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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30~2019.1.16 기간 초계정씨 함안유은후손종중 가족사 대화록으로 댓글로 주고 받았다. 대화자는 숙질간으로 정봉영과 장조카 정병권이다.
1950~1970년대 이야기기는 오래되어 기억을 더듬어 기술했으나 약간의 틀림도 있을 수 있다. 틀림이 발견될 시는 주변의 생존한 분의 의견을 청취하여 정정할 예정이다.
정병권의 본문 글과 댓글은 카페에 기 존재하기에 여기서는 정봉영 댓글과 답글만 게재한다.
세월이 흘러서 연로한 형수님이나 누님이 작고하면, 예로 들어 결혼 나이 등도 청취할 수 없다. 시대풍속도 변하여 3포세대(연애포기, 결혼포기, 출산포기)와 옛날의 조혼(早婚) 다산(多産) 풍습과 대비되는 시대상을 '註'를 달아 추록할 예정이다.
※보충할 내용에 '註'를 달되, 댓글과 답댓글 원본 원형을 보존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1》~《31》번까지 나간다.
☆☆☆
《1》
《''큰아들(정영조)는 자식 이면서도 나머지 아들(동생)을 키우고 보살피는 무거운 책임을 아버지(정영조)의 어깨에 짊어지게 하였습니다.'' 》
상기 내용은 사실이 아니다.
수정을 요한다.
정광식(鄭光植, 족보명 ; 정현락:鄭鉉洛, 父) 1912년생으로
정영조(장남) 1929년생, 안맹수(큰자부) 1928년생으로 부자간 17세 차이로 조혼풍습으로 16세(정영조, 함안중 3년), 17세(안맹수) 결혼(1944년)시켰다. 시집은 1년 묵혀서(친정에서) 1945년에 왔다.
註 ; 유은(柳隱) 정광식은 장자를 장가보내 며느리를 33살에 보았다. 요즈음 나이로는 장가도 안 간 시기였다. 현대에는 기네스북에 오를 정도이다.
장자 정영조는 1951.6.18(23세) 부산철도경찰대근무, 1953.10.15(25세) 경상남도경찰국 북부산경찰서근무로 부산으로 분가(이주)하여 살았다. 함안 본가에는 1944(결혼)~1951년(분가)로 6년간만 같이 살았다.(옛날에는 결혼 후 친정에서 1년 묵힘)
사료는 두루뭉실이 아니고 연대표 근거해야 한다.
《2》
《''사실 아들을 많이 낳았다고 큰자랑을 하고 있었지만 정갑영삼촌 아래로는 자식을 낳지않고 큰아들과 나머지 자식을 생각하여 자제 하였어야 했습니다.''》
상기 내용도 당시 시대상황 역사 인식이 부족하다.
그 시대는 태평양전쟁, 징용징병, 해방(1945), 6.25전쟁(1950) 등으로 사람(남자)이 많이 희생되어 다산(多産)이 가문의 영광이고 큰 자랑이었다. 해열제, 감기약도 없던 시대로 피임약은 산아제한 시대인 1970년대에도 없었다. 정관수술(남자), 복강경수술(여자)이 그때 최초로 시술되었다.
1950(6.25전쟁)~1975(산아제한 이전) 25년 시대로 출산이 장려되던 시대이다. 바르게 기술해야 한다.
《3》
《''정말 대책없는 행동으로 생각됩니다.
부모자식이 한집에 살면서 부모도
큰자식도 동시에 아이를 낳아키우니, 아래 삼촌은 숙질간이 서로 경쟁하는 우스광스러운 집안으로 된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베풀고, 공부시키고, 결혼시켜 살림까지 내주면서 논까지 각자의 몫으로 증여해 주었는데 이제와서 동생들이 큰형님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배신하고 아무 소용없는 시골 골짜기 땅을 탐내어 못땐 추태를 부렸습니다.''》
병권의 상기 기술도 내용도 완전 틀리다.(맞지않다)
정영조(장남) 6년만에 부산 분가(나이가 어리고, 6.25전쟁통으로 6년이 되었다) 1951년 23살 때다.
정영만(차남) 2년만에 집지어 분가
註 ; 정영만(1933년생) 20세, 이을순(1935년생) 18세 결혼하여 이을순은 1년 묵혀서 19세에 시집왔다. 정영만 29세 조졸(早卒)로 이을순은 그때 27세로 수절하여 현재 85세로 생존 건강하다.(전화로 직접 확인함)
정을남(여) 19세에 결혼 출가.
註 ; 정을남(1935년생), 안정숙(1930년생) 24세 장가 옴(1953년) 안정숙 자형은 정영조 형님보다 1살 아래다.
