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여정길에 처음으로 가 보는 절 입구의 노송이 즐비한 적송 소나무 숲길이 멋지다
[운문사사적]에 의하면, 557년(진흥왕 18년)에 한 신승(神僧)이
북대암 옆 금수동에 작은 암자를 짓고 3년 동안 수도하여
도를 깨닫고 도우(道友) 10여 인의 도움을 받아 7년 동안 동쪽에 가슬갑사,
서쪽에 대비갑사(현, 대비사), 남쪽에 천문갑사(현, 운문사), 북쪽에
소보갑사를 짓고 중앙에 대작갑사를 창건하였으나
현재 남아 있는 곳은 운문사와 대비사 뿐이다.
그후 600년 (신라 진평왕 22) 원광 국사가 중창하였다.
그는 대작갑사와 가슬갑사에 머물면서 점찰법회를 열고, 화랑도인 추항과
귀산에게 세속 오계를 내려줌으로써 화랑정신의 발원지가 되었다.
오갑사가 창건된 시기는 신라가 불교를 중흥하고 삼국통일을 위해 국력을
집중하여 군비를 정비할 때였다.
이때 오갑사가
운문산 일대에 창건되고 화랑수련장이 만들어 진다. 그것은 곧 신라가
서남일대 낙동강 유역으로 국력을 신장해가는
과정으로써 운문사 일대가 병참기지로서 당시 신라로서는
전략상의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삼국유사] 보양이목조에는 "후삼국을 통일하면서 태조왕건은
운문사에 있던 보양국사의 계책으로 이 일대를 평정하였다.
그 뒤 후삼국의 사회적 혼란을 어느 정도 수습한 왕건은 937년(태조 20년),
대작갑사에'운문선사'라는 사액과 함께 전지 500결을
하사하였다." 고 한다.
이 때부터 대작갑사는 운문사로 개칭되었고, 경제적 기반을 튼튼히 구축한
대찰로서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
1105년(고려 숙종 10) 원응국사 학일이 제3차 중창한 후 왕사로 책봉되었다.
원응국사는 1129년(인조 7) 부터 이 절에 머무르실 때
운문사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1277년 일연선사는 고려 충열왕에 의해
운문사의 주지로 추대되어 1281년까지 머무르셨다.
이 곳에서 일연은 『삼국유사』 의 집필을 착수하였다. 운문사의 절 동쪽에는
일연선사의 행적비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조선시대인 18세기 중반, 운문사는 설송 연초대사가 제4차 중창할 때와
19세기
전반 헌종 년간에서 운문사의 사세는 상당했다.
운문사의 제5차 중창주인 운악화상은 1839년에 오백전을 중수하였다.
이듬해 응진전과 명부전, 미타전, 내원암, 북대암등을 중건하였다.
그리고 다음해에는 청신암을 창건하였고, 1842년 금당을 중건하였다.
종각으로 들어서기전부터 가슴을 울리는 듯한 북소리가 들린다
여기 온걸 반기려는 걸까? 하늘은 구름이 잔득끼어 금세라도
눈이 내릴 것 같은 분위기이고 스쳐가는 바람이 차다
입구인 종각루를 들어서자 높이 6m 남북길이 21m동서 길이 18m나 되는
처진 소나무가 반긴다 이소나무가 봄이면 막걸리 12동에 물 12동이를
먹는다는 천연 기념물 180호인 처진 소나무이다
어느 대사가 삽목으로 심어 졌다는 것인데 원래 반송이라 하였는데
지금은 가지가 자꾸 밑으로 처진다 하여 처진 소나무라 한다
둥둥 울리는 느낌이 땅에서 하늘로 내 가슴속으로 울려퍼지는 느낌이다
보이지 않는 곳에 듣는 느낌과 북을 치고 있는 걸 보는 느낌이
또 다른 건 왜일까? 그러고 보니 스승이 치는 북소리와 이제 배우는
비구승이 치는 북 소리가 다르다
붉그스레한 비구스님의 얼굴에 초점을 맞추는데
"찍지마세요" 한다 내 마음을 들킨 것 같아 나도 가슴이 뜨끔하다
"저 북 치는 뒷 모습이라도 담아 가면 안될까요?"하니 안되요 한다
조선 초기에 지으졌다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큰 만세루이다
정면 7칸 측면 3칸의 규모로 200평이나 되는 큰 건물이다
큰 가람에 울려야할 종이 만세루 바닥에 놓여있다
왜 일까? 용누가 끊어져 지금은 울리지 않는 종이다
만세루 대들보의 결구부분이 흥미롭다
연꽃의 형태에 연밥을 묘사해 놓은 것 같다
생과 사가 따로이지 않고 부처와 중생이 다르지 않다는
불이문(不二門)이 수행자의 마음 가짐을 일깨워 준다.
