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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김우종과 함께하는 문학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雪城 김우종
한국 문학과 국가 권력 金宇鐘 1. 국가 권력이 만들어 낸 ‘순수문학’ 한국현대문학은 정치적 국가 권력이 끼친 영향을 고려하지 않고 문학사와 오늘의 양상을 설명할 수 없다. 개화기 당시부터 그렇고, 30년대의 일그러진 순수문학도 일제 군부세력이 대륙침략과 동시에 그 작전의 일환으로 카프파 7~80면씩을 두 번에 걸쳐 대량 검거하고 민족의 저항세력을 모질게 몰아쳤기 때문이었다. 이효석의 소설 <메밀꽃 필 무렵>은 30년대 순수문학으로서 대표적인 명작으로 평가되고 있지만 여기에는 당시의 피폐한 농촌현실이 완전히 배제되어 있다. 카프의 동반작가라고까지 불리어지던 그가 이렇게까지 돌변한 것은 국가권력이 문인들을 협박했기 때문이다. 같은 시기에 일본에서는 소설가 코바야시다키치(小林多喜二)가 고문사 당하고 다른 두 명도 경찰서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이런 순수문학에 이론을 붙인 것이 김환태의 평론 <예술의 순수성>(1934년)이며 해방 후 김동리는 문단내의 반공 논리로서 이 이론을 무기화했다. 그 내용은 사상성과 목적성과 사회성을 배제해 버려야 예술의 순수성이 보장된다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이것은 일제하 카프의 활동이 사회주의 혁명만이 아니라 민족해방운동이기도 했던 점으로 보면 그들 대다수가 유치장과 감옥으로 처넣어졌던 시기에 철창 밖에서 그들의 문학활동을 비판한 것이어서 씁쓸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 후에 석방된 카프파들도 이처럼 사상성 목적성 사회성을 빼버린 순수문학을 따르거나 침묵했다. 민족분단 후 북한에서 임화가 사형전에 진술한 재판기록중 그가 일제 때 순수문학을 했다고 자백한 부분은 그것이 변절이며 친일이었다는 뜻이었다. 이태준이나 정지용은 김환태 등장 전에 프로문학에 맞서서 ‘순수’를 자부하고 좋은 문학을 하고 있었으며 현실도피의 구실이 숨겨진 김환태식 순수논리를 의식적으로 창작에 도입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 다음에 현실도피형으로 기형화된 문학은 일제권력의 협박으로 만들어진 것이고 이를 순수문학의 이론으로 미화한 것이 김환태의 <예술의 순수성>이다.
2.문인 간첩단 사건 정치적 권력집단에 의한 문인 억압과 길들이기는 일제 강점기만이 아니라 그들이 가버린 뒤에도 계속되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보다 더 강도 높은 짓을 한 것이 박정권이다. 그러나 그것이 일제처럼 문학형태를 뒤틀어 놓지는 못햇다. <五敵>의 시인 김지하는 70년대 유시체제하에서 사형선고를 받았었다. 그런데 세계적 여론과 국내여론의 악화 때문에 죽이지 못했고 그것은 문학이 민주화운동에 강력한 힘을 실어주는 실체로서 오히려 가해자를 압박했다. 같은 시기에 박정권은 문인간첩단 사건을 날조해서 유신체제에 대한 문단의 저항운동을 막고 일제하 30년대처럼 문인들을 길들이려 했지만 이것도 우리 문학을 본질적으로 변화시키지는 못했다. 이 당시에 국군보안사 서빙고동 대공분실에 연행되었던 문인 수명 중 5명이 문인간첩단으로 기소되었다. 30년대의 경우만큼 규모가 크지는 않았지만 전체 문인에 대한 협박수준은 일제수대를 능가했다. 기소내용은 일본에서 “한양”지를 발행하던 북한 공작원으로부터 공작금을 받고 정부전복을 위한 간첩활동을 했다는 것이다. 