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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의 땅 뉴질랜드와 호주 여행기
1. 여행에 부쳐
공료연수에 대한 배려차원에서 배우자를 동반한 해외연수를 보내준다는 이야기는 있었지만 하도 TV등에서 문제제기가 있어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러던 중 옛 동료로부터 군에서 연락이 왔는데 해외연수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할 것인지 집단으로 할 것인지를 의논해 주고 집단으로 간다면 호주나 유럽 쪽으로 했으면 하는데 어느 곳으로 가는 게 좋겠느냐는 문의가 있었다. 나로선 어느 곳이든 초행이었으므로 그들의 의견이 모이는 대로 따르겠다는 뜻을 전한 지 며칠이 되지 않아서 2007. 10. 19부터 10. 28까지 10일간호주와 뉴질랜드를 여행하기로 정하였다는 전갈을 받았다. 그렇지만 세 차례의 해외여행 경험이 있어서 인지 별 설렘은 없었다. 다만 세계지도에서 기억하고 막내가 어학연수를 위해서 다녀왔다는 그리고 캥거루와 양떼정도가 내가 갖고 있는 여행지의 전부였다.
2. 1일차 : 짧은 일본 동경 신승사 관광
10. 19. 10:40 김해공항 발 동경행 Kal기에 몸을 실은 지 2시간여 만에 동경의 나리타공항에 도착하여 현지 가이드의 안내를 받아 한참을 버스로 달린 후 뷔페음식을 들었다. 한식과 고기를 구어 먹을 수 있는 식당으로 메뉴판을 보니 우리 돈 1만 원정도의 가격이었는데 우리 식당과 비교해 보면 가격도 맛도 상당히 나았다. 식사를 마친 다음 민심의 안정과 국태민안을 위하여 서기940년 창건하였다는 신승사를 찾았다. 이절은 시주를 크게 한 사람들의 이름과 주소 또는 회사이름을 판으로 만들어 넓은 면적의 절 주변 옹벽에 빼곡히 붙여두고 있었다. 우리나라도 절을 중건하거나 창건 시에 시주자와 창건주를 위하여 비석을 만들어 두기는 하나 이처럼 수시로 시주자의 공덕(?)을 기록함에 따른 영민함은 따르지 못하는 듯하다. 절을 둘러보고 연이은 절 주변공원에는 바위를 쪼갠 돌이라고 하기엔 크고 바위라고 하기엔 작은 그런 돌들에 아주 노골적으로 금액과 이름을 적은 비석들이 부지기수로 서있었다. 우리나라라면 쉽지 않겠지만 배워볼만 하다고 생각했다.
귀로에 각종의 잡화류를 파는 상가에 들려서 쌀값에 관심이 많은 나는 그 가격을 살펴보았는데 千葉縣産 (こしひガり)5Kg들이가 1,920円 이고 10Kg들이가 3,880원, ふさおとめ 5Kg짜리는 1,780円이었다. 나로서 이해가 안 된 것은 규격이 작은 것이 가격이 낮다는 거였다. 환율이 8:1내가 생각했던 것에 비해서 가격이 그리 높지는 않았다. 20:20에 시드니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3. 2일차 : 구름의 나라 뉴질랜드
시드니를 거쳐 우리가 뉴질랜드의 남섬에 있는 크라이스트처치에 도착한 시간은 현지시간 14:20이었다. 비행기만 꼬박 14시간을 탄 이후였다. 비행기가 착륙하기 이전 공중에서 본 뉴질랜드의 산은 험준했고 산등성이에는 눈으로 덮여 있었으나 우리가 내린 공항주변은 넓기만 한 평원이었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차량의 운전석이 우리와 반대였다. 가이드의 설명에 의하면 뉴질랜드는 영국의 지배를 받은 연유로 마차가 일반화 되어 있던 영국이 마부는 채찍을 사용했으므로 옆에 탄 사람 때문에 마부가 오른 쪽에 앉은 것이 자동차에 그대로 접목된 결과라는 설명이었다. 제일먼저 Canterbury Museum을 들러 700여년전 이곳으로 이주 모아새와 생선을 잡아먹고 살았다는 원주민 마우리족의 옛 생활상과 영국민들이 이곳으로 이주한 유물들을 둘러보았다. 마우리족은 전체인구의 14%정도가 되며 대부분이 북섬에 거주하고 있고 이들은 문신으로 지위표시를 하고 있다고 했다. 연접한 헤글리공원에서 우리나라와는 사뭇 다른 나무와 그 우람함에 놀랬는데 이 공원의 나무들이 이렇게 큰 것은 긴 낮 시간과 온난한 겨울, 가로등 없는 충분한 수면 등으로 다른 공원의 수목보다 생장이 3배는 빠르다는 설명을 전해 들었다. 도시를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인공을 가한 43Km나 된다는 에이번강은 공원의 중심부를 흐르고 있었다. 에이번강은 강이라고 하기보다는 개울의 규모였으나 그 깨끗함은 산속의 물에 하나도 뒤짐이 없었다. 몇 명을 태우고는 장대로 자그마한 목선을 저어가는 풍경은 참으로 평화스러워 보였다. 잘 다듬어진 잔디밭에 민들레와 비슷해 보이면서 그 크기는 훨씬 작은 꽃은 약간 떨어져서 보니 밤하늘의 별빛 같은 분위기를 자아냈다.
