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닷없는 재채기 끝에 한기가 온몸을 훑고 지나간다. 그 통에 얼굴까지 가려워지는 것 같다. 채영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여러 번 문대고 나서 방안을 휘둘러본다. 사방 연속으로 자잘한 구멍이 뚫린 하드보드 소재의 흰 벽이 깊숙이 스며든다. 가장자리에 가느다란 갈색 고무 배킹을 덧댄 외여닫이 방문, 그 앞에 겨우 한 평이 될까 말까한 좁은 공간이다. 책걸상, 녹음기와 스탠드, 그리고 마이크가 방안 기물의 전부다. 외부의 소음이 차단된 이 녹음실 안은 마치 우주를 떠도는 스페이스 캡슐 속 같다. 그나마 작은 창 하나가 있다는 건 때때로 적잖은 위로가 된다. 그 창을 통해 직원들이 전화를 받고, 봉사자들이 드나들고, 손님들이 차를 마시는 풍경을 엿볼 때면 그녀는 왠지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때로는 묘한 안도감까지 느껴지곤 했다.
지금 사무실에는 아무도 없는 것 같다. 건너편 녹음실에도 불이 꺼져 있다.
처음에 그녀에게 이 일을 권한 사람은 친구의 결혼식장에서 우연히 만난 황선배였다. 그는 그녀에게 대학원 공부는 잘 되어 가는가, 하고 물었다. 그녀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속 모르는 이들이 으레 던지듯 결혼은 언제 하는가, 하는 질문 따위는 하지 않았다. 아마도 누군가로부터 그녀와 우석의 일을 들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일껏 별 말이 없던 그가 피로연장을 나설 때쯤 그녀에게 넌지시 물었다.
너... 맹인들을 위해 책 읽어주는 일을 해보지 않을래?
무슨 그런 일이 있느냐며 그녀가 되묻자 그는, 맹인 후원 단체인 H복지관에서 낭독 봉사자를 모으고 있는데 너야말로 그 일을 잘할 수 있을 것 같다며 담당 부서의 전화번호를 적어주기까지 했다. 그녀는 마치 무엇에 홀린 듯 이끌려 이곳 복지관을 찾아왔다. 낭독 봉사를 자원했고, 마침내 그 일을 하게 되었다. 그녀가 평소 남다른 이타심을 꿈꾸어 왔다거나 그 일에 대단한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냥 하고 싶었다. 그건 황선배의 입에서 ‘맹인’이라는 말을 듣던 순간부터 그랬다. 일은 힘들지 않았다. 다만 일주일에 한 번, 정해진 시간에 녹음실로 와야 한다는 것이 조금 부담스러웠을 뿐이다.
흐트러졌던 자세를 바로 한 후 그녀는 녹음 버튼을 누른다. 책을 읽기 시작한다. ‘복대동맥은 횡경막의 대동맥열공에서 흉대동맥의 연속으로 시작하여...’ 안마 수련원에서 교재로 쓰는 <해부생리학>의 한 부분이다. 약시(弱視)를 위한 교재여서 본문의 글자 크기가 꽤 큰 편이다. 책을 처음 받아들었을 때 그녀는 글자가 커서 읽기가 더 수월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녹음을 시작하자 꼭 그런 것만도 아니었다. 글자가 커서 그런지 오히려 단락의 내용이 한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게다가 생소한 단어들이 많았다.
대동맥열공, 중천골동맥, 좌우총장골동맥, 중부신동맥, 전후상완회선동맥... 대체 이런 단어들은 어디쯤에서 끊어 읽고 높낮이를 달리해야 하는 건지 통 감이 잡히지를 않았다. 그녀는 대충 어림잡아 ‘좌우’ ‘전후’ ‘동맥’과 같은 단어 앞에서 숨을 고르곤 했으며 몇 번씩 연습을 한 후 녹음을 하곤 했다. 그래도 어떤 부분은 발음이 영 자연스럽지가 않은 것 같다.
‘기관간의 상호관계를 유도하는 것’이라는 대목에서 그녀는 읽기를 멈춘다. 잘못 읽었다. ‘기관간’을 ‘기간간’이라고 읽은 것이다. 지우고 다시 녹음한다. 또 틀렸다. 이번에는 ‘기관관’이라고 발음한 것이다. 건짜증이 인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이상한 날이다. 영 진도가 안 나간다. 녹음실에 들어온 지도 꽤 되는 것 같은데 아직도 앞면 녹음중이다.
책을 덮고 턱과 목 언저리를 쓰다듬어본다. 입을 있는 대로 벌리고서 아에이오우의 입모양을 대여섯 번 반복한다. 괜한 말장난까지 소리내어 해본다. 저 말뚝이 말 맬만한 말뚝인가 말 못 맬 말뚝인가, 작년 솥장사 헛 솥장사, 경찰청의 새 창살이 쇠창살인가 쌍창살인가... 그녀는 되감기 버튼을 눌러 단락 앞부분을 지우고 다시 또박또박 읽기 시작한다. 이번에는 그런 대로 잘 읽혔다. 한 페이지를 내리 읽다가 왠지 께름칙한 마음에 테이프를 되감는다. 녹음한 부분을 들어보기 위해서다.
아무런 소리도 없다. 정신이 번쩍 든다. 어떻게 된 걸까? 두세 번을 거듭 확인한다. 다시 읽은 부분부터 전혀 녹음되지 않았다. 녹음 버튼을 누르지 않았던 모양이다. 힘이 쭉 빠진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 문을 박차고 나와버린다.
