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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0년경 비잔티움 제국의 최대판도, 보라색은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치세에 회복한 영토 | |||||
공용어 | 그리스어 | ||||
수도 | 콘스탄티노폴리스 | ||||
정치체제 | 전제 군주제 | ||||
면적 - |
붕괴전 최대 3,500,000 km2 | ||||
인구 - |
붕괴전 최대 34,000,000 추정. (4세기) | ||||
주요 민족 | 그리스인 | ||||
종교 | 동방 정교회 | ||||
통화 | 솔리두스(노미스마) | ||||
성립 | 330년 | ||||
해체 | 1453년 5월 29일 | ||||
초대 황제 | 콘스탄티누스 1세 306년-337년 | ||||
최후 황제 | 콘스탄티누스 11세 1449년-1453년 | ||||
성립 이전 | 로마 제국 | ||||
해체 이후 | 오스만 제국 |
비잔티움 제국(그리스어: Βασιλεία των Ρωμαίων 바실레이아 톤 로마이온[*]), 동로마 제국(라틴어: Imperium Romanum Orientale 임페리움 로마눔 오리엔탈레), 로마니아(Ῥωμανία), 또는 로마이스(Ῥωμαΐς)는 중세 시대에 로마 제국의 뒤를 이은 제국으로 수도는 콘스탄티노폴리스(현재의 이스탄불)였고, 로마 황제를 직계한 황제가 다스렸다. 제국은 5세기 서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에도 천년 가까이 존속하였다. 비잔티움 시대는 보통 395년부터 1453년까지로 본다.
비잔티움 제국은 그리스-로마 문화를 보존하였으며, 그리스적 성격이 강해지면서[1] 당대 일부 사람들[주 1]은 그리스인들의 제국이라 칭하기도 하였다.[주 2] 이슬람 세계에서 비잔티움 제국은 보통 '룸'(روم , "로마")으로 알려졌다.[2] "비잔티움 제국"이란 표현은 16세기에서 19세기의 역사가들이 널리 쓰면서 보급되었다.
고대 로마 제국에서 동로마 제국으로 변형한 시점은 콘스탄티누스 1세가 아나톨리아의 니코메데이아에서 보스포루스 해협의 비잔티움(콘스탄티노폴리스)으로 천도한 시기로 잡기도 한다.[주 3] 7세기경 동방 문화의 영향력이 증대되면서 헤라클레이오스 황제는 개혁을 실시하고 그리스어를 공용어로 삼아 이전 고대 로마와 구별된다.
비잔티움 제국은 중세 유럽에서 가장 막강한 전제 군주제 국가였으며, 한때 활발한 정복 사업을 통해 옛 로마 제국의 고토를 거의 되찾아 광활한 지중해 세계를 통일하여 그 중심지 역할을 하였고 심지어는 중동 지역으로 진출하기도 하였다. 특히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아시아와 유럽, 흑해, 그리고 에게 해의 무역로에 자리잡고 있어 제국의 경제는 수 세기 동안 유럽에서 가장 부유했다. 더불어 비잔티움 제국은 사산 왕조 페르시아와 아랍 및 오스만 제국의 침략에서 유럽과 기독교 문명 세계를 보호하는 방파제 역할까지 하였다. 그러나 점차 영토를 잃었으며, 12세기에 콤네노스 황조가 영토를 어느 정도 회복하였으나 제국은 오랜 쇠퇴기에 접어들어 결국 15세기에 오스만 투르크의 침공으로 멸망한다.
목차 |
비잔티움 제국이라는 용어는 역사가들이 지어낸 말로, 제국이 있던 당시에는 전혀 쓰이지 않는 말이었다. 이것을 영어식으로는 ‘the Byzantine Empire’라고 표기하며, 대한민국에서는 이 영어식 표기를 그대로 써 '비잔틴 제국’이라고 불렀으나, 최근에는 원어를 살려 비잔티움 제국 또는 동로마 제국이라 부르고 있다. 제국의 이름은 그리스어로 "로마인들의 제국"(Βασιλεία των Ῥωμαίων, 이를 라틴어로 번역하면 'Imperium Romanōrum') 혹은 단순히 "로마인들의 땅"(Ῥωμανία)이었다. 제국의 황제는 자신을 로마의 통치자, 즉 옛 로마 황제의 후계자이자 상속자로 여겼다. 그 주민들은 인종적으로는 그리스인이 압도적으로 많았으나, 스스로 그리스인(그리스어: Ἕλληνες, 헬레네스)이라고 하지 않고 로마인(그리스어: Ρωμαίοι, 로마이오이)이라고 불렀다. "비잔티움"이란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천도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옛 이름인 비잔티움에서 나온 말이다. 이때부터 제국 수도의 옛 명칭은 역사서나 시문 외에는 거의 쓰이지 않았다.
이 제국을 "비잔티움"이라고 칭하게 된 것은 1557년 서유럽에서 독일인 역사가 히에로니무스 볼프가 비잔티움 제국의 사료를 모은 비잔티움 역사집(Corpus Historiæ Byzantinæ)을 출간하면서 시작되었다. 1648년 '루브르의 비잔티움'(Byzantine du Louvre, Corpus Scriptorum Historiæ Byzantinæ)이 출판되고, 1680년 뒤 캉즈의 '비잔티움 역사'(Historia Byzantina)가 출판되면서 몽테스키외 등 프랑스 작가 사이에서 '비잔티움'이라는 표현이 대중화되었다.[5] 그러나 근대 그리스의 성립과 더불어 "비잔티움"이라는 말이 서구 세계에서 일반적인 표현으로 굳어진 것은 19세기의 일이었다.
'그리스인들의 제국'(Imperium Graecorum)은 서구 세계에서 보통 비잔티움 제국이 로마 제국의 계승자임을 거부하는 맥락에서 쓰였다. 적어도 기원후 800년 교황 레오 3세가 샤를마뉴를 임페라토르 아우구스투스(Imperator Augustus)로 대관식을 치를때부터 비잔티움이 로마의 계승국이라는 주장은 계속 도전받았다.
로마 교황이나 서방의 지배자들이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에게 '로마'라는 이름을 쓰려고 할 때 이들은 '로마인들의 황제'(Imperator Romanorum) 대신 '로마니아의 황제'(Imperator Romaniæ)라는 표현을 선호하였는데, 전자의 경우 서방인들은 샤를마뉴와 그의 후계자를 일컫는 의미로 쓴 까닭이다.[6]
여러 역사 지도에서는 기원후 395년에서 610년까지 제국을 서술할 때는 '동로마 제국'이라고 쓰는데, 610년에 헤라클레이오스 황제가 제국의 공용어를 라틴어에서 그리스어로 바꾸었기 때문이다.(당시 이미 인구 대다수가 그리스어를 썼다.)[주 4] 그리고 기원후 610년 이후의 지도에서는 '비잔티움 제국'이라는 표현이 많이쓰인다
비잔티움 제국은 스스로를 ‘로마 제국’이라고 칭하고 있었다. 그리고, 로마 제국은 ‘문명 세계 모두를 지배하는 대제국’이며 ‘하느님에 의한 최후의 심판이 일어날 때까지 계속 되는, 지상의 마지막 제국’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비잔티움 제국은 고대 로마 제국의 수준 높은 이념과 제도를 그대로 이어받으면서 거기에 종교적 권위와 오리엔트적인 전제 정치를 더하여 매우 엄격한 전제군주적 황제권과 관료 정치를 시행하였다.