사건은 1974년 1월 초에 이호철이 다방에서 유신헌법 개헌 청원 운동을 시작하자 즉시 수사관에 의하여 가택연금 당한 며칠 후 보안사에 연행되어 일본 “한양”지와의 관계를 조사받게 되었고, 자기 때문에 우리들( 임헌영 장백일 정을병 김우종)도 모두 연행되어 고생하게 되어서 미안하다는 것이 이호철의 말이었다. 우리도 모두 ‘한양’지와의 관계를 조사받았지만 재판과정에서도 “한양”지 사장 김기심과 편집장 김인재가 북한 공작원이라는 객관적 증거는 한 가지도 제시된 바 없다. 김기심과 김인재를 일본에서 만난 사람들은 당시 한국문협회장 조연현외 이은상 조병화등 여러명이 있었으나 선배문인들을 제외되고 40대 이하 비교적 활동이 가장 많던 5명문인이 문인간첩단으로 묶였다. ‘한양’지의 원고청탁과 고료지불등 ‘한양’의 한국지부 업무를 직접 맡고 있던 동국대 정종 교수는 기소되지 않고 우리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는 검찰측 증인으로 동원되었다. 일본에 주로 거주하며 한국과 일본 사이를 왕래하여 ‘한양’ 연락 업무를 맡고 있던 문여송(영화감독)도 특히 이호철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는 검찰측 증인으로 동원되었다. 악명 높은 보안사 서빙고동 대공분실에 간첩죄로 연행되었던 사람들로서는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내가 한양과 관계를 맺은 최초의 동기는 참여문학운동 때문이었다. 순수문학에 대한 본격적인 비판과 사회참여 운동이 처음 시작된 것은 60년대 초부터였다. 이 운동은 주로 ‘현대문학’ 출신 평론가들이 이 문예지에 발표하면서 전개되어 나갔다. 그런데 순수문학 이론으로 반공투쟁을 한 대표적인 인물들이 중심이 되어서 순수문학지를 표방하고 있는 문예지에 순수문학에 대한 도전장을 싣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조연현은 그래도 이런 원고를 계속 받아 줬지만 다른 발표지를 찾아야하는데 그것이 어려웠다. “창작과 비평”은 60년대 후반기에 나왔을 뿐만 아니라 그 때나 지금이나 거의 모든 문예지는 다른 문예지 출신들에게 개방되지 않는 사정이 있었다. 그러다가 일본의 “한양”지 청탁을 받고 발표하기 시작했다. 이 당시에는 이것응 한국정부의 공보실에도 전시되고 시중 서점에도 나오고 있었으며 내용은 국내의 정치현실에 대하여 국내언론보다는 좀 더 자유로운 비판적인 기사들이 많았으나 친북 기사는 보지 못했다. 공판 중에 우리는 모두 반공법이나 국가보안법 위반 사실을 부인했지만 정을병 무죄, 임헌형과 나는 집행유예, 이호철과 장백일은 고법까지 가서 가을에 석방되었다. 사실로 우리 5명중 누구도 그런 법을 위반한 사실이 없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취조한 수사관 최모는 내가 출옥한 뒤에 숨은 내막을 밝혔다. 그는 상급자인 김대령으로부터 우리를 간첩단으로 묶으라는 지시를 받았는데 어쩔 수 없는 사정 때문에 지시에 따랐으니 미안하게 되었다고, 이것을 그는 임헌영에게도 고백했다. 국군보안사에서 이런 정치공작을 한 이유는 당시의 긴박했던 사정 때문이었으리리고 짐작된다. 우리가 연행된 것은 1974년 1월 초순 경이며 3개월 전인 1973년 10월 2일에 동숭동 문리대에서 유신헌법반대운동이 일어나며 전국적인 민청학련사건으로 확대되었다. 12월 24일에는 장준하 함석헌등이 참여한 “현행헌법개정 청원운동”이 일어나고 다음달에 우리 차례가 되었다. 서대문구치소에 수감되고 보니 내가 있던 옥사에서는 계속 학생들이 들어오고 다시 끌려 나갔다가 반죽음이 되어 밤중에 돌아 오고 김동길 교수와 백기완도 아래 위층으로 들어오고 다른 한쪽으로 밀려 난 일반죄수들은 누울 자리마저 빼앗겨서 난리였다. 