정삼영(3남) 3년만에 집지어 분가
註 ; 정삼영(1937년생) 24세로 군복무 병장 때 특별 휴가받아 결혼(1960) 조정자(1940년생) 21세로 친정에서 1년 묵혀 다음해 22세 신행(시집 옴)
정갑영(4남) 3년만에 부산 분가
註 ; 정갑영 27세, 허남미 23세 결혼(1966년)
정창영(5남) 반년(6개월) 만에 부산 분가
註 ; 정창영 26세, 박영숙 21세 결혼(1968.4.8)
정필남(2녀) 호적부 상으로는 1946.10.26 출생, 5살 때 '1950.8.5 상오 11시 본적지에서 사망'(홍역)으로 기재
정봉영(6남) 아내(황복련) 바로 분가했으나 3년간 주말 부부 생활함(법수중 3년간)
註 ; 정봉영 27세, 황복련 25세 결혼(1975.12.25)
父 정유은, 母 조복희 동갑으로 당시 연세 64세, 큰형님 정영조 47세였다.
정태영(7남, 막내) 3년만에 분가
註 ; 정태영 26세, 조호자 24세 결혼(1977.3.15), 父 정유은, 母 조복희 당시 66세, 큰형님 정영조 49세로 형제는 많아도 조혼으로 젊은 나이에 자녀 성혼(成婚)을 끝 마쳤다.
길게 잡아 3년 이내로 분가시켰다.
♧♧♧
註 ; 상기 8남매 결혼과 분가에서 내 아버지의 역할과 직분으로 이루어졌다. 큰형님은 장자로서 조력(助力 ; 힘을 써 도와줌)이지, 부모처럼 주최 주관자는 아니다.
나는 창원황씨 처가 3남 5녀의 첫째 맏이 큰딸에 장가들어 아래로 처남 3명, 처제 4명의 성혼시에는 나 대(능력) 대로 축의하고, '심산회(心山會 ; '심산'은 장인 황덕수의 아호이다)를 만들어 친목하고 있지만, 나는 조력으로 그쳤을 뿐이다. 큰형님의 子 조카들이 ''자기 아버지가 조부모를 대신하여 다 했다''는 말은 도가 지나도 한참 지나쳤다. 내용이 오도되었다.
《4》
《''자주 앞집에 셋째아들 정삼영삼촌과 충돌이 있었고 특히 정삼영 삼촌은 술을 좋아하시고 특히 술을 드시면 할아버지와 자주 다투었고, 한때는 정삼영삼촌이 낫을들고 할아버지를 위협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상기 내용도 일부는 사실이 아니다.
술을 좋아하신 것은 사실이나 ''낫을 들고 늙으신 아버지를 위협했다''는 누가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나 와전이다.
농촌에서는 작업중이라 낫, 삽, 호미, 가꾸리 등을 들고서 얘기하는 경우가 많다.
정삼영 형님은 술을 좋아하긴 했어도 주사를 부린 분이 아니고, 경제적인 돈의 뒷받침은 못했을지라도(아이들 5남매 교육비 관계로) 부모님에 대한 인륜도덕과 효행의 근본을 아시는 분이다.
농촌에서 4남1녀를 모두 대학을 보내 결혼시키고 분가했다. 카페는 전국에서 들어와서 읽기에 다 아는 사실이지만 언급한다. 육사 출신 직업군인 2명, 공무원 1명, 공사(公社) 1명에다, 그 중에는 박사 2명도 배출했다.
《5》
8남매의 맏이인 정영조형님은 이승만 자유당시대 부산에서 1951.6.18부터 경찰에 입문 1956.12.15까지 부평파출소 차석(국제시장 관할) 근무로 속된 말로 끌발이 좋았고, 그후 북부산, 동래, 부산진경찰서 등에서 형사반장을 했고, 1960.4.19 이후 창녕경찰서(유어지서장)으로 전보, 1961. 6.23 전역했고, 함안에 귀향 약 2년 농사일하다가 정병태(1962.10.1생) 태어난 이듬해인 1963년 10월 경부터는 부산 수정동에서 쌀장사를 했기에 정영조형님과 정삼영 형님은 계속 형제간의 우애가 돈독했다.
다만 부산에서 쌀장사가 잘되어 여유가 있는 부자로 봤는데, 동생(정삼영)의 3가지 진지한 부탁을 들어주지 않은 적이 있었다.
♧♧♧
註<1> ; 1956.1.23~ 명(命) 부평파출소 근무(국제시장 관할) 시기는 이승만 자유당시대로 물자가 부족한 최빈국으로 미제 물품을 알아주었다. 아버지(정현락)가 부산에서 가져온 미제 모기방장 3개, 미제 야전침대, 야전삽, 작은 문수 중고 군화(워크) 등이었다. 내가 초등 2학년(1957) 시절 부산에서 가져온 발보다 더 큰 헌군화를 한동안 신고 다니기도 했다. 다시 아이들은 모두 검정고무신을 신던 시대였다.
《6》
하나는 유현리 평촌마을 가로등 부탁건이다. 다른 이에 2개를 부탁하여 세웠다. 1개은 할아버지(정광식) 고종사촌 동생 부산 윤점도(子 ; 윤성환)가 세웠고, 1개는 정삼영 고종사촌 동생 자동차정비회사를 하는 마산 서수원이 세워주었다.
