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cafe.daum.net/reformedchurchs
종교개혁사
루터의 종교개혁과 그의 신학
V. 1.0
이 책은 아민 저진(Armin Sierszyn)의 „2000 Jahre Kirchengeschichte“ 중에 제3권인 종교개혁사를 기본으로 정리를 한 것이다. 그의 1권 고대 교회사가 1995년에 나옴으로서 독일어권 복음주의권에서는 처음으로 대학 교과서로 사용될 수 있는 교회사 책이 등장했다. 이후에 계속해서 4권(근,현대교회사)까지 출판되고 그의 책은 계속해서 출판 횟수가 높아짐. 그는 스위스 STH의 교회사 교수이며, STH는 2008 까지는 독일어 문화권에서 유일하게 국가에서 인정하는 보구 개혁주의 신학대학이었다.
목차
I. 루터와 독일 종교개혁
1. 1517 이전까지의 루터
a. 수도원에 입단하기까지 b. 루터의 초기 수도원 생활 c. 종교개혁의 전환점으로 가는 길
2. 95개조 논제 계시사건부터 보름스 제국회의까지
3. 종교개혁으로의 진전.
4. 종교개혁의 전개
5.신교제후연맹의 전쟁패배와 아욱스부르크 종교회의
II. 쯔빙글리와 스위스 종교개혁
III. 칼빈과 제네바 종교개혁
IV. 유럽의 종교개혁
V. 급진적 종교개혁
VI. 종파형성시대 (가톨릭교, 루터교, 개혁교, 영국국교)
I. 루터와 독일 종교개혁
초기의 루터신학의 삶의 자리는
Wie kriege ich einen gnaedigen Gott? 내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자비에 도달할 수가 있을까?, 신론과 거기에 따른 구원론.
1. 개혁 이전의 루터의 삶
* 루터의 조상과 부모
- 루터의 고향은 튀링엔 숲가 아이제나하 근처의 뫼라(Moehra)이다. 선조는 자유 농민이였다. 루터의 남자쪽 혈통은 1759에 끊어짐. 여자쪽으로 이어지는 혈통은 아직 있다[1].
- 당시 튀링엔의 상속법에 따라 막내가 농장을 물려받기 때문에 둘째인 루터의 아버지 클라인한스는 1483 당시 번창하는 구리광산이 있는 아이스레벤으로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이사를 갔다.
- 그의 부인 마가레테는 1483.11.10에 마틴을 둘째 아들로 낳았다.
- 반년후에 만스펠트로 이사가서 루터는 13세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 그는 엄하지만 자애로운 아버지를 존경했다. 자기를 길러준 부모님을 회상하면서 감사했다.
- 루터의 아버지는 광산에서 처음에는 품삯꾼으로 일했으나 1498(루터 15세) 부터는 제련공장의 주임이 되었고, 1511에는 2개의 제련공장을 운영하였고, 6개의 갱도에 지분을 가지고 있었다.
- 1502(루터 18세)에는 시의원으로 선발되었다. 당시 시의원은 4명으로서 도시에서 가장 명망높은 자리였다. 루터의 가정은 루터가 성장하면서 같이 성장하였다.
...............................................................................
* 비텐베르크 신학교수
- 1511 여름(28세)에 루터는 에어프르트에서 다시 비텐베르크 교수로 부름 받았다. 당시 비텐베르크의 지도자는 수도원장인 쉬타우피쯔였다.
- 그는 루터에게 박사학위를 할 것을 권고했다. 루터는 이 계획에 완강히 반대했다. 그는 육신적으로 연약해졌고, 오래 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19]. 그러나 그는 수도승으로서 순종의 의무가 있었으므로 할 수 없이 승락을 했다. 당시는 교수들 중에서도 박사 학위를 하지 않은 사람이 많을 정도로 박사학위는 귀한 것이었다.
- 1512.10.19 (29세) 그는 궁성교회에서 박사학위 수여식을 가졌다.
