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예총과 함께 한 민요분과위원회 10년사라기 보다는 소리왓 10년사라는 말이 어울릴 듯 하다. 사실 민예총 민요분과로서의 소리왓 역사는 10년의 딱 반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예총과 함께하지 않은 적이 거의 없으니, 내외간에 당연히 한 몸이거니 여기는 사람들도 많았으리라. 뭐, 떡본 김에 장사 지낸다고, 전부터 별러왔던 소리왓의 10여년 역사를 이 기회에 정리해 보아야 할까보다.
●우리노래연구회 민요분과에서 민요패 소리왓으로
그러려면 1987년에 결성되어 활동하고 있던 제주문화운동협의회 시절로 거슬러 올라 가야 한다. 80년대의 암울하고 복잡했던 시대상황 속에서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민요연구회의 민요를 접한 것은 어둠 속에서 빛을 만난 것과 같았다. 당시 우리에게 민요는 구비문학의 한 분야로서 연구해야 할 대상, 또는 늘 화려한 무대매너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무대를 장식하지만 어딘가 생동감이 없어보이는 통속민요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창작민요, 구전가요 등 또 다른 민요의 세계가 있다는 것이다. 배우고 익혀보니 그게 모두 우리의 가까운 과거와 현재 얘기다. 옛 것으로만 보이던 민요가 오늘날 우리가 실제로 즐기고 향유하는 민요가 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우리의 관심을 민요로 이끌었다. 충남대 민요패의 제주전수에 통역 겸해 공동전수형태로 참여한 것도 활동에 탄력을 가한다. 87년도에 제주문화운동협의회(제문협)가 창립되고, 학생신분으로서 그 창립을 감격과 함께 바라보았다. 제문협의 한 조직이었던 우리노래연구회는 당초에는 노래패 중심의 활동을 하고 있었다. 1990년, 우노연 조직의 역량을 강화하고자 하는 문협 선배들의 의도와, 졸업 후 활동 진로를 고민하고 있던 제주대 국문학과 민요분과 '섬비나리' 출신 세 명(안민희, 문애선, 안희정)의 요구가 맞물리면서 가요분과와 민요분과로 우노연의 조직개편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이론에서 실천으로의 연결은 쉽지 않았다. 민요의 창법도 모르는 상태에서 어설픈 민요 익히기는 곧 한계를 드러냈고, 봉건시대의 민요를 오늘 이곳에 끌어내 오는 문제에 대한 고민은 여전히 진행중이었다. 잠깐의 침체기가 있었다. 90년 말에서 91년 초 사이에 안동민요연구회 소모임활동을 하던 권오동, 사학과 노래패 '노래마을' 출신 현희순이 차례로 민요분과에 합류하면서 전망은 조금씩 구체화되어가기 시작한다. 91년 상반기에 우리노래연구회는 4.3제주민중항쟁 43주기 '사월제'에서 보급하기 위해 '불타는 섬'이란 노래테이프를 제작했다. 자체제작할 수밖에 없었던 열악한 제작여건상 음질이 떨어져서 많이 보급되진 않았지만, 지금 우리에겐 유일하게 하나 남은 자료 테이프를 들을 때마다 그 시절이 다시 생각나곤 한다. 각 분과의 회원 확보가 어느 정도 이루어지자, 7월 즈음해서 분가 논의가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창법도 다르고 커리큘럼도 다른 두 분과의 한집살림은 사실상 한 지붕 두 살림과 매한가지였다. 하반기 동안 각기 독자적 형식의 패로 독립하기 위한 전망들을 내오고, 91년 12월 21,22일 노래패가 먼저 제주대학교 사회과학대 중강당에서 창립공연을 하는 것으로 '섬하나 산하나'의 시대를 열었다. 민요분과는 그해를 넘겨 92년 1월6일부터 열흘간 제1회 민요교실을 여는 것으로 '민요연구회(준비위)'의 역사를 시작하였다. 이후 92년 7월에 '민요연구회(준비위)'는 민요패 소리왓으로 명칭을 바꾸게 된다. 이 시기 함께 했던 사람들이 안민희, 안희정, 현희순, 문용철, 이상오, 변향자, 고경녀, 조기두 등이다.
