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公山)전투와 신숭겸(申崇謙)의 말무덤 전설
시대 : | 고려 |
시기/년도 : | 927년(태조 10) |
지역 : | 대구 팔공산 |
관련인물 : | 견훤(甄萱) 왕건(王建) 신숭겸(申崇謙) |
관련전투 : | 공산전투(公山戰鬪) |
상세내용
공산전투에서 왕건을 대신하여 죽은 신숭겸에 얽힌 이야기.
공산전투는 927년 대구 달성군 팔공산에서 후백제 견훤과 고려 왕건 사이에 있었던 큰 싸움이다.
후백제 견훤은 신라 조정의 친고려 정책에 무척 분노하였다. 그래서 고울부(현재 영천)를 기습한 뒤 바로 신라 경주로 쳐들어갔다. 신라 경애왕은 급히 고려 왕건에게 도움을 청하니 왕건은 경애왕에게 친서를 보내어 안심시키는 한편 친히 정예 기병부대 5천여 명을 거느리고 출발하였다. 그러나 이미 견훤은 경애왕을 자결하게 한 뒤였으며 신라 땅 위에서 갖은 만행과 약탈을 저질렀다.
견훤이 백제로 돌아가던 중 급히 신라로 오는 왕건과 공산에서 마주쳐서 전투가 벌어졌다. 고려군은 혼신을 다해 공격하였으나 백제군에게 완전히 포위되어 위급한 상황에 처하였다. 이때 신숭겸이 나서서 “제가 황제의 복장을 입고 나서서 싸우는 동안 이곳을 벗어나십시오!” 라며 왕건에게 자신의 지략을 따를 것을 간곡히 청하였다. 왕건은 달리 방법이 없으므로 눈물을 흘리며 허락하고 말았다.
이에 신숭겸은 왕건의 옷을 입고 어마를 타고 출정하였으며, 김락과 원보 장군 등도 그의 뒤를 따랐다. 이들은 “공격하라!” 라고 외치며 군사들과 함께 백제군의 진영으로 용감하게 달려가 싸웠다. 이 틈을 타서 왕건은 백제군 수중을 벗어나 개성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마침내 신숭겸과 김락 장군은 백제군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였고, 백제군은 신숭겸의 목을 베어 견훤에게 가져갔다. “아니야, 왕건의 목이 아니야!” 견훤은 무척 노여워했으나 이미 끝난 일이었다. 견훤은 두 장수의 목을 베어 왕건에게 보냈다. 이를 본 왕건은 “애석하도다” 하며 눈물을 흘리고 그들을 위한 팔관회를 열어주었다고 한다.
신숭겸과 김락을 위해 연 팔관회에 얽힌 이야기도 남아 있다. 팔관회 때 왕건은 두 장수가 없음을 슬퍼하여 허수아비로 그들의 모습을 만들어 관복을 입히고 자리에 앉혔다. 그러자 신숭겸과 김락의 허수아비가 일어나 술을 마시고 춤도 추었다고 한다. 이후 예종은 이 이야기를 듣고 감동하여 그들을 위해 도이장가를 지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님이 온전케 하온 / 마음은 하늘 끝까지 미치니 / 넋이 가셨으되 / 몸 세우시고 하신 말씀 / 직분 맡으려 활 잡는 이 마음 새로워지기를 / 좋다, 두 공신이여 / 오래오래 곧은 자취는 나타내신져.”
또 하나 신숭겸의 죽음에 얽힌 이야기 중 말에 관한 전설이 있다. 어느 날 신숭겸이 용탄여울에서 목욕하는데 큰 바위굴에서 용마가 나오고 있었다. 그는 즉시 그 말을 타고 5리 정도 거리인 유봉리의 산을 날아서 돌아 왔으며 이때부터 신숭겸은 이 용마를 타고 다녔다. 그 후 신숭겸이 공산전투에서 죽자 이 용마는 그의 머리를 물고 그의 고향 옆 태안사 뒤쪽으로 가져가서 3일간 울다가 굶어 죽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매년 3월 16일에 이를 기리는 산제를 지내며, 매년 신숭겸의 제사도 지내고 있다. 또한 신숭겸의 묘가 있는 춘천에서는 공산전투를 기념하는 의미에서 매년 외바퀴 수레 싸움을 벌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