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9 푸르메 미소원정대 후기
( )
네팔은 내가 몇 년을 꿈꾸던 나라였다. 나는 네팔의 설산이 보고 싶었다. 물론 설산이라면 스위스에도 있고 미국에도 있겠지만 나는 네팔의 ‘침범되지 않은’ 자연을 원했다. 나는 산에서 사는 사람들을 보고 싶었다. 지금 사람들은 산조차 갉아 먹는다. 하지만 네팔 사람들은 언제까지나 산의 품에 안겨 살아갈 것처럼 보였다. 그게 경제적 어려움이 그들을 그냥 그렇게 보이게 하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그들은 우리와 다른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궁금했다.
카트만두
‘카트만두’. 주옥 아주머니가 말한 대로 카트만두라는 말을 발음할 때는 무언가가 입에 착착 감긴다. 사원 이름에서 변화되어 온 이름이라는데, 많은 입을 거쳐 만들어진 이름인 만큼 누가 부르든 편한 이름이 되었나 보다.
우리는 카트만두에 일찍 도착했다. 처음 카트만두를 보고 느낀 네팔의 이미지는 내가 상상했던 것과 많이 달랐다. 나는 새파란 하늘에 푸르른 산들이 웅장하고, 돌집들이 아기자기한 산악도시를 기대했었다. (쿠스코처럼) 그러나 실제로는 해가 쨍쨍했지만 안개인지 먼지인지 하는 것 때문에 시야가 누랬고, 멀리 보이지도 않았다. 그리고 흙(모래?)이 많았다. 도시 건물들은 슬레트 지붕에, 밋밋한 벽돌집이다. 전체적으로 낮고 들쭉날쭉한 모양이었다. (낮은 대신 모양이 여러 가지로 창의적이었는데, 상상하지 못했던 독특함이었다. 나는 경제성장기의 한국을 상상했다) 노상방뇨를 하는 청년들이 민망한 것도 못 느낄 정도로 잘 보였다. 길에는 오토바이와 아기자기한 봉고차들이 너희 나라 규칙 같은 건 모른다는 것을 팍팍 티 내며 제 갈 길을 갔다. 차들이 마치 동대문의 사람들처럼 차도 위에서 경적소리와 함께 뒤섞였다. 하지만 그래서 속도가 안 나기 때문에 큰 사고는 나지 않는다고 했다.
알고 보니 카트만두는 56제곱 킬로미터로 서울의 10분의 1도 안 되는 크기의 도시였다. 우리가 카트만두에서 묵은 곳은 걸어서 왕궁과 5분 거리, (우리나라 동대문 시장과 비슷한)타멜 거리에서 3분 거리에 있었는데, 카트만두의 여러 유적지들을 가는데 모두 30분이 안 걸렸던 것을 생각하면 그 호텔을 잡은 게 횡재한 것 같이 기쁘진 않다.
우리 호텔 옆에 있었던 왕궁은 지나다니면서 자주 보았는데, 울타리 뒤에 높다랗거나 화려한 성채가 있기는커녕 건물 하나도 제대로 솟아 있지 않았다. 들어가 보고 싶었지만 아직은 일반인 입장이 되지 않는 듯 했다. 2007년 전 국왕 갸넨드라 왕이 퇴위하고 겨우 2년이 지났고, 총리가 뽑힌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사람들은 왕이 없었다는 듯이 빈 왕궁을 지나쳐간다. 그 전부터 원래 그랬을 지도 모르겠다. 왜 네팔에는 왕정이 이어졌을까? 마음대로 이유를 정할 수는 없지만, 개인적으로 왕정이 네팔을 더 신비롭게 해주는 것 같다. 이번에 여행에서 마오이스트를 조심하라는 충고를 받았는데, 가고 보니 이미 네팔은 마오이스트들이 휘어 잡고 있다. 성스럽다는 네팔에 마오이즘이 어울리지 않다고 말하는 건 너무 유치한가?
내가 카트만두 호텔에서 밖에 나가는 이유는 딱 두 가지다. 우리를 데리러 온 버스를 타러 가거나, 쇼핑을 가거나. 쇼핑은 항상 바로 옆의 타멜 거리로 갔다. 타멜 거리는 소개되어 있지 않은 가이드북이 없을 정도로 확실히 여행객들을 위한 거리다. 카트만두가 자신 있게 내놓는 쿠꾸리 칼, 파쉬미나 천, 마니차, 네팔 차, 전통 옷 같은 기념품들이 모두 모여 있다. 꽤나 복잡하고 넓지만 하루에 한 번씩은 갔으니, 타멜 거리 중심가만 세 번 정도 돌았을 것이다. 그 때마다 해인 언니, 경섭이, 영태 형, 용진이, 한이 형까지 한국 청년모임(?) 참가자들이 짝짝 붙어 갔다. 여기서도 흥정실력이 좋아야 했다. 영태 형과 경섭이는 무얼 사기보다 흥정하기에 더 재미를 붙인 것 같았다. 하지만 실력 쌓기는 그리 쉽지 않았다. 나는 혼자 하나에 700루피 한다는 모자를 200루피로 깎아 사서 좋아하고 있었는데 그 앞에 똑같은 모자가 50루피에 팔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기(?)를 당하고 난 뒤로 점원들에게 정나미가 떨어졌다. ‘이렇게 팔면 저 집에 못 들어가요’ 하는 점원의 표정을 믿어도 되는지 의심이 자꾸 들게 된다. 제품 가격에 대한 신뢰가 없다면 제품의 질을 따지지 않고 값 낮추기에만 급급하게 되는 것 같다. 값을 조정하는 일이 귀찮아선지 해인 언니와 영태 형은 정찰제의 합리성을 그리워했다.
