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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쓴 소도동과 소롯골 지명고
2023.09.07. 윤순석.
이 글은 2016.11.07년 저 윤순석이가 태백시청재직 중에 한국문인협회태백지부의 <태백문학>에 발표했던 「소도동 지명고」라는 제목의 글이였는데, 금년 2023년 여름에, 춘천 강원대학교에서 재직하고 계신 권혁진 강원한문고전연구소 소장을 통해 얻은 이세귀李世龜의 <유사군록遊四郡錄>을 참고하여 다시 고쳐 쓴 글이다.
태백산 소도동을 왜 방외동이라 했었고 소도와 소롯골은 어디서 기원한 이름이기에 우리지역에서 불려지게 되었나? 소도동에서「소도」라고 명명한 유래를 알기 위해「소도」에 대한 기록을 인터넷에서 찾아봤다.
<후한서後漢書>ㆍ<삼국지三國志>ㆍ<진서晉書>ㆍ<통전通典>등에 삼한지역의 소도蘇塗에 대한 기록이 전한다. 그 중 가장 자세한 기록인 <삼국지위서한전三國志魏書韓傳>에서는 소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귀신을 믿으므로 국읍國邑에서는 각기 한 사람을 뽑아 천신에 대한 제사를 주관하게 하였는데, 이 사람을 천군天君이라 부른다. 또 이들 여러 나라에는 각각 별읍別邑이 있는데 이것을 소도蘇塗라 한다. 큰 나무를 세우고 거기에 방울과 북을 매달아 놓고 귀신을 섬긴다. 도망자가 그 속에 들어가면 모두 돌려보내지 않아 도둑질하기를 좋아한다. 그들이 소도를 세운 뜻은 마치 부도浮屠를 세운 것과 같으나 그 행해진 바의 선악은 달랐다.
라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설명하고 있다.
이 기록중에서 「큰 나무를 세운다」는 대목에서 우리나라의 동구밖 경계지점의 솟대나 장승, 사찰의 일주문에 해당하는 일본신사의 도리이가 연상되고, 또 도리이는 대들보 종류인 종도리 중두리, 굽도리등의 「도리」와, 「소도」는 솟대와 음이 유사하면서 장승처럼 높이 솟아서 내외를 구분하거나 경계를 나타내는 표지물로 기능했던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 우리 태백지역을 다녀가신 선비, 유생들중 이들이 현재의 소도동 지역을 기술한 글을 통해 옛 소도동지역을 회고해 보고 소도지역 지명의 본뜻을 고증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여행기등을 남긴 분들을 찾아봤는데 소도지역에 대해 의미있는 글을 남긴 분들은 다음과 같다.
①서기1664년에 다녀간 윤순거, 윤선거(1610~1669)형제분,
②서기1680년에 다녀간 안동의 이보(1629~1710),
③서기1692년에 태백까지는 오지 않았으나 춘양 태백산사고지를 다녀가면서 그 지역사람들이 황지지역을 설명해준 내용을 기술한 이세귀李世龜(1646~1700),
④서기1719년에 춘양사람 강재항(1689~1756)
⑤서기1735년에 다녀간 이인상(1710~1760) 그리고
⑥서기1804년에 다녀간 강주호(1754~1821)와 ⑦1891년에 태백을 다녀간 송병선(1836~ 1905)의 글은 소도지역에 대한 기술이 간단하여 참고할 것이 없었고, 이외에는 서기1625년의 이시선(1625~1715), 1828년의 유정문(1782~1839 )과 1719년의 김재락(1798~1860)이 있으나 이분들의 글에는 소도지역에 대한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그리고 이들보다 앞서 삼척부사를 지낸 허목(1595~1682)은 <태백산기>라는 태백지역에 대해 전해들은 간단한 기록을 남겼다.
이분들이 「소도」에 대하여 남긴 문헌기록의 주요내용을 보면 아래와 같다.
서기1664년 4월15일(이하 모두 음력임) 황지와 소도지역을 여행했던 윤선거尹宣擧(1596~1668)가 지은 <파동기행巴東紀行>에서는 아래와 같이 기술되어 있다.