●보급 중심의 활동기
민요교실을 첫 정기사업으로 '소리왓'이란 '진정한 이 시대의 소리를 만들어내는 밭'이란 뜻이다. 이때 '밭'은 '재생산의 장'을 의미한다. 이 명칭에 걸맞게 소리왓의 활동은 민중의 삶과 정서에 맞는 진정한 이 시대의 소리를 찾고 이를 대중적으로 널리 확산시키는데 목적을 두었다. 92년 독립선언후부터 첫 정기공연이 올려진 95년까지 소리왓 초기 활동은 보급활동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여름과 겨울 두 차례에 나누어 열리는 민요교실이 소리왓의 중심사업이 되었는데, 이때 민요교실의 목적은 '민요의 대중적 확산'과 '삶의 노래로서의 민요라는 인식정착', 그리고, '내부역량 강화'등에 두었다. 이 외에는 노동현장 등 '현장지원활동'과 방송대 설화민요연구회, 서귀포 디딜팡등 '다른 문예단체 지원활동', 상설민요교실의 형태였던 '월요모임' 같은 사업들로 채워진다. 이중 '월요모임'은 수료생들로 소모임이 꾸려지고, 이는 다시 회원활동으로 연결되는 중요한 통로가 되기도 했다. 따라서 이들 사업을 효과적으로 추진해나가기 위해 강사로서의 전문성을 갖추는 것이 소리왓 회원들의 주된 과제가 되었고, 이에 따른 일상활동 역시 현지조사라든가 민요전수, 자료수집 등으로 이루어진다. 이 시기에 오은경, 강은영, 박승영 등이 합류한다.
●전문집단으로의 전망 형성기
(1) 제1회 정기공연, 그 이후 95년11월 제주시민회관에서 '작은 소리 큰 신명'이란 이름으로 첫 정기공연을 올렸다. 제주민요를 비롯 다양한 형태의 민요들을 고루 담은 소리공연 형식의 공연이었다. 창작민요는 양용찬 열사 추모의 내용을 담을 수 있는 내용들로 선곡했다. 사실상 민요패 소리왓이라는 명칭 뒤에 붙이던 '준비위'라는 뜻의 <준>이란 딱지를 뗀 것은 이 공연에서였다. 대외적으로 소리왓의 존재를 알리고, 내부적으로는 개인기량을 다지는 계기로 삼는데 의의를 둔 공연이었다. 이전까지의 활동이 찬조형태의 소공연과 보급활동 중심으로 운영되었다면 첫 정기공연은 또다른 계기를 만들어낸다. '관객'과 만나는 '공연'은 '수강생'과 만나는 '강습'과는 사뭇 다르다. 또 다른 방향에서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나 할까. 첫 공연치고는 무난했다는 주변의 격려담긴 평가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갖추어야 할 것 투성이였다. 회원 모두에게 자극제가 되었다. 현회순 회원이 판소리 쪽으로 전망을 두고 소리공부를 떠나는 아쉬움도 있었지만 이때 시작된 사업들이 대부분 소리왓의 정기사업으로 정착돼 있으니 이후 사업들의 추진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다 준 셈이다. 이 시기에 다시 김경률, 강봉규, 강종임이 합류해 정기공연을 함께했고, 이후 김경호, 김정은이 합류한다.
(2) 전수활동 내부강화 사업은 개개인의 전문성 강화 쪽으로 좀더 초점이 맞추어진다. 여름민요전수란 이름으로 집중전수기간을 내부강화사업의 하나로 둔 것도 이 시기였다. 사실 1993년 4월에 이옥희 선생님에게 제주민요를 전수한 이래 전수활동이 정례화 된 것은 이 시기 이후이다. 1996년 8월 조공례선생에게 '남도들노래, 강강술래' (전남 진도), 곧이어 9월에 김주옥 선생에게 '제주들노래', 1997년 8월 충남 부여 박홍남 선생에게 '산유화가', 김주옥 선생에게 다시 '제주들노래', 1998년 8월 전북 익산 박갑근 선생에게 '익산지게목발소리', 1999년 6월 서귀포시 예래동 강승화 선생님에게 '흙벙에 부수는 소리 등 예래동 민요', 1999년 8월 이상휴 선생에게 경북 예천군 '통명농요', 2000년 6월엔 다시 강승화 선생에게 '예래동 민요', 같은해 8월 김남기 선생에게 '정선아라리'를, 2001년 김주옥선생에게 '제주들노래', 행원리 안도인 선생에게 '물질소리', 김영자, 강등자 선생에게 '촐비는 소리', 덕수리 강원호 선생님에게 '방앗돌 끗어내리는 소리', 송평우 선생에게 '집줄놓는 소리', 동김녕리 김경생 선생에게 '멜후리는 소리', 삼달리 강성태 선생에게 '검질매는 소리'를 익혔으며, 2002년 8월 경남 '고성 농요' 전수, 2003년 8월 경기도 '농사일소리' 전수 등 한해도 거르지 않고 전수활동을 한 셈이다. 