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논문은 전직 로이터통신(Reuters) 기자였던 앤드류 맥그레거 마샬(Andrew MacGregor Marshall)이 2013년 10월 31일에 자신의 자신의 블로그 '젠 저널리스트'(ZENJOURNALIST)에 공개한 논문이다. 이 글은 이제까지 태국 정치 및 왕실에 관해 발표된 글 중 가장 심도 있는 내용이며, '위키리크스'(Wikileaks)가 폭로한 미국 정부의 비밀 외교전문을 광범위하게 분석해, 태국 정치의 심연을 이해하는 데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다. '크메르의 세계'가 한국어로 번역했고, 동영상 등 일부 자료를 추가했다. 전편을 먼저 읽어보려면 '여기'를 클릭하라.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3)
กลียุค — Thailand’s Era of Insanity
푸미폰 아둔야뎃(Bhumibol Adulyadej, 라마 9세: 1927년생) 국왕이 자신의 망나니 아들에 관해 국민들 사이에 만연해 있던 경멸적 시선을 공유하고 있었으며, 적절한 시기에 마하 짜끄리 시린톤(Maha Chakri Sirindhorn: 1955년생) 공주로 하여금 마하 와치라롱꼰(Maha Vajiralongkorn: 1952년생) 왕세자를 대체하여 자신의 후계자가 되도록 하려 했다고 믿을만한 충분한 이유들이 존재한다.
이와 관련하여 가장 명료한 징후는 캐나다 작가 윌리엄 스티븐슨(William Stevenson: 1924~2013)이 저술한 놀라운 책 <혁명적인 왕: '왕과 나'의 속편같은 실화>(The Revolutionary King: the true-life sequel to the King and I)이다. 스티븐슨은 1990년대에 푸미폰 국왕으로부터 준-공식적 자서전을 집필해줄 것을 사적으로 요청받은 후, 방콕(Bangkok)에서 여러 해를 보냈다. 스티븐슨은 푸미폰 국왕 및 국왕의 측근 집단에 대한 접근권을 전례없는 수준으로 허락받아 방대한 시간의 인터뷰 자료들을 모았다. 태국인이든 외국인이든 왕실 외부의 그 어떤 작가도 스티븐슨만큼 태국 왕실에 다가갔던 사례는 존재하지 않는다.
<혁명적인 왕>은 1999년에 출판됐지만, 거의 모든 학자들로부터 조롱을 받았다. 이 책은 기본적 사실들에 관한 오류가 가득했고, 그보다 더욱 광범위하면서 눈에 띄는 오해들도 실려 있었다. 더욱이 2001년에 발행된 재판에서도 그러한 오류들을 수정하려는 노력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학자들은 이 책의 중요성을 낮춰보는 경향이 있다. 이 책을 진지한 역사적 연구로 보아선 안 될 것이다. 그런 차원이라면 이 책은 비웃음을 살만큼 실패작이다. 하지만 푸미폰 국왕 자신의 관점에 관한 통찰이라든지, 왕실 내부 그룹이 실제로 어떤 인식을 가졌는지, 그리고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외부에 보여지길 원하는지에 관해 알고자 한다면, 이 책은 정말로 중요한 가치를 지닌 자료이다. 로저 커쇼(Roger Kershaw)는 2001년 <아시안 어페어스>(Asian Affairs)에 기고한 이 책의 서평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푸미폰 국왕의 비공식적 대변자라는 스티븐슨의 특권적 지위는 우리에게 태국 왕실의 과거와 현재의 역할에 관해 왕실 스스로의 입장에 접근할 수 있는 특혜를 보장해주고 있다. |
스티븐슨의 책이 지닌 여러 두드러진 특징들 중 하나는 와치라롱꼰 왕세자에 관해 묘사한 방식 및 왕위계승에 관한 푸미폰 국왕의 시각이다. 이 책은 1977~1981년 사이에 '미국 국방정보국'(U.S. Defense Intelligence Agency: DIA) 국장을 지낸 유진 티게(Eugene F. Tighe: 1921~1994) 중장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티게 중장은 시리낏(Sirikit: 1932년생) 왕후의 친구인 클레어 부스 루스(Clare Luce Booth: 1903~1987)가 태국 왕실 내부 정보를 자신에게 제공해줬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클레어는 시리낏 왕후가 남편을 깔아뭉개고 있다면서, 왕후가 아들이 차기 국왕이 되길 바란다고 말해주었다. 하지만 푸미폰 국왕은 자신의 딸들 중 하나를 [후계자로서] 더 선호한다는 것이다. |
스티븐슨의 책은 푸미폰 국왕이 어린 와치라롱꼰 왕세자에게 몇가지 예의범절들을 가르치려 하면서 겪었던 기묘한 일화도 소개하고 있다.
핸섬한 소년이었던 와치라롱꼰 왕세자는 숙명적인 고압적 감각을 보였다. 그는 한 궁내관의 질책에 대해 "미래의 그대의 국왕에게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라"며 반항했다. 푸미폰 국왕은 엉덩이를 때리며 "너는 아직 라마 10세가 아니다"고 환기시켰다. 소년 와치라롱꼰은 스승들의 등뒤에서나 엄숙한 의례에서 얼굴을 찌푸렸고, 한 궁정 시종이 국왕에게 사죄를 할 때까지 계속 그렇게 했다. 해당 시종은 오랜 시간 진행되는 의식 중에 열중쉬엇 자세로 마치 돌처럼 보일 정도로 서 있을 수 있는 특징을 가진 사람이었다. 왕세자는 자신의 주변 인물들과 유사한 점토 석상들의 모델이 되었다. 궁내관들은 왕세자의 조각상을 6개 만들었다. 푸미폰 국왕은 어느날 밤 잠들어있는 왕세자의 발치에 그 조각상들을 일렬로 배치하도록 했다. 소년 왕세자가 깨어나서 불쾌할 정도로 추한 자신의 얼굴들을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
이 책에는 성적 포식자(=플레이보이)로서 왕세자가 지닌 악명에 관해서도 암시되어 있다.