중심지라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도시 전체가 여덟 시가 되면 예외 없이 정전이 된다. 그래도 사람들은 땅보다 낮은 반 지하 건물에서 장사를 한답시고 촛불과 전등을 킨다. 길거리 장사들도 저녁이 되어서야 주섬주섬 무언가를 설치한다. 어디든 밤거리 구경이 제일인데, 제대로 하지 못해 아쉽다. 대신 마지막 날에는 일찍 일어나 거리를 돌아다니기로 했다. 하지만 저녁이 일찍 시작된다고 아침까지 이른 것이 아니었다. 아마 한국이라면 대여섯 시부터 불이 켜졌을 텐데 여기는 아홉 시가 다 되어서야 상점가가 깨어나기 시작했다. 이 도시 사람들은 아침보다 밤을 더 좋아하는 것 같다.
네팔하면 또 생각나는 것이 ‘오체투지’다. 모든 몸의 부분을 이용해 신에게 정성스럽게 귀의하는 절이다. 네팔의 여러 마을에는 크고 작은 마니차(불교 경전이 적혀 있는 원통인데, 한 번 굴리면 경전을 한 번 읽은 효과가 있다고 한다)들도 있다. 인간이 아무리 해도 이겨낼 수 없는 네팔의 자연은 다양한 종류의 충실한 종교인들을 길러냈다. 불교든 힌두교든 모두가 독실하고, 네팔의 종교 유적들은 정말 정교하고 정성 들여 조각되어 있다. 모든 사원에는 경전을 적은 색색깔의 천이 만국기처럼 달려 바람에 휘날렸다. 카트만두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네 개나 모여 있다. 대부분이 종교와 관련된 유적이다. 시간이 하루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하루 안에 스와얌부나트 사원, 더르바르 광장, 파슈파티나트 사원 화장터, 보드나트 스뚜빠까지 네 개의 유적과 카트만두 Art Council에서 열리는 네팔 화가 단체전과 이화여대 의료 봉사 사진전을 모두 봐야 했다. 하지만 다행히 기사아저씨의 뛰어난 운전실력과 우리들의 체력이 있어 모두 소화할 수 있었다. 물론 전부 내가 만족할 만큼 제대로 본 게 아니라서 다음에 다시 가봐야 할 것 같다. 네팔에 대한 기본 지식이 우선 많이 부족했고, 이번 관광은 얼마나 네팔 사람들이 공을 들여 만들었는지, 그리고 현재 얼마나 유적을 관리하지 않는지 알게 된 시간이었다. (어쩌면 그렇게 사람들이 유적을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오히려 더 자연스러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특히 파슈파티나트가 아깝다. 파슈파티나트는 네팔 사람들이 이용하는 화장터 중 가장 큰 곳이다. 강변에서 시체를 태운 다음 남은 재를 강에 떠내려 보낸다. 하지만 사람이 너무 많아서 화장이 끝나기도 전에 시체를 강에 버려야 하는 일도 생긴다고 했다. 전에 명상을 배울 기회가 있었는데, 그 때 네팔 사람들이 얼마나 죽음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곧 죽게 된 네팔 사람들은 사원 안에 따로 마련된 죽음 준비실로 들어가 죽을 때를 기다리며 명상을 한다. 죽음을 준비한다는 것이 이들에게는 굉장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모두가 죽음을 두려워하기 마련이지만, 이들은 그 두려움을 죽음과 친해지는 것으로 승화시키려 하는 것이다. 우리가 파슈파티나트에 갔을 때도 이미 많은 시신들이 화장되고 있었다. 하지만 다들 하얀 천으로 싸여 있었고, 시체를 직접 볼 수는 없다. 화장터의 분위기는 굉장히 묘하다. 화장을 구경하는 사람들은 그냥 지나가는 동네 사람들처럼 보이는데, 다들 굉장히 조용하고 멍멍한 표정들이다. 네팔 사람들의 죽음은 그렇게 사람들 앞으로 내놓아져 있다. 사람들은 죽음을 지켜보면서 뭘 느낄까.
산
어릴 적에는 에베레스트, 히말라야에 대한 다큐멘터리와 영화들을 즐겨보았다. 특히 크레바스와 절벽을 넘나드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공포영화보다 더 스릴 있었다.
캬, 사람이 굴러 떨어질 때 말야, 새하얀 얼음바위에 철철 흐르는 피라니.
몇 십 km 밑 크레바스 속으로 떨어진 사람이 어둠 속에서 구조대를 기다리며 벌벌 떠는 장면은 어떻고.
어린 기억에 새겨진 시각효과는 굉장했다. 나에겐 설산을 정복하려는 사람들이야말로 인간의 극한을 넘어서려는 사람으로 보였다. 그런 점에서, 다른 시기를 선택할 수도 있었지만 이 여행을 꼭 잡아야 했다. 바로 그 엄홍길 대장님이 가시지 않는가! 누구보다 그런 고난과 사고를 많이 거치면서 살아오신 분이다. 그런 분을 대장님이라고 부르며 함께 여행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대장님과 첫만남은 대단히 부산스러웠다. 네팔만 몇 십 년을 다니셨을 대장님도 정신 없어 보이시는 모습이 역력했다. 하지만 곧장 참가자 한 명 한 명 눈을 마주치면서 악수해주셔서 난 금새 편해졌다.
트레킹은 도착한 지 하루 걸러 시작이다. 우리가 최종 목표로 삼고 있는 네팔 동북부의 남체바자르까지 걸리는 시간은 하루 정도. 즉 비행기로 루크라까지 간 다음 팍딩에서 하루를 묵고 고된 오르막을 올라 남체바자르에 도착해 하루를 지낸다. 그리고 남체에서 하루 동안 루크라로 내려오는 것이다. 남체바자르는 세계 최대 고봉이라는 에베레스트로 가는 길목이고, 꽤나 큰 마을이 만들어져 있다. 거기서 푸르메 치과의료봉사도 하게 될 것이었다.
