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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요즘처럼 청명한 가을날씨 속에 살게 되면 사는 일이 새삼스럽게 고맙고 풋풋해집니다.
도시에서도 그렇겠지만은 산중에서 살면 날씨 영향을 많이 받게 됩니다.
날씨가 우중충하고 비바람이 치고 그러면은 괜히 짜증이 나고
오늘처럼 이렇게 화창한 날씨에는 마음이 활짝 열려가지고 아주 즐거워지고 그럽니다.
요즘 연일 맑게 개인 청명한 가을 날씨 덕에 저도 여러가지로 일상을 흥겹게 지냈습니다.
그래서 이제 빨래를 빨래줄에 널면서 곧잘 서정주의 푸르른 날이라는 시를 두런두런 외우게 되요. 다들 잘 아시겠지만.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저기 저기 저 가을 꽃 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 드는데
눈이 내리면 어이 하리야 봄이 또 오면 어이 하리야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이런 시인데 송창식의 노래도 있지요?
이렇게 두런두런 시를 외우고 있으면 더 마음이 흥겨워지고 즐거워지고 사는 일이 새삼스럽게 고맙게 느껴집니다.
가을날 시을 읽고 있으면 마음이 아주 그윽해져요.
시는 그 언어의 결정체입니다. 그 안에 우리 말의 넋이 살아있습니다.
시를 두런두런 외우고 있으면 우리말의 아름다운 속얼굴이 투명하게 드러나요.
가끔은 바쁜 일상 속에서 시를 더러 읽으십시오.
지난 날 우리가 소년이나 소녀시절, 중고등학교 시절, 더러 시를 외웠지않습니까? 세상 살다보니 까맣게 묵어가지고 시가 뭔지, 소설이 뭔지, 산문이 뭔지, 운문이 뭔지 거의 모두 망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때로는 시를 읽으면서 자기 삶을 새롭게 가꿀 필요가 있습니다. 시를 읽으면은 피가 맑아져요. 무뎌진 감성에 녹이 벗겨집니다.
우리들 험한 세상 사느라고 감성이 얼마나 무뎌졌어요. 달이 뜨는지 해가 돋는지지 별이 있는지.. 도시 자체에서는 환경 자체가 그러니까 거의 무뎌지고 있습니다.
저는 요즘 밤으로 장시를 더러 읽고 있는데 왕유나 백낙천의 시를 읽고 있으면 사는 일이 새삼스럽게 고마워집니다.
요즘 우리는 눈을 뜨기 무섭게, 지겹고 짜증스런 뉴스에 크게 위축되고 있습니다.
미국발 금융위기가 어떻고 외환사정이 어떻고 펀드와 주권으로 몇조원을 날리고, 농사를 짓지도 않는 사람들이 국민세금으로 이루어진 쌀직부금을 받아가고, 들리는 소식마다 우리를 몹시 우울하게 합니다.
경제를 살리겠다고 나선 사람들이 경제를 살리기는커녕 널뛰고 있는 경제에 갈팡질팡 쫒기고 있는 그런 실정입니다.
입만 벌리면 우리는 경제 경제 하는데 우리는 가진것만큼 행복한가? 스스로 물을 수 있어야 됩니다.
많이 가진 사람들은 그만큼 행복한가? 그렇다고 해서 많이 갖지 못한 사람들은 다 불행한가요?
이와 같은 물음을 스스로 자기에게 던져야합니다.
외부적인 여건만 가지고 행복불행을 평가할수는 없습니다.
많이 가졌으면서도 살 줄을 모르면 불행하고, 적게 가지고 있으면서도 살 줄을 알면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행복과 불행은 외부적인 상황이나 여건에만 있지 않고
내적인 수용여부에 즉 받아들이는 삶의 자세에 행복과 불행이 달려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요즘처럼 들려오는 소식에 휩쓸리다 보면은 우리들 자신이 너무 왜소해지고 무기력해집니다. 살아가는 일에 자신을 잃고 끝없이 방황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와같은 외부적인 현상만이 삶의 전부는 아닙니다. 경제경제 하지만은 경제만이 우리 삶의 전부가 아닙니다.
