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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장성군 북하면 솔용
松磵羅公墓表(1647~1717) 德殷 宋秉虁
昔我先祖華陽夫子之門 摳衣之士 甚盛而自幼受業 久益服勤者 曰松磵羅公諱重器是已
肅宗丁巳中司馬 時尤翁以禮松 北謫南遷 栫棘瀛海 至有告廟之論 公抗章天門 明辯師門被誣之寃
政院啓曰湖南進士羅重器 以一種怪鬼之從 敢爲罪魁 投進張皇之疏 如許之類 不可暫留於輦轂之下 人皆爲公危之 公則無機微色焉
至庚申更化後 始筮仕 內以爲參奉 奉事直長 歷兵戶禮三曹 佐郞正郞 移監察主簿 外以爲盈德槐山高敞淳昌金川 皆前後履歷也
尤翁曰求仁得仁 譬諸夷齋 又曰焚斫之餘 老栢걸屹而不僵
李西河鄭丈巖李寒圃齋趙二憂堂李疎齋金竹泉金北軒諸名賢 或以以書 推重焉 斯可以諗夫永世歟
公濡染家庭 薰炙師門 學問純熟 門路端的而況丁巳一疏明 白痛快 以盡三一之義者乎
公字子珍 羅州人也 鼻祖諱富 勝國監門衛上將軍 中廟朝有 諱昶 號止齋 文科湖當翰林
稔知金安老之奸凶 不欲與同朝 而退休焉 卽公五世祖也
祖諱海鳳 號南磵 官別提 早從睡隱姜公學 而晩乃卒業于文 元公沙溪金先生之門
丙子之難 發檄募義 前後遭艱 守墓塵制 鄕人立祠俎豆之
考諱俊 號溪叟 從遊於谿谷張公 登司馬 以陪親從戎 除孝陵參奉 享谿磵祠 妣珍原朴氏生員濬哲女 直提學熙中五代孫也
公早年投紱 逍遙林泉 十有餘載 丁酉壽七十一而以疾復于家 墓在長城北面 巽坐之原
配全義李氏通德郞䪫 女 吏判大提學文靖公愼儀曾孫也
有二男 長聖奎次瑞奎 長房生進士廷一 因賊臣弘錫凶疎 疎卞未達 而爲彼黨搆罪遠竄
次房生廷燮廷弼廷一生得繪 廷燮生得絅得緯餘括若干人也
今公之後孫亨均鍾聲龍均 將營樹表于阡 謁余以文 揆以先誼 不敢辭 遂就基狀 檃 ?括如石
歲在著雍攝提格暮春 日德殷宋秉虁謹撰
松磵羅公墓表 (송간나공묘표)-1 - 송간 나중기 묘표 - 德殷 宋秉虁(덕은 송병기) 재벌번역/나천수(나주목 향토문화연구회 부회장)
昔我先祖華陽夫子之門(석아선조화양부자지문)/옛날 우리 선조 송시열 문하에서 摳衣之士 (구의지사)/ 배우는 선비들이 甚盛而自幼受業(심성이자유수업)/매우 많았는데, 어려서부터 수업을 하여 久益服勤者曰(구익복근자왈)/갈수록 더욱 부지런히 따르는 자를 말하자면 松磵羅公諱重器是已(송간나공휘중기시이)/송간 나중기 바로 이 사람이다. 肅宗丁巳中司馬 (숙종정사중사마)/ 숙종 정사년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時尤翁以禮松 (시우옹이예송)/ 이 때에 우암 송시열 옹이 예송문제로 北適南遷 (북적남천)/북쪽으로 귀양을 갔다가 남쪽으로 移配되어 栫棘瀛海至有告廟之論 (천극영해지유고묘지논)/큰 바다에 이르기까지 배소(配所)의 주위에 가시 울타리를 설치하여 외부와 격리하고 종묘 사당에 고하자는 논의가 있었다. 公抗章天明辯師門被誣之寃(공항장천명변사문피무지원)/공은 글을 써서 두둔하면서 임금께 사문의 무고를 당한 원통함을 변명하였다. 