선생님들 중 이옥희, 조공례, 김주옥 선생이 차례로 유명을 달리하셨으니 우리의 조급증은 더 커진다. 제주에서의 민요전수는 제주소리를 제대로 체득하기 위한 데 가장 큰 목적이 있지만, 다른 지역 민요의 전수에는 이 외에 부수적인 목적이 있다. 다른 지역의 민요전승실태, 방법 등을 엿보는 것과 함께, 다른 소리의 체험을 통해 제주지역 소리만이 갖고 있는 특징적인 부분들을 끄집어내기 위한 것이다. 순수하게 회원회비만으로 단체활동을 유지하고, 이 외에도 연습실 겸 사무실 마련을 위해 특별회비란 명목으로 각출해야 했던 당시로선 일주일간의 다른 지역 소리전수를 위해 각자 지출했던 10여만원의 비용은 적잖은 출혈이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이것 역시 정기공연에서 느끼는 긴장감과는 또 다른 자극제가 되어왔다. 배우고자 하는 사람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현실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며 또 제주에만 국한된 문제도 아니다. 그러나 지키고 전승시켜야 할 중요한 문화유산이라고 판단될 경우 이를 지키려는 노력의 정도와 방법은 지역에 따라 여러가지 양상으로 나타난다. 그것이 지역문화의 가능성을 가늠하는 척도라 여겨진다. 지역문화의 계승을 위해서는 무형의 문화를 전수하는 주체나 계승하는 주체나 모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하며, 이것이 가능하게 둘 사이를 매개해 주는 것이 문화행정의 역할일 것이다. 지역마다 정부 또는 자치단체의 지원하에 기능보유자들이 운영하는 전수회관이 있어 누가 찾아가도 반기며 적극적으로 지역의 문화를 전파하고 보급하려 애쓰는 모습이 역력하다. 또한 무형문화재를 갖고 있는 지역의 자부심도 대단하다. 전라남도 진도군에서는 매일 아침 지나가는 쓰레기차량에서 진도 소리꾼들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군에서 쓰레기차량마다 무상 배포한 테잎을 돌리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주변에서 늘상 듣는 음악이 제주민요라면 익숙해지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 이렇게 될 날을 그리며 또 다시 신발끈을 조이게 되는 것이다.
(3) 어린이민요교실과 소리나라 일반인을 대상으로 꾸준히 진행해오던 민요교실에 96년에는 또 하나의 사업을 덧붙였다. 여름방학을 맞은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한 어린이민요교실을 마련한 것이다. 우리음악을 어릴 때부터 접한 아이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민요를 친근하게 느끼게 되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기에. 이 사업의 효과는 아주 긍정적이었다. 아이들이 쉽고 재미있게 부를 수 있는 민요와 동요의 발굴이 또 하나의 과제로 남겨졌다. 이 행사는 또 '어린이민요단 소리나라'를 낳는다. 어린이민요교실 수료생들로 민요단을 구성한 것이다. 소리나라는 당초 제주설화에 기반을 둔 소리왓 2회 정기공연 '꼬부랑나무아래 행기물'을 함께 하기 위한 한시적인 조직이었으나 공연이 끝난 후 상설조직으로 자리잡게 된다. 소리나라는 지속적인 국악교육의 효과를 가늠케 하는 척도이면서, 공연을 통해 자연스럽게 또래의 아이들에게 우리 민요의 가치를 알리는 중요한 조직으로 자리잡아 간다. 98년부터는 소리나라도 정기발표회를 갖기 시작하는데, 98년 1월 '덩따쿵 쿵따쿵 소리로 여는 세상'이라는 제목으로 처음 올리기 시작한 이 정기 발표회는 2001년 제주에 내려오는 설문대할망 이야기를 소리극화한 '할망할망 어드레 감수과?'까지 4회를 끝으로 수시 찬조공연과 일상적인 교육 중심의 활동으로 대체된다. 전래동요를 놀이극 형태로 보여주는 소리나라의 크고 작은 공연은 제주사투리의 보급과 아이들 놀이노래의 전파에 많은 역할을 했다. 소리나라 활동도 올해로 9년째를 맞고 있으니, 나이를 많이 먹은 셈이다.
