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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친히 드리신 기도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요 17:1).
우리는 산상수훈과 누가복음 11장에 기록되어 있는 기도를 주님의 기도라고 부르는 데 익숙해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주님이 제자들과 신자들에게 일종의 모범으로 주신 기도문입니다. 그렇지만 진정 우리 주님의 기도라고 일컬어질 수 있는 것은 사실은 이 부분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주님이 아버지께 친히 개인적인 기도를 올리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주님이 이 기도를 드리게 된 상황은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는 요한복음 14장, 15장. 16장에 기록되어 있는 위대하고 강력한 말씀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신자들에게 장차 임할 성령에 대해서, 성령께서 그들 속에서 하실 수 있는 일들에 대해서, 그리고 성령 강림의 모든 결과들에 대해서 말씀하신 후에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기 시작하셨습니다.
17세기의 어느 지혜로운 설교자가 이 기도에 대한 영원한 진리를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이는 지구상에서 드려졌던 모든 기도 중에 가장 위대한 기도이며, 지구상에서 선포되었던 모든 설교 중에 가장 위대한 설교에 뒤이어 나온 것이다." 어떻게 보면 여기에 아무것도 더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요한복음 14, 15, 16장에 이 설교가 진행되다가 갑자기 설교 말미에 우리 주님이 기도를 올리십니다. 이 기도는 이 세상 어디에서 발견될 수 있는 진술보다도, 심지어 성경 자체에 기록된 수많은 진술 중에서도 가장 풍요롭고 숭고한 진술에 속합니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이 본문을 두렵고 떨리는 자세로 설교하여, 그 원래의 위대함과 가치를 조금도 감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기도는 너무나 신성하기 때문에, 그리고 이 기도에 대해 설교하는 것은 우리 주님의 마음 그 자체를 들여다보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 기도를 가지고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그저 읽는 일이라고 느꼈던 사람들이 과거에 있었습니다. 17세기에 독일에서 살았던 슈타인 (Stein: 모라비안 형제들이 주축이 되어 일어났던 위대한 경건주의 운동의 지도자)이라는 분은 요한복음 17장에 대해 감히 설교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고 말하였는데, 지금까지 그와 견해를 같이했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제 생각에는 그런 태도가 잘못된 것 같습니다. 제가 주장하고 싶은 바는, 우리 주님이 이 기도를 소리내어 하셨을 때에는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잘 듣고 연구하고, 무엇보다 그 교훈을 이해할 수 있게끔 하셨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하나님께 단순한 기도를 드린 것이 아니라, 큰소리로 기도를 하심으로써 제자들이 듣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 기도가 기록으로 보존될 수 있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여기에는 예수님이 제자들로 하여금 이 기도를 듣게 하시고 이렇게 기록으로 남기도록 배려하신 자상함도 들어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교회사를 들여다볼 때 이 기도가 매우 특별한 방법으로 성령님의 쓰임을 받아왔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성도들이 어려움을 당할 때, 특별히 죽음을 코앞에 두었을 때, 이 기도가 그들을 지탱해 주는 힘이 되었습니다. 어쩌면 이에 대한 가장 주목할 만한 예는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의 위대한 지도자이며 강력한 하나님의 사람이었던 존 녹스(John Knox)의 경우일 것입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존 녹스는 생을 마감하면서 죽음이 임박했다는 것을 느꼈을 때 자기 아내에게 요한복음 17장을 읽어달라고 부탁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부인이 이 놀라운 본문을 읽어주고 있는 동안 영원한 안식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이 본문이 우리에게 어떤 풍성한 은혜를 제공하는지 깨닫는 분에게는 이것이 전혀 놀랄 일이 못 됩니다.
