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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학기 강의를 준비할 때마다 힘들지 않은 과목이 없지만 가장 신경이 쓰이는 과목은 ‘아시아사입문’이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강의해야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벌써 몇 년째 강의하였지만 여전히 오리무중이라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아시아란 무엇인지도 잘 모르니 말하여 무엇 하랴. 마침 2학기에서 ‘동양사탐구’란 과목을 가르치면서 동일한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 현재까지 얻은 결론은 아시아사는 세계사이므로 아시아사의 구성원리는 세계사의 구성원리와 동일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세계사의 구성원리가 상호관계를 핵으로 두고 다루어야 하는 점, 상호관계는 각 단위 지역의 내부적 변화와 교통․통신․교역을 관련지어 다루어야 한다는 점, 동아시아 이외의 지역에 대한 관심을 더 높여야 한다는 것 등이다. 이러한 생각에서 기존의 논저목록에 새로 몇 가지 글을 보충하였는데, <<바다의 아시아 1. 바다의 패러다임>>(오모토 케이치 외 엮음, 김정환 옮김, 서울, 다리미디어, 2003), <<바다의 실크로드>>(양승윤 외, 청아출판사, 2003), <<아시아간 무역의 형성과 구조>>(스기하라 카오루 지음, 박기주․안병직 옮김, 서울, 전통과현대, 2002), 그리고 <<리오리엔트>>(안드레 군더 프랑크 지음, 이희재 옮김, 서울, 이산, 2003)가 그것이다. 이 가운데 가장 시원하고 재미있었던 것이 <<리오리엔트>>였다.
이 책에 대하여는 책 말미에 있는 <옮긴이의 말>, 신문의 많은 서평 및 각종 소개(확인한 것만 15개임)에서 훌륭한 교수나 기자들이 자세하게 쓰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 자세한 내용을 제시하는 것은 별 의미도 없고 내 능력을 벗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첨부한 4 편의 소개와 논평 및 인터넷 검색 참조 바람). 다만 한 가지 보충이 될 만 한 것을 들도록 하면 다음과 같다.
각 소개자들이 가장 관심을 갖는 것은 왜 아시아는 몰락하고 유럽은 흥기하였는가였다. 프랑크는 “서양은 아시아 경제라고 하는 열차의 3등 칸에 달랑 표 한 장을 끊어 올라탔다가 얼마 뒤 객차를 통째로 빌리더니 19세기에 들어서는 아시아인을 열차에서 몰아내고 주인행세를 하는 데 성공했다.”고 하였다. 왜 그것이 가능하였는가? 그것의 현재적 의미는 무엇인가?
명청시대사를 공부하는 내 입장에서는 다음과 같인 두 가지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첫째, 중국이 가진 세계의 공장으로서의 위상이 무너진 것이며, 그 이유는 최대의 수입국인 유럽에서 수입대체에 성공한 결과이다. 즉 중국의 대표적인 상품인 차, 자기, 비단은 모두 중국인의 노동력과 기술력이 중국에서 생산되는 원료와 결합된 자기 완결적인 생산품이었다(어느 것도 수입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유럽은 16세기 이후 비로소 신대륙의 은을 이용하여 이들 상품을 수입할 수 있었을 뿐 그 어느 것도 자급할 수 없었다. 따라서 세계 은의 50%이상을 중국이 흡수하고 이를 통하여 중국경제를 활성화시킬 수 있었던 것은 당연하였다. 그런데 18세기 초 독일에서 마인쯔 자기를 생산함으로써 수입대체를 할 수 있었으며, 아름다움이나 가격 그 어느 면에서도 유럽의 자기가 중국을 앞서기 시작하였다. 혹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유혹하는 유럽 도자기>>(김재규, 서울, 한길아트, 2000)에 수록된 사진을 참조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18세기 중기 청조에 유럽식 도자기의 유입과 유럽풍 미술의 전파도 이러한 현실을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또한 19세기 초 인도에서 차를 발견하여 재배함으로써 중국산을 대체할 수 있었다. 그밖에 비단은 일찍이 페르시아 등지에서 생산되었으므로 중국의 독점시대가 종결되고 유럽의 우위가 성립하였다. 특히 18세기 중반이후 면방직 공업이 기계화됨으로써 생산성이 극대화되었고 이것이 산업혁명으로 이어졌던 것은 그 우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실이었다. 반면에 영국은 인도에 아편을 재배하여 중국에 수출함으로써 아편의 상품화가 대대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중국의 대응은 정치적이든 경제적이든 기술적이든 그 어느 것도 성공적이지 못하였다. 둘째, 주목해야 할 것은 중국사회의 불안정성이 증대된 것이다. 그 원인은 인구증가, 사회 통제력의 제약 등 다양한 요소가 있겠다. 그러나 내가 특히 관심 갖는 것은 계투의 일상화로 대표되는 일상적인 사회 불안의 증대이다. 이러한 사회불안은 복건, 광동 등이 심하지만 18세기 후반이 되면 전국적인 현상으로 나타났으며, 막대한 신변보호비용은 물론이고, 생산에의 투자와 노동력 투입을 어렵게 만들고 소득을 감소시켰다. 사회불안→생산 및 소득 감소→구매력 감소→생산쇠퇴 등으로 계속되는 악순환의 고리는 더욱 두터워졌고, 그 결과 중국의 내부적인 탄력성과 대응능력은 약화되었다. 경제는 경제 자체로 완결되지 않고 사회, 경제, 문화, 정치 모든 것이 서로 긴밀히 결합되어 있었다. 영국과의 전쟁에서 패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후 청조의 대응이 적절하지 못하였던 것은 당시 중국이 가지고 있던 총체적인 상황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었다.
이상과 창조적 발전과 내부적 안정의 상실이란 나의 설명은 별로 새로울 것도 없다. 그러나 여기서 2004년 1월 현재, 한국이 어떻게 살 길을 찾을 수 있으며 세계 속에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할 때 일부나마 역사의 교훈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이것이 곧 번역자인 이희재씨가 “한국의 역사적 사명”이라고 강조한 ‘세계 주변부와의 교류 확대 및 인류 보편의 가치 추구’라는 화두를 현실화 시킬 수 있는 전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세계사를 배우고 가르치는 핵심적 이유가 아니겠는가?
아시아가 세계경제를 호령하리라
동아일보/ 2003년 3월 1일/ 이민호 서울대 명예교수ㆍ서양사
지금 세계는 지각 변동을 방불케 하는 일대 전환기에 직면해 있다. 그럼에도 오늘날의 인문사회과학이 노정하는 무력함을 보면 안타까울 따름이다. 우리 귀에 들리는 것은 기득권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의도로 유포되는 '문명의 충돌'이라는 호들갑스러운 수사학이 고작이다. 이런 상황에서 과거 종속이론가로 이름을 날린 안드레 군더 프랑크의 <리오리엔트>가 좋은 번역자를 만나 국내에서 출간된 것은 반가운 일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기존 학계의 안이한 풍토에 경종을 울리면서 자못 충격적이기까지 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다.
이 책의 주제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기존 세계사 해석을 지배한 유럽중심주의에 대한 정면 비판과 새로운 역사적 이론적 지평의 개척이라고 하겠다. 저자의 말을 빌리자면, "지금까지 통념으로 받아들여 온 유럽중심적 역사서술과 사회이론을 뒤엎으려고" 하는 것이며, 나아가 "글로벌한 관점에서 보면 근세 세계사에서 유럽이 아닌 아시아가 중심 무대를 장악한 것이 명백하다"는 점을 증명하려는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유럽인들은 아메리카의 금과 은을 갖고 나서야 비로소 아시아 중심의 세계 경제열차의 3등칸에 간신히 승차할 수 있었다. 당시 유럽인들이 가진 이점이라 해봐야 '후진성'의 이점이 전부였다. 그러던 유럽이 19세기에 들어 아시아에서 거대한 '카지노'를 벌이게 되고 '일시적으로' 대박을 터뜨렸다.