政院啓曰(정원계왈)/승정원이 아뢰기를 湖南進士羅重器(호남진사나중기)/“호남의 진사 나중기는 以一種怪鬼之從(이일종괴귀지종)/일종에 도깨비 같이 나아가며 敢爲罪魁投進張皇之疏如(감위죄괴투진장황지소여)/감히 죄인의 우두머리를 위하여 장황한 상소를 올렸는데, 如許之類不可暫留於輦轂之下(여허지류부가잠유어연곡지하)/ 이와 같은 무리들이 잠시라도 임금이 타는 수레 아래 머물러 있게 해서는 아니 된다. ” 하니 人皆爲公危之(인개위공위지)/사람들이 모두 공을 위험하다고 하였지만 公則無機微色焉(공칙무기미색언)/공은 기색이 변하는 낌새가 없었다. 至庚申更化後始筮仕內以爲參奉 (지경신경화후시서사내이위참봉)/ 경신년에 이르러 갑술경화 후에 비로소 처음 벼슬을 얻어 內職으로는 南別殿 참봉, 奉事直長歷兵戶禮三曹佐郞正郞移監察主簿(봉사직장역병호예삼조좌랑정랑이감찰주부)/內贍寺 奉事, 禮賓奉事, 직장을 역임하고, 병조, 호조, 예조 3조의 좌랑, 정랑을 하고 감찰의 주부로 옮겼으며 外以爲盈德槐山高敞淳昌金川皆前後履歷也(외이위영덕괴산고창순창김천개전후이력야)/ 外職으로는 영덕현감, 괴산군수, 고창현감, 순창군수, 금천군수가 모두 전후 이력이다. |
尤翁曰求仁得仁 (우옹왈구인득인)/ 우암옹이 말하기를 “仁을 구하여 仁을 얻었다.”라는
譬諸夷齋 (비제이재)/ 백이(伯夷)와 숙제(叔齋)의 고사를 비유하였고
又曰焚斫之餘 (우왈분작지여)/ 또 말하기를 “불타고, 찍히고 한 나머지의
老栢傑屹而不僵 (노백걸흘이부강)/ 늙은 잣나무가 뛰어나게 우뚝 솟아 쓸어지지 않았다.” 하였다.
李西河鄭丈巖李寒圃齋趙李疎齋金竹泉金北軒諸名賢 (이서하정장암이한포재조이소재금죽천금북헌제명현)/서하 이민서, 장암 정호, 한포재 이건명, 소재 이이명, 죽천 김진규, 북헌 김춘택과 여러 명현들은
或以詩書推重焉 (혹이시서추중언)/ 혹은 시와 혹은 글로서 추앙하여 尊重히 여기었다.
斯可以諗夫永世歟(사가이심부영세여)/이것은 영원히 임금께 간하는 지아비라 할 수 있다.
公濡染家庭 (공유염가정)/ 공은 가정에서 익숙하게 익혔으며
薰炙師門 (훈자사문)/ 스승의 문하에서 교화를 받았다.
學問純熟 (학문순숙)/ 학문은 완전히 익었으며
門路端的而況丁巳一疏 (문로단적이황정사일소)/학문의 나아갈 길이 분명하고 하물며 정사년에 한 번의 상소로
明白痛快 (명백통쾌)/명백하고 통쾌하였으니
以盡三一之義者乎 (이진삼일지의자호)/임금과 스승과 아버지가 일체라는 의리를 다함이었다.
公字子珍羅州人也 (공자자진나주인야)/공의 자는 자진이요 나주인으로
鼻祖諱富勝國監門衛上將軍 (비조휘부승국감문위상장군)/시조는 휘 富로 바로 전대 왕조에서 감문위 상장군을 하였으며
中廟朝有諱昶號止齋文科湖當翰林(중묘조유휘창호지재문과호당한림)/중종조에 휘 창은 호가 지재요, 문과 합격하여 호당의 한림을 지냈으며
稔知金安老之奸凶 (임지금안노지간흉)/김안로의 간사한 흉계를 자세히 알고
不欲與同朝 (부욕여동조)/조정에서 함께 하기가 싫어서
而退休焉 (이퇴휴언)/물러나 쉬었으니
卽公五世祖也(즉공오세조야)/곧 공의 5세조이다.
