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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1. 02. 27(일)
■ 조선국 영의정 문충공 사암(思菴) 박공(朴公) 신도비명 병서(幷序)
본조에서 여러 차례의 사화를 겪었으나 을사년에 이르러 극도에 달하였다. 세도(世道)가 크게 변하고 사문(斯文)이 땅에 떨어져 성현의 글을 화근으로 지적하고 선비가 일삼는 것은 시문(時文 과거(科擧)에 관한 글)뿐이어서 국세가 매우 위태로워졌다.
그러나 하늘이 우리 동방을 도와 사류(士類)가 대거 배출되어 명종ㆍ선조 때에 정치와 교화가 크게 밝아짐으로써 선비된 이가 공맹(孔孟)ㆍ정주(程朱)를 근본으로 삼아 인륜이 위에서 밝고 서민(庶民)이 아래서 새로워 삼대(三代 하(夏)ㆍ은(殷)ㆍ주(周))의 융성한 치도에 가까워졌다.
이때에 청의(淸議)를 주창하고 사류를 인진(引進)하여 우뚝이 영수(領袖)가 된 이는, 사암 선생 박공(朴公) 휘 순(淳), 자 화숙(和叔)이 바로 그분이다. 그런데 세운(世運)이 험악하고 시론이 뒤틀려, 공이 그만 낭패 분주하여 덕업(德業)이 중도에서 막혔으므로 지금까지도 식자들이 애석하게 여긴다.
공은 본관이 충주(忠州)이다. 박씨의 가보(家譜)는 고려 때 부정(副正) 영(英)에서부터 시작되었고, 그 뒤 8세손 소(蘇)가 처음 본조에 벼슬하여 은산 군수(殷山郡守)가 되었다. 아들 지흥(智興)은 진사과(進士科)에 합격하였고, 아들 우(祐)는 생원과(生員科)에 장원, 명경과(明經科)에 합격하여 벼슬은 우윤(右尹)에 이르고, 호는 육봉(六峯)이다. 그 형 상(祥)은 세칭 눌재 선생(訥齋先生)으로 기묘사화 때의 명현이다.
육봉이 당악 김씨(棠岳金氏)를 맞이하여 가정(嘉靖 명 세종(明世宗)) 계미년(1523, 중종 18)에 공을 낳았는데, 뛰어난 자품에 기색(氣色)이 맑고 평이(平易)하여 마치 정금 양옥(精金良玉)과 같았고, 겨우 8세에 입을 열어 사물(事物)을 읊으면 으레 온 좌석을 놀라게 하였으므로 이웃에 사는 교사가 말하기를,
“내가 어찌 감히 너의 스승 노릇을 하겠느냐.”
하였고, 육봉도 평소 문장으로 자부해 왔으나 공의 글을 보고는 말하기를,
“마땅히 이 늙은 무릎을 꿇어야 되겠다.”
하였다.
18세에 진사과에 합격, 서 선생 경덕(徐先生敬德)에게 수학하였고, 정미년(1547, 명종 2)에 육봉의 상을 만나 초막(草幕)을 짓고 시묘(侍墓), 너무 애통해하다가 생명을 잃을 뻔하였고, 소상이 지난 뒤에도 죽(粥)을 먹었다. 상을 마친 뒤에는 산으로 들어가 글을 읽다가 1년이 넘어 돌아왔고, 치재(恥齋) 홍인우(洪仁祐)를 찾아가 횡거(橫渠 장재(張載))의 태화(太和 《정몽(正蒙)》의 편명(篇名)) 등의 글을 강론하자, 치재가 감탄하기를,
“학문을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화숙(和叔)뿐이다.”
하였다.
계축년(1553, 명종 8)에 명종이 친림(親臨)하여 경서로 선비들을 시험하였는데, 공의 행동거지가 점잖고 논설이 정확 투철하여 온 시정(試庭) 사람들의 눈길을 모으므로, 드디어 수석 급제를 내렸다. 여러 관직을 역임, 이조 좌랑ㆍ홍문관의 수찬(修撰)ㆍ교리(校理)와 사가호당(賜暇湖堂)이 되었는데, 하루는 상이 호당의 학사들을 불러 경의(經義)를 강론시키고 제술(製述)을 명한 다음, 손수 청색(靑色) 술잔에 술을 가득 따라 권하고 또 소식(蘇軾)의 금련촉(金蓮燭)의 고사(故事)를 모방하여 그들을 보냈으며, 그 이튿날 대신 상진(尙震) 등이 그들을 거느리고 전폐(殿陛)에 나아가 진사(陳謝)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이를 당대의 성사(盛事)로 여겼다.
검상(檢詳)ㆍ사인(舍人)이 되었고, 어명으로 호서(湖西)에 나가 재변을 조사하고 돌아와서 홍문관 응교로 승진되었다. 그때 홍문관에서 임백령(林百齡)의 시호(諡號)를 의논하여 올리게 되었다. 원래 임백령은 을사사화 때 윤원형(尹元衡)ㆍ정순붕(鄭順朋)ㆍ허자(許磁)ㆍ이기(李芑) 등과 어울려 간악하고 음흉한 짓을 멋대로 부려 규암(圭菴) 송 문충(宋文忠 문충은 송인수(宋麟壽) 이하 제현을 남김없이 희생시키고 고묘 녹훈(告廟錄勳) 되었으며, 윤원형은 왕실의 가까운 외척으로 마침 영상이 되어 국권을 잡았으므로, 간당(姦黨)들이 그를 배경으로 삼고 바른 선비들을 노리고 있는 터이라, 임백령에게 만약 좋은 시호가 주어지지 않으면 큰 화가 다시 일어나게 되었다.