●소리판굿의 시도 - 영역의 확장
(1) 2회 정기공연 '꼬부랑나무 아래 행기물' (97년 1월) 민요는 사람이 말을 하듯 가장 자연스런 호흡으로 불려지는 것이다. 언뜻 단조로워 보이는 제주민요 가락에 담겨 있는 흥과 힘찬 생명력을 드러내 보여주기 위해 민요, 풍물, 춤이 어우러지는 '소리판굿'이란 형태를 시도했다. 마당극, 마당굿, 판굿 등 기존의 마당극 쪽의 다양한 명칭과 개념들에서 '판굿'이란 말을 떼어와 '소리'와 접합시킨 것이다. 매체는 '소리'요, 시공간은 열린 '판'이요, 풀어가는 방식은 '굿'적이라는 것이다. 과거에 대한 진정한 씻김이 없이는 미래로 나아갈 수 없다. 어떤 형태로든 이 섬의 아픈 기억들과 만나고 싸우고 용서하고 화해하는 씻김 작업을 해야 했다. 첫 판굿이니만큼 누구나 쉽게 다가설 수 있는 내용이면서 역사 이전, 설화의 시대서부터 소급해 오자는 데 의견이 모아지면서 제주에 전해지는 '고종달설화'가 모티브로 정해졌다. 제주땅에 흐르는 왕의 기운을 없애기 위해 제주로 파견된 중국사신 고종달과 그것을 막기 위한 제주 샘물의 신과 민중들의 지혜로운 항거를 내용으로 한 것이다. 연출은 정공철 선배를 모셨다. 소리와 극이 어우러진 판굿, 말이 쉽지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을 혼자서 헤쳐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스스로의 한계를 인정하면서, 또 횟수를 거듭하면서 나름대로의 형태를 갖춰갈 것이라는 가능성도 예측하면서 내디딘 걸음이었다. 모든 것을 자비로 충당하던 시기에 처음으로 '문예진흥기금'이란 것도 받았다. 고민이 늦어지면서 공연은 다음해인 97년 1월로 넘겨지게 된다. 첫 판굿의 시도였던 '꼬부랑나무 아래 행기물'은 대사를 최대한 절제한 상태에서 소리를 통해 보여지는 소리판굿의 기본형은 갖췄되, 각 부분(소리, 연기, 대사, 춤 등)의 기량이 전반적으로 부족함을 느꼈던 공연이었다. 이 부끄러움은 9회 공연을 앞둔 지금까지 계속된다. 아직 "이것이 진정한 소리판굿이다!"라고 자신있게 내놓을 수 있는 틀을 갖추지 못한 탓이다. 평생 계속되어야 할 부담스런 짐이 되지 않을까 내심 걱정되기도 한다. 이 시기에 김형섭이 정회원으로, 양윤호, 한명경, 양수연, 양현정이 준회원으로 합류한다. 이후 정기공연은 계속 '소리판굿'으로 이어진다. 내용상으로는 제주사람들의 역사적인 삶을 따라서 쭉 이어온 공연인데, 형식면에서는 제각기 다양한 시도들을 해오며, 각 공연에서마다 한두가지씩의 성과들은 남겨온 셈이다.
(2) 3회 ' 녀풀이' (97년 11월) 두번째 녀풀이는 기존에 극단 '수눌음'이 공연했던 마당극 ' 녀풀이'를 소리판굿으로 각색한 것으로 일제수탈에 항거하는 제주 수들의 삶을 담아낸 작품이다. '극'이 중심이 되는 마당극을 '소리'가 중심이 되는 소리판굿으로 바꾸는 데 있어서 고민을 많이 해야 했던 작품이다. 지금이야 두세 명 정도가 대본팀을 구성해 하나의 작품을 만들지만, 일제시대 해녀투쟁사에 대한 자료를 함께 공부하고, 원대본의 장면 하나하나를 쪼개어 분석하고, 재구성하기까지의 과정을 전회원이 며칠 밤을 새다시피 했었으니 그야말로 '공동창작'이었다. 작품의 완성도는 덜했을지 몰라도 공연을 준비하는 과정에서의 충실도는 가장 높이 쳐줄 만 하다.