祖諱海鳳號南磵官別提(조휘해봉호남간관별제)/조의 휘는 해봉으로 호가 남간이며 벼슬이 별제로
早從睡隱姜公學 (조종수은강공학)/ 일찍이 수은 강항선생을 따라 학문을 하였으며,
而晩乃卒業于文元公沙溪金先生之門(이만내졸업우문원공사계김선생지문)/만년에는 문원공 사계 김장생 선생의 문하에서 졸업하였다.
丙子之難發檄募義 (병자지난발격모의)/병자년의 난리에는 격문을 보내어 의병을 모집하였고
前後遭艱守墓塵制 (전후조간수묘진제)/ 난리 전후로 喪을 당하여 시묘살이를 하며 禮制를 다하였다.
鄕人立祠俎豆之(향인입사조두지)/고을 사람들이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냈다.
考諱俊號溪叟 (고휘준호계수)/아버지 휘는 俊으로 호는 계수이며
從遊於谿谷張公 (종유어계곡장공)/계곡 장유공을 따라 교유하였으며
登司馬 (등사마)/사마시에 합격하고
以陪親從戎 (이배친종융)/아버지를 따라 從軍하였다.
除孝陵參奉 (제효릉참봉)/ 효능 참봉에 제수되었으며
享谿磵祠 (향계간사)/ 계간사에 향사되었다.
妣珍原朴氏生員濬哲女 (비진원박씨생원준철여)/ 어머니는 진원박씨 생원 준철의 따님이요,
直提學熙中五代孫也 (직제학희중오대손야)/직제학 희중의 5대손이다.
公早年投紱(공조년투불)/공은 이른 나이에 벼슬을 버리고
逍遙林泉十有餘載(소요임천십유여재)/ 10여 년간 세상을 피하여 조용히 사는 선비의 정원에서 소요하다가
丁酉壽七十一而以疾復于家 (정유수칠십일이이질복우가)/정유년(1717년) 나이 71세에 병으로 집에서 돌아갔다.
墓在長城北面巽坐之原(묘재장성북면손좌지원)/묘는 장성군 북면 巽坐의 벌판에 있다.
配全義李氏通德郞䪫女/배는 전의 이씨로 통덕랑 경의 따님이며
吏判大提學文靖公愼儀曾孫也(이판대제학문정공신의증손야)/이조판서, 대제학 문정공 (石灘)慎儀의 증손이다.
有二男長聖奎次瑞奎(유이남장성규차서규)/두 아들을 두었으며 장남은 성규이고 차남은 서규이다.
長房生進士廷一 (장방생진사정일)/큰아들 쪽에서 진사 정일을 낳았는데
因賊臣弘錫凶疎 (인적신홍석흉소)/임금에 불충한 신하 弘錫의 흉한 상소한 까닭에
疎卞未達而爲彼黨搆罪遠竄(소변미달이위피당구죄원찬) /상소하여 변명하였으나 통하지 않아 저 무리들이 죄를 얽어서 멀리 귀양 보냈다.
次房生廷燮廷弼廷一生得繪 (차방생정섭정필정일생득회)/차남 쪽에서는 정섭, 정필이 태어났으며, 정일은 득회를 낳고
廷燮生得絅得緯餘括若干人也(정섭생득경득위여괄약간인야)/정섭은 득형, 득위를 낳고 나머지는 모두 약간인이다.
今公之後孫炯均鍾聲龍均 (금공지후손형균종성용균)/ 이제 공의 후손 형균과 종성 그리고 용균이
將營樹表于阡 (장영수표우천)/ 장차 무덤에 표석을 세우려 하면서
謁余以文 (알여이문)/ 나에게 글을 청하여
揆以先誼 (규이선의)/선대의 사귄 정을 헤아려
不敢辭 (부감사)/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遂就其狀檼括如石(수취기장은괄여석)/드디어 나아가 功績을 돌 같이 다듬었노라.
歲在著雍攝提格暮春日(세재저옹섭제격모춘일)/무인년(1938년 음력 3월 일에
德殷宋秉虁謹撰(덕은송병기근찬)/덕은 송병기 삼가 짓다.