루크라로 가는 경비행기 안에서 카트만두 시내에 있는 동안 보지 못했던 설산을 드디어 볼 수 있었다. 비행기를 기준으로 한 쪽은 몇 백만 년의 수염을 늘어뜨리고 근엄하게 앉아 있는 고봉들이고, 그 반대쪽은 산맥이 구름에 잠겨 있는 모습이다. 마치 폭포가 고봉에서부터 흘러내리는 것 같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설산들은 착하게만 보였다. 루크라로 가는 경비행기는 쉴 새 없이 길을 뚫느라 덜덜거려서 탑승객들은 마치 청룡열차를 탄 기분이다. 마음대로 내 속을 주무른다. 숨은 턱턱 막히고, 심장은 어쩔 줄 몰라 한다. 너무 재미있다. 하지만 창희와 제욱이는 비행기에 탈 때마다 가뜩이나 빈 속을 또 게워냈다.
30분 정도 되는 공중관광이 끝나고 산 표면에 그대로 지어낸 것 같은 루크라 공항에 내린다. 드디어 걷기 시작이다. 길은 잘 다져져 있었다. 저 멀리 산이 바뀔 때까지 산허리에는 좁고 노란 길이 이어져 있다. 산과 계곡의 경계는 분명하다. 잔풀이 별로 없어 산 위에 자라는 나무들이 잘 보인다. 임병웅 선생님이 말하시기로는 스트로브 잣나무라고 하셨다. 큼직큼직한 잣방울들이 송골송골 맺혀 있다. 네팔 고지대라고 한국과 완벽하게 다른 식생은 아니다. 앵초도 있고, 쑥과 민들레도 있다. 생각을 안 하고 멍하게 걸어가다 보면 그냥 우리나라 산자락을 걷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게 치부하기엔 너무도 높고 큰 산들이다. 하늘 반쪽을 집어삼키고 있는 산 뒤에 또 뾰족한 설산이 나를 내려다 본다. 한국에 없는 것은 있어도, 한국에 있는 게 여기에 없을 리는 없을 것 같다. 한국의 많은 언덕과 산을 올랐지만 히말라야의 산들을 보니 한국의 산이 자잘한 언덕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여기의 산들은 우리에게 길을 가지고 장난치지 않는다. 남체바자르로 올라가는 산은 정상까지 가는 다섯 시간 동안 계속 오르막이었고, 내려가는 길은 끝까지 계속 내리막일 뿐이었다. 나는 그게 더 나은 것 같다. 오르막 중에 이게 끝나면 다시 내리막일 것을 기대하거나, 내리막 뒤에 있을 오르막을 걱정하는 것보다 말이다.
루크라에서 팍딩까지의 길은 약간의 기복이 있긴 했지만 편한 길이었다. 말 그대로 산골의 흙길이다. 밭도 있고, 자동 스프링쿨러가 퐁퐁퐁 물을 뿌리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 집집마다 닭들이 줄을 지어 흙을 집어먹고, 길에는 야크 똥이 돌처럼 흔하다. (이것 때문에 밑을 보고 걸을 수밖에 없었지) 햇빛에 반사되어 푸른 풀밭이 너무도 평화로워 보인다. 영화 속의 많은 장면들이 떠올랐다. 어쩔 때는 <페인티드 베일>의 습한 바위절벽들이, 또 다른 때는 <브로크백 마운틴>의 침엽수가 우거진 산맥도 떠오르고. 지리산과 설악산, 덕유산의 풍경도 히말라야에는 다 들어있는 것 같다. 모든 산들의 어머니라는 듯이.
물길도 아름답다. 유리가루들이 넘치는 것처럼 파랗고 반짝거린다. 사람들이 말을 멈출 때 그 정적을 메우는 건 쿠르릉하는 물소리뿐이다. 호텔의 히말라야 래프팅 광고를 보고 어떻게 네팔에서 트레킹을 하나 했는데 실제로 보니 이보다 좋은 래프팅 장소가 없을 것 같다.
팍딩을 지나 몬주부터 남체까지는 무척이나 가파른 오르막이었다. 대장님이 걸음을 늦추셨는데도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다. 이렇게 긴 오르막은 처음 겪어보는 것이었다. 좁은 길이라 집도 한 채 없었다. 능선이나 허리를 감고 오르는 게 아니라 단단한 산 표면을 대해야 한다. 가도가도 정상이 나올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정상은 이미 오래 전에 포기했지만) 나중에 똑 같은 길을 내려갈 때는 ‘이 길을 어떻게 올라왔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가파르고 힘들었던 오르막이었던 듯싶다.
원래 나는 산을 오를 때 고도표에 그려져 있는 정상을 보고 오른다. 하지만 정상을 생각하고 걷지 않으니 오르는 순간순간이 절실하다. 여기서는 정상 따윈 생각할 수 없었다. 정상은 한계를 결정짓는 변명이었다. 이제는 우리가 정상을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겠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선글라스 너머로 구름에 걸린 무지개 덩어리가 보였고, 어느 언덕까지 올라서는 에베레스트와 로체도 보였다. 언젠가는 내 발을 그 정상에 딛게 하고 싶은 곳이다. 멀리 보이는 계곡 위의 구름다리는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아찔한 모양새지만, 밑으로 보이는 물을 보면서 걸으면 마치 신선이 된 것 같아 즐겁다.
하지만 그렇게 자연의 아름다움과 신비에 심취해 있는 와중에 대장님이 하시는 말씀은 이게 히말라야가 죽어가는 모습이라는 거다.
