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기억의 저편에 머물고 싶다/ 우 은 문 작
석모도는 강화의 외포리 선착장에서 배로 10분 거리에 있는 작은 섬이다. 물이 맑고 섬 주
위의 풍광이 좋아서 육지에서 들어온 관광객들이 하루나 이틀, 길어야 한 사흘 머물고 가는
곳이다.
8.15, 광복절의 석모도는 어둠이 깔리자. 그 많던 차량이 강화로 모두 건너갔는지 쓸쓸하
기까지 하다. 별천지 민박에서 나온 석훈은 선착장으로 차를 몰았다. 선착장은 주차장을
방불케 하던 긴 차량행렬이 뚝 끊어졌다. 차량을 실은 마지막 배가 이제 막 이곳을 떠나
강화의 외포로 들어서고 있었다. 석훈은 차에서 내려 선착장으로 걸어갔다. 이틀을 이렇게
오갔지만 그때마다 가슴이 시리고 아픈 것은 전혀 치유될 것 같지가 않았다. 한강의 넓이
보다도 좁은 강화와 석모도 사이지만 섬은 섬이다. 남한에서는 최서단인 이 곳. 해가 하루
일을 끝내고 쉬고 있는 지도 꽤 됐지만 하늘과 닿은 물빛은 붉은 기운을 다 삭이진 못했
다. 그 것은 석훈이 영신을 향한 자신의 심사인 듯하여 마음이 더 아파온다. 벌써 가마득
한 옛일처럼 느껴지는 지난 6월의 어느 날, 그 때 석훈의 모습은 이와는 달랐다. 물론 불
안과 초조는 있었다. 그래도 석훈은 하늘의 천사가 저지른 실수로 자신만이 득을 본 행운
아 중의 행운아라고 스스로 생각했었다.
시간은 밤 9시가 넘어 있었다. 석훈은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발길이 얼른 떨어
지지가 않았다. 꼭 영신이 여기 어디쯤에서 나타날 것만 같았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선생님 시장하시죠? 우리 간단히 뭐 먹고 가요? 네? 영신인 지금 배가 무척 고프답니다.”
석훈은 고개를 강하게 내저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이 자리에서 그대로 돌이 되어도 억울
할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돌아가야 한다. 이젠 절대로 영신이 이곳에 올리는
없을 테니까. 석훈은 발길을 돌렸다. 이제 주차장에서 왼 종일 지친 차를 별천지로 모셔서
푹 쉬게 해야 될 것 같았다. 그리고 너무나 가슴시린 그곳으로 홀로 돌아가야 한다. 그렇
기는 하지만 석훈은 차로 가질 못했다. 신이가 배가 고파 했으나, 마지막 배를 놓치면 절대
로 안 되는 상황이라 그냥 지나쳤던 까치식당에서 발이 멈췄다. 그리고 안을 들여다보았
다. 허름한 식탁이 10개쯤 놓여 있었다. 주인 아낙도 이젠 들 손님이 없다는 것을 확신한
듯 정리를 하고 있었다.
“저녁 밥 좀 될까요?”
석훈은 돌아보지도 않는 아낙의 등판에 대고 말을 붙였다.
“아이고 참 지금이 무슨 저녁이여요. 9시가 넘었는데. 그리고 우린 왕새우 소금구이 전
문이래요.”
주인 아낙의 말이 팔려는지 말려는지 애매해서 다시 물을 태센데, 석훈의 뒤에서 앳된 여
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도요, 아줌마?”
석훈과 동시에 아낙이 뒤를 돌아봤다. 흰색 티에 청바지 차림으로 큰 키에 어울리지 않게
작은 배낭을 멘 보기 드문 팔등신 미인이다. 이제 손님이
둘이라 거절할 수 없었는지 아낙은 태도를
누그러뜨렸다.
“이리로들 앉아요.”
두 사람이 일행인 줄로 아는 태도다. 석훈은 아낙이 가리키는 자리 옆 자리에 앉았다. 여
대생 차림의 손님은 아낙이 가리키는 식탁에 앉았다.
“아따 참, 설거지 좀 줄이게 한 테불만 써요.”
둘은 아무 말이 없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석훈이 어색하게 일어나 여대생 쪽으로 앉았
다. 마주 앉아 자세히 보니 나이가 한 스물쯤 될 듯한 얼굴이다. 예쁘다. 석훈은
영신이 자신의 앞에 앉았더라면 하고 부질없는 생각을 했다. 그리움이 밤안개가 피어나듯
했다. 또 가슴이 시려 온다. 석훈이 여대생에게 말을 걸어 본다.
“학생은 어쩌다가?”
“아, 네, 그게….”
“마지막 배를 놓쳤군?”
“네.”
너무나 측은하게 들린다.
“그럼 일행은?”
“모두 다 강화로 건너갔죠.”
“학생은 무얼 하다가?”
“전 혼자 생각 좀 정리하다가 그만.”
“에이, 휴대폰도 없었나?”
“알을 다 썼거든요.”
“알이라, 그럼, 돈은?”
“동아리 선배가 다 갖고 있는데…. 내일이면 누군가 건너와서 절 데려 갈 거예요.”
아낙이 얼마 만큼인지도 모르게 왕새우를 불판 위에 얹어 와서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그
러나 차림표를 보고 무엇을 시킬 처지도 못되었다. 그리곤 밥을 가져왔다. 둘은 아무 말도
없이 밥 한 그릇을 몽땅 비웠다. 왕새우는 둘이 번갈아 가며 한 마리씩 들고 먹었다.
석훈은 4홉들이 정종 한 병을 그의 비웠다. 그리고 만 원 권 석 장을 식탁 위에 놓고 나왔
다. 여대생도 석훈의 뒤를 따라 나왔다. 주인 아낙은 돌아보지도 않고 안녕히 가시라고
인살 했다. 그때서야 여대생이 90도로 허리를 굽혀 석훈을 향해 인살 했다.
“아저씨 감사합니다.”
인사성이 밝은 걸 보니, 참한 집 자제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라고 석훈은 생각했다. 영신이
그랬었다. 차에서 내리면 언제나 차렷 자세로 90도쯤 고개를 숙여 인살 했었다. 그 모습이
늘 좋았었다.
“그런데 잘 때는 있고?”
“아, 아니에요.”