각 가정이나 공공장소에 유난이도 잔디가 많고 잘 다듬어져 있다는 이야기에 겯들여 가이드는 이 나라는 집을 지을 때 잔디와 나무를 일정정도 심는 것이 의무화 되어있다고 그 연유를 말했다. 그러면서 잔디가 저렇게 잘 다듬어져 있는 것은 저렇게 관리하지 않으면 이웃사람들이 지방정부에 신고를 하고 그에 따라 그를 시정하라는 명령이 내리며 불응 시 행정대집행을 하고 그 비용을 청구한다는 거였다.
4. 3일차 : 남섬의 켄티버리평원을 달려 퀸즈타운으로
크라이스트처치에서 밤을 보내고 다음날은 시의 중심가를 자동차로 둘러보았는데 그곳은 150여년전에 조성된 거리로 낙후되어 있어 지방정부는 재개발을 일부에선 고쳐서 쓰자는 양론이 팽배하나 아무래도 재개발이 될 것 같다는 가이드의 설명이었다.
그곳의 상점가는 입구가 좁았는데 이는 옛날 영국정부가 입구의 폭을 기준으로 세금을 부과함에 따라 그렇게 되었다는 설명에 세금이 사회전반에 줄 수 있는 영향을 다시금 생각했다. 시의 변두리에 있는 홈비공단은 양과 사슴 등에서 나오는 산물에서 나오는 것을 가공하는 것이 주라고 했다. 어제 저녁에 잔 호텔이나 식당 등의 창틀에서 먼지를 볼 수가 없었는데 이는 청소의 덕이라고 하기보다는 그곳자체가 먼지가 없는 곳이어서라고 하는데서 환경의 문제를 다시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정부의 거의 완벽한 복지정책으로 상위 10%를 제외한 그 외 사람들은 그렇게 악착스럽게 돈을 벌겠다는 개념이 없다고 했다. 또한 많은 젊은이들의 꿈은 집과 캠핑카 나아가 요트구입이라고 한다.
평원을 달리는 동안 바라본 봄 하늘은 우리의 가을 하늘보다 맑았고 정말 사람 구경하기는 힘들었다. 우리가 지나고 있는 케니버리대평원은 길이가 270여Km에서 280Km이고 그 폭이 40Km에서 80Km나 되는 세계 제일 넓은 평원이라고 했다. 동쪽의 서든알프스산맥은 그 길이가 1,100여Km나 되고 해발 2,000m를 넘는 산이 190개란다. 그중 17개는 3,000m를 넘으며 우리의 시야에서 보이는 대부분의 산들이 만년설을 이고 있었는데 만년설은 1,500m이상이라고 하니 그 산들의 높이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넓은 평원 임에도 도로는 직선보다는 적당히 곡선으로 만들어 두었는데 이는 교통사고방지를 위해서라고 했다. 곳곳에 철조망을 높이는 것이 눈에 뜨이기도 했는데 이는 수익이 낮은 양에서 사슴과 소 사육으로 눈을 돌리면서 생긴 현상이란다. 사슴은 특히 동양계사람들이 그곳에 들려 용혈을 채취해 마시는 것에서 창안하여 사슴뿔은 전매화가 되어 개인 간의 거래는 제약되고 국가가 많은 연구비를 투입 제품을 개발 전세계병원 등에 납품하고 일부는 관광객에게 판매한단다.
