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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열과 명복(冥福)●ㅡ황성진
1. 그의 육신(肉身)은 사라지고 없다. 그리고 그는 존재한다.
His body is not exist, and He is exist.
2. 사람의 복 중에 최고의 복이 명복(冥福)이라 합니다. 그러면 명복이란 무엇일까요? 사전적인 뜻은 “죽은 뒤에 저승에서 받는 복”입니다.
3. 사람이 죽은 뒤에 다음 삶이 결정될 때까지 머무는 중간상태를 중음(中陰)이라 합니다. 그것은 낮과 밤의 사이인 황혼 녘이며, 이 세계와 저 세계의 틈새입니다. 티베트에서는 사람이 죽은 후 다시 환생하기까지 머물게 되는 중간상태를 '바르도'라고 부르며, 그 상태에 머무는 기간은 49일로 알려져 있습니다. 티베트 말로는 바르도(Bardo)라 하지요. 바르도(Bardo)는 둘(do) 사이(bar)라는 뜻입니다.
4. 사람이 죽으면, 그의 생전에 지은 업에 따라 사후의 길을 걷게 되어 있습니다. 그의 친지나 벗, 동지, 가족 등이 보통 조문(弔問)을 가서 “명복을 빕니다.”라고 합니다. 실제로 명복을 빌어주는 방법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5. <티베트 사자의 서>라는 책에는 파드마삼바바라는 석가모니 부처님 이후의 최고 고승(高僧)이 사후에 사람이 걷는 길을 잘 밝혀 놓았습니다. 사람에 따라 49일의 기간을 온전히 다 사용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죽자마자 새로운 몸을 받기도 합니다. 사람이 생전에 지은 업에 따라 사후에 걷는 길은 차이가 있습니다.
6. 명복은 결국 죽은 후, 새로운 삶으로 넘어가기 전, 사후 세계의 길을 잘 걸을 수 있는 복입니다. 생전 그의 벗이나, 스승, 친지 등이 사후 세계의 길 안내를 진리에 따라 잘 해주는 일이 명복을 비는 일입니다. 진리에 따라 길 안내를 받는 일에 장애가 없는 것도 명복입니다. <죽으면 끝>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자손, 친구 등이 길 안내를 잘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길 안내를 할 의지를 갖고 있으며, 또 실제 잘할 수 있는 사람을 생전에 가까이 하는 것도 돌아가신 분의 몫입니다. 결국 명복(冥福)도 생전에 스스로 짓는 것입니다.
ㅡㅡㅡㅡㅡㅡ큰 슬픔을 겪으셨군요. 김병관회장님과 같은 형님을 두었으니 김상열 영가는 분명 명복이 있는 분입니다. 삼가 김상열 영가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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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也一片 浮雲起(생야일편 부운기 ) 死也一片浮雲滅(사야일편 부운멸)●
이몸이 나기전에 그 무엇이 내몸이며, 세상에 태어난뒤 내가 과연 누구든가?
자라나 사람되어 잠깐동안 내라더니,
눈 한 번 감은 후에 나는 과연 누가 될까?
영혼의 집인 육신을 버리고 떠난 동생 상열 영가에게 고하노라.
그대는 2018년 음력 9월 23일 새벽 1시에 이승을 하직하니 그대가 이 세상에 머문 기간이 정확하게 63년 90일이였다.
이제 막 그대의 육신을 불태워 한줌의 재가된 유골을 유택지에 막 안치하고서 돌아서기 차마 힘들어 형제의 연을 맺고 지나온 63년을 잠시 돌아보노라.
비록 형을 두고 먼저 떠나간 너가 야속하긴 하지만 아직도 삶의 참가치를 모르고서 나태하게 살고 있는 이 우매한 兄에게 諸行無常 生者泌滅(제행무상 생자필멸)이라는 참 이치를 새삼 깨닫게 해주는 스승이 되었구나.
일찌기 만공선사께서는 입적하시는 날 아침 거울 앞에 단정히 앉아 "내 오늘 그대와 이별일세 그간 수고 많았네" 하시곤 홀연히 좌탈입망 하셨듯이 그대 역시 63년간 영혼의 집이 되어준 육신에게 감사하는 순간이었으면 한다.
