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꽃피는 밥상
민들레 국숫집 서영남 씨 가족
글 장승욱 | 사진 김원
'민들레 국숫집 가족들'이 식당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뒷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아버지 서영남씨, 바로 앞이 딸 모니카 씨, 나머지 분들은 자원봉사자들이다. 어머니 강베로니카씨는 개인 사정으로 함께하지 못했다.
인천 화수동의 언덕배기에 자리 잡고 있는 ‘민들레 국숫집’에는 국수가 없다. ‘웃찾사’의 인기 코너 ‘안 팔아’처럼 이 집에서는 아무것도 팔지 않는다. 그 대신 퍼준다. 밥도 퍼주고, 국도 퍼주고, 반찬도 퍼주고, 정情도 퍼주고, 돌아갈 때는 담배까지 몇 개비까지 나눠준다. 이 집에 찾아와서 VIP 대접을 받고 가는 손님들은 노숙자들이다. 주방장인 ‘국숫집 아저씨’ 서영남 씨는 이렇게 말한다. “이분들 때문에 제가 사는데 당연히 VIP로 모셔야죠. 밥보다 중요한 것이 사람대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늘 사람대접을 어떻게 할 것인가 생각합니다.”
민들레 국숫집은 오전 10시에 문을 열어 오후 5시에 문을 닫는데, 하루 평균 300여 명, 많을 때는 400여 명이 이 집에 와서 끼니를 해결한다. 영남 씨는 꽤 심한 잔소리꾼이기도 하다. 그의 잔소리는 대개 이런 내용이다. “그 고추가 청양고추라 엄청 매워요. 괜히 눈물 빼지 말고 세 개씩만 가져다 드세요.”
지난 2003년 만우절에 거짓말처럼 문을 연 이 집은 운영 비용 중 70~80퍼센트가 얼굴 없는 기부자들로부터 나온다고 한다.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 일손을 보태고 가는 자원봉사자들, 그리고 무언가를 싸들고 찾아오는 사람들로 인해 이 집은 신나는 ‘나눔의 물류 센터’가 된다. 어떤 이는 칫솔을 한 봉지 가져오고, 어떤 이는 직접 낚아 올린 숭어를 열한 마리나 가져와 식단에 숭어회가 추가되기도 했다. 어떤 이는 30킬로그램에 가까운 쌀을 배낭에 짊어지고 땀을 뻘뻘 흘리며 찾아왔다. 서울 아현동에서 왔다는 그이는 잇바디가 온통 드러나게 활짝 웃으며 기념사진 한 장을 찍고는, 식사하고 가라는 권유도 뿌리치고 언덕길을 터덜터덜 걸어 내려갔다.
'가난한 사람들과 어울려 함께 사는 것’이 꿈이었기 때문에 지금 “꿈같이 살고 있다”는 국숫집 아저씨의 말이다. “담배 필요하세요? 물으면 겨우 꽁초 하나 있어도 더 달라고 안 해요. 아침부터 저녁까지 여니까 하루 세 번 식사하셔도 된다고 해도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도 있는데… 하면서 한 번만 오시거든요. 저는 이럴 때 가난한 사람들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곤 합니다.”
서영남 씨는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스물두 살 때부터 25년 동안 수도원 생활을 했던 수사修士 출신이다. 94년부터 전국의 교도소를 돌며 사목 활동을 했던 인연으로 환속한 뒤에는 출소자들을 위한 ‘겨자씨의 집’을 운영하기도 했다. 2002년에는 “호박이 넝쿨째 굴러오는 행운”을 만나 어여쁜 아내 베로니카와 토끼 같은 딸 모니카를 얻었다. 베로니카 씨는 교도소 사목 활동을 후원하던 신도였고, 서영남 씨가 결혼을 위해 준비한 것은 손수 바느질한 누비이불 한 채가 전부였다.
이렇게 해서 ‘베베모’가 구성되었다. ‘베베모’란 세 식구의 세례명인 베드로, 베로니카, 모니카의 첫 글자를 따서 지은 것으로, ‘느슨하게 연결된 하나의 살아 있는 공동체’를 꿈꾸는 기초 공동체 또는 ‘1차 가족’의 이름이기도 하다. “가족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들의 만남이라고 생각합니다. 피가 아니라 사랑이 가족을 만드는 것이지요.”
그래서 ‘베베모’의 가족은 현재진행형의 나눔과 사랑으로 계속 늘어나고 있다. 민들레 국숫집의 VIP 손님들이 가족이고, ‘민들레의 집’식구들도 가족이다. ‘민들레의 집’은 노숙자들 중에서 “조금만 거들어 드리면 혼자 일어설 수 있는 분들”을 위해 보증금 50만 원에 월세 10만 원 식으로 얻어준 거처인데, 식구들이 스무 명쯤 된다고 한다. 또 교도소 사목 활동으로 인연을 맺은 재소자들도 ‘베베모’의 2차 가족에 속한다. 모니카 씨는 ‘민들레의 집’에 깃들여 사는 노숙자들과 교도소에서 만난 재소자들을 모두 ‘삼촌’이라고 부른다.