비잔티움의 황제는 원로원, 시민, 군대에 의해 추대되어 지상을 책임지는 하느님의 대리자이고 제국은 천국의 예표이며, 최후의 심판이 올 때까지 정통 그리스도교 신앙을 지키도록 하느님이 임명한 단 하나의 후견인으로서 사도들과 대등한 종교적 권위를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황제는 정치·군사·종교 등에 대해 무한적인 절대 권력을 휘둘러왔으며, 제국의 백성들은 스스로 황제의 노예임을 자청하며 오로지 그의 은혜만으로 살아간다고 생각하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로마와 마찬가지로 특별행정구로서 거리의 치안 유지, 식량 확보, 시민의 재판권, 상업 활동 규제와 보호 등 시민 생활에 관한 모든 행정상의 처리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독이 맡았다. 국가 정치의 중추인 궁정에서는 재상, 재무대신, 궁정재무장관, 궁정장관, 시종장 등이 황제를 도와 업무를 처리하였다. 원로원은 황제의 공식 자문기관으로서 정권 교체나 제위가 비게 되었을 때, 또한 새 황제의 등극에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통치체제가 지배하는 비잔티움 제국은 대외적으로 언제나 2가지 정면 작전을 세워야만 하였다. 즉 동쪽의 사산조 페르시아와는 전시대부터 계속하여 전투 상태에 있었으며 이것은 율리아누스의 전사,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일시적 평화조약 체결에 이르기까지 단속적으로 계속되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사두 지배 체제라는 새로운 행정 제도를 만들었다.[7] 그는 자신과 공동 황제를 두어 아우구스투스라 칭하였다. 공동 황제는 각자 젊은 후계자인 부제를 두어 규칙에 따라 양위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밀리아누스가 퇴위하자 사두 체제는 무너졌으며, 콘스탄티누스 1세는 사두 체제 대신 황조 세습 원칙을 세웠다.[8]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제국의 수도를 옮겼으며, 사회와 종교 체제에 중요한 변화를 일으켰다.[9] 기원후 330년 그는 비잔티움 땅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두 번째 로마로 삼아 천도하였는데, 이 곳은 동방과 서방 사이의 교역로 사이에 자리잡은 요충지였다. 콘스탄티누스는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도입한 행정 개혁을 개선하였다.[10] 그는 화폐(그가 도입한 솔리두스 금화는 매우 가치있고 안정적인 통화였다[11])를 안정시켰으며, 군대 조직을 개혁하였다. 콘스탄티누스 시대에 제국은 상당한 군사력을 회복하였으며, 안정과 번영을 누렸다.
한편 이 시대에 그리스도교는 더 이상 국가의 박해를 받지 않았으며, 황제가 관대한 특전을 베풂으로써 황실의 비호를 받았다. 콘스탄티누스는 황제는 교리를 정하지 못하며, 이를 위해서 공의회를 소집해야 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콘스탄티누스는 아를의 교회 회의를 소집하였으며,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황제가 교회의 수장이라는 주장을 잘 보여주었다.[12]
395년 제국의 상태는 콘스탄티누스의 업적이 효과를 본 시기로 볼 수 있다. 황조 세습 원칙은 철저하게 확립되어, 이 해에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가 죽자, 황위는 그의 아들 아르카디우스와 호노리우스가 각각 동부와 서부를 맡았다. 테오도시우스는 제국 동서부 양 지역을 통치한 마지막 로마 황제였다.[13] 동부 제국은 다키아, 마케도니아, 아시아, 폰투스, 오리엔트, 트라키아, 이집트로 이루어졌다.
3세기와 4세기에 동부 제국은 대개 서부 제국이 직면한 어려움을 도와주었는데, 동부 제국은 더욱 도시 문화가 확고하였고, 재정 자원도 풍부하여 공물을 지불하여 침략자를 구슬릴 수 있고, 용병을 고용할 여력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테오도시우스 2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성벽을 더욱 요새화하여, 어지간한 공격은 대개 막아낼 수 있게 되었다. 이 성벽은 1204년까지 파괴되지 않았다. 훈족의 아틸라가 침입하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테오도시우스는 이들에게 공물(300kg에 달하는 금이었다고 한다) [14]을 바쳤다. 또 훈족이나 다른 이민족과 교역하며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사는 상인들에게 혜택을 주기까지 하였다.
그의 뒤를 이은 마르키아누스는 훈족에게 이런 어마어마한 액수의 공물을 계속 바치는 데 거부하였다. 그러나 아틸라는 이미 서로마 제국으로 관심을 돌린 뒤였다.[15] 453년 아틸라가 죽자, 훈족은 몰락해버렸고, 동부 제국은 남은 훈족 무리와 유리한 관계를 이어나갔으며, 이들은 결국 비잔티움 군대의 용병으로 싸우게 된다.[16]
아틸라가 죽자 동로마 제국은 평화기를 누렸으나, 서로마에서는 476년에 게르만족 출신의 로마 장군 오도아케르가 유명무실한 서부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폐위시켰으며, 다른 꼭두각시 황제를 세우는 대신 스스로 왕이 되었다.
이탈리아를 회복하기 위하여 제노 황제는 모이시아에 정착해 있던 테오도리크의 동고트족과 협상하였다. 그는 고트의 임금을 이탈리아로 보내 '이탈리아 군부 총감'(magister militum per Italiam)으로 삼았다. 493년 오도아케르가 몰락하자, 젊은 시절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산 적이 있는 테오도리크 왕은 스스로 이탈리아를 통치하였다. 테오도리크가 동고트 왕국으로 이탈리아를 통치하자, 제노 황제는 서방 영토에 대한 최소한 명목상 수위권만 지켰다.[13]
491년 로마인 혈통의 관리 출신인 늙은 아나스타시우스 1세가 황제가 되었으나, 새 황제의 권력이 이사우리아족의 저항을 제대로 통제하게 된 것은 498년의 일이었다.[13] 아나스타시우스는 자신이 정력적인 개혁가이자 유능한 행정가임을 드러내었다. 그는 일상적인 거래에 널리 쓰이는 폴리스(follis) 동화의 무게를 최종 결정하여 콘스탄티누스 1세의 화폐 제도를 완성하였다.[17] 그는 또 세금 제도를 개혁하고, 사람들이 싫어하던 크리사르기론 세금을 폐지하였다. 그가 죽을 당시 제국의 국고에는 145,150kg의 금이 있었다.
527년에 즉위한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로마 제국의 옛 영토를 상당 부분 회복하였다. 그는 일리리아인 농민의 아들로, 숙부 유스티누스 1세(518–527) 치세부터 권력을 쥐고 있었다.[18] 532년에 동부 국경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유스티니아누스는 페르시아의 호스로 1세와 평화 조약을 맺어 사산 제국에 많은 연공을 마치기로 합의하였다. 같은 해에 황제는 니카 폭동에서 살아남았으며, 폭동은 3만 명의 폭도가 죽으면서 끝났다. 이 성공으로 유스티니아누스의 권력이 공고해졌다.[19] 동고트족 임금 테오다하드가 교황 아가피토 1세를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보내었으나, 유스티니아누스와 평화 협정을 맺는데 실패하였다. 그러나 교황은 황제가 황후 테오도라의 지지에도 불구하고 단성론자 안티모스 1세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를 비난케 하는데 성공하였다.