강하게 부정했다. 그럼 어쩌겠다는 말인가. 석훈은 순간 난감했다. 영신과의 일로 얼마나
곤욕을 치렀던가.
“그럼 오늘밤은 어떻게 할 건데?”
“아저씬 어디서 주무시는데요?”
묻는 말엔 대답을 앉고 오히려 묻고 있었다.
“응, 난 별천지에서 민박하고 있어.”
“그럼, 전 아저씨 차에서 자면 안 될까요?”
“내 차에서? 내가 차가 있다는 걸 어떻게 알고?”
“낮에 저수지 근처서 아저씰 뵌 적이 있었죠.”
“아니, 학생들은 해수욕장 근처에 있던데?”
“전 혼자 있길 좋아하거든요. 저보고 누굴 닮았다고 하시면서 사진 찍었잖아요?”
“아, 그랬었구나. 자네가 내 제자인 보경일 닮았다고 했지. 어쩐지.”
둘은 다시 선착장 쪽으로 걷고 있었다. 강화의 외포리 쪽에서 비치던 불빛들이 많이 꺼져
있었다.
이미 10시가 넘었다.
“내 아들도 둘 다 대학생이야.”
“아유, 그렇게 안 뵈는데요."
석훈은 너무 스스럼이 없이 대하는 녀석이 마치 오랫동안 보아온 녀석처럼 느껴져서 좋았
다.
“큰 놈은 미국에 유학하고 있고, 작은 놈은 H외대 3학년이이지. 그런데 학생은 몇 학년?”
하지 않아도 될 말까지 곁들어 했다.
“맞춰 보세요?”
“음, 2학년?”
석훈이 교단을 지킨 지가 25년이다. 그것도 여고3학년을 담당한 것이 몇 년인가.
“와, 족집게시다.”
“그렇게 보였어?”
“네!”
“ 그럼 내가 학생의 성씨도 맞춰 볼까?”
“아니에요, 제가 말씀드리죠. 뭐.”
“그럼, 그럴까?”
“네, 소연이라고 합니다. 장 소연. 학교는 Y대학교. 국문학 전공입니다.”
“하하하. 그럼, 나도 내 소개를 하지.”
“잠깐요. 아저씬 선생님이시죠? 혹 여자 고등학교?”
석훈은 놀랍다고 생각했다.
“호, 연이도 족집게 점쟁인 걸! 음. 맞긴 맞는데…. 그게 어째 좀….”
석훈은 씁쓸히 말끝을 흐렸다.
“선생님, 제가 뭐 잘못 말씀드린 것이라도….”
소연은 괜히 죄스러운 듯이 말했다.
“아니, 연이가 잘못한 건 없어.”
석훈은 쓸쓸한 자신의 모습이 소연에게 전해졌나 보다고 생각했다.소연은 배낭에서 담배
를 꺼내 불을 붙인 다음 석훈에게 내민다. 석훈이 받아서 한 모금 마셨다. 소연은 담배는
저렇게 피우는 게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피우질 못하는 분이구나 싶어서 미안하기까지
했다.
“선생님, 담배 잘 못 피시지요?”
“허, 어떻게 알았지?”
“담밸 잡으시는 폼이나 ,빨아들이는 게 영 아니시거든요.”
“그랬군. 그럼 소연이도 잘 못 피나?”
“아, 네.”
부인하는 양이 재미있어서 빠져나갈 길을 마련해 줄 아량으로 석훈이 한 마디 더 한다.
“음, 그럼, 애인이 필 담밸?”
“맞아요. 맞긴 맞는데요. 아직 애인은 아니고요….”
소연은 말끝을 흐렸다. 석훈도 소연의 말에 가슴이 시려왔다.
“연이도 사연이 있었구나? 괜히 배를 놓친 게 아니라….”
소연은 대답 대신 일어서며 말했다.
“선생님, 그만 돌아가시죠? 시간이 11시가 넘었어요.”
“벌써 그렇게 됐나? 그래 일어서자.”
석훈이 비벼 끄는 담뱃불이 바람에 날려 잠깐 불꽃이 일다 흩어지며 꺼졌다. 석훈은 우리
의 삶의 모습도 저 담뱃불의 명멸과 같은 거라고 생각 했다. 선착장 주차장은 텅 비어 있
었다. 석훈의 짚 차만 한 쪽에 덩그렇게 서 있었다. 석훈은 차에 올랐다. 소연은 뒷자리에
탔다. 그러나 소연은 의외로 조수석 뒤가 아닌 운전석 바로 뒤에 앉았다. 석훈은 하마터
면 왈칵 울음이 쏟아질 뻔했다. 소연이가 앉은 자리엔 언제나 영신이 앉았었다. 그리곤 조그맣고
예쁜 손으로 석훈의 어깨를 주무르며 말했다.
“선생님, 제가 선생님을 사랑해도 돼나요?”
“녀석, 그럼 여태 사랑하지 않았었나?”
“아이, 씨. 그런 스승과 제자 사이의 사랑 말구요.”
“아, 그럼 아빠와 딸과의 사랑?”
“아이, 씨! 난 삐침!”
그리곤 뒤로 홀랑 넘어져서 사라졌다. 그러면 석훈은 오른 손을 뒤로 해서 휘휘 저었다.
그것이 재미가 있었는지 영신이 까르르 웃었다. 그러면 석훈이 차를 길가로 대고 뒤를 돌
아보며 말한다.
“아, 미안, 미안해! 자자! 항복이야.“
“그럼 이제부턴 아빠라고 부를게요. 됐죠?”
“응, 난 좋아. 그리고 지금은 행복해 신이야!”
영신은 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석훈의 얼굴에 뽀뽀를 퍼부었다. 그것이 지금 이 자리
에서 왜 이렇게 가슴이 시리게 하는지. 이런 석훈의 마음을 읽었는지 소연도 잠시 침묵
했다. 그리고 조금 뜸을 들여 말했다.
“선생님, 무척 아픈 사연이 있으신가 봐요?”
차가 염전을 지나고 있을 때가 되어서야 소연은 입을 열었다.
“응, 그런 사연이 있지. 그런데 난 아무에게도 그 사연을 말할 수가 없어.”