자, 이에 대한 여러분의 각별한 주목을 촉구합니다. 왜냐하면 저는 우리의 문제들 중에 절반은 성경에서 정확히 제시되고 있는 것들을 우리가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생긴다는 확신이 점점 더 강하게 들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모든 근심과 걱정, 우리의 모든 불안과 주저, 그리고 그렇게도 많은 영적 생활의 불행 등이 사실은 우리를 위해 제공된 것을 우리가 깨닫지 못한다는 사실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두 번째 서신에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이 우리에게 주어졌다고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벧후 1:3). 이 신약성경의 서신서들에 계속해서 나오는 주장에 따르면, 우리의 머리로 생각해 낼 수 있는 어떤 상태나 우리가 처할 수 있는 어떤 영적 상태에 대해서도 이미 그 대비책이 다 마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에 관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그 충만한 승리의 삶을 알아야 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여기 이 땅에서도 영광을 체험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이런 질문이 떠오릅니다. 그런데 왜 우리 모두가 이 위대한 구원을 영광스러워하지는 못하고 있을까요? 왜 우리 모두가 즐거워하지는 않고 있을까요? 우리가 그렇게 자주 변명조가 되거나 패배자의 인상을 보이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왜 우리는 자주 세상과 미래에 대하여 심한 두려움에 빠지고 하나님의 뜻과 교회에 대하여 우려를 하게 될까요? 왜 우리는 자주 이런 병적인 우려에 빠져 종종 무가치한 것들에 광적으로 의지하게 되는 걸까요? 저는 지금 분명히 말씀 드립니다. 이런 모든 현상들은 우리를 위해 제공된 것들을 우리가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좀더 쉽게 말씀 드리자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깨닫지 못하고, 그 기업을 상속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에게는 변명의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앞에서도 계속 말씀 드린 바와 같이, 모든 것이 이미 여기에 우리에게 주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요한복음 17장뿐이라고 해도, 우리의 영적인 삶을 지지하는 데는 충분하고도 남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은 요한복음 17장에서 우리가 우주적으로 어떤 위치에 있는지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우리에게 중요하고 가치 있는 모든 것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안목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기도를 살펴보고 주님이 말씀하고자 하시는 바를 깊이 생각해보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것입니다.
자, 배경은 이렇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떠나셔야 할 때가 임박했고, 그들이 얼마나 고민에 빠져 있는지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들의 고민은 숨길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설교를 시작하셨습니다. 그들이 근심하게 된 원인은 예수님이 이제 그들을 떠날 것이라고 방금 전에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제자들에게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3년 동안 그분을 따라다녔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었고, 그분이 행하시는 기적들을 목격하였으며, 그분을 의지하게 되었으며, 예수님은 그들에게 어떤 권능들을 주셨습니다. 어떤 문제나 어려움이 생겼을 때에는 즉시 예수님께 도움을 청하거나 질문을 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답변을 예비하고 계셨으며 인내심도 참 많으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놀라운 3년이 지나고 이 모든 친밀하고 풍성한 교제를 나눈 후에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제 그들을 떠날 때가 되었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들은 완전히 풀이 죽었으며 당혹스러워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바라보신 예수님은 그 마음을 느끼실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을 읽고 그들의 영혼을 이해하시면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말씀을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 놀라운 교리를 설명하십니다. 