533년 황제가 북아프리카 옛 속주의 반달족을 몰아내도록 벨리사리우스 장군과 약 15,000명의 군대를 파병하면서 서방 정복이 시작되었다. 이들은 놀라울 정도로 수이 승리를 거두었으나, 주요 독립 부족들을 복종시키는 것은 548년의 일이었다.[19] 이탈리아 동고트 왕국에서 테오도리크 대왕이 죽고, 그의 조카이자 후계자인 아탈라리크와 대왕의 딸 아말라순타는 권력이 약한 테오다하드를 왕위에 올렸다. 535년 소규모 비잔티움 원정대가 시칠리아로 파견되어 손쉽게 승리하였으나, 고트인들의 저항이 커졌으며, 벨리사리우스가 로마와 나폴리을 포위하여 함락하고 라벤나를 수복한 540년에야 겨우 승리할 수 있었다.[20]
그러나 546년 12월 17일 동고트족은 토틸라의 지휘 아래 이내 규합하여 로마를 함락하였다. 549년 초 결국 벨리사리우스는 소환되었다.[21] 뒤이어 551년 말 아르메니아인 환관 나르세스가 35,000여 명의 군대를 이끌고 고트족을 물리쳤다. 토틸라는 부스타 갈로룸 전투에서 패사하였다. 그의 뒤를 이은 테이아스도 마찬가지로 552년 10월 몬스 락타리우스 전투에서 패하였다. 일부 고트족 부대가 계속 저항하였고, 프랑크족과 알레마니족이 침입하였으나 이탈리아에서 전쟁은 결국 일단락되었다.[22] 551년 히스파니아의 서고트족 귀족 아타나길드는 임금에 반역을 일으키고 유스티니아누스의 도움을 청하였다. 황제는 늙었지만 훌륭한 군 사령관 리베리우스에게 군대를 주어 파병하였다. 그리하여 비잔티움 제국은 헤라클레이오스 시대까지 스파니아(Spania)의 일부 지역을 점유하게 되었다.[23]
그리스의 역사 |
청동기 시대 (c. 3650-1100 BC) 고대 그리스 (c. 1100-146 BC)
중세 (330-1821 AD)
근대 그리스 (1821 AD-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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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에서는 로마와 페르시아간의 전쟁이 이어지다가 561년 유스티니아누스와 호스로의 사절들이 50년간 화평을 맺었다. 550년대 중반 유스티니아누스는 대부분의 전장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나, 발칸 반도만은 예외였는데 이곳은 슬라브인의 침입이 계속되었다. 559년 황제는 쿠트리구르와 스클라베니의 대규모 침략에 직면하였다. 황제는 퇴역한 벨리사리우스를 불렀으나, 위기가 끝나자 곧 자신이 상황을 관리하였다. 유스티니아누스가 자신의 도나우 함대를 강화한다는 소식에 쿠트리구르인들의 우려하였으나, 제국은 이들에게 공물을 지불하고, 강 사이에 안전한 통로를 확보한다는 조약을 맺었다.[19]
유스티니아누스는 입법 사업으로도 유명하다.[24] 529년 열 명으로 이루어진 위원회를 설치하고 카파도키아인 요한네스가 위원장으로 삼아 고대 로마 법전을 개정하게 하여 로마법 대전(Corpus Juris Civilis)을 편찬하였다. 로마법을 수합한 이 법은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으로 불리기도 한다.
6세기에 동부 지역에서 전통적인 그리스-로마 문화의 영향력은 여전하였으며, 자연철학자 요한네스 필로포노스 같은 대표적인 학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철학과 문화가 부상하면서 옛 문화를 압도하게 되었다. 로마노스가 쓴 성가는 성체 전례의 발전을 이루었으며, 건축가들은 니카 폭동으로 파괴된 옛 성당 자리에 하기아 소피아 성당을 세웠다. 하기아 소피아는 오늘날까지 건축사에서 중요한 건축물이다.[13] 6세기와 7세기에 비잔티움 제국은 일련의 전염병으로 인구가 크게 줄고, 경제가 쇠퇴하여 크게 약화되었다.[25]
565년 유스티니아누스가 죽자 유스티누스 2세는 페르시아에 연공을 바치는 데 거부하였다. 그러는 사이 롬바르드족이 이탈리아를 침공하여 6세기 말에는 비잔티움령으로 남은 이탈리아 영토는 반도의 1/3 정도에 불과하였다. 유스티누스 2세의 후계자 티베리우스 2세는 페르시아와 싸우는 반면 아바르족에 공물을 지불하였다. 티베리우스의 장군 마우리키우스는 동부 전선에서 활약하였으나, 조공만으로는 아바르족을 달래지 못하였다. 아바르족은 582년 발칸 지역의 시르미움과 싱기두눔 요새를 함락하였으며, 투르크인들이 도나우를 건너 침입하였다. 이때 황제가 된 마우리키우스는 사산의 호스로 2세와 화평 조약을 맺어 아르메니아에 대한 접근권을 얻었으며, 602년에 아바르족과 슬라브족을 도나우 강 이북으로 몰아내었다.[13] 한편 서방 영토에 이민족이 다시 침입하자 마우리키우스는 라벤나와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에 황제 대리로서 총독을 두어 제국의 영토 확보에 힘썼다.
이 시대의 속령 통치 방식 및 중앙집권체제 안에서의 가장 큰 변화는 대외정세 변화에 촉구된 군사력의 강화와 문관 세력의 약화이다.
군사력의 강화는 제국령의 양두 지배에서 테마 제도로의 전환이며, 문관 세력의 약화는 〈디오클레티아누스-콘스탄티누스 제도에서 군사와 세무를 중시하는 로고시트 제도로의 전환이다. 이들 모두 옛 로마적 행정제도에서 변신한 것이다. 테마 제도는 헤라클리우스의 치하에서 비롯된 국령의 전체적 저하를 보충하기 위한 비상 수단으로, 지방 영지의 자급자족을 목적으로 시작된 것이었다. 이 제도는 점차 정비되어서 마케도니아 황조의 번영시대의 기초가 되었다. 제국의 성운은 테마 제도의 성쇠에 달려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즉, 지방 호족 및 중앙의 고급 관료, 군인, 성직자로 이루어지는 대토지 소유자층이 중소자유농민층을 흡수하여 테마 제도를 침식하였으며, 거듭되는 대외 위기에 따른 내정의 혼란이 테마 제도의 기능을 위협할 때 제국의 성운도 흔들렸다. 대토지 소유자층의 증대는 이미 8세기 무렵부터 현저하게 나타났다. 9세기 초, 니케포루스 1세 또는 니케포로스 1세는 대토지 소유자층의 재력을 강제적으로 정부에 되돌리려고 하였다.