여기서 '일시적으로'라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말에는 명백히 동양의 경제력이 언젠가는 다시 세계를 지배할 것이라는 알레고리가 담겨 있다. 일찍이 애덤 스미스와 같은 학자들은 중국 경제의 역사적 중요성을 아낌없이 강조한 바 있다. 그러던 것이 19세기에 들어 유럽의 이론가들은 한결같이 서구의 경제 발전을 침소봉대함으로써 유럽중심적인 역사상을 고착시켜 왔다.
예컨대 마르크스는 유럽적·부르주아적·자본주의적 발전의 보편성을 신봉하면서 이로부터 이탈한 지역을 이른바 '아시아적 생산양식'으로 뭉뚱그리고 나아가 '아시아적 전제주의'가 횡행하는 곳으로 낙인찍어 버렸다.
베버 역시 유럽 특유의 프로테스탄트 윤리가 다른 문명의 종교들과는 달리 합리적인 자본주의 정신을 낳았다고 주장했다. 그런가 하면 브로델의 경우 아예 유럽이 역사가를 발명해내고 이들로 하여금 유럽 안팎에서 유럽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도록 했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바로 여기서 근대 학문이 '동양의 쇠락'과 '서구의 발흥'이라는 명제를 증명하는 일에 주력했음이 여실히 드러난다.
이러한 인식을 토대로 프랑크는 세계 경제의 진정한 중심이 유럽이 아니라 아시아였음을, 그리고 아시아가 될 것임을 주장한다. 그리고 언제 어디서든 반드시 서구 모형을 추종할 필요도 없고 그럴 의무도 없음을 역설한다. 과연 저자는 서구 모형에 따라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을 겨냥해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수여되던 '명예 백인'의 지위를 얻었을 뿐이라고 빈정댄다.
그러나 유럽중심주의를 비판한다고 해서 필경 그것을 대신하는 특정한 지역권이나 문명권이 출현할 것이라는 환상을 가져서는 안된다. 바로 이러한 '환상적 중심주의'에 대한 경고야말로 프랑크가 제시하는 으뜸가는 메시지일 것이다.
만일 이런 환상에 빠지게 된다면, 이는 합리적인 유럽만이 '예외적으로' 근대 자본주의적 경제 발전을 성취할 수 있었다는 유럽중심주의적 편견과 하등 다를 바가 없다. 요컨대 유럽중심주의를 극복하는 길이 아이러니컬하게도 유럽을 답습하여 아시아를 위한 아시아의 역사를 인위적으로 발명해내는 것일 수는 없다.
그럼에도 한국어판 서문에서 저자가 동아시아 경제의 역동성을 강조했음은 여전히 우리의 관심을 끈다. 그렇기에 '아시아 시대의 글로벌 경제'라는 원서의 부제가 한국어본에서 빠진 게 아쉽게 느껴지는 것이다.
18세기 전 亞경제 세계의 주축
중앙일보/ 최갑수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2003년 3월 8일
독자들 가운데는 먼저 지은이의 이름에 의아해할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대표적인 종속이론가였던 그 프랑크가 아닌가 하고 말이다. 그런데 이미 30년이 훨씬 지난 1960년대 말에 <저개발의 개발>이라는 기막힌 제목의 책으로 이름을 높였던 그가 맞다면, 필시 노익장의 나이에 이 책을 썼을 터인데 대단한 순발력이 아닐 수 없다. 당시 그는 좌파진영 내에서 정통 마르크스주의에 반기를 들었는데, 지금은 서구학계 전반에 대해 우상파괴를 감행하고 있는 것이다.
제목에서부터 이미 책의 야심만만한 문제의식이 드러난다. <리오리엔트>(원제 ReOrient)란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하나는 '다시 동양으로'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새로운 방향설정'이란 뜻이다. 그러니까 이 책은 유럽중심주의를 넘어 세계경제에서의 아시아의 재부상을 진단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현대 세계경제 보고서는 아니며 유럽중심주의를 논박하는 문화연구도 더욱 아니다. 이것은 전지구적 관점에서 1400~1800년에 이미 존재했다는 '글로벌 경제'의 흐름을 추적하는 세계경제사다.
중요한 것은 연구대상의 시기다. 1400년 당시만 해도 유럽은 지중해 세계의 변방에 불과했다. 하지만 불과 400년이 지난 1800년이 되며 유럽은 일약 세계사의 중심으로 부상했다. 이 서구의 대두는 너무도 극적이어서 지난 1천년 사이 최대의 사건이 돼 왔다. 그러기에 이 시기는 서구 역사학계에서 가장 많이 연구되어 왔고 또 19세기에 탄생하게 되는 사회과학에 최대의 화두를 제공했다.
프랑크는 바로 이 근대 초입을 분석대상으로 삼음으로써 최대 전략거점을 공격대상으로 택한 셈이다. 유럽중심주의의 뇌관 자체를 폭파하는 작업이다. 이 책의 주 논지는 다음의 두 부분으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1400~1800년의 세계경제에 대한 수정주의 해석이고, 다른 하나는 유럽의 발흥에 대한 탈(脫)유럽중심의 설명방식이다. 먼저 저자는 유럽이 자본주의를 만들어냈다는 통설을 거부한다. 전지구적인 차원에서 시장경제를 주도하고 1750~1800년의 글로벌 경제를 움직였던 것은 바로 동양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심지어 유럽은 신대륙의 발견 이후에도 세계경제의 중심이 아니었다.
저자는 주요한 이차적인 연구문헌을 동원해ㅡ그는 역사학자는 아니다ㅡ인구성장, 생산성 향상, 기술혁신, 심지어 1인당 소득에서 특히 중국과 인도가 18세기의 상당 기간까지도 유럽에 대해 앞서 있었음을 입증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1500년 이전 유럽은 세계경제에서 거의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 그나마 아메리카로부터 얻은 금과 은으로 겨우 당시 글로벌 경제의 열차에 올라타는 티켓을 잡았을 뿐이다. 오랫동안 중국은 유럽을 포함하는 전 세계에 대해 무역흑자를 유지해 당시 은 생산량의 40%를 끌어들였으며, 유럽으로는 만성적인 무역적자를 귀금속으로 메울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의문이 생긴다. 1750년 이후 유럽이 어떻게 해서 세계시장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는가? 이에 대해 저자는 세계경제의 주기변동에서 근본요인을 찾는다. 유럽이 대두했던 것은 아시아가 1800년 이후 일시적으로 겪은 주기적인 몰락의 기회를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국제교역과 식민지 및 노예무역을 통해 자본을 비축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경비와 노동력을 절약하기 위한 기술 투자를 남김없이 설명할 수 없다.
따라서 높은 임금 및 생산요소 비용이라는 또 다른 요인이 있었다. 영국은 고임금 비용을 줄이기 위해 투자했던 반면 보다 효율적인 농업체계로 말미암아 임금수준이 낮았던 중국으로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요컨대 중국인은 유럽인 못지않게 합리적이었으며, 다만 경제기회의 내용이 달랐을 뿐이다. 이 책이 제시하고 있는 구체적인 통계자료는 물론이거니와 기본명제 역시 논란의 여지를 갖고 있다.
주류 학계의 견해에 역행하는 만큼 그럴 소지는 더욱 클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통념을 깼다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임무를 완수한 셈이며, 그것을 푸는 일은 결국 후학들의 과제다. 독자들은 번역자의 경쾌한 문체를 통해 오랜만에 아시아를 주무대로 하는 역사세계를 접할 수 있게 됐다. 감히 일독을 권한다.