‘베베모’의 자금책인 베로니카 씨는 옷가게를 하고 있는데, 1년에 한 번 여름에 실시되는 상가 집단 휴가에 맞춰 ‘베베모’ 가족도 여름휴가를 떠난다. ‘베베모’ 가족의 목적지는 산도 아니고 바다도 아니다. 교도소에 사형수로, 무기수로 수감돼 있는 형제들, 삼촌들을 만나러 가는 것이다. 청송교도소에는 모니카 씨와 동갑인 재소자도 있다. 10년 전에는 소년원에 수감돼 있었고, 지금도 역시 교도소에 있으며, 10년 뒤의 주소 역시 교도소일 것이 분명하다.
영남 씨와 모니카 씨 부녀가 몇 달 전 ‘민들레 국숫집’ 다섯 돌에 맞춰 ‘민들레 꿈’이라는 이름의 공부방을 연 것도, 이런 경험 때문에 아이들을 제대로 돌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화수동에는 부모가 없는 결손 가정의 아이들이 많다. “돈이 없어 다른 공부방에도 못 가는 아이들을 감싸주자.” “언니, 삼촌, 할머니가 있는 가족 같은 분위기를 느끼게 해주자”는 것이 공부방을 책임지고 있는 모니카 씨의 목표다. 더 큰 목표는 공부방을 거쳐 간 아이들이 돌아와 새로운 아이들을 돌보게 되는 것이다. 모니카 씨는 그것을 “1기 아이들의 귀환, 사랑의 순환”이라고 표현했다. 공부방 입구 현판에 새겨진 ‘민들레 꿈’이라는 글씨는 교도소에 있는 ‘삼촌’이 써서 보낸 것이다.
‘민들레 국숫집’에는 다음과 같이 쓰인 액자가 하나 걸려 있다. ‘소유로부터의 자유 /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는 기쁨 / 아름다운 세상을 위한 투신.’ 이는 ‘베베모’ 가족의 가훈이기도 하다. 모니카 씨가 아버지에게 말한다. “아빠, 저 오늘 저녁에 투신하러 가요.” 저녁때 촛불집회에 참석하러 간다는 말이다. 촛불 하나의 불빛이 세상을 동그랗게 밝혀주듯이 ‘베베모’ 가족의 ‘아름다운 세상을 위한 투신’이 더 큰 가족, 사랑과 나눔을 위한 거대한 연대連帶를 이루기를 바란다.
서영남 베드로(55세) 민들레 아저씨 우리 아빠. 가난하고 소외되고 힘든 이웃을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귀한 분으로 섬기고 대접하며, 그들의 친구와 가족이 되어주는 분입니다. 이 시대에 외면 받기 쉬운 나눔과 섬김이라는 값진 정신을 몸으로 실천하며 홀씨 하나로 아름다운 사랑의 꽃을 피워내고 있는 우리 아빠를 사랑합니다! (모니카)
강베로니카(50세) 인천의 지하상가에서 조그만 옷가게를 하면서 수입의 대부분을 민들레 국숫집에 내놓습니다. 사형수와 무기수 형제 아홉 명을 동생 삼아 친누나처럼 옥바라지를 해줍니다. 노숙을 하면서 힘겹게 살아왔던 ‘민들레의 집’ 식구들도 가족처럼 따뜻하게 보살펴줍니다. 아파서 병원에 입원하면 마음을 다해 간호해줍니다. 외로운 이들의 누나, 어머니 같은 존재입니다. (베드로)
이아롱 모니카(25세) 제 딸 모니카는 조그만 공부방 ‘민들레 꿈’을 맡아서 합니다. 대학에서는 사진을 전공했지만, 지금은 대학원에서 사회복지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행복은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다 내어줄 때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라고 믿고 있는 모니카는 베로니카와 함께 제 인생에 넝쿨째 굴러온 호박입니다. (베드로)
* 베드로 님에 대해서는 모니카 님이, 베로니카 님과 모니카 님에 대해서는 베드로 님이 소개해주셨습니다.
장승욱 _ 작가이자 우리말 연구자인 글쓴이는 조선일보 편집기자와 SBS 보도기자를 지냈습니다. 여행을 좋아하여 우리나라 방방곡곡에 수많은 벗들을 거느리고 있습니다. 저서에는 <술통> <사랑한다 우리말>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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