[왕세자가] 불화 점안식을 주재할 때, 궁내청(Royal Household Bureau) 직원인 한 아름다운 젊은 여성이 내게 물었다. "그가 왜 당신에게 악마의 눈길을 보내는거지?" 나는 [왕세자가] 나를 본 것이 아니라 그녀를 쳐다본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그러자 그녀는 몸서리를 치면서 "바라지 않아. 그건 여자에겐 치명적이야"라고 말했다.
미국에서 교육을 받은 귀족 여성이 탄식하며 말했다. "왕위계승권자였던 소년에게 덕을 갖추라는 것은 무리였다. 관복을 입은 그의 사진들을 좀 봐라. 만일 그가 낡은 관습들에 종속되어버린 인물이라면, 그는 모든 것을 다 할 수도 있다. 자신이 바라는 여자는 모두 다 취할 수 있고, 과거의 국왕들처럼 행동할 수도 있다." |
스티븐슨은 푸미폰 국왕의 모친인 상완(Sangwan, 공식호칭-'시나크린타'[Srinagarindra]: 1900~1995) 왕대비가 1977년에 시린톤 공주가 "왕세자가 차기 국왕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라면서, 그녀를 왕세녀 지위로 올려주는 일을 지지했었다고 적었다. 또한 와치라롱꼰 왕세자가 한때 푸미폰 국왕에게 총기를 발사했다는 세간의 소문도 다시 한번 기록했다.
스티븐슨은 1991년의 쿠테타 및 이어진 1992년의 정치소요의 상황을 비현실적이며 전적으로 부정확한 방식으로 재구성하는 가운데, 왕세자가 주역 악당들 중 한명이었던 것처럼 묘사했다. 그는 푸미폰 국왕이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하는 동안 왕세자가 부패한 장군들과 공모했다면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라마 9세(=푸미폰 국왕)가 찟라다 궁의 개인적인 만찬에서 섹소폰을 연주하고 있었던 것은 1992년 4월 29일 자정을 3시간쯤 넘긴 시각이었다. 시리낏 왕후는 [1991년 쿠테타 지도자이자 1992년 3월 총선결과에 따라 총리로 지명된] 수찐다 끄라쁘라윤(Suchinda Krapayoon: 1933년생) 장군과 춤을 췄다. 수찐다 장군은 이후 말을 건네기 위해 독자적인 테이블에 앉아있던 왕세자에게로 다가갔다. 그때 국왕의 최측근 중 한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왕세자가 여기 있다니 이상한 일이군. 그는 평소에 이런 데는 오지 않아. 그의 테이블에 앉아 있는 사람들 좀 봐. 다들 사깃꾼 같네." 이후 수찐다 장군은 국왕에게 몸을 굽혀 절하는 일에 신경을 쓰지 않은 채 방을 떠났다. 국왕은 언제나처럼 자신의 의자 등받이에 자켓을 벗어 헐렁하게 걸쳐둔 상태였다. 국왕은 연단 위에 <매드>(MAD) 매가진에 나오는 오래된 만화를 놓아두고 있었다. 그 만화의 한 가운데에는 한마디 말 밖에는 적혀있지 않았다. "생각하라!"(THINK!)
만일 [푸미폰 국왕이] 어떤 것이든 독재정권이 결정한 것에 관해 말했다면, 그것은 왕세자 및 그의 지지자들에 대한 비판이 될 것이었고, 국왕 자신이 '왕실모독죄'(lese majesté) 혐의를 짊어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점차로 그러한 일은 일어날 법하지 않게 되었다. 이때 발생한 새로운 정치위기 속에서, 국왕은 생생한 상태로 날아드는 정보들의 견본만을 살피며 공부만 했다. 시위대는 수찐다 장군과 왕세자에 대해선 비판을 가했지만, 국왕에 관해서는 지지했다. 이후 역습의 정보들이 수찐다의 반대세력을 희석시켰다. 하지만 그때도 국왕은 여전히 아무런 상처를 받지 않았다. 그는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
스티븐슨은 책의 말미에서, 푸미폰 국왕의 치세가 종말로 다가가면서 나타나는 임박한 결말에 관한 분위기를 상기시키고, 국왕이 시린톤 공주를 후계자로 앉히기로 결정했다는 점을 암시했다. 그는 다시 한번 왕세자의 난잡함을 부각시키면서, 시리낏 왕후가 와치라롱꼰 왕세자에게 라오스를 병합하라고 압력을 가했음을 암시한다.