그후 평촌마을 진입 시멘트 포장공사 때 정삼영과 이판기는 길이 250~300m의 확장되는 면적 논 수용을 무상 제공하되, 첫 진입로인 신촌 육맹수 논 30~50여 평을 사들이는 대금 당시 화폐 50만원 부탁 건이 좌절된 적이 있다.
또 하나는 '첨정 수재공 정구룡 기적비'를 세울 때 50만원 협찬을 거절하였다. 여기서는 정기영(상춘아지매) 50만원, 정영갑(子 정병삼 이름으로) 50만원, 정재영(월촌 거주) 50만원으로 충당되었다.
상기 3개의 부탁 건 좌절로 형제간에 돈독하던 우애가 이후 나빠져서 술을 좋아하는 분이라, 술을 자시면 정영조 형님과 자주 언쟁을 했다.
언쟁한 내용은 수회차 들어서 알지만, 내용기술을 생략한다. 사촌들을 배려해서다.
할아버지(정광식)에게 대든 것은 절대 아니다. 형님에게 그렇게 하지말라고 꾸중하는 할아버지에게 상기 건에 대하여 잘 못한 큰아들을 두둔하는 할아버지와 다툰 것이 와전된 것임을 밝혀둔다. 할아버지는 심한 꾸중을 했지만, 마음속으로 술취한 정삼영의 말이 옳았다고 보았을 것으로 유추된다.
♧♧♧
註 <1> ; 정유은 할아버지는 1912년 임자생(壬子生)으로 불교계의 성철스님과 갑장으로 한일합방(1910) 2년 후에 태어난 조선시대 말기 사람이다.
조선시대의 가부장적 제도에 익숙하여 형이 잘 못한다 하여 욕(욕도 '곰' 지칭 정도이다)을 하며 대드는 것을 금기시 했다. 그래서 정삼영 형님을 도로 꾸중하다보니, 장자를 두둔하는 아버지와의 언쟁이 와전된 것이다. 할아버지는 이렇게 농부로 살아도 인품이 있었다.
註<2> ; 논어[공자]의 [자로]편에
''아버지는 자식을 위하여 숨겨주고, 자식은 아버지를 위하여 숨겨주니 곧음(정직:正直)이란 바로 이 가운데 있는 것이다'' 이렇게 장자(큰아들)의 잘 못을 숨겨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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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지금도 할아버지,할머니 제사를 23년째
장손자(정병권)가 공손히 모시고 있습니다''》
아래 내용과 일치하지 않아서 묻는다?
사람은 평민, 소시민으로 살지란도 근본을 지니고 살아야 한다. 기준이 있는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 한다.
유현리 대지 3개, 답 1개가 상속받은 내 땅이니, 할아버지 정광식(족보명 ; 정현락)의 아호 유은(柳隱)이 들어간 유은재(柳隱齋 ; '재'란 집이란 뜻), 골짝의 공동 위토와 산판을 표시하는 초계정씨 유은후손종중(草溪鄭氏 柳隱後孫宗中) 자연석비(표지석) 2개가 보기 싫으니 당장(즉시) 뽑아서 옮겨 달라고 요청 중이다.
'초계정씨 유은후손종중'은 정유은(정광식:정현락 ; 같은 명칭이다)의 후손 7남1녀, 정영조, 정영만, 정을남, 정삼영, 정갑영, 정창영, 정봉영, 정태영 후손으로 아들과 딸을 가리지 않는 후손 종중(문중)을 말한다.
장자 정영조에서 막내 정태영까지 포함된 후손이다. 정병권 장조카는 정영조 장자의 아들이다??
《8》
《''정봉영 삼촌에게~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손익을 계산하여 영악한 마음과 욕심을 가지고 타산적인 행동을 하고, 어릴 때나, 지금이나, 눈치와 잔머리를 굴리면서 자기 중심적 내로남불 식 사고방식으로 다른사람을 불편하게 하고 달을 가르키며 달이야기를 하는데 손까락이 잘 생겼다,못 생겼다 엉뚱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상기 말도 주객이 전도된 감이 있다.
여태까지의 지나온 언행으로 볼때, 상기 내용은 혹시 ''정병권의 생활 가치관''??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니었는지? '마음거울'을 보며 되돌아보기 바란다.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 고 했다.
사람이란 누구나 성인 공자, 석가모니, 그리스도처럼 살 수는 없다. 사람마다 다 허물을 지니고 산다. 남의 허물을 덮어줄 수 있는 인격이 있고 없고의 차이이다. 그런 인생을 살아야 한다. 남을 까발리는 처세는 멀리해야 한다. 내 거울부터 보아야 한다.
민초, 백성, 서민, 하민, 범민, 궁민, 평민 등 보통사람으로 살지라도, 인간적, 정신적, 긍정적으로 기준잡힌 삶의 행로를 걷도록 노력해야 한다.
국호 대한(大韓)에 사는 백성이라면 딱 1가지 대의(大義)가 뭔지를 알고 산다면 그 사람은 부귀(富貴)가 있고 없고를 떠나서 대한민국 국민으로 한평생을 성공으로 살은 사람이다.