염전을 오가는 젊은이들이 길을 비켜주고 있었다.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90도로 꺾어 어류
정으로 차를 몰았다. 5분 거리였다. 횟집만 한 열 집 정도가 모여 있는 곳이다. 석훈은
낮에도 이곳에서 1시간 이상을 서성이다 떠났었다. 그 땐 북적댔었는데, 몇 집만 한 두 명
의 손님을 맞아 불을 켜 놓고 있었다. 6월에 신이와 선착장 끝에 서서 바라보던 갈매기
때도 이 밤엔 보이지 않는다. 그저 인천 공항에서 뜨고 내리는 항공기들의 불빛만 반짝였
다. 석훈은 텅 빈 가슴이 자꾸만 쓰려왔다. 소연은 석훈의 손을 잡았다. 따스한 손이다.
영신의 손도 이랬었다.
“이리로 와 봐, 소연아?”
방파제 끝은 물이 차서 찰랑댔다. 석훈이 쪼그리고 앉아 양 손으로 물을 잡았다.
“선생님 전 이 바닷물로 세수할래요.”
영신이가 말했었다. 그리곤 말릴 사이도 없이 얼굴에 끼얹었다.
“에고, 이 왕 바보!”
“해해해. 선생님이 더 바보!”
영신은 모션만 취했던 것이다.
그 땐 웃고 말았던 그 조그만 잔상이 석훈을 못견디게 만들었다.
“소연아, 그만 가자. 난 지금 무지 슬퍼!”
소연은 영문도 모르고 일어섰다. 석훈은 민어루 해수욕장을 왼쪽으로 끼고 언덕 위로 차를
몰았다. 언덕 위엔 들꽃마을 민박집이 한껏 멋을 부리고 서 있다. 그 곳을 조금 벗어나
길옆에 차를 세웠다. 해수욕장이 내려다보이는 곳이었다. 젊은이들이 통기타에 맞춰 노래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석훈이 먼저 차에서 내렸다. 바닷바람이 비릿한 냄새를 몰고 제
법 차갑게 와 닿았다. 석훈은 차 트렁크를 열고 자리를 꺼내서 폈다. 8월 중순의 밤인데
도 한기가 제법 심하게 느껴졌다. 석훈은 모포도 하나 꺼내왔다.
그리고 하연의 어깨를 감싸줬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고맙긴, 오히려 오늘밤도 홀로 갖가지 상념에 잠겨 잠 못 이루는 밤이 됐을 텐데, 보기
드문 팔등신 미인과 함께 있으니, 허참. 난 복 터진 사내지 뭐!”
“지내신다는 별천진 조기에요?”
소연이가 가리키는 곳에 휘황찬란한 별천지의 불빛이 보였다.
“맞아, 지난 6월, 현충일에 저 곳에서 한 몇 시간 쉬었다 간 적이 있어.”
“물론 상대는 사모님이시겠죠?”
“허, 대답하기가 난처한데….”
소연이가 얼른 자신의 배낭에서 양주 한 병을 꺼냈다. 그리고 오징어포를 안주로 내놨다.
“아니, 이건 웬 양준가?”
“제가 지난달에 알바했던 집에서 병만 모셔온 거예요. 내용은 소주죠.”
그리곤 능숙한 솜씨로 술병을 따고 오징어포를 먹기 좋게 찢어 놓았다. 들꽃마을의 간판
조명만으로도 충분히 밝았다. 술 마시기엔 그저 그만이다. 소연의 말대로 술병만 양주지
내용은 소주였다.
“참, 마땅한 잔이 없네.”
“에이 선생님도, 미국 영화에서 나오잖아요. 그냥 술병을 입에 대고 이렇게”
소연이 한 모금을 먼저 마시고는 석훈에게 술병을 건넸다. 석훈도 소연을 따라 두 모금을
마셨다. 그때, 석훈의 휴대전화에서 메시지 도착 신호가 들렸다. 소연이 얼른 일어나 전
화를 찾아왔다.
“자정이군.”
“얼른 메시질 확인 하셔야지요, 선생님.”
“자네가 봐도 돼, 자정쯤이면 으레 오는 메시지지.”
소연이 키를 눌러 확인한다.
[샘사랑해요이건언니꺼임제편이니안심해도됨요보고싶어요ㅠㅠ◎]
급히 보낸 흔적이 역력했다. 신이가 보낸 메시지였다. 영신은 메시지 끝에 꼭 ◎표시를 하
는 습관이 있었다.
“이 바보!”
석훈은 마치 소연에게 말하듯 한 마디 던지곤 술병을 들어 벌컥벌컥 두어 번을 마셨다.
“바보라니요?”
석훈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곤 말을 이었다.
“영신인 내 제자야. 지금 고3이고. 그런데 그 자율 학습이란 게 우릴 절름발이 연인 사이
로 만들고 말았지. 영신이네 집이 나와 같은 방향이야. 그래서 열 시에 자율학습을 끝내면
내 차로 함께 집으로 가지. 그런데, 3월부터 주5일을 같이 다니다 보니 6월쯤엔 정이 흠
뻑 들더군.”
“그럴 수도 있겠는데요. 선생님.”
“그래, 처음은 운전 중이라도 내 오른 손으로 영신의 왼손만 잡았지. 그래도 난 충분히
행복했었어. 그런데 한 달이 못되어 그것으로는 아쉽더군….”
“선생님, 그건 진도가 늦은 거예요. 요즘은 two two day래요”
“two two day라?”
“만난지 22일이면 해볼 건 다해본다는 거죠.”
“이런, 그런데 우린 자네가 말하는 대상들과는 다르잖은가?”
“선생님은, 요즘 저흰 그런 것 별로 따지지 않거든요. 서로 사랑하시잖아요? 그럼 뭐가
문제란 거예요?”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는 싶지. 그런데 아직 현실적으론 안돼.”
소연이 자신의 시계를 별천지의 불빛에 비춰본다.
“선생님, 벌써 자정인대요.”
“음, 그렇게 됐겠군.”
석훈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 소연의 말대로 차에서 자게 할 것인지, 아니면 다른 방법이
있을는지를 ….
“소연인 나랑 별천지의 내 방으로 가지?”
“전 그래도 괜찮은데, 선생님께선 어떠실지?”
“그래, 좀 그렇긴 하지만 소연일 차에서 혼자 자게 할 순 없지.”