아시아는 왜 급속히 몰락했는가
교수신문 서평 : 『리오리엔트』(안드레 군더 프랑크 지음, 이희재 옮김, 이산 刊, 2002) 2003년 12월 30일 고려대 정안기 / 고려대·경제사
최근 1997년 아시아 경제위기에도 불구하고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제국의 눈부신 경제발전을 배경으로 근대 세계경제사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 전환이 모색되고 있다. 종래 인류사의 보편으로써 서구중심주의적 세계사관과 구미제국주의에 굴복하는 피동적이고 정체론적인 아시아 사상에 대한 편견의 수정 그리고 현재진행형으로써 글로벌리즘에 대한 새로운 역사상의 확보이다. 이는 세계사상의 중심으로서 서구가 아닌 다양한 세계의 일 지역(주변)으로서의 서구의 존재와 서구중심사관에 입각한 ‘세계사’가 아닌 새로운 인류 전체사로서 ‘글로벌 히스토리’의 구상이다.
이 책의 저자 안드레 군더 프랑크(73세, 미국 노스웨스턴대 원로교수)는 1970∼80년대 세계 학계를 풍미했던 종속이론(Dependency Theory)의 창시자이며, 1980년대 한국학계를 뜨겁게 달구었던 한국자본주의논쟁의 이론 틀을 제공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프랑크는 저개발국의 근대화론 혹은 공업화론이 난무했던 1960년대 당시 정치경제학의 시점에서 라틴아메리카를 중심으로 하는 제3세계의 저발전을 저개발국 내부의 봉건제가 아닌 서구자본주의의 수탈과 세계체제의 종속적 지위로서 파악한 ‘저발전의 발전(1969)’으로 세계학계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그의 문제의식을 더욱 발전시켜, 글로벌 3중 구조론의 근대세계사를 구상한 것이 잘 알려진 월러스틴의 ‘근대세계시스템론’이다. 그러나 실제로 프랑크 자신을 비롯하여, 월러스틴 이론의 가장 약한 고리는 역시 아시아였다. 특히, 1980년대 중반 이후 아시아 NIEs를 비롯한 아시아 지역의 뚜렷한 경제발전과 세계경제에서 차지하는 아시아의 지위 그리고 장래에 대한 기대치가 급속히 상승하면서 더욱 분명해졌다. 그러나 아시아경제 발전을 비롯한 세계경제 변화에 가장 먼저 반응한 연구자가 또한 프랑크이기도 하다.
프랑크는 이 책을 통해서 ‘자본주의vs사회주의’ 혹은 ‘서구vs비서구’라고 하는 20세기 역사관의 한계를 넘어, ‘서구문명vs아시아문명(중국)’이라고도 할 수 있는 ‘아시아’의 독자적인 문명세계를 역사적으로 재조명하고자 한 최근에 보기 드문 논쟁적인 대작이다. 프랑크는 이미 1995년 센더슨이 편집한 ‘제 문명과 제 세계시스템(Civilizations and World Systems)’ 가운데 ‘근대세계시스템론의 재고-브로델, 월러스틴 비판-’을 게재해, 절친한 연구 동료이기도 했던 월러스틴의 유럽중심주의적 세계시스템론을 통렬하게 비판하였다.
프랑크는 현재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과거 유럽중심사관의 연장으로서 현대세계가 아닌 아시아를 중심으로 형성되고 있는 새로운 세계질서와 이에 정합적인 포스트세계시스템론을 주장하였다. 바로 포스트세계시스템론의 연장으로 아시아 중시의 글로벌사관(Globalogical)을 제시한 것이 ‘리오리엔트’이다. 이 책은 1400-1800년까지의 아시아 중심의 세계경제에 대한 전체적인 분석을 통하여, 탈유럽중심사관의 논쟁적인 문제제기와 함께 독창적인 논리로 장기 아시아 근대의 역동성을 보여주는 한편의 대하 역전드라마를 방불케 한다. 이 책은 한국에 앞서 일본(山下範久 옮김, 'リオリエント', 藤原書店 刊, 2000)과 중국(劉北成 옮김, '白銀資本', 中央編譯社 刊, 2000)에서 번역·출간돼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제목 리오리엔트는 세계사의 중심으로 아시아의 복귀(re-Orient)와 서구중심사관의 수정(re=orient)의 상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른바 ‘아시아 르네상스(Asia Renaissance)’시대의 도래를 예감하게 하는 주제 설정이라 할 수 있겠다. 먼저, 제1장 ‘현실의 세계사와 유럽중심적 사회이론과의 대결’에서는 ‘17-18세기 서구 기원의 세계시스템이 나머지 비서구세계를 포섭해 가는 과정으로서 근대 세계체제의 형성’이라고 하는 상투적인 유럽중심의 근대세계사 패러다임에 대해 프랑크는 인류사 중심의 글로벌패러다임(탈서구중심사관)으로 그 방법론적인 대결구도를 분명히 하고 있다. 즉 브로델, 월러스틴이 주장하는 의미에서 서구가 세계경제 혹은 세계시스템 가운데 중심적인 지위를 차지하였던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고 단언하고, 1800년 이전 세계경제와 그 문명의 중심은 아시아였다는 주장이 본서의 주요 논지이다.
그렇다면 세계경제가 아시아(중국)를 중심으로 어떻게 물자가 글로벌하게 교역되고, 중국은 어떻게 교역수단인 화폐량(은화)의 50%나 흡수할 수 있었는가를 제2장 세계무역의 회전목마’와 ‘화폐는 세계를 돌면서 세계를 돌게 한다’는 제3장에서 검토하고 있다. 먼저, 제2장에서는 1400∼1800년에 걸친 글로벌한 교역망을 세계지도로 제시하면서 세계를 4개의 지역(대서양지역, 아프리카·서아시아지역, 인도양지역, 아시아지역)으로 나누어 각 각의 물산루트와 교역실태를 묘사하고 있다.
그 가운데서 세계무역의 중심은 중국을 비롯한 인도, 동남아시아, 일본을 포함한 동아시아 해역무역이었으며, 유럽을 시작으로 세계의 다른 지역과 비교하여, 동아시아지역, 동남아시아해역에서 화교를 비롯한 일본상인의 활약 및 유럽을 능가하는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 지역 도시의 현저한 발전상을 인상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또한, 당시 글로벌한 물자교역을 촉진한 기축통화는 은화였으며, 은화의 주요 공급자는 스페인령 남아메리카와 일본이었다.
이들 은화의 대부분은 최종적으로 아시아, 중국으로 유입되었다. 그 가운데 스페인을 통해서 유럽으로 유입된 은화는 가격혁명을 유발하면서 유럽 각국의 군비증강과 용병 비용으로 충당되었던 반면, 영국과 네덜란드로 유입된 은화는 아시아 물산의 구매에 지출되었다. 반면, 유럽과의 교역을 통해서 중국으로 유입된 막대한 양의 은화는 중국경제의 기저적인 확대와 함께 급속한 생산력 발전을 견인하였다는 것이다.
한편, 그와 같은 산업혁명 이전 아시아가 세계경제에서 차지한 압도적인 지위를 유럽지역과 비교시점에서 인구, 생산, 생산성, 소득, 교역지표를 통해서 밝힌 것이 제4장 ‘글로벌 경제-비교와 관계-’이다. 인구사 연구는 이미 세계주요국의 역사연구 가운데서도 가장 진전된 분야이기도 한데, 이 시기 세계인구에 차지하는 유럽인구는 약 10∼20%에 지나지 않았던 반면, 아시아 인구는 50∼70%에 달하였으며, 인구증가율도 역시 아시아가 훨씬 높았고 생산측면에서도 세계총생산의 5분의 4를 차지하였다는 것이다.