- 그는 관습대로 성경에 맹세를 했다. 그 앞에서 성경은 먼저 닫혀젔다가 그 다음에 펼쳐서 그에게 전달되었다. 이는 그가 모든 비방자 앞에서는 성경을 닫고, 자신은 항상 열려진 성경 앞에서 숙이라는 상징적 행위였다. 그는 자신의 행위를 자주 바로 이러한 성경에로의 맹세에 근거를 두었다: „나, 박사 마틴은, 나의 의지와 관계없이 순전한 순종을 근거로 박사가 되도록 강제로 부름을 받아서 박사 직분을 수락하여만 했고, 성경을 신실하고 순전하게 설교하고 가르치도록 내가 가장 사랑하는 성경에 맹세를 했어야만 했다.“
- 루터는 바로 쉬타우피쯔의 성서신학 교수 자리를 물려주었다(lectura in Biblia)
- 그가 교수로서, 그리고 설교자로서의 밀도있는 성경공부는 종교개혁의 근원이 되었다. 그의 성경해석이 그를 종교개혁적 깨달음으로 인도하였다.
- 그는 이제 신학교수가 되었으므로 자신의 강의 내용을 자유롭게 정할 수가 있었다. 루터는 다음과 같은 강의를 했다:
- 루터는 먼저 강의를 위해 먼저 시편을, 각 줄 사이를 많이 띄어서 라틴어로 인쇄하여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 다음 학생들에게 먼저 각 절마다 교부들의 의견을 불러주어서 받아쓰게 하였다. 강의의 후반부는 루터 자신의 본문 해석을 불러주었다. 학생들은 이것을 노트에 필기를 해 두었다.
2. 종교개혁의 전환점으로 인도하는 길
* 참회자 루터와 의심하는 루터
루터의 성장과정은 당시 경건한 젊은이들의 전형을 보여준다: 중세 때에 하나님의 심판이 두려운 사람은 영혼의 평화를 얻기 위해 수도승이 되었다[20]. 루터의 경우도 이와 비슷하다. 가끔 찾아오는 우울증이 결국 그를 수도원으로 보낸 것이다. 그는 경건하고 열심히 고해성사를 하는 수도사였다. 처음에는 그에게 어느 정도의 평안이 찾아왔다. 그러나 그는 깊이 파고드는 성격이라서 시간이 감에 따라서 그에게는 새로운 의심과 시험[21]이 다가왔다. 이 시험은 탑실체험(Turmerlebnis)이라고 불리우는 그 체험 후에서 비로서 사라졌다.
루터의 시련은 오캄주의의 회개의 교리에서 시작되었다. 루터는 신학명제집[22]으로서는 오캄의 제자인 가브리엘 빌의 주석을 사용하였다. 그의 회개론에 의하면, 참회자는 (고해성사 때) 반드시 올바른 회개[23]를 먼저 해야한다[24]. 그런데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인간을 참회로 몰아간다. 즉 회개를 위한 전제는 하나님에 대한 순수한 사랑이다. 그러나 사랑에는 순수한 사랑 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종류의 사랑도 있다. 가브리엘 빌은 두 가지 종류의 사랑을 가르친다:
그런데 문제는, 지옥에 대한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기적인 사랑이므로, 단지 자신을 생각하지 않고 순수하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만 죄사함(absolutio)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사랑도 그것이 온전히 자신의 의지에 의해서 발생되어야만 유효하다. 참회자가 이러한 상태에 도달해야지만 자신에게 은혜가 쏟아 부어진다(infusio gratiae: 은혜의 부어짐). 그러면 „개인의 현재적 죄“가 사함받고 죄인은 „진정으로“ 의롭게 된다. 그러나 원죄는 비 개인적인 죄로서 항상 남아있다. 이것은, 사실 5세기에 어거스틴이 배척했던 펠라기우스가 가르친 것과 유사하다.