이에 홍문관 관원들이 서로 눈치만 살피며 우물쭈물하고 있었는데, 공이 홀로 분연(奮然)히 나서서, 공소(恭昭)로 의정(議定)하였으니, 이는 곤월(袞鉞)을 보인 것이다. 윤원형이 흐느끼며 말하기를,
“임공(林公)은 나라의 원훈(元勳)으로, 시호에 충(忠) 자가 없으니, 그들의 마음이 너무 흉칙하다.”
하고는 모두 국문하여 죄로 다스리려 하자, 온 사류가 모두 두려워하였으나 공은 태연하였고, 상이 공에게 중형을 가하려 하였으나 구원하는 이가 있어 파출만 명하였다.
처음에 공이 의금부에 자진 출두해서 상의 처분을 기다리기 위하여, 방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태연히 나왔으므로, 집안사람들은 일이 생긴 줄을 알지 못하였고, 다시 집으로 돌아올 적에는 어린 딸이 나와서 맞이하므로 공이 그 손을 잡고 웃으면서 말하기를,
“하마터면 너를 다시 만나지 못할 뻔했다.”
하였다.
그 이튿날 남쪽으로 내려갔다가 임술년(1562, 명종 17)에 한산 군수(韓山郡守)로 제수되었는데, 1년 만에 선정을 베풀어 고을 백성들이 부모처럼 친애하였고, 공무가 끝나면 으레 정사(亭舍)에 나가 독서로 일과를 삼으므로 인근 고을 선비들이 소문을 듣고 모여들었다.
계해년(1563, 명종 18)에 성균관 사성(成均館司成)으로 들어와서 사헌부 집의와 홍문관 직제학을 역임, 차자(箚子)를 올려 시사(時事)를 논하였고, 이어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로 승진되었는데, 이후로는 승지가 결원되면 공의 이름이 그 추천 명단에 오르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이조 참의에서 사간원 대사간으로 전임되었다가 체직되었고, 다시 대사간에 제수되어서는 요승(妖僧) 보우(普雨)의 죄를 논하고 처벌할 것을 주청하는 한편, 윤원형의 파출까지 논하였다. 이는 을사사화 이후로 윤원형이 임백령ㆍ허자 등을 심복으로 삼아 사류를 제거하고 백성에게 해독을 끼쳐 국세가 불안, 조석을 유지하기 어렵게 된 때문이다.
공이 개탄하기를,
“양기(梁冀)를 탄핵하고 두헌(竇憲 동한(東漢) 때의 외척(外戚)을 베어서 세도(世道)를 만회하는 것이 나의 임무이다.”
하고 대사헌 이탁(李鐸)을 찾아가 이 일을 의논하자, 이공도 처음에는 난색을 보이다가 공의 차분한 설명을 듣고 비로소 승락하므로, 곧장 집으로 돌아와 조복(朝服)도 벗지 않은 채 촛불을 켜놓고 계사(啓辭)를 작성, 날 새기를 기다려 입궐하여 계사를 올렸다.
그러나 그때 문정대비(文定大妃)가 승하한 지 겨우 5개월이었으므로 상이 차마 이를 윤허하지 못하다가 공의 논쟁이 더욱 강경해지자, 마침내 좌의정 심통원(沈通源)까지 파출시키므로, 백성들은 길에서 가무(歌舞)하고 중외(中外)의 선비들은 선(善)으로 향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이에 육행(六行)을 지닌 선비를 선임하여 사도(仕道)를 깨끗이 하는가 하면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을 신원(伸冤)하여 그 관작을 회복시켜 주었고, 나라를 좀먹거나 백성을 해치는 일을 일체 혁파하였다. 한편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 이하 여러 현인이 다 세도(世道)를 바로잡는 것으로 자신의 소임을 삼고 선후로 진출하여 원우(元祐) 시대와 같은 성세를 기대하게 되었다.
이번의 혁신을 주창한 초기에는 문순공 역시 의문을 품고 위험하게 여겼으니, 공이 아니었으면 실현되기 어려운 일이었다. 사헌부 대사헌으로 특배(特拜)되었다. 이후부터 체직과 배관(拜官)이 거듭되었다.
병인년(1566, 명종 21)에 부제학(副提學)으로 문순공에게 서찰을 보내어, 다시 조정에 나오기를 권유하였으며, 융경(隆慶 명 목종(明穆宗) 1년 정묘년(1567, 명종 22)에 명종이 승하하고 이듬해 무진년(1568, 선조 1)에 행인(行人 사신(使臣) 구희직(歐希稷)이 황제의 명으로 와서 대행왕(大行王 명종)의 시호를 전하므로 공이 원접사(遠接使)로 나가 영접하였는데, 조사(詔使)가 공의 절도에 맞는 예의를 보고는 늠연(凜然)히 존경심을 가졌고, 함께 시를 수창하면서 감탄하기를,
“송(宋)의 인격(人格)에 당(唐)의 시격(詩格)이다.”
하였다.