사무실 안은 휑뎅그렁하다. 양쪽으로 칸칸이 나뉜 일곱 개의 다른 녹음실도 하나같이 불이 꺼져 있다. 직원들은 오늘 무슨 회합이 있는 듯했고, 그녀가 왔을 때 녹음실에 있던 사람들도 작업을 마치고 돌아간 모양이다. 창마다 어둠이 짙게 고인 녹음실은 괴괴하고 을씨년스러워 보인다. 맞은편 창에 그녀가 서 있다. 새까만 눈동자 속에 영롱하게 맺힌 하나의 상(像)처럼 그 검은 창은 어릿어릿 다가서는 그녀를 고스란히 받아준다.
둥그런 벽시계를 올려다본다. 5시 45분. 이 사무실에는 건물 밖을 내다볼 수 있는 창이 없다. 때문에 날이 흐린지 비가 오는지 알 수 없고, 어둠침침해서 늘 전등을 켜 놓는 편이다. 보통 때는 평일 이 시간에도 두어 사람쯤 남아 녹음을 하곤 했는데 오늘은 어찌된 일인지 다들 약속이나 한 듯이 가버렸다. 어째 쓸쓸하고 싱숭생숭하다. 그녀는 정수기에서 온수 한 잔을 받아 목을 축이며 하릴없이 서성인다.
문득 입구 쪽의 게시판에 시선이 머문다. 녹색 부직포 위에는 여러 장의 안내문들이 구지레하게 붙어 있다. 귀퉁이의 백지 한 장이 눈길을 끌어당긴다. 글씨 한 자 없는 흰 종이에 깨알같은 구멍들만이 빽빽하다. 점자편지다. 바늘로 지면을 꼭꼭 누른 다음 뒤집어 놓은 것처럼 무수한 작은 구멍들. 대체 무어라고 쓴 걸까. 한 마디도 해독할 수가 없다. 다행스럽게도 그 편지 옆에 사무실 직원이 볼펜으로 조그맣게 써놓은 메모가 붙어 있다. ‘..당신들이 애써 녹음해준 테이프를 고맙게 잘 듣고 있습니다. 다음에 저는 이러이러한 녹음도서를 듣고 싶습니다...’
오톨도톨한 그 점자 편지를 살며시 더듬어본다. 이걸 찍어보낸 이는 어떤 세상을 살고 있는 걸까? 아침에 일어나면 그는 무슨 생각을 할까? 그녀는 이곳에 막 드나들기 시작하던 무렵, 계단에서 마주쳤던 맹인 남녀를 떠올린다. 그들이 부부인지 오누이인지 그녀로서는 알 수 없었다. 여자는 다리를 절었으며 화상으로 인한 흉터 때문에 한쪽 눈꺼풀이 심하게 찌그러져 들러붙어 있었다. 그래도 성한 한쪽 눈은 볼 수가 있는지 여자가 앞장을 서고, 뒤에 선 남자는 팔을 길게 내뻗어 여자의 한쪽 어깨를 잡은 모양새로 걸었다.
좁은 계단 위에서 그들과 맞닥뜨렸을 대 그녀는 벽 쪽으로 몸을 바짝 붙이고 선 채 길을 내주었다. 그들은 무슨 노래인가를 나지막하게 흥얼거리고 있었다. 그녀 앞을 스쳐갔으며 금세 계단 저 아래로 모습을 감추었다. 그러나 그들의 읊조림은 여전히 그녀 곁에 남아 있었다. 구불구불한 나선형 층계를 따라 올라온 메아리가 빈 벽의 모서리를 때리며 황홀한 저음으로 울려퍼졌다.
그때의 느낌을 그녀는 이제라도 무어라고 설명할 수 없다. 구석구석 취기가 퍼지고 머리꼭지까지 피가 확 몰려 온몸이 일시에 더워지는 것 같았다. 맑은 물 위에 일렁이는 영상처럼 숙이 언니의 모습이 눈앞에서 고스란히 피어났다. 붉으죽죽한 눈시울, 그렁그렁 눈물이 고인 눈동자, 그녀의 손목을 잡아당기던 숙이 언니의 그 투박한 손길...
숙이는 그녀네 집의 식모였다. 그녀가 초등학교 6학년이던 어느 봄날, 숙이는 그녀네 집으로 살러 왔다. 군데군데 허옇게 버짐이 핀 얼굴, 들쭉날쭉 엉성하게 자른 바가지 머리, 졸고 있는 것처럼 반쯤 내리감은 눈, 고무줄 통치마 밑으로 꼬챙이처럼 앙상한 두 다리... 숙이를 처음 보았을 때 그녀는 가까이 다가가기도 싫었다. 처음에 숙이는 부엌일을 하나도 할 줄 몰랐다. 어머니는 숙이에게 부엌일을 하나하나 가르쳤다. 제법 눈썰미가 뛰어났던 숙이는 어깨 너머로 한번 본 것은 그대로 흉내를 냈다.
1년, 2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숙이는 하루가 다르게 변해갔다. 복숭아 속살처럼 희고 뽀얀 얼굴에 짙은 속눈썹으로 둘러싸인 커다란 눈, 보기 좋게 부풀어 오른 가슴과 잘록한 허리, 검고 숱이 많은 머리칼... 온몸에 건강한 아름다움이 넘쳐흘렀다. 그런 숙이를 보면 그녀는 이상하게 화가 치밀었다.
야, 너 이거 치워!
그녀가 숙이를 부르는 이름은 언제나 ‘야’였다. 숙이는 그녀보다 두 살이나 더 많았지만 어른들 앞이 아니면 그녀는 절대로 숙이한테 언니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녀는 사사건건 참견을 하고 트집을 잡았다. 숙이는 그녀가 그러거나 말거나 개의치 않았다. 고자질도 할 줄 몰랐다. 그녀는 숙이의 그런 성격까지도 헐뜯기 일쑤였다. 우둔하다는 둥 음흉스럽다는 둥... 그 미움에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다. 그냥, 그냥 다 미웠다. 그녀는 숙이가 한가하게 앉아 누룽지를 먹는 것도, 마당에서 강아지를 어루만지며 노는 것도 꼴 보기 싫었다. 어머니가 숙이를 칭찬하거나 동생들이 누나 누나 하면서 따르는 걸 보면 심사가 마냥 뒤틀렸다. 어느 땐가 그녀는 어머니가 숙이에게 추석빔으로 사준 꽃무늬 원피스를 갈갈이 찢어 개집 속에 처넣기까지 했다.
