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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2. 6(월). 오전 11시. 고려성경연구소
변화산 사건
[본문] 마태복음 16:28-17:8 (막 9:1-8; 눅 9:27-36)
예수님은 열두 제자 중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어느 높은 산에 올라가셨는데, 그때 예수님의 모습이 변화되고 그 얼굴이 빛나며 그 옷이 매우 희게 변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때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님과 이야기하였다.
예수님이 올라가신 이 산은 전통적으로 '다볼산'(588m)으로 알려져 있다. 누가는 이때 예수님이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셨다고 한다(눅 9:28). 그리고 기도하실 때 예수님이 변화되시고 광채가 났다고 한다(눅 9:29). 그러면 이 변화산 사건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1. "인자가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28절)은 어느 사건을 가리키는가?
여러 견해들이 있다. 1) 변화산 사건; 2) 예수의 부활; 3) 승천; 4) 오순절 성령 강림; 5) 예루살렘 멸망; 6) 교회는 곧 하나님의 나라; 7) 마지막 날 재림 등 (cf. M. Künzi, Das Naherwartungslogion Markus 9,1 par., Tübingen, 1977). 칼빈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부활하심에서 시작하시고 그의 성령 보내심과 이적 행하심에서 더욱 충만하게 나타내신 천상적 영광의 현현”이라고 본다(마 16:28 주석 중). 판 레이우원(Van Leeuwen)은 '오순절 또는 예루살렘 멸망 또는 강력한 복음 전파'로 본다(Markus, 154). 껄러르스(Keulers)는 '예루살렘 멸망'으로 보면서 "예루살렘 멸망은 마지막 심판의 준비이기 때문에, 여기 있는 몇 사람은 예비적 심판(inleidend oordeel)을 경험할 것이다."고 한다(마 16:28 주석 중). 판 브루헌(Van Bruggen)은 '예수님의 재림 시 만물의 종말 때'로 본다(Marcus, 192).
그러나 이어서 나오는 변화산 사건으로 보는 것이 옳다(Chrysostom, Theodotus; France,Nolland 등).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예수님의 부활은 모든 사도들과 여자들과 500여 형제들이 보았다. 승천은 적어도 120명 정도의 성도들이 보았다. 오순절 성령 강림도 모든 사도들과 많은 성도들이 경험하였다. 예루살렘 멸망도 수많은 사람들이 경험하였으며 마지막 재림은 그때 살아 있는 세상의 모든 사람이 경험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여기 서 있는 사람들 중에 ... 볼 자들도 있다."는 말씀에 맞지 않다. 그러나 변화산 사건은 열두 제자 중에 세 명만 경험하였으니 이 말씀에 맞다.
2) 공관복음서 모두 예수의 이 말씀 다음에 변화산 사건이 나온다. "엿새 후에"(팔일 쯤 후에)라는 정확한 시기 특정은 이 변화산 사건이 앞의 말씀에 연결된다는 것을 시사한다(France, Nolland).
3) 마 16:28의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는 말씀은 막 9:1의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자들도 있느니라."는 말씀에 비추어 볼 때, 하나님 나라의 임함을 가리킨다. 28절의 "그 왕권을 가지고"는 헬라어를 직역하면 "그의 나라 가운데"이다. 즉, 예수님이 그의 나라 곧 하나님의 나라 가운데 오시는 것을 말한다. 막 9:1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능력)으로 임하는 것을(-> 임한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고 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물체적으로'가 아니라 '능력으로' 임하는 것(임한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곧 변화산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성령의 능력으로 임한 사건을 가리킨다.
2. 예수님의 얼굴이 변형되시고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것은 예수님의 얼굴 모습이 구조적으로 또는 외형이 변형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동일한 얼굴 모습이지만 하나님의 영광으로 빛난 것을 말한다(Keulers). 이것은 곧 예수님이 성령으로 충만하여서 영광으로빛나는 것을 말한다. 이는 곧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보여 준다.
모세가 시내산에 머물다가 내려왔을 때 그 얼굴에 광채가 나서 이스라엘 사람이 두려워하여 얼굴에 수건을 썼다고 한다(출 34:29-35). 이것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교제하고 기도하였을 때 성령으로 충만하였음을 나타낸다.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하였음으로 말미암아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나나 ..."(출 34:29). "여호와와 말하였다"는 것은 하나님과 대화하고 기도하였다는 것을 말한다. 모세가 장막에 들어갔다가 나올 때에도 얼굴에 광채가 나서 수건으로 가리었다고 한다(출 34:34-35). 즉,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나님과 교통할 때 모세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얼굴에 광채가 난 것이다.