더구나 아시아문명의 3대 수공업은 면직물, 견직물, 보석세공품을 포함한 금속가공, 도자기, 유리제품이었다. 이에 비교하여, 1500∼1800년대에 걸쳐 유럽의 유일한 교역상품은 화폐였으며, 그것도 단지 식민지 아메리카에서 획득한 은화에 불과했다는 지적이다.
다음은 생산력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아시아의 급속한 몰락과 당시까지 세계의 후진지대였던 서구의 발흥을 다룬 것이 제5장 '횡으로 통합된 거시사’와 제6장 ‘왜 서양은 (일시적으로) 승리했는가’다. 프랑크는 17세기 위기의 세계적인 동시성에 주목하면서 아시아의 후퇴와 몰락을 500년 주기의 장기파동으로 설명하고 있다. 즉, 종래 경제사 일반이 공유해 왔던 서구의 충격에 의한 아시아의 몰락을 부정하고 아시아의 몰락은 이미 서구의 발흥에 선행했다고 주장한다. 즉, 인도 뱅갈지역의 직물업은 물론이고 중국(청조)도 이미 1720년경부터 은 수입이 격감하였고, 그 후 지속적으로 감소하였다고 한다. 또한, 1870년 유럽의 발흥과 그 원동력에 대해서 미국의 은과 노예 그리고 노예플랜테이션이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미국으로부터 획득한 막대한 양의 은이 풍요로운 아시아역내 교역권으로의 진입을 수월하게 하였고, 유럽은 단지 세계를 누비는 거간꾼으로 막대한 유통이익을 획득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유럽의 발흥은 단지 아시아의 쇠락에의 편승과 그 결과에 지나지 않았다는 결론이다.
그러나 제5장에서 다룬 아시아의 몰락과 관련한 후퇴선행론은 서양의 발흥을 어느 시점을 잡는가에 따라 그 결론은 상이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제6장에서 다루고 있는 유럽의 발흥과 관련한 은화결정론적 이해는 전체적으로 그 설득력이 매우 약하다. 오히려 문제의 소재는 동양의 후퇴와 서양의 발흥과의 관련성 여부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서구발흥의 최대 원동력은 단지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획득한 은화만이 아닌 아시아문명의 충격, 그 대표적인 물산이라고 할 수 있는 면직물, 차 등이 유럽인의 라이프스타일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즉, 서구의 아시아문명에 대한 강렬한 憧憬이 서양의 발흥을 촉발시켰고, 아시아물산에 대한 수입대체화의 일환으로 면방적업 중심의 생산혁명(산업혁명)이 발생하였다. 따라서 산업혁명의 달성에 의해 획득한 유럽의 높은 생산력이 시장경쟁을 통해 아시아의 수공업적 생산력을 상대적으로 후퇴시켰다는 아시아 충격론(Oriental Impact)이 오히려 서양의 발흥과 아시아의 후퇴를 보다 정합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이상과 같이 이 책은 획기적인 문제제기와 뛰어난 학문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프랑크 자신의 실증적인 발견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즉, 종래 경제사에 관련한 광범위한 2차 문헌을 아시아라고 하는 시각과 독자적인 문제의식에서 재구성한 것이 그 특징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 프랑크가 거둔 최대의 업적은 종래 유럽중심주의라고 하는 ‘서구=근대’의 도식적인 등치구도(예외성과 보편성)를 부정하고 그 ‘지역성(region)’을 분명히 한 점일 것이다.
월러스틴도 반론에서 평하고 있지만, 아시아문명이라고 하는 거대한 영향에도 불구하고 급격한 서구의 발흥은 역사적 우연에 불과한 하나의 기적(European Mircale)이었으며, 이 기적의 해명이야말로 이 책의 최대의 성과이며, 유럽의 특질을 보다 분명히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즉, 프랑크는 서구와 아시아를 문명사적으로 상대화시켜 종래 아시아 개념을 재검토함으로서 근세 서구와 비서구의 분절화된 시각(유럽중심사관)의 비판과 세계시스템론과 국민국가를 넘어서는 공간적 단위로서 ‘지역성’을 적출했다는 점에서 그 공헌이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2000년 이 책의 번역, 출간과 함께 일본학계를 반응은 어떠한가. 일본학계는이미 프랑크에 앞선 문제의식으로 1984년 사회경제사학 전국대회(당시 공통논제는 아시아교역권의 형성과 구조)를 통해서 이른바 아시아교역권 논쟁이 촉발하였다. 즉, 서구의 아시아 진출과 관련한 아시아교역권의 존재여부, 전근대와 근대의 ‘연속vs단절’, 서구의 충격에 의한 아시아간 무역의 평가여부 등 첨예한 논점과 수차례에 걸친 활발한 학술논쟁을 통해서 치밀한 실증에 입각한 획기적인 연구 성과를 축적할 수 있었다.
그 가운데 일본문명론의 가와카츠 헤이타(川勝平太), 중화조공시스템론의 하마시타 다케시(浜下武志), 아시아간무역론의 스기하라 카오루(杉原 薰)가 일본학계의 세계경제사, 아시아경제사를 주도하는 3인방으로 논의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일본학계는 이 책에서 보여준 프랑크의 평가는 그 스펙트럼이 다양하지만 전반적으로 호의적이다. 그 이유는 아마 프랑크의 작업이 서구세계에서 최초의 아시아사상에 대한 포괄적이고 정당한 평가이며, 그 동안 일본학계가 거둔 연구시각과 방법론이 드디어 유럽의 시민권을 획득하게 되었다고 간주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서구문명vs중국문명’이라는 세계사의 중심으로써 중국 중시의 시각과 장래 중국 중심의 아시아경제에 대한 지나친 낙관론에 대해서는 상당히 비판적이다. 그 가운데 일본문명론을 주장해 온 가와가츠 헤이타는 해양사관과 물산복합론에 기초하여, 세계적으로 독자성을 갖는 일본문명을 서구문명과 상대화시켜, 일본근대는 서구의 충격이 아닌 ‘아시아 충격=탈아시아’를 통해서 근세로부터 근대일본으로 이행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즉, 유럽을 비롯한 세계 근대문명의 탄생비밀은 프랑크가 제시한 리오리엔트(Re-Orient)가 아닌 디오리엔트(De-Orient)야말로 근세로부터 근대세계로 이행의 본질이었다고 주장한다. 어쨌든 프랑크의 리오리엔트는 금후 일본학계가 주도하는 아시아경제사 연구의 커다란 촉진제가 될 것임은 분명하다. 또한, 금후 이 책에 대한 서구학계의 반응과 뿌리 깊은 서구중심사관이 어떻게 몰락할지의 여부도 큰 관심거리다.
이 책은 출간되자마자 세계사학회를 비롯한 다수의 학술상을 수상하였으며, 세계경제사와 아시아경제사 연구 가운데 고전의 반열에 올랐다. 어쨌든 국내에서 번역이 좀 늦은 감이 있지만 크게 반가운 일이다. 이 책이 제기하는 문제의 요지는 한국학계에 대해서도 상당한 충격이 아닐까 한다.
이미 막대한 연구인력과 연구축적에도 불구하고 일국사적 시각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국사학계의 연구동향과 과도한 민족주의에 발목 잡힌 배타적인 역사관, 아직도 구태의연한 유럽중심사관에 사로잡힌 자본주의맹아론 등의 질긴 생명력과 획일적인 연구동향을 고려한다면, 한국학계에 대해서도 그 수용여부와 무관하게 커다란 파문이라 할 수 있겠다. 즉, 정보화, 세계화를 특질로 하는 21세기의 세계사상 속에 그 하나의 퍼즐조각에 불과한 한국사(한반도지역)를 어떻게 끼워 넣을 것인가 하는 점일 것이다. 따라서 역사학계를 비롯한 인문사회과학계열 전공자들뿐만이 아니라 동아시아 근대사 혹은 글로벌리즘의 역사상에 관심이 있는 독자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또한, 이 책과 관련해서 함께 읽어 볼만한 책으로는 스기하라 카오루의'아시아간 무역의 형성과 구조'(박기주 옮김, 전통과현대 刊, 2002)가 있다.