소시민 일지라도 대의를 항상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존경해야 한다.
대의(大義)란, 사람으로서 마땅히 행해야 할 큰(大) 도리이다.
'내로남불'은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란 뜻으로 종합편성채널(종편) TV 등의 시사 프로에서 언론 패널들이 주로 사용하는 속어(俗語)로 여기서는 해당 언어가 아니다.
할아버지를 기리는 본가(생가지) '유은재(柳隱齋)'와 '초계정씨 함안유은후손종중(초계정씨 유은후손종중(草溪鄭氏 咸安柳隱後孫宗中)' 표지석 입석(立石) 취지와는 무관한 어휘이다.
《9》
《''부모와 형제간을 위해 뼈빠지게 고생한 큰형님을 자신의 아버지(할아버지, 정광식)와 비교
하면서 큰형님을 헌신적인 삶을 평가 절하 하고, 폄하하고, 부모님(정영조)께 받은 진정한 사랑과 도움을 저버리고 자신의 이익을 쫓아 살아온 자''》
상기 내용도 사실이 아니다. 그렇게 말한 적이 없다. 주객이 전도되었다.
정병권(67) 보다 10살 연배인 숙부되는 작은아버지 정창영(77)에게 막말과 실언과 결례를 했다. 주고 받은 카톡(정병권) 문자에 따르면,
《''누가 감히 나에게 사촌 어쩌구, 왕따, 자기네들이 한 게 뭐 있다고?
2대에 걸처 상속된 사유 재산권에 할아버지 핑게대며 아무도 나에게 그러한 어리석은 말을 할 사람도 없고, 자격도 없습니다.
아버지가 상속받고, 아버지 아들인 내가 아버지의 유언 받들어 상속된 사유재산에 조상의 이름을 들추며 못할 짓을 해놓고서 오히려 나에게 훈계 하다니,
아버지(정영조)에게 받은 은혜도 모르는 배은 망덕도 유분수지 어따데고 말도 엉터리 협박을 하십니까~
아버지 돌아가시고 나니까 또 다시 못땐(못된) 협작들을 하며 불법적인 ''돌맹이''를 집앞에 세워 내가 살고 있는 집에 앞에 비석을 세우고 뭐라고요? 보기 좋다고요? 보기 좋으면 삼촌집 앞에 돌맹이 가져다 세우세요~''》
조카 정병권(67)이 10세나 위인 4째 숙부 정창영(77) 형님에게 내뱉은 불손한 언사는 단적으로 인륜도덕과 예의 법도를 찾아볼 수 없는 정신감정 수준이 아닌가 여겨진다.
《10》
할아버지 정광식(족보명 ; 정현락) 7남1녀(실제는 7남 2녀)을 낳아 농부로 열심히 일하여 많은 농토를 남겼다. 옛날 남강댐이 준공(1969.10.7)되기 전에는 남강이 범람하면 침수되는 벌이었다.
아호 유은(柳隱)이 들어간 유은재(柳隱齋 ; '재'란 집이란 뜻), 골짝의 공동 위토와 산판을 표시하는 초계정씨 유은후손종중(草溪鄭氏 柳隱後孫宗中) 자연석비(표지석) 2개를 장손자로서 '돌맹이'라 지칭하며 보기 싫다고 당장(즉시) 뽑아서 옮겨 달라고 요구 중이다. 어떻게 할아버지를 생각하여 세운 기념석비인데 ''돌맹이''로 보이는지 묻는다?
《11》
상기 정병권 글에 대하여 맞은 이야기도 있지만, 틀린 이야기가 많아 내용을 바로잡아 주어야 하나,
2019년 연말연시로 너무 바빠서 상기 댓글 13개를 2019.,1.3 와서야 달게 되었다.
상기 내 댓글 내용에 틀린 점에 대한 이의가 있다면, 그에 대한 답변은 오늘 오전 창원 모임을 다녀와서 재 기술할 예정이다.
끝장 토론을 할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음을 밝혀둔다.
현재 전국의 독자 184명이 들어와서 읽고 있다.
《12》
《''할아버지는1995년3월에 돌아가셨습니다. 부산에서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시기 직전에 급히 시골로 모셔가서 영민 하셨습니다.''》
정창영 형님의 증언에 의하여 바르게 기록한다.
《아버지(정현락)께서 ''내가 죽어도 고향(시골)에 가서
죽어야 하니, 함안 집으로 속히 데려가다오'' 해서 회사(울주군 삼남면 홍덕섬유) 출근했다가 긴급히 연락받아 10시 경 부산 수정동에 도착하여 큰형님(정영조), 정갑영형님과 내 차로 모시고 함안에 도착, 12시 지나서 오후 3시경 운명하시고,
그때 갑영형님 만이 곁에서 임종(84세를 일기로)하셨다'' 부모님의 임종을 곁에서 지켜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나도(정창영) 잠시 자리를 비켰는데(화장실 가는 사이에도) 어느 순간에 운명하신다. 부모님의 임종을 앞둔 분들에게 꼭 전하는 경험 이야기이다 》
《13》
유현 거주 동생 정태영의 추가 기억 증언에 의하면,
《''부산 수정동에서 1995.3.