눈을 안으로 돌리면 보다 긍정적이고 아름답고 향기로운 영역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늘 우리가 눈앞의 현실, 밤낮 들려오는 뉴스에만 귀기울이고 거기에 매몰하다보면 삶 자체가 시들해요.
그런 외압에 짖눌려서 안으로 충분한 잠재력과 가능성이 있는데 그걸 읽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사는일이 지겹고 힘들어집니다.
옛사람들은 어떻게 살았는지 그 삶의 자취를 살펴보면은 그 후손인 우리들이 배울 바가 참으로 많습니다.
252년 전 서울을 배경으로 활동한 장오현 이라는 선비가 있습니다.
그는 평생의 소망이라는 글에서 이런 내용을 닮고 있습니다.
인왕산 아래 옥류동 골짜기에 있는 허름한 집 한채에 마음이 끌려가지고 언젠가는 그 집을 사들여서 꾸미고 싶은 소망에 아주 부풀어 있어요. 그 집을 팔려고 내놨는데 집값을 물어보니까 엽전으로 500냥, 250여년 전의 500냥이면은 그렇게 큰 돈이 아닌가봐요. 그는 이걸 자기가 사가지고 그런 꿈을 꾸어요.
집 둘레에는 평소 자신이 좋아하는 나무를 심고 꽃을 가꾸고 채소밭을 일구고 사는 꿈에 그는 늘 부풀어 있습니다. 이 평생 소망의 부엌에서는 자신이 꿈꾸는 이상적인 주거공간에서 어떻게 살겠다는 생활의 모습이 낱낱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내가 누리는 행복, 일상에 쓰는 도구, 늘 하는 일, 귀중하게 여기는 책, 즐기는 경치, 조심할 것들을 차례차례로 나열하고 있어요.
그 중에서도 맑은 복 8가지를 들고 있는데
첫째, 태평시대에 태어난 것. 자기가 태어난 시대가 전란이 없고 아주 태평시대래요. 그러니까 그때가 소위 문예부흥기라고 할 수 있는 영정조시대입니다. 250여년전 다산 이분들이 살고 하던 때예요.
둘째, 서울에 사는 것. 요즘 같은 서울은 대단치 않은데, 250여년 전 서울은 도성으로써, 시골은 여러가지고 궁벽하고 교통수단같은 것도 요즘 같이 않아서 서울이 아마 살기 좋았던가봐요.
셋째, 자기자신이 다행히 선비 축에 낀 것. 어느 정도의 교육을 받았다는 선비 축에 낀 것.
넷째, 문자를 대충 이해하는 것. 겸손한 표현이예요.
다섯째, 산수가 아름다운 곳 하나를 차지한 것. 아마 그 자기가 꿈꾸던 옥류동 골짜기의 집을 사 들여서 이렇게 표현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여섯째, 꽃과 나무를 천그루를 가진 것, 대단해요. 꽃과 나무 천그루를 가지고 있었던가봐요.
일곱째, 마음에 맞는 벗을 얻은 것. 이게 아주 중요한 겁니다. 마음에 맞는 벗을 있다는 사실은 든든한 자산이예요.
여덟째, 좋은 책을 소장한 것.
이와 같이 맑은 복 여덟 가지를 들고 있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들도 각자 내 자신이 어떤 맑은 복을 지금 누리고 있는지 돌이켜보세요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정말 내가 조촐하게 지니고 싶은 그런 맑은 복이 있다면 한번씩 들어보세요. 들춰보십시오.
아마 그런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살았고
맑고 흐리니 이런 분별도 없이 살았기 때문에 갑자기 생각이 나지 않겠지만은, 이 다음 한가한 시간에 내가 지금 순간순간 나에게 주어진 맑은 복을 어떻게 받아쓰고 있는가 그렇게 한번씩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저는 새삼스럽게 제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전에도 제가 몇번 말씀드렸는데 경전이 되었건, 누구의 글이 되었건, 건성으로 객관적으로만 읽고 지나치지 마십시오. 그것을 자기 삶의 거울에 비춰볼 수 있어야 해요. 그래야 그 경전을 읽는, 책을 읽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 경전을 통해서, 그 책을 통해서 자기자신을 읽는 거예요.
새삼스럽게 제 자신의 처지를 되돌아 보게 되었습니다. 제가 산중에서 혼자 지내면서도 기가 죽지 않고 나날이 새로워지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내 뒤에서 내 자신을 받쳐주고 있기 때문에 그럴까 하는 그런 생각이 있었어요.