즉 예수님이 떠나시는 것이 그들에게 더 나은 일인데, 이는 예수님이 그들을 위해 처소를 예비하러 가시므로, 그들은 결국 더 나쁜 상태가 아니라 더 좋은 상태로 들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은 그들에게 다른 보혜사를 보내셔서 그들 안에 거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이 오셔서 성령으로 그들 안에 내주(內住)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내주라는 비상한 교리인데, 성부와 성자께서 신자의 삶 속에 거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축복되고 놀라운 교리를 상세히 설명하십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끝내지 않으십니다. 이제 예수님은 그들을 위해 기도하십니다. 예수님이 이 땅을 떠나 아버지와 함께 거하러 가신 후에도 계속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실 것임을 알려 주기 위함입니다. 1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교리와 교훈을 주시지 않고, 예수님이 그들을 아버지께 맡겨드리고 있는 모습을 보여 주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이 결코 홀로 남게 되지 않을 것이며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그들을 돌보시리라는 것을 알려 주고자 하십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위대한 중보자가 되실 것이며, 실로 성부께서 친히 그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이 기도를 큰소리로 하여 제자들로 하여금 듣게 하신 목적입니다. 예수님이 아직 그들과 함께 있을 때 예수님이 그들에게 관심을 갖고 계시며 비록 그들을 몸으로는 떠난다고 하더라도 계속 관심을 가질 것임을 알려 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기도의 본질입니다. 이제 이 기도를 전체적으로 살펴보십시다. 나중에 좀더 자세히 살펴보며 그 풍성하고 영광스럽고 가격을 따질 수 없이 귀한 교훈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여기에서 몇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자주 본 장을 읽으셨습니까? 지금까지 본장은 여러분에게 어떤 가치가 있었습니까? 여러분은 얼마나 자주 그 풍성한 보화를 탐구해 보셨습니까? 고민에 빠졌을 때 얼마나 자주 이 말씀을 의지하셨습니까? 존 녹스가 임종 때 이 구절을 읽어 달라고 한 그 느낌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제가 보기에는 많은 분들이 이 위대한 기도를, 말하자면 일종의 가짜 겸손을 내세워 한쪽으로 밀어둔 것 같습니다. 우리의 가장 큰 위험은-실로 제가 가장 큰 위험이라고 느끼는 것은-성경을 볼 때 자세히 들여다보며 모든 구절에 귀를 기울이고 모든 말씀을 붙잡고 모든 진술에 관해 질문을 하는 방식이 아니라 그냥 대충 읽는 것입니다. 본 장의 한 마디 한 마디에 심오하고 풍성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것을 찾아보려는 수고가 꼭 필요합니다.
그러면 우리 그 일을 함께 해봅시다. 먼저 이 기도에 대한 전반적인 면을 보면서 표면에서 분명히 나타나는 분명한 교훈들을 찾아봅시다. 제생각에 우리가 맨 먼저 배워야 할 점은 기도하는 방법입니다. 이 본문은 기도의 모범이 아닙니까? 소위 주기도문이 모범적 기도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우리 주님이 친히 이렇게 기도하셨고 따라서 이것은 모범 또는 실제적인 예라는 점에서 모범적 기도인 것입니다. 올바른 기도 방법은 다름아닌 주님이 기도하신 방법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항상 확신해도 좋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주님의 삶 전체가 기도의 삶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많은 시간을 기도로 보내셨으며,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이제 우리 모두가 이 문제에 대한 지도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기도가 단순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시대의 위대한 성도들은 이구동성으로 우리가 배워야 할 것들 중에서 가장 배우기 어려운 것이 기도하는 법이라고 하였습니다. 만약 기도하기가 어려워서 곤란을 겪고 있는 신자가 계시다면 낙담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성도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제가 걱정하는 사람은 기도에 전혀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에게는 틀림없이 뭔가 문제가 있습니다. 기도는 성도가 성취할 수 있는 것 중 최고 수준의 것입니다. 그것은 그저 우연히 '기도문을 외는 것' (saying a prayer)이 아닙니다. 이 얼마나 끔찍한 표현입니까? 기도문을 외다니요? 이것은 기도와는 매우 다른 것입니다. 기도문을 읽거나 외우는 것은 비교적 쉽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우리는 주님이 기도하시는 모습을 봅니다.