"난 죽을 여유가 없네." 그(=푸미폰 국왕)가 농담을 던졌다. 만일 그의 생명이 다할 경우, 바로 그 순간 그가 진행해온 모든 일들이 위기에 빠질 것이었다. 왕세자는 결코 시린톤 공주가 왕위에 오르도록 좌시하지 않을 터였다. 그녀는 이미 오래 전에 자신이 결코 결혼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결정하여 모친인 시리낏 왕후를 속상하게 만든 상태였다. 국왕이 얼마나 더 생존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질문은 영원한 논란거리였다. 권력을 독차지하려고 계획한 이들은 시린톤 공주의 미래에 대해 무시할 수가 없었다. 비록 그녀가 여전히 독신이었고 왕위를 물려받을 가능성이 없다고 할지라도, 국왕은 그녀가 자신의 자리를 계승하도록 준비해오고 있었다. 또한 대다수 국민들은 그녀에게 너무도 헌신적이어서 만일 그녀가 차기 국왕이 된다면 환영할 준비도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일대 혁신이 될 수도 있었다.
라마 9세는 현존하는 세계 최장기 재위 군주였다. 하지만 그는 2번이나 커다란 심장마비를 이겨내야만 했다. 국왕은 한 차례 신속하게 회복된 직후 TV에 모습을 나타냈다. 그는 차트와 지시봉을 들고 있었다. 그리고는 외과적 절차를 상세하게 묘사한 후, 경고성 발언을 남겼다. 그는 자신이 아직 오랜 기간 살 수 있을 것이라 예상했다.
그의 경고는 라마 10세가 될 것처럼 보이는 사람, 즉 와치라롱꼰 왕세자 주변에 이미 모여들고 있던 이들에 대한 경고였다. [푸미폰 국왕은] 여느 아버지들과 마찬가지로, [아들에 관해] 자신이 들은 이야기들을 믿기를 주저했다. 보도의 최초 저자가 누구인지 확인하긴 불가능하지만, 왕세자가 자신을 매혹시킨 여성과 잠자리를 같이 하기 전에 매우 주의를 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에이즈(AIDS)가 급속도로 퍼지고 있기 때문이다. 팩스나 모뎀을 사용하는 이들은, 왕세자가 선택한 여성이 에이즈에 감염되지 않았음을 의사에게 확인시키기 위해 상당 기간 격리상태로 지낸다고 주장한다. 왕세자는 이제 44세이고, 엄중한 경호를 받고 있는 방콕에 위치한 자신의 궁전에 거주하고 있다. 시리낏 왕후는 왕세자가 자신의 군사적 능력을 라오스에서 발휘해보도록 제안했다. 라오스는 언제나 고대 시암의 한 부분이었다. 왕세자는 명령을 내리고자 했다. |
스티븐슨은 왕세자가 [2번째 부인이었던] 유와티타 뽈쁘라셋(Yuvathida Polpraserth: 별명-'몸 벤츠'[Mom Benz]) 왕자비를 추방시킨 일화에 관해서도 서술했다.
그 스캔들이 잦아들려고 할 무렵, 왕세자는 [쫒겨난] 여배우 출신 왕자비와 [불륜의 대상이었다고 폭로했던] 공군 중장의 사진들로 이 나라 수도의 담벼락들을 도배했다.
"이 두 사람은 기피대상 인물로 선언됐고, 왕궁으로부터 추방됐다. 누구라도 그들을 보는 이들은 그들을 외면해야만 한다. 아난 롯삼칸(Anand Rotsamkhan)은 자신의 직위에서 해임됐다. 만일 그가 또 다른 일을 벌인다면, 그는 무거운 처벌을 받게 될 것이다. 태국 정부는 그가 태국으로 돌아오길 바라지 않는다. 외국 땅에서 묻히도록 하라."
왕세자를 미래의 국왕으로서 후원하던 이들은 신중한 침묵 속으로 들어가버렸다. 왕세자는 정부에 관해 발언할 권한이 없었지만, 이미 마치 절대군주와 같은 어조로 발언하고 있었다. |
이 부분은 참으로 센세이셔날한 것이며 선동적인 자료이다. <혁명적인 왕>은 푸미폰 국왕에 대한 단순한 찬양서가 아니다. 그것은 와치라롱꼰 왕세자에 대한 명백한 공격이기도 하다. 이 책은 [폴 핸들리(Paul M. Handley)의 <왕은 절대 웃지 않는다>(The King Never Smiles)와는 달리] 태국에서 공식적으로 금지된 적이 없다. (부분적으로는 이 책을 푸미폰 국왕이 직접 감수했다는 점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태국의 서적상들은 이 책을 들여놓으려 하지 않는다.
왕당파 기득권층은 이 책이 푸미폰 국왕의 애칭인 '렉'(Lek)이란 표현을 사용한 것을 불쾌해하면서도, 이 책이 왕세자를 모욕한 것을 내심 반가와했다. 그들은 스티븐슨의 주장들을 결코 논박하려 들지도 않았다.
스티븐슨의 책은 해외에서 대량으로 구매되어 태국으로 수입됐고, 방콕의 중산층들은 이 책을 좋아했다. 이 책은 성자와 같은 민주주의 지지자 푸미폰 국왕이 부패한 군국주의자 와치라롱꼰 왕세자가 태국을 폐허로 몰아넣으려는 것에 용감하게 맞서 싸우는 것처럼 묘사했고, 그러한 묘사는 태국의 중상류층 사람들이 제멋대로 예단하고 상정한 내용과 맞물리면서 퍼져나갔다. 이 책을 읽고 그 내용을 액면 그대로 수용한 이들이라면 누구나 푸미폰 국왕이 자신의 백성들이 왕세자를 미워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보았고, 국왕이 어떻게 해서든 왕세자의 왕위계승에 앞서 구원을 해주리라 결론내렸다.