(혹시 저의 번역이 부실할 수 있어 해석문 다음에 원문을 병기하고 있으니 직접 확인하실 분들은 내용을 참고하면 될 것 같습니다)
4월15일
아침 일찍 출발하여 동점銅店에서 아침을 먹고 천천穿川(현 구문소)을 구경했다. 오후에 물을 거슬러 올라 열번이나 냇물을 건너 황지로 올라가려다가 길이 너무 험해 천천으로 되돌아왔다. 철암으로 상묘물上妙物 앞을 지나니 길이 아주 평탄하다. 수원水源을 보기 위해 곧바로 냇물의 근원을 따라 올라갔다. 저녁나절쯤 마침내 황지에 도착했다. 영월 형님의 행차는 어제 황지에 도착하여 오늘 아침에 방외굴方外窟로 향했다고 한다.
황지의 지형을 보자면 동서로 길고 남북으로 짧다. 주위는 수십리인데 평지를 이루고 있고 태백산 동쪽의 대박산 봉우리 아래에서 황지연못물이 나온다. 가끔 연못 가운데 색이 누렇기 때문에, 이것으로 황지라고 한다. 연못물이 솟아올라 바로 시내를 이루어 흐르는데, 아래위 연못과 방외굴의 물이 합쳐져서 큰 하천이 되고 천천穿川으로 들어간다. 이것이 바로 낙동강의 근원이다. 아래위 연못은 황지 동쪽에 있고 진짜 볼만하다고하지만 날이 저물어서 찾아가 보지 못했다. 방외굴方外窟은 황지서쪽에 있다.
저녁에 방외촌方外村으로 가서 형님과 같이 잤다.
4월16일.
아침에 방외굴을 지나 하방재를 넘었다.
十五日 早發 朝飯于銅店 觀穿川。午後溯流十渡 上于黃池 路甚崎嶇 自穿川還。由鐵岩之上妙物之前 則路極平夷 而爲觀水脈直溯川源。向夕方達于黃池。越行昨到 朝向方外窟矣。
蓋觀黃池之坪 東西長而南北短 周回可數十里 作一平陸。太白山東枝名大朴峯之下 黃池出焉 有時池中色黃故名以是云。池水涌出 卽成川 而注與上下淵方外窟之流 合爲大川 歸于穿川 是乃洛東江之源也。上下淵者在黃池之東 極可觀也 而日暮未及尋往。方外窟者在黃池之西。夕往陪宿于方外村。
十六日。朝過方外窟 逾何方峙。晝秣于業平莊 逾壯山峙。
라고 하여 방외굴方外窟 방외촌方外村이라는 ‘방외方外’라는 지명이 나온다.
이글을 보면
당시 영월군수였던 윤순거는 14일날 황지에 도착하여 15일날 아침에 방외굴(현재는 폐교된 태백시 혈동15번지 소재의 혈리분교에서 서쪽 70m에 위치한 혈암사 굴)로 향했고,
윤순거의 동생 윤선거는 15일날 오후에 황지에 도착하여 황지연못은 봤지만 날이 저물어 상하연上下淵(현 황지동623-50번지 일대)은 못보고 형인 윤순거가 머물고 있는 방외촌方外村으로 가서 함께 숙박한 후
16일날 아침에 영월 군수 윤순거 일행이 전날 이미 구경한 방외굴을 지나서 하방재로 간다.
그런데, 윤순거 윤선거 형제가 함께 숙박한 숙박지는 방외굴(태백시 혈동 산36-2번지 하천가의 현 혈암사 굴)에서 여행경로 방향인 하방재(현 화방재)쪽이 아닌, 그와는 반대방향인 사내골, 소롯골, 현 소도동사무소 방향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영월군수 윤순거일행은 방외굴을 보고 나서 갔던 길을 뒤돌아 방외촌으로 가서 숙소를 잡고 쉬다가 뒤늦게 온 동생과 합류하여 함께 자고, 다음날 다함께 다시 방외굴을 지나서 하방재로 간 것이다.
영월사또 윤순거의 행로는, 황지 ⇒ 방외굴方外窟(현 혈암사 굴) ⇒ 황지방향으로 뒤돌아 방외촌에 가서 동생일행과 합류 및 숙박하고 ⇒ 다시 방외굴 ⇒ 하방재.인 것이다.