숙이에 대한 그녀의 기억들은 대충 이런 것이다. 돌아보면 스스로가 초라해지고 부끄러워지는 일들뿐인 것이다. 그러나 지금이라고 해서 더 나을 것도 없다. 허영과 자만으로 가득 차 세상일이 다 만만한 양 우쭐해 있던 그녀가 그나마 어섯눈이라도 뜨게 된 것은 우석과의 일로 인해서였다. 속된 말로 그녀는 그에게 채였다. 씁쓸한 기억 탓일까 으스스 몸이 떨려온다. 온기가 남아 있는 물컵을 손에 쥔 채로 궁리를 한다. 그냥 갈까, 녹음을 계속 할까...
그때 누군가가 문을 두드린다.
누굴까. 그녀는 뚫어져라 문을 바라본다. 자신도 모르게 미간에 날이 선다. 경비원 노인일지도 몰라. 이 시간쯤이면 언제나 귀가 약간 어둡긴 하지만 꼬장꼬장한 그 노인네가 건물 안을 한 바퀴씩 돌곤 했다. 노인은 그녀가 들어오고 나갈 때마다 항상 먼저 아는 척을 해주곤 했다. 그런 생각을 하자 긴장이 조금 풀리는 듯하다. 그녀가 짧게 응답하자 스르르 문이 열리더니 삼십 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낸다. 검은 안경을 쓰지 않은 그는 겉으로 볼 때 맹인 같지는 않다. 그러나 그는 문과 벽을 가볍게 쓰다듬으며 안쪽으로 들어선 후 그녀가 서 있는 쪽이 아닌 전혀 엉뚱한 방향에 대고 크지도 작지도 않은 목소리로 묻는다.
누구, 여기 계십니까?
그가 맹인이라는 걸 알아차렸음에도 그녀는 선뜻 나서지지가 않는다. 그냥 그 자리에 뻣뻣이 선 채로 대꾸한다.
네, 저 혼자 있습니다. 어떻게 오셨는데요?
그는 옆구리에 끼고 있던 자그마한 검은 색 비닐 백을 앞으로 내민다. 대출해간 녹음도서라며 반납하려 한다고 덧붙였다. 그녀는 그 꾸러미에 메모를 써서 끼운 뒤 담당 직원의 책상 위에 놓아두고 나서 그에게 말한다.
자, 됐습니다. 잘 전달했으니 걱정 마세요.
그 말을 다 듣고 나서도 그는 돌아설 기미가 없다. 주춤거리며 여전히 문 앞에 서 있던 그가 잠깐 사이를 두더니 어렵사리 입을 뗀다.
저어... 물 한 잔 부탁할 수 있겠습니까?
아, 그거였군... 그 말이 그토록 어려웠던가. 그녀는 그를 중앙의 테이블에 앉게 하고 물컵을 챙기면서 그를 곁눈질한다. 군데군데 물무늬로 얼룩진 청회색 파커, 단이 젖은 코르텐 바지, 물기 먹은 그의 반곱슬머리가 차례로 눈에 들어온다. 핏기 없는 뺨과 허옇게 말라붙은 입술은 추위 속을 오래 헤매고 다녔음을 짐작케 한다. 다소 여윈 체구에 길쯤한 얼굴, 파리한 안색이 그를 더욱 추워 보이게 하는 건지도 알 수 없다. 그녀는 따뜻한 물이 담긴 머그를 그의 손에 살며시 쥐어주며 묻는다.
밖에 비가 오나보죠?
웬 걸요, 눈이 내리는 걸요. 함박눈.
전혀 예상치 못했던 터라 그녀의 입에서는 탄성이 새어나온다. 따뜻한 물 한 모금을 마시고 나자 그의 얼굴은 금세 눈에 띄게 밝아진다. 그녀는 의자를 꺼내어 그의 맞은편에 앉는다. 그가 묻는다.
눈 내린 지 한참 됐는데 모르셨어요?
네... 안 보여서요.
그러자 그가 조심스러운 어조로 혹시 전맹이냐고 묻는다. 장님이냐고? 바깥 풍경이 안 보인다는 의미로 말했을 뿐인데... 당황한 그녀는 무심히 고개를 젓다가 이내 그와 같은 행동이 그에게는 무의미하다는 걸 깨닫는다.
아뇨, 전 정상이에요.
무심코 뱉어낸 말이다. 그러나 얼마나 한심하기 짝이 없는 말인가. 대체 무엇이 정상이고 무엇이 비정상이란 말인가. 그녀는 그만 혀를 깨물고 싶어진다. 아랫입술을 지그시 눌러 문 채로 그의 표정을 엿본다. 다행히 그는 노여워하는 기색 없이 물을 마시고 있을 뿐이다. 그녀는 미안함을 제 안에 감춘 채 부러 상냥하고 앳된 어조로 묻는다.
눈도 오는데 뭐 하러 이렇게 나오셨어요?
딴은 그 점이 궁금하기도 했다. 회원제인 이곳 녹음도서실은 우편대출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대개의 시각장애인들은 집에서 전화로 도서 대출을 신청하고 우편물로 전달받고 반납한다. 장애인복지법에 의해 우편비용은 전혀 들지 않는다. 그런데 이 궂은 날씨에 테이프 꾸러미를 들고 여기까지 온 이유가 무엇일까. 의아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눈이 와서요. ..그냥 눈을 맞고 싶었어요.