“원래 이 시기에 이렇게 더우면 안 돼. 이쯤만 되도 코트 입고 싸매고 다녀야 되는데.”
“저 봐. 원래 저 아래까지 눈이 쌓여야 되는데 지금 바위가 다 드러나잖아. 저 모래가 날아가서 눈도 누리끼리하지?”
대장님 말씀대로, 그 때 네팔의 기후는 건조하고 이상하리만치 따뜻했다. 3,000m에 올라가는데도 땀이 죽죽 났고 발을 옮길 때마다 모래바람이 훔씬 나서 사람 사이의 간격을 벌리고 가야 했다. 특히 모래바람은 나에게 큰 충격이었다. 모래층은 발로 계속 긁어도 없어지지 않았다. 무슨 사막도 아니고. 모래로 화장한 듯한 풀도 눈에 띄었다. 우리가 일으키는 모래바람이 저 먼 산 위까지 올라갈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니 조심조심하게 되었다.
아무리 산을 오르는 데 큰 돈을 물리고 규정을 해놓는다고 해도 히말라야는 보이지 않는 영향들에 끊임없이 시달린다. 하지만 내가 잠시 놀란 것은 산 곳곳에 SPCC(에베레스트 주변 지역의 환경을 보호하는 지역모임이란다)의 이름표가 붙여져 있는 쓰레기통을 보았기 때문이다. 네팔 내에서도 이런 모임이 자체적으로 만들어져 굴러가고 있었다. 마을도 있는데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트레킹 코스인 것에 비하면 내가 본 쓰레기는 많이 없는 편이다. 다른 누구보다 히말라야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 히말라야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할 때인 것 같다.
우리가 가는 트레킹 길목길목에는 몇 발자국 건너 집들이 있었고, 30분이면 다른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좋아 보이는 집도 있었고 나무도 대충 만든 오두막도 있었다. 산자락에 금방이라도 미끄러져 내려갈 형상으로 지어놓은 집들이다. 그리고 항상 상점에는 코카콜라, 환타, 산 미구엘 맥주가 진열되어 있다. (몇 시간을 힘들게 걸은 뒤 마시는 탄산음료의 맛!) 또 길 위에 조그만 황금색 봉지가 떨어져 있는 것이 자주 보였는데, 알고 보니 여기 사람들이 주로 피는 담배상표였다.
우리가 묵은 롯지들은 정말 좋았다. 우선 상상했던 것보다 시설이 너무 좋다. 방은 2인실인데 침대도 크고, 방마다 화장실이 있다. 창문도 큼직큼직한 게 전망이 좋았다. 밤이 되어 밖으로 나가면 곧바로 별바다가 펼쳐졌다. 시내처럼 여덟 시가 되어 불이 꺼질 것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고, 매 시간 때마다 먼저 가 있던 포터 분들이 양철 컵에 밀크 티를 담아주셨다. (가루우유와 홍차를 섞은 것이었는데, 내가 먹어 본 차 중에 가장 맛있었다. 집에서 시도를 해보았으나 성공이 잘 되지 않는다) 식당도 크고 잘 꾸며져 있다. 나는 트레킹이 무척 고되고 조용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너무도 좋은 대우를 받게 된 것이다. 나는 돌 바닥에 몇 겹을 싸매고 모두 함께 자는 우리들을 상상했었다. 밥은 네팔 전통음식인 달밧 한 접시 정도? 대장님과 함께 트레킹을 하면서 대장님의 연륜이 얼마나 깊은가를 느낀 시간은 길이 아니었다. 롯지와 식당에서였다. 우리가 묵은 롯지와 식사를 한 식당들은 거의 모두가 대장님과 이어져 있는 곳들이었다. 우리가 남체에서 묵었던 Khumbu롯지에는 따로 방문 앞에 ‘엄홍길(영문)’이라고 적혀 있는 방이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대장님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의 식사를 맡은 포터 덴지는 엄홍길 대장님과 몇 십 년을 함께 하면서 한국인보다 한국음식을 잘하는 포터가 되었다. 김치찌개와 라면은 물론이요, 떡국도 먹었고, 수육, 자장면까지. 집에서도 못 먹는 메뉴들이 가득했다. 더 달라하면 더 주기도 했다.
하지만, 현지음식을 두 끼밖에 먹지 못한 아쉬움이 아직까지 남는다. 트레킹 중에는 모두 한식이었고, 카트만두에서 호텔식과 몇 번의 현지 정식, 한 번의 중국 음식을 먹었다. 모두 너무 맛있게 잘 먹었지만 네팔의 일반적인 식사라는 찌아 한 잔과 밀전병 하나라도 내게는 충분했을 것이다. 특히 달밧을 손으로 집어먹는 맛은 정말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끈기가 없어 밥을 먹는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메인 요리는 밥이 접시 가운데 놓이고 야채와 갖가지 양념으로 볶은 고기, 커리 같은 것으로 밥을 비벼먹는 식이다. 내 입맛에 딱 맞았다. 재미도 있고, 손으로 먹는 게 불편하기 때문에 속도도 느려져 건강에도 좋을 테다. 하여튼 내가 식성이 좋은 덕이지만, 여행을 가서 한식을 먹는 것은 나에게는 정말 돈이 아까운 일이다.
히말라야를 이제야 처음 만났다. 산은 산답고 물은 물답고 하늘은 하늘다운 곳이다. 무슨 일인지 네팔은 내게 너무나도 친숙하다. 언젠가 무슨 일이 되었던 간에 나는 다시 히말라야로 갈 것이다.