방외굴 동쪽으로는 사내골, 소롯골, 소도리 그리고 황지지역 순으로 촌락이 형성되어 있고,
사내골은 태백향토사학자 김강산씨의 <태백의 지명유래>에서 ‘선비가 왔던 골짜기’라는 뜻의 ‘사래골士來谷’이라고도 불렀다하니 윤순거 일행이 여기에 묵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군수일행이 움직이는데 마부와 종들까지 한두사람이 수행하는 것도 아닐 것이니, 초가삼간 네다섯채에 농가주인이 쓰는 방은 제외해야겠고 나머지 빈 공간 한두칸씩 빌려서는 수용이 불감당할 것이다.
그 다음 숙박가능한 곳은 소롯골과 소도리인데, 소롯골은 골짜기 끝에 심원암이라는 절이 있던 골이라고도 하는데 사찰운영에 민가의 경제력이 필수적이니 소롯골 어귀에 민가가 있을 법도 하므로 이곳에서 묵었을 수도 있겠지만 다수인력을 수용하기에는 사내골이나 마찬가지일 것 같다.
소도리에는, 방외굴에서 5~10리쯤이고 도보로 40분 정도 소요되는 거리라 멀긴 하지만, 소도리점이라는 여행객이 묵을 수 있는 일종의 역참과 같은 시설이 있던 곳이니 아마도 소도리점에서 숙박했을 것 같다.
근데, 음.. 소롯골!! 음音 값이 심상찮다.
또, 서기1680년경 이보(1629~1710)가 쓴 <유황지기遊黃地記>에서는
정오가 지나기에 말을 재촉하여 박외동朴外洞으로 향해 가다가 바위굴을 구경했다. ... 박외촌朴外村에 도착하여 잠시 쉬었다가 다시 업평촌業平村으로 향했다... 어느덧 해가 서산에 뉘였뉘였하기에 급히 신절령新節嶺을 넘었다.
日加午促馬向朴外洞觀窟巖 行抵朴外村少憩 轉向業平村日欲銜山 急踰新節嶺
라는 기록이 있다. 즉, 이보는 황지연못을 구경하고 소도지역으로 가서 소롯골과 사내골 분기점을 지나쳐서 현 혈암사가 있는 곳의 굴을 구경했고
박외촌에 도착하여 좀 쉬고 나서, 다시 어평촌으로 향해가다가
해가 지려하기에 서둘러 신절령(=새길령, 사길령, 조도령)을 넘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보의 행로는 황지 ⇒ 박외동의 굴암窟巖(현 혈암사 굴) ⇒ 박외촌에서 휴식 ⇒ 어평방향으로 행보 ⇒ 신절령(사길령)을 넘었다고 이해된다.
서기1692년 이세귀는 태백산사고지를 향해가다가 각화사 아래쪽 석현리石峴里의 손몽청孫夢淸의 집에 투숙하게 되었는데 그 곳에서 집주인 가족들이 들려준 황지지역의 지리개황을 기술하였는 바, 다음과 같다.
하방재 동쪽은 소외所外(바깥)이 되고 소외所外는 즉, 외황지동(바깥황지동)이다. 외황지의 물은 동쪽에서부터 쏟아져 들어온다.
내황지는 발원지가 두 개인데 그 하나는 황지지역 골짜기속의 평지에서 용출하는 것인데 속칭 누리수라고 하고, 또 하나는 대박산의 화전에서 발원하여 나와서 평지에서 용출하는 용출발원수(황지연못)와 함께 남쪽으로 흐르다가 외황지 즉, 소도지역에서 오는 물과 합하여 동점으로 흘러가서 석문(구문소)를 뚫고 나간다. ...
하방재의 서쪽은 어평동이 되는데 물은 북쪽으로 쏟아져 내려가다가 벌판을 이룬다.
下方峴之東爲所外 所外卽外黃池洞 外黃池水自東來注焉。內黃池有兩源 其一源湧出谷中平池 俗號爲婁里藪。其一源出大朴山禾田 合而南流 與外黃池水相合 流下鍮店 穿石門而出...下方峴之西爲魚萍洞 洞水北注乃野。
라고 하고 있다. (이분이 쓴 <유사군록遊四郡錄>중 이 구절로 인해 전에 썼던「소도동 지명고」를 다시 쓰게 된 것임)
이 글에서 의문은,
실제 지형은
화방재가 분수령이 되어 서쪽으로 내려가는 물은 어평으로, 동쪽으로 내려가는 물은 사내골, 소롯골 그리고 소도당골 물과 합류하여 상장초등학교 앞에서 황지천과 합쳐진 후 낙동강 상류가 되어 동점 구문소로 흘러 내려가는 것이므로
정확히는 「외황지의 물은 동쪽으로 쏟아져 내려간다(外黃池水東注)」라고 하여야 하는데,
실제와 달리, 「외황지의 물은 동쪽에서부터 와서 쏟아진다(外黃池水自東來注)」라고 오기誤記한 것과,
어평의 물은 남서쪽으로 흘러내려가기 때문에 「북쪽에서부터 와서 쏟아져 내려가 들을 이룬다(洞水自北來注乃野)」라고 하여야 함에도 「북쪽으로 쏟아져 내려가 들을 이룬다(洞水北注乃野)」라고 하여 사실과 반대의 기술을 한 것이 그것이다.