둘은 자릴 정리하고 별천지로 갔다. 광복절을 맞아 손님이 많이 들었는지 주인 아낙은 무
척 고무돼 있었다.
“아이고 선생님, 어딜 가셨다가? 전 강화로 나가신 줄 알았지요.”
“네, 방이 하나 더 날까요?”
“에고, 오늘이 광복절이잖아요.”
석훈이 난처한 얼굴을 하자, 눈치를 첸 소연이 먼저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곤 스스럼없이
배낭을 내려놓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선생님, 제가 침대 아래서 잘 테니까요, 침대 위에서 주무세요.”
“아니 그 반대로 하지.”
“근데 선생님, 전 오늘밤엔 잠이 올 것 같지가 않은데요.”
“그럼 밖으로 나가서 좀더 얘길 할까?”
“그래요. 그럼.”
둘은 다시 밖으로 나왔다. 가을이 훌쩍 한 발을 들여 놓았는지 해풍에 제법 밤공기가 찼
다. 석훈이 갖고 나온 모포로 소연의 등을 감싸 주었다. 그리고 해수욕장의 불빛을 보며
나란히 앉았다.
“선생님, 저도 괜히 이 곳에 온 것은 아니거든요. 제가 고1때였어요. 학원엘 다녔는데,
그 많은 선생님들 중에 제 마음이 끌리는 선생님은 이제 막 대학원에 진학해서 공부하면서
아르바이트 하러 나온 국어 선생님이셨어요. 미남은 아니지만 어쩐지 정이 갔지요.”
“호, 저런! 그래서?”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로 난리가 난 이후 한 2년인가 지난 때였어요. 엄마랑 지하철을 타
고 가다가 장난기가 발동했어요. 그래서 메시지를 날렸죠. 그 전날 선생님께서 공개적으로
자신의 휴대전화 번호를 칠판에 적어 놓으셨거든요.”
“허 재밌는데. 그래서 어떤 내용으로?”
“샘, 짐 저 지하철 타고 백화점엘 갑니다.”
그리고 좀더 생각을 하고나서
“혹 잘 못 되면, 제 주위에 아는 분들께 알려 주셔요.”
“그랬더니?”
“넌 누구냐? 인간이면 이름을 밝히고, 여우면 물렀거라!”
“훗, 점점 재밌는데. 그럼 소연인 뭐랬는데?”
“그땐 바로 답을 못했지요. 엄마도 옆에 있고 해서. 그런데 밤에 집에 돌아와서 제2탄을
날렸죠.”
“응 그래, 뭐라고 날렸누?”
“인간이건 여우 건 다 같은 생명인데, 어찌 그걸 구별하시려 하나요?”
“호, 말 되는군.”
“그 후로는 서로를 밝히고 메시지는 하루에 한 열 건씩 보내고 받았지요. 단 한 시간도
메시지나, 혹은 통화를 하지 않고는 못 견뎠답니다. 그런데 메시지가 오가는 동안 전 선
생님이 자꾸 좋아지는 거 있죠. 그래서 선생님 메일에다 하루에도 몇 번이고 글을 남겼지
요. 아마 모르긴 해도 다 모으면 책 한 권은 족히 될걸요.
그런데 문제는 시간이 흐르면서 선생님도 절 좋아하시는 눈치였다는 거지요.
정말 그렇게 짧은 시간에 그토록 깊게 빠질 수 있다는 사실에
제 자신도 놀랍더라구요.”
하늘에서 유성 하나가 긴 비행을 끝내고 바다 저쪽으로 사라졌다. 석훈은 생각했다. 삶이
고 사랑이고 간에 저렇게 명멸하는 게 아닐까? 그런데도 마치 자신만 예외로 영원하리란
착각 속에 살아가는 거라고.
“근데 선생님, 제 얘기 듣고 계신 거예요?”
“아, 미안! 근대 사실 좀 딴 생각을 했지. 미안해!”
“그래서 제가 물었죠.”
“어떻게?”
“선생님께 전 어떤 존재냐고요?”
“그랬더니?”
“넌, 내가 왜 사느냐의 지표를 밝히는 등대와 같은 존재라고 하셨어요.”
“호, 그 말은 그 선생님께서 소연이가 엄청 중요한 존재란 얘기잖아. 정말 멋진 말씀을
하셨군.”
“어쨌든 전 그런 표현이 아주 좋았거든요. 그런 저런 사연이 얼마나 많았는지….”
그리고 소연은 말이 없다. 소연은 울고 있었다. 석훈의 마음도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
로 아렸다. 초등학교 4학년 때 할아버지의 명으로 엄마와 떨어진 적이 있었다. 읍내에서
선생님 댁으로 들어가 공부하기로 결정한 때였다. 할아버지로부터 석훈이 가장 사랑하는
무엇을 빼앗긴 아픔이었다. 밤이면 냄새나는 뒷간에서 선생님의 눈을 피해 얼마나 울었던
지 사모님께서 돌려보내시려고 무진 애도 쓰셨다.
“그래 그 후의 일은?”
소연이 울음을 그치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여름 방학쯤엔 매일 만났죠. 그게 화근이었답니다. 선생님이나 저는 절제를 하시려고 무
진 노력을 했지요. 이래서는 안 된다. 이건 우리의 만남을 어렵게 만드는 일이다. 그렇게
잘 알면서도 그게 생각대로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바로 광복절 휴일에 이 석모도로 여행을
왔었죠.”
“아, 그리고 오늘처럼 배를 놓쳤다?”
“아니에요. 그 땐 의도적이었답니다. 제가 졸랐거든요. 아침에 일출을 보겠다고요. 그리
곤 이튿날 아침 일곱 시에 첫배로 떠났죠. 친구네 집에서 자고 학교에서 보충 수업에 바로
간다고 엄말 속였지요. 그 땐 무슨 배짱에서였는지….”
“들통이 났겠군?”
“그 동안은 엄마가 간섭을 했었는데. 이번엔 아버지가 다그치기 시작했지요.”
“아버진 무엇 하시는 분이셨는데?”
“미국에서 삼촌과 한 5년 사업하시다가 정리해서 들어오신 지가 얼마 안 된 때였지요. 지
금은 부동산 중개를 하시지만요.”
“그런데, 그날 밤에 무슨 일이 있었나?”