루터는 이 가르침에 따라서 회개를 통한 죄사함을 얻으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내면에 진정한 하나님 사랑을 만들어내려고 노력했다. 처음에는 이것이 이루어지는 듯 하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오랬동안, 그리고 깊이 관찰할수록, 자신이 가장 깊이 회개를 할 때에도 여전히 자기 사랑(지옥에 가고 싶지 않는 마음)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자기 자신을 더욱더 채찍질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내가 가장 경건해졌을 때, 나는 의심하는 자로서 제단으로 갔다. 그리고 의심하는 자로서 다시 제단을 떠났다… 우리는 완전히 깨끗해고, 죄가 한점도 없어야만 우리의 회개가 유효하다는 거짓 환상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승려로서 진지하게 투쟁했지만, 목표를 향해 가면 갈수록 오히려 멀어져갔다[25]…, 나는 그리스도를 엄격한 심판자로서만 알고 있었을 뿐이다. 그분으로부터 도망치기를 원했지만, 도망칠 수는 없었다“
즉 그는 하나님께 대한 완전한 사랑, 깊은 회개는 자기 스스로는 성취할 수가 없음을 깨달았다. 그는 인간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자신에게 굽어있는 존재”(Auf-sich-selbst-Verkrümmtsein, incurvatus in se)인 자기욕망(Ich-Sucht)이 결정적인 동력으로 자리 잡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심판하고 징벌하는 하나님앞에서 공포와 불안은 커져 갔다.
* 나는 애초에 멸망으로 예정되었는가?
그는 이러한 식으로 회개성사를 계속하다가 절망하여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얻을 수가 없다. 나는 특별한 죄인이다. 하나님은 나를 대항하신다. 왜? 하나님은 내가 그 분의 은혜를 얻기를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창조시부터 영원토록 저주받았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피조물을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 내버려 두시는가? 그분은 비참한 자의 고통을 보고 기뻐하시는 악한인가? 그가 예정에 대해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하나님을 찬양할 수 없게 되고, 오히려 모독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즉 그는 어거스틴이 가르친 예정론에 의해 그의 공포와 불안은 더욱 가중된 것이다. „나도 (하나님의 예정에 대해) 몇번이나 분노를 하여 절망의 깊은 수렁에 까지 빠진 적이 있었소. 나는 내가 인간으로 태어나지 않았기를 바랬었소“ 에라스무스에게 보낸 논문에서 이렇게 피력한 적이 있다.
* 쉬타우피쯔가 그리스도를 가르키다
쉬타우피쯔는 어거스틴의 신비주의와 토마스 아퀴나스의 영향을 받은 사람으로서 루터에게 더 많이 그리스도를 바라보라고 권고했다. 그의 위로의 가르침은: 하나님은 분노하시고 의로우시나 그리스도는 은혜로우시다. 당신이 예정에 대해 논하기를 원한다면, 그리스도의 상처로부터 시작하시오. 그러면 예정에 대한 모든 논쟁이 한 순간에 그칠 것이요. 죄인은 불평을 함으로써 예정에 대한 의심을 더 심화시키지 말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분과 자신을 동일화 시킴으로서 이것을 극복해야 하오.
루터는 이것을 받아들임으로써 고난을 당하시는 그리스도의 상이 그의 눈앞에 나타나게 되었다. 자신의 죄 때문에 절망하고 있던 루터는 쉬타우피쯔를 통해 다음과 같은 인식에 도달했다: 고통스럽게 절규하는 것은 하나님의 유기나 자신이 하나님을 멀리 떠났다는 표시가 아니라, 정 반대로 하나님께서 이 고통을 당하고 있는 영혼을 도우시고 계시며, 이러한 자에게 하나님이 가깝게 계시다는 표시이다. 하나님 스스로가 죄인의 마음안에서 회개와 뉘우치는 마음을 일으키신다. 그렇다. 하나님께서 모든 구원의 마음을 일으키신다. 루터는 자신의 고해성사 신부인 쉬타우피쯔에게 이러한 도움에 대해 평생동안 감사했다. „복음의 빛이 처음으로 나의 가슴속에 비추었다“
쉬타우피쯔는 루터를 유명론의 회개교리[26]로부터 끌어내어 복음의 위로(그리스도의 상처)로 인도한 것이다. 이것이 루터의 첫 회심이다: 은혜와 양심의 위로는 인간의 회개와 상관이 없고,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와 관계가 있다. 단지 그분만을 통해 하나님께서 구원을 일으키신다. 그러나 쉬타우피쯔는 루터를 본질적인 종교개혁적 인식으로 이끌지는 못했다: 그는 가톨릭 전형적인 원죄론을 신봉했고,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해서는 분명한 의견을 갖지 못었다. 즉, 그는 은혜를 강조하기는 했지만, 선행을 통한 구원의 교리도 믿고 있었다. 이러한 이중적인 입장은 루터를 장기적으로는 돕지 못했다.