의료봉사
이 캠프의 가장 중요한 목적 중 하나가 의료봉사였지만, 사실 시작이 될 때까지 나는 봉사에 대해 아무런 생각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치과의료라니! 내가 가장 무관심하면서도 무서워하는 분야다. 남체에 도착하고 나서 곧바로 준비가 시작되었는데, 막상 그 윙윙거리는 기계가 설치되려 하니 내가 먼저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치료가 잘못되거나 하는 일에 대한 두려움은 아니었다. 옆에서 그 아플 치료를 하는 것을 봐야 한다는 게 무서웠다.
나는 치과의사들에 대해 막연한 편견을 가지고 있어서, 치과의사 분들이 자기소개를 할 때 ‘아니, 저분들이 치과의사란 말야?’ 하고 놀랐었다. 그러니까, 너무 다들 젊으셨다. 그리고 치과의사라는 것을 증명할 만한 겉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봉사 당일이 되고 의사선생님들이 이름이 적힌 의사가운을 걸친 모습을 보니 폼이 나더라. 준비된 물품도 모두 반짝 반짝한 새것이었다. 이동준 선생님이 해주시는 약품과 도구 설명을 들으니 갑자기 용기가 솟았다. 이 정도 준비면 뭐든 될 것 같았다. ‘좋아, 해보는 거야’ 갑자기 흥분이 되면서 내가 일을 도울 수 있다는 게 감격스러워졌다. TV에서나 보던 라텍스 고무장갑을 끼고 마스크를 썼다. 안내원 창희를 따라 첫 환자가 들어왔다.
봉사는 아침 10시부터 해가 질 때까지 식사시간을 빼고 종일 진행되었다. 만들어진 조는 다음과 같았다. 물론 일이 중복되는 사람들도 많고 내가 헷갈린 부분도 있다.
교육 조(온 사람들에게 올바르게 이빨 닦는 법을 가르쳐주고 치약과 칫솔을 준다. 곧바로 네팔어로 통역되지 않기 때문에 수준급 영어 실력이 필요하다): 주옥 선생님, 영태 형, 미정 언니(시카고 언니)
진료 조(로비에서 환자들을 검진하고 진단서를 작성해 환자를 치료 조에 안내한다, 처방된 약을 나누어준다): 이금숙 선생님, 전형복 선생님, 창희, 제욱이 김우현 선생님, 황철호 선생님, 임병웅 선생님, 정훈이, 김희영 선생님, 용진이, 전귀영 선생님, 최태석 선생님
치료 조(진단서에 따라 환자를 치료해 준다):
(1) 석도준 선생님 팀(충치 치료 기계가 있다)- 석도준 선생님(전형적인 치과의사의 목소리였다), 나(물품 나르기, 충치 치료 중 물 주사 뿌리기 등 잡일 담당), 한이 형(라이트 비추기), 해인 언니(약품 믹싱하기, 도구 준비하기, 물품 나르기 등)
(2) 이동준 선생님 팀- 이동준 선생님(팀장이시다. 도중에 중요한 치료기구가 없어져 대체기구를 찾아오시느라 고생하셨다. 그래도 찾아서 다행이다), 경섭이(원래 이 팀에 있다가 석도준 선생님 팀으로 와서 석션─입에 고인 물을 빨아들임─역할을 했다), 김계희 선생님(혼자 잡일과 라이트를 모두 같이 하셨다), 임정진 선생님(약품 믹싱하기, 도구 준비하기, 물품 나르기 등)
멀티/기록 조- 구둘래 기자님(나중에는 라이트를 비춰주시는 센스 발휘), 신광영 기자님
통역(네팔 어로 치료과정이나 사항들을 통역해준 셰르파)- 고르바
이 정도이다.
내가 맡은 일은 생각보다 정말 흥미로웠다. 처음에는 내가 할 일이 하나도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충치 치료 중 이빨을 갈 때 발생하는 열을 막기 위해 물을 뿌리는 기계(이번에 처음 안 사실이다)가 고장 나 주사기에 물을 담아 뿌려야 하는 상황이 일어났다. 순식간에 손이 바빠졌다. 하지만 물을 얼마만큼 뿌려야 할지 막막했다. 내가 치과 치료를 받을 때 가장 불편한 것이 바로 이 물이었다. 간지럽고, 목이 막히기 때문이다. 그걸 지금 내가 주사기로 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환자의 목구멍에 출렁출렁 차오르는 물을 보며 나까지 불안해졌다. 하지만 선생님은 주저 말고 뿌리라고 하셨다. 처음에는 주사기 한 개도 다 쓰지 못했는데, 갈수록 양이 많아져 나중에는 주사기 두 개도 부족할 정도로 물을 쓰게 되었다. ‘흠, 어쩌면 그 고통은 나만 느끼는 것일지도.’ 하고 나 스스로를 추스르며 말이다. 다행히도 나중에는 고장 나 있던 석션 기계를 최태석 선생님이 손으로 하나하나 쓸 수 있도록 고쳐주셔서 물을 그때그때 빨아들일 수 있었다.
선생님이 충치 치료를 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몇몇 중복되는 동작은 몸으로 익히게 되었다. 가령 어느 때 솜을 집어준다거나 펜치같이 생긴 발치기구를 가져온다거나 하는 일을. 그래서 선생님이 준비한 물품을 가져가실 때는 마음이 통하는 것 같아서 꽤나 기뻤고, 정신이 없어서 준비를 못 해드릴 때는 별 것이 아님에도 무척 죄송스러웠다.