로마서 14:17에 보면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에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특징, 본질은 그런 물질적인 것이나 일상적인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는 말이다. '의'는 죄의 반대이며 죄가 없는 상태(그리스도의 의로 무장한 상태)이며, '평강'은 하나님이 의인(그리스도의 의를 받은 자들)에게 주시는 복(하나님과 화목한 상태, 마음의 평강)이며, '희락'은 평강이 풍성하여 주 안에서 기뻐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의'와 '평강'과 '희락'은 "성령 안에서" 주어진다. 곧, 성령에 의해, 성령의 능력으로, 성령이 지배하실 때 주어진다. 따라서 성령 충만할 때(한국의 부흥회 때처럼 잘못된 성령 충만이 아니라 말씀 안에서 올바른 성령 충만일 때) 하나님 나라의 모습의 본질을 발견할 수 있다. 이 땅에서 우리는 참된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 나라의 본질을 어느 정도, 부분적으로 맛볼 수 있다. 이것은 미래의 천국을 이 땅에서 미리 조금 맛보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미래의 하나님 나라의 특징을 이 땅에서 변화산 사건을 통해 미리 조금 맛보게 보여 주신 것이다. 모든 제자들에게가 아니라 세 명의 제자들에게만 미리 보게 해 주신 것 이다.
요한계시록 21장에 보면, 성령이 요한을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서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여 주시는데(10절), 이것은 곧 영원한 천국, 완전한 천국의 모습이다. 그런데 그 성에 "하나님의 영광이 있어 ..."라고 말한다(11절). '영광'(독싸)의 원래 뜻은 '빛나는 빛, 비추이는 빛'이다. 즉, 성령이 충만한(그야말로 100% 온전히 충만한) 천국은 하나님의 영광의 밝게 빛난다는 의미이다. 성령이 충만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빛나는 것이다.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변형되고 그 얼굴이 빛이 나고 그 옷이 하얗게 빛나게 된 것은 그 변화산에서 예수님이 성령으로 충만하시고(물론 그 전에도 충만하셨지만 지금은 더욱 더 충만 충만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으로 밝게 빛나신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는 곧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으로 충만(충만, 충만)한 곳이며 하나님의 영광이 밝게 빛나는 곳임을, 사람들뿐만 아니라 천국의 모든 물체들에게까지 하나님의 영광이 빛난다는 것을 말한다.
사도 바울은 모세의 얼굴에 난 광채와 그것을 가리기 위해 쓴 수건에 대해 말하면서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8) 우리가 주의 영광을 보면(주와 교통하면, 기도와 말씀과 찬송과 사랑 가운데)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으로 이르는데(주의 영광이 빛나게 되는데), 이는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 한다. 곧,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으로 변화되어 간다는 것을 말한다. '성령'은 만물을 지으시고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자이시며, 우리를 변화시키시고 영화롭게 하시는 분이시다. 특히 우리가 기도할 때, 모세처럼 오래도록(그냥 시간만 많이 하는 것이 아니라 참된 마음으로, 순수한 마음으로 진지하게 오랫동안) 기도할 때 성령의 주관과 다스림을 받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하나님의 영광으로 (부분적이나마) 빛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원리는 예수님은 변화산 사건에서 세 제자들에게 보여 주신 것이다.
3. 그러면 베드로가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이것은, 일반적으로 교회에서 많이 설교하듯이, 베드로가 이 세상에서 자기의 사명을 망각하고 자기만 좋은 곳에 편히 살겠다는 이기적인 태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베드로는 여기서 자기를 위해 초막을 짓자는 말은 전혀 하지 않았다. 오직 "주를 위하여 하나, 모세를 위하여 하나, 엘리야를 위하여 하나" 짓겠다는 것뿐이다. 이기적인 태도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그러면 무엇인가? 원어에 보면 여기에(4절) "좋사오니"(칼론 에스틴)가 제일 먼저 나온다. 그러니 베드로의 말의 핵심은 '좋다'(칼론)는 것이다. 이는 곧 '하나님 나라의 좋음', '천국의 좋음'을 말한 것이다. 베드로는 피곤하여 졸다가 문득 깨어서 자기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 밝은 영광이 빛나고 예수께서 모세와 엘리야와 더불어 말씀을 나누시고 하는 모습들을 보고서 자기도 모르게(눅 9:33)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라고 말을 내뱉은 것이다. 베드로는 순진한 사람이라서, 자기의 감정이나 생각을 감출 줄을 모르고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드러낸 것이다. 따라서 이 말의 핵심은 지금 이 순간, 여기 있는 것이 "좋습니다. 너무 좋습니다. 영원히 머무르고 싶습니다" 하는 마음의 솔직한 표현인 것이다. 이는 곧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의 좋음을, 천국의 아름다움을 고백한 것이다. 성령으로 충만하고 하나님의 영광이 빛날 때 그 천국은 얼마나 아름답고 좋은지를 자기도 모르게 탄성을 지르듯이 고백한 것이다.
4. 그러면 "그들이 몹시 무서워하였다"는 말과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는 어떻게 조화될 수 있는가?
마가복음 9:6에 보면, 베드로가 초막 셋을 짓자고 말한 것에 대해 "이는 그들이 몹시 무서워하므로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알지 못함이더라."고 한다. 그러면 베드로의 "여기 있는 것이 좋다"는 말과 "몹시 무서워하였다"는 말은 어떻게 조화될 수 있는가?