* 탑실 체험
쉬타우피쯔의 도움은 영원한 것이 되지 못했다. 루터는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자비로우시다는 것을 그로부터 배웠다. 이것은 그가 일생동안 붙잡았다. 그런데 그에게는 의로우신 하나님이 서서히 이해가 되지 않게 되었다. 가톨릭과 쉬타우피쯔의 가르침에 따라 그는 의로운 하나님을 벌주는 하나님으로 자비로운 하나님과 구분을 하기 때문이다.
그는 롬1:17 „“하나님의 의가 복음에 계시되었다“의 말씀을 읽게 되었다. 이 말씀은 그에게 벼락과 같이 느껴졌다. 그때부더 그는 의로운 하나님을 증오하기 시작했다: „거칠고 혼미한 양심으로, 불붙는 갈증을 느끼며“ 그는 롬 1:17의 진정한 의미를 깨닽기 위해 수없이 그 말씀에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갑자기 그의 눈에 17절 후반의 말씀이 눈에 들어왔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이 말씀이 이제는 그의 종교개혁적 인식의 열쇄가 된다: 하나님의 의는 다름이 아닌 그분의 자비하심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들로 부터 우리 자신의 의를 제거하시기 위해 우리를 텅 비게 만드신다는 것은 그는 쉬타우피쯔로부터 오래전에 배워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신비주의적인 겸손의 종교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그는 성사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느낄 수가 없었다[27]. 그렇다면 그의 마음자세가 성사를 받기에 충분히 준비가 되지 않았음이 명백한 것이다. 그런데 이제 천국의 기쁨과 함께 새로운 인식이 그를 엄습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율법을 통해 죄인으로 만드시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우리 죄인들을 복음으로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아무 조건없이 일어난다. 조건이란 단지 불행만을 자초할 것이다.
루터가 „하나님의 의“를 인간적인 의미로 이해를 했을 때에는 의로운 하나님과 은혜로운 하나님은 모순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가 „의“라는 말씀을 그리스도를 통해서(von Christus her) 이해할 때 이것은 모순이 아니라 같은 말이었다: 의로운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바로 그 자비로운 하나님이었다. 이것으로 인해 인간이 의롭게 되기 위한 모든 종교적인 선행 조건이 없어진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요 은사이다: 죄의 인식, 회개, 믿음, 칭의, 성화. 규정 대신에 은혜가 들어온 것이다. 이것으로 인해 이제 가톨릭의 문제는 해결이 된 것이다.
„하나님의 의란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 의롭다 여심을 받고 구속함을 얻은 것이다. 나는 율법의 의와 복음의 의를 구분해야 한다는 것[28]을 배우게 되었다. 나에게는 단지 율법과 복음 사이를 구분하지 않았던 것이 문제였다. 즉, 나는 두 개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였고, 그리스도와 모세 사이에는 시간적 차이와 완성적 차이외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내가 양자를 올바로 구분을 했을 때에, 즉 율법과 복음은 다른 것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에 전환점이 왔고… 나는 이것이 다음의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하였다: 복음을 통해 하나님의 의가, 즉 수동적인 의(죄인이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의)가 계시 되었고, 이 수동적인 의를 통해 자비로운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믿음으로 의롭게 하신다는 것을…“
이제 루터는 어두운 긴 터널을 통과하여 드디어 빛을 본 것이다. 성령의 말씀을 통하여 스스로 하나님께서 그를 커다란 위기로 부터 해방시켜 주셨다. 아무런 조건없이 하나님께서 그를, 죄인을 의롭다고 선포하신 것이다. 믿음도 완전히 하나님의 은혜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와, 죽음과 사단으로 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그 분의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셨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은 가장 큰 계시이다. 십자가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를 알 수있다. 그러나 그분의 진노보다 훨씬 큰 사랑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독생자를 심판하시고, 그리스도는 우리 대신에 벌을 지신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기쁜 전환이 되는 것이고, 구원의 반석을 위한 단단한 반석이 되는 것이다.