2 함안으로 급히 모셔서 본가 안채여 모셨는데, 당시 사랑채 대문쪽의 등나무(정봉영이 1968년 진주농대 임업묘포장에서 가져와 식재, 현재는 벌목으로 없음)가 27년간 너무 무성히 자라서 사랑채 기와지붕을 다 덮을 정도였기에, 누가 '지붕 아래로 내려오는 넝쿨을 좀 잘라야 한다'하여 정창영 형님은 그걸 정리하다가 곁에서 아버지 임종을 못 보았고, 마침 그때 잠시 신촌마을에서 올라왔던 집사람(동생 정태영 처) 조호자(제수씨)가 우연인지는 몰라도 시아버지의 고종명 마지막 임종 순간을 곁에서 같이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임종을 지켜본 이야기다.
《14》
병권의 본문 내용 중
다음,
《''1990년 할머니(조복희)가 갑자기 뇌출혈로 먼저 돌아가셨습니다.
할머니가 시골부엌에서 넘어지시고 3일을 혼수상태로 버티시다 돌아가셨습니다.''》
상기 기술도 틀리기에 바로잡는다.
1990년이 아니고, 조복희 할머니는(1912년 생으로 할아버지 정현락:정광식과 동갑) 1993.5.2. 82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하루전에 승표집 옆의 터밭에서 냉이(겨울이나 이른 초봄에는 나물) 잡초를 호미로 한나절 뽑으시고, 다음날 새벽 화장실에서 뇌출혈로 쓰러져서 아무도 몰랐는데 아침에 관동형수가 우연히 들려서 발견하여 안방에 모신 이후 의식을 잃은 후 10일을 고생하시다 돌아가셨다.
《15》
북한이 보유한 핵은 주변국 중국, 러시아, 한국, 일본, 핵우산의 미국과 관련이다.
이 핵을 어디다 사용하겠나?
가까운 한국에 대한 위협 보유용이다.
국제적으로 정상적인 나라가 되려면 비핵화가 선행 되어야 하듯이,
할아버지를 기리는 자연석비를 두고 '돌맹이'라 비하 지칭하는 장손도 북한의 비핵화처럼 정상적인 행동을 취해야 한다는 취지로 비유법으로 말한 것이다.
비핵화를 안 하면 국제적으로 정상국가 대우를 못 받듯이,
'돌맹이'(수십번 반복했다)란 말을 취하하지 않으면 장손자로 대우 인정받기 어렵다는 비유어이다.
《16》
현재 골짝의 묘지와 앞의 묵은 전답(멧돼지로 인하여 휴경)과 산을 '초계정씨 유은후손종중'으로 귀속시켰기에 망정이지(정삼영, 정갑영, 정창영 형님의 제안과 주장으로),
장자, 장손 개인 명의로 내려갔다면 지금 정병권의 하는 처신으로 보아 사단이 날뻔했다. 어찌 천만다행이 아니라 하겠는가?
현재 구(도랑)의 둑과 폐도된 소로 사이 국가 땅에 위치하는 할아버지를 기리는 유은재(柳隱齋)와 초계정씨 유은후손종중(草溪鄭氏 柳隱後孫宗中) 기념석비를 보기싫다고 옮기라는(시비거는) 장손자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 경항각지의 양식있는 독자들의 판단을 기다린다.
《17》
장손이라면 나라땅에 세웠네요? 할아버지로 물러받은 우리땅(내땅)에 세워도 되는데 그렇게 했네요?
좌우지간 돈이 많이 들었지요? 저가 먼저 앞서서 그런 일을 해야 되는데 조상에 대하여 면목이 없습니다.
길이 보존되도록 주변을 정리하여 잘 보존하도록 합시다.
하는 것이 순리라고 본다.
함안군청에 민원을 제기하겠다는 말 자체가 67세 나이의 장손자(도회지에서 성장했다기로)로서 할 말인가? 철이 든 사람인지(사리 판단) 아닌지? 묻는다?
경향각지 현명한 제현의 질타를 기다린다.
내가 10~11시에 애청하는 KBS 가요무대 프로를 본 후 밤 늦게 결언을 적는다.
누가 옳고 거르고는 들어오는 독자들과 관련 있는 후손들이 평가할 것이다.
임진왜란 선무원종일등공신 첨정 수재공 정구룡 장군(임란 말기 1598.9.28 순절)을 제향하는 경충재 담벽 앞의 경충재(景忠齋) 석비도 2017.10.10 자비로 세웠다.
《18》
《''자신의 이름 석자를 후세에 알려 자랑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후안무치한 행동입니다.''》
조카의 이 말도 삼촌(숙부)에 대한 적절한 표현이 아니다. 취소하기를 주문한다.