하나님의 영광으로 너무 아름다우면, 그것이 우리 인간에게는 두려움이 될 수 있다. 너무나 깨끗하고 아름다운 천국의 영광을 보면, 그 앞에 선 우리 인간의 죄악됨 때문에 엄숙한 두려움, 거룩한 두려움이 임하게 된다. 갈릴리 바다에서 예수님의 능력을 체험한 베드로는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하였다(눅 5:8). 왜 그랬을까? 예수님이 싫어서였을까? 정말로 예수님이 떠나시기를 바라서였을까? 아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했을 때 베드로는 자신의 죄인됨이 분명히 드러남을 온 몸으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본 이사야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고 하지 않았던가?(사 6:5)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두려워하는 것)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이 둘은 같이 간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한 천국을 경험하게 된 죄 많은 인간은 거룩한 두려움으로 떨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때 베드로의 심정은 좋음과 두려움으로 뒤범벅되어 있었을 것이다. 아니, 거룩하고 아름다운 두려움으로 말미암아 그 천국의 좋음에 흠뻑 빠져 있었다고 할 수 있다.
5. 그러면 이 본문에서 설교의 핵심은 어디에 두어야 할 것인가?
이상에서 논한 것들이 설교의 핵심을 차지하면 안 된다. 성경 해석과 설교는 다르다. 설교는 오늘날 그 자리에 있는 성도들이게 주는 메시지가 있어야 한다. 성도의 삶을 충분히 고려하고 삶에 적용되는 말씀이라야 한다. 그렇다면 이상에서 다룬 것들은 설교자가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 알고 있어야 하는 사전 지식 또는 본문 이해에 해당되고, 설교를 위한 포인트는 따로 생각해야 한다. 이것은 설교자마다 청중에 따라 다르게 잡을 수도 있는데, 필자는 다음 몇 가지를 생각해 보았다.
1) 예수의 하나님 아들 되심(5절)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기뻐한) 자니"가 이 변화산 사건의 정점이 될 것이다. 모든 변화와 이적은 결국 예수의 하나님 아들 되심을 증거하는 것이다.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와 말씀한 내용도 누가복음에 의하면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이다(눅 9:31). 곧, 예수께서 고난받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것에 대해 말한 것이다. 예수님이 누구시며 무슨 일을 하실 것인가가 초점이다. 예수님은 율법과 선지자에 의해 증거를 받으신 분이다(롬 3:21). 모세와 엘리야는 율법과 선지자의 대표로 나타나서 예수를 증거한 것이다.
2)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5하)
결국 제자들에게 남은 것은 그의 말 곧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결국 예수님께 순종하는 것이 중요하고 그것이 우리에게 남아서 계속 요구하는 것이다. 체험은 그때로서 잠깐 지나간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베드로후서에서 이 변화산 사건의 체험에 대해 말하면서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다고 한다(벧후 1:19).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런 신비적 체험보다 더 확실하고 견고한 것이다. 체험은 지나고 나면 의심될 수도 있고 흔들릴 수도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변함없이, 언제나 그 자리에, 객관적으로 있다. 따라서 이 말씀에 우리가 주의하고 이 말씀을 붙드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도 중요하지만 거기에 체험이 있으면 더 좋다고 말하면 안 된다. 성경은 반대로 말한다. 물론 체험도 있으면 좋지만(그러나 그것이 하나님께 온 것인지, 마귀에게 온 것인지, 아니면 그냥 자기 생각인지 개꿈인지 잘 구별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더 확실하고 더 분명하고 더 좋다고 말해야 한다.
우리 신자는 결국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하나님의 말씀 중에서 어려운 말씀을 풀려고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무엇을, 어떻게 하라, 하지 말라고 명령하는 계명이 중요하다. 이 계명, 명령은 분명하고 단순하고 누구나 다 이해할 수 있다. 다만 그것을 행하는 것이 중요하다. 성경의 요약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인데, 이것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특히 이웃 사랑은 말은 쉽지만 실천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그렇지만 행하려고 애써야 하는 것이다.
3) 그래도 앞에서 살펴본 바 변화산 사건의 내용, 특히 하나님 나라의 본질에 대해 설교에서도 뭔가 전하고 싶은 마음이 들 수 있다. 이 경우엔 하나님 나라의 본질(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에 초점을 두어 설명할 수도 있고, 성령의 역사와 성령 충만에 초점을 두어 설명할 수도 있고, 아니면 기도할 때 이런 성령의 역사와 영광스런 변화가 있었다는 것에 초점을 두어(누가복음) 설명하고 적용할 수도 있다. 그럴 때에는 고린도후서 3:18과 출애굽기 34:29-35을 연결시켜서 설명하면 좋을 것이다. 한 가지 주의할 점은 자칫하면 이 설명에 너무 많은 시간을 할애하면 적용 부분이 약해질 수 있다는 점이다. 성경 강해나 성경 공부 시간에는 이 변화산 사건 본문을 자세히 설명할 수 있으나, 설교에서는 설명(지식)에 너무 많은 비중을 할애하면 적용이 약해질 위험성이 있으니 적절히 시간 안배를 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