루터는 이러한 새로운 인식의 장소가 그가 공부방으로 사용하던 비텐베르크 수도원의 탑 안에 있는 방이라고 진술하였다.
* 종교개혁적 인식의 싯점
- 루터는 1537년의 설교에서 말하기를: 우리는 빛을 다시 찾았다. 그러나 나는 신학박사가 되었을 때에도(1512) 그것을 몰랐다.
- 탑실체험의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의견이 있다. 1512 가을부터 1515 봄 사이에 이 시기를 잡는 사람이 있고, 1518에 이 싯점을 잡는 사람들이 있다. 아마도 그의 인식은 단계별로 일어나 최종적인 인식이 탑실에서 일어났을 것이다. 루터는 스스로에 대해 말하기를: „나는 나의 신학을 갑작스럽게 배운 것이 아니고, 계속해서 깊이 파 헤쳐야만 했었다“.
- 루터는 1513.8월에 시작되는 시편강의를 위해 거의 1년을 밀도있게 준비하였다. 이미 시편을 강의하는 첫 학기에 그는 은혜를 새롭게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그가 주석을 한 시편 71:2을 보면: „나의 의가 아닌 당신의 의 안에서, 의로운 자들이 당신 앞에 설 수 있는 그 의안에서, 나를 나의 불의와 죄로부터 해방시켜 주소서“
- 로마서 연구를 통해 이러한 새로운 인식이 넓혀져 갔다.1516초에 그는 어거스틴 수사인 멤밍엔에 있는 게옥 쉬펜라인(Spenlein)에게 편지하였다:
„나는 당신의 영혼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무척 궁금하오. „그리스도의 의“ 안에서 평안을 찾았는지 알고 싶소… 당신이 우리와 함께 있었을 때 이러한 믿음이 있었소.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것이었소. 나도 아러한 오류에 빠져 있었으나, 지금은 이 오류에 대항하여 투쟁하고 있소. 그러나 이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소. 사랑하는 형제여!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만나시오. 십자가에 달리신 그 분 말이오… 그 분에게 말을 거는 방법을 배우시오: ‚주 예수님이여. 당신은 나의 의요, 나는 당신의 죄입니다…’ 당신이 당신 앞에서 더 이상 죄인이 아니기를 원하는 이러한 무흠 상태에 도달하고자 하는 헛된 노력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시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단지 죄인 가운데에서만 계실 뿐이오… 당신이 그리스도의 백합이나 장미라면, 당신의 행위는 가시위에서 행하여진다는 것을 아시오“
- 자기 친구에게 이렇게 위로를 할 줄 아는 사람이면 그는 벌써 천국의 문을 통해 들어간 사람이 아닌가? 루터 스스로는 결정적인 전환의 싯점을 1518년에 잡는다. 그가 저술한 라틴어 서적들을 모아서 발간한 책(1545)의 서두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나는 내가 완전히 새로 태어났고, 열린 문을 통해 천국으로 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때 나에게 전체 성경이 그의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내가 하나님의 의라는 말을 증오한 만큼, 나는 이제 그 말을 그 만큼 큰 사랑으로, 나에게 가장 달콤한 말씀으로 찬양하였다… 이러한 깨달음을 가지고 두번째 시작하는 시편을 해석하게 되었다“
- 그의 1515/1516의 로마서 강의 원고에는 1:17에 그의 깨달음에 대한 내용이 없다. 그는 그것을 인쇄하지도 않았다. 그는 두번째 시편 강의(1518) 내용부터 인쇄를 시켰다.