우리 문인에게 긴급조치법 아닌 간첩죄가 씌워진 것은 문인에 대한 정치적 억압이 아니라는 구실로 국내외 여론 악화를 막을 수 있고, 간첩죄는 한국에서 가장 무섭고 그만큼 효과적인 협박수단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김대령으로부터 ‘문인간첩단 일망타진’ 보고를 직접 받고 ‘이것이 사실인가’라는 질문에 ‘사실입니다’라고 대답했더니 매우 칭찬했더라는 것이 최수사관이 전한 말이다. ‘한양’지와 가장 밀접한 관계라면 선배들이여러명인데 40대 이하인 5명만을 묶은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고려해 볼만한 특기사항이라면 이호철은 유신헌법개헌 청원운동 주동자, 임헌영은 그 서명자이며 참여문학운동에 가담해 있던 30대 평론가. 장백일은 ‘한양’지의 한국지부장격이었던 정종(鄭瑽)교수와의 특별한 관계, 정을병은 한양지 평집장 김인재와 동향 친구. 그리고 나는 참여문학운동을 주도했기 때문에 뽑혔다는 것이 공안검사 이창우가 취조 마친 후 내게 한 말이다. 그럴 수도 있겠지만 나는 당시에 에세이집 베스트셀러와 TV프로 출연등으로 유명해져 있었고, 내가 간첩으로서 대학 강단에서 학생들을 선동했다는 신문기사로 보면 간첩단 명단에 대학교수가 필요해서 뽑았으리라는 짐작이 간다. 그런데 이 사건은 일제 때 순수문학의 경우처럼 우리 문학 형태에 부정적 열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이 사건을 겪으면서 나 개인적으로는 출옥 후에 또 긴급조치 4호 위반으로 에세이집이 출판배포금지 조치를 당하고, 다시 가본(假本)형태로 심의를 청구한 평론집이 심의 거부로 출판이 금지 되어서 글로써 먹고 살기 어려워졌다. 물론 교수직도 끝났는데 모교인 서울대에 강사로 출강할 기회를 주었다. 한국문학 전체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영향을 미쳤다. 유엔 인권위원회와 국제 앰네스티등이 구명운동을 일으키며 한국문학이 독재 권력에 저항하고 민주화 운동에 앞장서고 있다는 긍정적 이미지를 세계에 알리는데 일조를 했고, 한국의 대다수 문인들이 이 사건에서는 박정권의 횡포에 대하여 비판적 입장에 서게 되었으며, 문학의 사회참여운동이 오히려 확산되었다. 이와 함께 반독재 저항운동이 더욱 확산되고 그 연장선에서 박정권이 무너진 것을 보면 정치권력의 횡포가 문인의 체질을 강화해 주고 사회적 위상을 높이는 한편 가해자에게 불리하게 작용한 셈이다.
3.해방 후 문단권력의 유산 일제 국가권력에 의해서 현실도피형으로 기형화된 순수문학은 8.15 후에 정상 회복되지 않고 정치권력의 싸움 속에서 새로운 기능을 지니게 되었다. 즉 해방공간에서 순수문학과 구 카프파와의 논쟁은 처음엔 표면상 문학논쟁이었지만 실제로는 남로당과 이승만 세력을 배후에 질머진 좌우 정치권력 투쟁이었고 여기서 순수문학은 반공투쟁의 무기가 되고, 그 문단권력의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그 중심에 김동리 서정주 조연현등의 청년문학가협회가 있었다. 그리고 이 조직은 이승만의 정치활동을 지원하고 있었고, 이승만과 미국은 친일파들에게 다시 권력을 쥐게 했고, 예술원도 독점하고 가장 많은 신인을 배출시켜 세력이 확대되었기 때문에 친일문학은 문학사 기술에서 빠지고, 그후의 문학도 부분적으로 바른 해석을 원천적으로 막아 버렸다. 물론 문단 밖에서 검찰 총장 국회의원등으로 구성된 반민특위가 중부경찰서에서 동원한 50명 폭력 경찰에 의하여 박살나고, 한국 현대문학사 전공교수가 2000년대가 되는 최근까지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를 비롯한 대학에서 단 한명도 채용한 사실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모든 것이 설명되지만 그 결과 해방 후에도 일왕을 찬미하고 침략전쟁을 미화한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가 발표되고 이것이 지금도 국민시 수준에서 애독 애송되며 바른 평가 발표가 방해받고 있는 것이 오늘의 우리 현대문학이다. <국화 옆에서>를 보자.