“선생님도 꼭 그렇게 생각하시죠?”
“그럼, 아무 일도 없었다?”
“그런 건 아니지만, 서로 위하는 선이었지요.”
“서로 위하는 선이라면?”
“선생님의 팔을 베고 누워서 잠들었죠. 전 피곤도 했지만, 선생님 품에 안겨서 잔다는 게
너무 행복해서 그냥 잠들었지요. 선생님이 아침에 차를 운전하시면서 놀렸죠. 코까지 골
면서 자더라고요.”
“그런데, 어른들이 그렇다면 믿어줄까? 어른 자신들의 척도에서 보면 그게 아니거든.”
“그렇긴 하지만, 선생님과 전 아니었어요. 절대루!”
‘절대루!’라고 하고선 소연이 어깨까지 들먹이며 울었다. 그건 긍정인지 부정인지…. 바
다 바람이 무척 찼지만 석훈은 이제 그만 일어나자고 말할 수가 없었다.
“소연인 지금도 그 선생님을 사랑하나?”
석훈의 말에 소연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멀리 인천국제공항 쪽을 보며 긴 한숨을 쉬었
다. 어디로 떠나는 건지 비행기 한 대가 이륙하고 있었다. 인천 쪽의 하늘은 도시의 불빛
으로 이직도 밝았다.
“그럼요. 그런데 선생님의 마음은 잘 모르겠네요.”
“그게 무슨 말인가?”
석훈의 물음에 소연은 한동안 대답이 없다가 입을 열었다. 깊은 고뇌가 그녀를 엄습한 듯
한 표정이었다.
“선생님의 말을 못 믿겠다는 거죠.”
“왜? 무슨 일로?”
“석모도를 다녀간 뒤에 아버지가 다그쳤지요. 선생님과의 관계를 말이에요. 전 입맞춤까
지는 했다고 말했지요. 그 정도는 각오해야 되겠기에. 그런데 엄마는 아니었어요.”
그리고 소연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몸까지….”
그리고는 어깨가 들썩일 정도로 흐느꼈다. 한참이 지났다. 매무새를 가다듬은 뒤 소연이
말을 이었다.
“전 끝까지 아니라고 말했죠. 근데 아빤 제가 선생님과 주고받은 메일을 모두 복사를 하
셨더라고요. 거기엔 선생님이 습작한 소설과 희곡, 그리고 시까지 고스란히 들어 있었답니
다. 전 선생님의 그 모두를 사랑했었거든요. 그래서 삭젤 하지 않았었는데 그게 또 문제었
죠. 그 중에 소설 한 편이 저를 주인공으로 한건데 좀 심했어요. 아빤 그걸 선생님께 들
이 대고 협박을 했지요.”
석훈은 알 것 같았다. 영신의 아빠가 한 것과 너무 흡사했다.
“그런데 선생님은 어떻게 말씀하셨나?”
소연이 깊게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그건 작품이지 현실이 아니라고 하셨죠. 그리고 아빠가 내민 녹음기에 그렇고 그런 이야
길 다 했더군요. 물론 저와 있었던 걸 다 말씀하시진 않았지만요. 그런데 제가 납득할 수
없었던 건요. 선생님은 저를 그 동안 귀찮게 여겼다고 하신 겁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1년
선배가 저를 좋아하는데 저도 마음이 있는 것 같다고요. 그리고 훌륭한 집 자제니까 같
이 사귀게 해 보라고요. 얼마나 섭섭하고 기가 막혔던지. 그 선배가 오늘 저랑 같이 온
동아 리 선배랍니다.”
“그럼 소연인 선생님께 그런 의사를 전하긴 했고?”
“선생님과 여러 차례 대화를 시도했었죠. 그러나 그마져도 불가능했죠.”
“그랬었군. 부모님께서 감시를 하셨다?.”
“선생님도 ‘내가 직접 한 말 외엔 믿지 말아라’라고 메시질 남겼더군요. 그런데 그걸
저랑 엄마가 같이 봤다는 거죠. 아빠와 엄만 곧바로 선생님께 찾아가서 난리를 쳤지요. 그
래서 저와 관련된 모든 것을 파기하고 다시는 연락을 하시지 않았답니다.”
“그 뒤론 그 선생님과는 어떻게 지냈나?”
“전 친구들이 핸드폰으로 메시지를 보냈죠. 크면 꼭 선생님 곁으로 가겠다고요. 그런데 5
년이 지난 지금도 전 선생님께 못가고 있답니다. 이젠 부모님은 오빠랑 결혼하라고
합니다.”
“그럼 소연인 그렇게 할 생각인가?”
“이제 집으로 가면 제가 결정을 내려야 하거든요. 정말 어떻게 해야 할 지. 전 이런 상황이 너무
싫어요.”
“그럼 그 선생님은 지금 어디서 뭘 하시는데?”
“그 후에 대학원을 마치고 호준가 뉴질랜드에서 공부를 더 하고 계신데요.”
그리고 소연이 울었다.
“선생님은 지금도 변함없이 소연일 사랑하실까?”
“그걸 전 모르겠답니다. 그래서 제가 선생님을 못 믿는 거구요.”
그리고 석훈의 무릎을 벤 채로 울었다. 소연의 아픔이 석훈에게로 전염된 것인지. 석훈도
속으로 울었다. 소연은 잠이 들었다. 보름을 사흘 넘긴 달이 희멀건 얼굴로 중천에 떠서 두
사람을 비추고 있었다. 무수한 별들이 달빛에 가려 하늘을 희미하게 수놓고 있었다. 석훈
은 모포로 소연을 더 덮어 주었다. 석훈을 가슴 시리게 하는 건 별들도 마찬가지였다.
그건 지난 7월 어느 날 밤이었다. 신이와 석훈이 한적한 시골길을 달리다가 잠시 길가에
차를 세우고 하늘의 별을 바라본 적이 있었다. 영신이 별을 구경하겠다고 졸라서였다. 영
신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선생님, 선생님은 오래 사셔야 돼요.”
“왜?”
“왜냐 하면요. 제가 의사가 도려고요.”
“그럴 수도 있지. 신인 이과고. 공부도 엄청 잘하니까.”
“근대요. 제가 선생님 만나기 전엔 아니었어요.”
“그렇더군. 생활 기록부엔 우주천체학이라고 했더군.”