그러면 내 둘레에 무엇이 있는가 돌아보니까, 스승과 말벗이 될 수 있는 몇 권의 책이 있습니다. 고마운 존재들이예요.
스승과 말벗이 될 수 있는 몇 권의 책을 제가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고맙게 생각하게 되요.
둘째, 출출하거나 무료해지려고 할 때 마시는 차가 있어요. 제가 산중에서 살면서 차맛을 모른다면 무슨 재미로 살까 이런 생각을 문득문득하게 되요. 단지 차만 마시는 것이 아니고 그 차를 통해서 자기자신을 되돌아보고 또 사물을 보고 생각하고 그런 그 여유를 갖게 됩니다. 삶의 아주 맑은 여백같은 것이죠.
셋째, 혼자 살면 사람들이 딱딱하고 굳어지잖아요. 걸핏하면 신경질이나 부리고. 내가 굳어지려는 삶에 탄력을 주려는 음악이 있어요. 다행히 전기가 들어오지 않은 곳이라서 건전지를 쓰는 조그마한 소리통을 통해서 음악을 들을 수 있어요.
넷째, 내 일손을 기다리는 채소밭이 있다는 사실이 아주 새삼스럽게 고맙게 여겨지더라고요.
책과 차와 음악과 채소밭이 내 삶을 녹슬지 않게 받쳐주고 있다는 그런 사실이 아주 고맙게 여겨졌습니다.
여러분들도 이제 한가한 시간에 자기 삶을 녹슬지 않게 받쳐주고 있는 그런 그 맑은 복이 몇개나 되는지 한번씩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바쁜 일상 속에서 마음 한구석에는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한적한 삶을 누리고 싶은 그런 꿈을 지니고 있습니다. 누구나 그래요. 이 다음에 아이들을 다뒤치닥거리해놓고 어디 시골에나 내려가서 진짜 내가
조그만 밭이라도 일구면서 한가하게, 그동안에 살지 못했던 그런 한가하게 좀 지내고 싶다라는 이런 소망들을 가지게 되는 거예요.
그런 꿈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아주 우리가 풋풋한 가슴을 지니게 합니다. 또 이러한 꿈은 우리들의 본능이예요. 꼭 뭐 돈 있는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그렇게 살고 싶어 하는 그런 본능적인 소망이 있다고요. 앞에서 이야기 한 선비의 평생의 소망도 그런 꿈의 일종의 표현입니다.
언제 현실로 이어질지 알 수 없는 소망이지만은 미래를 설계하는 그 상상만으로 현재의 삶은 아주 풋풋해질 수 있습니다.
일상에 찌들지 않고 늘 풋풋한 그런 가슴을 지닐 수 있어요. 그런 꿈이 있기 때문에.
잘 아시다시피 소동파는 송나라때 시인이고 관료였던 그 소동파는 적벽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저 강물 위의 맑은 바람과 산중의 밝은 달이여
귀로 들으니 소리가 되고 눈으로 보니 빛이 되는구나
가지고자해도 말릴 사람 없고 쓰고자해도 다할 날 없으니
이것은 천지자연의 무진장이로다"
우리 둘레는 이런 무진장한 천지자연이 무수히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챙기지 않기 때문에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에 내 일상생활과 연결이 안되요.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을 즐길줄 아는 사람은 세상에 그리 흔하지 않습니다.
또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이 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가령 보름달 같은 것을 볼때 나이 든 사람은 저절로 그런 생각을 하게 될거예요. 젊은 사람들은 '오 달이 또 떴네' 이러겠지만
요즘은 텔레비젼 통해서 날마다 보니까.
내 남은 평생, 평생에 둥근달을 몇번이나 볼까. 나이든 사람은 그럴거예요. 둥근달을 보면서, 달맞이를 하면서 내가 남은 이 생애동안 이 달을 몇번이나 볼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되요.
한번 지나가버린건 다시 되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때그때 그걸 감사하게 받아쓸 수 있어야해요.
또 달은 기약할 수 없습니다. 이다음달에 흐려서 비가와서 날이 궂어서 뜰지말지 알 수 없는 거예요.