이미 너 육신은 地水火風으로 흩어졌지만 不生不滅 不增不減 會者正離(불생불멸. 부증불감. 회자정리) 이치따라 언젠가는 돌고 돌아서 또 만나기 마련이란다.
이 형이 귀신은 속여도 팔자는 못 속인다는 사주명리학을 접해보았는데 새 집으로 이사가는 운이 있을 때 이승을 하직하는 것을 보더라도 죽음은 끝이 아니고 새 삶의 시작임이 분명하리라.
63년간 너를 운전해온 너의 영혼은 불멸의 화신이라 너는 금생의 성적표 따라 더 좋은 새집으로 이사 갔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生死(생사)는 一如 (일여)이고 靈魂(영혼)은 不滅 (불멸)이니 이 우주가 얼마나 아름답고 위대한 동네인가?
비록 산간벽촌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정든고향 등지고 물설고 낯선 타향객지에서 격동의 한 시대를 온 몸 부딫치며 걸어온 한평생이 어찌 값지지 않다 하겠는가?
그 고난의 여정들은 너가 새집을 짓는데 훌륭한 재목들이 될
것이라 확신한 다.
그대는 만고 충신 忠毅公 文字起字(충의공. 문자 기자) 할아버지 후손으로 산간벽촌 경남 의령의 오지 마을에서 달밤에도 밭을 가시는 부지런한 아버님과 자식사랑에 눈머신 자애로운 어머님의 6남매의 셋째로 이 세상에 태어났었다.
올망졸망 4형제가 한 이불을 덮고 할머니 젖가슴을 서로차지 하려고 밤마다 쟁탈전이 벌어진 것은 두살터울로 태어나는 동생 으로 인해 젖떨어지기 무섭게 할머님께 인계되었으니 엄마의 품이 얼마나 그리웠겠느냐. 부모님 사랑을 놓고 다투는 형제는 전생의 경쟁자가 맞는 것 같다.
수많은 추억속에서
나는 초등 4학년이고 너는 1학년 때였다.
형제 누군가와 다투고서 단식 응석을 부리던 중 학교에 갔는데 배가 아파 조퇴를 해야 한다는 전갈을 받고 달려가 몇끼를 굶어 기진맥진한 너의 고사리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 혼자 갈 수 있다며 한사코 손사례 쳐서 나는 다시 학교로 돌아 갔었다.
집뒷산 방개곡 고개마루까지 수십번을 쉬다 걷다하여 겨우 집 가까운 대나무 밭까지 와서는 더 이상 걷지 못하고 쓰러져 모기만한 소리로 엄마를 부르는데 마침 뒤딜방아 찧던 누님귀에 들려 걷지도 못하는 너를 등에 엎고 오는데 "누우야 밥 주라" 고 애원하여 김령김가의 전통을 이은 너의 외고집과 자존심을 꺽는 계기가 되었던것 같다 .
이 형이 서울 유학 중 공산혁명가가 되려고 월북을 결심 서울을 떠난 이후 그 어린 새가슴은 야속한 형을 원망하며 이 형의 행방불명으로 실성하다 싶이 한 부모님의 장남노릇까지 하면서 큰 의지처가 되기도 했었지.
이 형이 5년만에 눈푸른 납자되어 승복차림으로 고향땅을 밟았을 때 너는 고교입시 준비 하느라 부산에서 소식 듣고 한달음에 달려와 부모님과 합세하여 다시 산으로 가지 말고 같이 살자고 애원하여 온 집안이 눈물바다가 되기도 했었다.
동생들 학업이나 마칠 때 까지 수행의 길을 일단 접자고 결심하여 이형이 풍진세속에 묻히고 마는데 너도 일조를 한셈이다.
너와 함께 부산 대신동 산비탈에 5만원짜리 단칸방을 얻어 자취 하며 학비라도 보태려고 우유배달을 시작 임시로 이 형이 집집마다 찾아 다니면서 거래처를 확보하고 너는 새벽 같이 그 무거운 우유 가방을 메고 메뚜기 콧잔등 같은 대신동 보수동 비탈길에서 흘린 비지 땀도 만만치 않았으리다.
