퍈집된 세상을
에디톨로지 Editlogy로
읽는다
영어나 유럽어를 모국어로 하지 않는 '주변부 지식인'으로 살 면 가끔 참 억울한 일이 생긴다. 내가 이야기할 때는 아무도 귀 기울여 듣지않다가, 서구의 유명한 어느 누군가가 이야기하면 바로 사람 들의 주목을 받는 경우다. 나는 다음 두 가지 사건이 참 서러웠다.
첫 번째는 독일 통일과 관련된 일이다.
나는 베르린 장벽에 무너지는 순간을 현장에서 직접 경험했다.
통일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진행되았는가를 누구보다 잘 안다. 독일 통일은 너무나 황당한 사건 이었다.
동구권과 소비에트의 몰락이라는 그 엄청난 사건은 사실 우습게 시작되었다.
귄터 샤보브스키Günter Schabowski라는 동독 공산당 대변인이 여행자유화에 관한 임시 법안을 발표할 때였다. 독일어에 서툴렀던 외국 기자 가 언제부터 그 법안이 유효하냐고 묻자, 샤보브스키는 아무 생각 없이 "바로sofort" "즉시unverzüglich"라고 대답했다. 아주 사소한 말실수였다. 그러나 기자회견장에 있던 기자들은 “지금부터, 즉시 서독 여행이 가능하다!"라는 기사를 송고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동베를 린 주민들은 서베를린으로 통하는 관문인 '체크포인트 찰리'로 몰려 나왔다.
어찌할 바를 몰라 우왕좌왕하던 경비병들은 결국 주민들의 요구에 굳게 닫힌 철문을 열어주고 뒤로 물러났다. 베를린 장벽은 이렇게 황 당한 말실수로 무너진 것이다. 물론 언젠가는 무너질 장벽이었지만, 이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없었더라면 훨씬 격렬하고 잔혹하게 무너졌을 것이다.
독일 통일 후 20년 가까이 나는, 가는 곳마다 이 이야기를 하고 다녔다. 다들 그저 재미있으라고 하는 농담으로만 여겼다. 그런데 2009년 10월, 미국의 <월스트리트저널ws>에서 "베를린 장벽은 기자들의 질문 으로 무너졌다"라는 기사가 독일 통일 특집으로 나왔다.
내가 매번 설명하던 바로 그 내용이었다. 그러자 한국 신문에서도 바 로 그 기사를 받아 여기저기서 보도하기 시작했다. 한 TV에서는 특집 으로 다루기도 했다. 20년이 지나도록 내 이야기는 아무도 진지하게 듣 지 않았다. 그런데 미국의 권위 있는 신문이 한 번 보도하니 바로 '역사 적 사실이 되어버렸다. 내 입장이 한번 되어보라. 정말 환장한다.
두 번째는 스티브 잡스에 관해서다. 나는 오래전부터 "창조는 편집이다!"라고 주장해왔다.
21세기 가장 창조적인 인물로 손꼽히는 스티브 잡스의 탁월한 능력은 따지고 보면 '편집 능력'이다.
그러나 이러한 내 주장에 지금까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저 스티브 잡스에 관해 난무 하는 '구라' 중 하나로 여겨졌을뿐이다.
사실 객관적 척도가 있을 수 없 는 인문학적 주장은 듣고자 하는 사람의 태도가 결정적이다. 말하는 이 에 대한 기본적인 '리스펙트respect'가 없으면 아무리 우겨도 안 듣는다.
2011년 스티브 잡스가 죽자 아웃라이어」 「블링크」 같은 책으로 유명 한 말콤 글래드웰Malcolm Gladwell이라는 미국 작가가 '편집etiting'이야말로 스티브 잡스식 창조성의 핵심이라고 주장했다. <워싱턴포스트wp>에 기 고한 글에서 그는 "스티브 잡스의 천재성은 디자인이나 비전이 아닌 기존의 제품을 개량해 새로운 제품을 만들어내는 편집 능력에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스티브 잡스의 창조적 능력을 편집 능력 과 연관시켜 말하는 게 아닌가!
아, 이건 독일 통일의 경우보다 훨씬 더 분통 터지는 일이었다.
솔직히 말콤 글래드웰이 나처럼 한국어로 책이나 기사를 썼다면, 나 에게는 상대가 안 된다. 한국의 독자만을 상대로 하는 나와는 출판 시 장의 규모가 다르다. 물론 내 책도 일본어, 중국어로 번역되었다. 그러 나 전 세계적으로 번역되어 출간되는 그의 책과는 비교가 안 된다. 내 가 플라이급이라면 그는 헤비급이다. 아무리 내가 수년간 우겨왔어도 그가 한 번 이야기한 것과는 그 파급효과가 질적으로 다르다. 이건 뭐 몸무게 무겁다고 바로 위대한 사람이 되는 것 같은 느낌이다.
영어권, 특히 미국에서 논의되는 것들을 끊임없이 힐끔대야만, 비주류의 불안에서 벗어 날 수있는 주변부 지식인의 슬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