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 14도 한국의 5월 날씨(지금은 2월 10일).
도우강 푸른 초원 위로 해꼬리가 떨어지는가 싶더니 어느새 빨간 보자기가 성큼 덮어버렸다. 이베리아반도 포르토 어디쯤에서 리스본으로 달리는 열차, 그 덜컹거림에 취했다가 ‘하염없이’라는 단어를 떠올린 것도 저무는 노을 탓이다.
그 노을은 유년의 벌판 서쪽에서 처음 만난 것 같다. 태안 백화산(8세까지 백두산인 줄 알았음) 위로 노을이 덮이기 시작하면 생강밭이나 감나무는 물론 갈마리 하천에서 한머리 전체를 빨간 색칠로 먹어버렸다. 적돌만과 도비산 그리고 하늘과 하천까지 모두 빨갰다. 우리들은 감탄사를 찾을 줄 몰랐으므로 그냥 '빨갛다'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두 번째 노을은 논산 쌘뽈여고 총각선생 시절이다. 놀뫼평야 쪽으로 노을이 밀리기 시작하면 담벼락과 광, 마루와 목련나무 아래 장독대까지 온통 빨간 색깔이니, 이따금 하숙집을 급습하는 여고생 제자 앞에서도 빨간 얼굴이 그대로 노출되기도 했다. 그 저녁놀이 진하게 떠오르다니.
포르토에서의 겨울 복장 그대로 열차에 올랐다가 더위를 먹으면서 생애 처음 멀미를 먹었다. 처음에는 왜 머리가 아픈지 몰랐다. 멀미인 줄 알았다가 나중에 옷을 몇 개 벗으니 금세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며 몸이 풀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리스본에서 조금만 더 아래로 내려가면 아프리카 북단이라는 것을 깜빡한 것이다.
생애 처음은 음식 투정에서도 나타났다. 그동안 나는 비행기 탄 사람들이 ‘김치 깍두기가 먹고 싶어’ 따위의 뇌까림을 손톱만큼도 이해할 수 없었다. ‘바깥에 나갔으면 현지 음식을 먹어야지.’ 하며 어이없어 하는 표정을 강하게 던져주곤 했다. 그런데 그날 저녁 리스본 어느 싸구려 식당에서 우리 네 식구는 한 시간 내내 ‘맛있는 반찬’ 타령의 열거에 빠졌다. 참치찌개나 감자탕, 동태찌개, 어리굴젓, 뼈다구탕을 떠올리면 아주 짧게나마 그런 부류의 스크린이 냄비뚜껑 들썩이며 보글보글 끓는 것이다.
오십 직전까지 어머니의 손맛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명절이 끝나고 해물전 같은 것들에게서 신맛이 들어올라 치면 어머니는 재빨리 전 찌개로 변신시켰다. 그 국물에 밥을 비벼먹으며 오랜 시간 공복을 잊었었다. 지금 어머니는 92세. 이차구차 이유로 아직 ‘남이 차려주는 밥상’ 없이 그냥 속절없는 표정으로 주방에 머무르신다, 아, 목이 멘다.
1987년도 7월이었던가, 대전 은행동 풍년갈비 맞은편 지하 빈들교회에서 처음 아내를 만났다. 젊은 풍물패 ‘터’의 창단식이었고 몇 개의 단체 연합 발대식 같은 자리였고 나는 해직교사의 자격으로 참석했던 것 같다. 대각선으로 마주한 자리의 생머리 그미를 보며 얼핏
‘저 여자가 내 아내구나’
를 아주 짧게 떠올렸던 것 같다.
5공화국 해직교사 멤버 중 최교진, 전인순, 황재학은 결혼을 했었고 송대헌과 조재도, 전무용은 애인이 있었다. 몇몇 사람이 등허리 떠밀었고 나도 싫은 표정을 짓지 않았다. 600일쯤 만나다가 둥지를 틀었다.
부부는 결혼 이후 혁명의 시대를 스쳐 보내며 주로 술집과 도서관 탐방을 다녔다. 제주도나 부산여행에서도 한두 차례는 도서관에 들러 인증샷을 찍고 책을 읽었다. 마찬가지였다. 이번에도 스무 권의 시집을 끌고 왔다. 아파트 시집 코너에서 무작위로 쑤셔넣은 활자 중 도종환, 육근상, 이정록, 권덕하, 송진권, 안도현, 박두규, 황규관의 시집을 독파했으니 12권이 남았다. 그러데 이상하다. 일주일이 지나도록 술 담배가 전혀 유혹하질 않는 것이다. ‘정년퇴임’이라는 단어도 잠깐 잊혀져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