10세기의 로마누스 1세 또는 로마노스 1세를 비롯한 여러 황제들은 중소자유농민 농지의 전매, 기증, 유증을 금지하여 대토지 소유자층의 증대를 막으려고 노력하였다. 또한 납세의 연대제 강화, 대토지 소유자의 선매권 금지 증의 보호책으로 중소자유농민층을 보호하려고 하였지만 이러한 정책은 결국 국세에 의한 수입 확보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11세기 초엽 대토지 소유자층 출신인 로마누스 3세 또는 로마노스 3세가 종래의 보호책을 폐지하고 대토지 소유자층을 옹호하는 정책을 펼쳐 중소자유농민층이 몰락하기 사작하였다.
또한 7세기~9세기에 걸쳐 외적들의 침임이 끊이지 않았으며 그 때문에 중앙정부 내부에서는 군사와 세무 관계를 다루는 부국의 중요성이 커졌다. 이들 부국장은 정치의 중추를 차지하여 〈디오클레티아누스-콘스탄티누스 제도〉 아래의 여러 관료들과 교체되었다. 즉 로고시트 제도가 등장한다. 이것은 원래 회계 담당을 뜻한다. 이 제도의 중심은 회계국장이며 외무대신직과 내무대신직을 겸하는 역체국장과 함께 큰 권력을 가졌다. 그런데 관료 기구의 정비와 함께 황제는 자신이 신임하는 사람을 이 관료 기구의 요소에 두어 이것을 장악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행정 기구의 개조는 대외적 요인에 따른 것으로, 그 첫 번째 요인은 7세기 전반부터 시작하여 9세기 후반까지 계속된 이슬람과의 싸움이며, 두 번째 요인은 불가르족의 등장이다. 7세기 중엽에 발칸 반도 북부에 나타난 불가르족은 제국령 안에 최초의 독립 국가인 제1차 불가리아 왕국을 세웠다. 세 번째 요인인 슬라브족은 일찍부터 남하하여 정주하고 있었는데 독립국가를 만들지 않고 선주민인 그리스계 주민들과 융화되어 그리스 민족을 슬라브화하였다. 그러나 9세기 초에는 슬라브족에게 점령된 지역을 그리스 남부에서 탈환하기 시작함에 따라 슬라브족이 그리스화 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9세기 중엽에는 나중에 키예프 공국을 세우게 되는 루스족이 처음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 인근에 나타났는데 988년 키예프 대공 블라디미르 1세 때 동방 정교회를 국교로 선언함에 따라 키에프 대공국도 동유럽의 유력한 일원이 되었다. 이렇게 대외 위기를 극복하고 행정·국방 기구의 정비와 중소자유농민층의 번영을 배경으로 비잔티움 제국은 바실리우스 2세 또는 바실리오스 2세 때, 아르메니아와 시리아의 연안지대, 다뉴브 강 이남 발칸 반도를 다시 제국령으로 편입시키키는 등 유스티니아누스 1세 이후 최대 영토를 얻었다.
바실리우스 2세가 죽은 후 비잔티움 제국은 내부에서는 혼란이 거듭되고, 이탈리아 지역에서는 노르만족이, 도나우 강 유역에서는 페체네그족이, 동쪽에서는 신흥 세력인 셀주크 투르크가 제국을 위협했다.
1071년 로마누스 4세 또는 로마노스 4세가 20만 병력을 이끌고 제국의 위협 세력으로 떠오른 셀주크 투르크를 침공했다. 전쟁 초기에는 압도적인 병력을 지닌 비잔티움군이 우세를 점했으나, 밀린 보수에 대한 불만으로 제국 영내를 약탈한 독일계 용병들의 반란, 투르크 계열의 유목민족의 이탈, 분산시킨 병력의 패배, 호위대를 지휘하던 안드로니쿠스 두카스의 배반, 결정적인 순간에서 명령계통의 혼란 등 겹쳐진 악재로 비잔티움군은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셀주크군의 4만 병력에 크게 패배한다. 이어 셀주크군은 비잔티움 제국의 주요 병력 제공 지역이었던 아나톨리아 등 동부 지역을 완전히 초토화시켜 제국을 철저하게 와해시켰다.
11세기부터 천천히 시작된 비잔티움 제국의 쇠퇴 현상은 1204년의 제4차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점령으로 상징된다. 그 원인은 국내 봉건화의 진행과 함께 셀주크 투르크, 십자군, 불가리아 왕국, 세르비아 왕국 등이 초래한 외세의 압력에 있었다. 국내 봉건화의 현상은 11세기 초의 콘스탄티누스 9세 또는 콘스탄티노스 9세 통치하의 프로노이아 제도(토지를 매개로 한 황제와 신하의 주종 관계) 성립이었다. 당시 면세 특권이 부여되어 있던 대토지 소유자층의 영지, 징세청부인에게 임대로 내놓은 토지, 프로노이아로서 지급된 토지는 징세에 있어 치외법권적인 존재였다. 이러한 토지의 증가는 한편으로 중소자유농민층의 납세 부담을 증가시켰으며 이것은 곧 전자의 증대와 후자의 몰락이라는 악순환을 낳았다. 또한 이러한 사태는 국고의 빈곤화를 초래하였다. 이러한 사회상·경제상의 변혁은 행정·국방에도 영향을 끼쳤다. 테마 제도는 소아시아와 발칸 반도의 주요 부분이 11세기 중엽 제국령에서 벗어남에 따라 대토지 소유자층에게 돌아갔다. 황제들도 거의 다 대토지 소유자층 출신들이었다. 따라서 대토지 소유자층의 발언권은 커져갔으며 반대로 황제의 권력은 약화되었다. 중앙과 지방을 가리지 않고 내란과 반란, 세력 확장을 위한 음모와 세력 다툼이 끊이지 않았다. 11세기 후반의 축소된 제국령에서는 군사령관 2명이 전 영토를 2개의 군구로 나누고 자국군 대신 외국인 용병대가 나라를 지키게 하였다. 이러한 불안한 국내 정세에 더욱 박차를 가한 것은 대외 위기였다.
11세기 후반 노르만족의 진출은 제국의 이탈리아 남부 지배에 종지부를 찍게 하였으며, 1071년 셀주크 투르크와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소아시아 중앙에 룸 술탄국의 수립을 허용하였다. 이러한 동서의 압력에 대항하기 위해 알렉시우스 1세 또는 알렉시오스 1세는 베네치아 공화국에 군사 원조를 의뢰하고 그 보상으로 제국령 안에서의 무역 및 면세 특권을 주었다. 더욱더 혼란을 초래한 것은 페체네그족, 마자르족 등 이민족들의 대거 남하와 약탈이며 세르비아 왕국의 번성과 제2차 불가리아 왕국의 수립이었다. 이러한 외세의 압력이 정점에 이른 것은 제4차 십자군 원정이었다.
이미 제1차 십자군이 제국령을 통과하였을 때 서유럽과 비잔티움 제국 사이에 생긴 오해는 반감과 혐오와 적의로 변하였는데 제4차 십자군 원정 때에는 그 정점에 달하였다. 그리고 동지중해 무역의 독점을 기도한 베네치아 공화국의 도제 엔리코 단돌로는 이것을 계기로 콘스탄티노폴리스 점령을 단행하기 위하여 십자군에 가세하였다. 이렇게 하여 1204년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아군인 십자군에게 함락되고 라틴 제국이 설립되었다.