21세기 초가 되면, 태국의 엘리트 계층은 와치라롱꼰이 결코 차기 국왕이 될 수 없을 것이라 믿을 수 있는 또 하나의 이유를 갖게 된다. 그들은 왕세자가 후천성면역결핍증(HIV: 에이즈)에 감염됐다는 점과 백혈병으로 인한 극심한 통증에도 시달리고 있다는 점을 인지하게 된 것이다.
어쩌면 그가 자신의 부왕보다 먼저 사망할지도 몰랐고, 태국 엘리트 계층도 그렇게 되길 바랬다. [국민들의] 경멸을 받고 있고, 병에 걸렸으며, 적법한 남성 후계자도 두지 않았다는 점. 와치라롱꼰은 라마 10세가 될 기회를 영원히 상실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후 상황이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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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푸미폰 국왕의 생일을 맞이하여 대접견 행사에 모습을 보인 왕실가족. 좌로부터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 마하 와치라롱꼰 왕세자, 시리낏 왕후. |
태국의 엘리트들은 지각변동이 자신들의 발밑까지 들고일어났다는 것을 결코 깨닫지 못한다. 1950년대 후반부터 이 나라를 변모시키기 시작한 오랜 경제적 호황기는 경제적 불평등을 야만적 수준으로 벌려놓았고, 태국을 '마피아 국가'(mafia state)로 만들어버렸다. 조폭, 재벌, 경찰 수뇌부, 범죄조직 두목, 군 장성들, 사기꾼들이 부를 축적했고, 국왕에 대한 거짓된 열렬한 숭배를 가짜 명예훈장으로 사용하면서, 축적된 돈으로 기득권층에 합류하는 티켓을 구매했다.
구시대 귀족들은 언제나 평범한 태국인들을 업신여겼다. 기성체제에 편입된 졸부들은 언제나 자신들의 미천한 출신성분 때문에 당혹스러워 하면서, 그것을 감추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태국에서 가장 부유한 가문들은 점차 거품 속에서 생활했다. 그것은 동화같은 판타지의 세계였다. 후견(patronage)과 정실주의(nepotism)로 구성된 엘리트 세계에서 성공하기 위한 열쇠는 올바른 사람들을 사귀면서 질문은 많이 하지 않는 것이었다.
부유층들은 자신의 자녀들을 외국의 학교나 대학들로 보냈지만, 그들에게 결코 생각하는 법을 가르치진 않았다. 그리고 푸미폰 국왕에 대한 인격적 숭배가 점차 강화되면서, 엘리트 계층에게 '비판적 사고'(critical thinking)란 일종의 장애처럼 여겨졌다. 기성체제의 퇴폐적 세계에서 체면이 바로 중요한 모든 것이었다. 퇴폐풍조는 만연해 있었지만, 존경할만한 품위의 가면 뒤에 감추어두었다.
세월이 흐르자 태국 엘리트들의 대부분은 점차 부패하고 무능해졌다. 거짓말과 부정직함은 너무도 일상적이어서, 그들은 진실을 인식하는 능력조차 상실했다. 사회적 어른들과 "국가의 아버지"인 푸미폰 국왕을 존경하라고 가르치는 가운데, 그들은 어린아이 취급을 받으며 무지해져버렸다.
빈곤층들은 대부분 태국의 경제적 발전에서 소외됐고 이 나라의 악명높은 열악한 교육체계 때문에도 불리한 입장에 처했지만, 엘리트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21세기 초 무렵부터 그들은 더 이상 순종적인 바보들이 아니었다. 오랜 기간 태국에 거주해온 제임스 스텐트(James Stent)는 2010년에 발표한 대단히 훌륭한 분석 글 <태국의 혼란에 관한 사색>(Thoughts on Thailand’s turmoil)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1950년대 태국 시골 마을의 제한된 세계에서는, 정령들과 공무원들을 달래는 가운데 전통적인 생계유지 방식이 거의 변화되지 않고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졌다. 하지만 이제 급격하게 변하고 있다. 시골 주민들은 이제 TV, 휴대폰, 픽업 트럭, 그리고 방콕에서 일하는 친인척들을 통해 세계의 나머지 부분과 연결되고 있다. 택시 기사들은 대부분 태국 북동부지방(=이싼지방)의 시골마을 출신인데, 그들 중 많은 이들이 내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도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우리는 정말로 그렇게 어리석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가 전에 어리숙한 적이 많았지요. 하지만 더 이상은 아니죠." |
탁신 친나왓(Thaksin Shinawatra: 1949년생)은 바로 이러한 가연성의 사회 정치적 분위기가 불길에 휩싸이도록 만들었다. 그가 비록 엄청난 부를 축적하여 태국의 엘리트 계층에 최근에야 편입했고, 태국 사회에서 발생한 심오한 변화를 이해하진 못했던 것으로 보이긴 하지만, 그는 보통 사람들을 폄하하지 않았으며 그들에게 실질적인 이익이 될 정책을 공식화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태국의 빈곤층들도 탁신의 부패를 모르진 않았지만, 그들은 다른 엘리트 역시 마찬가지로 부패했다는 점을 충분히 파악할만큼 영리했다. 이에 관해서는 다시 한번 스텐트의 글을 살펴보자.
필자가 마을 사람들에게 탁신이 매우 부패한 것이 사실이 아니냐고 묻자, 언제나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답변이 돌아왔다.
"모든 정치인들이 부패한 것처럼, 물론 탁신도 부패했다.
하지만 우리를 위해 무언가를 해준 부패한 정치인은 탁신이 처음이었다."