“맞아요. 전 우주에 떠 있는 무수한 별들을 연구하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왜?”
“그건 다 선생님 때문이에요.”
“녀석, 싱겁긴! 내가 뭐라고 했기에?”
영신이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갑자기 석훈의 품에 안겼다. 자그마한 체구에 바싹
마른 녀석이 석훈의 품에 안겨 숨을 고르지 못하고 있었다. 가슴이 콩닥거리는 소리가 석
훈에게까지 들렸다. 석훈은 영신을 꼭 안고 토닥거렸다. 영신이 반배치 후 처음 만났을 때
그 엄마가 학교로 와서 말했었다.
“선생님, 우리 영신인 심장이 아주 약하답니다. 그러니 갑작스럽게 혼을 내신다거나 쇼크
를 주시면….”
그리고는 말을 더 이상 잇지 못했었다. 한참 동안 숨을 고르던 녀석이 고개를 들고 배시시
웃으며 말을 이었다.
“선생님께서 뭐라고 하신 게 아니라 제가 스스로 결정한 건대요. 저도 심장이 나쁘지만
선생님이 걱정이 더 돼서요. 당뇨기에 약간의 고혈압, 제가 아무래도 선생님의 건강을 지
키려면 내과 의사가 돼야겠어요.”
그리고 은하수가 하얗게 깔린 곳을 가냘픈 팔을 들어 가리켰다.
“저기요. 동쪽 하늘에 견우와 직녀별 보이시죠?”
“응, 그래 보여”
“선생님은 星圖를 아시겠지요?”
“성도(星圖)라?”
“별자리의 위치를 알기 쉽게 그려 놓은….”
“그래 맞다. 성도(星圖)!”
“그게 제 가방에 지금 있긴 한데.”
“아니 그보다 영신이 그냥 설명해 줌 안 될까?”
사범 대학 시절에 친구 녀석 하나가 가끔 성도를 펼쳐 놓고 침이 마르도록 설명했었다. 그
러나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녀석은 제풀에 지쳐서 화를 내며 돌아가곤 했었다.
그때 들은 얄팍한 지식으로 영신의 앞에서 지금 겨우 체면 치례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요. 그럼.”
“헤라클래스 자리와 전갈자리 정도는 나도 알긴 아는데….”
석훈의 이 한 마디에 영신의 반응이 의외로 좋았다.
“어머! 선생님, 우와! 헤라클래스 자리와 전갈자리 정도라니요?”
“아, 녀석아, 깜짝 놀랐잖아?”
영신은 석훈의 볼에 자신의 볼을 비비며 좋아했다.
“전 천체에 대해서, 아니 별자리를 잘 아는 분과 결혼하기로 제 자신에게 맹세했거든요.
초등학교 시절이긴 하지만.”
“그런데 그런 사람을 만나려면, 의대로 진학해선 안 되잖아?”
“글쎄요. 그렇더라도 선생님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그래 너무 장황하게 말고, 하고 싶은 말씀만 하시지. 우렁 각시님.”
석훈이 기분이 좋을 땐 영신을 ‘우렁 각시‘ 라고 불렀다. 영신만이 아니라 자신이 맡은
31명을 이름보단 닉네임을 주로 불렀다. 베로니카, 쭈리더스, 달려라 하니 등으로 불렀다.
피노키오, 로즈 마리, 린다 박, 그 중에도 영신을 ’각시’로 부르지 않고 ‘우렁 각시’
로 부른 것은 반 아이들이 눈치 챌까 봐서 한 배려였다. 그런 석훈의 마음을 영신은 잘
알고 있었다.
“제가 말하려는 별자리는요. 헤라클래스 자리와 전갈자리가 아니라. 그 두 별 사이의 공
간이 넓죠. 그 공간에 작은 별들로 이루어진 커다란 별 자리가 보이죠?”
영신은 그 가냘픈 팔을 들어 헤라클래스 자리와 전갈자리 가운데를 원을 그리며 가리켰다.
“응 보여.”
석훈이 학생이고 영신이 선생 같았다.
“선생님은 그게 뭐 같이 보이세요?”
“응, 물뱀을 양손에 쥐고 있는 땅꾼 같은데.”
영신은 석훈이 헤라클래스 자리와 전갈자리를 말했을 때보다 더 격렬하게 석훈의 볼에 뽀
뽀를 했다. 너무 심하게 하다가 입술끼리 부딪치기라도 할까봐 석훈은 조심스러웠다. 영
신은 보철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또 석훈의 품에 안겨 숨을 고르느라 시간이 걸렸다.
“제가 드리려는 얘기는요. 땅꾼자리거든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유명한 의사 아스킅레
피오스의 별자리라고도 하지요. 근데요 선생님, 땅꾼자리와 함께 있는 뱀자리는 그의 의술
의 상징으로 만들어진 거래요. 아스클레피오스는 아폴로신과 코로니스(Coronis)사이에서
태어난 매우 영리한 아들로 켄타우르(Centaur.반인반마)인 키론(Chiron)에게서 의학, 식
물 학, 그리고 약초 다루는 법 등을 배워 인류 최초의 의사가 되었거든요.”
“아, 의사라. 영신의 의도를 알겠군.”
영신은 신들의 이름을 철자까지 말할 정도로 깊이 알고 있었다. 석훈은 이런 영신을 보면
안타까웠다. 건강만 좋았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겠는데, 그 건강이 늘 영신을 괴롭혔다.
“근대요, 어느 날 아스클레피오스는 친구 집에서 뱀을 한 마리 죽이게 돼요. 이때 놀랍게
도 또 다른 뱀이 어떤 약초를 입에 물고 와 이것을 죽은 뱀에게 붙여서 살려내는 것을 보
게 됐다는군요.”
“호, 우리 신이 대단히 박식하다. 무지 멋있다. 난 신이가 영리해서 더 좋거든.”
“에고, 또 그 말씀, 영리한 신이, 영리한 신이. 자꾸 그렇게 말씀하시지 마세요. 이젠 절
놀리시는 것 같이 들리니까요.”
“그래? 그럼 이담부턴 안할게”
“에게, 또 삐침?”
“아니, 그게 아니고 무지 행복함.”
“에이 치. 자꾸 놀림 싫어요.”