수도를 빼앗긴 옛 비잔티움 제국 세력은 니케아 제국, 에페이로스 공국, 트라페주스 제국 등 곳곳에 망명 정부를 세웠다. 이 망명 정권 가운데 하나인 니케아 제국은 불과 반세기 사이에 주변의 외적들을 무찌르거나 화친을 하였으며, 1259년 미카일 8세가 팔라고니아 전투에서 승리하여 그 지위는 확고해졌다. 그리고 1261년 미카일 8세는 옛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라틴 제국에서 수복하여 팔라이올로고스 황조 시대를 열고 비잔티움 제국을 부활시켰다.
그러나 부활한 비잔티움 제국은 국내외적으로 많은 문제를 떠안게 되었다. 대외적으로는 13세기 후반에 콘스탄티노폴리스 탈환을 노리는 반(反)비잔티움 세력에게 시달렸다. 앙주 가문의 책동으로 옛 보두앵 2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략에 나섰는데 미카일 8세는 1282년에 일어난 시칠리아 만종 사건으로 위기를 넘겼다. 그러나 국내 봉건화에 따른 악폐는 더욱 심해졌으며 행정의 혼란, 경제활동의 부진, 외국인 용병의 증가는 신민들의 세금을 더욱 무겁게 하였다. 이러한 내정상의 악순환은 외정상의 실패로 이어졌다.
가장 큰 실패는 14세기 발흥한 오스만 제국에 대한 정책이었다. 소아시아의 부르사에 수도를 두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던 오스만 제국은 니코메데이아와 니케아 두 도시를 점령하였다. 이러한 상황에 당면했지만 국내 제위 계승 문제로 효과적인 대책을 세울 수가 없었다.
1365년 오스만 제국의 술탄 무라트 1세가 수도를 아드리아노폴리스로 옮기자 비잔티움 제국은 바다에서는 베네치아 공화국과 제노바 공화국에, 육지에서는 오스만 제국에게 둘러싸인 동지중해의 작은 나라로 전락하였다. 이때부터 비잔티움 제국은 오스만 제국에게 조공을 바쳐야만 했으며 이로써 비잔티움 제국은 정치적 독립을 상실하게 되었다. 계속해서 오스만 제국이 세르비아와 헝가리를 물리치자 발칸 반도에서 오스만 제국에 대항할 세력은 없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정세 속에서 비잔티움 제국은 동방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의 재통일을 조건으로 로마 교황청을 통해 서유럽으로부터 군사 원조를 얻으려고 하였지만 이마저도 실패로 끝났다. 무라트 2세 이후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략은 날로 심해졌으며, 1453년 봄 술탄 메흐메트 2세는 농성군의 10배나 되는 병력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하여 5월 총공격을 시작하였다.
이로써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되어 비잔티움 제국은 멸망하게 되었다. 뒤이어 아테네, 모레아, 트라페주스 제국이 차례로 오스만 제국에 점령당하였다.
메흐메트 2세는 1460년 미스트라를, 1461년에 트라페주스 제국을 정복하여 그리스인 세력을 모두 멸망시켰다.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의 조카 안드레아스 팔라이올로고스는 이미 소멸된 비잔티움 황제의 칭호를 물려받아 1465년부터 1503년 죽을 때까지 지녔다.[6] 15세기 말 오스만 제국은 소아시아와 발칸 반도 일부 지역에 지배권을 확립하였다. 메흐메트 2세와 그의 후계자들은 20세기 초 오스만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자신들이 비잔티움 제국의 적법한 후계자라고 여겼다. 한편 도나우 공국에서는 비잔티움의 일부 귀족을 비롯한 정교도 피난자들을 받아들였다.
그가 죽자 모스크바 대공국의 이반 3세가 동방 정교회의 보호자로써 황제의 역할을 자처하였다. 그는 안드레아스의 누이 소피아 팔레올로기나와 혼인하였으며, 이들의 손자 이반 4세는 처음으로 러시아의 차르가 되었다.(이 말은 카이사르를 뜻하며, 전통적으로 슬라브 사람들이 비잔티움 황제를 일컫는 말이었다) 이반 황제의 후계자들은 모스크바가 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적법한 후계자라는 생각을 지지하였다. 러시아 제국이 세 번째 로마라는 관념은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제국이 무너질 때까지 살아남았다.[26]
비잔티움 제국의 경제는 수백년간 지중해와 유럽에서 가장 선진적이었다. 특히 유럽은 중세 후기 까지 비잔티움의 경제력을 따라가지 못하였다. 또 비잔티움 제국에서는 서유럽과 달리 화폐 경제 제도가 발달하였다. 제국 정부에서 발행한 금화 노미스마는 11세기 전반까지 높은 순도를 유지하여 후세에 ‘중세의 달러’라고 불릴 정도로 국제적 화폐로 유통되었다. 특히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는 업종마다 길드를 통한 국가에 의한 보호와 통제가 두루 미치고 있었기 때문에, 국영 공장에서 독점적으로 제조된 견직물이나 귀금속 공예품, 다른 나라와의 무역 등이 제국에 많은 부를 가져와,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세계의 부의 3분의 2가 모이는 곳’이라고 칭해질 만큼 크게 번영하였다. 오랫동안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유라시아와 북아프리카 거의 모든 지역을 포괄하는 무역망의 중심지였으며, 또 비단길의 서쪽 관문이기도 하였다. 어떤 학자들은 7세기에 아랍인이 쳐들어오기까지 제국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경제력을 가졌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랍인의 정복으로 부는 역전되어 비잔티움 제국은 한동안 쇠퇴가 침체기를 맡았다. 콘스탄티노스 5세의 개혁(765년경)으로 제국은 다시 부흥하여 1204년까지 발전하였다. 10세기부터 12세기 말까지 비잔티움 제국은 화려함을 과시하였으며, 여행자들은 수도의 부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러나 경제적 재앙이었던 제4차 십자군으로 모든 것이 달라졌다.[27] 팔라이올로고스 황조는 경제를 회생하고자 노력하였으나, 후기 비잔티움 국가는 국내외 경제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였다. 12세기 이후로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상공업의 발전에 밀려나 제국의 국내 산업은 쇠퇴하여 해군력 제공을 담보로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에 대한 무역 특권 부여로 무역의 이익도 잃은 제국은 쇠퇴의 길로 들어섰다. 점차 제국은 교역과 가격, 귀금속 유통에 대한 영향력을 잃었으며, 어떤 학자들은 화폐 주조권도 통제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보기도 한다.[28]
교역은 제국의 경제적 기반이었다. 섬유는 가장 중요한 수출품이었을텐데, 특히 비단은 이집트로 수입되었으며, 불가리아나 서방에서도 유통되었다.[29] 국가는 국내외 무역을 강력하게 통제하였으며, 화폐 주조를 독점하였다. 정부는 금리도 직접 통제하였으며, 길드나 조합의 활동도 제한을 두었다. 황제와 제국 관리들은 수도의 물자 공급을 확실히 하고 곡물 가격을 억제하기 위해 때때로 위기 상황에 개입하기도 하였다. 또 정부는 세금을 통해 잉여량을 저장해두었다가 공무원 급료나 공공 사업 투자로 다시 유통하기도 하였다.[30]
주요 산업인 농업은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 이래 별로 기술의 진보가 없었다. 고대부터 중세까지는 서유럽에 비해 고도의 농업 기술을 가지고 있었고 유럽의 농업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지만, 12세기부터는 서유럽이나 중동에서도 농업 기술이 개선되면서, 제국의 농업 기술이 눈에 띄게 낙후되었다.