탁신의 부패, 권력남용, 개인적 부는 오늘날까지도 이들 농총지역 지지자들에게는 간과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무관한 요소라고 치부하는 것이다. |
자신의 의제를 추진할 때 국왕의 바라미(barami: 국왕의 공덕)를 앞세우는 것이 유리하다는 점을 인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보면, 탁신 역시 다른 엘리트들과 마찬가지로 왕당파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기득권층과는 달리, 탁신은 와치라롱꼰이 라마 10세가 되는 일에 별로 거리낌을 갖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왕세자의 차기 국왕 등극이 불가피한 일이라고 여겼고, 1990년대부터 전형적인 실용주의자의 입장에서 그러한 일을 준비해나왔다. 그는 자신의 거대한 재산 가운데 상당한 금액을 왕세자의 호의를 얻는 데 사용했다.
태국의 기득권층에 상당히 우호적인 성향을 지녔던 미국 대사 랠프 보이스(Ralph L. Boyce: 1952~ )는 2005년 3월 본국으로 보낸 비밀 외교 전문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푸미폰 국왕에게는 더 이상 관심이 쏠리지 않을 것이다. 탁신은 이미 오래 전부터 미래를 위해 왕세자에게 투자를 해왔다. |
푸미폰 국왕은 탁신이 와치라롱꼰 왕세자에게 후한 지원을 하는 것에 몹시 분노했다. 국왕은 아들에게 지급되던 재정적 비용을 제한시켜 왕세자를 훈육시키고자 했다. 그것은 마치 왕세자가 아직도 학생일 때 용돈을 삭감시켜 선을 지키도록 만들고자 하는 것과 같았다. 하지만 탁신이 왕세자에게 후원을 하면서 이러한 전략은 방해를 받았고, 푸미폰 국왕은 격노했다. 푸미폰 국왕은 2001년 12월 자신의 생일 행사 연설에서 조롱조의 독백을 하면서 탁신 총리를 놀려댔다.
태국의 전통적 엘리트들 역시 탁신이 공공연히 와치라롱꼰과 동맹을 맺는 일에 간담이 서늘해졌다. 쁘라송 순시리(Prasong Soonsiri)는 예비역 공군 중령 출신으로 푸미폰 국왕의 측근 서클에 속하는 극우파 인사이다. 그는 <파 이스턴 이코노믹 리뷰>(Far Eastern Economic Review) 소속 기자들인 숀 크리스핀(Shawn Crispin) 및 로드니 타스커(Rodney Tasker)와 회견을 가지면서 푸미폰 국왕의 불안함과 관련된 정보를 유출했다. 2002년 1월 10일자 <파 이스턴 이코노믹 리뷰>에 실린 이 인터뷰는 <국왕의 정당한 두통>(A Right Royal Headache)이라는 가십성 제목을 달고 있었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일부 고위 관리들의 말이 신뢰할만한 것이라면, 태국의 새로운 한해는 정치적으로 골치아파질 것이 분명하다. 탁신 친나왓 총리에게서 감지된 오만함과 그가 왕실가족 내부 문제에 참견하려 한다는 주장들이 나오면서, 탁신 총리는 점차로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을 짜증나게 만드는 원천이 되어가고 있다. 태국의 입헌 군주는 일상적인 정치에서 어떠한 공식적인 역할도 맡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작년 12월 초 자신의 생일 연설을 통해 탁신 총리를 공개석상에서 맹렬히 비난했다. 탁신은 국왕의 아들, 즉 와치라롱꼰 왕세자와 관련된 사안들에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왕실과 가까운 한 고위 관리에 따르면, 국왕은 이 모든 일에 인상을 찌푸린 것으로 알려졌고, 총리실과 왕실 사이에 마찰이 있을 가능성도 점쳐지고 있다. 해당 소식통은 작년 1월6일의 총선에서 압도적인 다수표를 얻었던 탁신 총리가 의회의 탄탄한 지지와 더불어 태국에서 가장 부유한 사업가라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왕실을 가로막으려 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러한 일은 장차 태국의 안정에 심각하고도 우려할만한 함축이 될 수도 있다. |
이 보도에 대해 탁신 정부는 분노섞인 반응을 보여, 크리스핀과 타스커를 추방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이러한 반응은 도리어 해당 보도의 신빙성만 강화시켜주었다. 하지만 이 사건이 급상승 중이던 탁신의 인기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진 못했다.
태국 엘리트 계층이 탁신의 대중적 지지로 인해 푸미폰 국왕에 대한 숭배가 약화될 것이라 걱정했다는 것은 널리 수용되고 있는 중론이다. 하지만 그것은 완전히 틀린 이야기이다. 그들이 정말로 걱정했던 것은 와치라롱꼰이 차기 국왕으로 등극할 가능성이 희박해보였던 현실이 탁신의 대중적 인기 때문에 희석되는 것이었다. 탁신 총리의 전례없는 지지율과 선거를 통한 적법성이 왕세자의 비호감도를 상쇄시킬 가능성이 있었던 것이다. 총리인 탁신과 국왕인 와치라롱꼰의 조합은 가공할만한 팀웍을 형성할 가능성도 있었고, 아마도 그 경우 다가올 10년간 태국을 충분히 주도할 수도 있을 터였다.
이러한 우려가 고조되는 가운데, 왕세자는 2001년 2월 논타부리 궁(Nonthaburi Palace)에서 있었던 비밀 결혼식 이후 보다 성숙하고 안정된 것 같은 모습을 보였다. 그는 이 결혼식을 통해 자신의 시녀들 중 한명과 [3번째] 결혼을 했다. 그녀는 바로 시랏 아콘퐁쁘리차(Srirasmi Akharapongpreecha)였다.