<해설>
○華陽夫子(화양부자)는 송시열을 지칭한다.
부자는 존칭어이다. 공자는 공부자, 맹자는 맹부자로 존칭하기에 우리나라도 존경하는 인물에게는 존칭어를 붙였다.
이외 존칭어가 바로 子이다.
공자의 본명은 孔丘이며, 맹자의 본명은 孟軻이고, 장자의 본명은 莊周인데, 이들을 높여 부른 칭호가 공자, 맹자, 장자 이다.
그래서 송시열의 문집을 宋子大典이라 한 것이다.
○摳衣(구의)는 직역하면 옷을 걷어 올림, 옷자락을 걷어 올리고,
의역하면 배우다, 문하에 들어가다,
○久益(구익)은 갈수록 더욱,
○栫棘(천극)은 유배(流配)된 죄인에게 가해지는 형벌. 곧 배소(配所)의 주위에 가시 울타리를 설치하여 외부와 격리(隔離)하는 것.
○瀛海(영해)은 큰 바다,
○天明(천명)은 임금,
○政院(정원)은 승정원,
○張皇之疏(장황지소)은 장황한 소를 올리다.
○如許之類(여허지류)은 이와 같은 무리들이
○輦轂(연곡)은 임금이 타는 수레
○筮仕(서사)는 처음 벼슬을 얻음,
○승정원 일기에 보면 나중기의 直長 벼슬은 발견되지 않는다.
○南別殿은 영희전(永禧殿)의 먼저 이름, 조선 시대에, 태조·세조·숙종·영조·순조의 영정(影幀)을 모신 전각(殿閣)임,
○夷齋(이재)는 백이(伯夷)와 숙제(叔齋)
○求仁得仁의 고사
자공(子貢)이 공자에게 “백이ㆍ숙제는 어떤 사람입니까?”라고 물으니, 공자는 “옛날 어진 사람이다.” 하였다. 자공이 또 “후회를 하였습니까?”라고 물으니, “인(仁)을 구하여 인을 얻었으니 또 무엇을 후회하랴.” 하였다. 《論語 述而》
○李西河(이서하)는 西河 李敏敍, 1633 (인조 11) - 1688 (숙종 14),
영의정 이경여(李敬輿)의 아들이며, 뒤에 도정 후여(厚輿)에게 입양되었다. 서울에 살았으며 송시열(宋時烈)을 사사하였다.
1650년(효종 1) 진사시에 합격하고, 1652년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검열·정언·지평·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현종초 수찬으로 있을 때 허적(許積)을 탄핵하다가 병조좌랑에 전직되었고, 검상·헌납·응교·사인·나주목사 등을 역임하였다. 이조와 호조의 참의를 거쳐 광주목사(光州牧使)로 있을 때 병으로 사직하였다.
그뒤 승지·대사간·대제학에 이어 공조·이조·병조·호조의 참판을 거쳐 1683년(숙종 9) 강화부유수가 되고, 예조·호조·이조의 판서를 차례로 역임한 뒤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가 되었다.
문장과 글씨에 뛰어나 많은 시문을 남겼으며, 김수항(金壽恒)·이단하(李端夏)·남구만(南九萬) 등과 교유가 깊었다.
1677년 광주목사로 있을 때에는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박광옥(朴光玉)의 사우를 중수하고, 김덕령(金德齡)을 제향하였다. 나주의 서하사(西河祠)와 흥덕의 동산서원(東山書院)에 제향되었다.
○鄭丈巖(정장암)은 丈巖 鄭澔, 1648(인조 26)~1736(영조 12),
정철의 4대손으로 아버지는 감찰 경연(慶演)이다.
노론의 영수인 송시열의 문하에서 공부했고, 1682년(숙종 8) 생원이 되었으며 1684년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이후 검열과 정언을 지냈으나,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정권을 잡자 파직되어 문외출송(門外黜送)당했다가 경성(鏡城)에 유배되었다. 1694년 갑술옥사로 남인이 몰락해 서인이 다시 정권을 잡자 풀려나 지평·수찬·교리 등을 역임했다.