구희직이 돌아간 뒤 그해 3월에 황제가 또 검토(檢討) 성헌(成憲)과 급사(給事) 왕새(王璽)를 보내 황태자 책립조서(皇太子冊立詔書)를 전달하므로 공이 막 양관(兩館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에 제수되어 있다가 다시 접반사(接伴使)를 맡았는데, 그들로부터 이전과 같은 예우를 받았다.
성공(成公)이 공을 위하여 평원정 십절(平遠亭十絶)을 써 주었는데, 평원정은 나주(羅州)에 있다. 공이 이 임무를 마치고 나서 대제학의 자리를 문순공에게 옮겨 주기를 주청하였는데, 그 계사(啓辭)에 이르기를,
“제학이 양관(兩館)의 직책이기는 하나 결국 대제학과 같은 중직(重職)은 아닙니다.
지금 이황(李滉)은 고령(高齡)의 석유(碩儒)로 제학이 되고 신은 그 위에 있으니, 이는 너무 전도(顚倒)된 일입니다.” 하므로 상이 대신과 의논하여 그대로 따랐다. 그러나 문순공이 다시 사퇴하여 공에게 넘겼다. 공은 도학에는 《심경(心經)》ㆍ《근사록(近思錄)》을 근본으로 삼고 문장에는 한유(韓愈)ㆍ사마천(司馬遷)ㆍ이백(李白)ㆍ두보(杜甫)를 주로 하여 선비들의 습속이 크게 달라졌다.
기사년(1569, 선조 2) 4월에 주강(晝講)에 나아가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과 함께 문소전(文昭殿) 부례(祔禮)에 대해 논하였다.
원래 이기(李芑) 등이 문정대비의 뜻을 받들어, 인종(仁宗)은 재위(在位) 기간이 1년도 되지 않은 임금이라 하여 문소전에 합사(合祀)하지 않고 연은전(延恩殿)에 합사하므로, 온 나라 사람들이 슬퍼하고 분개해하였다.
이때 공이 이를 통절(痛切)하게 논하였고 문순공도 전옥(殿屋)을 변통할 제도를 논하였으나 모두 대신에게 저지되었다.
이해 여름에 판서 김개(金鎧)가 몰래 기회를 보아 공과 제현들을 모함하기 위하여 말하기를,
“오늘날 선비들의 습속은 이미 기묘사화 때처럼 되어 버렸다.”
고 하였으니, 이는 남곤(南袞)ㆍ심정(沈貞)의 남은 수법을 그대로 따르려는 속셈인 것이다.
송강(松江) 정철(鄭澈)이 지평(持平)으로 입시(入侍)하였다가 그의 간특한 형상을 면박하자, 그가 흐느껴 울면서 물러갔다.
문순공이 어떤 사람에게 보낸 서찰에 이르기를,
“요즈음 한 차례의 소동은, 겉으로는 다른 사람을 공격하였으나 그 의도는 사실 나에게 있었다.”
하자, 삼사(三司)가 함께 김개의 관작 삭탈할 것을 논하였다.
이때 공이 선류(善流)의 종주(宗主)로 이조 판서에 제수되었으나 굳이 사퇴하고 나오지 않으므로,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가 권유하기를,
“사류(士類)를 모아 상의 마음을 계도(啓導)해 드려야 하고, 소인들로 하여금 이를 무너뜨리게 하여서는 안 됩니다.”
하였고 상도 공의 사퇴를 윤허하지 않으므로 드디어 출사하였다.
이듬해 정월에 본직을 사퇴하고 예조 판서로 체임되었으며, 신미년(1571, 선조 4)에 무주(茂朱) 적상산성(赤裳山城)에 실록(實錄)을 봉안하였고, 다시 이조 판서에서 찬성(贊成)으로 승진되었다. 임신년(1572, 선조 5)에 우의정에 제수, 연경(燕京)에 들어가 신종황제(神宗皇帝)의 등극을 축하하였다.
고사에, 외국의 진주사(進奏使)는 으레 협문(夾門)을 이용하기로 되어 있는데, 공이, 표문(表文)은 정문(正門)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논의하여, 그것이 이내 정식(定式)으로 되어 버렸고, 이 사행(使行)을 통해 평소 공의 명성을 들은 중국 사람들이 연도(沿道)에 나와서 시(詩)를 청하는 자가 매우 많았으며, 본국으로 돌아올 적에는 그곳 주사(主事)가 교역(交易)하는 일에 대하여 묻자, 공이 대답하기를,
“우리 임금은 재물을 좋아하신 적이 없소.”
하였다.
계유년(1573, 선조 6)에 본국으로 돌아와서 왕수인(王守仁)의 그릇된 학설을 적극 논하였고, 좌의정에 승진되어서는 과거에 급제한 뒤 벼슬길에 나오지 못한 사람들을 대헌(臺憲 사헌부)에 통사(通仕)시키기를 주청하였다.
갑술년(1574, 선조 7)에 본직을 사퇴하여 체직되자, 옥당(玉堂)에서 상에게 공의 유임 권유를 주청하기를,
“심복(心腹)을 부탁할 만한 충현(忠賢)이 없게 되었다.”
하였다.