그 어려운 와중에도 태권도에 입문하여 유단자가 된 너를 한없이 자랑스럽게 여겼고 형이 입대한 후 범준이 동생까지 낯선객지에 데려다 학부형 노릇까지 한 너가 참 대견스럽기 까지 했었다.
이 형이 군 입대 훈련중 너가 보내준 위문 편지를 달빛에 수 십번 비추어 보며 고된 훈련의 시름을 달래기도 했었지.
이 형 제대말년에 너도 육군에 입대하여 너무 심한 훈련으로 인해 관절이 고장났다는 전갈 받고 하도 걱정이 되어 특별 휴가까지 받아 진해에서 최전선 연천으로 달려갔었다.
당시의 교통편 안 좋아 일과가 끝난 저녁 늦게 도착 외출 면회가 어려워 부대안 소나무 밑 달빛 아래서 형이 준비해간 빈약한 빵 몇조각과 음료를 나누어 마시던 기억이 생생하구나.
두 형제의 애틋한 우애를 지켜본
중대장의 특별 배려로 부대 가까운 민가로 나가 쌀가마가 쌓여 있는 창고 같은 방에서 함께 밤을 지새며 오뚜기 사단 사단에서 다른 부대로 보내 달라고 애원하였지만 돈 없고 백 없는 촌놈의 처지를 비관하며 눈물로 지새는 밤이 되고 말았었지.
주인집 아주머니 차려주는 따뜻한 아침밥을 먹여서 다시 부대로 보내는 너의 뒷 모습이 너무나 처연하여 사라질 때 까지 지켜보다 무거운 발걸음을 돌려야만 했었다.
당시만 해도 고된 훈련을 이기지 못해 자살이나 탈영하는 병사가 허다했던 시절이라 더더욱 마음이 조여 발걸음이 무거웠다.
단장의 아픔을 감내하며 대구 성당 주차장까지 와서 고향가는 완행버스를 기다리는 정류장에서 마음이 다급하여 편지지를 구해 너와 너희 중대장에게 보내는 간곡한 편지를 작성하기도 했다.
6.25전재시 백마고지 전투에서 구사일생하신 아버님의 투혼과 통영 앞 바다에서 해군159명이 순직하는 엄동의 바다에서도 기적적으로 살아난 이 형을 생각해서라도 용기 잃지 말라는 내용등으로 쓰내려가다 너무 감정이 북받쳐서 나도 모르게 울고 말앗다.
옆에 앉은 어느 아주머니 해군 아저씨께서 무슨 슬픈 사연 있길래 그렇게 서럽게 우시냐고 물어오시기에 사연을 들으신 아주머니도 함께 눈물을 훔치었다.
이 형이 능동 가게방에서 너의 형수와 신혼 살림을 차렸을 때 무사히 전역하고 돌아온 너가 참으로 자랑스러웠었다.
못난 형을 도와 가문을 일으키겠다는 너의 충정을 매정하게 뿌리치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이 되엇구나.
어차피 홀로가는 인생
너가 연마한 태권도나 더 수련하여 후진 양성으로 국위선양이라도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만 남는 순간이다.
언젠가는 우리형제 고향으로 돌아가 농촌을 부흥시키자며 78년 문정동에 폐가를 헐어다가 밤새워 막사를 짓고 돼지를 사육하다 양돈 파동으로 귀농의 꿈이 산산 조각나기도 했었지.
외아들 황남이를 낳자마자 미숙아로 인큐베이터에서 겨우 살려낸 그 아들이 헌헌 장부가 되어 너의 긴 투병중에도 주일마다 빠지지 않고 문병한 것도 선대 효자 집안의 피가 흐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긴병에 효자 열녀 없다고 혹여 계수씨나 아들 황남 한테 좀 섭섭한 일이 있었더라도 너그럽게 용서하거라.
20년 전 좌뇌 수축증이라는 불치의 병에 걸려 투병하는 동안 이 못난 형은 명리를 탐하는 또 다른 중병에 걸려 헤매든 기간이라 더욱 가슴이 아프구나.
변명 같지만 이 형 역시 잘못된 사상에 심취 부모형제도 아랑곳 하지 않고 오직 혁명을 위해 한 목숨 바치겠다는 각오로 온 집안을 힘들게 했던 것처럼 공산혁명가들의 잘못된 애국심이 나라를 어렵게 만들 것 같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육신이라는 업의 고리를 벗어난 지금은 너도 이 형의 숭고한 뜻을 잘 것이다.