이렇게 하방재를 기준으로 동서 양쪽의 하천방향을 설명하면서 똑 같은 오류를 보이고 있다. 이는 아마도 직접 본 것이 아니라 전해들은 이야기를 다시 기술하는 과정에서 오기誤記된 듯하다.
여기서 특이한 기술은, 화방재를 아랫방향이라는 하방재下方峴로 표시했고 화방재의 동쪽 소도지역을 바깥이라는 뜻의 소외所外라고 표시한 것이다.
1719년에 강재황(1689~1756)이 쓴 <황지기黃池記>에는
다음날인 07월18일 새벽에 길을 떠나 10여리를 간 후 동북쪽으로 조도령을 넘으니 길이 더욱 높고 험하다. ... 동북쪽으로 박외촌博隈村에 도착했다. ...다음으로 구멍바위에 도착했다.
己丑晨發行十餘里 東北踰鳥道嶺益高險 ... 東北抵博隈村...至孔巖
라는 기록을 남겼는데, 1719년 7월18일 사길령을 넘어서 동북쪽인 황지방향으로 가다가 박외촌博隈村에 도착했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윤선거가 방외굴方外窟, 이보가 ‘박외동朴外洞의 굴암窟巖(굴바위)’이라고 했고, 85년쯤 뒤인 1804년에 이곳을 다녀간 강주호가 ‘혈동穴洞의 석굴石窟’이라고 불르게 되는 박외촌의 굴에 도착한 강재황은 이 굴을 구멍공짜를 써서 ‘공암孔巖’이라고 불렀으니 현 혈암사 굴을 지칭하는 것이다.
이보의 박외촌朴外村과 윤선거의 <파동기행>에서의 방외촌方外村, 강재황의 박외촌博隈村은 발음이 비슷하고, 같은 지역을 지칭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위치가 윤선거가 기술한 방외촌方外村은 방외굴 동쪽인데 반해, 강재황의 <황지기>에 나오는 박외촌博隈村과 이보의 박외촌朴外村은 방외굴의 서쪽으로 기술되어 있다.
이렇게 이해된다.
윤선거의 <파동기행>과 강재황의 <황지기>의 기록간의 연대차는 55년이고, 1680년 이보의 <유황지기>와 1719년 강재황의 <황지기> 사이의 연대차는 39년이다. 대충 윤선거의 기록이 있고 나서 40년뒤의 기록이고 그후 15년뒤의 기록이라서 조선조라는 시대를 감안해보면 언어생활에 세대차가 별로 없다. 즉, 당시는
농업경제사회이므로 토지에 일가친척이 다 메여있어야 했고 노동집약적 농경으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씨족공동체를 형성하고 내부적으로 다경험의 노인을 존중하고 옛 풍습을 고수함으로써 경험과 전통을 통해 결속하는 전근대사회로서
실제생활여건이나 관습상 거주이전이 자유롭지 않고 교통오지로서 문물교류가 빈번하지 않았던 시공상황時空狀況이였으므로
한 두 세대 격차로는 언어의 변천이 크게 일어나지 않고, 지명의 외곡 및 이전(지명도 옮겨지고 바뀐다)이 급격하지 않은 환경이라고 판단되고 보면,
방외촌과 박외촌 또는 박외동의 위치는 옮겨진 것이 아니라 두 지역을 포괄하는 더 광범위한 영역을 지칭하는 것이였다고 생각된다. 예를 들면 행정동 명칭인 황지1동과 황지2동 상장동이 모두 다 법정동인 황지동의 관할내에 있으므로, 상장동에 살면서도 황지동에 산다고 말한다하여도 틀린 것이 아닌 것처럼 방외촌 또는 박외동은 광역의 지명이였던 것 같다.