1699년 동래부사를 거쳐 광주부윤(廣州府尹)·승지·부제학·함경도관찰사를 지냈다.
1710년 대사간·대사헌 등을 역임했으나 당론을 일삼는다 하여 흥해(興海)·갑산(甲山) 등지에 유배되었다.
1713년 대사성에 재임용되어 송시열의 묘정배향(廟庭配享)을 건의했다. 1715년 그가 부제학이 되었을 때, 유계(兪棨)의 손자인 유상기(兪相基)가 조부의 유저(遺著) 〈가례원류 家禮源流〉를 간행했다. 이때 권상하(權尙夏)가 서문을 쓰고 그가 발문(跋文)을 쓰게 되었는데, 이들은 서문과 발문에 소론 윤증(尹拯)이 스승인 송시열을 배반했다고 비방하는 내용을 썼다(→ 가례원류시말). 숙종은 평소에 윤증을 후대해 우의정에까지 임명했으며, '유상'(儒相)이라 칭하며 가까이 했었다. 그해 윤증이 죽어 숙종은 매우 애석해 하고 있었는데, 정호가 그를 공격하자 유현(儒賢)을 배척했다 하여 파직시키고 발문을 없애버렸다. 이에 조정의 노론들이 일시에 상소하여 그를 구하고자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소론도 권상하를 공격하여 〈가례원류〉의 서문마저 삭제하도록 청했다. 이 사건으로 노론과 소론의 당쟁이 격화되어 노론·소론의 대신과 성균관 유생들까지 서로 상소하여 몇 개월이 지나도록 그치지 않았다. 결국 1716년 노론이 승리함으로써 정호는 대사헌이 되고 그가 쓴 발문도 회복되었다. 이해 윤선거(尹宣擧)의 문집 〈노서유고 魯西遺稿〉가 간행되자 노론 계통의 재야유생들이 이 문집에 효종에 대한 불손한 내용이 있다고 훼판(毁板)할 것을 상소하자, 그도 여기에 적극 가담해 결국 문집의 각판(刻板)을 깨뜨려 없애고, 윤선거 부자의 관직도 추탈(追奪)하게 했다.
○李寒圃齋(이한포재)는 李健命, 1663(현종 4)~1722(경종 2),
경종대의 노론 4대신(老論四大臣)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 전주. 자는 중강(仲剛), 호는 한포재(寒圃齋).
할아버지는 영의정 경여(敬輿)이며, 아버지는 지돈녕부사 민서(敏叙)이다. 1686년(숙종 12) 춘당대문과에 급제하여 설서·수찬·교리·이조정랑 등을 지냈다.
○李疎齋(이소재)는 李頤命, 1658(효종 9)~1722(경종 2),
할아버지는 영의정 경여(敬輿)이며, 아버지는 대사헌 민적(敏迪)이다. 1680년(숙종 6) 별시문과에 급제, 홍문관정자에 기용된 후 박사·수찬·응교·헌납·이조좌랑 등 청요직(淸要職)을 역임했다. 1686년 문과 중시에 급제하여 강원도관찰사로 나갔다가 승정원의 승지가 되었다. 이 기간 동안 송시열(宋時烈)·김석주(金錫胄) 등 노론 거물의 지원 아래 노론의 기수로 활동했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면서 파직, 영해·남해에서 유배생활을 했고, 1694년 갑술옥사로 서인이 정권을 잡게 되면서 호조참의로 복귀했다. 그후 대사간까지 승진했으나, 기사환국 때 송시열 등과 함께 죽은 형 사명(師命)이 정치적으로 신원되지 못하자, 1698년 이를 문제삼다가 공주로 유배되었다. 이듬해 유배가 풀렸으나 기용되지 못하다가 1701년에 예조판서로 특임되었으며, 이후 한성부판윤·이조판서 등을 지냈다. 1706년 우의정에 올랐으며, 1708년에는 좌의정에 올랐다.
