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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응부相應部 경전에서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원인과 조건이 갖추어질 때 눈이 존재한다.
원인과 조건이 충분하지 않을 때는 눈이 존재 하지 않는다. .
몸과 의식도 이와 마찬가지다.
우리는 삶을 사랑하고 그것을 꽉 붙들고 있습니다.
우리는 죽음을 무서워하고, 그것으로부터 숨고 싶어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항상 걱정하고 근심에 빠지게 되며,
이것은 전적으로 수명에 집착하는 우리의 생각 때문입니다.
불교심리학의 유식학파唯識學派 에 의하면
지각에는 주체와 인식의 대상이라는 두가지요소가 있다고 합니다.
예; 밤중에 숲속을 걷다가 뱀을 보게 되면, 우리는 아마도 매우놀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손전등으로 그것을 비춰보아 그것이 단지 밧줄일뿐이라는것을 알게 되면
매우 안도 하게 될 것입니다.
뱀을 본 것은 잘못된 인식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네 가지 잘못된 지각이 바로우리의 고통의 원인이라는 것을 가르칩니다.
즉 1,자아 2,인간 3,중생 4,수명에 대한 우리의 지각이 그것들입니다.
보살은 이러한 모든 잘못된 인식으로부터 벗어난 사람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 자신과 장소에 대해 커다란 존경심을 가지고,
온 마음을 기울여 하찮은 것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경이롭다는 것을 알고 모든
지각하는 것을 버리고 자유롭게 살아갈 때, 나 자신을 충분히 존중하며 자연 속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부처님 말씀}
“보살은 보시할 때 그 어떤 것에도 의지 하지않는다.
다시 말해 보살은 보시를 위해 색, 소리, 냄새, 맛, 촉감, 혹은 법등 그 어떤 것에도 의지하지
않는다.“
타인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봉사하는 동안은 당신은 자신과 타인을 구별하지 않는
마음으로 그 일을 합니다.
당신의 자아, 인간, 중생, 혹은 수명의 견해에 집착하여 당신의 일을 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정신은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정진(精進), 선정(禪定) 지혜(知慧)의 육바라밀을 행할 때도
마찬가지로 필요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보시행을 그 한 예로 들고 있습니다.
세 가지 종류의 선물이 있습니다.
예 : 물질, 법, 그리고 두려움 없음이 그것입니다.
(반야심경)에서 관세음보살께서는 우리에게 두려움의 극복, 즉 안심이라는 선물을 주고
있습니다.
보살이 보시 행을 행할 때
그는 네 가지 잘못된 견해에 사로잡히지 않은, 두려움 없는 마음으로 합니다.
사실 우리가 네 가지 그릇된 지각에서 벗어나는 순간, 우리는 이미 두려움을 모르게 됩니다.
잘못된 지각은 우리가 지각의 본질을 잘 모르고 있기 때문에 생깁니다.
우리는 색, 소리, 냄새, 맛, 촉감, 그리고 법의 진정한 본질을 보지 못하고, 우리는 그것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예; 우리가 만약 배고픈 사람을 만나, 그 에게 여러 다른 질문을 하지 않고 또는
우리가 보시 행을 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고 그 에게 먹을 것을 준다면,
우리는 진정으로 반야의 정신을 실천하는 것이며 그릇된 지각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색색은 견고하고 실재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부처님과 현대 과학에 따르면, 색은 단지 텅 빈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합니다.
바위, 철, 혹은 나무 등과 같은 모든 물질은 수많은 분자로 구성되어 있고,
분자는 다시 셀 수 없이 많은 원자와 원자보다 더 작은 원소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들은 전자기력과 핵력에 의해 뭉쳐있습니다,
원자는 거대한 텅 빈 공간으로 그 속에는 양자, 전자, 중성자, 등과 같은 무한한
작은 원소들이 엄청난 속도로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물을 깊이 들여다보면, 우리는 그것이 마치 꿀벌 통같이 매우 빠른 속도로
분주하게 움직이는 것을 볼 것입니다
전자는 핵인核仁의 둘레를 초당 300,000km 의 속도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러니 색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얼마나 잘못되었습니까?