호수의 나라이기도 한 이 나라의 전력은 남섬의 호수 5개를 인공의 수로 48Km를 만들어 하는 수력발전과 풍력이용이며, 북섬은 지열을 이용 발전하고 있어 이 또한 친환경적임을 알 수 있었다.
지나는 노정에서 본 MT. Kook의 17,000여년의 빙하물이 흘러내려 생겼다는 호수의 물은 Milk Blue빛인데 멀리서 보니 햇빛 방향에 따라 그 색깔이 다르게 보였다.
보이는 것이라곤 푸른 초원과 양떼인 상태에서 가이드의 양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대부분의 양 수놈은 생후3개월이 지난 후에 도살한단다. 교배시기가 되면 암놈 50마리에 1마리의 수컷을 넣어두는데 30마리 정도가 교배되는데 3회 정도를 반복하며 수컷은 1개월여를 계속 교배에 이용한다고 했다.
1880년 영국인들이 건설했다는 Bungy jump장을 둘러보고 금광채굴에 동원되었던 광부들이 여건이 좋아 여왕이 와서 살았으면 좋을만한 곳이라는 데서 연유했다는 와카티프호수(길이가 83Km나 되고 수심이 깊은 곳은 300m) 변의 Queens Town에 여장을 풀었다. 가이드로부터 영화 ‘실미도’가 이곳에서 촬영되었다는 생소한 이야기를 듣고 이곳의 60%를 일본인들이 소유해 이곳을 일본인의 땅이라고도 한다는 말에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해 다시 한번 무서움을 느꼈다.
5. 4일차 : 호머터널을 지나 Milford Sound로
승선시간을 맞추어야 한다는 가이드의 안달에 아침 일찍 서둘러 숙소를 나와 버스에 올랐다. 산꼭대기 부분의 만년설과 푸른 초원을 보며 2시간여를 달린 후에 빙하가 만든 호수로 호수2개가 하나로 되었다는 ‘태안아워’라는 호수 변에서 잠시 휴식을 했다. 그러던 중 호수 주변에 조성된 공원에서 쓰레기를 모으고 있는 어린 소년을 발견했다. 호기심이 발동한 나는 그 소년에 다가가 서투른 영어로 Hello. How year old?라고 했더니 Eleven.했다. 나는 아이의 너무 빠른 말에 이해를 못하고 조금은 멍청이 서 있다가 Thank you.하고는 그를 떠났다. 가이드로부터 그들이 아이를 키우는 이야기를 듣기를 했지만 겨우 11살짜리가 저렇게 청소를 해 돈을 버는 현장을 보는 것은 나로선 경이로웠다.
이곳 ‘태안아워’는 1850년대 중국인들이 유럽인에게 속아 금광의 인부로 왔다가 4~5년 종사하다가 풀려나 남쪽으로 가면 따뜻하겠지 하고 내려와 정착한 곳이라고 한다. Queens Town이 일본 땅이라면 이곳은 중국인이 90%를 소유해 중국 땅이라고 한단다. 이렇게 중국인들의 소유비율이 높게 된 것은 이곳을 1961년 정부가 밀포드사운드와 연계하여 제2의 Queens Town으로 만들겠다는 발표에 그들이 토지를 매집한 결과물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 후 정부가 지금의 길이 너무나 멀다는 단점을 들어 원주민들이 다니던 길에 착안 다른 길을 모색하고 있어 중국인들이 투자에 크게 손해를 본 이례적인 사례에 속한다는 이야기였다. 그럼에도 이 정도로 유지될 수가 있는 것은 중국여행객들이 Queens Town에 자지를 않고 이곳에서 숙박해 주기 때문이라니 중국의 민족성을 뒤돌아 볼만하지 않은가!