또 1736년경 이인상李麟祥이 쓴 <유태백산기遊太白山記>에서는
처음에 입산하여 각화사에서 잤는데 절은 봉화로부터 50리 거리에 있었다... 5리를 더 올라가서 태백산 사고지를 구경했다. 날이 밝아지기 시작할 무렵 상대산의 중간 봉우리를 향해 올라갔다. ... 갈수록 수목은 점점 키가 작아지더니 상대봉에 올라서는 나무 한그루 없고 심지어 일척 일촌짜리 나무도 없이 바람만 불 뿐이었다. ... 드디어 동북쪽으로 길을 내며 천왕당을 향해갔다. 해가 지고 달이 나오니 다만 보이느니 공제선위의 나무만 보인다... 천왕당에 도착했다. 인정시까지 도착하기로 기약했는데 드디어 60리 길을 온 것이다. 앞을 향해 가면서 주막을 찾아봤다. ... 소도리 주막에 도착했다. 이때는 이미 삼경의 밤이고 무릇 20리를 온 것이다.
始入山宿覺華寺 寺距奉化五十里... 上五里觀史閣... 天始明始向上帶山之中峰也... 林木漸短及登上帶 便無尺寸之木 而只有風矣... 至天王堂約人定時 而纔行六十里, 向前尋店舍... 抵素逃里店 夜已三更凡行二十里
라고 하여 춘양 각화사에서 여명에 산행을 시작하여 상대봉을 경유하여 도착한 태백산에서 하산하다가 천왕당에 도착하니 10시경이였으며, 소도리 주막에 도착하니 밤12시경이더라는 내용이다.
방외굴方外窟, 방외촌方外村, 박외동朴外洞, 박외촌朴外村, 박외촌博隈村의 「방외方外, 박외朴外, 박외博隈」는 ‘바깓 동네’라는 뜻의 ‘밖에’라는 음 그대로를 이두식 즉, 한자를 발음기호로 표기한 것이라고 판단되고,
이세귀의 글에서 나타난 「소외所外」는 '박외. 방외'등의 ‘밖에, 바깥’이라는 음을 버리고, 뜻으로서 바깥인 외자를 넣은 「소외所外 = 바깥인 바」를 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소도리素逃里」도 '소도'라는 우리말 발음을 이두식 즉, 발음기호로서의 한자를 사용한 것에 불과하지만, 한자가 원래 뜻글자이니 만큼 발음기호이면서 단어의 뜻과 의미까지 설명 가능한 점을 기화로, 발음기호로 사용한 한자의 부차적 기능을 살려 '소도'라는 단어의 뜻과 의미를 작자가 현지 여행중에 파악한 대로 한문으로 서술한 것이라고 보여진다.
이상으로 살펴봤지만 당초 「소도」라는 이름이 어떻게 명명되어진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아 아래와 같이 추리해본다.
소도리와 박외촌은 다음과 같은 상관관계가 있다고 보여진다. 즉,
한국어가 훈민정음 창제로 인해 지구상에서 최광대폭의 발음영역을 가진 언어로 진화된데 비해, 일본어는 우리말인 고구려백제계통의 언어를 승계하였으나 섬나라에 갇혀 대륙의 진화방향과 시류를 함께 타지 못한 갈라파고스 섬의 동식물들과 같이 화석화된 언어에 비교할 수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고
우리말 고어를 연구할 때는 고유일본어, 특히 한자漢字의 일본어 훈을 비교연구하는 것이 거의 필수적인데,
‘바깥「외外」자字’를 일본어에서는 「소도そと(소또, 소토.로도 발음가능)」라고도 읽고 「가이がい」라고도 발음하는데 「소도そと」는 ‘외外’짜字를 한자漢字음이 아닌 훈으로 읽은 것이다.
설명하자면 「하늘 천天」을 한국에서는「천」이라고 한 개 음으로만 읽지만, 일본은「천天」이란 한 개의 글자를 「덴(천이라는 한자 발음)」이라고도 읽고 「아메あめ 또는 아마あま」라고 훈으로도 읽고 있다.