안드레 군더 프랑크의『리오리엔트』와 관련한 '노트'
thered@pungkeong.jinbo.net
*이 글은 노트형식으로 기록된 것이다. 따라서 각주나 인용문의 출처를 생략했다.
지구적 차원에서 봤을 때, 현재의 세계정치・경제적 구조나 질서를 결정하고, 그 어떤 경향성을 강제하는 유일무이의체제로서 자본주의를 부정하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우리가 경험하고, 현존하는 이 자본주의체제는 군더 프랑크가 말하는 것처럼 ‘글로벌’하며, 그러기에 자본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 세계체제 전체의 특성을 이해해야만 한다는 그의 논점은 의미심장하다. 그러나 아쉽게도 군더 프랑크의 세계체제는 현재의 ‘자본주의적’ 세계체제의 동학과 위기를 설명할 수 없는, 그 어떤 수식어도 붙일 수 없는(그리고 붙일 필요도 없다는) ‘세계체제’일 뿐이다.
1. 역사적 통일성에 관하여
군더 프랑크의『리오리엔트』에서 비판적인 논점 가운데 하나는 서구의 기존 역사학(폭넓게는 사회과학)에서 나타나는 ‘서구중심주의’이다. 그가 말하는 서구중심주의란 세계경제의 ‘일부’일 뿐인 유럽의 ‘차이’와 ‘예외’가 일반(법칙)화되는 관념적・이데올로기적 효과이다. 그것은 ‘합리성, 제도, 기업가 정신, 기술, 온난한 기후, 문화적 우위, 그리고 경제성장과 근대화’ 등으로 포장되고 일반화되었다. 따라서 이 문제는 역사의 ‘거시성’ 또는 ‘총체성’이라는 논제와 연결된다. 즉 “세계체제가 유럽을 중심에 둔 부분세계가 아니라, 세계를 총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이론적 시각을 제공”(519)하는 의미를 지녔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총체성이란 시간적 그리고 공간적 총체성을 의미한다. 세계라는 역사적 시공간을 하나의 단일한 총체로 파악하고, 이 총체성의 본질을 반영하는 것은 차이가 아니라 ‘통일’임을 강조한다. “통일성이 어떻게 다양성을 낳고 또 끊임없이 변화시키는지를 알아야 한다”(55)는 주장이나, “세계 경제 안에 아시아라는 동심원이 있고, 그 안에는 다시 동아시아 경제가 있고 중국 경제가 있다. 유럽과 대서양 너머 아메리카는 이 동심원들 중에서 맨 바깥쪽에 있었다”(232)라는 그의 주장은 이를 입증한다. 물론 그는 남아시아나 서아시아・동아프리카를 또 하나의 외곽 고리로 상정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외곽과 동심원의 차이구조가 아니라 동심원의 수렴과 전체의 통일구조이며, 이 통일의 내적 완결성이다. 따라서 군더 프랑크에게 있어서 14세기의 동양(중국)과 18세기의 서양 사이의 경제 중심적 위치전환이 그 내적 구조 분석이 부재한 채 결과만 존재하는 것은 크게 이상할 일이 아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헤겔의 ‘역사적 시간’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는 의심을 가지게끔 만든다. 헤겔은 시간을 직접적인 경험적 실존 속에 있는 개념으로 정의했다. 헤겔의 역사적 시간이 갖는 두 개의 본질적 특징은 ‘동질적 연속성’과 ‘시간의 동시성’이다. 알튀세르는 이 특징이 우리를 그 사회적 총체의 고유한 구조로 인도할 것임을 의미한다고 지적했다. 맑스는 이러한 헤겔적인 역사적 시간을 뒤집었다. 즉 역사적 시간은 각각의 상대적 자율성에 의해 결정되는 심급들 사이의 상이한 모순과 수준들의 접합에 의해 전체를 이룬다. 이러한 측면에서 통일체란 어떤 복합체의 유형에 의해 구성되는 전체이며, 그 통일성은 다양한 수준 또는 심급들이 공존하는 복합적인 전체적 통일성이다. 그러기에 세계체계 내의 상이한 수준들을 단순히 ‘종속변수’라고 공언한 군더 프랑크의 논의가 오히려 “본질적인 요인들을 무시하는 결과”(501)인 것이다.
2. 맑스와 서구중심주의
‘자본주의로의 이행’은 궁극적으로 자본주의의 역사를 이해하는 일이다. 따라서 그것은 역사에 관한 인식론적 토대를 바탕으로 성립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면에서 맑스에게 자본주의 이행의 문제는 그의 과학적 역사관이라 일컬어지는 역사유물론에 기대어 있다. 맑스는 「정치경제학의 비판을 위하여, 서문」(1859)을 통하여 ‘사적 유물론의 가설’을 제시하고,『자본』(1867)을 통하여 이 가설을 ‘자본주의적 사회구성체’라는 사례에 적용하고 검증한다. 맑스 스스로 얘기한 바 있지만, 그의 “최종목적이 현대사회의 경제적 운동법칙을 발견하는 것”에 있다면, 그는 사적 유물론을 통해 자본주의적 사회구성체의 원리를 밝히고, 이 속에서 자본주의의 경제적 운동법칙을 설명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작업은 때로 경험주의적 방법론이라는 회의를 불러 일으켰다. 이는 특히 그가 살아있는 ‘영국’을 그 법칙규명의 대상으로 삼고, 이를 현실 자본주의의 ‘이상적 평균’으로 정의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은 마치 하나의 불변적인 법칙성을 띠는 것처럼 현실화되었으며, 더군다나 유럽의 자본주의적 발전 양태와 이행을 하나의 규범적 모델로 정당화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그러나 우드가 언급한 것처럼, 맑스의 저작 속에도 이와 관련한 서로 다른 두 가지 생각이 혼재된 듯 나타났다. 즉 하나는 맑스 이전의 정치경제학의 통념적 모델과 대단히 유사한 기술진보에 의존한 단선적 발전주의적 역사관의 강조이고, 다른 하나는 과거의 역사관을 비판하면서 사회체제의 이행의 법칙을 ‘객관적’ 이론으로 추상화하는 유물론적 역사이론의 강조이다. 이러한 문제는 결국 맑스가 그의 저작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과 『자본』을 통해, ‘이른바’ 원시축적의 비밀에 대한 고전적 명제들을 비판한 이래로, 서구에서 자본주의의 이행과정을 둘러싼 논쟁을 지속적으로 야기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맑스에 대한 유럽(더 정확히는 영국) 중심의 발전주의 역사관이라는 누명이 좀처럼 벗겨지지 않는다.
보편적이며 발전적인 역사주의의 문제는 특히 맑스의 최대 난제라고 평가받는 ‘아시아적 생산양식’에 이르러 더욱 도드라진다. 그가 이 개념을 사용한 것은 생산과 화폐, 그리고 상품자본이라는 세 가지 자본운동의 통일을 통해 자본주의를 이해해야만 한다는 원칙 아래, 유럽(정확히는 영국)에서의 자본주의 발생의 법칙성을 유럽 이외의 지역과의 비교를 통해 강조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그것은 결과적으로 유럽 이외의 모든 사회를 하나의 동일한 생산양식으로 포괄하고자 하는 지리적 규정력에 있어서 정합될 수 있는 법칙추구의 기능을 상실했다. 그리고 이러한 맑스의 의도된 혹은 의도되지 않은 결과는 반反 유럽중심주의 비판자인 군더 프랑크에 의해 ‘붉게 칠한 오리엔탈리즘’이란 비판에 직면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자본주의의 특성과 이행, 경로에는 하나의 일반화된 법칙이 존재하는가. 그렇다면 이를 인정하는 것이 유럽중심의 역사주의적 관점을 생산하는 것인가라는 질문에 새삼 봉착하게 된다.