피요르드국립공원은 타지만해협에서 생성된 구름이 서든알프스산맥에 걸려 비가 많이 내리는 우림지역으로 연중 강우량이 7,000mm에 이르고 고사리와 처음에는 못이 들어가나 오래되면 못이 안 들어가는 리무나무, 상처에 찧어서 바르면 치료의 효과가 있고 늦여름에 꽃이 피고 이 꽃에서 생산되는 꿀에는 위속의 헬리브박테리아를 죽이는 성분이 포함되어있다는 나무카나무가 많이 자생한다고 한다. 빙하침식 때 270m가 더 내려갔으나 14,000여년이 지나는 동안 퇴적되었다는 ‘이글링톤벨리’는 반지의 제왕 촬영지기도 하다는데 짧게 자란 풀들을 밟는 기분은 야릇했다. 이곳을 지나 거울호수(Mirrors rakes)는 바닥에 낀 이끼가 물빛을 더욱 맑게 해 거꾸로 드리운 산들이 볼만했다. 지나는 산에 산재한 나무는 반지의 제왕에서 움직이는 나무의 모형이 되었다고 하는데 많은 비로 이끼로 덮여있었다.
호머라는 측량기사가 터널의 필요성을 제기해 입구가 해발 920m인 곳을 30년이 걸려 인력으로 뚫었다는 1,270m의 ‘호머터널’에 못미처 만년설에서 생기는 눈안개와 가이드의 강권에 마신 만년설이 녹아내리는 개울물맛은 기대이상이었다. 터널은 대형버스 2대는 지날 수 없는 협소한 구조이고 준공 때의 투박함과 지하수 등이 터널을 흐르는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는데 우리나라 같으면 꽤나 말들이 많을 법한 관리지만 그들은 그대로 보존하고 있음에서 가능하면 환경을 해하지 않으려는 뜻을 읽을 수 있었다.
빙하에 의해 생성되었다는 밀포드사운드에서 배를 타고 어제 내린 비로 생긴 실 같은 물 흐름으로 폭포를 이룬 바위산의 물 흐름과 우리에겐 생소한 ‘나무사태’의 흔적, 펭귄, 물개, 150m를 넘는다는 폭포, 기암절벽은 만년설로 덮인 산들과 조화되어 선상의 객들을 일상의 삶에서 잠시 떠나있게 하기에 족했다.
6. 5일차 : 크라이스트처치로의 귀로에서 들은 이야기들
Queens Town에서 자고 느긋한 시간에야 크라이스트처치로 출발했다. 간 길을 그저 되돌아오는 것이니 자거나 가이드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것이 고작일 밖엔 없었다. 뉴질랜드도 우리나라와 같이 1980년대에 IMF의 위기를 당한 적이 있었단다. 그 때 은행과 철도사업을 매각했었는데 은행은 되사들였으나 철도는 지금도 영국계 기업이 소유하고 있다고 했다. 외국계 기업이 철도를 인수한 후 요금인상을 단행하였고 이에 반발한 시민들이 기차 안타기 운동이 전개되면서 일본에서 중고자동차를 수입해 타게 되었는데 그러다 보니 뉴질랜드가 일본의 폐차장이란 이야기까지 생겼단다. 기차 안타기 운동의 영향으로 지금은 사람이 탑승한 기차를 보거나 경찰관을 보면 복권을 사라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화물운송을 제외한 기차운행은 보기어렵다고 했는데 나 또한 뉴질랜드에 머무는 동안 본적이 없다. 뉴질랜드가 IMF를 당하게 된 것은 미국의 핵잠수함이 남극을 돌면서 그 지역에 가장 가까이 위치한 칠레와 함께 국민감정이 크게 상해 있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미국의 핵잠수함이 뉴질랜드 근해에서 고장이 나 배 수리를 위해 뉴질랜드 입항을 원했으나 핵 반입반대란 명분으로 거절하였다. 이에 미국이 뉴질랜드의 면양관련 제품의 금수라는 보복책을 들고 나오면서 외환위기가 초래 되었다는데 이때 8,000만 마리이던 면양 중 2,500만 마리를 도축하였다고 한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미국에 대한 의존도가 줄어들고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권과의 교역이 크게 늘었다고 한다. 아마도 사슴의 사육증가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뉴질랜드를 방문하면서 그 때까지 그냥 버리던 뿔에서 녹혈을 받아 마시는 것을 보고 착안했다는 것을 보면 아시아권과 교역에 맞춤사육이 아니었을까 싶다.