(3) 4회 '사람세상 살려옵서'(98년 11월) 4·3은 제주사람 모두에게 아물지 않은 상처임과 동시에 우리들에게도 언젠간 풀어헤쳐야 할 가슴속 불씨였다. 제주에선 어느 마을도 4.3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사람세상 살려옵서'는 그 중 한 마을의 얘기다. '사람세상 살려옵서'는 각색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처음으로 완성대본을 만든 순수 소리왓 창작 작품이다. 굿노래에서 그대로 가져온 제목임에도 불구하고 4.3소재 작품이라는 점과 맞물려서 98년 초연에는 정보기관의 주목을 받았던 작품이기도 했다. 유족 한 분이라도 더 모시기 위해 공연 당일까지 전화통을 붙들고 있었던 기억, 영혼으로 분해 유족들과 만날 때 모골이 송연해지던 기억에 다시 숙연해진다. 2000년에 재공연도 이루어진다. 4.3특별법이 통과되고 처음 가진 공식적인 4.3도민위령굿인 '도민해원상생굿'의 감동을 소리판으로 끌어들여, 이 시기 특별법 통과라는 성과에 가려 자칫 잊어버리기 쉬운 4.3의 의미를 되짚어보는 내용으로 재구성했다. 여기서는 굿의 형식과 내용에 대한 구체적인 고민이 이루어졌다.
(4) 5회 '혈육'(99년 12월) '혈육'은 이산가족의 문제를 다룬 작품이다. 분단상황으로 인해 제주사람이면서 제주를 찾지 못하는 사람들, 남북으로 나뉜 모든 이산가족들의 문제를 짚어보고자 했다. 38선에 철조망이 쳐지고 남북간은 물론 해외 동포들도 쉽게 조국을 오가지 못하는 상황 속에 도일한 부모와 남쪽 제주에 홀로 남겨진 여자아이가 주인공이다. 40여년이 흐른 후 중년이 된 이 여자아이 '순이'에게 분단은 어떤 모습으로 남아있는지를 돌아보는 '가슴으로 부르는 사모곡'이다.
(5) 6회 '아기장수의 꿈'(2000년 4월) 제주에서 오랫동안 전해지고 있는 전설 날개달린 아기장수의 이야기는 시간을 흐르고 흘러 민란의 장두들과 만나고, 4·3의 민중들과 만나고, 다시 흘러 현대의 소년 '장수'와 만난다. '아기장수의 꿈'은 우리 역사의 그늘에 자리잡고 있는 '미국'이란 존재를 '미군범죄의 문제'를 통해 겉으로 드러내고자 한 작품이다. 창작민요 중심의 공연으로 얼마나 민요패의 특성을 살리고, 관객들과 공감할 수 있는가를 시험해 보는 무대가 되었던 작품이기도 하다.
(6) 7회 '우리할망넨 영 살아수다'(2001년 11월) 여섯 번째 '우리할망넨 영 살았수다'는 초심으로 돌아가기, 기초부터 다지기의 일환이었다. 이야기에서 출발하여 적절한 노래를 삽입하는 형태가 아니라, 노래를 중심으로 하여 주변에 살을 붙여나가는 형태의 구성으로 창작방법 자체를 바꾸었다. '우리할망넨∼'은 100년 전 제주사람들의 일상이다. 4계절의 변화에 따라 이뤄지는 제주사람들의 삶과 노동을 제주민요의 원형을 최대한 살려 담아내면서 제주공동체의 참모습을 이야기하고자 했다. 가장 소박한 우리네 옛 삶의 이야기가 지금 현재의 우리들에게 얼마만한 공감을 가져올 수 있을까 반신반의 했었는데, 기대 이상으로 좋은 반응을 얻어서 완판 공연만 14회를 기록하는 소리왓 최초의 최장기공연이 되기도 했다. 이 작품은 그대로 소리왓의 회원교육용 교과서가 되었으며 상시 공연 가능한 작품으로 자리잡았다.
(7) 8회 '웡이야 자랑아'(2002년) 일곱 번째 '웡이야 자랑아'는 신화와의 두 번째 만남을 시도했던 작품으로 소리왓 창립 10주년을 맞아 야심차게 준비한 작품이다. '웡이야 자랑아'는 제주의 산육신(産育神)인 '삼승할망' 이야기와 근현대사를 접맥시켜,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우고자 한 작품이다. 신화에 대한 고민의 수위가 깊어지고 구체화되었다는 긍정적인 성과가 있었지만 너무 방대한 내용을 담아내려 하다보니 신화와 현실의 연결고리가 느슨해지고, 초점이 흐려지는 아쉬움이 있었다. 2003년 4.3주기에 재공연을 시도하면서 신화와 현실의 연결에 좀더 구체적인 고민이 가해진다. 소재를 4.3으로 한정시키고, 장면의 연결을 아이들 놀이와 노래를 활용하면서 또 다른 느낌의 작품이 만들어졌지만 신화는 우리가 짊어지고 가야 할 또 하나의 과제가 되었다.