이러한 사태의 전개로 인해 가장 많은 것을 잃은 사람은 ['추밀원'(Privy Council: 국왕자문기구) 의장인] 쁘렘 띠나술라논(Prem Tinsulanonda: 1920년생) 장군이었다. [독신인] 쁘렘은 돌봐야 할 자식들이 없었기 때문에 부의 축적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지만, 그의 일생은 자기 자신이 축적시켜놓은 '국왕의 바라미'를 보존하는 일로 점철되어 있었고, 그 자신이 권력에 관한 중독자였다.
쁘렘은 이미 20년 전부터 와치라롱꼰의 불구대천지 원수로 자리매김해왔다. 그리고 그는 왕세자가 라마 10세로 등극하면 자신을 추밀원에서 쫒아낼 것이란 점과, 심지어는 자신의 신변안전까지도 위험해질 수 있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탁신은 쁘렘에 대해 그다지 존경심을 보여주지 않았고, 쁘렘과 같은 고령의 장군이 아직도 그렇게 강력한 권력의 인사로 존재해야 할 이유도 찾지 못했다. 탁신은 총리가 된 후 쁘렘의 인맥들을 체계적으로 포위하면서, 영향력 있는 자리에 자신의 사람들을 포진시켜나갔다.
2005년, 태국 엘리트 계층의 안락했던 세계에 폭탄과도 같은 사건 2건이 발생했다.
2월에는 탁신이 이끄는 '타이락타이 당'(Thai Rak Thai party, 태국사랑 태국인 당: TRT)이 총선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뒀다. 이 승리는 몇가지 측면에서 전례가 없는 것이었다. 우선 태국 역사에서 임기를 다 채운 후 다시금 재선된 총리는 탁신이 최초였다. 그리고 총선에서 단일 정당이 압도적인 과반을 차지한 것도 최초였다. 탁신의 총선 승리는 자신의 반대자들에 대한 멋진 반격이었고, 다가올 일정 시기 동안 탁신이 태국 정치에서 지배적인 힘을 갖게 될 것임을 보여주는 일이었다.
4월29일에는 시랏 왕자비가 아들인 티빵꼰 라서미촛(Dipangkorn Rasmijoti) 왕자를 출산했다.티빵꼰 왕자는 에이즈에 걸리지 않았다. 태국 신문들은 그보다 한해 전에 의사들이 "정자 세척"(sperm washing)이라 불리는 기술을 개발했다는 것을 보도한 바 있다. 이 기술을 이용할 경우, 에이즈에 걸린 아버지의 아이라고 할지라도 HIV에 감염되지 않을 수 있다. 와치라롱꼰 왕세자는 이제 다시금 적법한 남성 후계자를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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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와치라롱꼰 왕세자가 시랏 왕자비 및 아들인 티빵꼰 왕자와 함께 기념촬영을 한 모습. |
엘리트 사회에는 패닉이 찾아왔고, 탁신 친나왓을 반대하기 위한 연합세력이 구축됐다. 여기에는 태국 기성체제의 거의 모든 세력이 망라됐다. (시리낏 왕후에게 충성하거나, 쁘렘에게 충성하거나, 아니면 양자 모두에 충성하는) 군 수뇌부, 보수 야당인 '민주당'(Democrat Party), [임명직] 관료들과 사법부, 그리고 [언론재벌이자 선동가인] 손티 림텅꾼(Sondhi Limthongkul: 1947년생)과 [예비역 육군소장 출신의 정치인] 짬렁 시므앙(Chamlong Srimuang: 1935년생)이 '옐로셔츠 '(PAD: 국민 민주주의 연대) 운동의 기치 하에 주도하던 반정부 시위에 참가한 많은 수의 방콕 중산층 사람들이 여기에 포함된다.
이 연합세력은 1990년대에 서로 반목하던 세력들을 모두 아우르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조합이었다. 즉 푸미폰 국왕의 측근 그룹과 시리낏 왕후의 측근 그룹이 모두 포함됐고, 쁘렘 띠나술라논과 관련 있는 기성체제 보수파들, 그리고 아난 빤야라춘(Anand Panyarachun: 1932년생)의 계파 내에 존재하던 "왕당파 자유주의자들"(royal liberals), 우파 성향의 재계 재벌들, 좌파 NGO들 및 노동계 지도자들까지 포함했다.

(사진: AFP) 옐로셔츠 운동의 창시자들이자 2005~2008년 사이의 태국 정치위기에서 옐로 진영의 선봉장을 맡았던 손티 림텅꾼(우측)과 짬렁 시므앙(좌측). 2008년 시위 때의 모습. 언론사 사주인 손티는 야외에서 진행하는 정치 쇼 프로그램인 팟캐스트를 진행하면서 반-탁신 운동의 세력화에 불을 지핀 인물이다.
