서는 9단을 달리 ‘입신(入神)’이라고 부른다. ‘바둑에 관한한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뜻이다. 흑과 백이 겨루어 많은 ‘집’을 지은 쪽이 이기는 바둑은 굉장한 정신력과 집중력을 필요로 한다. 361칸의 바둑판 안에서 치열한 접전이 벌어진다.
그 과정이 너무나 복잡하면서도 변화무쌍하다. 그래서 바둑은 유독 마음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그 바둑의 최고 경지인 9단이 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을 잘 다스릴 줄 알게 되었다는 뜻이 아닐까. “그러고 싶은데 잘 안될 때가 많아요. 바둑을 둘 때 마음이 많이 반영되니까 어떤 마음이든 떨쳐내려고 하는데…. 자기와의 싸움이니까 더 노력해야죠.” 아직은 많이 부족하다지만 그녀는 이미 모든 바둑기사들이 꿈꾸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녀 나이 스물여섯, 프로가 된 지 11년 만이다. 박지은 기사가 처음 바둑을 본 것은 열 살 때, 아버지가 두는 것을 보고 호기심이 생겼다. “나도 배우고 싶다고 하니까 부모님이 바둑교실에 보내주셨는데, 너무너무 재밌는 거예요. 엄마가 그러시는데 제가 ‘이렇게 재밌는 걸 왜 이제 가르쳐주냐’고 그랬대요.”
“평생할 일은 바둑이다” 열한 살 소녀의 선택 열한 살 때부터 좀 더 전문적으로 개인교습을 받기 시작한 지은은 그 무렵 ‘내가 평생 할 일은 바둑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열두 살 때부터는 프로입단 시험에 도전했다. “여류입단 대회가 1년에 두 번 있어서 봄에 한 명, 가을에 한 명을 뽑아요. 그만큼 프로가 되기 어려우니까 입단대회 기간에는 다들 날카로워지고, 완전 폐인이에요. 학생들이 고3때 겪는 그런 스트레스를 겪는 거죠. 밥맛도 없고 피골이 상접하고.”
학교가 끝나면 곧장 바둑교실로 가서 밤늦게까지 열심히 두었지만 계속 떨어졌다. 학업과 바둑, 두 가지를 병행하기란 힘들었다. 지은은 중학생이 되면 학교를 그만 다니겠다고 마음먹는다. 학업 대신 바둑을 택한 지은의 결정. 워낙 바둑을 좋아하시는 아버지는 반대하지 않으셨지만, 어머니의 반대는 컸다. 지은이는 어머니에게 간곡한 편지를 썼고 승낙을 얻어냈다.
“어릴 때니까 ‘엄마, 저는 바둑이 너무 하고 싶어요. 이걸 하게 해주세요….’ 뭐 이런 식으로 썼던 것 같아요. 엄마도 지금은 잘한 것 같다고 하세요.”(웃음) 보통은 특기생으로 학교에 적은 두지만 지은이는 학생이 아닌 ‘한국기원’의 연구생으로서 바둑에만 집중했다.
평일엔 학원에서, 주말엔 연구실에서 하루도 쉬지 않고 바둑을 두었고, 이윽고 1997년, 그녀는 열다섯 살의 프로 바둑기사가 된다. “후회해 본 적은 없어요. 학창 시절이 없다는 게 약간 아쉬울지는 몰라도, 내가 평생 할 일은 바둑이라는 게 너무 확실했으니까요.” 프로가 된다는 건 모든 걸 자신이 알아서 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어린 나이에 스스로 계획을 세우고 자기 관리를 해야 한다는 게 힘들었지만 그녀는 놀더라도 꼭 연구실에 와서 놀았다. 놀아도 바둑을 잘 두는 사람들과 놀다 보니 실력도 는 것 같다는 그녀는 1999년 여류명인전에서의 우승을 시작으로 프로로서의 이력과 면모를 갖춰갔다.
‘절대강자는 없다’ 언제나 처음 시작하는 마음으로 박지은 선수는 열일곱 살 때 조훈현 9단을 처음 이겼을 때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한다. “KBS 바둑왕전에 나갔을 때 조훈현 9단과 딱 만났는데, 전 당연히 전혀 기대를 안 했죠.
난 어리니까 배우겠다는 생각만 하고 뒀는데 이겼을 때 굉장히 기뻤어요.” 이기겠다는 마음 없이 편안하게 뒀기 때문에 이겼던 것 같다는 박지은 선수. 입장이 바뀌어 요즘은 박지은 선수가 오히려 나이 어린 초단들과 둘 때면 부담을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 바둑에는 ‘절대강자는 없다’는 말이 있다. 바둑판 앞에서는 나이도 경력도 몇 단이냐도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그만큼 누가 마음을 비우고 두느냐가 승패를 좌우할 때가 많다.
박지은 선수에게도 마음의 중요성을 크게 깨닫게 해준 경기들이 있었다. 그녀가 프로가 된 후 가장 힘들었던 시기였다는 스무 살 때의 일이다. 당시 좋은 성적으로 여류세계대회에 나간 박지은 선수는 결승전에 올랐고 자신감도 넘쳤다. 하지만 당연히 우승할 거라고 생각했던 경기에서 어이없는 실수로 반칙패를 했다.