아무런 홍보가 없었던 것 같은데 사람들은 갈수록 점점 몰려왔다. 신기한 노릇이었다. 겨우 호텔 방 하나를 빌려 조촐하게 시작한 것인데 남체, 루크라, 카트만두에서 까지 사람들이 무상치료를 한답시고 오고 갔다. 나를 포함한 치료 팀 사람들은 계속 안에만 있어야 했기 때문에 어떻게 사람들이 몰려오고 기다리는지 보지 못했지만 이백이 넘는 사람들이 있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기계가 하나밖에 없어 충치 환자들은 많이 기다려야 했다. 게다가 환자들의 상태가 많이 좋지 않았다.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열 몇 살 소년은 치석이 벽처럼 쌓여서 몇 십 분 동안 잇몸치료를 받고 돌아갔다. (잇몸치료는 기계로 치석이 없어질 때까지 잇몸 속을 긁어내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걸리고 피도 많이 나더라) 치료를 받으러 왔으나 신경치료를 해야 하기 때문에 그냥 돌아가는 사람들도 많았다.
오전 진료는 12시 30분쯤에 끝났다. 밥은 맛있는 수제비가 있었지만 밥도 못 먹고 기다리실 환자들을 위해 모두들 탁자에서 일찍 일어나는 모습이었다. 나와 해인 언니도 얼른 뒤따랐다. 거의 30분만에 다시 오후 진료가 시작되었다. 사실 중간에는 쉬는 시간이 없었지만 우리는 치료마다 충치에 바른 약품이 마를 때까지 5분 정도를 쉴 수 있었다. 것보다 쉬지도 못하고 치료 팀 두 곳을 오가며 어떻게 치료가 되는지, 병이 얼마나 깊은지를 한국어를 곧바로 네팔어로 통역해준 고르바에게 모두가 감사해했다. 정말 대단한 셰르파라고 생각한다. 엄홍길 대장님도 중간중간에 찾아오셔서 응원해주셨다.
몇 명을 했는지도 모르는데 금새 창문 밖이 어두워왔다. 마지막 충치 환자를 끝으로 우리는 ‘끝-‘ 소리를 내질렀다. 물론 이 끝이 있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치료를 받지 못하고 돌아가야 했겠지만 결과를 보니 꽤 많은 사람들이 치료를 받고 갔다. 150여 명 가량이다. 전형복 선생님 말씀으로는 전직 치과의사가 하루에 30에서 40명 정도를 치료한다고 하시니 정말 이건 실력이 아니라 마음이 도와준 일 같다. 사실 처음에 봉사를 하루밖에 안 한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이게 무슨 봉사야’ 하는 생각도 잠시 했었다. 하지만 하루는 생각함에 따라 짧을 수도 있고 길 수도 있는 것 같다. 난 이번 행사가 충분히 앞으로 이런 봉사가 이어질 발판이 될 성과를 이루었다고 생각한다.
이번 봉사를 통해 자부심, 만족감 같은 것은 크게 느끼지 못했지만, 무엇보다 치과 진료에 대해 많은 것을 알았고(^^;;), 누구보다 내게 도움이 많이 된 것 같다. 지금까지 내가 한 봉사 중에 가장 만족스러웠던 봉사였다. 무엇이든 자기가 할 수 있는 능력으로 사람을 돕는 것이 가장 큰 만족을 주는 것 같다. 이번 봉사에 참여하신 모든 치과 의사 선생님들께서 느끼셨으리라 생각한다.
사람들
이번 여행에서 네팔 사람들과 한 사람이라도 주소를 나눌 만큼 친해지지 못해 아쉽게 생각한다. (여행자로서 가장 후회되는 일)
하지만 이번 여행에서 정말 좋은 동반자들을 많이 만나서 행복했다. 내 자신이 이렇게 밝게 사람을 대할 수 있다고 믿은 지가 오래 전이었다. 비록 9일에 지나지 않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많은 것을 주고 받았다.
어은경 간사님께선 꼭 (좋은 쪽으로!) 금붕어같이 생기셨다. 모두들 전형적인 동양 미인이라고 부르지만 정작 당신은 서양 미인이 되길 원하신다. 너무 다른 사람들을 꼼꼼히 챙겨주셔서 난 간사님이 힘든 줄은 잘 알아채지 못했다.
김성재 국장님은 언제나 먼저 밝게 인사해 주셔서 나도 따라 인사하게 되었다. 얼굴과 잘 어울리는(?) 직업들을 거쳐오셨다. 그리고 그 경력과는 상관없이 쾌활하셔서 너무 좋았다.
정말 이번에 많이 친해진 해인 언니! 언니와는 이야기를 나누든 나누지 않든 모든 시간이 행복하고 편안했어. 앞으로도 자주 보았으면 좋겠다. 여행을 갔다 와서 여러 빵들을 만들어 보았어. 난 언니가 짓는 그 어색한 표정이 좋아. 허허허.
음, 지금 생각해보니 푸르메 재단 사람들은 다 활달한 것 같다. 정태영 팀장님도 그랬다. 처음에 보았을 때는 ‘앗, 약간 까다로워 보이시는 분이다’ 생각했었는데 전혀 아니었다. 유머 감각이 대단하신 듯 하다. 이번에 큼직한 카메라와 캠코더를 처리하시느라 많이 애먹으셨다.
나는 최태석 선생님과 전귀영 선생님을 보면서 우리 엄마 아빠도 네팔에 오면 어떨까 생각했다. 두 분 다 내게 너무 편하게 대해주셨다. 최태석 선생님은 조용해 보이기도 한데 석션 도구를 하나하나 손으로 다 감아 고쳐주셨고, 조그만 일도 걱정해주시고 배려해주셔서 마음이 훈훈했다. 전귀영 선생님은 엄마처럼 솔직하고 발랄하신 분이었다.