무어라고 섣불리 대꾸할 수가 없다. 싸락눈이 내리는 겨울 어스름녘에 지팡이를 의지한 채 골목길을 걷는 맹인이라... 이유 없이 가슴이 답답해진다. 두 달 전쯤에 그녀는 학교 앞에서 우석과 그의 여자를 보았다. 그들은 아주 오래된 연인 사이처럼 보였다. 우석은 새 연인의 어깨를 소중한 보물처럼 감싸안은 채 걷고 있었다. 바로 얼마 전까지 그녀에게 그랬던 것처럼. 구부정한 자세로 종알대는 연인의 말에 귀 기울이던 우석은 고개를 뒤로 젖히며 호쾌하게 웃었다. 몇 년 동안이나 보아온 너무도 익숙한 모습이었다. 그녀는 면도날에 스친 것처럼 온몸의 살갗이 다 쓰라리고 아팠다. 우석은 그녀의 눈길 따위는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새로운 연인에게 몰입해 있던 우석에게 그녀는 그저 거리에 넘치는 인파 속의 한 사람일 뿐이었다. 그 날 그녀는 발길에 채이던 낙엽을 밟으며 지치도록 내리 걸었다.
사방 귀퉁이에 어둑시근한 그늘이 내려앉은 방안은 좀 무겁고 어색한 기운이 감돈다. 네 귀퉁이를 떠받친 날카로운 모서리가 유독 또렷한 윤곽으로 다가온다. 그녀는 맞은편의 그를 지그시 바라본다. 그 또한 무슨 생각에 빠져 있는지 말이 없다. 잠시 후 그가 테이블 위에 두 손을 올리더니 깍지를 끼어 맞잡는다. 그리고는 가라앉은 침전물을 조심스럽게 휘젓듯이 천천히 입을 뗀다.
어젯밤에 전... 입영 영장을 받는 꿈을 꾸었어요. 후후, 우습지 않아요? 꿈속에서 나는, 이상하다, 난 이미 군대 갔다왔는데... 그래서 어디로 어디로 계속 쫓아다니면서 뭔가 잘못되었다고, 나는 이미 군대를 갔다 왔다고 하소연을 했어요. 근데 아무도 그걸 믿지 않는 거예요. 너무나 안타까워서 가슴이 터질 것 같았어요. 깨고 나서 생각하니까 정말 우습데요. 눈만 멀쩡해진다면 그깟 군대 생활, 삼 년이 아니라 십 년인들 못하랴 싶은 게... 근데도 꿈속에서는 그렇게 억울할 수가 없었어요.
꿈을 자주 꾸나보죠?
꿈꾸는 걸 좋아해요. 꿈속에선 모든 게 보이니까요.
뒤통수를 한 대 되게 얻어맞은 느낌이다. 그녀는 이제껏 단 한 번도 그런 걸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맹인이 꿈을 꾸는지 안 꾸는지, 비록 현실은 볼 수 없는 처지여도 꿈속에선 볼 수가 있는지, 그런 건 전혀 관심 밖의 일이었다. 온몸이 나른해지는 느낌이다. 마치 깊은 산중이나 혹은 심해 한가운데에 그저 아무런 대책 없이 떨구어진 것처럼 아득하고 막막하기까지 하다. 그녀는 앞에 놓인 자신의 물컵을 끌어당겨 양손으로 감싸 쥐고 물을 한 모금 머금는다. 물을 넘기기가 유난히 힘들다. 목이 꽉 죄는 느낌이다.
그는 느릿느릿 말을 잇는다.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소년처럼 겸연쩍은 표정이다. 둥글고 커다란 두 눈을 끔벅거리기도 한다.
꿈속에서는 정상이었을 때처럼 농구를 하고 자전거도 타고 여행을 떠나기도 합니다. 늦여름 오후의 뭉게구름, 눈부시게 쏟아지는 햇살, 눈앞에서 출렁대는 시퍼런 바다, 선홍빛으로 물든 노을진 들녘 그런 것들이 눈에 선합니다. 잠들기 전에는 꿈속에서 그런 것들을 다시 보게 되었으면 하는 바램으로 설레기까지 한답니다.
그녀는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는 말을 하고 싶어서, 아니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을 찾아 저물녘에 눈보라 속을 헤집고 다녔던 게 아닐까. 그의 초점 없는 두 눈, 블랙 사파이어 같은 눈동자 속에 불빛 한 점이 별처럼 반짝인다. 그녀는 왠지 그가 자신의 형상을 낱낱이 보는 듯한 착각에 사로잡힌다. 언제였던가, 골목에서 그녀와 마주친 숙이의 오라비처럼.
숙이에게는 친오라비가 하나 있었다. 그는 키가 작은 편은 아니었는데 깡마르고 얼굴이 길었으며 하관이 빨랐다. 이마에는 굵은 주름이 서너 줄 패어 있고, 이마 한가운데에 새까만 제비초리가 좀 특이했으며, 좁다랗게 찢어진 삼각꼴의 눈은 날카로웠다. 그는 일년에 서너 번쯤 자기 동생을 만나러 오곤 했다. 야 이 썩을 년아, 니는 언제까지 넘의 집 식모살이만 할래? 그는 올 때마다 공장에 시다로 취직을 시켜주겠다며 숙이를 꼬드겼고 한참을 그런 식으로 으르고 꺼불대다가 갈 때는 숙이의 돈을 있는 대로 죄 뜯어갔다. 아니, 뜯어갔다는 말은 옳지 않다. 돈이라든가 통장 따위에는 도무지 관심조차 없는 숙이가 처음부터 선선히 내주었던 것이다.