“한 송이의 국화 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제1연)
문학에선 어떤 표현법이든 정확한 논리적 설명이 가능해야 하며 그것만이 거부할수 없는 진실이고 그 해석은 받아들여져야 한다. 제1연이 말하는 바는 한송이 국화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전쟁터에 끌려 나가 죽은 자들이 고향에 돌아 오고 싶어 소쩍새가 되어 뒷산에 와서 봄부터 울어대는 희생이 필요했다는 것. 여기서 국화꽃은 패전 후 새로 태어난 일왕 히로히토다. 서정주는 이 시를 해방 직후 1947년 11월 9일에 발표했는데 다음 해에 발표된 <귀촉도>에서도 소쩍새를 그런 이미지로 사용했고, 歸蜀道(소쩍새)가 전쟁희생자를 의미하는 전설인 것도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므로 이 시의 소쩍새는 ‘일제 침략전쟁의 희생자들’이며 다른 해석이 가능하지 않다. “한 송이의 국화 꽃을 피우기 위해/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보다.”(제2연)
‘먹구름’과‘천둥’은 바로 전쟁의 이미지이며 그것이 있었기에 한 송이 국화꽃이 아름답게 피어날 수 있었다는 것. 즉 예쁜 국화꽃의 피어남을 위해서는 전쟁은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고 전쟁을 정당화한 것. 물론 여기서도 국화는 히로히토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제3연)
‘거울 앞에 선 누님’은 伊勢神宮의 거울 앞에 선 히로히토다. 그는 결혼식 때도 조상에게 고하며 여기 거울 앞에 서 있었고 즉위식 때도 그랬다. 그러므로 일왕은 나라 망치고 항복 선언 한 후에도 당연히 여기 와서 신고하며 거울 앞에 서 있었을 것이다. 거울은 일본 왕실 만세일계의 조상신 아마데라스오미카미(天照大神)가 굴에 있다가 나올 때 들고 서 있던 것이고, 그는 여자이며 스사노오노미코도의 누님이다. 히로히토는 그 후손이므로 ‘누님같이 생긴 꽃’이다. ‘거울 앞에 선 누님’을 그렇게 가슴조이는 연애만 하다 돌아온 여자로 보는 것이 잘못인 또 하나의 이유는 해방 당시의 한국여인은 거울을 거의 모두 앉아서 봤기 때문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은 한참 젊던 30세 기념으로 만주침략하고 40세 기념으로 태평양 전쟁 일으키고 44세로 망할 때까지의 긴장된 감정 변화를 연애감정에 비유한 것이다.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에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 다.(제4연)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다른 풀들이 다 얼어 죽은 뒤에 홀로 피어 있는 국화는 전쟁의 마지막 단계인 원자폭탄 투하로 온 국민이 죽고 A급 전범들도 다 죽는 판에 히로히토만 천황폐하 자리 그대로 갖고 새로 태어났다는 것이다. 마지막 연에 와서 특히 ‘노오란 꽃잎’이라고 색깔을 말한 것은 일본황실 문장인 국화가 황색이니까 이 시의 국화는 일왕임을 당당하게 그리고 노골적으로 한국인들에게 설명해 준 것이다. 그리고 이 시는 보들레르와 니체를 칭찬하며 악마적 탐미주의를 계속한 것이다. 히로히토 한 사람의 아름다운 부활을 위해 그같은 참혹한 전쟁이 필요했다면 이것은 일왕 찬미이고 잔혹한 침략전쟁의 찬미다. 이 시는 건국 후 국정 국어교과서에 실려 있다가 1900년 쯤에 내가 국정국어 교과서 개편 마지막 심의회의 때 나의 주장으로 삭제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그러나 검인정 교과서가 있는 이상 국정교과서는 별다른 의미가 없으며 2008년에는 서정주 고향에서 300억 송이 국화 축제 기타 행사가 이 시의 이름으로 벌어졌다.
4. 오늘의 남북 문학 정치적 권력은 남북 분단 현실에서도 한국문학을 크게 일그러뜨려 놓았다. 문예이론이 최고통치자의 교시로 하달되고, 당의 철저한 검열을 거치는 북한문학은 정치권력에의 예속화 도구화의 가장 대표적인 예다. 남한의 문학은 이런 간섭 안 받지만 북쪽의 슬픈 동족 현실을 스스로 외면하고 침묵하고, 외세가 쪼개 준 자기 조국 반 쪼가리 지분 속에 안주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부끄러운 문학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