이해 가을에 다시 좌의정에 제수되었고, 을해년(1575, 선조 8)에 의성대비(懿聖大妃)의 상을 당하자, 두 차례나 헌의하여 3년 동안 백의관(白衣冠)으로 지낼 것을 주청하였고, 그 뒤 인순대비(仁順大妃)의 상에도 그렇게 하였는데, 당시의 속론이 공의 주장을 꺾을 수는 없었으나 못마땅하게 여기는 자가 많았다.
이해 가을에 인피(引避)하여 물러났다가 다시 나왔는데, 일찍이 경연(經筵)에서 문성공 이이의 훌륭한 학문ㆍ도덕을 극론하였고, 겨울에 본직을 사퇴하여 체직되었다. 기묘년(1579, 선조 12)에 영의정에 제수되어 건백(建白)한 바가 많았다.
즉, 노산군(魯山君)의 묘(墓)를 봉식(封植)하자는 일과, 성 문간(成文簡 성혼(成渾))의 진술한 것을 채택하고 그가 물러가는 것을 허락하지 말도록 하자는 일과, 김효원(金孝元)을 수용(收用)하여 동서(東西)의 당론을 씻어 버리도록 하자는 일과, 이 문성(李文成)을 주청사(奏請使)로 삼지 말자는 일과, 경제사(經濟司)를 설치하여 공안(貢案 공물(貢物)에 대해 기록한 문부)을 개정하자는 여러 가지 일로, 혹은 시행되기도 하였고 혹은 물정에 어둡다 하여 쓰여지지 않기도 하였는데,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은 의견의 차이가 거의 없었고 김공 우옹(金公宇顒)은 일마다 강력히 찬동하였다.
임오년(1582, 선조15)에 서교(西郊)에 나가서 조사(詔使) 황홍헌(黃洪憲)ㆍ왕경민(王敬民)을 영접하였다. 계미년(1583, 선조16)에 이호(尼胡 탕개(湯介))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앞서 공이 북쪽 지방을 염려하여 계책을 세운 바 있었고 또 인재를 구별해 놓았었는데, 이때에 와서 문성공(文成公)이 본병(本兵 병조 판서)이 되어 안으로는 군사(軍事)의 모책을 마련하고 밖으로는 병마(兵馬)를 조달(調達)하여 모든 처사에 실책이 없으므로 상이 이를 의지하여 적도(賊徒)를 토벌하려 하였다.
하루는 문성공이 부름을 받고 입궐하였다가 갑자기 현기증을 일으켜 오랜 시간을 끌게 되자, 상이 어의(御醫)를 보내 병을 보게 하고 또 물러가서 조리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대간(臺諫)의 탄핵이 이 틈을 타서 일어나자, 문성공이 소(疏)를 올리고 대죄(待罪)하였다.
공이 동료 재상들과 함께 상에게, 문성공의 출사(出仕) 돈유(敦諭)를 주청하였는데, 그 뒤에 대간의 탄핵이 다시 일어나,
“나랏일을 멋대로 다루고 임금을 무시하니, 장차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인가.”
하였다.
한편, 이호(尼胡)가 여러 진보(鎭堡)를 연달아 함락시켜 정세가 몹시 위급하게 되었는데, 대간의 계사(啓辭)가 그치지 않고 기어이 문성공을 제거하려 하므로, 공이 본병(本兵)을 잠시 체직시키기를 주청하자, 상이 그대로 따라 공에게 병판(兵判)을 겸임시켰다. 이때 문간공(文簡公)이 소를 올려, 시배(時輩)들의 붕당을 만들어 참소하는 정상을 극론하자, 공이 청대(請對)하여 충(忠)과 사(邪)를 분별하여 그 시비가 매우 뚜렷하였다.
이에 삼사(三司)에서 공의 열 가지 죄를 논하고 양현(兩賢 이이와 성혼)을 아울러 탄핵하므로 공이 강사(江舍)에 돌아오자, 조신과 유생들이 함께 글을 올려 신변(伸辨)한 이가 수백 명에 이르렀고, 우상(右相) 정지연(鄭芝衍)이 공을 구원하는 데 전력하므로 상이 친히 교서를 지어, 주론자(主論者)를 특별히 유배시키고 나머지 도당은 모두 외직(外職)에 전보시키면서 이르기를,
“나는 주자(朱子 주희(朱熹))를 본받기 위하여 이(珥)ㆍ혼(渾)의 당(黨)을 불러들여야겠다.”
하고는, 공에게 다시 들어오기를 간곡하게 권유하므로, 공이 할 수 없이 명에 응하였다.
갑신년(1584, 선조 17)에 문성공이 별세하자, 공이 고단해진 처지로, 함께 협력할 사람이 없는 것을 자나 깨나 우탄(憂歎)할 뿐이었고, 을유년(1585, 선조 18)에 사체(辭遞)되어 강사(江舍)로 돌아왔다. 이해 여름에 노상(盧相 노수신(盧守愼))의 직언으로 찬축(竄逐)된 사람들이 특사되었고, 가을에는 이발(李潑) 등이 공과 제현(諸賢)을 무고 훼방하여 그 이름을 당적(黨籍)에 써 넣었다.
병술년(1586, 선조 19) 8월에 공이 휴가를 얻어 영평(永平)으로 내려가게 되었는데, 상이 중사(中使)를 동문(東門) 밖까지 보내어 술을 내려 전송하였다. 영평에는 백운산(白雲山)이 있어 시내와 못이 절승하였으므로, 공이 이내 집을 짓고 살았는데, 깨끗이 진세(塵世)에서 벗어나 시사를 일체 언급하지 않고 매일 촌민(村民) 야로(野老)와 함께 자리를 다투며 한가로이 세월을 보냈으며, 배우러 오는 이가 있으면 서로 토론하여 지칠 줄을 몰랐다.