물리학자들은 그들이 원자의 세계에 들어가 보면, 우리의 생각으로 만들어진
이 세상이 환상에 불과한 것임을 분명히 알게 된다고 말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물거품을 예로 들어, 사물에는 공간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으며, 또한 소리 냄새 맛 촉감 법 등도 역시 마찬가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여섯 가지 감각의 대상에 대해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아, 인간, 중생, 그리고 수명에 대해서도 잘못된 생각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시 행을 하는 동안 우리는 우리의 그릇된 견해를 극복해야 하며,
그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그것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일상생화 속에서 우리는 색을 필요로 하지만 그것에 집착할 필요가 없습니다.
일단 우리가 그것을 깨닫고 나면,우리는 평온하고 두려움이 없으며
여섯 가지 감각의 대상을 자유로이 이용할 수 있습니다.
보살은 육바라밀{보시.지계.정진.선정.지혜}로 알려진 여섯 가지 방편을 통해
깨달음의 묻에 도달합니다.
우리가 돈이 있을 때만 보시 행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라도 우리의 평화와 행복감을 나누어줄 수 있습니다.
부처님 말씀
보살이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행을 하는 마음 자세란.
왜 그러한가?
만약 보살이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행을 한다면그로 인해 얻는 즐거움은 상상 할 수도 없고
헤아릴 수도없을것이다
동방 허공을 헤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만약 보살이 상에 머무르지 않고 보시하면
그러한 덕행으로 인해 얻는 즐거움은 허공과 같이 클 것이다.
상에 머물지 않는 다는 것은 현재 어떠한 곳에서라도 있는 그대로 남을 도울 수 있을 때
상에 머물지 않고 보살행을 하는 것 입니다.
상에 머무르지 않고 보시함으로써 얻는 즐거움은 끝이 없습니다.
우리는 종종 수행의 열매는 평화와 해탈이라고 말합니다.
예 ; 우리가 설거지를 하는 동안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놀기만 하는 사람들을 생각 한다면
우리는 설거지를 즐길 수 없습니다.
결국 우리는 그릇 몇 개를 깨끗이 씻을 수 있겠지만 우리가 얻는 행복이란 차 숟가락
한 스푼보다 더 적은 것입니다.
그러나 아주 평온한 마음으로 설거지를 한다면 우리의 행복은 한없이 클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해탈입니다.(우리의 일상생활과 아주 밀접합니다.)
형상으로 볼 수 있는 것은 모두 허망한 것이다
상에서 상 없음을 볼 수 있다면 그것이 곧 여래를 보는 것이다.
여래를 80가지 성인의 표시 혹은 32가지상호(相好)로 볼 수 있을까.
대상이 있어야 우리는 지각을 하며 이러한 우리의 지각은 종종 정확하지 않거나
가끔씩은 아주 잘못된 것이 됩니다.
이러한 지각의 정확성은 우리의 통찰력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통찰력을 얻게 될 때,
우리는 이것을 반야, 지혜, 혹은 상을 넘은 깨달음이라고 부릅니다.
이 문장에서 우리는 반야의 변증법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동일 명제의 원리에 따라 주로 지각합니다.
즉 ‘A는 A 이다’와 ‘A는 B가 아니다‘가 그것입니다
그러나 이 문장에서 수보리는 'A는 A가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금강경)을 계속 공부하다보면 이러한 문장들이 많이 나옵니다.
부처님께서 한 송이 장미를 볼 때 그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그것을 한 송이 장미 로 인식할까요.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그 장미가 한 송이 장미라고 말하기 전에 먼저 그 장미는 장미가 아니라는 것을 아십니다.
그는 장미와 장미가 아닌 다른 요소들을 전혀 구별하지 않고 장미는 장미가 아닌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사물을 인식할 때 우리는 일반적으로 개념화라는 칼을 휘둘러 실체를 조각내고 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은 A이고 A는 결코 B ,C 혹은 D가 될 수 없다.”