그 날 그녀는 학교에서 돌아오고 있었다. 골목 어귀를 막 접어들었을 때 저만치에서 한 남자가 걸어오고 있는 게 보였다. 그는 그 즈음 한층 유행하던 허리띠를 매지 않으며 골반이 꽉 끼도록 지어진 녹두색의 바지를 입고 있었다. 점퍼는 벗어서 한쪽 손아귀에 쥔 채로 어깨에 척 걸쳤으며 양어깨에 있는 대로 힘을 주고는 비딱한 갈지 자로 거들먹거리는 걸음걸이였다. 대여섯 걸음을 앞두고서야 그녀는 그가 바로 숙이의 오라비라는 걸 알아차렸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고개를 푹 숙이고 눈을 내리깔았다. 시치미를 뚝 떼고 지나갈 속셈이었다.
너가 요집 주인 딸내미지?
앞을 가로막은 녹두색 바지가 깐죽거리는 투로 묻고 있었다. 별 수 없이 그를 힐끔 쳐다보고는 뻣뻣하게 선 채로 고개를 한번 까딱했다. 그는 여고 교복 차림의 그녀를 위 아래로 한번 쓱 훑어보았다.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외로 꼬고는 빤히 쳐다보는 그 세모꼴의 눈초리는 필시 무언가를 궁리하는 양 같았다. 그녀는 긴장했다. 가방을 모아쥔 손에 땀이 배었다. 그런데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전혀 뜻밖이었다.
너가 우리 숙이한티 고렇게 잘 해준담서?
잠시 헷갈렸다.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싶었다.
나가 우리 숙이한티 잘은 못 하지만 갸가 으떻게 지내는가는 다 알재. 니 이름이?
당황한 그녀는 제 이름을 말하면서 더듬기까지 했다.
어 그려, 채영이 니, 우리 숙이 잘 좀 부탁헌다 잉.
그 말을 하고 나서 무슨 말인가를 더 할 것처럼 빤히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던 그가 그녀의 한쪽 어깨를 슬쩍 밀고는 뚜벅뚜벅 걷기 시작했다. 그의 발자국 소리가 그녀의 등뒤에서 시나브로 멀어져갔다. 그게 다였다. 그녀가 그와의 대면에서 어떤 특별한 일이 있었던 건 결코 아니었다. 그런데 참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와의 그 짧은 대면 이후 그녀는 숙이가 전처럼 만만해 보이지 않았다. 숙이를 계집종처럼 부려먹다가도, 별 대수롭지 않은 일을 트집잡아 패악을 떨다가도, 그녀는 골목길에서 맞닥뜨린 그 오라비를 떠올리게 되었다. 그가 보였다. 숙이의 뒤에 떡 버티고 서서 이편을 노려보고 있는 그 세모꼴의 눈. 피붙이. 혈육의 정이 엉겨붙어 끈끈함을 연상케하는 그 단어를 생각할 때마다 그녀는 왠지 숙이의 오라비를 떠올리곤 했다.
그 말은 상당히 의외군요. 저는 그런 것들보다 가족, 네, 그래요, 식구들이 제일 보고 싶을 것 같은데요?
꼭 그렇지만은 않아요. 그들에게선 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으니까요.
목소리.. 목소리요?
네, 목소리를 들으면 표정이 다 읽히거든요. 이 사람이 화가 났구나, 기분이 좋구나, 몹시 슬프구나 그렇지만 기차를 타고 갈 때 차창 밖으로 펼쳐져 있던 한가로운 농촌 풍경들, 군대시절 불침번을 설 때면 금방이라도 우박처럼 내 머리 위로 후두둑 후두둑 쏟아질 것만 같던 별들. 그래요, 달, 나무, 숲, 안개, 눈 내리는 풍경 사실은 그런 것들이 가족이나 친구보다 더 보고 싶어요. 내 기억 속에서 그 영상들은 점점 더 희미해져갑니다. 아마 그래서 더욱 간절해지는 건지도 모르지요.
실례지만 눈은?
평온했던 그의 얼굴에 가벼운 체념의 빛이 스쳐 지나간다.
포도막염으로 중도 실명했습니다.
제대 후 대학에 복학한 그의 마지막 학기는 정신없이 바빴다. 취업준비로 여념이 없던 그 무렵의 어느 날, 갑자기 눈이 부시고 사물이 뿌옇게 보이며 통증이 시작되었다. 병원에서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내인성이라고 했고, 정밀검사 후 치료를 받았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주치의가 예견한 대로 서서히 시력장애가 왔다. 세상은 날마다 안개 낀 날씨처럼 흐렸고, 불빛 주위는 달무리 현상이 보였다. 시야가 좁아지다가 일부가 아예 보이지 않기도 했다. 처음에는 활자를 읽는 것에 불편을 느끼는 정도의 약시 상태였다. 얼마 후 일 미터쯤 떨어져 있는 사람의 손가락 움직임 정도는 알아볼 수 있는 지수 상태가 지속되었다가, 빛의 유무를 느끼는 정도의 시력인 광각 상태가 되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엔가 눈앞에서 어렴풋한 빛조차도 영영 사라져버렸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여 묻는다.
아니, 뭐 듣자니 요즘은 개안 수술로 시력을 되찾는 경우도 많다고 하던데요?
그는 입술을 꾹 다문 채 먹먹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그러다가 대꾸 없이 다만 고개를 저을 뿐이다. 그녀는 이곳 복지관에서 녹음 낭송법을 배우기 전에 소위 ‘맹인 체험’이라는 것을 한 적이 있다. 검은 천띠로 두 눈을 가리고 가짜 맹인이 되어 보는 것이었다. 앞이 안 보이는 상태로 길을 걸을 때 그녀의 한 가닥 알량한 이성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그녀의 모든 감각은 완전히 마비되었다. 뻔한 길을 걷고 있음에도 어디쯤인지, 어느 만큼 걸어왔는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안내자가 곁에 있었지만 그조차 믿을 수가 없었다. 엉덩이는 자꾸만 뒤로 빠지고 발이 안 떨어졌다. 한 치 앞이 다 허방일 것 같았다. 계단 앞에서 그녀는 달달 떨었다. 안내자가 손을 잡아주지 않는 한 그녀는 한 발짝도 뗄 수 없었다. 무서웠다. 그녀에게 보이지 않는 세계는 지옥이었다. 곳곳에 천길 낭떠러지가 숨어 있는 나락이었다.