뉴질랜드는 다른 나라에 비해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높다고 하는데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역사적인 배경이 있다고 한다. 초기에 이 나라에 온 사람들 중 부동산 등으로 거부가 된 남자들이 신분상승의 목적으로 영국의 가난한 귀족여성과 결혼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면도 있고 여성운동을 통해 이룩된 부분도 있다고 한다. 여성의 사회적 지위의 단면으로 표출된 것이 현 수상이 여성이란다. 또한 남녀가 이혼을 하더라도 여성이 재혼을 하기 전에는 그 생계와 관련 이혼한 남성에게 상당한 책임이 부여된다고도 했다.
크라이스트처치로 되돌아 와 오후 6시10분에 우리는 비행기로 북섬의 오클랜드를 향해 몸을 실었다. 뉴질랜드가 1시간 섬머타임을 한 관계로 해가지기 전이고 다행히 날개를 피한 창문 쪽이라 우리가 묵었던 도시와 국토의 경관을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비행기는 구름 위를 날고 있었는데 뛰어내리기라도 하면 솜같이 푹신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석양 무렵 비행기는 착륙을 위해 구름 속으로 들려갔는데 가까이서 본 구름은 정말 장관이었다. 이것을 카메라에 담았었는데 사진으론 비행기에서 본 그 광경은 살아나지 않았다.
비행기에서 내려 저녁을 들기 전 시간을 내어 시내 중심부에 있는 대형 카지노장을 둘러보았다. 이 도박장은 당초계획은 외각에 세우려고 했었는데 평소 돈을 잘 쓰지 않는 중국인계주민들로 하여금 돈을 쓰도록 하기 위해서 교통이 편리한 곳에 세웠다고 한다.
7. 6일차 : 로토루아에서의 양몰이 쇼와 마오리족민속공연
지열지대인 로토루아의 아그로돔에서 양털깍기쇼, 양몰이 쇼 등을 관람하고 트럭터가 끄는 이동수단으로 끝없이 펼쳐진 초원인 농장을 둘러보고 양 등에게 먹이 주는 행사도 가졌다. 중식은 교민이 운영하는 초원 가운데 위치한 식당에서 들었는데 마당가에 태극기를 계양하고 있는 것이 이채로 왔다. 이를 보고 우리나라에 사는 외국인이 이와 같이한다면 우리는 잠자코 보고 있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식사 후에 집 주인의 배려로 거실을 둘러볼 수 있었는데 그 때 주인은 약간은 흥분한 상태로 이런 이야기들을 했다. 대한민국이 안 좋은 것을 든다면 첫째가 먹는 것 가지고 장난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정치인들이 청렴하지 않은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 나라는 전혀 그런 일은 없다고 했다. 그분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는데 그 나라는 20세가 되면 성년식행사를 2박3일을 하는데 그 후부터는 부모로부터 독립하여 살아간다는 것이다. 때로 형편이 안 되어 부모에게 얹혀서 사는 경우도 있지만 그 때는 전기세와 밥값은 반드시 지불한다고 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자식에게 너무 올인 하는 것은 스스로를 불행하게 하는 것으로 남는 것은 양로원 가는 것이란 말까지 했다. 그 나라는 호텔방에서 신을 신은채로 생활하고 있었는데 대부분의 가정집 거실도 그런 형태이긴 하나 그렇지 않은 집도 있으니 남의 집을 방문할 때는 반드시 신발을 벗으라고 충고했다. 그러면서 우리나라 에너지 소비와 관련 한겨울에 반바지 반팔 입고 사는 나라는 세계에서 아마도 대한민국 사람 뿐일 거란 말도 빠뜨리지 않고 했다. 그 나라에선 추우면 옷을 하나 더 껴입어 해결하지 잘 사는 사람도 우리 같지는 않다는 거였다.
그 나라는 노는 사람이 없다면서 그렇게 바쁘다 보니 치매한자가 없단다. 치매환자가 게을러서 그런지는 좀 그렇긴 했다. 그 나라 여성에 비해 우리나라 여성들은 너무 사치스럽고 남편에 대해서 소홀한 것 같다면서 부인들이 돈돈 하는 것도 되돌아보아야 한다면서 마음이 편하면 삼계탕도 보약이라고도 했다. 시민의식과 관련해서는 뉴질랜드는 집안은 좀 지저분하더라도 주변은 깨끗하게 청소를 한다고 했다. 또 우리나라는 위험에 처한 여인의 목소리가 나면 눈 감으려하는 것이 추세이나 그 나라는 그렇지 않은데 이는 타인에 대한 배려의 문제임을 강조했다.