우리는 「천天」짜를 글자 익힐 때만 「하늘 천」이라고 훈과 음을 다 함께 읽지만, 「천지天地, 천하天下, 천상天上」등과 같이 한자가 두 개 이상 조합된 단어로 되어 있으면 우리는 「하늘」이라는 훈은 빼고, 「천지, 천하, 천상」과 같이 「천--」이라고 한자음만으로 읽는데 비해,
일본은 「천지, 천하, 천상」등의 단어를 보고 「덴찌, 덴까, 덴쇼」라고 한자음으로도 읽는 한편, 「아마츠찌, 아메카시타, 아메노우에」등과 같이 훈으로도 읽어, 훈과 음을 선택적으로 다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즉, 漢字를 특이하게도 두가지 방법으로 읽는 것이다.
여기서 합리적인 추리를 해보자면,
오랜 옛날부터 「불쑥 높이 솟아 경계를 이루는 고개나 산마루 같은 지형지물 또는 솟대같은 구조물」 로서 ‘경계와 바깥’이라는 뜻과 상징을 나타내는 순수 우리말 고어古語인 「소도(또는 소또, 솟또, 소토), 솟대, 솟도리」등의 단어를 사용되어 왔는데,
서기757년 우리 고유지명을 일괄 한자로 표기하게 한 신라 경덕왕의 한자표기 전용정책이 있었고, 신라말 구산구종의 불교영향으로 유명사찰이 전국 명산에 분포되고 산간벽지까지 소통되는 교통망에 힘입은데 이어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지나면서 인구증가와 교류가 더욱 활발해지고
여기에 더하여 한문문화가 일상 언어생활에서 순수우리말을 꾸준히 대체하여 옴에 따라 한문의 영향력이 십승지보다 더 심심산골인 태백산지역에까지 확대 및 보편화되어 「경계바깥, 바깥 동네」라는 의미의 우리말「소도」를 이두식 표기로 '소외所外'와 같이 표기할 때도 있지만,
이때까지도 일상에서는
여전히 ‘소도’와 ‘밖에’라는 두가지 우리말이 병행해 사용되어 오다가 문자로 표기할 시에는 ‘밖에’라는 단어가 더 선호되어 쓰였던 듯하다. 원래 소도는 '경계지점 이라는 점의 개념'이였다가 '경계와 그 너머'를 아우르는 개념으로 확대된 것이라고 판단되고 '밖에'는 당초부터 '경계 너머에서부터 시작되는 공간'이라는 개념적 차이가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서기 1664년에 황지를 다녀간 윤선거의 글인 <파동기행>에서 나오는 「방외方外」라는 표기를 예로 들자면, ‘소도’라는 전래 음은 버리고 ‘밖에’ 라는 발음을 선택해 ‘방외’라고 하되, 발음기호를 뜻글자인 한자를 사용하는 것에 착안하여 중의적重意的으로 바깥이란 뜻의 외外자 즉, 뜻으로의 ‘바깥’인 '외外'자를 넣어 ‘하방치의 바깥 동네(하방치외촌下方峙外村)’ 곧,「방외方外」로 표기한 듯하다.
그리고 1680년에 태백을 다녀간 이보가 쓴 <유황지기遊黃地記>에서는 「박외朴外」로 표시했는데, 이 「박외朴外」의 예에서도 우리음 ‘밖, 밖에, 바깥’을 이두식 한자로서 ‘박에朴에’라는 발음을 표기하는 한편, '박에'의 '에' 짜字 자리에는 발음이 비슷한 ‘외外’짜字를 써서 바깥이라는 뜻을 또한번 중첩적으로 나타냄으로써 순수우리말과 한문투의 단어가 섞이는 언어생활 풍습을 알 수 있게 한다.
서기1692년 이세귀의 글에서 나타나는 ‘소외所外’는 「화방재(또는 어평재)동쪽의 마을」을 「바깥 동네」 내지 ‘밖’이라는 뜻의 순수 우리말 상고음인 「소또」로 음을 표기했지만 이 경우에서도 발음기호로 쓴 한자가 뜻글자인 점에 착안하여 내용면에서도 밖이라는 뜻을 살린 것이다.
이것은 같은 음값인 소외골, 소뢰골, 소롯골, 솟또골, 소도골등과 상통하는 것이라 판단된다.
