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등제’란 영등할으방(영등할아버지)을 위한 제사를 말함이니 이 지방 해안 부락을 중심으로 한 민속신앙의 하나이다.
이 ‘영등할으방’은 1월 말일에 제주도 동쪽에 있는 소섬(牛島)으로 들어와서 2월1일에는 한림읍(翰林邑) 한수리(翰洙里) 영등당(燃燈堂)에 와서 제를 받고 그 후 3일간 섬을 일주하고서 그 다음에 맞는 묘일(卯日) 아니면 축일(丑日)에는 돌아간다는 것이다.
이 ‘영등할으방’에 대한 내력담은 다음과 같다.
『영등할으방 귀신이 정월 구뭄에 소섬 동어귀에 들어왔당 하룻밤 묵엉 영등 초호를날 산지로 들어옵니다.
이 할으방이 지주(제주)에 들어오민 지주 전체 해각에 사는 사름들은 영등이 들어왔저 허곡, 객곳디 물천을 잡지 아니헙니다.
영등할으방이 들어온 때는 개곳디 강 보멀, 구젱기 같은 물천을 잡앙 보민 속이 텅텅 비영 요물이 엇입니다. 이건 영등할으방이 다 까먹어분 때문입니다. 경허곡 영등달 초호를날부터 날씨가 청명허민 의복이 엇인 영등이 왔젱 헙니다.
이 영등이 올 고리에 집에 무신 일을 냉기젱 허나 먹씰 일이라도 돌아오민 영등할으방 적시로 메 한 기를 굴루이 거려 놔사 탈이 엇입니다. 경허곡 이 영등할으방이 나가기 전이 서답을 허나 지붕을 이나 용시에 비료를 허나도 못헙니다.
이 때에 서답을 허나 지붕을 일민 버렝이(벌레)가 일곡 곡석엔 숭년이 집니다.』
그런데 여기 이 영등신의 본풀이 신화를 보면 다음과 같다.
『옛날 성은 황씨 이름은 영등이라는 민간 사름도 아니고 저싱 사름도 아니고 요왕 사름도 아닌 대왕이 무휴에서 솟아나 요왕황저일 드러가(동정국 애기씨 허고 서정국 부인의 서녀와 서이) 나발이 펑개에 노렴을 헐때에 한수릿 괴깃배가 풍파를 만나서 외눈배기 땅데레 불려감시니, 영등대왕이 나산 ‘저 사름을 구제해서 살리라’허여 큰 왕석 우이 가 아자시니 배가 그 안으로 들어갔다.
영등대왕이 그 사름들을 전부 왕석 쏘곱데레 곱쪄부니 외눈배기 놈들이 물어 먹을라고 개를 데리고 들어오면서 “곧 이제 존 반찬이 왔는디 어디 갔느냐?“고 허자 영등대왕은 ”나도 그런 걸 봉글랴고 나아잤다“허니 외눈배기놈들은 다 나가 부렀다.
영등대왕은 배를 내여놓아 보내면서
“이 배를 탕 가면서 가남보살 가남보살을 허멍 가라”고 시켰다.
보재기들은 배를 타고서 가남보살 가남보살을 불르멍 오는디 거저 한곳이 당허여 가니까 가남보살을 아니 부른덜 이제사 관계없다 해서 그만 가남보살을 아니 부르니 홀연 강풍이 또시 일어가지고 또로 외눈배기 땅데레 들어가니 영등대왕은 마츰 그 자리에 나아자 이서, 보재기들은 “살려줍서”고 빌었다.
영등대왕은 “왜, 그때에 내가 뭐라고 허더냐?”허면서 다시 가남보살 가남보살을 부르멍 가라고 하였다.
경허고 또 “한곳딜 가더라도 가남보살을 부르멍 댕이곡 영등달 초호를날랑 날 생각을 하여라”허니 그때에 보재기들은 가남보살을 부르멍 괴양 한수리꼬지 돌아왔다.