- 그에게는 1513부터 쉬타우피쯔의 도움과 강의를 위해 준비한 성경공부의 도움을 받아서 (시편, 로마서) 복음적 자유의 빛이 계속해서 조금씩 밝아진 것 같다.
- 시작은 벌써 하였고, 은혜의 신학자 어거스틴에게 가깝게 접근을 하였지만, 성경이 주는 빛은 가톨릭 신비주의 신학의 주변에서 맴돌고 있었다.
- 다른 표현을 빌리자면, 1513부터 루터는 성서적인 개혁자였으며, 그의 이전의 개혁자보다 훨씬 깊은 식견을 가지게 된 것이다.
- 그가 쉬펜라인에게 보낸 편지(1516)는 그가 종교개혁자로서 많이 성장한 것을 보여준다.
- 따라서 루터의 종교개혁적인 인식의 싯점은 그의 초기의 강의의 시기, 즉 첫째 시편 강의(1513-1515), 로마서 강의(1515-1516), 갈라디아서 강의(1516-1517), 히브리서 강의(1517-1518)등의 시기에 그의 눈이 성서에 열리며 새로운 인식이 형성되었다.
- 그는 원치않게 일개의 수도승으로서 95개조 논제를 붙임으로서 한 순간에 세계적으로 유명해졌고, 사랑을 받고 또한 미움을 받았다. 바로 이 투쟁의 시기에, 즉 1517/1518의 겨울에 그에게 복음과 복음적 자유의 문이 완전히 열린 것이다.
* 루터가 깨달은 종교개혁적 인식[29]
- Ernst Bizer[30]은 현대신학이 제대로 간파하지 못한 루터의 종교개혁적 인식의 한가지 결정적인 요소를 강조하였다:
신비적으로나 성사를 통해 인간에게 은혜가 부어짐으로써 인간이 칭의를 받는 것이 아니다. 의란 또한 기독교적인 경건한 의식의 상태도 아니다(겸손, 믿음, 확신…). 또한 인간의 삶에 있어서 십자가나 시험이나 고난이 죄인을 의롭게 여겨주는 능력을 가진 것도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개인에게 일을 하시고 계시다는 표시는 될 수가 있다. 겸손이나, 회개, 죄의식이나 믿음은 종교적인 경험으로서 („그리스가 우리 안에 계신 것“) 칭의로 이끄는 길이 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이러한 모든 체험은 종교적인 인간이 상대적인 것 같이 상대적이며 흔들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중세신학의 오류였으며, 또한 쉴라이어마하 이후의 신프로테스탄트 신학의 오류이다.
비쩌는 „들음에서 나는 믿음“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을 제시한다: 성서적이고 종교개혁적인 믿음은 하나님 말씀을 들음에서 나온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성사이며,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일으키신다“ 라고 루터는 1519의 성탄절 설교에서 말하였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안에서(만) 우리들에게로 오신다. 믿음은 말씀과 함께 서고 넘어진다. 그리고 이 말씀은 초대교회의 경건한 의식의 산물(현대신학의 주장)이 아니라 그것은 그 자체로 하나님의 창조적인 행위이다. 말씀은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돌아가셨다고 한다. 그리고 말씀 스스로가 우리에게 이 구원을 선물로 주신다. 루터가 나중에 말하기를 이 „의“는 경건한 인간에게 존재하는 적극적인(aktiv) 의가 아니라, 우리에게 낮설은(fremd, strange) 수동적인 의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거지에게와 같이 새로운 옷을 입히는 것이다.
[1] 필자의 집에 전기기사가 방문하여 책꼿이에 루터의 책이 많이 있는 것을 보고, 필자에게 목사냐고 물어봐서, 그렇다고 대답했더니, 자신이 루터 자손이라고 하면서 나중에 루터로부터 자기까지 이어지는 족보를 보내왔다.
[2] 문법을 주로 배우고, 웅변학, 논리학도 조금씩 배움.
[3] 여러 집들을 다니면서 노래를 불러주고 돈을 받는 학생 합창단.