나이답지 않게 조그만 주먹으로 석훈의 가슴을 콩콩 때렸다.
“근대요. 이제 밑줄 쫙 치셔야 해요. 중요하거든요. 그 후 그 약초를 알아낸 아스클레피
오스는 그것을 사용하여 병을 고치고 죽은 이를 부활시키는 방법을 알아냈다는 거여요.”
“이제 끝났나요? 별자리 박사님.”
“지루하세요. 선생님?”
“아니. 신이가 숨이 찬 것 같아 걱정이 돼서.”
사실 석훈은 영신이가 걱정이 됐다. 그러나 하고 싶은 이야길 들어주는 것도 영신에겐 스
트레스 해소가 될 것 같아 조심스레 듣고 있는 것이다.
“그는 아르고호의 항해에서도 의사로 활약했는데요, 그 후에는 전적으로 의학의 연구에만
전념했대요.”
영신의 얘기는 계속 됐다.
“그는 인류의 소원이며 어떤 인간도 결코 성공할 수 없었던 불멸의 신비인 생명의 신비
를 벗기는 데 몰두했데요. 근대 선생님, 네 마리의 난폭한 말에 사자가 찢겨진 히폴리투스
의 생명을 구해주었다는 얘긴 들으셨지요?”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읽었던 것 같은데 ….”
석훈이 자신 없이 대답하자. 반색을 하며 영신이 말했다.
“울 선생님, 이렇게 많이 아실 줄 몰랐어요. 전.”
영신이 눈물까지 글썽이며 좋아했다. 영신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별자리를 무척 좋아했었단
다. 그 아빠가 미국 출장 때 사다준 소형 천체 망원경으로 아파트 옥상에서 별을 관찰 하
다가 밤을 꼬박 새운 적도 있었단다.
“이젠 전 결심했어요. 선생님.”
“뭘?”
“제가 나이가 더 들면 선생님께로 시집가기로요.”
“녀석. 싱겁긴, 우리 집엔 너보다 훨씬 예쁜 마누라가 있는데?”
“그건 저도 알아요. 그래도 전 선생님께 시집가기로 정했으니까 그렇게 아세요.”
진심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전혀 없는 마음은 아닌 것 같아 겁이 덜컥 났다. 초등학교 시절
부터 별을 아는 사람에게 시집가기로 했다는 말은 간혹 했었다. 그래서 석훈은 화제를 바
꿔볼 양으로 말을 돌렸다.
“이제 땅꾼자리 얘긴 끝난 건가?”
그러나 영신인 그게 아니었다.
“아니에요. 이제부턴데 잘 들어보셔요. 착한 선생님. 응, 어디까지더라…. 아 네. 아폴로
의 모함 땜에 죽은 오리온을 살리려고 했는데. 근데 죽음의 통제자로 지옥의 왕이었던 하
데스는 아스클레피오스의 의학에 몹시 당황했더래요. ‘만약 인간의 죽음이 극복될 수 있
는 것이라면 누가 하데스의 지옥으로 가겠는가?‘ 하고요.”
“오호. 그렇기도 하겠군.”
하고 석훈이 맞장구를 치면서도 영신이 걱정이 됐다. 그러나 영신은 땅꾼자리 얘길 계속했
다.
“결국 하데스는 그의 아우인 제우스에게 아스클레피오스가 죽은 자를 살리는 행위를 즉각
그만 두게 해달라고 부탁을 했지요. 그랬더니 제우스도 죽음이 인간의 벗어날 수 없는 한
계고 어떤 의술로도 깨뜨릴 수 없는 법칙이어야 한다는 데 동읠 했대요. 글쎄.”
영신이 얘길 시작한 지가 꽤 오래 됐다. 그런데도 이야길 멈추지 않았다.
“근대요. 제우스는 아스클레피오스를 찾아가 죽은 사람을 살려내는 것을 그만두도록 주의
를 줬대요. 문제는요. 이 주의에도 불구하고 아스클레피오스는 ‘생명을 구하는 것은 의사
의 사명이다’라고 그 충고를 듣지 않았다는 거죠.”
석훈은 영신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그 의도를 알았다. 의학을 공부해서 석훈 자신을 돌보
겠다는 것이 영신이 석훈에게 하고 싶은 말임을.
“잘 들어 보세요. 선생님. 그래서 제우스가 화가 난 거예요. 제우스는 어쩔 수 없이 번개
를 내려 아스클레피오스를 죽이고 말지요. 그렇지만 그의 의사로서의 위대한 기술과 업적
을 잊지 않고 하늘의 별자리로 만들었대요. 그래서 모든 인간들이 그를 기억할 수 있게 했
다는 거죠.”
“그래 영신아. 네가 하고자하는 말은 내가 잘 알겠다. 그러니 이제 그만 하고 집으로 가
자.”
석훈은 적이 걱정이 됐다. 그러나 영신이 말했다.
“이제 끝나가요. 선생님, 좀만 참고 더 들으셔요.”
그리고는 또 이야길 계속했다.
“아스클레피오스 옆에 놓인 뱀은 그가 뱀에게서 얻은 약초로 명의가 되었다는 전설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된대요. 그 후에 아스클레피오스는 옆의 뱀자리 때문에 땅꾼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거죠.”
영신의 별자리 이야기는 끝이 나고 있었다.
“전 저 남쪽하늘 위로 떠있는 땅꾼자리를 보면서, 생명을 구하는 의사로서의 사명을 다해
서 죽음까지도 불사했던 위대한 인간 아스클레피오스를 생각하고 결심한 거예요. 의사가
되기로요.”
영신은 얘기를 끝내고 석훈의 품에 안겨 거친 숨을 고르느라 한동안 말이 없었다. 석훈은
그런 영신의 머리카락을 손가락빗으로 쓸어 주었다.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그러나 이튿날
영신은 학교에 나타나지 않았다. 석훈은 몹시 애가 탔다. 집으로 전화를 해도 통화를 할
수가 없다. 영신을 석훈은 사흘이 지난 후에야 병원에서 볼 수가 있었다. 그 후로는 석
훈이 영신을 전혀 보지 못했다. 영신의 부모가 석훈의 접근을 철저하게 막고 있었다. 영
신의 병세도 그와 비례해서 점점 악화되어 갔다.