후안무치(厚顔無恥)란? 얼굴이 두껍고 부끄러움이 없다라는 뜻으로, 뻔뻔스러워 부끄러워할 줄 모름을 일컫는다.
자유한국당을 탈당한 서청원이 2018.12.4 경, 자기가 주군으로 모셨던 박근혜 탄핵에 가담한 김무성을 겨냥 ''탄핵해놓고 朴 석방하라니... 후안무치'' 언론보도를 본 것 같은 데, 상기 한자어는 내게 적절한 지칭이 아니다.
차라리 직설로 공명심(功名心)이라면 몰라도...?
단문의 글이라도 어휘 선택이 중요하다.
《19》
《''할아버지, 아버지(정영조)가 동네 어른들과 함께 건축한 재실입니다''》
''정유은 아버지(할아버지), 정삼영 형님이 주동이 되어 정삼도(정영철 부), 정영곤(정병열 부), 정조규(정헌화 부), 읿본 정화수(정인영 부) 등의 조력으로 1975년 3월에 준공되었다.
정영조 형님은 동네 입구 '첨정 수재 정공 휘 구룡 기적비'에 이름 등재가 빠졌음을 밝혀둔다.
비석 측면 명단을 한번 확인하기 바란다.
세상 만사를 부정적 사고로 보는 습성에서 탈출하여 살기를 주문한다.
가정의 부자지간 교육에서도 적용된다.
《20》
경충재는 1975년 3월 준공(정영조 형님 47세 때)
수재공 비석은 1984년 건립(정영조 형님56 세 때)
옛말에 ''사람은 이름 석자를 남기고 호랑이는 가죽(호피)를 남긴다''는 말을 아는가?
독(좋은 말로는 성실 근면)하게 살아 2남 3녀에게 상속 많이 해 본들, 이름 석자 못 남기는 정영조 큰형님을 반면교사로 삼아 내가 고희(古稀 ; 70세)인 2018년 앞두고, 2017.10.10~2018.11.18 기간에 옛날 종중 재정이 빈약하여 목재가 불실한 경충재 재실에 뭔가 뜻있는 일을 해야 하겠다고 작심하여 420년 역사(1598년)의 종중인 '초계정씨 함안종중'과 23년 역사(1995년) 아버지 종중인 '초계정씨 함안유은후손종중'를 위하여 표지석을 세우게 되었다.
아들 2놈이 출세는 아직 크게 못해도 '孝' 의 근본을 알고, 세대차이에도 불구하고 부자지간에 대화의 소통이 되고, 가정이 화목하기에, 칠순을 바라보면서 아버지의 해외여행 경비로 300만원(집당 150만)를 모아주건 데, 해외 여행을 생략하고 내가 더 염출하여 합천 황매산과 김해 불모산에서 자연석을 구하여 세운 것이다.
기부, 협찬이란 돈이 있다고 하는 것이 아니고 마음에서 울어나야 한다.
제는 못하면서 좋은 일을 두고 비비꼬며 비난하는 자는 사람이 설 익은 자이다.
''뒤쪽에서 비난하지 말고 한 번 해 보라지~!!''라는 말을 남긴다.
《21》
경충재에는 2개의 표지석을, 아버지 종중에는 3개의 표지석을 세웠다.
경충재 표지석 후면 하단은 가로 세로 30cm×20cm의 세운이의 돌판 기명은 이렇다.
《''宣武原從一等功臣 僉正 壽齋公 鄭九龍 景忠齋
十三代孫 鄭奉永 敬竪 2017.10.10''》
한글세대를 위하여
《''선무원종일등공신 첨정 수재공 정구룡 경충재
13대손 정봉영 경수 2018.10.10''》번역이다.
경수(敬竪)란 '공경하는 마음으로 세우다'이다.
어떤이는 근수(謹竪), 근립(謹立) 즉, '삼가하여 세우다' 용어를 쓰기도 하나,
여기서는 임진왜란 때 토적 중 1598.9.28 장렬히 순절한 충신의 재실이기에 지위를 높여서 '경수'라고 했다.
뭐가 잘 못 되었다는 말인가?
《22》
《''삼촌이 비난한 종손정일권이
독단으로 세운 정구룡장군의 2분 배위와 자(子 ; 정설과 배위) 큰손자(정이황과 2분 배위)를 분묘 7기를 이장한 자연장 산소에 종손 정병동(정일권)이라고 단독으로 멋데로 올린것을 보고 쌍놈이라 욕했습니다.''》
상기 말 하나는 쓸만 한 지적이다.
상기는 3년 동안 종중을 농단한 사이비 3인방(정일권, 정재영, 정해영) 두고 내가 한 말이다.
비석 내용이 완전 엉터리 쌍놈 짓을 했기에 종중 돈의 여력이 되는대로 비신을 뽑아내고 다시 교체할 예정이다.
비석의 잘 못을 최초로 발견한 사람이 나다. 모두가 예사로 여기니 종중의 수치다.