거기에는 유명한 배견와(拜鵑窩)ㆍ이양정(二養亭)ㆍ토운상(吐雲床)이 있고 백운계(白雲溪)ㆍ금수담(金水潭)ㆍ창옥병(蒼玉屛)이 둘러 있는데, 흥이 날 적에는 지팡이와 나막신으로 소요하였고, 혹은 풍악(楓嶽 금강산) 등 여러 산을 유람하였다.
상이 공에게, 영원히 떠나 버릴 뜻이 있음을 알고 어의(御醫)를 보내어 문병하고 세 차례나 소명(召命)을 내렸으나 끝내 나가지 않았으며, 기축년(1589, 선조 22) 7월 21일에 일찍 일어나 시를 읊조리다가 훌쩍 세상을 떠나니, 춘추가 67이었다.
이날 하늘에서 비가 내리고 우레가 진동하다가 이윽고 상서로운 광채가 대지를 비춰 달처럼 환하므로 산중의 백성들이 놀라고 의아하여 달려왔는데, 공은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이해 9월에 종현산(鍾賢山)에 안장되었고 부인은 고씨(高氏)로 딸 하나를 두어 군수 이희간(李希幹)에게 출가시켰다.
공은 어린 나이에 도(道)를 구하여 가정(家庭)에서 이미 학행을 닦은 데다가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을 따라 수업하였고, 만년에는 이 문순(李文純)의 가르침을 받아 세도의 성쇠를 일체 함께하였으며, 또 문성공과 함께 이기(理氣)의 깊고 아득하고 크고 작고 열리고 닫히는 묘(妙)를 논하였으니, 그 학문의 연원과 조예를 대충 짐작할 수 있다.
조정에 나가 반열(班列)에 서서는 오직 상의 마음을 바로잡는 것을 근본으로 삼았고, 일생 동안 힘쓴 바는 선악을 분별하여 현사(賢邪)를 진퇴시키는 데 있었으므로, 공과 함께 재직하고 협력한 이는 모두 어질고 덕 있는 인사들이었다. 이 때문에 조정이 맑아지고 백성이 안정되었다.
공이 만약 끝까지 재직하여 배운 바를 다 발휘하였다면 그 치도(治道)의 성과가 어찌 이 정도에서 그쳤겠는가. 참소를 만나 버림을 받고 임천(林泉)으로 돌아와서는 매일 초야의 수재(秀才)들과 함께 선왕(先王)의 도덕을 영가(詠歌)하면서 늙음이 닥쳐오는 줄도 모르는 채 지냈고, 묵연히 마음에 터득되는 바는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였으니, 이 어찌 곤액(困厄)을 겪을수록 더욱 드러난 이가 아니겠는가.
백사(白沙) 상공(相公) 이항복(李恒福)이 일찍이 공의 행장(行狀)을 찬(撰)하였는데, 그중에는 자못 빠진 데가 있으니, 이는 위간재(魏艮齋)의 묘문(墓文)과 같은 뜻이 아닌지 모르겠다. 군수 이희간의 아들 탁(蘀)이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김 문정공(金文正公)에게 공의 문집(文集)에 대한 서(序)를 청하였는데, 그 글에 공의 모든 행적이 유감없이 발휘되고 추중(推重)되어 있다.
그 뒤 조정에서 문충(文忠)이란 시호를 내렸고 남방의 선비들이 많이 사당을 세워 제사하였으며, 영평(永平)에도 그러하였으니, 이는 1백 년도 가지 않아서 공에 대한 공론(公論)이 확정된 셈이다. 은산공(殷山公)이 회덕(懷德) 선암천(船巖川) 서쪽 기슭에 안장되었는데, 공이 일찍이 그 앞에 집을 짓고 그 이름을 사암(思菴)이라 하였으므로, 배우는 이들이 공을 사암 선생이라 칭한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
세도의 성쇠는 / 世道升降
바로 그 인물에 있고 / 職由其人
그 인물의 도는 / 其人所由
오직 의와 인인데 / 惟義與仁
의로는 임금을 바르게 하고 / 義以正君
인으로는 백성을 안정시키네 / 仁以安民
본조의 치도가 밝고 / 本朝休明
공이 남방에서 출생하여 / 公起南垠
우리 명종 선조 만났으니 / 際我明宣
진정 융성한 시기였네 / 寔曰昌辰