우리 국민들의 식습관과 관련해서 자기 집 주변에 유사한 형태의 식당이 4개가 있는데 그 중 자기 집에서 음식찌꺼기가 가장 많이 나와서 잔반을 모아 가축을 치는 사람이 자기를 보고 고맙다고 한다고도 했다. 이는 뷔페형태로 운영되는 식당이니 자신이 먹을 만큼 가져가 먹으면 될 터인데 한국인 여행객들은 그렇게 하지 않고 무턱대고 많이 가져가서 남기는 습관 때문에 그렇다는 거였다. 그에 그치지 않고 자기가 접한 여행객 중 젊은이들의 밥 먹는 태도는 엉망이었고 어린애치고 버릇 있는 놈 하나 없더라고 하면서 그를 조금이라도 나무라면 그 사람을 욕하는데 우리의 미래가 참 걱정이라고도 했다. 이래서야 서울대학을 나오면 무엇 하느냐고 했다. 거실에 깔아둔 털 깔개가 따뜻해 그 값을 물었더니 기백만 원이라고만 했다. 거실 구경은 잘 했으나 옳기는 하면서도 쓴 말만 실컷 듣고 뒤통수를 긁적이며 그 집을 나와 버스에 올랐다.
마오리족의 유적과 진흙열탕, 물이 수십 미터나 내뿜는 간헐천을 둘러보았다. 마오리족의 유적에서 원시상태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서구의 열강에게 무참하게 종족이 살해되고 땅까지 빼앗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어려운 여건에서도 나라를 지켜 오신 조상의 위대성에 감사의 마음이 들어다. 온천개발을 하겠다고 우리는 수백 미터도 굴착하는 걸 마다 않는데 유황냄새 풍기면서 부글부글 끓는 진흙열탕과 간헐천변에 있는 노천 온돌을 보면서 화산활동의 현상을 미루어 생각해 보았다. 저녁에 마오리족의 민속공연을 보면서 그들의 음식을 먹었는데 외국여행은 그 나라의 음식 먹는 것도 여행의 목적이라고 늘 말해온 나로서도 너무 기름지고 느끼해 두 끼를 거듭 먹으라면 아무래도 못 견딜 것 같았다. 저녁에는 폴리네시안 풀에서 유황온천욕을 달빛 속에 즐겼다.
8. 7일차 : 와이토모 동굴과 에덴동산 관광
개인이 만들었다는 연못과 물길 그리고 다양한 수목과 동물원을 겸한 정원형태의 관광지를 둘러보면서 중국 것하고는 다른 풍치를 느낄 수 있었다.종유석 활동이 계속되고 있는 와이토모 동굴에서 거미와는 다르나 어둠속에서 빛을 내어 다른 생물체를 유인 걸리면 잡아먹는 생명체의 빛을 보고 물이 흐르는 것을 이용한 동굴 속 배타기도 쉽지 않은 체험이었다. 오클랜드 시내로 돌아와 해발 198m 사화산 구덩이가 있는 에덴동산에서 오클랜드 시내를 둘러보고 가벼운 걷기 기회도 가졌다.