예수님은 여러 가지 간구의 내용을 상당히 논리적인 순서로 배열하십니다. 우리 주님은 많은 간구를 두서없이 아뢰고 있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명확한 배열이 있고 매우 정확한 순서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의 훈련을 일정량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 항상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잠시 마음을 정돈하고 정확히 우리가 이제 하게 될 일에 대해 묵상하는 일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기도의 대상이신 그분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그 깨달음과 더불어 우리의 기도에 필연적인 순서가 생겨납니다. 이 순서는 이 위대한 기도를 분석해 가는 가운데 분명히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17장은 우리가 마땅히 기도해야 하는 방법에 대한 훌륭한 실례(實例)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것은 기도를 시작하시는 이분이 누구인지를 우리에게 즉시 알려줍니다. 우리가 지금 함께 생각해 보는 바로 이 기도보다 우리의 복되신 주님의 인격을 더 잘 보여 주는 곳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그분은 그분의 아버지께 이렇게 말합니다.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예수님은 창세 전에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그 영광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즉 창세 전에, 영원 전부터 아버지와 함께 영광을 누리셨던 신인(神人) 앞에 있음을 대번에 깨닫게 됩니다. 이기도를 계속 공부하는 가운데 우리 주요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관한 가장 풍요롭고 심오한 교리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가끔씩 강조한 요점이지만, 성경이 진리를 제시하는 방식은 참으로 놀라울 정도로 다양합니다. 성경에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관한 진리가 객관적 교리로 분명히 선언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교리는 자주 실제적 예들과 실제 행동 속에서, 그리고 그분이 자신에 대해 친히 하시는 말씀 속에서, 또는 그분이 가정하시는 것들 속에서 완벽한 교훈으로 주어집니다. 이 기도를 함께 연구해 나가면서 우리는 이복된 분에 관한 이 풍성한 교리를 대면하게 됩니다. 오, 하나님의 아들이 이 시간의 세계 속으로 내려오셨다는 사실-지금 우리가 여기에서 성육신의 모든 신비와 영광을, 동정녀 탄생과 하나님의 아들의 낮아지심에 대한 모든 신비와 영광을 대면하고 있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붙잡고 다시 깨달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참으로 놀라운 것은 아버지께 기도하고 계신 이 분이 아버지와 동등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본성을 취하셨습니다. 육신을 입고 오셨습니다. 죄악된 육체의 모양으로, 사람으로 사셨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는 친히 기도하고 계십니다. 사실 우리는 다른 곳에서 주님이 그의 아버지께 강력한 울음과 눈물로 외치시는 모습을 봅니다. 정말 생각할수록 신기하고 놀라운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구속하시기 위하여 육신을 입고 내려오셨으며, 여기에서 그 마음을 활짝 여시고 우리에 대한 놀라운 관심과, 우리에 대한 놀라운 사랑을 보여 주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곧 이분의 인격에 관한 이 풍성한 교리를 살펴볼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매우 구체적으로 주님이 드리는 기도 속에서 주님이 세상에 오신 전체 이유를 발견합니다. 주님은 특별한 임무를 부여받았으며, 그것을 이루기 위해 오셨으며, 참으로 영광스럽게도 그것을 이루셨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분의 기도를 듣고 있노라면, 우리는 그분이 그렇게 하시는 이유를 꿰뚫어볼 수 있는 눈을 얻게 됩니다. 구원의 계획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또 오늘 우리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이 기억하기를 중단해 버린 한 가지가 나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손실인지 모릅니다. 복음이 왕성하게 전해지던 위대한 시대에 우리의 조상들은 '구원의 계획'에 대해 자주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그것에 대해 거의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주관적이라, 그리고 우리는 특정한 이익들에 너무나 관심이 많기 때문에, 잠시 물러서서 구원 계획의 장엄한 전체를 보는 일을 좀처럼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 모든 것을 발견합니다. 주님이 창세 전에 영원히 있었던 그 영광에 대해 말씀하실 때 그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분이 우리를 한 걸음 한 걸음 인도하시며 그 영광 속으로 다시 이끌어 주고 계시는 것을 보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 기도를 듣거나 읽을 때마다 영광 중에 시작하고 영광 중에 마치며, 또 그 사이에 십자가의 깊은 비천함과 수치로 내려갔다가 다시 부활로 오르는 것을 체험할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이 다 여기에 있습니다. 즉 우리와 관련된 위대한 계획, 하나님이 그의 아들에게 특별한 구원의 대상으로 주신 특정한 사람들과 관련된 하나님의 이 위대한 목적, 그리고 그들을 그 궁극적 완성으로 이끌어주시기 위하여 그들을 위해 그 아들이 행해야 할 모든 것들이 다 여기에 들어 있습니다.