(8) 2004 소리판굿 '용시풀이' '우리할망넨 영 살았수다'에다 '오늘'이라는 시점을 가미한 것이 2004년 '용시풀이'이다. 2004 찾아가는 문화활동’의 일환으로 제주도농민회와 함께 한 이 공연은 '바로 오늘, 우리의 문제'인 '쌀수입 전면개방'을 앞둔 제주농촌의 현실을 담아낸 작품으로 지난 8월 말부터 9월 초까지 제주시와 서귀포시를 비롯 대정읍·안덕면·성산읍·구좌읍·표선면 등 도내 전지역을 순회하며 일곱차례 공연되었다. 지역과 밀착된 공연, 현실이 반영된 공연, 공연을 준비할 때마다 떠올리는 화두이지만 늘 부족함을 느끼는 건 우리가 가야 할 길이 아직은 먼 까닭이다. 이번 공연도 우리가 가야할 지향점을 담은 공연이되, 신화와 현실, 과거와 현재의 매끄러운 연결등이 여전히 극복해야 할 과제로 남는다.
(9) 공연이 맺어준 인연들 공연은 새로운 사람을 소리왓으로 이끌어주기도 한다. 제2회 '꼬부랑나무 아래 행기물'을 함께 했던 김형섭이 회원으로 가입하여 이후 녀풀이, 사람세상 살려옵서('98), 혈육, 아기장수의 꿈, 용시풀이 등 다수를 연출한 바 있고, 96년 공연부터 스탭으로 인연을 맺은 송정희가 97년에는 회원 가입하여 지금까지 주축이 되어 활동해 오고 있다. 98년 '사람세상 살려옵서'를 전후해서는 오영순, 황준희 회원이 합류했는데, 회원들 중 최연장자여서 '왕언니'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했던 오영순 회원의 활동으로 소리왓은 두 개의 작품을 얻었다. 개인사가 작품 속에 녹아든 '혈육', 어린 시절 기억을 떠올리며 직접 대본을 쓴 2001년 '우리할망넨 영 살았수다'가 그것이다. 98년 '사람세상 살려옵서'에서 함께 공연했던 허수빈, 2000년 재공연에서 함께 했던 조옥형이 각각 합류했고, 정회원은 아니지만 98년과 2000년 '사람세상 살려옵서'를 후원회원 자격으로 참여하며 열연했던 송유정, 이정민, '우리할망넨 영 살았수다'와 '웡이야자랑아'에 참여했던 신찬엽도 잊을 수 없다. 공연을 통해서는 아니지만 최근에는 인재를 또 하나 얻었다. 판소리를 전공한 권은희가 민요와 연기에 뜻을 두고 합류한 것이다. 소리왓 활동을 하다 96년에 판소리 쪽으로 방향을 튼 현회순을 대신하는 것 같아 내심 든든하다.