조지프 라야는 "비잔티움 문화와 동방 정교는 같은 하나다."라고 말한 바 있다.[31] 동방에서 제국이 존속하면서, 황제는 교회의 일에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비잔티움 국가는 고대 종교 시대부터 일상적으로 종교와 관련한 행정ㆍ재정 업무를 수행하였으며, 이는 그리스도교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었다. 카이사레이아의 에우세비우스가 고안한 모범에 따라 비잔티움 제국에서는 황제를 그리스도의 대리자 또는 전령으로 여겨졌으며, 황제는 타종교인에게 그리스도교를 선교하고 행정이나 재정 등 종교 "외적"인 일을 맡는다고 보았다. 그러나 황제가 교회에서 수행하는 역할은 고정된 형태로 법에 따라 정해진 제도로 발전되지는 않았다.[32]
비잔티움 제국의 그리스도 교도들은 제국 역사를 통틀어 통일된 상태였다는 것은 그리스도교에 대한 일반 사람들의 오해이다. 제국의 로마 교회는 동방 정교회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이들은 결코 제국 전체의 모든 그리스도 교도를 대표한 적이 없었다. 5세기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였던 네스토리우스가 보급한 네스토리우스주의는 제국 교회를 분열시켜 오늘날 아시리아 동방 교회로 이어졌다. 6세기에 교회의 대분열 당시 오리엔탈 정교회가 칼케돈 공의회의 선언에 반대하여 제국 교회에서 떨어져나갔다. 5세기에 로마가 몰락한 당시 아리우스주의는 대개 서유럽 게르만족에 국한되어 있었으나, 초기 제국에는 이들 종파와 더불어 아리우스주의나 다른 그리스도교 분파도 있었다. 그러나 제국이 후기로 접어들면서 동방 정교회는 제국에 남은 그리스도교도 대부분을 대표하게 되었다. 유대교도 제국 역사에서 중요한 소수 종교였다. 이들은 박해를 받는 시기도 있었으나, 대부분의 시기에는 보통 용인되었다.
로마가 붕괴하고 여타 동방 총대주교들의 내부 불화를 겪으면서 6세기에서 11세기까지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는 그리스도교계에서 가장 부유하고 영향력있는 중심지가 되었다[33] 제국이 허울만 남으면 쇠퇴한 때에도 교회는 제국 국경 안팎으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비잔티움 제국의 활발한 선교로 대부분의 동유럽권(세르비아, 불가리아, 러시아 등 슬라브 민족)과 일부 중동권에 기독교 문화가 형성되었고 비잔티움 제국은 자연스레 정교회의 본산지 역할을 담당하였다. 슬라브 민족은 동방 정교회와 함께 키릴 문자와 동방정교회의 교회 헌법을 수용했다. [34] 게오르기예 오스트로고르스키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비잔티움 사회에서는 교회가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세례, 결혼, 장례 등 개개인 생활의 중요한 순간에 교회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또한 신학, 예술, 경제, 정치, 외교 등 국가와 사회의 모든 부문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비잔티움 정부에서 황제는 유일한 절대 군주였으며, 그 권력은 신에게서 비롯되는 것으로 여겨졌다.[6] 8세기 말에 궁정에 집중된 민간 행정부는 수도의 대규모 권력 집중의 일환으로 형성되었다.(사켈라리오스 직위의 상승은 이런 변화와 관련이 있다).[36] 이 시대에 가장 중요한 개혁은 테마 제도을 설치한 일로서, 테마는 스트라테고스 한 사람이 민간과 군사 행정을 전담하였다.[6]
"비잔티움적"이라는 말은 경멸적인 의미로 쓰이기도 하지만, 비잔티움의 관료제는 제국의 상황에 맞게 개혁하는 탁월한 역량을 지니고 있었다. 비잔티움의 직위 체계와 서열 제도는 오늘날의 눈으로 볼 때 제국 행정이 질서 정연한 관료제로 보인다. 관리들은 황제를 중심으로 엄격한 질서에 따라 배치되었으며, 각자의 직위에 대한 황제의 뜻에 따랐다. 실질적인 행정직이 있었으나, 권위는 관직이 아닌 개인에게 주어질 수 있었다.[37] 8세기와 9세기에 민간 업무는 귀족의 지위에 오르는 지름길이었으나, 9세기부터 민간 귀족은 혈통 귀족과 대립하였다. 비잔티움 정부에 대한 어떤 연구에 따르면 11세기의 정치는 민간 귀족과 군사 귀족의 대립으로 점철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 시기에 알렉시오스 1세는 새로운 궁정의 작위와 관직을 신설하는 등 중요한 행정 개혁을 추진하였다.[38]
로마가 몰락한 뒤 제국의 가장 큰 어려움은 제국과 주변 세력의 관계를 유지하는 일이었다. 주변 민족들이 공식적인 정치 제도를 이룰 때, 이들은 비잔티움 제국을 본뜨기도 하였다. 비잔티움의 외교는 주변 세력들을 국제 및 국가 내부의 관계망으로 끌어들이게 되었다.[39] 비잔티움의 외교망 사이에서는 조약이 주기적으로 체결되었으며, 새로운 지배자가 왕가를 이루는 데 기꺼이 받아들였으며, 비잔티움 사회의 의견, 가치, 제도로 포섭하였다.[40] 고전 저자들은 평화와 전쟁을 도덕적ㆍ법적으로 구분하길 좋아하지만, 비잔티움 제국에서는 외교를 다른 형태의 전쟁 수단으로 보았다.[41] 가령 불가르족이 제국을 위협하자, 이에 대응하여 키이우 공국에 돈을 주어 반격하는 식이었다.[41] 야만족 담당국은 최초의 대외 정보 기관으로, 제국의 적에 관한 모든 정보를 수합하였다.[41]
비잔티움 사람들은 여러가지 외교 제도를 두었다. 가령 수도에는 여러 대사관이 수년 동안 상주하기도 하였다. 타국의 왕가 일원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머무르도록 요청하기도 하였는데, 이들은 정치 상황에 따라 유용한 볼모가 될 수 있었다. 또 중요한 관습으로 방문자들을 호화로운 모습으로 압도하는 것도 있었다.[39] 디미트리 오볼렌스키에 따르면, 동유럽에서 문명이 보전된 것은 노련하고 책략을 갖춘 비잔티움의 외교 덕분이었다고 하였는데, 이는 오랫동안 유럽 역사에 기여하였다고 한다.[42]
비잔티움의 문화는 고대 그리스의 고전 문화인 헬레니즘 문화를 계승, 그 위에 기독교적 요소를 결합하여 천년 간에 걸쳐 중세 서유럽의 라틴-게르만 문화권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발달하였다. 중세를 통해 유지한 비잔티움 문화는 근세 서유럽에는 그리스 정신을 전해주었고, 발칸과 러시아에 거주하는 슬라브계 민족의 문화적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특히 6세기와 9세기~10세기, 14세기에는 절정에 이르렀다.