《23》
꼭 세나 대를 표기하여 후손이 알아보기 쉽게 하려면 시조 홍문공 광유후 정배걸로 부터 해당 선조의 세나 대를 표기하는 방법은 있을 수 있다.
시조 광유후 홍문공 정배걸로 부터 수재공 정구룡(2 배위)는 15세손이고,
정설(배위)는 16세손, 정이황(2 배위)는 17세손이 된다.
그렇게도 하지 않았다. 조상을 정일권으로 부터 댓수를 정해 아랫 후손으로 만들어 놓았다.
비석의 표기가 421년 大선조님을 정일권의 후손으로 만들어 놓았다.
종중 농단의 사이비 3인방으로 인하여 쌍놈비가 되었다.
종손이란 자(놈)가 예법도 모르는 무식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비신을 교체해야 하는 이유다.
《24》
421년 전의 선무원종일등공신 수재공 정구룡의 배위 진양정씨와 인천이씨 2기,
정설과 배위 2기,
정이황과 2배위 3기 등
합 7기의 공동선조는 정일권 단독의 선조가 아니다. 그런데 나라(창원시)로 부터 받은 윗대 선조 보상금 24,025,300원이 제 돈인양 단독으로 제 이름 정병동(정일권)만 명기했다.
종중에는 어른이 있고 항렬의 위계(상, 하)가 있다. 정일권 개인 돈 출연이 아니다.
내가 경충재에 세운 표지석은 단독 출연 협찬 기증이다.
단독 이름이라도 내용이 판이하게 다르다.
정병권의 혼동은 잘 못 되어도 크게 잘 못된 것이다. 속된 말로 똥 오줌 가리기다.
《25》
종중에 인물이 없다 그리 똑똑한데 좀 나서서 정일권이 잘 못 된 것 좀 지적해라.
정일권이란 놈은 저거 5대조 정연민과 배위 2기 분묘 보상금 600만원을 수령하고서 뒤로 제끼고,
421년 대선조인 선무원종일등공신 정구룡 배위 정경부인 진양정씨, 인천이씨와 9대나 낮은 정일권이 5대조 정연민을 동급으로 나란히 표기한 쌍놈의 비석이다.
종중의 수치가 돠는 비석이다.
종중의 기둥 역할을 수행하는 나를 두고 칭찬은 인색하고, 아녀자나 소인배처럼 말꼬리나 잡고 늘어지는 형태를 계속 보인다.
내가 상대를 안하면 되나 세상 만사를 부정적으로 보고 사는 조카를 한 번 깨우치려 노력 중이다.
대의(大義)를 위하여 나서주기 바란다.
정일권의 5대조 분묘보상금은 옛 종중보고서(2016.11.13) 다시 확인하니, 600만원이 아니고, 4,557,100원이다. 이 금액을 뒤로 빼돌리고 9대 위의 윗선조에 휘(이름)를 병기했다. 공무원했다는 자가 그렇다.
윗대 선조에 대한 불충, 불효, 모독, 결례이다. 정일권 5대조 휘는 삭제할 것이다.
종종 재정이 확충되면 비신을 뽑아내어 파기하고 윗대도 3개로 분리할 예정이다. 이 사실을 영구히 기록으로 남긴다.
《26》
정병권의 사고방식은 개인주의, 내 중심주의로 의타주의, 공헌심 내지 공명심을 찾아볼 수 없다.
국가와 사회를 위하여 이바지 하는 사람도 많은데, 종중을 위하는 것은 내가 1993.10.23 종중을 설립한 의무감 때믄이다.
나는 15년 전부터 TV 시청도 드라마는 사절이다.
15년째 EBS의 세계테마기행, 한국기행, 세계견문록 아틀라스, KBS의 걸어서 세계속으로, 스페셜, 다큐 등을 애청한다.
15년 동안 세계를 공부하다보니, 아이들이 효심으로 주는 여행비로 종중을 위하여 한 가지 표적을 남기게 된 것이다.
칭찬에 인색한 사람은 아무 쓸모짝이 없는 사람이 된다.
조카는 그런 류의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내가 점심 약속이 있어 나간다.
《27》
《''정일권이란 쌍놈을 추천하여 총무로 삼촌이 임명하였습니다.''》
나이 67세로 벌써 갔다 하네?
내가 총무로 임명한 것이 아니고, 속칭 사이비 3인방이 된 정재영, 정해영이 정일권을 총무로 임명했다.
정일권의 6대조 정동우가 종손 노릇하려 대가 끊어진 13촌숙 정인한에게 족보상 양자를 달았다.
정일권은 그 후손이다. 족보상으로 종손이기에 교육청 산하 초등교 행정실장(7급)을 하기에 그것도 공직이라 묘사 때마다 초헌관으로 우대해 주었는데,
분묘보상금이 종손 명의로 신청 청구되는 현행법을 악용하여 사이비 3인방의 일원이 되어 엉터리 비석을 세우고 절에다 300만원을 시주하는 등 분묘보상금 2400만원 농단 사건이다.