아무래도 이 형에게는 19대 선조이신 만고충신 文자 起자 할아버지의 피가 흐르고 있기 때문 일 것이다.
역대 대통령 4분을 예언한 그 유명한 설송선사께서 1987년 피닉스 백화점 파산 후 누적된 부채 수십억을 5년안에 갚는다 해서 기적 같이 갚게되었고 이 형이 주 문왕을 도운 강태공 같은 운명이라 60대 후반부터 나라를 평정한 후 70대 후반이 되어서야 산으로 간다고 했으니 내 기필코 나라를 좀 먹는 저 오랑케들을 무찌르고 청나라의 순치황제 처럼 산으로 가서 금생의 업을 소진할 작정이다.
이 형은 禪房(선방) 문고리라도 잡아본 덕분에 고난이 곧 하늘의 선물이라는 진리를 선무당 처럼 아는 고로 계란으로 바위치기의 숯한 도전과 실패 다시 일어나 불사조 처럼 고난의 늪을 헤쳐온 것만도 내 영혼의 큰 자산이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른다.
1985년 9월 30일 저녁 누님의 전화 한통화가
33년의 고행길이 될 줄이야 그 뉘가 알았겠는가?
아무리 돌이켜보아도 수도생활을 회피한 내 업보로 인해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렵고 복잡한 일을 맡아 해결하면서 인간사의 도를 닦으라는 계시가 아니엇나 싶다.
천신만고 끝에 수십억의 빚을 청산하여 160여명의 재산권을 찾아준 것은 일생일대의 보람이기도 하지만 산골 촌놈이 세상을 배우는 계기가 된 것이 더 값지다 하겠다. 상가의 완벽한 정리는 아직도 요원하지만 정녕 혼이 있다면 너도 함께 돕기를 간청하노라.
이제 이승에서의 미련도 원망도 미움도 성냄도 다 내려 놓고
구곡장천을 훨훨 날아서 천상으로 가거라.
이제 너의 고단한 육신이 홀연히 자취를 감추고 한 줌의 재만을 남기었을 뿐이니 생은 일편浮雲(부운)이라 모두가 그대처럼 이렇게 사라지는 한조각 구름이거늘 어찌 소소한 인간사에 미련이 있을 손가.
사바의 중생들은 하늘과 땅과 인간의 이치를 깨달아야 하는 우주교실의 학생이기에 모두가 구도자이고 고행자들 일 뿐이다.
성현께서 병고로서 양약을 삼으라 한 것이 헛되지 않았는지 20년 투병의 인고는 선승의 반열에 오른 것 처럼 입관전 너의 모습은 너무나 평온해 보였다.
아들 진웅스님 할배스님이신 관응 큰 스님도 천축사 무문관에서 6년 정진하여 당대의 고승대덕이 되셨듯이 너는 요양원이라는 다른 차원의 무문관에서 13년간의 고행정진도 만만치 않았슴이 분명하
다.
세상물정 잘 몰라 여기저기 투자해서 날려버린 그 많은 금전들이 네 곡간에 아직 남아 있었드라면 미련이 많아 그렇게 평온하고 가볍게 떠나지는 못했을 것이다.
더 신기한 것은 빈소를 막 차린 후 이름모를 아름다운 새가 날아와서 영정사진과 계수씨 발등에 앉았다가 방을 몇 바뀌나 돌고 날아갔는 데 영안실이 생긴 이후 처음 있는 일이라 하는구나.
아마 시류와 영합하지 않은 착한 너는 한마리의 새가되어 천국으로 날아 갔으리라.
이웃의 도움으로 성당문앞에도 가보지 않은 너가 신부님과 수녀님 그 많은 성도들의 낭랑한 찬송 축복기도 속에서 영결 미사까지 마친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사바의 중생들이 탐진치속에서 그 화려함이 만대에 이어진다 하여 그무엇이 위대하다 할 것인가?
부질없는 명리를 탐하지 않고 농부의 심정으로 묵묵히 인생이라는 사래긴 밭을 갈아온 너야말로 이 혼세의 표상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중생심으로는 참으로 슬프다!