○金竹泉(김죽천)은 金鎭圭, 1658(효종 9)~1716(숙종 42),
송시열의 문인으로 1682년(숙종 8) 진사시에, 1686년에는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좌랑 등을 지냈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자 거제도로 유배되었다가, 1694년 갑술환국으로 남인이 제거당하자 지평(持平)에 기용되었다. 노론과 소론의 대립이 깊어지면서, 소론 남구만(南九萬)으로부터 척신(戚臣)으로서 월권행위가 많다는 탄핵을 받고 삭직되었다. 1699년에는 동부승지로서 송시열과 입장을 달리한 윤증(尹拯)을 공박하여 소론과 대립했다. 대사성과 이조참판을 거쳐 1706년 병조참판에 있을 때 소론이 집권하자 2년간 귀양살이를 했다. 그뒤 대제학·공조판서·좌참찬을 지냈다.
○金北軒(김북헌)은 金春澤, 1670(현종 11)~1717(숙종 43),
본관은 광산. 자는 백우(伯雨), 호는 북헌(北軒). 숙종의 장인인 만기(萬基)의 손자이며, 호조판서 진구(鎭龜)의 아들이다. 서인 노론의 중심가문에 속하여,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 이후 남인이 정권을 잡았을 때 여러 번 투옥·유배되었다. 1694년 재물을 써서 궁중에 내통하여 폐비 민씨를 복위시키려다 체포되어 심문을 받았으나, 갑술환국으로 남인이 축출되자 풀려났다. 서인이 노론·소론으로 갈라지자 노론에 속하여 1701년 소론의 탄핵으로 부안에 유배되었다
○諗夫(심부)는 지은이가 만든 단어 같은데, 글자 플이를 하면 임금께 간하는 지아비란 뜻,
○濡染(유염)은 숙습(熟習)함. 즉 익숙하여 몸에 젖은 버릇. 익숙하게 익힘,
○薰炙(훈자)는 어떤 스승이나 지도자(指導者)로부터 교화(敎化)를 받음.
○純熟(순숙)은 완전(完全)히 익음,
○門路(문로)는 임금의 수레가 드나드는 대궐 정문의 길.
○端的(단적)은 어떤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나는 상태에 있는 (것)
○三一之義(삼일지의)는 君師父 일체란 뜻 즉 임금과 스승과 아버지는 하나의 몸이란 뜻
○勝國(승국)은 바로 전대의 왕조(王祖) 즉 고려
필자가 승국의 의미를 표현해 보려고 “고려”로 쓰지 않고 “바로 전대의 왕조”로 써서 해석코자 한다.
○翰林(한림)은 조선시대 때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의 별칭,
○稔知(임지)는 자세히 알다,
○金安老(김안로)는 1481~1537.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이숙(頤叔), 호는 희락당(希樂堂)ㆍ용천(龍泉)ㆍ퇴재(退齋)이다.
기묘사화로 조광조(趙光祖) 일파가 몰락한 뒤 발탁되어 이조 판서에 올랐고, 아들 희(禧)가 효혜공주(孝惠公主)와 혼인하여 중종의 부마(駙馬)가 되자 이를 계기로 권력을 남용하다가 1524년 영의정 남곤(南袞), 심정(沈貞), 대사간 이항(李沆) 등의 탄핵을 받고 경기도 풍덕(豊德)에 유배되었다.
1531년 재차 서용된 이후 동궁(東宮 : 인종)의 보호를 구실로 실권을 장악하여 허항(許沆), 채무택(蔡無擇), 황사우(黃士佑) 등과 함께 정적(政敵)이나 뜻에 맞지 않는 자를 축출하는 옥사(獄事)를 여러 차례 일으켰다.
1537년 중종의 제2계비인 문정왕후(文定王后)의 폐위를 기도하다가 발각되어 중종의 밀령을 받은 윤안인(尹安仁)과 대사헌 양연(梁淵)에 의하여 체포되어 유배되었다가 곧이어 사사되었다.