그러나 A를 상호 의존관계에 놓고 본다면 A는B ,C, D뿐만 아니라 이 우주의 모든 것을 다
포함하는 것입니다.
‘A'는 그 혼자만으로는 결코 존재할 수 없습니다.우리가 A를 깊이 들여다보면 그 속에서
B. C.D등 모든 것을 보게 됩니다.
일단 A가 단지 A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하면.우리는 A의 진정한 본질을 이해하게 되고.
그리하여 ‘A는A’이다 혹은‘ A는 A가’ 아니다 라고 말할 자격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 전까지는 우리가보는 A는 진정한A의 허상일 뿐입니다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 혹은 당신이 매우 싫어하는 사람을 깊이 들여다보면,
그녀에게 오로지 그녀 자신만 있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녀 속에는
그녀가 받은 교육, 사회, 문화 ,유전, 부모, 그리고 그녀라는 존재를 만드는데 기여했던
모든 것들이 다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볼 때, 우리는 그녀를 진정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녀가 우리를 기분 나쁘게 만든다면 우리는 그녀가 의도적으로 그렇게 한 것이아니라.
좋지 않은 상황이 그녀를 그렇게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녀의 좋은 점을 보호하고 개발시키기 위해서는
그녀를 생기 있고, 사랑스럽게
만드는 우리자신을 포함한 그녀 밖에 존재하는 요소들을 보호하고 개발할 필요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평온하고 기분 좋다면 그녀도 역시 평온하고 즐거워질 것입니다.
우리가 A를 깊이 들어다 본 뒤 A가 A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다면, 우리는
진정한 사랑이되고, 보시 행은 진정한 보시 행이 되며 지계행은 진정한 지계행이 되며
도움은 진정한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께서 한 송이 장미를 보는 법이며
그가 그 장미에 집착하지 않는 까닭입니다.우리가 여전히 상에 머물러 있다면
우리는 여전히 장미에 집착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선을 하기 전에는 산은 산이고, 강은 강이다.참선을 하는 동안에는 산은 더 이상
산이 아니고 강은 더 이상 강이 아니다
참선을 마친 뒤에는 산은 다시 산이고. 강은 다시 강이다
이러한 것이 반야의 변증법입니다.
여래를 32가지 혹은 80가지 상호로 인식하는 것은 위험 합니다.
왜냐하면
마귀와 전륜성왕轉輪聖王 도 똑같은 표시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 몸의 형상으로 여래를 찾지 말라”라고 부처님께서 말씀 하셨습니다.
그는 또한 “ 상이 있는 곳에 허망함이 있는 것이다,” 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즉 지각이 있는 곳에 허망함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임무는 상에 더 이상 속지 않고, 통찰력과 깨달음을 얻을 때까지 수행하는 것입니다.
여래는 삶, 지혜, 사랑, 그리고 행복의 진정한 본질입니다.
우리가 상의 상 없음을 볼 수 있을 때 바로 우리는 여래를 볼 기회를 갖게 됩니다.
우리가 장미의 형상에 머물지 않고 그것을 볼 때 우리는 장미가 아닌 본질을 알게되며.
그리하여 우리가 한 개의 그 장미 속에서 여래를 보기 시작합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가 한 개의 조약돌 한그루나무 혹은 어린아이를 들여다 본다면
우리는 그 속에서 여래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금강경)에서는
여래를 “ 오는 바도 없고 가는 바도 없고 온 흔적도 간 흔적도 없으며 머문 흔적도
머물지 않은 흔적도 없으며 생겨난 흔적도 사라진 흔적도 없는" 존재로 정의 합니다
※ (무명을 깨치는 금강경 )의 의미를 당신이 일단 이해하고나면
( 금강경 )이 아름다운 한편 음악같이전혀 애쓰지 않고도 당신은 그 의미를
자연스럽게 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