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잘 읽었습니다. 님이 주장하시는 바가 경주의 발전을 위해서 필요한 주장이라 느껴졌습니다. 앞의 이야기도 기회가 되신다면 올려주시지요 꼭 읽어보고 싶습니다.
--------------------- [원본 메세지] ---------------------
몇년전 경주여행을 하고 답사후기(?)를 써 본적이 있습니다.
글세...
요즘의 경주가 얼마나 변했는지 모르고, 또 제가 보지 못했던 것들이 충분히 많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카페의 주제에 맞지 않을까 싶어 저의 생각을 보냅니다.
글의 분량이 생각보다 많고 사진도 많아 마지막 부분만 첨부합니다.
답사로서의 신라와 경주에 대한 저의 생각입니다...
" ..............
그리고 마지막 <경주>에 대해서 한마디 하고자 한다.
갔다와서 책을 보면 경주는 꽤 자부심이 있다고 보여진다.
특히 가장 동쪽의 도시, 한반도에 해가 처음 비추는 곳이란 자부심이 강하다. 그런 표현을 많이 보았다. 그리고 경주TV에서 신라민속촌 건설계획을 잠깐 들었지만, 내생각에 경주와 신라는 얼른 연결이 되지 않는다.
한마디로 <新羅의 遺蹟들은 생각나지만 慶州의 雰圍氣는 모르겠다>는게 지금의 마음이다.
낱낱의 유적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지도 못하고 - 관광지의 상업성에서도, 문화적 답사의 유기적 관계에서도 - 그 '총합미'를 간파해내기도 쉬운 일은 아니다는 생각이 든다.
경주에서의 말처럼 하나의 국가가 1,000년을 수도를 바꾸지 않고 한곳에서 서막을 맞이 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역사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경주란 지역'의 탁월함으로 주장하여도 달리 항변할 근거가 없다.
그러나 지역을 넘어선 종교적, 정치(경제)적, 군사(사회)적인 많은 이유들이 있을 것이고, 그것은 분명 문화적 유산과 유물들로 오늘에 이르렀을 것이다.
때문에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십대 문화유적지로 지정되었고, 95년도에는 불국사와 석굴암이 세계문화유적으로 지정된 충분한 근거들을 가지고 있다고 인정된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봐도 부족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차라리 화려한 경주란 주제로 모든 것의 화려함을 적극적으로 부각시키든지, 신라의 서울이었다면 서울로서의 위용과 권위를 갖추든지, 내 생각에는 경주를 관통하는 <核心主題>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단지 하나, 경주를 살아있는 불국토로 만들기위해 그 많은 절과 탑과 불상들을 만들었다는 것만 남아있고, 우리는 수고스럽게도 여기저기를 다니며 아는만큼만 느껴야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저기를 돌아다녀도 여전히 '이곳이 불국토'라는 감동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 문제다.
더우기 신라의 문화에 대해 나는 감을 잡고 있지 않다.
고구려의 진취적인 기상, 백제의 온유한 숨결은 있는데 신라의 무엇은 얼른 떠오르지 않는다.
신라의 그 무엇이, 경주의 그 무엇으로 재현되어야 하는데 <그 實體가 무엇이어야 하는가?>가 먼저 고민되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慶州遺蹟의 總合美가 新羅의 總體性으로 발현되어야 遺蹟들은 生命力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주제와 생명력이 설득력을 가질 때 경주시내의 지금 지어지는 건축도, 지금 만들어지는 도로도, 지금 구상되는 도시계획도, 식당에서 나오는 반찬하나에도 우리는 통일성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했다고 한다.
그리고 '통일이란 개념'에는 흡입력이 있고, 포용력이 있고, 그리고 진보를 향한 강한 추진력을 담고있다.
<경주는 이 신라의 낱낱의 유적들을 統一해내야 한다>. 신라의 수도 옛 경주를 완전히 복원해내든지 신라민속촌을 규모있게 만들든지 무엇인가 대책을 만들때이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 시대의 우리들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만큼, 이익이 되는만큼만 투자하겠지만 일단은 방향을 올바로 잡고 시작할 일이다.
일제때처럼, 구정권때 같이 석굴사원에 콘크리트를 덮어놓고, 목조전실로 가둬버리는 그런 우매한 일을 하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언젠가는 다시 뜯어야할 석굴사원을 생각하면서, 경주시내의 문화재정책은 다시 뜯기지 않고, 대신에 후대에서 <조금 조금씩 더해갈 수> 있는 그런 방향이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화강암의 나라, 돌을 무우 다루듯 자유자재로 다루었다는 신라인들, 한국인의 끈기와 오랜 저력을 담고 있는 수많은 돌에 관계된 유적들을 생각하면서 일단은 소재에서 <화강암 = 돌>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불상도 돌이고, 탑도 돌이고, 안압지도 돌이고, 첨성대도 돌이고, 포석정도 돌문화이고, 하다못해 왕릉도 태반이 돌로 채워진 유적들 아닌가 !
그리고 시간의 흐름이 주는 연속성을 부각시켜, 유적답사의 <연대별 코스 안내>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여기에 당시의 사회적 문화적 종교적 흐름을 보다 풍부하게 해석할 수 있는 친절한 자료와 안내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것은 사진 몇장의 책자와 유적앞의 철판에 새겨진 글씨가 아니라, 영상과 모형등을 동원한 입체적인 안내기기가 필요하다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것이다.