“제가 정신이 나갔는지, 두면 안 되는 곳에 둔 거예요. 근데 그 이후에 중국대회에 나갔는데, 중국에서는 또 그게 반칙이 아니래요. 근데 무서워서 못 두고 있다가 한 수 굶게 돼서 반집 차이로 또 지고…. 세계대회 단체전에서는 제가 주장이었는데, 마지막에 실수를 한 적도 있고요. 그때 정말 충격을 많이 받았어요.” 이후 계속 질 것 같은 두려움이 생기면서 자신감도 잃어갔다. 우울증이 오고, 숨도 못 쉴 정도로 몸도 아팠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러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박선수가 그 시기를 이겨내기 위해 택한 것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거였다고 한다. 그녀는 연구생 시절처럼 다시 바둑학원으로 나갔다. 그리고 다른 연구생들과 똑같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종일 바둑을 연구하고 공부했다. 그렇게 일년이 지나자 여류기사 최초로 ‘농심배’ 국가대표로 뽑히고, 여류세계대회에서도 우승하며 좋은 성적이 나타났다. 하지만 그것이 끝은 아니었다.
패배하면 좌절하고 다시 시작하기를 수차례. 그때마다 그녀의 실력만큼 마음 또한 성장해갔다. “옛날엔 지면 울기도 많이 하고, 잠을 잘 못 잔다던가, 한 달 동안 체한다던가, 화병에 걸리기도 했어요. 바둑 둔 게 머릿속에서 안 떠나고, 실수를 했던 장면이 자꾸 떠오르니까 엄청 스트레스가 되고. 사람들이 무서워서 말도 못 붙이고 아무도 가까이 오지도 못할 정도였어요.
그런 어느 날 이건 아니구나, 싶었어요. 평생 바둑을 둘 건데 내 몸을 이렇게 상하게 해서는 안 되겠다, 가족은 물론 가까운 사람들을 힘들게 해서는 안 되겠다.” 박선수는 마음을 긍정적으로 바꾸어 먹기로 했다. 패배해도 그 속에 빠져 있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자신이 원하는 것, 좋은 것을 생각하며 빨리 털어버리고 기분을 풀었다.
좋은 책을 읽거나 마라톤, 복싱, 암벽등반, 요가 등 운동도 하고 악기도 배웠다. 요즘에는 일본어를 배우러 다닌단다. 다양한 사람들, 다양한 세상과 접하며 기분을 전환시켰다. 시합 전에는 스스로에게 ‘자신감을 잃지 말라’고 ‘잘할 수 있다’고 말해주었다. “자꾸 그렇게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마음먹으니까 진짜 달라지더라구요. 주변에서도 요즘은 웃음도 많아지고 말도 잘한다고, 많이 변했다고들 하세요.”
바둑의 미덕 “잘 배웠습니다” 박지은 9단은 이번에 이긴 상대가 루이나이웨이 선수라는 사실 때문에 더욱 화제가 된 것 같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올해 46세인 루이나이웨이는 1988년 여자 최초로 9단이 되었으며 지금까지 총 25회 우승 기록을 가지고 있는 최강자이기 때문이다. “루이는 참 대단한 분이에요. 그분은 정말 바둑을 좋아해요. 승부를 떠나서 두는 거 자체를 좋아하시고 공부도 진짜 열심히 하세요.
진짜 바둑을 즐기면서 한다는 게 느껴져요.” 그간 루이나이웨이와 전적 8승 13패를 기록하고 있는 박지은 선수는 언제나 그녀의 여유를 본받고 싶었다. 바둑이 재미있어서 시작했지만 프로가 된 뒤에는 순수하게 바둑을 즐기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던 그녀는 루이나이웨이에게 진정한 프로의 모습을 배운다고 한다.
실제로 박선수는 바둑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우며 성장해왔다. 바둑은 평생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뭔지를 알게 해주었고,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해주었고, 자신의 성격 또한 밝아지게 해주었다는 것. “바둑은 초반, 중반, 후반 중 한 부분만 잘 둔다고 이기는 게 아니에요. 집중하지 않으면 다 이겼던 경기도 한순간에 무너지니까 끝까지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해요. 어떤 일이나 다 그렇겠지만 바둑은 우리 삶하고 똑같은 거 같아요.”
자신은 낮추고 상대에게서 배우겠다는 바둑의 정신. 대국이 끝나면 ‘잘 두었습니다’ 혹은 ‘잘 배웠습니다’라고 인사하는 것처럼 바둑의 미덕은 겸양의 예(禮)에 있다. 9단이란, 모든 것을 이룬 ‘마침표’가 아니라는 것을 그녀도 잘 안단다. 오히려 그만큼 더 크고 넓은 마음으로 열심히 배워나가라는 의미로 하늘이 준 기회임을 아는 성숙한 스물여섯 아가씨다.
프로바둑기사 박 지 은 9단은 1983년생으로 열 살 때 처음 바둑을 두게 됩니다. 14세에 학업을 중단하고 ‘한국기원’의 연구생이 된 박지은 선수는 리그전을 펼쳐 ‘1조~6조’에 속하게 되는 연구생 시절, 여자로서는 처음 ‘1조’에 들어가 바둑계의 주목을 받습니다. 15세 때 프로가 된 이후 제1회 여류명인전 우승, 제2회 흥창배 준우승, 제2기 여류명인전 준우승, 제2회 정관장배에서 우승, 2003년에는 남자기사들을 제치고 한국 최초로 국가대표가 된 여류기사이며, 2003년부터 2007년까지 5년 연속 네티즌이 뽑은 인기여자기사상을 수상하기도 하였습니다. 2007년 여름, 제1회 대리배 세계바둑여자 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하여 7단에서 8단으로 승단한 박선수는 2008년 1월 제1회 원양부동산배 세계여자대회에서 우승함으로써 6개월 만에 9단이 됩니다. 여자기사로서는 한국 최초이자 세계에서 세 번째 9단입니다.
|
첫댓글 대단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