저는 그것보다 더 고무적이고 신나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이 시간의 세상 속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장엄한 계획과 목적의 일부라고 느끼는 것보다 우리에게 더 큰 안전의 근거는 없습니다. 이 중 어느 것도 우연한 것이 아닙니다. 우발적으로 된 것은 전혀 없습니다.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미래의 그 어떤 것도 이 계획을 방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 친구 여러분, 만일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신은 창세 전에 이미 하나님의 흥미와 관심의 대상이었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이 모든 것들은 영원 속에서, 시간이 시작되기 전에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기억해야만 할 것은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도 그 원래의 계획을 조금도 변경시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성경 속에서 그렇게도 연속적으로 발견하는 주장입니다. 우리는 지치지 않고 이 위대한 말씀들을 인용해야만 합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여러분이 만일 이 점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의심이 든 적이 있으시다면, 이 기도를 읽으시고 주님이 여기에서 보여 주시는 그 안전을 똑똑히 확인 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주님이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을 살펴보십시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다른 누구도, 우리 스스로도 결코 할 수 없을 몇 가지 일을 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앞의 몇 장에서 이 점에 대하여 그 제자들에게 말씀해 오셨는데, 여기에서 요약을 하고 계십니다.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하신 일은 율법 자체와 율법의 모든 요구들을 만족시키신 일입니다.
저는 사람들이 율법을 언급하지 않고서 어떻게 그리스도와 그의 삶과 죽음을 바라보며 그에 대해 설교할 수 있는지가 참 의아합니다. 하나님의 율법이 충족되지 않는다면 구원은 없습니다. 율법은 우리를 반대합니다. 율법은 거기에 서서 우리에게 완전하고 절대적인 순종을 요구합니다. 만일 우리가 한 가지 면에서라도 실패한다면 율법은 우리를 죽이겠다고 위협합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완성하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아직도 우리 죄의 저주 안에 있을 것입니다. 잃어버린 영혼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그 일을 끝내셨습니다. 우리의 전과가 지워졌습니다. 율법이 충족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가 없습니다. 그것을 아십니까? 그것으로 인해 즐거워하십니까? 당신은 아우구스투스 토플래디(Augustus Toplady: 1740-1778. 찬송가 188,503장의 작시자)와 함께 서서 이렇게 노래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율법과 하나님에 대한 공포가
내게는 아무 상관이 없네
내구주의 순종과 보혈이
내 모든 죄를 감춰주시네
주님이 실제로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에 여기에서 이 모든 것을 예견하고 계시다는 것이 이 얼마나 놀라운 사실입니까! 주님은 자기가 할 일이 무엇인지 정확히 아십니다. 그 점에 대해 불확실한 것이 전혀 없습니다. 주님은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었습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이미 완성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완성된 구원을 선포합니다. 우리가 할 일은 그것을 받는 일 외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거기에 우리가 부가해야 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제시해야 할 어떤 선행이나 공로도 없습니다. 그 모든 것은 다 그리스도 안에, 오직 그분 안에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이 기도를 더 깊이 상고하는 가운데 그 놀라운 사실을 더 분명히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이 세상의 인생 속에서도 우리에게 가능한 몇 가지가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여러분께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이 복된 교리에 대해서 우리는 즐거워해야 마땅합니다. 성령의 모든 열매들이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우리의 삶 속에서 명백히 드러나야 합니다. 이 모든 것들이 우리의 현재 소유물이 되어야 합니다. 이 교리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은 구원받기를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때는 좋았다가 어떤 때는 나쁜 미스터리들 속에서 항상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즐거워하는 사람입니다. 바울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빌 4:4). 그렇지만 여러분은 즐거워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즐거워할 수 있는 가능성을 깨닫고 있습니까? 만일 여러분이 이 기도가 말하고 있는 바를 파악하기만 한다면, 이 교훈을 이해하기만 한다면, 이 세상의 어려움 속에서도, 지옥의 위협 속에서도 미소를 지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즐거워하기를 원하시며 하나님이 그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이 충만함을 알기를 원하십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인 형제 자매들이여! 부끄러운 줄을 아십시오. 우리가 직접 거기에 참여해야 합니다. 그 안에서 온전히 즐거워해야 합니다!