3. 맑스의 자본주의 이행
소위 사회체계의 ‘이행’이란 것은 한 사회가 그 토대를 이루는 경제적, 사회적 체계를 재생산하는 데 있어서 점점 더 많은 내외적 어려움에 봉착함으로써, 결국 새로운 존재조건의 일반적 형태가 될 또 다른 체계를 토대로, 다소간 급격히 조직되기 시작하는 국면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자본주의로의 이행은 필연적으로 이전 단계의 사회적 생산양식이 붕괴되는 조짐을 통해 그 가능성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맑스는 자신의 초기 저작을 통해 이 문제에 서서히 접근해 들어가기 시작한다.
우선 그는『독일이데올로기』(1846)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유물론적 역사관에 기초해 경제행위의 전제조건, 즉 생산력의 발전정도, 생산관계들의 상태 등을 통해 사회를 재구성하는 한편, 이에 따라 생산양식과 상부구조라는 층위론적 성격의 건축학적 사회관을 등장시켰다. 요컨대 사회의 본질적 총체는 법 관계들과 국가형태들, 또는 인간 정신의 보편적 발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물질적 생활관계들에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물질적 생활관계가 사회를 구성하며, 또한 사회적 내부의 변화를 창출할 수 있는 원인이 된다. 맑스는 자신의 역사유물론의 처음과 끝을 가장 압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서문』(1859)을 통해 이에 대한 설명을 분명히 하고 있다. “변혁의 시기는 그 시기의 의식으로부터 판단될 수 없으며 오히려 이러한 의식을 물질적 생활의 모순들로부터, 사회적 생산력들과 생산관계들 사이의 현존하는 충돌로부터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 내지 적대는 하나의 “혁명적인 단절의 효과”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한 생산양식으로부터 다른 생산양식으로의 이행, 따라서 사회구성체 전체의 변형까지도 결정하는 것이 이 효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본주의로의 이행을 가능케 하는 이 모순의 조건은 언제, 그리고 어떻게 나타나는가. 맑스에 따르면 그것은 봉건적 생산양식 내의 존재하는 현재의 생산관계들이 특정한 발전 단계에 이르러 더 이상 새롭게 발전하는 생산력들과 조응하지 못함으로써 가능해진다. 요컨대 “부르주아지가 형성되었던 기초로서의 생산수단들과 교류수단들은 봉건 사회 내에서 만들어”지며, 여기서 새로운 생산력들이 완전히 발전함으로써 새로운 생산양식, 즉 자본주의로의 이행이 발생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으로의 이행의 조건을 초기 저작들 속에서 설명하는 맑스의 주장은 우드가 ‘통념적 모델’로 지적했듯이, ‘역사를 분업단계의 연속’으로 상정하고, 이를 ‘기술의 초역사적 진보화 과정’을 통해 파악하고 있다는 점에서 단계적이며 필연적인 역사주의적 냄새를 풍긴다는 비판에 바로 노출된다.
특히 맑스 스스로가 “아시아적, 고대적, 봉건적, 그리고 현대 부르주아적 생산양식들을 경제적 사회구성체의 순차적인 시기들”로 언급하며, 여기서 “부르주아적 생산관계들을 사회적 생산과정의 마지막 적대적 형태”로 파악함으로서 그 스스로가 자신을 둘러싼 의문의 단서를 제공하고 있기에, 이같은 비판이 반박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여기에 시스몽디로 대표되는 소부르주아적 사회주의를 비판하면서 낡은 사회를 재건하려고 하거나, 낡은 소유관계의 틀 속에 현대의 생산수단들과 교류수단들을 억지로 밀어 넣으려는 것은 헛된 짓에 불과하다는 주장은, 결국 그가 그 모순의 진화론적 측면을 지적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더군다나 엥겔스가『공산당 선언』의 사상적 의미가 “다윈의 이론이 자연 과학에서 정초했던 것과 동일한 진보를 역사 과학에서 정초할 사명을 부여받은” 것이라고 언급함으로서, 더욱 맑스의 혐의에 힘껏 쐐기를 박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실상 맑스는 자신의 초기저작에 해당하는『독일 이데올로기』에서부터 대표적인 정치경제학 저작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특히 “자본주의적 생산에 선행하는 형태들”), 그리고『자본』에 이르는 긴 시간동안, 자본주의적 생산양식과 이에 선행하는 상이한 생산양식의 형태들 각각을 원시공동체와 아시아적 생산양식, 그리고 노예제, 봉건제 등으로 명명하고 이를 비교・분석하는 작업을 계속해 왔다. 하지만 후기의 정치경제학 저작으로 넘어가면서 맑스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생산 일반과 동일시하는 고전적 정치경제학과의 거리를 분명히 하는 한편,『자본』제1권의 ‘이른바 시초축적’이라는 장을 통해 전자본주의 생산양식과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어떠한 차이를 지니는지, 그리고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봉건적 생산양식으로부터 어떻게 출현하는지, 또한 그 변동의 과정이 어떠한지를 보다 직접적으로 설명하게 된다.
맑스의 고전 정치경제학에 대한 비판은 소위 ‘고전적 상업화 모델’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아담 스미스 등에 의해 주장된 상업화 모델은 상업 활동을 통한 무매개적인 자본의 축적을 주장한다. 그러나 자본은 상업적 활동을 통해 축적된 부가 그 자체로 자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소유관계의 변화를 통해 부가 자본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모델의 논리는 그 자신이 하나의 운동법칙을 가진 사회체계로부터 이와는 완전히 다른 동학과 조건을 가진 다른 사회 체제로의 이행 또는 변환에 대한 개념이 부재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비판의 과정을 통해 맑스는 자본주의 이행의 조건이 자본의 단순한 상업적 발전과 확장에 있지 않으며, 자본주의적 운동법칙을 낳는 자본의 특수한 사회적 관계에 있음을 처음으로 밝힌다. 결국 맑스가 말하려 하는 이 자본의 특수한 사회적 관계라는 것은,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가치액을 증진시키기 위해 타인의 노동력을 구매하려고 갈망하는 화폐와 생산수단 및 생활수단의 소유자와, 자기 자신의 노동력의 판매자인 자유로운 노동자가 서로 대면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는 곧 직접 생산자가 생산수단으로부터의 분리 과정인 시초축적의 조건이 된다.
자본주의로의 이행에 있어서 맑스에게 가장 현상적이며 현실적인 대상으로 직접 지목받은 곳은 영국이다. 맑스는 (영국을 둘러싼) 이 현실에서 나타나는 자본주의적 관계들을 ‘이상적 평균’, 즉 하나의 “일반적인 형 allgeneinem Typus”이라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현실과 개념이 혼용된 듯한 그의 규정은 오히려 영국적 자본주의의 이행과 그 동학의 일반적 법칙성에 대한 역사결정 내지 역사법칙적 협의를 불러일으키는 지점으로 작동한다. 이미 발리바르는 맑스가 영국을 선택한 이유가 오히려 그에게 경험론적인 혐의를 덧씌운다고 지적했다.