비잔티움 문화는 일반적으로 보수적이면서 신비적인 분위기가 두드러지는 점이 있으며, 비잔티움 사람들은 아름다움을 외면적 요소보다는 정신적인 요소에 더 가치를 두고 있었다.
고대의 저작들은 비잔티움 시대에도 계속 장려되었다. 그리하여 비잔티움의 학문은 고대 철학과 형이상학과 긴밀하게 이어졌다.[43] 비잔티움 제국에서는 과학을 응용하는 면에서 여러 번 중요한 업적을 이루었으나(유명한 사례로 성 소피아 성당을 들 수 있다), 6세기 이후 비잔티움의 학자들은 고대 저술가의 사상을 확대하거나 새로운 이론을 발전하는 측면에서는 거의 성과를 내지 못하였다.[44] 유스티니아누스 시대에 역병이 창궐하고, 이후 아랍인이 침략하는 등 특히 혼란기에 학문은 정체되었으나, 제국이 천 년을 넘긴 시점에서 소위 "비잔티움 르네상스"로 비잔티움의 학자들은 특히 천문학과 수학 등 아랍과 페르시아의 과학 발전에서 전문가 역할을 자임하였다.[45]
제국의 마지막 세기에 비잔티움의 문법학자들은 개인으로서나 저술로서나 초기 이탈리아 르네상스에 고대 그리스어 문법과 문학 연구에 주된 기여를 하였다.[46] 이 시대에 트라페주스에서 천문학과 여타 수리 과학 교육이 이루어졌으며, 약학은 거의 모든 학자들의 관심을 끌었다.[47]
법 분야에서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개혁은 법리학의 발전에 분명한 영향을 끼쳤으며, 레온 3세의 에클로가(Ecloga)는 슬라브 세계의 법 체제를 이루는 데 영향을 끼쳤다.[48]
원래 비잔티움의 언어는 고대 로마에 기원을 두는 라틴어였다. 그러나 기원후 7세기경 헤라클레이오스 황제가 사실상 그리스어를 공식 언어로 삼았다. 학술 분야에 쓰이던 라틴어는 교양 계층 사이에서도 급속히 쓰이지 않게 되었으며, 때때로 비잔티움 문화에서 의례적인 부분으로 나타나는 정도였다.[49] 더불어 민중 라틴어는 제국의 소수 언어였으며, 여러 학자들은 이것이 남부 블라크 언어의 시초가 된다고 보고 있다.[50]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서부 지중해 속주를 일시적으로 회복하면서, 라틴어는 학술 언어 뿐 아니라 일상 구어로 제국에서 계속 쓰이게 된다.
궁정, 행정부, 군대를 떠나 동부 로마 속주에서는 그리스어가 서방 제국이 멸망하기 훨씬 전, 라틴어 이전부터 이 지역에서 수 백년 동안 쓰인 주요 언어였다.[51] 그리스어는 그리스도교 교회, 학술, 예술 분야의 보통 언어로 자리잡았으며, 다른 민족이나 여러 속주간의 교역에서 링구아 프랑카로 주로 쓰였다.[52] 라틴어는 한동안 주요 구어인 코이네 그리스어와 양층언어로 남았으며, 코이네는 더 이전의 문어와 공존하다가 결국 표준 방언으로 발전하였다.[53]
다민족으로 이루어졌던 비잔티움 제국에서는 다른 언어도 널리 쓰였으며, 시대마다 이들 가운데 일부 언어는 각 지역에서 제한적인 공용어로 인정되기도 하였다. 유명한 예로, 중세 시대 초입에 시리아어와 아람어는 동부 접경 속주에서 교양있는 계층 사이에서 더욱 널리 쓰이는 언어였다.[54] 비슷한 사례로 콥트어, 아르메니아어, 그루지야어도 해당 지역에서 식자 계층에게 중요한 언어였으며,[55] 나중에는 외국과 접촉하면서 고대 교회 슬라브어, 블라크어, 아랍어도 각 영향권과 제국 내에서 중요해졌다.[56]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지중해 지역과 배후지를 통틀어 중요한 교역 중심지였으므로, 중세 시대에 알려진 거의 모든 언어가 제국에서 쓰였는데, 심지어 중국어도 쓰인 경우가 있다.[57] 비잔티움 제국이 결국 쇠퇴기에 접어들면서, 제국의 시민들은 문화적으로 동질화되었고, 그리스 언어는 이들의 정체성과 종교와 같은 의미를 가지게 된다.[58]
비잔티움 제국과 그 영향을 받은 여러 지역에서는 독특한 건축, 회화을 비롯한 여러 예술을 남겼다. 비잔티움 예술은 거의 전적으로 종교적 표현과 관련이 있으며, 더욱 구체적으로 보자면 면밀하게 정해진 교회 신학의 비인격적 특성을 예술로 표현하였다고 볼 수 있다. 비잔티움의 예술 양식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를 정복하고 무역을 통해 교류하면서 퍼졌으며, 이곳에서 그 양식은 12세기경 변형된 형태로 남아있다가, 이탈리아 르네상스 예술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주게 된다. 동방 정교가 확산하면서, 비잔티움 양식은 동유럽의 중심지, 특히 러시아로 확산되었다.[59] 종교 건축 등 비잔티움 건축의 영향은 이집트에서 아랍, 러시아, 루마니아 등 다양한 지역에서 나타난다.
비잔티움의 문학에서는 네 가지 요소를 꼽을 수 있는데, 그리스어, 그리스도교, 로마, 동방이 바로 그것이다. 비잔티움 문학은 역사, 연대기, 백과사전(포티오스 총대주교, 미카엘 프셀로스, 미카엘 코니아테스는 비잔티움의 위대한 백과사전 저자로 여겨진다), 수필, 세속 시문(비잔티움에서 유일한 진짜 영웅 서사시는 디게니스 아크리타스Digenis Acritas이다)으로 이렇게 다섯 가지로 분류하기도 한다. 또 그 밖에도 교회와 신학 문학 및 민중 시가가 있다. 현존하는 비잔티움의 두루마리 서적 2,3천여 권 가운데, 세속 시가, 역사, 과학, 의사과학(pseudo-science)을 다룬 책은 330권에 불과하다.[60] 비잔티움 제국의 세속 문학이 가장 발달한시기는 9~12세기경이며, 종교 문학(설교문, 전례문, 시, 신학, 신앙 논문 등)은 훨씬 이전인 로마노스 시대에 발달하였다.[61]
중세 시대에 유일하게 오랫동안 안정을 유지한 나라인 비잔티움 제국은 서유럽과 동떨어져 있었다. 끊임없이 이민족의 공격을 받은 비잔티움 제국이 방파제 역할을 하여 서유럽은 페르시아, 아랍, 셀주크 투르크, 그리고 한동안 오스만 제국과 거리를 둘 수 있었다. 어떤 학자들은 가령 비잔티움과 아랍의 전쟁 덕분에 샤를마뉴가 부상할 수 있었다고 보기도 하며,[62] 또 봉건 제도와 자급자족 경제에 큰 자극을 주었다고도 한다.