●민예총 가입과 제주창작국악동요제
2000년도에 드디어 민예총 가입단체가 되었다. 그간 가입을 미뤘던 이유를 굳이 밝힌다면 보다 탄탄한 조직기반을 마련한 후 가입해서 민예총에 든든한 버팀목이 되겠다는 것이었다. 당초 목적대로 든든한 버팀목은 아니지만 흔들리지 않을 만큼의 묘목은 되지 않았나 하는 나름의 판단에서였다. 어차피 깊이 밀착되어 있었고, 더 이상 미룰 일도 아니었다. 민예총은 우리에게 등 기댈 언덕과 같은 것이었다. 이외에도 2000년도에는 '제주창작국악동요제'라는 또 하나의 굵직한 사업을 시작했다. '사단법인체도 버거운 사업을 감히…' 하는 의미에서 '저질렀다'는 표현이 더 적합할 지도 모르겠다. 민요의 채보와 보급이 일상사업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지만 그것은 엄밀하게 따지면 우리의 노래가 아니라 선대의 노래를 우리가 따라부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의 노래라고 하는 것은 우리음악의 바탕 위에 변형을 가하거나, 창작하여 이 시대 우리의 삶에 밀착된 것을 말한다. 우리 음악을 오래동안 접하다보면 자연스럽게 변형과 창작능력은 생길 것이다. 그러나 그 시간을 묵묵히 기다려 줄 만큼 주변의 조건이 녹록치 않다.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민요를 부르던 세대들은 급속히 사라져가고, 우리의 보급방식이 아날로그라면, 다른 음악의 전파방식은 디지털로 비교도 할 수 없는 속도로 파급되고 있다. 그래서 도내의 작곡가들이 우리의 동반자가 되었다. 창작능력을 갖고 있으면서 우리음악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 것, 그것은 그 시간의 차이를 압축시킬 수 있는 중요한 열쇠였다. 그중 출발점은 국악동요였다. 국악에 대한 수요가 가장 높고, 효과가 확실하며, 작곡인력이 있는 곳, 그곳이 초등학교였기 때문이다. 제주창작국악동요제는 곡의 형식과 내용면에서 제주적인 정서를 담은 노래를 중심으로 선정·발표하고, 시상함으로써 제주민요의 맥을 계승한 제주적 창작동요의 전형을 만들어 나간다는 데 취지를 두고 지금까지 총 4회를 개최했다. 4회째를 거치면서 참가곡의 수준이 향상되는 성과를 보았고, 총 39곡의 창작곡이 이 행사를 통해 배출되었다. 그리고 이 곡들은 각 회마다 1,000장의 CD로 만들어져 각급 기관과 학교현장, 어린이집, 국악관계자, 개인들에게 무료로 배포되었다. 이 행사의 가장 심각한 문제점은 재정이다. 매년 2천만원이상의 돈을 자부담으로 충당한다는게 행사를 치르는 단체의 입장에서는 큰 부담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작곡자들에게도 충분한 창작의 시간을 주고, 재정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작년 4회 개최 이후 연례행사를 격년제로 바꾸는 고육지책을 쓰기도 했다.
●특별한 기억들
97년 '꼬부랑나무 아래 행기물'공연을 마치고 나서 연기훈련의 필요성을 절감하던 시기에 극단 세이레의 제의가 있었다. 세이레의 전국연극제 제주예선참가작 '변방에 우짖는 새'에 함께하자는 것이었다. 여기에 4명의 회원이 합류해서 또 다른 배움을 얻었던 것도 기억에 남거니와 그 친분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국악실내악단 '뮤지꼬레'와의 인연도 특별하다. 제1회 국악동요제를 발표회 형태로 치르고, 2회 행사부터 경연으로 전환하게 되면서 반주단 섭외의 문제가 대두되었다. 경연에서 작곡자들이 창작한 곡을 최대한 잘 표현할 수 있게 도와주는 반주의 역할은 아무나 할 수 있는게 아니었다. 그러던 중 강호중선생이 뮤지꼬레 단원들과 함께 제주공연을 한다는 첩보를 접수하고 무작정 뮤지꼬레 섭외에 들어갔다. 슬기둥 멤버이기도 했던 강호중 선생은 의외로 털털했다. 당시로선 어려운 부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흔쾌히 동의해주셨고, 7∼8명의 단원들과 함께 해마다 내려오셨다. 국악동요제에 대한 관점도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렇게 이어진 인연이 4회까지 총 3회를 함께 하게 했고, 2003년에는 뮤지꼬레의 제주공연에 소리왓이 찬조로 함께 참여하기도 했다. 바쁜 일정임에도 늘 우리 일정을 감안해 시간을 빼주시는 뮤지꼬레와 강호중 선생께 지면으로나마 감사드린다. 97년 라디오 방송에서 민요소개 코너를 맡아 진행했던 것도 기억에 남는 일이다. KBS제주 '라디오 동서남북'이라는 프로그램이었는데 한 3분 쯤 됐을까, 민요를 직접 부르며 소개하는 코너였는데, 4월7일부터 9월30일까지 일요일을 제외하고 하루 한 곡씩 소개했으니 꽤 긴 시간이었던 셈이다. 