그도 한때는 그러했으리라. 상념에 빠져 있던 그녀가 애써 밝은 어조로 묻는다.
혹시 연극을 보신 적이 있나요?
그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로 네, 하고 대답한다.
언젠가 시각장애인을 위한 연극을 상연한다는 신문 기사를 읽은 적이 있어요. 저는 그게 참 궁금했어요. 어떻게 시각장애인이 연극을 볼 수 있지요?
그녀 스스로도 참 당돌한 질문이다 싶다. 맹인에게 그런 질문을 천연덕스럽게 던지고 있는 자신이 미련스럽게 느껴진다. 그는 빙긋이 웃는다. 얼굴 가득 퍼지는 미소를 보는 순간 그녀는 자신의 물음이 그의 심기를 불편했을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을 떨쳐버린다.
듣고, 느끼지요. 대사를 듣고, 음악을 듣고, 상황을 느끼고 누군가가 설명을 해주기도 하구요. 저는 그림을 보러 가는 것도 좋아한답니다. 물론 이때도 해설자가 있어야겠지만요.
눈앞에 그가 서 있다. 화랑 안이다. 그녀는 그의 옆에 나란히 선다. 이러한 상상은 다소 감상적인 치기일까. 아무래도 좋다. 그녀는 그에게 속삭인다. 그림 한가운데에 아기를 업은 한 소녀가 있어요. 소녀는 정강이까지 내려오는 검은 치마를 입었고 까만 고무신을 신었어요. 흰 처네로 아기를 업었는데, 검은 통치마자락을 거의 덮을 만큼 치렁합니다. 소녀의 흰 저고리 어깨 위로 등에 업은 아기의 까만 머리랑 이마가 아주 조금 보여요. 이마를 가린 짧은 단발머리 모양의 소녀는 눈을 감고 있어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소녀의 얼굴은 그지없이 평온하고 고요해 보인답니다. 미리 양해를 구해 놓았으니 그림을 살짝 만져 보시겠어요?
그는 그림의 표면에 손끝을 대고 스치는 듯 마는 듯 가볍게 쓰다듬어본다.
시력을 잃고 나서도 얼마 동안은 점자를 부러 안 배웠어요. 결국은 배워야 했지만. 처음으로 점자를 읽었을 때의 느낌이 아직도 생생해요. 손바닥은 물론 온몸이 간질간질해서 금방이라도 재채기가 터져 나올 것만 같았지요.
그녀 안에서 길고 뜨거운 속숨이 터져나온다. 십 년, 혹은 그 이상의 세월이 지나면 누구나 자신의 불행과 불운에 대해 이처럼 의연하고 담담해질 수 있는 걸까. 푸르스름한 형광등 불빛이 꺼무룩하게 흐려지고 짙은 녹색 카펫이 깔린 방안이 땅속으로 깊숙히 꺼져 드는 것만 같다. 생면부지인 자신 앞에 느닷없이 나타나 이런 말을 전혀 아무렇지도 않게 꺼낼 수 있는 그. 그녀는 맞은편에 앉은 그의 존재가 문득 초현실적으로 느껴진다. 그와 동시에 기억의 물밑에 가라앉아 있던 얼굴 하나가 넘실넘실 수면 위로 올라온다. 병원 뒷마당에 시름하니 서 있던 숙이. 그녀의 커다란 눈망울, 그렁그렁 괴어 있던 눈물까지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녀가 대학에 입학한 해의 늦가을에 숙이의 오라비가 사고를 당했다. 만취한 채로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가 벼랑 아래로 구른 것이다. 사고 소식 후 숙이는 곧바로 제 오라비에게로 달려갔다. 그녀는 어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딱 한 번 위문차 숙이를 보러 갔다. 병실로 들어서던 그녀는 놀라 뒷걸음질을 했다. 환자는 얼굴과 온몸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그는 석 달째 의식불명 상태였다. 언제 깨어날지 아니, 과연 깨어날 수 있을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잠시 멀뚱하니 서 있다가 하는 둥 마는 둥 인사를 마치고는 도망치듯이 그 자리에서 빠져나왔다. 얼마쯤 그렇게 가고 있는데 누가 그녀를 불렀다.
숙이였다. 숙이가 한걸음에 다가와 그녀의 손을 끌어당겼다. 그녀는 숙이의 투박하고 따뜻한 손길을 머쓱해하며 제 손을 숙이에게 내준 채로 서 있었다. 그날따라 숙이가 어딘가 낯설어 보였다. 한지붕 아래 몇 년 동안 노상 보아왔던 그 얼굴이 아니었다. 달덩이처럼 동그랗고 뽀얗던 얼굴, 어수룩해 보일 만큼 천진하던 표정은 흔적이 없고, 짙은 속눈썹으로 그늘진 눈동자 속에는 온갖 수심이 가득했다. 그 눈동자에는 이내 습한 기운이 스며들었다. 축축하게 젖어들던 숙이의 눈자위는 가을 햇살 속의 단풍만큼이나 붉었다.
그것이 그녀가 본 숙이의 마지막 모습이다. 얼마 후에 그 오라비가 의식을 회복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는 앞을 전혀 볼 수 없게 되었다고 했다. 오래지 않아 숙이는 그 눈먼 오라비와 함께 먼 일가붙이가 살고 있는 전라도의 어느 촌으로 내려갔다. 그 후로 그녀는 더 이상 숙이의 소식을 듣지 못했다.