그러고 보면,
강재황의 <황지기>에서 「노령을 넘어 동남쪽으로 철암을 지났다 踰弩嶺東南過鐵巖」라고 하여 한학에 정통한 선비답게 현재의 「송이재」를 노령弩嶺이라고 한자漢字식 표기를 하였는데, 여기서 노령의 '노弩'는 「쇠뇌 노」짜字이니 당시 서민들은 지금의 송이재를 「쇠뇌고개」라고 불렀을 것으로 짐작되며(윤순석의 「송이재 소고」 참조),
1736년 이인상의 <유태백산기>에는
소도리점을 운영하는 남후영이가 이인상일행에게 황지지역을 설명하는 말 중에
「속어로 (꽃중에 꽃인) 목단을 함백이라고 하듯 (뭇 봉우리중에) 함백산이 가장 아름다운데 소룃고개에서 보면 제일 잘보입니다. 俚言呼牧丹曰含朴 玆山甚姸 宜望於素耒峴」라고 하여
지금의 「송이재」를 '소뢰고개素耒峴'라고 했으니, 뢰는「호미 뢰」자字이기에 호미고개 ⇒호이재(송이재 구간중 통리쪽에 있는 작은 고개를 호이재라 불렀음)이지만 소뢰고개素耒峴의 음으로 봤을 때는 '소뢰'로서 '소도, 솟또, 솟대, 쇠뇌'와 상통한다.
만약 「송이재」가 솟대나 도리처럼 불쑥 솟은 높은 산이나 재(고개)가 아니라 계곡도랑 또는 여울이거나 했다면 '밖에'라는 발음을 따서 명명되었을 것이지, '솟또, 소도' 계열의 지명인 '소뢰'로 발음되지 않았을 것이다.
민족의 말뿌리가 깊어 그 줄기에서 나온 단어는 소멸되기 어려웠던 지 ‘밖에’라는 음을 못 버려서 ‘방외, 박외, 박외博隈’로 써왔듯이, ‘소도’라는 뿌리말도 못버려서 ‘소외, 소뢰, 소도’라는 단어가 지속 나타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서기1719년에 다녀간 강재황이 쓴 <황지기黃池記>에서 보이는 ‘박외博隈’는 아예 ‘밖에’라는 우리말이고 보면, 한자는 그저 발음기호(이두)일 뿐이라고 볼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혀짧은 훈장이 ‘바단 풍(風)’하면 학동들이 ‘바단 풍이’라고 그대로 따라하듯, 「‘밖외(外)자를 쓴다’는 설명」그 말 자체를 그대로 옮겨 적은 단어라고 생각되어진다.
부언하자면,
‘소도’라는 단어와 '밖에'라는 단어를 일상 구어口語에서는 지속적으로 사용되었지만 문자로 표기할 때는 문자생활의 시류時流상 '소도' 보다는 '밖에'라는 발음을 더 선호한 듯하다. (물론, 내 생각입니다... ^^ )
서기1736년 이인상李麟祥이 쓴 <유태백산기遊太白山記>에서의 ‘소도리’의 설명은 앞에서 했으므로 생략한다.
한편, 상고시대부터 신라통일시기까지, 영토관념은 「대동강 이남은 전부 신라 땅」이라는 지금과 같은 국경선國境線내의 면적 단위가 아니라, 구멍 숭숭 뚫린 치즈나 식빵과 같이, 심하면 골다공증환자의 골밀도 엑스레이 사진처럼, 행정력이 사실상 미칠 수 있는 읍과 읍, 그리고 이를 연결한 도로정도가 영토라고 인식했다고 보면 가장 확실할 것이라 이해된다. 삼국시대에 한반도 중남부에 말갈족이 출몰했다는 기록은 이러한 배경에서 이해될 수 있는 바,
만약, ‘소도’가 우리가 어려서부터 배워온 대로 상고시대의 치외법권 지역을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는 국가공권력의 직접적 지배하에 있는, 그리고 인구번창하는 평야지역이나 소출이 풍족하여 빈부격차가 악수귀천樂殊貴賤으로, 례별존비禮別尊卑로, 정치권력으로, 신분제도로 발전한 지역에서나 있을 법한 이야기이고,
상고시대 행정력이 미치지도 못했을 태백지역 같은 산속 무인지경에서는
치외법권지역과 법치지역을 구분하여야 할 하등의 필요조차 없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에,
‘하방재 동쪽을 바깥이라고 한다’는 문헌상의 소도의 뜻을 실증적으로 살려 ‘소도’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외형상 높이 솟아있는 자연물이나 구조물을 경계로 삼아 어떤 권역을 나타내는 기준점의 단어였을 거라고 판단한다.