9. 8일차 : 호주 시드니의 블루마운틴과 야생동물원
아침 8시 50분 비행기로 오클랜드를 출발 시드니로 행했다. 공항에서 마중 나온 가이드의 안내를 받아 블루마운틴(Blue MT)으로 행했다. 차중에서 가이드의 호주에 대한 설명이 있었는데 호주는 6개주 2특별구로 이루어져 있는데 특별구중 하나는 사막지역으로 원주민들이 살고 있고 인구는 약1%정도라고 한다. 호주는 특히 예방의학이 발달되었고 치과와 안과를 제외하고는 전액을 국가가 부담한다고 했다. 예방의학이 발달한 것은 병을 예방하지 않으면 국가의 부담이 늘기 때문에 특히 이 분야가 발달되었다고 한다. 호주에는 10명의 노벨상 수상자가 있는데 그 중 7명이 기초과학 분야라고 했다. 도한 호주의 주요수입원은 첫째가 1차 산품이고, 두 번째가 로열티 수입, 이어서 관광 유학생에 의한 수입이라고 했다. 내가 생각한 것과는 이외인 것은 로열티 수입과 유학생에 의학 수입의 비중이었다. 이어서 호주에서 가장 싫어하는 것은 첫째가 환경저해, 두 번째가 거짓말, 셋째가 부정식품이라고 했다. 또한 선호하는 직업은 첫째가 소방관이고 둘째가 경찰관이며 셋째가 의사라고 했다. 특히 의과대학을 입학하기 위해서는 성적만이 아니라 정답이 있는 것은 아니나 인성검사가 합격과 불합격을 갈라놓는다고 했다. 의사라면 우리나라도 선호직종이나 소방관과 경찰관은 이외였는데 이는 시민들의 봉사를 선호하는 거와 무관하지 않다는데서 답을 찾았다. 가는 도중에 고속도 상에서 뒤쪽 타이어가 펑크나는 사고가 발생했다. 하나가 남았으니 하고 산 정상까지 갔다. 이 산의 정상은 1,017m라고 하는데 우리가 생각하는 곡선의 산이 아니고 그냥 직선에 가깝다. 산이라고 하기보다는 그저 평평한 산맥인 셈이다. 그래서 도로도 산등성이를 따라 나있고 주변에 민가도 있다. 이 길은 1850년대 Gold rush때 광물채굴용으로 개설된 것이라 한다. 이 나라에 백인들이 발을 들여 놓은 220년 역사에 중국인 170년의 이민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250m의 수직에 가까운 궤도열차를 타고 절벽에 가까운 산 경치를 감상했다. 우리가 중식을 마치는 때까지 차는 타이어를 갈지 않은 채 운행을 하겠다기에 사고의 위험성 때문에 탑승을 거절하고 1시간여를 허비한 후 시정되어 겨우 출발했다. 블루마운틴의 교민이 운영하는 식당은 파리와 날벌레들로 불결한 편이었다. 거기다 식후에 커피는 한잔에 2불을 지불해야 했다. 좀 심하다는 기분이 들어 나는 사 마시지 않았다.
사진이나 그림에서만 보던 캥거루가 있는 야생동물원을 둘러보았는데 비가 조금 내린 영향이긴 하나 너무 지저분하고 냄새가 나 보는둥마는둥 하고 나는 동물원을 나왔다. 그 때에야 겨우 차량은 다른 차로 교체되어 있었다. 시드니로 돌아와 저녁의 오페라 하우스 건물을 둘러보고 시민들의 북적거림도 보았다.
10. 9일차 : 본다이비치와 시드니의 유람선 관광
출발이 늦은 시간으로 계획되어 있어 집사람과 둘이서 호텔 근처를 한 시간여 걸었다. 우리가 오기 전에 비가 많이 내린 듯 도심을 흐르는 개천은 흙탕물이었고 세월교 형태의 다리에는 세비와 우리와 별반 다름이 없는 쓰레기 들이 걸려 있었다. 공원의 잔디는 그런대로 잘 다듬어져 있었으나 한두 개 버린 쓰레기는 이곳이라고 별반 다를 게 없어보였다.
영화 빠삐용 촬영지라고 하는 갭팍의 수직절벽은 푸른 바다와 어우러져 절경이었다. 다만 호주 특유의 파리가 이를 애써 방해했다. 부드러운 모래사장으로 유명하다는 해변 본다이비치의 수영객과 어우러진 바다를 바라보는 것도 머리를 시원하게 했다. 시드니 시내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더들리페이지는 잔디로만 조성되어 있었는데 시민들이 가벼운 운동을 하는 곳으로 관리되고 있었는데 이곳은 8대 총독인 더들리페이지의 저택 터로 그가 3개의 조건을 붙여서 나라에 기증하였다고 한다. 그 조건이란 첫째 누구에게도 팔지 말 것, 둘째 건물을 짓지 말 것, 셋째 경관을 망치는 구조물 설치를 하지 말 것이었다고 하는데 그가 기증한 조건대로 현재까지 관리되고 있었다. 더들리는 자신의 아들 3형제에게는 10만달러씩만 유산으로 남겼는데 지금도 더들리란 성만으로도 존경의 대상이 된다고 한다.