[4] 학예부(Artistenfakultät). 소위 7학예는 3학예(Trivium, 문법, 변증법, 수사학)와 4학예(Quadrivium, 기하학, 산술, 음악, 천문학)로 이루어졌다.
[5] 이들은 via antiqua(구 방법)의 자연신학을 거부하고 믿음을 완전히 초 자연적 계시에 근거하는 당시로 보면 현대적 방법을 따름.
[6] Disputation
[7] Theologie der Anfechtung
[8] 아버지는 집안이 좋은 신부감을 골라 놓았다. 그는 이미 출세를 한 사람이었고, 루터가 집안을 더 일으켜 세우기를 원했다.
[9] Bettelorden(동냥수도원)이라고도 하는 구걸을 해서 운영을 하는 수도원. 프란치스코의 영향.
[10] 15세기 부터 수도원 규칙을 강화시키려는 개혁운동이 있었다. 이 엄한 규칙을 지키는 수도회를 Observanz라고 한다. 루터는 고행을 위해 이 수도원을 택한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는 자신이 대학에서 배운 같은 방향의 철학적-신학적방법이 지배하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11] 중세의 조직신학책
[12] 식탁담화 1538. 1월. TR 3, 3698
[13] Artistenfakultaet
[14] 그러나 이 이름없는 대학이 1530년 이후 몇 십년 동안은 유럽의 최고의 명문이 되었다.
[15] 자신이 졸업한 에어푸르트 학예부 대학이 아님.
[16] Johannes Reuchlin: 1455-1522 .그는 독일에서 히랍어와 히브리어를 과학적으로 연구를 한 사람이다.
[17] 인생의 한 큰 부분이나 전 인생의 죄를 회개하는 회개성사.
[18] 당시의 마틴 루터까지도 그것을 믿었다면, 종교적 세뇌의 힘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생각나게 하는 부분이다.
[19] 어거스틴 은자 수도원은 극단적인 금욕으로 30세를 넘기지 못하는 젊은이들이 많았다고 한다.
[20] 과거 한국에서 많은 젊은이들이 삭발하고 절에 들어가거나 목사, 신부가 되는 현상과 비슷하다.
[21] temptatio. 의심과 같은 이유로 받는 내면의 시련. 독일어로는 Anfechtung이라고 한다.
[22] 신학명제집(Sentences, 1140-1150)은 페트루스 롬바르두스의 4권으로 된 작품으로서, 그는 교부들의 중요한 진술(명제, sentences)을 모아서 조직신학적으로 정리하였다. 이것은 당시 조직신학 교과서로 사용되었으며, 석사과정에서 의무적으로 이것에 대한 주석을 쓰게 하였으므로, 많은 유명한 주석이 나오게 되었다. 가브리엘 빌의 주석은 루터 당시에 사용되던 유명한 주석 중의 하나였다.
[23] 올바른 회개는 참회이다(contritio cordis). 참회란 마음으로 자신의 죄를 슬퍼하고 아파하는 것이다.
[24] 성경은 인간 스스로가 먼저 참회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함을 가르친다.
[25] 그리스도께 가까이 가면 갈수록 자신의 죄가 더 드러남.
[26] 앞에서 언급한 오캄주의의 회개의 교리
[27] gratia infusa(주입 은혜): 성사를 받을때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은혜.
[28] 이것은 루터의 신학 이해에 있어서 하나의 중요한 포인트이다. 루터의 신학에서 자세히 다룬다.
[29] Reformatorische Erkenntnis
[30] „Fides ex auditu“ 1958, 3판 1966. 들음에서 나는 믿음. 교회사가, 루터 연구가.
첫댓글 좋은 자료 제공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파일을 통하여 눈으로 구경(?)을 하였습니다만, 시간 내어 정독하여 보겠습니다.
독일어 권(스위스)에서 보수 개혁주의 신학자가 저술한 유일한 교회사 책을 의역하면서 제가 나름대로 보충, 생략한 것입니다.
상당히 무게가 있고 유익한 글이니 정독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전체를 3회, 부분적으로 5-10회를 정독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