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시절의 두 친구
나는 농과대학에서 공부하면서는 꽤 흥미도 갖게 되어 비교적 열심히 학교에 나가 공부도 하고 친구도 사귀고 하였다. 이백천과는 같은 자취방 식구니까 말할 것도 없었지만 박창근(朴昌根), 김종태(金鍾兌)와는 거의 붙어 다녔으며 김제 죽산의 김용두(金容斗)와 옥구의 김승수(金承洙), 이리의 김의규(金義圭)들과 가깝게 지냈고 동진면 하장리의 신형조(辛炯祚)는 동향이긴 하지만 농림학교 출신으로 대학에서는 같은 과에서 공부를 하였지만 그는 입학하자마자 고등고시 준비 공부로 강의도 선별적으로 듣고 친구들과의 사귐도 거의 끊고 있어서 어울릴 틈이 별로 없었다. 그는 두어 번 실패 후 합격하여 검사를 지낸 후 변호사를 하였다. 1980년대 이후 몇 차례의 교유가 전부다.
그 때 우리들보다 나이가 20여 세가 많은 전영수(全英洙)씨라는 만학의 학생 한 분 있었는데 우리 몇 사람과 매우 가깝게 지냈다. 중앙청 무슨 과장으로 있을 때 6·25전란으로 이리로 피난을 와 부인 양선생이 이리여고 가정과 교사를 하게 되매 그대로 눌러 앉아 있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심심파적으로 농대의 정문 앞에서 헌 열쇠 노점상을 하였는데 오며가며 우연히 우리 몇 사람과 친하게 되어 나중에는 우리 과에 편입학을 하여 동문이 된 것이다. 인품도 훌륭하고 경륜도 있어서 형님처럼 따랐는데 내가 혼인할 때는 친구들과 우리집과 운학동에도 왔었다.
이때 가장 가깝게 지낸 김종태의 죽음은 4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안타깝고 허전하며 알 수 없는 미스테리다.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나와 박창근, 김종태 세 사람은 그림자처럼 붙어 다녔다. 박창근과 나는 공업학교 동창이지만 그는 1반이고 나는 2반이어서 서로 얼굴만 알고 지내다 농대의 같은 과에서 만나 비로소 친하게 되었고 김종태는 이리농림학교 출신이었으니 친교를 맺은 연륜이 비슷한 셈이다. 그는 이리 옆 오산역의 남쪽 만경강 강둑 옆에 있는 들녘마을에 살았는데 마을 이름은 잊었다.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와 계모, 누이동생과 함께 살고 있었는데 언제나 고독해 보였으며 모든 일에 긍정적인 면보다는 부정적인 면이 많았고 약간은 냉소적이고 배타적인 성격이다. 옳고 그름과 하고 안함을 분명히 하였으며 비판적인 시각이 날카로웠었다. 위로 형이 있는데 분가하여 살고 있다고 하였으며 무슨 신문의 지방기자라고 하였다. 이리에서 그의 집까지는 6Km 쯤인데 창근이와 나는 가끔 가서 그 부친께 인사만 드리고 만경강 강둑으로 나가 술도 마시고 노래도 부르고 소리도 지르며 울분을 토해내곤 하였다.
날씬한 몸매에 쌍꺼풀의 미남으로 머리도 명석하고 공부도 잘했으며 집안 형편도 어려운 것 같지 않았다. 문학을 좋아하여 소설을 탐독하고 시도 줄줄 외워 나와는 문학 이야기를 자주 나누곤 하였는데 그는 주량이 두주를 불사할 정도였지만 아무리 마셔도 헛소리 하는 법이 없었고 자세가 흐트러지는 일도 없었다.
1955년 4학년 2학기가 되면서 우리 세 사람 중 내가 제일 먼저 부안여중의 교사로 취업이 되었고 1960년인가 종태가 김제 만경인가 진봉인가의 장씨 집안으로 장가를 들었으며 2~3년 후쯤에 군산여자중학교 수학선생으로 부임하였는데 그 후에 창근이와 셋이서 이리에서 만났을 때 아이들과 생활하는 교직생활을 매우 만족해 하며 갓 태어난 딸아이가 귀엽다고 자랑깨나 하였다.
그런데 1964년 어느 때던가 한 번도 상면한 일이 없는 그의 형님으로부터 종태가 혹 부안에 가지 않았느냐는 전화가 왔었다. 그러면서 종태가 한주일 전부터 행방불명이라는 것이다. 학교에서 퇴근 후 교직원들과 저녁 회식을 하고 헤어진 이후 행방이 묘연하다는 것으로 자살 피살을 막론하고 그 후 시신도 발견되지 않았으니 불가사의 한 일이다. 그 후 학교에서는 그 부인을 서무과에 채용해 생계를 잇게 해 주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뿐 종태는 짧은 생애를 그림처럼 살다가 연기처럼 가버려 지금까지도 내 가슴 안 한쪽이 빈 것처럼 허허롭다.
박창근(朴昌根)은 익산시 삼기면 오룡리 검지마을 사람이다. 그의 백형 박갑근(朴甲根)씨는 익산농요의 기능보유자(인간문화재)로 이름 있는 소리꾼이다. 이 어른이 1980년 초 어느 여름날 부안 소리의 전당인 부풍율회를 찾아 오셨는데 마침 부안지방의 큰 소리꾼 옹정의 김판술씨와 자리를 같이 하고 두 소리꾼이 소리를 매체로 곧 서로를 알아보고 친해져 모내기소리, 김매기소리, 등집소리, 지경다지기소리, 상여소리 등에 이르기까지 주고 받고 하는 소리판을 벌이니 그런 장관이 없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친구 박창근의 장형이었다.
창근이와 나는 고등학교 때는 반이 서로 달라 가깝게 지내지 못했으나 대학에 와서 비로소 가까워졌는데 그는 내가 갖고 있지 못한 장점을 다 갖고 있었다. 항시 겸손하고 모든 일에 과묵 신중하며 의리가 있고 친구를 먼저 배려하는 성품이다. 나와는 내 자취방에서 같이 뒹굴기도 하며 소탈하고 털털하여 그 험한 보리 가래밥도 가리지 않고 잘 먹었는데 담배가 골초였다. 후에 내가 그를 은사 신석정 선생님의 사윗감으로 추천하여 그 집 둘째 사위가 되었다. 나는 그를 함부로 대했으며 거친 말을 하여도 그는 항시 너그럽게 웃었으나 종태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좋고 싫은 것이 분명하였으며 비위에 맞지 않으면 험한 욕설도 마구 쏟아내는 성격이다.
첫댓글 감사히 읽었습니다.
읽허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