많은 인재 포용하니 / 休休有容
덕에 어찌 외로울 것인가 / 德豈無隣
율곡을 의지하고 / 於惟栗翁
문순을 존경하여 / 尊尙文純
본체 밝혀 실제에 적용하니 / 明體適用
실로 참된 유자일세 / 實儒之眞
인심이 귀부(歸附)하는 교화로 / 棫樸之化
수많은 명철 / 群哲振振
예빙(禮聘)이 연속되어 / 旌招繹續
태공(太公)과 이윤(伊尹) 같은 이 / 惟渭惟莘
묘당에 등장할 제 / 咨于在庭
공이 이를 주도하니 / 公秉樞匀
간악한 무리 물러가고 / 姦倖屛跡
준수한 인재 활약하여 / 俊乂躍鱗
거의 성대(盛代) 이루어 / 庶幾煕載
요순의 군민 보려다가 / 親見君民
평지에 풍파 일고 / 平無不陂
현자의 길 험악하여 / 賢路荊榛
공을 붕당으로 몰아 / 謂我邦朋
열 가지 죄 열거하였네 / 十罪斯陳
공이 끝내 초야에 숨으니 / 公遯于野
어느 누가 큰 경륜 맡을쏜가 / 誰任經綸
그 산은 높고 험하며 / 其山崷崒
그 물은 깊고 넓은데 / 其水奫淪
배견와와 창옥병 등 / 鵑窩玉屛
그윽한 곳에 / 寂寞之濱
지팡이 나막신으로 / 我杖我屨
목욕하고 봄바람 쐬면서도 / 詠沂上春
영원히 잊지 못하는 이는 / 永言不忘
저 서방의 미인이었다가 / 彼西方人
유연히 이 세상 뜨고 나니 / 悠然乘化
우레와 비 새벽잠 깨웠어라 / 雷雨警晨
옛날 유원성이 죽을 적에 / 昔元城沒
이 같은 이변 있었네 / 斯異斯臻
유원성의 그 기상 / 元城氣象
철벽 은산 같았는데 / 壁鐵山銀
공 또 그와 같아 / 公實如之
끝내 변함없었으므로 / 終不緇磷
내가 이 명 지어 / 我作銘詞
이 돌에 새기노라 / 篆此貞珉
[註解]
[주01] 금련촉(金蓮燭)의 고사(故事) : 송 나라 소식(蘇軾)이 한림학사(翰林學士)가 되었을 때 임금이 편전(便殿)으로 불러 차[茶]를 하
사하고 나서, 어전(御前)에서 사용하던 금련촉을 손수 들어주어 한림원(翰林院)으로 돌아가게 한 일을 말한다.
[주02] 고묘 녹훈(告廟錄勳) : 사유를 종묘(宗廟)에 고하고 훈공(勳功)을 장부에 기록하는 것.
[주03] 곤월(袞鉞) : 《춘추(春秋)》의 한 글자의 표창이 곤룡포(袞龍袍)를 받는 것보다 더 영광스럽고, 한 글자의 폄하(貶下)가 도끼에 맞
아 죽는 것보다 더 무섭다는 뜻. 즉 《춘추》의 필법을 말한다.
[주04] 육행(六行) : 부모에게의 효도, 형제와의 우애, 동성(同姓)과의 화목, 이성(異姓)과의 친목, 벗과의 신의, 어려운 이에게의 구휼(救
恤)을 말한다.
[주05] 문소전(文昭殿) : 조선 신의왕후(神懿王后)의 사당으로, 세종 15년에 태조와 태종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주06] 연은전(延恩殿) : 조선 성종 2년에 성종이 그 아버지를 덕종으로 추존하여 종묘(宗廟 문소전)에 봉안하려 하였으나 원래 여기에는
태조와 태종을 봉안하는 곳으로, 덕종을 봉안하고 보면 예종이 들어갈 수 없으므로 전을 따로 지어 덕종을 봉안한 곳인데, 그 뒤 명
종 2년에 인종의 위패 봉안 문제가 대두되어 결국 연은전에 봉안하였다가, 선조 2년에는 연은전에 후전(後殿) 1칸을 지어 인종의
위패를 옮겼다.
[주07] 위간재(魏艮齋)의 …… 뜻 : 간재는 송 나라 위섬지(魏掞之)의 호. 이는 주희(朱熹)가 그의 묘문(墓文)을 지을 당시에는 증적(曾
覿)의 권세가 한창 성대하였으므로, 증적과 관련되는 사실을 그대로 썼다가는 그 화(禍)가 그의 무덤에까지 미칠 것을 염려하여 그
저 평범하게 다루었다가, 그 뒤에 묘표 발(墓表跋)를 지어 그 사실을 자세히 드러낸 것을 말한다.
[주08] 서방의 미인(美人) : 《시경(詩經)》 패풍(邶風) 간혜(簡兮)에서, 서방은 서주(西周)를, 미인은 성주(聖主)를 말하는데, 여기는
선조대왕을 그린다는 뜻이다.