계림과 오릉에서부터 포석정과 안압지까지 우리가 유적을 답사하는 동안 우리는 신라의 흥망을 알게될 것이고, 삼국시대의 우리역사를 충분히 접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해본다.
역사공부가 유적과 함께 문명과 함께 한다면 얼마나 재미있고 풍부할 수 있을까 ?
시작과 근본을 전제하지 않는다면 종교와 철학은 우리의 감상과 걷돌게 될것이다.
즉 종교와 철학은 그만큼 쉬우면서도 해석의 잣대와 도구없이는 한낱 부속품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러나 여기에 <과학성과 전설>이 들어간다면 거기에는 생명을 가질 수 있다.
종교와 철학의 보편연속성은 과학과 전설이라는 구체적 분석으로 인해 우리의 감각으로 인지된다고 생각된다.
이미 분석되고 연구되어온 석굴사원외에도 많은 유적들에 대한 과학적 분석과 설화에 대한 끈기있는 관심은 우리의 유물들과 유적들을 보다 진지하고 깊이있게 연구하게 되는 충분한 계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여행이 그렇듯이 우리는 항상 아름다움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의미있는 시간과 가치있는 공간을 만들려면 항상 아름다운 경험을 필요로 한다.
문화미의 풍부함과 자연미의 감동에 '예술적 깊이'를 알 수 있게 된다면, 그 지성은 참으로 너그럽고 복된 풍요로운 삶을 것이라고 믿어본다.
경주에는 소중한 자원들이 참 많다는 생각을 해본다.
아울러 '나도 본 기억이있다'는 말보다 '나는 이렇게 느꼈는데 너는 어떻게 생각했느냐'하는 대화가 가능할 수 있는 진지한 설명들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본다.
세계적 유물이면 세계적 유물들과 비교하여, 동양적이면 동양적인 면에서, 한국적이면 한국적인 면에서, 지방의 지역문화재면 또 그런면에서 등급이라면 등급이라도 나누어서 다양한 비교와 함께 절대적 기준들을 제시한다면 그 유물을 본 사람들은 얼마나 다양한 경험을 가질 수 있을까 ?
시스틴 성당의 천지창조란 천장벽화가 무엇때문에 위대한지, 일본에 있는 백제반가사유상이 지구가 멸망할때 제일 먼저 피신시켜야할 이유가 무엇인지, 석굴암의 본존불이 왜 지구에 살고있는 소위 인류의 가장 위대한 유물중 하나인지 우리는 알아야 하지 않을까 ? 그래도 세계의 3대 유물중 두개(주관적인 의견이지만)는 우리민족의 손으로 만든것 아닌가 ?!
우리의 예술적 깊이를 보다 심화시켜도 충분한 싹을 우리는 가지고 있는 않는가 ?!
그리고 <관광의 방법>도 많이 개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동호회 같은 모임들이 보다 활성화되고 여가를 이용한 학습도 다양해져야 하지만, 경주같은 규모의 유적과 유물들이 있다면 자체적인 관광버스라도 만들어서 안내인을 두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개개인의 노력과 수준에 여행을 맡길 것이 아니라, 공공의 성격을 가지고 보다 대중적으로 답사를 강제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야되지 않나 생각해 본다.
신라의 문화를 평가하는 유홍준씨의 표현을 빌린다면, '하나 하나의 종교적 조형물에 상반된 미감을 결합하여 이룩해낸 복합미'를 신라인은 가졌다고 주장하는 듯 하다.
내식으로 말한다면 '변증법적 대립과 통일이 논리적 역동성으로 운동과 창조로 발현되었다'는 말이다.
상승과 안정, 장중함과 맑음, 정중함과 유려함등 그 아름다움이 주는 감동은 참 깊은 맛이다.
나는 소불선생이 말했던 경주의 세개의 유물중 진평왕릉만 보았을뿐, 장항사 절터는 보지도 못했고, 에밀레종소리는 테이프로만 들었다.
그렇지만 '고귀한 단순과 조용한 위대'라는 말과 '명랑성과 생동성의 통일' 그리고 '감성과 지성이 양식적인 것에서 조화되어 있다'는 표현의 맛을 조금은 알것같았다.
그리고 혼이 담긴 인공미의 천년을 뛰어넘은 언어를 조금 들은 것 같다. 그것은 내게 즐거움이요 기쁨이다.
그러나 경주에 쌓여 있다는 신라의 천년 무게도 나는 느끼지 못했고, 신라인들의 활기찬 모습을 경주의 어디에서도 읽어내지 못했다.
그것이 설사 '나무'만 바라보고온 나의 지적, 경험적, 시간적인 한계일지는 모르겠지만, '숲'을 안내하지 못하는 공공의 그리고 사회의 책임방기를 나는 절실하게 느끼고, 또 변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감동은 보다 깊고 알차게 익을것 같다. "
- 답사후기 이후 경주여행을 다시했고, 다음에 장항사 절터는 가봤고, 그때는 없었지만 지금은 이런 인터넷 동호회도 많이 생겼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