이들을 결집시킨 것은 탁신 친나왓에 대한 단순한 반감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와치라롱꼰 왕세자에 대한 두려움 및 양자가 동맹을 맺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결과에 대한 공포 때문이기도 했다. 옐로 진영 내에서는 처음부터 왕위계승 문제가 중심적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하지만 가혹한 악법인 왕실모독 처벌법(lèse majesté law: 형법 제112조)을 위반할 가능성도 있는 데다, 그 이상의 의미 때문에라도 와치라롱꼰에게 공개적으로 도전하는 일은 위험성을 내포했다. 따라서 옐로셔츠 연합세력은 자신들이 왕세자의 차기 국왕 등극을 반대한다는 것을 결코 명시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하지만 실마리는 모든 곳에 나타나 있었다. 옐로셔츠 지도자들과 태국의 원로 정객들은 종말론적(apocalyptic) 분위기의 연설들을 통해 어렴풋이 보일듯말듯한 '깔리육'(กลียุค: 종말기)에 대한 공포심을 조장해나갔다. 그것은 부정부패와 부도덕성이 태국을 파괴하게 될 시대를 말한다. 실제의 탁신은 전례없이 효율적이면서도 전형적으로 부패한 정치적 대부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들은 탁신을 비견할 데 없이 위험한 '슈퍼 악당'(supervillain)이라면서 악마화시켰다. 그리고 이러한 일은 이미 한세대 동안 이어져온 와치라롱꼰에 대한 공포심 및 혐오감과 자연스레 연결됐다.
엘리트 계층은 탁신과 왕세자의 동맹이 자신들의 정치적 지배력에 실존적 위협이 될 것임을 깨달았고, 오싹해질 정도의 세기말적 어법을 사용하며 세상의 종말이 다가오고 있다고 경고한 것도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그들의 세계"는 종말에 다가가고 있었고, 바로 그 점이 그들을 두렵게 하였다.
2006년 3월 21일 새벽, 정신병을 앓고 있던 27세의 남성이 라차쁘라송(Ratchaprasong)의 '에라완 사당'(Erawan shrine)에 봉안된 브라흐마(Brahma, 梵: [역주] 힌두교에서 창조의 신) 신상을 파괴했다. 기인에 가까운 히스테리적 초-왕당파 인물인 '네이션 그룹'(Nation Group: [역주] 극보수 영자지 '더 네이션' 등을 발행하는 태국 굴지의 언론미디어 기업) 소속 타농 칸텅(Thanong Khanthong) 기자는 이 사건을 1767년 버마 군대의 침공과 약탈로 불타버린 아유타야(Ayutthaya) 왕국의 마지막 날들에 비유하면서, [아유타야 왕국의 강성기에 재위한] 나라이 국왕(King Narai: 1633~1688)이 말했다는 고대의 예언을 들먹이기도 했다.
손티 림텅꾼은 옐로셔츠 집회장 무대에서 연설할 때, 태국을 집어삼킬 어둠의 시대를 막기 위한 실존적 전투가 태국에서 진행 중이란 말을 일상적으로 사용하곤 했다. 아난 빤야라춘은 태국이 실패한 국가가 되어 가고 있다고 경고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태국 사회는 지금 강력한 증오심 때문에 양극화되었다. 만일 이런 상황이 지속된다면, 우리는 몸서리쳐지는 시대를 살게 될 것이다. |
미국대사 랠프 보이스는 옐로셔츠 운동의 지지자였음에도 불구하고, 2006년 9월 5일 본국으로 보낸 비밀 외교전문에서 이러한 종말론적 불안을 다음과 같이 정확하게 분석했다.
이 모든 불안(angst)의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 중 한 부분은 단순히 사람들이 나쁜 시절이 얼마나 나쁜지를 망각하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한 부분은 정치 및 태국 사회가 불과 몇년 동안에 변화해온 방식에서 기인한다. 정치를 하는 엘리트들에게 있어서, 정치란 하나의 게임과도 같은 경향이 있었다.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1992년의 시위, 1997년 제정된 <국민의 헌법>, 경제 번영이 가져다 준 미디어에의 접근 확대, 오랜 기간 무시되어왔던 농촌 인구들에 대한 지원을 유지하는 가운데 선거제도를 통해 성공한 탁신 총리의 파퓰리즘 정책들 등, 일련의 과정을 통한 자각 속에서 태국 정치는 제법 민주화되어 왔다. 태국 사회에서 "끄랭짜이"(krengja, เกรงใจ, 깽짜이: [역주] 삼가하고 저어하는 마음)하는 일이 더 이상 최고로 칭송받을만한 덕목이 되지 못하고 있다. 국민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요구하는 일이 중요함을 더욱 자주 뱔견하게 된다. 더 많은 비율의 인구가 방콕에서 벌어지는 정치적 싸움의 결과에 관해 자신들이 참다운 권리가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입장을 주장할 마음의 준비를 한다. 이러한 점은 전반적인 정치적 온도계를 상승시키며, 경쟁관계의 양 진영 사이에 마음에서 우러난 폭력을 가할 가능성을 증가시키고 있다. 이러한 일은 엘리트들끼리 밀실에서 딜을 하던 정치 시스템에서 보다 참다운 민주적 정치 시스템으로 도약하는 과정에 나타나는 피할 수 없는 부산물일지도 모른다. 구시대 정치인들과 귀족들은 안절부절하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미 대사관)는 태국이 종국에는 그러한 이행을 관리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
옐로 진영 연합세력이 대재앙이 도래할 것 같이 하면서 탁신을 악마화시키는 분위기를 창출하려고 모든 노력을 펼쳤지만, 대다수의 태국인들은 탁신의 '타이락타이 당'에 대해 계속해서 지지를 보냈다.
하지만 방콕의 엘리트 계층과 중산층들은 태국의 나머지 지역이 가진 생각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옐로 진영은 반-탁신 성향 주류 언론매체들의 지원을 더욱 더 받아가면서, 독재자 같은 탁신 총리에 대항하여 전국적인 봉기가 발생할 것이란 망상만 부추길 뿐이었다.