ⓒ한국고전번역원 | 이재수 (역) | 1982
송자대전 제155권 / 신도비명(神道碑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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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思菴朴公神道碑銘 幷序
國朝屢更士禍。至於乙巳而極矣。世道大變。斯文倒地。聖賢之書。指爲禍胎。士子所事。時文而已。而國勢之危已甚矣。天佑我東。士流蔚興。明宣之際。治敎大明。爲士者誦法孔孟程朱。人倫明於上。庶民親於下。庶幾乎三代之隆矣。當是時。主張淸議。引進士類。卓然爲領袖者。曰思菴先生朴公諱淳。字和叔。其人也。世運平陂。時論乖張。公遂跋疐奔逬。德業中沮。至
今爲識者之恨焉。公忠州人。朴氏譜自高麗副正英。八世而有曰蘇。始仕本朝。爲殷山郡事。是生智興。成均進士。是生祐。生員壯元。明經及第。官至右尹。號六峯。其兄祥。世稱訥齋先生。爲己卯名賢。六峯娶棠岳金氏女。生公于嘉靖癸未。姿稟絶異。色夷氣淸。金精玉潤。八歲。開口詠物。輒驚座人。隣有敎師曰。吾敢爲爾師。六峯常以文自負。見公作曰。老膝當屈矣。十八。成進士。受學於徐先生敬德。丁未。六峯沒。廬墓毀。幾滅性。練後猶啜粥。服闋。入山讀書。逾年而歸。訪恥齋洪仁祐。講橫渠太和等篇。恥齋歎曰。可與共學。其惟和叔乎。癸丑。明廟以經書親臨試士。公擧止雍容。辨釋精透。庭中屬目。遂賜第居首。歷數官爲吏曹佐郞,弘文館修撰,校理。賜暇湖堂。一日上召對湖堂學士。講論經理。且命製述。親執靑鍾。滿酌以侑。而又倣蘇軾金蓮燭故事以送之。翌日。大臣尙震等。率詣殿陛陳謝。一時以爲盛事。爲檢詳舍人。奉 命檢災于湖西。陞弘文應敎。時館中將議上林百齡諡號。百齡當乙巳士禍。與尹元衡,鄭順朋,許磁,李芑。逞其姦兇。圭菴宋文忠以下諸賢無遺類。而告廟錄勳矣。元衡以肺胕親。方爲領相執國命。姦黨恃爲城社。視正士耽耽。百齡如不得美諡。則大禍復作矣。以故館中相顧依違。公獨奮然議定曰恭昭。蓋衮鉞間矣。元衡喑噫曰。林公國之元勳。諡無忠字。意在叵測。將鞫治。士類洶懼。而公夷然。上將置重典。有救者。只命罷黜。始公將待命金吾。入室更衣。坦坦而出。家人不知有事。及歸。幼女出迎。公執手笑曰。幾不得復見汝矣。翌日南歸。壬戌。除韓山郡守。期年而政成。邑民愛戴如父母。每衙罷。輒處亭舍。課日讀書。傍郡之士聞風坌集。癸亥。以成均館司成召入。歷侍講院輔德,司憲府執義,弘文館直提學。箚論時事。陞爲承政院同副承旨。自是每承旨有闕。公名未嘗不在焉。由吏曹參議。移司諫院大司諫。遞復拜。論妖僧普雨罪。請置法。又論黜元衡。蓋自乙巳以來。元衡與百齡,許磁等。結爲腹心。芟刈士流。流毒百姓。國勢臲卼。將不保朝夕。公慨然歎曰。劾冀誅憲。挽回世道吾責爾。就議於大司憲李公鐸。李公難之。公徐譬而始許焉。公歸。不脫朝服。取燭草啓。遲明入啓。時文定薨才五月。上不忍遽允。公爭益力。遂竝左議政沈通源而逬黜。百姓歌舞於道。中外之以儒爲名者。沛然有向善之心。於是選六行之士。以淸仕路。伸雪冤死之人。復其官爵。凡係蠹國害民之事。一切革罷。而文純公以下群賢。皆以世道爲己任。相與先後焉。蔚然有元祐之望。當其孚號之初。文純亦且疑而危之。匪公則難矣。特拜司憲府大司憲。自是旋遞旋拜。丙寅。爲副提學。以書勉文純公赴朝。隆慶丁卯。明廟昇遐。翌年戊辰。行人歐希稷以皇帝命來頒大行諡號。公以遠接使往迎。詔使見公禮儀中度。凜然起敬。及與酬唱。歎曰。宋人物唐詩調也。旣伴送還朝。其三月。帝又遣成檢討憲,王給事璽。頒皇太子冊立詔。公始拜兩館大提學。復受儐事。其見敬禮如前。成公爲公題平遠亭十絶。亭在錦城。畢事。請以文衡移授文純公。其啓曰。提學雖是館閣之職。而終不如大提之重。今李滉以高年碩儒。顧爲提學。而臣乃處其上。顚倒甚矣。上議于大臣而從之。文純公復辭遞於公。公論道學則以心經,近思錄爲本。論文章則主於馬,韓,李,杜。士習丕變焉。己巳四月晝講。與奇高峯大升論文昭殿祔禮。蓋李芑等承順文定意。以仁廟爲未踰年之君。不祔文昭殿而祔於延恩。國人悲憤。公論之痛切。文純亦論殿屋變通之制。皆被大臣沮格。夏。判書金鎧潛伺間隙。欲陷公以及諸賢。以爲今日士習已成己卯。蓋欲紹述衮,貞餘論也。鄭松江澈以持平入侍。面斥鎧姦狀。鎧涕泣而出。文純公與人書曰。近日一番騷動。雖攻他人。意實在滉。