강산은 원래 주인이 따로 없습니다. 강과 산은 본래 주인이 따로 없습니다.
그것을 보고 느끼면서 즐길 줄 아는 사람만이 바로 강산의 주인이 됩니다.
이와같이 우리 둘레는 우리가 관심을 안으로 기울이면은 우리들의 삶을 보다 풍요롭게 하는 것들이 무수히 있습니다.
그런데 눈을 밖으로만 팔기 때문에 외부적인 상황이나 그 덫에 걸려서 삶을 제대로 이루지 못합니다.
우리 둘레에는 이렇게 무진장한 고마운 자연이 기다리고 있어요. 우리를 위로하고 감싸주고 우리를 먹여살리는 그런 자연이 여기저기 널려있습니다.
그러나 정신을 밖으로만 쏠리느라고 그걸 찾아내지 못해요. 있는지 없는지 관심조차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좋은 날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이 무수히 있잖아요.
이 청명한 가을날 우리는 이렇게 앉아서 이런 이야기를 주고 받는데 본인을 이기지 못해서 오늘도 자살하는 사람이 30여명이 있을거래요. 결코 자랑스러운 통계는 아니지만 우리나라의 자살률이 세계경제협력기구 국가 중에서 첫째간다고 하지 않습니까.
한해 12000여명, 하루로 치면 30여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대요. 단 하나밖에 없는 자신의 귀중한 목숨을 스스로 끊고 있는겁니다. 목숨처럼 귀하고 소중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단 하나뿐이예요. 다시 되돌릴 수 없는거예요.
그런 목숨을 너무도 소홀히 여기고 있어요. 내팽개치고 있습니다.
이 순간에도 병원에서 사경을 헤매는 환자들은 단 몇분만이라도 더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산소호흡기를 떼지 못하고 있는 그런 상황에 있습니다.
환자뿐 아니라 환자 가족들도 조마조마하면서 단 몇분만이라도 더 살아있기를 소망하는 그런 가족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이런 존엄한 목숨을 너무 무가치하게 내팽개치고 있다는 사실이 아쉬워요.
자기 혼자만 위해서 살거나 죽는 것은 더 따질 것도 없이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그건 자랑스러운 일이 못되요.
이유가 개인적으로 봐선 이유가 어디있던 간에 자기 혼자만을 위해서 스스로 목숨을 내던진다는것은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사람은 혼자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설사 떨어져지낸다 하더라도 그는 가족과 친지들과 수많은 이웃들과 함께 삶의 흐름을 이루고 있어요. 가족과 친지들과 수많은 이웃들과 함께 어떤 삶의 흐름을 이루고 있습니다.
자기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함께 어울려 흐름을 이루는 삶의 대열에서 제 기분대로 이탈하는 것은 결코 명예스러운 일이 못됩니다.
스스로 자기 목숨을 끊는다고 해서 고통스러운 일들이 다 해결되는 겁니까.
죽음은 결코 끝이 아닙니다. 또 다른 삶의 시작이라는 사실을 깊이깊이 헤아려야 해요. 죽으면 그만이 아니라니까요. 그것은 끝이 아닙니다. 또 다른 삶의 시작이라는 사실을 깊이깊이 명심해야 해요
이것은 동서고금의 모든 선각자들이 자기 체험에서 몇생을 겪으면서 체험해서 우러나서 하는 소리입니다.
자살은 자신의 목숨을 자신의 손으로 끊는 자해행위예요. 스스로 자기를 해치는 행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또 하나의 자해의 업, 스스로 자신을 해치는 자해의 업을 짊어지고 다음 생으로 이어지는 윤회의 사슬 같은 거예요.
윤회에는 고통이 따릅니다. 스스로 자기 목숨을 끊는 자해의 업을 또 하나 더 거기에 추가해가지고 이 다음 생으로 이어지는 윤회의 사슬이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되요.
우리들이 평소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모두 업이 됩니다. 제가 이 자리에서 되풀이해서 무수히 말했습니다.
듣고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이것은 일회적으로 끝나지 않고 업이 되요.
말이 씨가 된다고 하지않습니까. 죽고싶네죽고싶네 하면 결국 죽게되요. 이것이 업의 파장입니다.
말뿐이 아니라 보고 듣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
다음생으로 이어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