지금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리는 일이지만 덕분에 제각기 다른 민요들을 익히느라 바쁘게 보낸 그 시기가 우리에게 자양분이 되었으니 감사한 일이다. 98년엔 제15회 전국민요경창대회에 소리나라 2팀이 참가해, 우수상을 거머쥐었다. 이때 여기에 참가했던 이원경 어린이가 지금은 제주의 소녀명창으로 판소리공부를 계속하고 있으니, 조기교육과 지속적인 국악교육의 효과가 일정정도는 입증된 셈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상근제의 정착이다. 기껏해야 한 두 명이 무보수로 사무실을 지키고 있었던 게 98년까지의 일이다. 1999년부터는 불안정하기는 하지만 유급 상근자 두 명을 둘 수 있는 여건이 되었다. 그리고 2000년에는 5명이 동시에 상근 가능한 인력과 재정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다시 1년 후 개인적인 사정으로 상근을 못하게 되는 회원이 생기면서 다시 두 명 체제로 축소가 된다. 이후의 문제는 보다 안정된 재정상태를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인력확보의 문제가 더 시급한 과제가 되었다. 사실상 유급이라고 해도 임금노동자의 최저임금 수준도 안되는 활동비로는 선뜻 이 바닥에 들어설 사람이 없는 까닭이다. 그나마 이 상근제를 처음 있게 한 것은 소리왓 후원회이다. 상근제도를 정착시키기 위한 논의를 하면서, 후원회원들이 어려운 가운데서도 조금씩 모아주는 후원금을 일상경비로 써버리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생각에 상근자 확보를 위한 기금으로 적립하기로 했다. 그 기금이 모여서 상근활동비의 일부를 책임졌으며, 그것이 기반이 되어 상근활동이 서서히 정착되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회원, 후원회원이 구분없이 모여 오름도 가고, 바다도 가고 하던 그런 시절은 사업들이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잊혀져 갔지만, 그 고마움을 결코 잊을 순 없다. 특히 소리왓 후원회원들은 소리왓의 잠재적 인력이다. 후원회로 가입해서 소리왓으로 영입되는 경우가 흔하기도 하거니와 후원회원의 자리를 줄창 지키고 있으면서 공연활동을 함께하는 후원회원들도 있다. 현재 정회원 중 문석범, 현애란 부부가 창립 당시부터 질기게도 후원회원 자리를 지키면서, 공연 때가 되면 공연하고, 강습이 주어지면 강습하며 정회원과 다름없이 활동해오다가 2002년에야 정회원으로 자리를 잡은 특이한 경우이다. 인터넷의 바다에 소리왓 카페(http://cafe.daum.net/soriwat)를 띄웠다. 소리왓 활동의 성과를 보다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기 위해서였는데, 먼 곳에 있는 사람들을 이웃으로 엮어주기도 하고, 때론 업무상 절차를 줄여주기도 하는 참 쓸모가 많은 공간이 되었다.
●맺으며
민요가 갖고 있는 힘은 무궁무진하고 찾으면 찾을수록 커지는 것이었지만 그것을 세상에 드러내야 할 우리는 너무나 소수였고, 빈손이었다. 부족한 대로 조금씩 파올리며 그 윤곽을 드러내 왔지만 아직도 갈 길은 멀고 험난하다. 있는 그대로의 무궁무진한 민요들을 캐어내 세상에 전달하는 일에서부터, 민요가 갖고 있는 열린 구조(이것이야말로 민요의 생명!)를 오늘의 고정된 악곡개념을 갖고 있는 세대들에게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 하는 문제, 또 오늘날 우리의 노동리듬, 생활리듬에 맞는 민요의 창작 등…. 10년을 넘긴 이 시점에서 우리는 또 다른 위기를 맞고 있다. 늘 새로운 회원들은 하나 둘씩 들어오지만 빠져나가는 숫자가 또 고만고만하다 보니 늘 10명 안팎의 회원들이 움직이게 된다. 그나마도 상시 가동할 수 있는 인력은 서너명 수준이다. 한정된 인력으로 그 많은 행사들을 치르다 보니 '사업에 치인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스스로를 혹사해 왔다. 정작 우리가 추구해야 할 전문성 강화는 점점 요원해지는 듯 하다. 민요의 대중화 못지 않게 예술화도 중요한 시기이다. 전망을 함께 공유하는 시간이 따라 짧아지면서 정체성에 혼란이 오기도 한다. 지나온 10년을 정리하는 것은 초심을 돌아보는 일이기도 하다. 부담스러운 작업이었지만 끝내고 나니 가슴 한 켠이 조금 가벼워지는 듯도 하다. 지금 이 시점 우리 모두에게 되돌아봄이 필요한 시기가 아닌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