於是三司竝論鎧削奪。時公爲善流宗主。遂以爲吏曹判書。公固辭不出。李文成公珥勉之曰。當裒聚士流。啓迪上心。不可使小人壞弄也。上亦不許其辭。故遂出仕。翌年正月。辭遞爲禮曹判書。辛未。奉安實錄于茂朱。復以吏判陞贊成。壬申。拜右議政。赴京師賀神宗皇帝登極。故事外國進奏。皆由夾門。公爭之。表文由正門入。自是遂爲定式。是行。中朝人素聞公名。沿途索詩者甚衆。將還。主事問開市。公曰。寡君未嘗好貨。癸酉還朝。極陳王守仁學術之非。陞左議政。請以未出身人通臺憲。甲戌辭遞。玉堂請勉留曰。忠賢無腹心之寄。秋。復拜左議政。乙亥。懿聖大妃喪。再度獻議。請以白衣冠。以終三年。後於仁順大妃喪亦然。俗論不能奪。然側目者多矣。秋引入復出。嘗於筵席。極稱文成公學問道德之懿。冬辭遞。己卯。拜領議政。多所建白。如封植魯山墓。如採用成文簡所陳。勿許其退。如請收用金孝元。洗滌東西黨論。如勿以李文成爲奏請使。如設經濟司改貢案諸事。或蒙採施。或以爲迂闊而不用。惟盧蘇齋守愼頗無異同。而金公宇顒則事事力主焉。壬午。迎詔使黃洪憲,王敬民于西郊。癸未尼胡叛。先是公以北路爲憂。有所規畫。又區別人才。及是文成公爲本兵。內籌軍謀。外調兵馬。擧無遺策。上方倚以討賊。一日文成承召詣闕。忽眩作淹滯。上遣醫看病。且令退去調治。而臺劾闖發。文成上疏待罪。公與僚相請敦諭出仕。後臺劾重發。以爲擅國慢君。將欲何爲。時尼胡連陷鎭堡。勢甚危急。而臺啓不止。必欲擊去文成。故公請姑遞本兵。上從之而以公兼兵判。時文簡公上疏極論時人朋讒之狀。公請對辨別忠邪。是非甚晳。於是三司論公十罪。竝劾兩賢。公退出江舍。於是朝紳儒生竝上伸辨之章者。至於累百人。右相鄭芝衍專救公。上親製敎書。特竄主論之人。其餘黨與竝補外而曰。予欲法朱子。入於珥,渾之黨。又勉諭公入來甚勤。公不得已應命。甲申正月。文成公沒。公孑然孤居。無與協恭。寤寐憂歎而已。乙酉。辭遞歸江舍。夏。以盧相言。特赦竄逐人。秋。李潑等誣毀公及諸賢。書名黨籍。丙戌八月。乞暇沐浴于永平。上遣中使宣醞於東門外。永平有白雲山。溪潭絶勝。公仍卜築居之。瀟洒出塵。口絶時事。日與村氓野老。爭席忘形。有來學者。則相與討論。亹亹不倦。有拜鵑窩,二養亭,吐雲床名號。環以白雲溪,金水潭,蒼玉屛。興至杖屨逍遙。或游楓嶽諸山。上知公有長往志。遣醫問疾。召命三至而終不赴。己丑七月二十一日。早作吟詩。倏爾乘化。春秋六十七。是日天雨雷震。俄而祥光燭地。晃若皎月。山氓驚訝坌集。則已三皐矣。其九月。葬于鍾賢山。夫人高氏。生一女。適郡守李希榦。公髫齡求道。旣受家庭之學。又從花潭受業。晩又服習李文純公。消息盈虛。無不與同。至與文成公論理氣沖漠大小闔闢之妙。則其淵源造詣。槩可見矣。及其立朝就列。惟以格君心爲本。而所務者分別淑慝。進退賢邪。故其所同寅協恭。無非賢德俊乂之流。以故朝著淸明。生民乂安。若得終始展布。以盡所學。則其治敎之效。豈至於此而止哉。及其遭讒擯棄。返身林泉。日與村秀才子。歌詠先王之道德。悠然不知老之將至。而泯然有會於心。則蓋有人不及知者。豈因阨窮而愈表見者歟。白沙李相公恒福嘗狀公行。而頗有脫略處。豈魏艮齋墓文意耶。李郡守之子䕪。爲請文集序於淸陰文正公。其發揮引重。無復餘蘊矣。其後朝廷賜諡文忠。南中章甫。多立祠俎豆之。永平亦然。公論之定。不待百年矣。殷山公葬在懷德船巖川西麓。公嘗築室其前。名曰思菴。故學者稱爲思菴先生云。銘曰。
世道升降。職由其人。其人所由。惟義與仁。義以正君。仁以安民。本朝休明。公起南垠。際我明宣。寔曰昌辰。休休有容。
德豈無隣。於惟栗翁。尊尙文純。明體適用。實儒之眞。棫樸之化。群哲振振。旌招繹續。惟渭惟莘。咨于在庭。公秉樞匀。
姦倖屛跡。俊乂躍鱗。庶幾煕載。親見君民。平無不陂。賢路荊榛。謂我邦朋。十罪斯陳。公遯于野。誰任經綸。其山崷崒。
其水奫淪。鵑窩玉屛。寂寞之濱。我杖我屨。詠沂上春。永言不忘。彼西方人。悠然乘化。雷雨警晨。昔元城沒。斯異斯臻。
元城氣象。壁鐵山銀。公實如之。終不緇磷。我作銘詞。篆此貞珉。<끝>
[각주]
[주01] 仕 : 一本仕下有文成出仕四字
[주02] 金水潭 : 金水一作錦繡
[주03] 赴 : 赴一作起
宋子大全卷一百五十五 / 碑
▲사암 영의정 박순 묘 / 소재지 : 경기도 포천시 창수면 주원리 688(옥산서원)
▲사암 박순 신도비[구]
▲시암 박순 신도비[신] >옥병서원 앞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