석훈이 영신의 별자리 얘길 돌이키고 있는 사이에 꽤나 시간이 흘렀다. 주인아주머니가 나
와서 얼른 들어가라고 말한다.
“하이고 선상님, 학생 감기 들겠네요. 얼렁 들어가 주무셔요.”
석훈이 그때서야 소연을 깨웠다. 소연이 한 숨을 잔 후라 생생해졌다. 방으로 들어오자.
자신의 배낭에서 양주병을 한 병 더 꺼냈다. 티 테이불 위에 안주감이 몇 있었다.
“선생님, 한 모금 더 하시고 주무세요. 저도 이대론 잠이 오질 않을 것 같아서요.”
소연의 말이 아니더라도 석훈도 술 생각이 났었다. 밖에서 두 모금 마신 것은 이미 까마득
했다. 시장하기도 했다. 석훈이 밖으로 나가자 주인아주머니가 다가왔다.
“시장해서요. 아주머니. 뭐 차릴 것 있을까요?”
“글쎄요. 라면이면 되긴 하겠는데.”
"네, 그럼 그렇게 하세요.“
라면이 들어오기 전에 둘이 양주병에 담긴 소주를 반은 비웠다. 그리고 라면이 들어오자.
가속을 붙여 한 병을 다 비웠다.
“참, 소연인 그 선배를 어떻게 생각하나?”
석훈이 술이 취하자 물었다.
“좋은 사람이지요. 그건 저도 인정해요. 절 끔찍하게 사랑도 하고요.”
“그럼 그 청년과 결혼하지 그래?”
석훈은 영신이 생각을 하며 물었다.
“그건 아니에요. 전 아직 선생님을 못 잊거든요. 그 짧은 기간 동안이었는데도 제가 살아
있다는 것을 실감한 건 그 때뿐이었거든요. 하여간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삶은 환희
같은 걸 느꼈으니까요.”
“그렇군. 난 그 선생님이 참 부럽다.”
“참, 선생님도. 어쨌든 고맙습니다. 선생님! 전 그럼 이만 꿈나라로 가렵니다.”
그리고 소연은 곧 잠이 들었다. 잠든 그 모습이 무척이나 곱다. 그러나 석훈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영신과 지낸 몇 개월이 몹시 안타깝고 그립다. 휴대전화를 꺼내서 지금까지
온 메시지를 확인했다. 담겨 있는 19통 중 2통이 영신이 보낸 것이다.
영신인 곧 수술을 받아야 산다. 영신의 부모는 석훈을 학교에 고발할 준비를 하고 있는 상
태다. 건강하지 않은 영신을 유혹해서 데리고 놀았다는 것이 그 이유다. 교장 선생의 결
정에 따라 해직될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석훈은 그런 자신을 걱정할 계제가 아니다. 그
보다도 영신의 건강이 더 걱정이다. 방학 기간에 심장을 수술해야 한다. 그 수술 날짜가
바로 며칠 후로 잡혔다. 좁혀진 혈관을 자르고 건강한 혈관으로 바꿔야 영신은 건강하게 살
수가 있단다. 그 자리엔 석훈 자신이 있어야 한다. 누구보다도 영신을 안정시켜 줄 수
있는 사람은 석훈 자신뿐이라고 석훈은 믿고 있다.
소연이 잠꼬대를 한다. 너무나 또렷이 말했다.
“선생님 사랑해요.”
그건 마치 영신이 자신에게 하는 말처럼 들렸다.
“그래, 이제 여섯 시다. 한 시간 후면 첫배가 떠난다. 난 영신이 있는 서울로 간다. 그리
고 다시 한번 더 영신의 부모와 부딪쳐 봐야겠다. 그러나 회의적이다.”
석훈은 결심이 서자 짐을 싸기 시작했다. 방금까지 멀쩡했던 하늘이었는데, 갑자기 후두둑
비를 뿌렸다. 석훈은 비속을 헤치고 차를 몰았다. 그렇게 시작한 비는 금방 장대비로 바
뀌었다. 장대비속에서 해맑게 영신이 웃고 있는 모습이 석훈의 급한 마음에 기름을 붓고
있었다. 술기운이 전신을 감쌌다. 영신이 없는 세상이라면 자신의 존재도 그 가치가 없다
는 생각이 석훈의 머리에 퍼뜩 스쳤다. 석훈은 자신의 짚을 더 거칠게 몰았다. 번쩍, 하
고 번개가 섬 전체를 대낮처럼 밝힌 후 곧이어 천둥이 천지를 진동시켰다.
수술을 앞두고 영신은 석훈을 몹시 기다렸다. 꼭 와 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석훈
은 끝내 오지 않았다. 열 시간의 긴 수술을 끝내고 이튿날 영신이 깨어났을 때도 석훈은
끝내 영신에게 오지 않았다. 석훈의 추락사는 전교생이 다 알지만 영신만 그 사실을 몰랐
다. 달포까지 영신은 끝내 오지 않는 석훈을 기다렸다. 그리고 건강을 되찾아 퇴원했다.
퇴원 후에야 알았다. 석훈이 늘 하던 말의 뜻을 알았다. 영신 자신은 석훈이 살 수 있
는 에너지였다. 그 에너지를 더 이상 받을 수 없다고 느끼는 순간 그가 살아야할 삶의
지표도 무의미해 지는 것이었으리라. 이제 영신은 그 아픈 기억 속에서 살아야한다. 그
것이 언제까지이든 자신의 삶 속에는 이미 석훈의 일부가 살아 숨쉬고 있다는 것을 스스
로 확인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 끝 -
첫댓글 제자와의 사랑이 너무~ 절절하네요. 석모도 가면 옛사랑을 만날 수 있으려나??
조정을 하면 어떨까요? 오른쪽으로 넘 길게 늘어져서 읽기가 불편한데요..... 조금 수고 스럽지만 수정해 주심 읽는 분이 편하게 읽을 수 있을것 같거든요. 부탁해요~~~~!
사과..샘, 제가 조정하고 있을 때 보셨군요. 미안해요.... 글구 봐 주셔서 감사하구요. 참,선 샘을 장선 샘으로 착각했네요. 에고 민망해라!
인터넷소설 본다고 딸 야단쳤는데... 글읽는엄마보고 씩웃고있네요. 사진과 함께 읽을 수 있어 더 좋은데 함께 갈 수 있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