그럼, 소도동이 바깥이라고 한다면 그 당시에 안쪽은 어디를 말하는지 궁금해진다.
이 또한 두가지로 해석된다.
첫째는,
'밖에'라는 발음을 '방외'로 표기한 것으로 보이는 윤선거의 '방외동'중 「방方」짜字에 촛점을 두고 뜻으로 풀이해 보면 ‘하방치의 바깥 동네(하방치외촌下方峙外村)’ 로도 이해할 수 있고, 또 이세귀의 글에서
「하방현지동위소외 下方峴之東爲所外」라고 하여 「하방재 동쪽은 소외 즉, 바깥이다」라고 하였으니 글자 그대로 하방재의 서쪽 어평마을쪽이나 천평쪽이 안쪽이라는 말로 이해된다.
이세귀의 글중 「민간에서는 황지연못을 누리수라고 불렀다 俗號爲婁里藪」라는 구절에서
'누리수婁里藪'의 '루婁'는 '새잡는 그물'이라는 뜻의 별자리 이름으로 서양식 별자리 위치로는 안드로메다 자리와 고래 자리 중간에 있는 양羊자리 성좌이며(추분날 저녁9시에 동북쪽 하늘가에 뜬 걸 볼 수 있다 : 안상현 저, 우리별자리 현암사 2000.3월 출판 참조), '수藪'는 늪지대라는 뜻이고 보면,
새나 짐승을 가두어 잡는, 또는 그런 식으로 사람을 고립시키는 곳인 늪지대라는 뜻이된다.
이보의 글에서도 황지연못 주변은 옛날 늪지대로 촌락이 발달하지 않았다는 정황을 감지할 수 있으므로 아마 지금의 황지 시가지 일대는 촌락이 발달하지 않은 듯하다.
그리고 태백시 통리 백산지역에는 백석평(2010년 윤순석 발표작, 「백석연못에 관한 소고」 참조)이 있는데 비해, 화방재와 사길령을 넘으면 천평이 있으니 백평보다는 천평이 더 번화한 지역이라는 생각 때문에 백평 소재 지역을 바깥이라고 했던 것인지도?
화방재에서 동쪽으로 황지방향의 소도동 일대와 상장동 일부지역이 모두 바깥이라는 말로 이해되므로 안쪽은 화방재 서쪽인 어평이나 천평 어디쯤을 말하는 것 같다.
두 번째는 역시 이세귀의 글에서
하방재 동쪽은 소외所外가 되고 소외所外는 즉, 외황지동이다. ....내황지(안쪽황지)는 발원지가 두 개인데 .....
下方峴之東爲所外。所外卽外黃池洞。內黃池有兩源 .....
라는 구절에서 하방재 동쪽을 '소외(바깥)'이라고 부르면서 다시 소외는 '바깥 황지 지역'이라고 설명한 것으로 보아, '안쪽 황지'라는 곳이 따로 있다는 내용이고 이는 안팍의 구별은 황지를 중심으로 기술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럼 안팍중에 '밖에' 해당하는 바깥황지인 외황지동은,
하방재를 시점 또는 종점으로 하고,
소도천과 황지천이 합류하는 지점(제방시설이 없던 옛날에는 벽화마을이나 식자재마트 일대가 누적된 하천범람으로 자갈이 불규칙하게 퇴적된 하천이었을 것이고 소통이 힘들어 자연적 경계였었을 것)을 또 한쪽의 시점 또는 종점으로 하는 소도천 중심의 중앙기준선과,
이 소도천유역으로 빗물을 내려 보내주는 주변부의 산간지역 전체를 아우르는 명칭이라고 추정되는데
그래서 지명이 '밖에(골), 방외(골), 박외(골), 소도(리), 소외所外(촌), 소뢰(골), 소롯골, 쇠뇌골, 솟또골, 솟대골' 등으로 불려졌고, 혹 불려졌지 않았을까 싶다.
(통계적으로 아직 확인은 하지않았지만 전국적으로 소뢰골이나 박외촌등으로 불려지는 지명이 '바깥'과 '솟대, 솟또'에서 파생된 것인지 여부를 확인해 볼 필요도 있겠다.)
= 이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