그와 나란히 녹음실을 나선다. 사무실 앞에서 기역자로 꺾인 복도는 여느 때와 달리 전등이 켜져 있지 않다. 창 밖에서 흘러드는 보안등 불빛 덕에 가까스로 물체를 어렴풋이 알아차릴 수 있을 뿐이다. 복도 끝의 철문을 지나 계단이 시작되는 지점에 이르자 바닥에 깔린 고무깔판이 희미하게 보인다. 노란색의 울룩불룩한 이 고무깔판은 주로 엘리베이터 앞이나 화장실 입구, 계단 앞에 깔려 있다.
계단인데 어두워서 실은 저도 잘 안 보이거든요.
그래요? 그럼 우린 정말 눈에 뵈는 게 없는 사람들이네요.
그의 말에 그녀는 소리내어 웃는다. 이 사람의 몸 어느 구석에 이런 힘이 고여 있는 것일까. 세상의 그 모든 날카로운 모서리를 제 안에서 아픈 줄 모르고 깎아내어 넉넉하게 헤아려 품을 줄 아는 지혜와 여유는 대체 어디서 생겨나는 것일까. 그녀는 어둠 속에서 그에게 손을 내민다. 그에게 자신의 한쪽 팔꿈치께를 잡게 한 후 휠체어 리프트 버팀대를 의지한 채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한다. 걸음을 떼어놓을 때마다 조릿조릿하다. 발을 잘못 딛기라도 한다면? 계단 턱에 하이힐 뒤축이 걸리기라도 한다면? 두 말할 필요 없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사람은 한데 엉겨붙은 채 계단 저 아래로 곤두박질치게 될 것이다.
눈은 그쳐 있다. 경비원 노인은 눈을 쓰느라고 그들이 나오는 것도 보지 못한다. 사방 천지가 눈이 부시다. 바람은 소복이 눈 덮인 청솔 그늘 밑에서 잠을 자고 있는지 미동조차 없다. 눈 내린 밤거리는 푸근한 느낌마저 준다. 그녀가 집 앞까지 태워다 주겠다고 하자 그는 손사래를 저으며 활달하게 말한다.
걱정 말아요, 초행길 아니에요. 길눈도 밝은 편이라구요.
그냥 이렇게 헤어질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무어라고 한 마디 정도는 해야 할 것만 같다. 그런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그녀는 머뭇머뭇 다가가 그의 한쪽 손을 잡는다. 그는 반갑게 그녀의 두 손을 맞잡는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그의 손은 의외로 작고 부드럽다. 그는 그녀의 손을 꼭 잡은 채로 두어 번 가볍게 흔든다. 말이 필요치 않다. 이윽고 악수를 풀기 위해 그녀가 손을 빼려고 했을 때, 빠져나가려던 손을 그가 돌연 꽉 그러쥔다. 결코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이. 순간 그 고집스러움과 완력이 그녀의 어깻죽지로까지 죽 뻗쳐온다. 쭈뼛하다. 그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낯설다. 이제까지의 그가 아닌 전혀 다른 사람 같다. 딱히 무엇이라고 단정지을 수 없는 복잡 미묘한 감정이 그녀 안의 저 깊은 곳에서 뭉클뭉클 솟구쳐 올라온다. 놀라움, 생소함, 두려움, 부끄러움.
그는 그녀의 손바닥 중앙과 엄지의 뿌리가 박힌 반바닥의 도톰한 살을 쓸어내리 듯 어루만진다. 그녀는 꼼짝할 수가 없다. 숨조차 크게 내쉴 수가 없다. 그에게 한쪽 손을 잡힌 채로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볼 뿐이다. 두 눈을 지그시 감은 그. 다소 창백해 보이는 낯색, 턱 언저리에 거뭇거뭇한 수염, 패인 듯이 푹 꺼진 눈두덩. 눈 덮인 나뭇가지 사이, 외등의 푸른 불빛 아래 드러난 그의 얼굴은 이를 데 없이 평온하다. 그는 무언가에 완전히 골몰한 상태다. 이따금 보일 듯 말 듯 미간을 찌푸리기도 한다.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이 죽은 듯이 호흡을 멈추었다. 흐르던 시간도 정지한다. 그가 그녀를 본다. 그녀의 마음을 읽는다. 모든 감각을 열어놓고, 그의 방식대로, 그의 보이지 않는 또 다른 눈으로 그녀를 낱낱이 보고 있다. 그녀 안에 가득 찬 혼란과 떨림, 그것마저도 꿰뚫고 있는 느낌이다.
우석에게서 헤어지자는 말을 들었을 때 그녀는 마냥 혼란스러웠다.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던질 수 있는 그는 그녀가 지난 삼 년간 늘 보아왔던 우석이 아니었다. 네가 나를 안다고? 후후.. 잘못 보았겠지. 그녀는 우석이 냉소와 함께 남긴 그 말을 오래오래 곱씹었다. 그녀는 과연 그의 무엇을 보아왔던 걸까. 우석에 대해 속속들이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그녀는 그의 허상만을 보았던 건지도 몰랐다. 잠시 눈이 멀었던 것일까, 아니면 내면의 심안이 없는 탓일까. 그녀는 말할 수 없이 씁쓸했다.
그가 자연스럽게 악수를 풀 때 그녀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묻는다.
다음에 만나면 저를 기억하실 수 있겠어요?
물론이죠. 목소리를 아니까요.
비슷한 목소리도 많을 텐데요?
네, 그렇지만 맹인더러 연극을 봤냐고 묻는 목소리는 흔치 않지요.