수백년간 서방 역사가들은 '비잔티움적', '비잔티움주의'라는 말을 '쇠토, 믿을 수 없는 정치, 복잡한 관료제'를 뜻하는 말로 썼으며, 이 말 속에는 비잔티움 문명과 남동부 유럽의 비잔티움이 남긴 유산에 대하여 대단히 부정적인 평가를 담고 있다.[63] 비잔티움주의(Byzantinism)이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종교ㆍ정치ㆍ철학에서 서방의 것과 반대되는 입장을 정의하는 표현이다.[64] 그러나 20세기와 21세기에는 서방 역사가들이 비잔티움 제국이 서방에 끼친 영향 등 좀 더 균형잡히고 정확한 방법으로 이들을 이해하고자 하는 것으로 보이며, 그리하여 비잔티움 문화의 복잡한 성격이 더욱 관심을 받으며, 전보다 더욱 객관적으로 평가되고 있다.[64]
헤라클레이오스 황제 이후로 제국이 완전히 그리스화 되었다는 데에는 이견이 존재한다. 헤라클레이오스 이후에도 여전히 라틴어가 제국의 법률과 행정 분야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다는 점, 또한 기존 로마제국에서 사용하던 황제의 호칭이 바실레우스로 붙여진 것도 이미 기원후 3세기 무렵부터 종종 있어온 일이며, 테마제도의 도입 역시 국가정체성의 변화라기보다는 행정제도의 발전일 뿐 실질적으로 군사 및 행정체계의 변화는 크지 않았다는 것이다.[출처 필요]
연도 | 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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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4년 | 콘스탄티누스 1세가 제국을 통일하고 유일한 로마 황제가 되다. |
325년 | 제1차 니케아 공의회가 개최되다. |
330년 | 콘스탄티누스 1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수도를 천도하다. |
431년 | 에페소스 공의회가 개최되다. |
451년 | 칼케돈 공의회가 개최되다. |
532년-537년 |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하기아 소피아 성당(그리스어: Αγία Σοφία 성스런 지혜)을 짓다. |
541년-543년 | 페스트가 유행하여 막대한 인구 손실을 입다. |
552년 |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이탈리아, 북아프리카, 에스파냐 남부를 탈환하다. |
730년-753년 | 우상숭배 금지를 이유로 성상파괴칙령이 내려져 성상파괴운동이 전개되다. |
843년 | 성상논쟁이 종결되어 성상파괴칙령이 파기되고 성상공경이 재수립되다. |
1014년 | 바실레이오스 2세가 불가리아를 정복하다. |
1054년 | 교회의 대분열이 일어나다. |
1071년 |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셀주크 투르크군에게 패배하고 로마노스 4세 황제가 포로가 되다. |
1096년-1204년 | 십자군이 제국의 영토를 지나가다. |
1204년 |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제4차 십자군에 점령당하다. |
1261년 | 미카일 8세 팔라이올로고스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복하다. |
1453년 |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침공, 전장에서 콘스탄티노스 11세가 전사하고 제국이 멸망. 로마 제국의 멸망은 476년 서로마 제국의 멸망이나 이 사건이라고 보는 시각이 대부분이다. |
1460년 | 제국의 마지막 영토, 제국령 모레아가 오스만 제국에 점령. |
1461년 | 제4차 십자군 직후 건국된 비잔티움계 트라페주스 제국이 멸망. 이 사건이 로마 제국의 멸망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
<비잔티움 제국사>, 게오르크(게오르기예) 오스트로스키 지음, 한정숙, 김경연 옮김, 까치,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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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황조 | 아우구스투스 (기원전 27년 - 기원후 14년) 티베리우스 (14년 - 37년) 칼리굴라 (37년 - 41년) 클라우디우스 (41년 - 54년) 네로 (54년 - 68년) |
군인 황제 | 갈바 (68년 - 69년) 오토 (69년) 비텔리우스 (69년) |
플라비우스 황조 | 베스파시아누스 (69년 - 79년) 티투스 (79년 - 81년) 도미티아누스 (81년 - 96년) |
네르바-안토니누스 황조 | 네르바 (96년 - 98년) 트라이아누스 (98년 - 117년) 하드리아누스 (117년 - 138년) 안토니누스 피우스 (138년 - 161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161년 - 180년) (공동 루키우스 베루스 161년 - 169년) 콤모두스 (180년 - 193년) |
난립기 | 페르티낙스 (193년) 디디우스 율리아누스 (193년) |
세베루스 황조 |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193년 - 211년) 카라칼라 (211년 - 217년) (공동 게타 211년-212년)마크리누스 (217년 - 218년) 엘라가발루스 (218년 - 222년)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222년 - 235년) |
군인 황제 | 막시미누스 트락스 (235년 - 238년) 고르디아누스 1세, 고르디아누스 2세 (238년) 푸피에누스, 발비누스 (238년) 고르디아누스 3세 (238년-244년) 필리푸스 아라부스 (244년-249년) 데키우스 (249년-251년) (공동 헤렌니우스 에트루스쿠스,251년) 트레보니우스 갈루스 (251년-253년) (공동 호스틸리아누스, 251년) 아이밀리아누스 (253년) 발레리아누스 (253년-260년) 갈리에누스 (260년-268년)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268년-270년) 퀸틸루스 (270년) 아우렐리아누스 (270년-275년)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타키투스 (275년-276년) 플로리아누스 (276년) 프로부스 (276년-282년) 카루스 (282년-283년) 카리누스 (283년-284년) (공동 누메리아누스, 283년-284년) |
테트라키아 | 디오클레티아누스 (284년 - 305년) (공동 막시미아누스 286년 - 305년,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 293년-306년, 갈레리우스 293년 - 311년)) 콘스탄티누스 1세 (306년 - 337년) (공동 갈레리우스,리키니우스 308년 - 324년), 막시미누스 308년 - 313년) |
콘스탄티누스 황조 | 콘스탄티우스 2세 (337년 - 361년) (공동 콘스탄티누스 2세 (337년 - 340년), 콘스탄스 337년 - 350년) 율리아누스 (361년 - 363년) 요비아누스 (363년 - 364년) |
발렌티니아누스 황조 | 발렌티니아누스 1세 (364년 - 375년) (공동 발렌스 (364년 - 378년) 그라티아누스 (375년 - 383년) (공동 발렌티니아누스 2세 (375-392) 마그누스 막시무스(383년 - 388년) :제위 찬탈 서방황제 |
테오도시우스 황조 | 테오도시우스 1세 (379년 - 395년) |
서로마 제국 | 호노리우스 (395년 - 423년) (공동 콘스탄티우스 3세, 421년) 발렌티니아누스 3세 (425년 - 455년)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 (455년) 아비투스 (456년 - 457년) 마요리아누스 (457년 - 461년) 리비우스 세베루스 (461년) - 465년) 안테미우스 (467년 - 472년) 올리브리우스 (472년) 글리케리우스 (473년 - 474년) 율리우스 네포스 - (474년 - 475년/480년)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 (475년 - 476년) - 오도아케르와 동고트 왕국으로 이어진다. |
동로마 제국 | 아르카디우스 (395년 - 408년) 테오도시우스 2세 (408년 - 450년) 마르키아누스 (450년 - 457년) 레오 1세 (457년 - 474년) 레오 2세 (474년) 제논 (474년 - 475년) 바실리스쿠스 (475년 - 476년) 제논 (복위,476년 - 491년) - 비잔티움 제국으로 이어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