허항, 채무택과 함께 정유삼흉(丁酉三凶)이라 불렸다. 저서에 《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가 있다
○俎豆(조두)는 제사(祭祀) 때, 신 앞에 놓는 나무로 만든 그릇의 한 가지
俎豆之는 제사를 지냈다,
○從戎(종융)은 從軍
○投紱(투불)은 직역하면 인끈을 던지다, 이 말은 벼슬을 버리다 란 의미,
○林泉(임천)은 직역하면 수풀과 샘물이지만, 의역하여 세상을 피하여 조용히 사는 선비의 정원이란 뜻, 곡 隱士를 지칭하기도 한다,
○弘錫은 金弘錫을 지칭한 듯하다.
金弘錫은 1702년(숙종 28) 생원시에 장원, 1714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716년 승문원정자가 되어 경신환국 때 송시열(宋時烈)을 비판하는 성균관 유생들과 내응했다는 이유로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으며, 이듬해에는 사직 이대성(李大成) 등과 연명으로 세자청정(世子聽政)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1722년(경종 2) 지평이 되어 세제 연잉군(延礽君: 뒤의 영조)의 대리청정을 주장하는 이이명(李頤命)·김창집(金昌集)을 규탄하는 한편, 영의정 조태구(趙泰耉)를 공박하였다.
이듬해 홍문록(弘文錄)에 오르고, 1724년 수찬이 되어 도당록(都堂錄)에 올랐다. 그해 영조가 즉위하자 양역불균(良役不均)의 폐를 논하고 이를 개혁할 것을 주장, 영조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이어서 관직을 매매하는 공명첩(空名帖)발급의 폐를 논하고 명나라에서 실시한 예에 따라 납속자(納粟者)에게 ‘의민(義民)’이라 호칭, 정려·복호(復戶)의 혜택을 줄 것을 주장하였다.
1725년(영조 1) 부교리에 이어 교리가 되었으나 1722년의 신임사화와 관련, 관직을 삭탈당하고 문외출송(門外黜送)되었다.
또한, 전일에 송시열을 비판하였던 일로 전라도 유생들의 항의를 받았다.
그가 죽은 뒤 1755년 손자 정리(正履)가 노론 4대신을 제거한 김일경(金一鏡)의 당여로 주살됨에 이에 연루되어 추율(追律)당하였다.
○疎卞(소변)은 상소하여 변명하니,
○搆罪(구죄)는 죄을 얽어서,
○遠竄(원찬)는 멀리 귀양 보내다,
○檃(檼)括(은괄)은 기울어지고 굽은 것을 바로잡는 기구로, 굽은 것을 잡는 것을 은(檃)이라 칭하고 모난 것을 잡는 것은 괄(括)이라 한다. 《회남자(淮南子》에, “그 굽은 것이 발라지게 되는 것은 은괄의 힘이다[其曲中規 櫽括之力].” 하였다. 또한 은괄(櫽栝)로도 쓰는데 이는 전체를 포괄(包括)한다는 뜻이다.
원문이 檼括로 된 것은 檃括의 오기이다.
○著雍은 古甲子로 戊에 해당
○攝提格은 古甲子로 寅에 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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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송간 할아버지 묘표(세고집과 족보)에서 한문 移記 하는데 눈알이 튀어 나올려고 했습니다.ㅋㅋㅋㅋㅋㅋㅋㅋ
빨간부분이 대동보 p496과 세고집 p412가 다른 부분은 천수아제가 해설부분에 써 넣었습니다,
2011년 발행본 3권 p305 번역문 있음
오늘에야 송간 할아버지묘표를 (선조묘소...)편에 올렸습니다.
총무님! 감사 합니다.
우리 남간 문중에서 가장 화려한 벼슬을 하신 분이라,경치도 좋은 곳에 계시는군요
오늘 카페에서 부모형제 할아버지 할머니 모두 재회 하실겁니다.
(은진 宋氏世蹟錄 宋子長派世系子孫錄)에 등재된 송병기의 字(子直) 號)(老圃)1859~1939)81세 (殷錫)의 2子 후손임
송간의 묘표가 무인년에 지었다면, 1938년 80세
어머님도 配도 광 김 임
남매를 두었지만 ,손자가 무려 8명
효능은 경기도 여주 장유의 따님인 인선왕후능임
䪫 䪫 䪫은 䪫은 음가로 찾지 마시고 音자 부수로 찾아야 함
전의 이씨 경의 따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