창희와 제욱이, 정훈이는 정말 귀여웠다. 솔직하게 말하면 나는 초등학생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편이었는데, 웬일인지 이 셋에게는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었다. 창희의 이빨을 볼 때마다 귀여워서 웃음이 번지게 되었다. 창희와 제욱이가 우리 방으로 와서 조잘조잘 이야기해줄 때가 좋았는데. 정훈이도 친해지게 되어 다행이었다. 그리고 제욱이가 내 일기장을 뺏어서 보려고 한 일은 두고두고 잊지 않을 것이다. (전에 러시아에 갔을 때도 그러는 사람이 있었는데 말이지, 내가 어떻게 했더라…)
나와 함께 방을 쓰셨던 주옥 아주머니는 원래 우리 엄마와 친하신 분이었다. 물론 그게 나한테도 연결된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잘 지냈다. 아주머니가 밤에 술자리에 가실 때마다 나 혼자 자야 하긴 했지만 말이다. 또 아주머니는 굉장히 일찍 일어났다. 나이 같지 않은 감각과 재치를 가지고 계시다. 나도 아주머니가 사신 것 같은 가죽가방을 샀으면 좋았을 텐데.
윤리 선생님이신 김희영 선생님은 정말 대화가 윤리 수업이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진짜 윤리 수업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하시는 질문마다 뜻이 명확하달까? 하지만 말씀도 조목조목 잘 하시고 맞장구도 잘 쳐주신다. 이번 여행에서 밥을 잘 못 드시는 것 같았는데 원래 그러신 걸까? 또 우리 학교에 관심이 많으시다고 하셨다.
각각 한겨레 주간지와 동아일보에 기사를 내고 계시다는 구둘래 기자님과 신광영 기자님께선 은근히 바빠 보이셨다. 나는 기자들의 생활에 대해 관심이 많다. 대체 어떻게 몇 시간 만에 다음 날에 나갈 기사를 작성할 수가 있단 말인가? 어떻게 취재하고, 만약 기사가 다른 기자와 중복되면 어떻게 하지? 하는 등등. 하지만 말을 잘 못 전한 것 같아 아쉽다.
이금숙 선생님은 정말 재미있는 분이다. 치과 의사시고 대학에서 강의를 하신다고 하지만 수줍음을 타시는 것도 같고, 그러다가도 말을 꺼내시면 정말 재미있게 하신단 말씀이야. 모든 일정에 꼼꼼하셨다. 남체에서는 밤에 나를 비롯한 사람들을 데리고 나가서 별 이름들을 알려주셨다. 난 정말 선생님을 좋아했다.
이번에 경섭이가 아이들과 ‘정말로’ 잘 논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발견했다. 배우고 싶은 점이 생겼다. 경섭이는 정말 사람들을 진심으로 잘 대해준다. 언젠가 에베레스트를 올라갈 거라는데 실패하기를 바란다. 호호호. (가려면 나 먼저다)
용진이는 신출귀몰했다. 용진이는 가끔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을 때가 있다. 하지만 기분이 좋을 때는 누구보다 말하기 좋은 상대다. 이번에도 같이 여행을 가서 같이 지낸 것이 좋다. 앞으로도 용진이의 LL을 지켜봐 줘야겠지.
가진 게 힘밖에 없다고 했던 영태 형! 여러 일들을 거치면서 힘을 가진 것은 맞으나 힘밖에 없다는 것은 뻥이란 사실을 모두가 알게 되었다. 누구보다 다른 사람들에게 인사를 잘 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데 열심이었다. 마지막 날 영태 형이 같이 안 간다는 것을 모르고 형에게 인사를 못했는데, 괜찮겠지.
한이 형은 국제학부에 있다. 국제학부가 뭘 하나 싶었는데 3학년에 학교에서 지원을 받아 유학을 갈 수 있다고 한다. 국장님이 형이 여름에 군대를 가는 것을 두고 많이 괴롭혀먹었다. 초콜릿 통을 설산이 보이는 베란다에 올려 놓고 사진을 찍을 정도로 의미 있는(?) 사진 찍기에 열심이었다.
이번에 치과 의사 팀장을 맡으시고, 의료 기구를 찾기 위해 몸소 몇 시간을 걸어갔다 오신 이동준 선생님도 있다. 무슨 일인지는 알아보지 않았으나 여행 중 다리가 다치셔서 카트만두에서는 여러 일정을 포기하셨다. 하지만 언제나 밝으신 분이다. 담배도 많이 피우셨지.
산삼을 캐고 다니신다는 김우현 목사님께선 역시 목사님답게 말씀을 하실 때도 여러 경구들을 섞어가며 말을 늘이신다. 우리들 사이에서는 고산증과 여러 소화불량 증세 등등 병을 치료해주시는 도사님으로 유명하셨다. 나도 도움을 많이 받았다. 손을 따고 나니 신기하게 배 아팠던 것이 사라진 것이다.
석도준 선생님과 전형복 선생님은 부부인데, 두 분 다 치과의사이시다. 과연 부부가 모두 치과의사라면 병원을 운영하는 것도 훨씬 편할 것 같다. 회사 일로 싸울 필요도 없을 테고. 나와 같은 치료 팀이셨던 석도준 선생님은 치료 중에 신경이 날카로우실 줄 알았는데 실수나 불편함을 모두 넘겨주셨고, 환자에게도 무척 친절하신 분이었다. 전형복 선생님은 언제나 눈이 반짝 반짝거린다.
생긴 것으로는 임병웅 선생님이야말로 산山사람이다. 거의 회색과 흰색이 섞인 백발에 녹색 모자를 눌러쓰고 계시다. 풀과 나무에 대해서 많이 알고 계신 듯 하다. 굉장히 폼 나는 카메라를 가지고 계시다.
황철호 기장님. 기장님이라는 말을 누구에게 써보기는 처음이네. 나는 커서 비행기를 조종해 보고 싶었다. 여객기 조종을 업으로 삼는다면 기분이 어떨까? 뭣보다 기장님은 내 친구 민주와 친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많이 친해질 수 있었다. 편하고 재미있으시다.