탁신 스스로도 몇 가지 지독한 전술적 실수들을 저질렀다. 그 중 가장 주목받은 것은 2006년 초에 자신의 가문이 소유하고 있던 기업 '친 코프'(Shin Corp)를 싱가포르의 국영 투자회사인 '테마섹'(Temasek)에 매각하면서 세금을 내지 않은 일이었다([역주] 이 일은 증권시장을 통한 매각을 통해 면세라는 합법성을 지닌 것이고 태국 재계의 관행이기도 했지만, 도덕적 측면에서 심각한 공격을 받았음). 옐로셔츠 운동의 기세가 거의 꺾일 무렵에 발생한 이 일은 도덕적 지향성을 지닌 중산층들의 분노에 불을 지폈다.
손티 림텅꾼은 숀 크리스핀과 이듬해(2007) 4월에 가진 인터뷰에서 자신에게 압력이 있었다는 점을 확인했다. 즉, 쁘렘 장군이나 쁘렘 장군의 최측근인 수라윳 쭐라논(Surayud Chulanont: 1943년생) 장군 같은 구시대 왕당파 엘리트 계층의 지도급 인사들과 [현역] 고위 장성들이 그의 옐로셔츠 운동을 지지하면서, 그에게 충돌이 발생하도록 해보라는 압력을 가했다는 것이다. 태국의 길거리 정치라는 치명적 무대에서는, 대중적 지지와 객관적 사실 사이에 별다른 연관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반정부 시위대의 지도부에게 중요한 점은 정부 당국이 욕을 먹을만한 상황을 조성한 가운데 자파 사람들 중 몇몇이 죽거나 장애를 입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손티는 크리스핀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군대의 개입을 요청하거나 국왕께서 나와달라고 요청하려면 언제나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그것은 유혈사태가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구시대 정치 이론에서는 국왕이 개입하려면 유혈사태가 있어야만 했다. 하지만 탁신을 제거하려는 목적의 활동에서는 그러한 기제가 작동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이 계획한 해법은 다소간 혼란이 왔다. 반-탁신 가두 투쟁을 벌일 때 사람들이 항상 말했던 것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손티 씨, 일을 좀 더 진전시킬 수는 없는거요? 충돌을 좀 만들어주지 않겠소? 피를 조금만이라도 좀 보여줄 수는 없소?" 하는 방식이었다.
나는 탁신과 싸웠고, 대규모 군중을 동원할 수 있었다. [보수 엘리트들이] 나중에 고백한 것인데 그들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올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었기 때문에, [옐로셔츠 운동의 시위에] 흥분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충격과 황홀경을 동시에 맛봤다. 이후 모든 엘리트들이 자신들의 세력을 모두 규합하여 내 뒤에 와서 섰다.
[역주] 본 역자는 팟캐스트를 통한 21세기 미디어 정치를 통해 방콕의 대중들을 선동한 손티 림텅꾼의 사례에서 한국의 김어준과 나꼼수의 선구를 보았고, 일찍부터 나꼼수 현상이 한국의 민주진영에 미칠 위험성을 경고한 바 있다. 손티 림텅꾼이 극우 진영을 사유화하려 했던 선동가라면, 김어준은 민주 진영을 사유화하려 했던 선동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손티는 원래 탁신에 대한 열렬한 지지자였다 그 반대파로 돌아선 인물이란 점에서, 특히 보수진영에서 유사한 현상을 보인 한국의 일부 정치적 전위들의 선구적 사례에 해당하기도 한다. 또한 특히 수구파를 중심으로 미디어 선동과 공연형 대규모 집회, 테러와 음모, 유혈사태가 결합된 현상을 보인다는 점에서, 태국 정치는 21세기 세계 정치가 나아갈 방향에 관해 가장 먼저 많은 단초들을 보여준 사례 중 하나라고도 볼 수 있다. |
손티의 옐로셔츠 운동 시위는 그들 스스로의 힘으로 탁신 정권을 붕괴시키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들은 2006년 군사 쿠테타가 일어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는 기여했다.
2006년 9월 19일, 쁘렘 띠나술라논 장군을 중심으로한 옐로 진영 네트워크 내에서 몇달 간의 계획이 진행된 후 왕당파 장군들이 쿠테타를 일으켜 탁신 총리를 실각시켰다. 푸미폰 국왕은 그 즉시 새로운 군사정권에 축복을 내렸다. 그것은 쁘렘의 쿠테타였지만 푸미폰 국왕도 동의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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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국방총사령관과 육해공 3군 사령관 등 군 수뇌부가 TV에 출연하여 쿠테타 성공을 발표하는 모습. 손티 분냐랏끌린(중앙) 육군사령관이 발표문을 낭독하고 있다. |
* 시리즈물 바로가기 :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1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2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3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4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5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6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7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8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9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10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11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12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13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완결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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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앤드류 맥그레거 먀샬 기자의 논문...
보면 볼수록 참으로 대단한 글입니다.
지난 30년간 태국 정치나 왕실에 관해 발표된 논문이나 보도문의 80% 이상을
그냥 아무 쓸모없는 휴지조각 정도로 만들어버린 글이 아닌가 평가됩니다..
가공할만한 정보 통제를 해온 태국이기에 발생가능한 학문적 혁명이네요..
과학분야가 아니라 인문사회과학 분야에서 이런 일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이런 천기누설을 ~ 일본에서 조심스럽게 열어보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