《28》
정일권이 정년퇴임 2개월을 앞두고 있었기에 내가 경남교육청 감사실에 직통 전화하여 비위사실을 고지했으나, 정식 형사고발 절차를 거친 죄명 결과가 나와야 징계 처분을 할 수 있다는 답변이었다.
단, 당사자에게 내용의 진의를 파악하겠다는 답변을 받았다(감사 주무관 성명을 묻고)
즉시 조치가 하달되어 '도둑놈이 제 발 저린다'고 정년퇴임 2달을 앞두고 감사관실의 전화로 조마조마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대외적으로 이런 일에 나서는 대의(大義)는 못하고, '안방 뒷구석 구들방쟁'이가 되어 이야기나 찾아서 듣는 소일꺼리에서 탈피하기를 바란다.
현장의 당사자 정면에서 정의(正義)를 말하는 사람이 되기를 주문한다.
《29》
장손(長孫)이란
한집안에서 맏이가 되는 후손 즉 ‘맏손자’로 4대조인 고조 이하에서 보통 통칭되는 용어이다.
대문중에서는 장손이라 부르지 않고 종손(宗孫)이라 부른다.
정일권은 종손으로 대우했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정재영(초등출신)이 해본다 하여 넘겼는데(재실 투표행위로) 정재영이 임명했다.
나는 당시 대표자로 총무없이 이사회를 통하여 동촌리 선산 보상금 151,966,200원을 반대를 무릅쓰고 강력히 추진 창원시 네스트오피스텔 2개 1014호, 918호를 매입 집행했다.
절반 잔여금액을 남겼더라면 사이비들이 회의비, 식대, 수당 등으로 이리 저리 소진했을 거다.
그 후 분묘보상금 간여시기는 사이비 3인방 때다.
39사단 선산 편입 함안군 군북면 동촌리 산104 보상금 151,966,200원에서 양도소득세(국세) 11.591,090원 완납 후 잔액 140, 375, 110원으로 창원 상남동 중심 상업지구 분수광장 옆의 네스트빌딩 오피스텔 2개(개당 7천만원 꼴)을 매입했다.
강력 추진으로 종중 자금의 허실이 없었으니, 나의 작지만 큰 공로라 하겠다.
사이비 3인방이 이 건을 이유로 묘사 후 경충재 투표 사건(2013.11.17)을 자행했다.
《30》
《''그러나 쌍방 막 고소,고발하고 개싸움해도 전혀 시정되지도 않고,성처만 남고, 결론은 아무것도 없고, 만날때 마다 개싸움은 진행되지만 똥냄새만 풍길뿐 고쳐지지도 않습니다.
똥냄새 맡기 싫으면 양아치가 지랄 하는곳을 피하는수 밖에 없습니다.
경충종중의 수준 입니다''》
상기 표현도 적절치 않다. 정치인이 국회에서 맨날 싸운다고 이민가야 하겠다고 내가 살고 있는 내나라, 내국민, 내조국을 상기와 같이 욕하는 사람이 많다.
내 얼굴에 침 뱉기다. 내종중, 내가정도 마찬가지다.
현재는 사이비 3인방에서 종권이 넘어와 정병열이 대표자를 맡아 총무 정노영과 함께 종중을 정상으로 꾸려가고 있다.
함안에서 사이비 3인방은 동조자 4인(정영상은 작고)을 끌어들여 이사회를 한답시고 수당, 식대 등을 지출하며 15여 회 이상을 한 결과물이 엉터리 비석 사건이다.
현재 정병열과 정노영은 종중 재정의 견실화를 위하여 선산 벌초, 가을 시제 제비용 외는 지출이 아예 없다.
네스트오피스텔 3개에서 들어오는 수익금은 적은 금액이라도 계속 적립되고 있다.
대표자 정병열은 리더십은 좀 부족할지라도 종중 재정의 건전화를 기하고 있다.
알다시피 정병열은 내 고조부 춘강공 정배민의 5대 종손이기도 하다.
현재 댓글이 58개에 이르다보니, 전국에서 323명이 들어와 읽고 있다.
《31》
내가 여러가지 사회활동 상 바쁜 사람이다.
조카의 질의에 대답을 안 하면 이상한 정봉영으로 오도(誤道)되기에 답변을 했다.
현재 정영조 형님으로부터 상속받은 사유재산은 그대로 지금처럼 살고, 또 子되는 정우현으로 대대로 이어가면 된다.
정우현이가 올해로 나이가 내 차남되는 정범해보다 2살 적은 40세로 알고 있다.
2살 많은 정범해는 아이가 초등 5학년이다.
빨리 성혼시켜서 손자, 손녀를 보기를 기원한다.
집앞의 표지석은 내가 충분히 설명했고, '초계정씨 함안유은종중'의 대표자 겸 좌장인 정창영(77) 형님이 충분히 설명한 것으로 알고 있다.
내가 여러가지 일로 바쁜 사람이다.
이것으로 댓글 답을 종결(終結) 짓는다.
註 ; 댓글을 쓰면서 이미지로 게재한 사진 전부를 하단에 게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