글지후제 외눈배기놈들은 영등대왕신디 가 “당신 덕분에 존 반찬을 못 먹었다”고 해서 영등대왕을 장도칼로 삼 도막에 그차 죽여 바당데레 내껴부니 머릿빡은 소섬으로 오르고, 발치거린 한수리 빗꿀물로 오르고 한존동은 청산으로 오르니, 민간 백성들은 바당에 수중 액을 막아준 영등대왕의 그 은혜를 생각허여 소섬에서 정월 그믐날 제를 치고, 초호를날 비꿀물에 오고, 청산은 초닷쇳날 영등제를 잘 받아 먹으민 고양데레 가곡 일년에 한번 돌아보는 조상이우다.
이 영등대왕은 소섬에도 처가 있고, 한수리도 처가 있고, 청산도 처가 있어 각시는 삼첩입니다.』
이러한 무속신화인 영등대왕의 본풀이에 근거하여 제주도민들은 영등제를 지내고 그 신을 즐겁게 해드리고 있다.
그래서 이 영등대왕의 제의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영등할으방은 정월 구믐날 소섬에 들어오곡 영등달 초호를날 서모관 한림 영등본향으로 오게 됩니다.
그 다음에 사흘간 도 일주를 허고, 묘일과 축일 때는 나가는 조상이우다.
이 조상이 나갈 때에 묘일이나 축일이 당허지 아니허민 떠나는 배를 놓지 못허곡, 더 오래 영헌 날이 당헐 때꼬지 한 일주일꼬지도 살다가 좋은 날이 당허여사 나가게 됩니다.
배는 낭으로 맨들곡 그 속에 하근 지물을 몬 걷엉 싣겅근에 사신요왕으로 떠나갑니다.
배는 널판자로 한 자 지러기나 되게 짱 큰 옷톰 생성도 싣겅 내보내게 되는디, 활쏘듯 나돕니다.
이 영등할으방이 들어온 때는 서답이나 용시를 못허게 됩니다.
서답을 허민 마쿠대기 버랭이가 괴고, 용시에는 숭년이 집니다.
이 때 물색옷을 몬직으민 눈이 아프곡 하근디 숭이 합니다.
영등제를 지낼 때 지물로는 떡 한 정반, 밥 한 사발, 지주 한 병, 실과 한 정반, 생선 한 개, 경허곡 소지(소지 원정의 뜻) 등이며, 들어올 때엔 본향엘 가나 집이서 굿을 치나 허여도 영등 적시로 또로 지물광 메를 허영 설상허여사 헙니다.』
위에서 영등제의 시기, 내력, 제물, 금기에 이르기까지 소상히 밝혀주고 있듯이 이 영등신은 일년에 한 번 제주도민의 생활을 보살펴 주는 조상으로 생각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한편 ‘동국여지승람’ 및 ‘동국세시기’ 등에는 ‘영등굿’, ‘말뛰기 놀음(馬躍戱)이라는 이름으로 다음과 같이 기록되고 있음을 찾아볼 수 있다,
『이월 초하룻날 제주도의 귀덕, 김녕, 애월지방에서는 열두 개의 나무 장대(木竿)를 세우고 신을 맞아서 제신을 즐겁게 하기를, 긴 나무 장대 끝에다 색채 비단으로 말머리 같이 꾸며가지고 말뛰기 놀음을 한다.
이 때에 밤에는 등불을 매달아 켜므로 이 제를 영등굿(燃燈祭)이라고 하며 이 제는 초하루에 시작하여 보름날에 마치는 것이다.』
(濟州俗二月朔日 歸德金寧等地 立木竿十二迎神祭之 涯月居人得槎型如馬頭 者飾以彩免帛作躍馬戱以娛神 至望日乃止謂之燃燈)라고 기록하고 있다.
지금은 볼 수 없는 옛 풍속이 되고야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