수행공간이라 일반인은 출입이 금지란다.
그러나 이것도 수행의 한 방편이였을까? 선방의 담장이 얇은 돌로 빗살처럼 쌓아 올린 모습이 시선을 끈다
불이문 바로 좌측으로 작압전(鵲鴨展)과 관음전 명부전이 나란히 서 있다
"작압전"까치 작(鵲)에 오리 압(鴨)이란 글이 특이하다
원래는 작갑사(鵲岬寺)란 절로 불리웠는데 폐사가 되어 보양국사가
중창을 하려니 옛 터를 못찾아 헤매던중 까치가 땅을 쪼아 대는 걸 보고
찾았다고 하여 까치의 은혜에 보답코저 까치집 모양을 본 따
작압전을 지었다 한다 작압전의 안은 조금 비좁다
가운데엔 고려초시대 석가여래좌상(보물317호)이 자리를 하고
좌우측엔 화강암으로 깎아 세운 사천왕 석주(보물318호)가 자리하고 있다
작압전 좌측의 사천왕석주이다
원래는 작압전 앞의 전탑의 몸돌에 있던 것으로 이곳으로 옮겨 놓았다 한다
그럼 탑은? 1층 몸돌의 것이 이렇게 컷다면 탑도 무지 컷을 것 같은데...
모두 악귀를 밟고 있는 생령좌의 형태로 통일신라 후대의 것으로 보고 있다
작압전의 석가여래좌상으로 광배와 좌대 모두 갖추고 있고
항마촉지인의 수인으로 보아 석가여래라 불린다
회분을 많이 칠하여서 인지 얼굴의 윤곽이 뚜렷하지 않다
작압전 앞의 선방의 담과 창문이 아름답다
운문사 대웅보전 앞에 동서로 나란히 서 있는 통일신라시대 3층석탑.(보물 제678호)
2기의 탑은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이 놓여진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의
석탑 형식으로, 크기나 양식 면에서 거의 동일한 특징을 보여준다.
하대석은 지대석과 붙어 있는데 각 면에는 우주(隅柱)와 탱주(撑柱)가
2개씩 새겨져 있고 그 위를 넓고 편평한 갑석이 덮고 있다. 상층기단에는
각 면에 우주와 1개의 탱주를 세우고 그 사이에 팔부중상을 1구씩 조각했다
팔부중상의 천의(天衣)가 휘날리는 모습이다
일층의 옥신석은 조금 높은 편이고 우주가 새겨져 있다
옥개석의 층급밭침은 전부5층으로 되어 있고 처마끝이 거의 수평이다
금당앞의 석등을 보려 했으나 일반인 출입금지라 볼수가 없어서
비로전과 석탑 사이에 새워둔 석등을 찍어 보았다
금당앞의 석등과 똑 같이 복원해 세워 두었다
이것 또한 선원의 창문이다
쌍탑의 우측엔1105년(고려 숙종 10년), 원응국사에 의해 건립된 뒤
수차례에 걸쳐 중창된 보물 835호, 운문사 대웅보전(大雄寶殿)은
지금 한창 보수 공사 중이다.
운문사 대웅보전 천장에는
떠나려는 배에 악착같이 매달려있는 '악착보살'이 있단다.
지금은 공사 중이라 볼 수 없다. 왜 악착보살이라 했을까?
지금은 비로전이란 현판을 걸어 놓았다
비로자나불이 안치된 곳이라 비로전으로 고쳤는가 보다 만세루 앞에 새로지은
대웅보전이 새로 세워져 있다 위 사진은 대웅보전(보물 제835호)문이
살짝 열려 있어 석등뒤에서 망원으로 댕겨 찍어 보았다
대적광전 뒤 산 위에 북대암이 보인다
새로 지어진 대적광전
대적광전에서 본 만세루
바람이 거세어 진다 곧 진눈개비라도 뿌려줄 요량인지
눈발이 한두개씩 보인다 더 늦기전 가지산 재를 넘어야 석남사로
가야 하니 발길을 돌려야 한다.
마지막 나오는 길에 처진 소나무 밑으로 한번 들어가 찍어 본다
수 천년을 중생들과 함께 한 이 거송이 얼마나 많은 소원을 짊어 졌길래
이리 가지를 땅으로 내리는가? 나에겐 산 부처님 같아 보인다
언젠가 시간이 되면 사리암도 올라 가 보고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