이금숙 선생님이 무지 좋아하는 책을 쓰신 작가 임정진 선생님께선 무언가 만드시기를 무척 즐기신다. 이번 여행에서도 사람들을 위해 가방에 매달 리본을 몇 십 개 준비해주셨고, 이름표를 덮는 덮개도 손수 만드셨다. 나도 이번 기회에 선생님께서 쓰신 책을 한 번 읽어봐야겠다.
계희 언니(원래 선생님이라고 불러서 언니라고 바꿔 부르기가 많이 어려웠다)는 대구에서 올라와서인지 사투리가 구수하고 말이 많다. 페인팅 레이디라는 이름으로 일러스트와 함께 어른들을 위한 동화를 쓰고 계시다고 했다. 우리 집에도 달력이 도착했는데, 여행이 끝난 뒤 보니 정말 사람이 다시 보이는 느낌이다. 너무 예쁜 그림이었다.
시카고 언니인 미정 언니는 굉장히 세련되고, 아이처럼 기발하다. 거리에서 네팔 아이들과도 금새 어울리고, 네팔 여자들이 입는 전통 의상도 곧잘 소화해냈다. 특히 언니가 쓰고 있던 색색 실크 모자는 너무 예뻐 보여서 나도 하나 샀다. 미정 언니는 해인 언니와, 나는 주옥 아주머니와 같은 방을 썼는데 미정 언니는 주옥 아주머니와 잘 놀았고 나는 해인 언니와 잘 놀아서 교류(?)가 순조로웠다.
언제나 삶을 여행처럼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새로운 것들을 만나면 나까지 새로워지는 것 같기 때문이다. 여행은 언제나 흥분된다. 여기서 여섯 시간 떨어진 곳에 우리와 다른 외모로 다른 말을 쓰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옆에 있으면서도 우리의 대화를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우리와 다른 입소리를 낸다. 우리와 다른 기념품을 판다.
손으로 그 긴 쌀을 한 움큼 집어먹었을 때 느끼는 기분. 요상한 향신료 맛이 나는 수프를 한 숟갈 떠먹었을 때의 흠칫함. 책꽂이에 네팔어 책들이 줄줄이 꽂아져 있는 것을 볼 때 어리둥절한 것. 길거리에 마약으로 추정되는 하얀 봉지를 불었다 빨아들였다 하는 사람들을 볼 때 안쓰러운 것. 여덟 시가 되면 공급되는 전기는 다 꺼져버려 상점들은 촛불을 놓는다. 차도에 중앙선이 없어 어쩔 땐 마치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가 된 기분도 느낀다.
모든 것은 언제나 순간이다. 나는 새로운 것을 만날 때야 순간을 만족스럽게 보낸다는 느낌을 받는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내리면서 순식간에 일상이 내게 돌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일주일 넘는 시간 동안 동고동락했던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방학 동안 선택한 것 중 가장 만족스러웠던 일정이 끝났다. 당장 한 달 안에 수학의 정석과 영어 문법, 단어장, 독후감 등등을 해치워야 하는 학생의 솔직한 심정으로, 공항에 내렸을 때 부산으로 가는 공항버스를 잡아타고 싶었다. 하지만 ‘네팔에는 쉬러 간 게 아니야’ 하고 마음을 다시 다잡았다.
그래. 좋은 경험을 하게 해준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하고 난 이제 다시 내 자리로 돌아가야겠다. 다음에 다시 만나요.
첫댓글 어머나 꼼꼼하게도 썼네. 기특해라.
ㅋㅋ 금붕어라.. ㅋㅋ 좋은 말이지? ㅋㅋ
저 원래 쉬운 사람이예요^^
와우!! 장문의 소감문이넹ㅎㅎ근데...국장님께서 대신 입대해주신다고 했으니깐;; 마음이 편안하다 ㅋㅋㅋ 저두 조만간 짧은;; 소감문 올릴게요 ㅋ
국장님이라 하시면 어은경 국장님 말씀이신지요^^
ㅎㅎ
LL? 뭐지?
새봄에게는 상을 줘야해...사실 이제야 고백하지만 가장 내 눈에 띄던 여성(?) 저애는 후에 멋진 여자가 되겠구나..생각했지요. 난 왜 이케 여자가 좋지?-.-
제 딸이 정훈이 처럼 자라서 새봄이 처럼 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앗! 저 입대해요? ㅡ,,ㅡ ㅋㅋ
해야되긋네요
강추, 가보시면 세상이 달리 보일겁니다. 얼릉 가시와요.
ㅋㅋ밀어내는 분위기
새봄이 사람들을 새심하게 잘 보네.. 대단한 관찰력!! 기자하면 나보다 잘 하겠다~ㅎㅎ
새봄 역시 놀라우이!! 같은 방 친구로서 새봄 홀로 잠든 날들을 떠올리니 매우 미안하이. 새봄이도 나도 밤마다 즐거이 노닐다가 각자 귀가했다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수정중이니까 '밤마다 술자리'라는 표현은 좀 고쳐주면 어떨까? 술 마시는 것보다는 사람 만나는 즐거움이 훨씬 컸거든. 나에게는 너무나 즐거운 추억으로 남을텐데 표현까지도 아름답기를 요구한다면 너무 소심한가? 아무튼 글쓴이 맘대로 하기를 바래.
ㅎㅎ 소심주옥샘
네 글을 보며 더어욱 네가 다니는 학교에 관심이 가져지는구나,,,,학교때문이 아니라,,,네가 가진 많은 재능과 자원이겠지? 그렇게 생각할래,,,,,섬세하고 논리적이고 사변적인 네 글을 누구보다 아끼고, 네가 같은 원정대원이라는 게 자랑스럽기 그지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