그녀의 얼굴에 살짝 홍조가 스친다. 그가 큼지막한 외투 주머니에서 짧게 접어놓은 맹인용 지팡이를 꺼내 가볍게 흔든다. 지팡이는 곧 아래로 죽죽 길다랗게 펼쳐진다. 막 걸음을 떼어놓으려던 그가 그녀 쪽을 향해 한 마디를 던진다.
실은, 제가 아까 말하지 않은 게 하나 있는데요.
그녀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는 그의 말이 이어지기만을 기다린다.
전 탁구도 아주 잘 친답니다.
그 말을 하며 그는 유쾌하게 웃어젖힌다. 그리고는 뚜벅뚜벅 걷기 시작한다. 허리를 곧추세우고 어깨를 반듯하게 편 그의 뒷모습은 당당해 보인다. 그녀는 손나팔을 만들어 저만치 앞서가는 그의 등에 대고 소리친다.
저도 탁구라면 자신 있어요! 언제 한판 붙어볼까요?
그는 내리 걸어가면서 고개를 아주 크게 끄덕인다. 그의 뒷모습이 점차 작아진다. 야트막한 콘크리트 담 모퉁이를 경계로 한순간에 사라져버린다. 주위를 돌아본다. 아무도 없다. 두껍고 낮게 깔린 암청색의 밤하늘, 불이 꺼진 고층 빌딩, 멀리 번들거리는 차도, 천천히 미끄러져 가는 자동차, 잔뜩 움츠린 채 눈길을 걷는 한두 사람의 행인. 눈 내린 도심의 야경은 온갖 소음이 다 날아가버린 것처럼 적막하다. 멍하다. 그를 만난 것, 그와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이 마치 꿈속의 일처럼 아득하다. 손바닥을 들여다본다. 그의 악력이 생생하다. 한기가 몰려든다. 빳빳하게 곱은 두 손에 입김을 쏘인다. 입김이 하얗게 부서진다.
주차장 쪽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붉은 벽돌 건물의 모서리를 돌자 바람 한 줄기가 쏟아진다. 그녀에게로 사납게 덤벼든다. 얼어붙은 볼에 머리카락이 채찍처럼 휘감긴다. 얼굴이, 목덜미가 간지럽다. 온몸 구석구석에 밀려오는 이 간지러운 기운에 금방이라도 매운 재채기가 쏟아질 것만 같다. 손이 닿지 않는 몸의 저 깊숙한 안쪽이 간지러운 느낌. 그녀의 몸속 어딘가에 숨어 있던 눈이 비로소 깊은 잠에서 깨어나고 있다. (*)
단편소설 심사평-임규찬(문학평론가·성공회대 교수)
선자에게 넘어온 예심통과작이 10편인데 전체적으로 지난 해보다 좋아 보였다. 물론 대체적인 경향은 여전히 사소설적인 것에 묶여 있었다. 부부나 부모, 친구 등 친인척 사이의 인간관계 속에서 주로 단절이나 소외를 문제삼고 있어서 그만큼 이 문제가 우리 사회의 심각한 정신적 그림자임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일차로 10편 중 [올가미](한진숙), [하얀 사랑](송재희), [염소떼를 모는 남자](김병고), 그리고 [숨어있는 눈](박현경)으로 압축하였다. 이들 4편은 전체적인 경향에서 보자면 다소 이질적이다. [올가미]는 한 여성의 굴곡진 삶을 몇 국면으로 늘리고 조여 나름대로 소설적 구성미를 잘 살린 작품이었다. 그러나 작중인물을 직접 화자로 내세워놓고 끝내 이 여성을 정신병적 행동으로까지 극단화시킨 방식은 아무래도 무모했다. 그 점에서 오히려 적절한 관찰자를 내세워 풀어나갔으면 좋았을 법했다. [하얀 사랑]은 홀어머니 밑에 남달리 살갑게 자란 두 남매가 성장한 이후 보여준 따뜻한 혈육 이야기다. 불의의 교통사고로 남편을 잃고 청상과부가 된 누나의 삶을 남동생의 시선으로 애잔하게 껴안고 있다. 여기에 ‘누나’를 닮았다고 생각하여 맞이한 ‘아내’가 막상 결혼 후 보여준 대조적인 삶을 밑그림으로 해서인지 더더욱 육친을 향한 애틋함과 그리움이 돋보인다. 그러나 너무 무난했다. 적어도 신인에게 기대되는 신선감을 문체나 구성 등 다른 면에서도 보기 힘들어 아쉬었다.
최종 경합은 [염소떼를 모는 남자]와 [숨어있는 눈]이었다. 둘다 독특한 소재(염소떼를 키우는 농촌노총각과 주부로서 맹인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낭독봉사자)였고, 또 그런 독특한 소재를 감당할만한 생활세계도 충분히 안받침하고 있어서 소설의 산문적 개진이 넉넉해 보였다. 다만 [염소떼를 모는 남자]는 ‘병약한 자신과 건강한 염소’라는 존재론적 문제의식을 실제적 삶으로 작중의 연관인물(어머니, 여자 등)과 깊이있게 연계시키지 못해 ‘정체성 탐구’라는 또다른 작가의 의도가 막연해졌다는 생각이다. [숨어있는 눈]도 자신이 낭독봉사자로 나설만한 충분한 내적 요소(맹인이 된 숙이오빠)가 있음에도 초반에 이를 잘 살려내지 못한 것이 흠이었다. 그러나 [숨어 있는 눈]이 문장력이나 구성력에서 훨씬 안정되었고, 세상을 보는 눈도 크게 열려 있어 여러모로 신뢰감을 주었다. 자연 [숨어있는 눈]에 최종 낙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선자의 멋진 출발을 축하하며, 아쉽게도 다음 기회를 다시 노려야할 낙선자들에게도 고행의 문운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