사실상 이 ‘이상적 평균’과 ‘현실에서의 전형’은 언 듯 곤란한 대당을 상기시킨다. 즉 방법론적 추상과 실제적인 역사적 현실의 문제이다. 하지만 레닌이 자신의 저작『실현이론에 대한 재론』(1899)을 통해 지적한 사실은, 맑스가 자본주의의 다른 모든 법칙들도 “자본주의의 현실이 아니라 그 이상만”을 묘사한다는 점을 우리가 주의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맑스는『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의 ‘정치경제학의 방법’이라는 장을 통해 ‘생산’이나 ‘노동’ 등 자본주의적 생산과 관련된 개념을 하나의 ‘추상’화된 방법으로 사용하겠다고 분명히 밝힌 적이 있다. 이러한 맑스의 ‘방법론적 추상’은 상이한 형태들을 공통된 규정으로 추상하고, 이를 통해 일반화의 범주를 가능케 할 수 있다는 의미로 읽혀질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는 경험적 추상이 아니라, 하나의 ‘이론적 추상’으로서 현실의 구체적-역사적 성격과 자연적으로 대립하는 이론의 성격을 나타내는 것이다. 발리바르는 이러한 측면에서 “영국은 하나의 불순한 교란된 대상이지만, 이것이 어떤 이론적인 곤란을 야기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맑스의 이론적 대상은 영국이 아니라 그 ‘핵심적 형태’와 그 ‘핵심적 형태’의 결정에 있어서의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전히 곤란은 잔존한 듯 하다. 즉 그것이 고도의 추상적 방법론이라면, 따라서 하나의 일반화된 법칙을 통해 그 총괄성이 쉽게 들어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적 지침이라면 ‘영국’이라는 역사 사실적 대상의 중심성으로부터 조금 자유로워졌을지는 몰라도, 결국 법칙의 일반화를 통해, 그리고 그것이 현실적 역사 속에서 ‘영국’이라는 대상으로 집중되는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는 방식을 취한다면, 우리는 여전히 법칙과 현실 속에서 혼란함을 반복적으로 겪을 수밖에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4. 세계체계론과 서구중심주의
어느 학자가 잘 지적했듯이, ‘자본주의 이행논쟁’이나 ‘종속이론’ 등의 분석단위는 일국적인 것에 한정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법칙추구적인 사회과학이든, 개별기술적인 역사학이든 간에 지역적인 형용사를 전면에 부각시키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1950년대부터 활발히 전개되었던 소위 ‘자본주의 이행 논쟁’ 역시 그러하다. 이 논쟁의 중심에 서 있었던 모리스 돕과 폴 스위지는 봉건제로부터 자본주의로 이행하게 된 원인과 조건, 그리고 그 실행 동학의 원인을 봉건제 내부의 계급적 관계와 봉건제 외부의 시장 압박이라는 각기 다른 관점에서 밝히고자 했다. 그러나 이들 모두는 자본주의의 발흥과 발전의 기원을 유럽 내부, 더 정확히는 영국에서 찾고자 했다는 점에서 동일했으며, 이것은 자본주의의 발흥과 발전의 기원에 있어서 보편적 법칙화로 확고히 자리 잡았다.
이에 비해 ‘제2차 논쟁’의 논객이였던 브레너는 영국뿐만 아니라 유럽 대륙의 각 국가들 사이의 상이한 자본주의 이행양상을 비교・분석함으로써 일국적 차원에서 벗어난 듯이 보인다. 무엇보다 그는 서구 중심부에서의 자본주의 출현을 제 3세계로부터의 수탈을 통해 설명하는 기존의 논자들과는 달리, 이들 사이의 필수적인 조건 관계를 부정하고 있다. 스페인과 영국의 비교에서 보듯이, 단순한 부의 약탈 및 이동에 의한 부의 축적과 자본의 축적은 동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브레너의 변별력 있는 주장 역시 궁극적으로 영국의 자본주의적 시원을 확고히 하고 있다.
오랫동안 진행된 이행 논쟁에서 나타난 논의들은 사실상 맑스가 자본주의 이행에 관한 언급들에서 보였던 핵심적인 두 가지의 문제를 충실히 따르고, 확장해나간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전 세계에서 영국이 최초의 자본주의의 이행의 조건을 산출했다는 점과 이러한 이행의 조건은 생산관계의 변혁적 발전의 계기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당시까지만 해도 후자의 문제는 맑스주의 내에서 여전히 갑론을박이 가능한 논쟁을 생산하는 이론적 고리로 작용했다면, 전자의 경우 누구도 의심치 않는 하나의 정당화된 명제처럼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점차 이 논쟁의 한 부분이 유럽(좀 더 정확히는 영국을 중심으로 한 유럽)의 비유럽에 대한 착취를 정당화한다는 점, 그리고 역사의 단계론적 발전을 기정사실화하고 이를 객관적 법칙으로 명제화함으로써 서구 중심의 단선적 발전주의 역사관을 확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제기되기 시작한다.
물론 이러한 문제제기 중심에 서 있는 사람이 군더 프랑크이다. 군더 프랑크는 돕과 스위지, 브레너 등의 맑스주의 경제사가들의 자본주의 이행 논쟁이 ‘서양의 발흥’과 ‘자본주의의 발전’의 원천을 유럽 내부에서 구하고 있다고 맹렬히 비판한다. 그리고 유럽을 세계경제의 전부가 아니라 ‘일부’로 파악하는 세계경제/세계체계를 주장한다. 소위 세계체계론적 문제의식이라 일컬을 수 있는 역사이론적 범주에는 군더 프랑크뿐만 아니라 월러스틴이나 브로델, 아리기 등이 있다. 이들 모두가 자본주의 맹아 혹은 원형 자본주의의 흔적을 18세기 이전까지 밀어붙인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대상 범위 또한 영국이라는 일국적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북유럽이나 이탈리아의 도시국가, 심지어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양으로까지 확장시킨다는 점에서 유럽 중심적 역사주의에 대한 비판 내지 회의적 태도를 견지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 사이의 차이 또한 분명하다. 도식적이긴 하지만 두 가지 차원으로 나눠볼 수 있다. 첫째는 자본주의 기원의 원동력 및 이행의 원인이라는 차원에서 생산관계에 기반한 생산양식을 강조하는 주장(아리기)과 상품관계에 기반한 생산양식을 강조하는 주장(월러스틴, 브로델, 군더 프랑크)이다. - 물론 군더 프랑크는 ‘생산양식’이라는 개념 자체의 폐기를 주장한다. 그러나 상품생산의 확장과 시장의 팽창으로 자본주의를 개념화한다는 측면에서 이 분류에 근접하다 - 둘째는 자본주의 기원 및 발전의 중심범위의 차원에서 유럽(월러스틴, 브로델, 아리기)과 유럽 이외의 지역(아리기, 군더 프랑크)의 주장이다. 각 주장들은 서로가 서로를 침범하면서, 또한 비판하면서 확장되어 나아갔다.