이 기도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이 놀라운 가능성에 관한 것을 보여 주시고 나서, 이미 제가 앞에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이 세상에서 우리가 누리는 안전과 능력의 근거를 보여 주십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위해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20절). 여러분은 이것보다 더 위로가 되는 것을 상상해 낼 수 있습니까? 여러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기도를 하고 계셨을 때 바로 당신을 위해 기도하고 계셨다는 것을 깨닫습니까?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위해 기도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오늘날 누군가가 기도해 주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이 많습니다. 믿음 있는 부모가 방탕한 자식을 위해 낙심하지 않고 오랜 세월 동안 기도를 멈추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스도께로 돌아온 사람들도 많습니다.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으셔서 그들이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다. 사람들이 당신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보다 더 큰 위안이 되는 것이 있습니까? 저는 제 일과 목회를 감당하는 가운데 사람들이 저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보다 더 큰 용기를 주는 것에 대해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모든 능력의 원천이신 하나님께로 가서 저를 능력으로 채워달라고 부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여러분이 성도의 기도를 신뢰한다면, 하나님의 아들이 당신을 위해 드리는 기도는 얼마나 더 신뢰를 해야 하겠습니까? 여기에서 주님은 우리를 위해 기도하셨으며, 우리를 위해 계속 기도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 주십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놀라운 사실은 주님이기도를 통하여 우리를 하나님의 손에 맡기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와 지키었나이다. 그 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저희로 내 기쁨을 저희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11-13절).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아버지여, 그들을 당신께 되돌려 드리오니 그들을 보전하소서"라고 기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우리를 하나님의 안전한 보호 속으로 넣어주셨다는 것과 우리가 하나님의 안전한 보호 속에 있다는 이 놀라운 진리를 어떻게 해서든 확실히 붙잡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 주님은 이 교리를 설명하는 일을 결코 싫증내지 않으셨습니다. 예를 들면 산상수훈에서 주님이 사실 계속 말씀하고 계시는 바는 이런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들아, 하나님이 네 아버지이신 것을 깨닫기만 한다면, 하나님이 너에 대해 어떤 관심을 갖고 계신지를 깨닫기만 한다면, 새들과 꽃들에 관한 교훈을 가슴에 새기기만 한다면 얼마나 좋겠느냐! 그것들에 대해 하나님이 관심을 갖고 계신 것을 보라. 그렇다면 너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은 얼마나 훨씬 더 크겠느냐, 이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리고 여기 주님의 마지막 기도에서 주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보호에 맡기시며 "아버지여, 이들을 보전하소서"라고 부탁하십니다. 바로 이 순간에도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지켜보시며 돌아보시며 보전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오, 실로 놀라운 위로와 격려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이 기도를 통해서 배우는 것은 우리가 이 세상과 어떤 관계에 있으며, 그 속에서 어떤 사명을 갖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우리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 좋은 소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기 위함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18절). 주님은 이 세상에 있는 그들에게 메시지를 남기셨습니다. 하나님이 전에 그를 보내신 것처럼 주님도 어떤 특정한 일을 위하여 그들을 보내고 계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이 기도의 표면에 부각되는 몇 가지 것들을 급히 살펴보았습니다. 이 기도는 자연스럽게 몇 부분으로 나눠집니다. 1-5절에서 우리 주님은 주로 자신을 위해서, 기도하십니다. 그리고 6-19절에서 님은 특별히 자기 주변에 있던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십니다. 그리고 20-26절에서 주님은 모든 시대에 모든 곳에 있는 보편적 교회를 위해 기도하십니다. 제가 방금 말씀 드린 것에는 논리적 구분이 있습니다. 주님은 찬양과 경배로 시작하시고, 자신을 위해 기도하신 후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시고, 마지막으로 제자들의 증거를 통해서 믿게 될 모든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이 기도는 모든 시대와 모든 기독교 교회 전체를 통할하는 위대한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이 본문을 연구할 때 우리는 그것을 매우 세심하게 살펴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 주님이 성부 하나님께 어떻게 나아가고 계신지를 잘 봐야 합니다.
