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4월 17일 제1회 천하장사씨름대회 결승전이 벌어진 장충체육관은 1만여 석의 관람석을 가득메운 관중들이 내뿜는 열기로 뜨거웠다.
잠시 뒤 관중들의 환호속에 지름 7m의 원형 모래판 위에 두 남자가 올라섰다. 당대 최고의 테크니션으로 불리던 최욱진(당시 22세)과 약관의 이만기였다.
잔뜩 긴장된 표정의 이만기를 앞에 두고 최욱진은 심호흡을 크게 했다. 판정시비까지 가며 아쉽게 내준 셋째 판이 자꾸 머리속에 맴돌았다. 전날 열린 한라장사 대회에서 우승한 최욱진은 밀어치기의 대명사 홍현욱 장사를 꺾고 초대 천하장사 타이틀을 바로 눈 앞에 두고 있었다.
상대는 한라전 결승에서 맞붙었던 이만기. 최욱진에 져 아쉽게 2위에 그친 이만기도 이준희 장사를 2-1로 물리치고 결승에 올랐다.
2-2 상황, 승부는 어느새 마지막 대결로 압축됐다. 치열한 샅바싸움 끝에 자세를 바로 한 최욱진은 심판의 구령이 떨어지자 이만기를 번쩍 들어올렸다. 그로부터 20여 년의 시간이 흘렀다.
◇테크니션, 최욱진=1970년 후반 1년 선배 강주섭(현 경남정보고 감독), 차경만(전 LG씨름단 감독) 등과 함께 진주상고(현 경남정보고)의 전성기를 이끈 최욱진은 기술씨름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학년 최욱진을 앞세운 진주상고는 이봉걸, 홍현욱이 버틴 고교최강 대구 영신고를 연파하고 전국 최강자로 우뚝 섰는데 그해 전국대회 37연승의 신화를 달성했다.
당시 진주상고와 맞붙는 상대 팀은 아예 시합 전 짐을 싸 놓고 경기에 나설 정도로 그 위세가 대단했다. 그러나 최욱진의 성장(172㎝)은 이때 멈춰버렸다.
최욱진은 자신의 신체약점을 기술로 승부했다. 매일같이 진양호 365계단을 뛰어올랐고 틈만 나면 훈련에 몰두했다. 이런 그를 두고 당시 최욱진을 지도했던 전재성(현 진주씨름협회장) 전 감독은 “씨름에 미쳤다”고 표현할 정도였다.
이후 경상대를 거쳐 1년간 모교 진주상고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러나 프로씨름이 출범하면서 보해양조에 입단, 활약했다.

자유자재의 기술을 구사했던 최욱진은 당시 씨름계를 주름잡던 거구의 홍현욱(182㎝), 인간기중기 이봉걸(2m7㎝), 이준희(195㎝) 등의 내로라 하는 강호들을 연파하며 초대 한라장사(1, 2, 3, 11회)에 등극하며 절정에 달했다.
특히 그의 전매특허나 다름없는 전광석화같은 뒤집기는 타의추종을 불허했다. 상대의 밑에 깔릴 듯 하다가도 강력한 허리 힘으로 상대를 넘겨버리는 이 기술에 이봉걸, 이준희 등의 거구들도 그냥 넘어갔다.
작은 체구의 최욱진이 덩친 큰 선수를 넘길 때마다 관중들의 환호는 대단했다. 한 지역씨름인은 “그 당시의 씨름인기는 최욱진 같은 걸출한 기술씨름을 선보인 선수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말했다.
◇전성기에 찾아온 부상=한라급(당시 95㎏급 이하)에서 과히 무적이었던 최욱진은 83년을 기점으로 부상에 하향추세로 접어 들었다. 정점은 83년 초대 천하장사 타이틀전. 지금도 기술씨름의 진수를 보여준 최고의 시합으로 손꼽히는 이 시합에서 최욱진은 이만기에게 2-3, 처음으로 지고 만다.
그리고 때이른 부상이 찾아왔다. 천하장사 대회 이후 전주에서 열린 한라장사 결승전에서 또다시 만난 이만기에게 첫 판을 먼저 따낸 최욱진은 일어서다 오른쪽 무릎의 극심한 통증에 그대로 주저않고 말았다.
그 흔한 CT촬영도 없던 시절, 고작 깁스가 고작이었던 그 시절에 최욱진은 연골이 파열된지도 모른채 3년동안 통증을 참아내며 시합출전을 감행했다.
그 사이 제11회 한라장사 정상에 오르며 건재함을 과시했지만 부상은 생각보다 깊었다. 아픈 오른쪽 다리를 피해 왼쪽에 힘을 싣다보니 이번엔 왼쪽 무릎까지 통증이 찾아왔다.
결국 86년 경희의료원에서 양 무릎 수술에 들어갔지만 이후 후유증으로 제대로 훈련에 임할 수가 없었다. 방황하던 그에게 때마침 모교 진주상고에서 프로대회 출전을 보장할테니 씨름부를 맡아달라는 제의가 들어왔고 최욱진은 고민끝에 88년 3월 학교로 복귀하고 만다.
하지만 그해 법이 바뀌면서 겸직이 금지 돼 한 시대를 풍미했던 최욱진은 은퇴식도 갖지 못한 채 대중에게서 멀어져갔다.
◇40년 씨름인생, “후회는 없어”=하지만 최욱진은 “후회는 없다”고 했다. 학교에 복귀하자마자 모교 씨름부 재건에 착수했다. 옛 명성을 잃어버린 씨름부는 와해일보 직전이었다. 그러나 최욱진은 3년간의 절치부심 노력 끝에 3년만인 91년 구미에서 열린 전국대회에서 다시 팀을 정상에 올려놨다.
지도자로 가능성을 엿본 순간이었다. 최욱진은 지금도 그 당시를 떠올리며 “선수가 아닌 지도자로서 첫 대회 우승이라 무척 감격스러웠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이후 진주상고가 사립에서 공립으로 전환되면서 최욱진은 거제, 통영 등지로 발령 돼 10년 넘게 씨름에서 멀어졌다. 이때 최욱진은 “이제 씨름과 인연이 없구나”라는 생각에 무수한 초청장에도 모질게 발길을 끊었다. 하지만 지난 2007년 모교인 진주남중학교에 발령이 나면서 달라지기 시작했다. 학교측은 모교출신 스타 최욱진에게 씨름부를 맡아달라고 제의했고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다시 씨름을 시작한 그는 자신의 장점을 최대한 살렸다. 상대 팀의 데이터를 치밀하게 분석하고 선수 개개인에게 맞춤식 교육을 실시했다.
그 같은 노력은 이듬해 전국대회 4관왕에 오르며 가시적인 성과로 나타났다. 하지만 그는 만족할 줄 모른다. 씨름은 항상 부침이 있기 마련. “성적뿐만 아니라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인성을 갖추는 것이 어린 후배들에게 필요하다”는 그의 지론 때문이다.
새해 그의 소망은 한 가지였다. 최근 이태현 등의 복귀로 다시 활기를 찾은 씨름이 옛 인기를 되찾는 것이다. “최홍만, 이태현 등이 이종격투기로 진출해 시합중에 맞는 장면을 보고 씨름인으로 마음이 아팠다”는 최욱진은 “과거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던 씨름이 다시 옛 명성을 되찾기만을 바랄 뿐”이라고 말했다.
사진설명=과거 화려했던 한라장사 시설을 회고하며 밝은 웃음을 짓고 있는 최욱진 감독(맨 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