한줌의 재가된 너의 육신의 흔적을 보관한 마루공원 산등성이는 가을빛이 저렇게 찬연한데 회색빛 한줌의 재는 왜 저렇게 어두운 그림자 뿐인가?
그러나 이형은 이제 슬픔을 거두려한다.
온 것이 아니니 간 것도 아니라는역대 조사선승들의 한결같은 법어의 의미를 이 형은 선무당처럼 알기 때문이란다.
사랑하는 동생 상열아
마지막으로 너의 이름을 부르면서 너의 안식처가 된 마루공윈을 떠나려고. 한다.당분간 산사로 들어가 마지막 너의 명복을 빌어보고자 한다.
다시는 이 생사의 고통을 되풀이하지 않는 불국정토에 태어나거라.
2018년 11월 2일
내동생 상열이가 한줌 재가 되는날 병관 법률거사 쓰다.
ㅡㅡㅡㅡㅡㅡㅡ
병관님 ㅡ
동생과의 고별사가
인생의 애환과
제행무상 제법무아의
불법을 눈물겹도록
감동있게 설하신 명문 입니다.
예로부터 부모를
여의는 것은
天亡之痛,(천망지통) 형제간에
사별하는 것은
割分之痛(활분지통)이라 했지요.
하늘을 잃는 아픔
보다 내 몸을 잘라
내는 아픔이 더
클 것입니다.
同氣인 형제간의
사별이 오히려 부모님과의 그것 보다 더 슬프고
아프다는 말입니다
심심한 위로를 드리
며 내생에서의 형제가 상봉을
기원합니다.
나무 아미타불 !
ㅡㅡㅡㅡㅡㅡ
김병관선생님
긴 글을 눈물로 다 읽었습니다.
그 와중에 이렇게 긴 글이 절절히 터져나와 받아쓰신 형제애를 읽자니 참으로 가슴 미어지네요.
고인의명복을 빕니다.
산사에 들어 몸과 마음 잘 추스리시길 발원합니다.
대전 저의 외숙모가 기침을 오래 앓다가 젊어서 돌아가셨는데 그 분
친정어머니와 시어머니에게 꿈속에 찾아가서
"나는 새가 되어 갑니다. "
라는 말을 꿈에 남겼다고 합니다.
초상을 치루고 나서 그 집 거실 석가래 아래 집을 지은 비둘기가 홀로 들어와서 살았고
비둘기를 쫒아내고 나서 집이 망해버렸지요.
외숙부도 딴 여자 만나서 차로 데이트하다가 교통사고로 60세에 아내곁으로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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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관회장님의 삶의 힘든경험의 여정은
민족을 위한 큰뜻을 이루기 위한 밑받침이 될것입니다.
가족들과의 가슴아픈 경험을 통하여 한핏줄 국민들도 현재 대가족입장입니다.
진보ㅡ보수
우파ㅡ좌파 정치적입장과 모든 이념을 떠나서
화합이루면서
사랑하며 살고싶고 소원입니다.
간절한 소원들을 인생의 선배이신 분들이
이루어질수 있도록
밑거름이 되어 이끌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ㅡ>현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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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관형님! 우선 상열형님의 영전에 명복을 빕니다. 안타깝게 먼저 고인이 된 아우를 생각하시며 지나온 삶을 반추하시는 형님의 글을 읽으니 삶이 무엇인지,부모가,형제가, 이승과 저승이 무엇인지, 소유와 무소유가 무슨차이가 있는지...많은 생각들을 하게 합니다. 저 또한 신반중학교 다닐적 고 상열이 형께서 선배로서 형으로 자전거 등교길에 동행하며 길잡이가 되어주셨던 것이 새삼 고마운 기억이었는데,살아생전 고마웠다는 말 전하지도 못했는데....형님의 애잔한 글을 읽어내려가니 감사하고 고마웠고 미안한 마음이 온통 범벅이 되는 슬픈 아침입니다. 고인이 된 상열형님께서 이제 십년을 넘긴 세월동안의 고통을 훌훌 털고 분명 병관 형님의 말씀대로 불국정토에서 새집짖고 행복하고 고통없는 새 삶을 시작하시리라 믿습니다.-김순우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