군더 프랑크의 논점은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근대’ 세계체제는 여럿이 아니라 오직 단일한 하나였다. 둘째, 이러한 세계체제는 유럽에서 시작되지 않았다, 그리고 셋째, 이 세계체제는 1500년대가 아닌 1250년대(혹은 5000년 전 까지도 거슬러 올라가)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처럼 세계가 이미 15세기 이전부터 하나의 단일한 글로벌한 세계경제로 이루어져 있다는 그의 주장은 과거의 사회이론가들 뿐만이 아니라 월러스틴이나 부로델의 세계체계론에 짙게 스며든 유럽 중심적 관념틀에 대한 비판의 지점이다. 군더 프랑크에 따르면 이들은 실제 역사와는 다르게 ”유럽이 시간적으로 선행하고 발전의 구조에 있어서도 우위에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하여 나머지 세계를 유럽 주변에 덧붙“임으로써, 세계경제를 유럽 중심의 것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사실상 군더 프랑크가 이런 주장을 할 수 있는 근거는 자본주의를 세계 규모의 분업과 다국간 무역으로 규정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그와 월러스틴은 유사하며, 월러스틴이 규정한 근대 세계-경제의 특징이 사실상 15세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도 마찬가지로 동일하게 발견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발견의 중심처는 유럽이 아니라 아시아이다. 명, 청, 동남아시아, 무굴제국, 오스만트루크 제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체계의 성장, 유럽과의 교역에서 압도적 우위, 과학, 기술, 경제, 금융제도 면에서 우위 등은 아시아에서 세계체계의 성립과 확장을 설명하는데 충실한 근거로 제공된다. 1800년대 무렵까지 중국을 중심으로 한 아시아의 자본주의적 경제체제의 성립과 확장, 세계경제의 주도적 위치의 확보를 주장하는 것은 지금까지의 (서구중심적) 주류 패러다임을 전복시킬 뿐만 아니라, 오히려 매혹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18세기 동양의 쇠락을 설명하는 군더 프랑크의 논리는 동양의 융성만큼이나 모호하고 미약하다. 유럽이 아프리카의 노예무역과 아메리카의 금, 은 등을 통해 서서히 힘을 비축하는 동안 서서히 약화되어간 아시아의 쇠락은 그들의 정치, 사회의 문제로 지적된다. 이 동양의 자생적인 쇠락의 틈바구니를 비집고 서양이 발흥한 것이다. 사실상 군더 프랑크가 장기순환에서 쇠락 국면과 융성 국면의 교체를 가늠하는 잣대로 삼는 것은 상품시장의 확대 및 인구의 성장 여부 등이다. 그리고 단순히 세계경제 시장에서의 경제적 압박감과 위기의식만이 현재의 단일한 세계시장을 연속시킬 수 있는 원인이라고 지적될 뿐이다. 그러나 이를 통해 세계체계를 단절이 아닌 연속의 입장에서 설명하려는 그의 의도는 세계 경제적 상품시장과 개별 국가의 정치, 사회적 변동 사이의 유기적 관계의 맥락을 상실함으로써, 체제 재생산의 구조와 동학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곧 그가 주장하는 세계체계의 ‘연속’에 대한 설명의 실패이다. 이러한 면에서 자본주의라도 다 같은 자본주의가 아니라는 아리기의 주장은 의미심장하다. 즉 자신의 주장을 ‘자본주의의 영원 회귀적 순환주의’라고 비판하는 논자들을 향해 아리기가 말한 것처럼, “세계-역사적으로 체계적 단절들과 패러다임의 변화는 정확히 ‘동일한 것’의 복귀를 통해 발생”하며, 이 ‘동일한 것’의 실질적 동학과 원리를 찾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는 무엇보다 군더 프랑크에게 동양의 융성 및 쇠락에 있어서 중요한 근간이 되는 자본(형성 및 축적, 그리고 축적위기)에 대한 명확한 개념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중국의 금과 은이 어떻게 자본으로 전환할 수 있는가의 문제는 여기서 핵심이다. 그러나 군더 프랑크는 단순한 부의 축적과 자본의 축적을 동일차원에서 해석하고 있다. 그리고 우드가 지적했듯이, “자본주의 속에서 시장이 작동하는 특수한 방식, 즉 “사람들로 하여금 시장에 참가하도록 강제하고, 생산자로 하여금 노동생산성의 증진을 통하여 효율적으로 생산하게 하는 자본주의 운동의 고유 법칙들인 경쟁, 이윤의 극대화, 자본축적의 법칙 등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상업화의 논리는 군더 프랑크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군더 프랑크의 주장에는 또 다른 차원의 ‘상업화 모델’의 흔적이 남아있다. 상업화 모델은 “유럽이 자연적인 자본주의적 발전에 대한 장애들을 제거할 수 있었고, 따라서 유럽이 도시사회와 교역 속에 있는 자본주의의 씨앗들을 성숙한 상태로 성장하게 할 수 있었음을 전제”한다. 이러한 점에서 그것은 서구 중심적이다. 그러나 자본주의를 상품시장의 영역으로 상정하지만, 이를 통해 유럽 세계체제의 기원과 발전의 보편성을 거부한다는 반反 유럽중심적 역사 해석 또한 사실은 유럽중심적인 가설에 기초하는 것이며, 이를 재생산하는 문제를 낳고 있다. 비유럽 사회가 더 발전된 도시문명과 교역체제를 가짐으로써 유럽보다 더 앞선 자본주의의 발전을 가져왔다는 군더 프랑크의 주장은 궁극적으로 상업화 모델의 전제를 허무는 것이 아니라 이를 수용하는 것일 뿐이며, 자본주의의 부재가 역사의 실패라는 유럽중심적 사고를 오히려 더 강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상 군더 프랑크는 자본주의를 하나의 불변적 경제체계로 이해한다. 그 이전의 경제체계가 무엇이었고, 또 무엇으로 불리든 간에 현재의 단일한 세계경제로서 자본주의는 ‘500년 혹은 5000년’의 지속성을 간직했으며, 앞으로도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그에게 일국 내부에서 중층결정되는 각 층위들의 접합은 물론이거니와, 자본주의의 위기나 이행, 또 다른 생산양식으로의 전환이라는 사고가 불필요한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기존의 논의에서 주장되는 유럽의 자본주의적 위계체제의 우위를 동양 혹은 동양에서 유럽으로 환기시키면서 지속화한다. 이것이 아무리 역사적 사실이라 하더라도, 우선적으로 자본주의가 규정하는 고유한 운동법칙, 즉 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을 통한 자본주의의 재생산의 법칙을 부정하는 것은 ‘근대’적 의미의 자본주의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자본주의의 운동법칙을 강조하면서, 유럽에 의한 ‘근대’적 자본주의의 기원과 발전을 이야기하는 것이 여전히 유럽 중심의 역사주의를 재생산하는 일인가. 그것은 맑스주의 내에서 두 가지 방법으로 방향을 잡은 것 같다. 하나는 유럽에 의한 세계 재구성의 ‘특수성’을 온전히 인정하는 한에서 문제를 재인식하는 월러스틴의 방식이다. 즉 18세기 이전에 ‘근대’ 자본주의의 발생이라는 특별한 일이 유럽에서 발생하여 세계를 바꾸어 놓았지만, 그것의 정치・경제적 지배의 효과에 의하여 그 방향이 부정적이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보다 중요한 것이 된다. 이 때의 ‘보편성’은 유럽에서 자본주의가 발생했다는 보편성이 아니라, 현재의 세계체제가 자본주의적 경제체제라는 의미에서만 사용될 수 있게 된다. 결국 “지리적 개념 자체는 세계체제 내에서 끊임없이 전위되어왔고, 또 전위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전위될지도 모른다”. 문제는 특정한 역사적 체제가 시공간의 팽창과 압축을 통해 특정한 개념을 전위시킨다는 것이며, 그것이 지배의 문제와 함수관계에 있다는 사실에 놓인 것이 된다.
다른 하나의 방향은 맑스의 이론적 추상을 긍정한 발리바르를 통해 살펴진다. 그러나 그는 맑스에게 자본과 임노동의 관계가 질적으로 전혀 다른 새로운 형태를 취하는 자본주의의 역사에 대한 고려가 부재하다고 지적하고, 이를 맑스(주의)의 공백이라 여긴다. 그리고 맑스가 자본을 통해 자본주의적 모순들이 그 즉각적인 형태 하에서 치명적인 것으로, 곧 궁극적으로 그 체계와의 단절 및 분쇄로 귀결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이념적 자본주의’라고 비판하기 까지 한다. 따라서 그는 궁극적으로 자본주의의 분석을 추상화된 이념적 평균이 아니라 구체적 현실로 가능하기 위해서 ‘역사적 자본주의’라는 문제를 맑스주의의 ‘이념적 자본주의’라는 문제설정에 대한 대당으로 설정해낸다. 결국 자본주의를 ‘역사주의’가 아닌 ‘역사적 이론’, 즉 특정하고 한계적인 역사적 시간을 통해 읽음으로써 서구중심주의에 대한 보편적 법칙성을 한정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