우리가 항상 확신해야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확신하셨던 것들입니다. 첫째로 주님은 "아버지여"라고 부르십니다. 주님은 아버지에 대해 의심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여섯 번 부르십니다. 주님은 그 관계를 아십니다. 영원 전부터 주님은 아버지와 하나셨습니다. 하나님은 복된 삼위이신 성부, 성자, 성령에서 성부에 해당하신다는 의미에서 그의 아버지이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예수님이 이제 사람이 되셨고 따라서 하나님을 그의 아버지로 우러러본다는 의미에서 그의 아버지이십니다. 또 성자께서는 자기 목숨을 바쳐 구원한 수많은 형제들의 대변자가 되었다는 점에서 하나님이 그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는 수많은 형제들 중 처음 나신 자이므로, 자녀들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과 갖는 관계의 의미에서 하나님이 그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러나 주님이 성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만 부르지는 않고 있음을 잘 보세요. 11절에 보면 '거룩하신 아버지'라고 부르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시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십니까? 그분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이므로, 그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아야만 합니다. 우리는 항상 존경심과 경건한 두려움으로 그분께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사르는 불이시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 주님이 아버지와 하나이셨지만, 비록 성부와 성자 사이에 어떤 막힌 것도 없었지만, 그리고 주님이 죄를 지은 적이 결코 없기 때문에 그 자신의 죄사함을 구할 필요가 전혀 없었지만, 그래도 주님은 하나님을 거룩하신 아버지라고 부르십니다. 심지어 우리의 복되신 주님까지도 그분을 거룩하신 아버지라고 부르셨다는 것을 우리는 왜 그리 자주 잊어버리나요?
마지막으로 주님은 하나님을 '의로우신 아버지'라고 부르십니다. 25절에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고 저희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삽나이다." 이것은 놀라운 사상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의 속성과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드러내고 계십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지금 이렇게 말씀하고계신 것입니다. "저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은 아버지께서 다 이루실 줄을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이 사람들에 관하여 제게 어떤 약속을 하셨습니다. 저는 이 사람들을 위해서 그 일을 하였습니다. 저는 아버지께서 그 모든 약속을 성취하시는 일에 있어서 추호도 불가능이나 실패가 없을 것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의로우신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에서 우리가 다른 것은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이것만큼은 우리에게 분명히 기억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즉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우리는 '우리 아버지께'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위대하시고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아버지이십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셨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아버지이시므로 그 앞에서는 무가치한 어떤 것도 거론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앞에 무가치한 소욕을 내보이거나 이기적인 욕망을 표현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우리 하나님은 의로우신 아버지요. 신실하시고 공의로우신 아버지이십니다. 우리가 우리 죄를 솔직히 고백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게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아버지 앞에 나가실 때 여러분의 죄가 생각나서 의심과 주저가 생긴다면, 하나님 아버지는 의로우시다는 사실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죄를 완전히 용서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의를 기억하시고, 하나님은 친히 하신 모든 약속을 반드시 분명하게 이루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오, 우리 주님이 이 기도를 제자들이 들을 수 있게 큰소리로 드리신 것이 얼마나 하나님께 감사한 일입니까! 또한 그 기도가 이렇게 성경에 기록된 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우리 함께 이런 것들을 깊이 연구해 보십시다. 깊이 묵상해 보십시다. 저는 실로 이것보다 더 풍성한 다른 것을 알지 못합니다. 이제 우리 함께 그 속으로 들어가 봅시다. 이 풍성함을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동안에 우리를 감싸고 있는 어떤 절대적인 것들이 있음을 깨닫기 바랍니다. 우리가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히 13:5)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깨닫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