점심을 겸한 시드니의 유람선을 타고 세계3대 미항이라는 시드니를 둘러보는 것도 나름대로 운치를 느낄 수 있는 코스였다. 총독 부인을 위해서 만들었다가 지금은 시드니 시민의 휴식처가 된 미세스 맥콰리체어는 해변과 어우러져 시민들의 정서함양에는 충분해 보였다. 마지막으로 호주최대라는 해양수족관에 들려 다양한 바다고기와 아름다운 바다 속을 옮겨놓은 모형들은 사람들이 어째서 이곳을 찾는지 알만했다. 저녁을 일찍 들고 나는 먼저 나왔는데 우리 일행이 탄 차를 운행하는 교민인 기사분의 분노 섞인 이야기를 들었다. 그분은 이민을 온지는 20여년이 넘었다고 하면서 우리 교민사회의 고질을 이렇게 이야기 했다. 배 고픈 것은 참아도 배 아픈 것은 못 참고, 둘은 되나 셋만 되면 꼭 하나를 왕따 시킨다면서 이는 만리타국에 와서도 고칠 줄을 모르니 큰일 이라고 했다. 나는 그저 묵묵부답으로 듣기만 했다.
오후 9시40분 비행기로 우리는 귀국하는 비행기에 탑승했다 .
11. 이번 여행이 남긴 것
이번 여행을 다니면서 가는 곳마다 우리나라의 단체 여행객을 만났다. 우리나라 국민이 참으로 해외여행을 많이 한다는 것을 실감했다. 그 중에는 젊은이와 어린아이들도 많았다. 여행경비를 생각하면 우리나라가 참 잘 사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뉴질랜드의 국내선 탑승 시는 우리 말 안내방송도 있었다. 이렇게 많이 나가면 무언가 배워오고 달라져 오면 쓴 외화가 아깝지 않을 것인데 하는 마음이다.
뉴질랜드의 환경을 가꾸는 노력은 무어라 말할 수 없었다. 우리나라라면 꿈도 꾸기 어려워 보인다. 시가지의 도로변에는 우리라면 그냥 인도로만 만들어 두었을 곳을 잔디를 심어두었고 그 관리도 정성을 다한 흔적이 역력했다. 우리는 이 관리가 힘들다고 나무나 심어두고 1년에 한 두 번의 풀 뽑기도 힘들어 해서 제대로 관리가 안되고있는데.... 우리는 만들기는 하고 관리는 등한한 면이 많다. 他山之石으로 삼을 만하다. 지금은 나도 촌에 있는 집을 손보아 살고 있으나 오랜 기간을 손보지 않고 공가상태로 방치한 적이 있다. 이 나라를 둘러보면서 그러한 자신의 행위가 얼마나 무책임 했나 하는 생각을 했다. 우리나라는 사유권이란 전제에서 비어있는 집이 엉망이라고 하더라도 제재하거나 시정하는 장치가 없는데 그들은 집안의 잔디까지 간섭을 받는 것을 당연시 하는 것은 어디에서 왔을까? 이에서 우리는 이제라도 집을 짓거나 관리하는데 일정한 기준을 세우고 실천해나가도록 할 필요가 있다고 보여 진다. 그러나 그것은 요식행위가 아닌 보다 실질적인 접근이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뜯고 건설하는데 예산의 대부분을 쓰는데 반해 이들은 잔디를 심고 환경을 생각하는 투자를 한다. 긴 안목의 관광자원이란 측면에서 우리도 현재와 같은 건설공사에만 많은 투자를 하는 것이 꼭 옳은 일인지도 되물어 보아야 할듯하다.
늘 해외여행을 하면서 외화를 쓴다는 부담을 안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이렇게 여행을 하는 것이 국민들의 해외진출의 계기가 되고 이미 진출한 해외교민에게는 수익원이 되며 그들의 생활방편이 된다는 이번 여행에서 알았다. 그것은 우리가 어려운 IMF를 당하여 해외여행을 삼갈 때 여행관련분야에 종사하던 교민다수가 도산하였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분들이 바꾸었으면 하는 것은 이번 여행에서 우리를 안내하거나 음식장사를 하는 교민들이 여행객인 우리를 자신들의 입장에서 수익원으로만 접근하는 것은 시정되었으면 한다. 이는 가이드의 지나친 쇼핑안내와 물건을 사도록 사주하는 사례이다. 쇼핑장소에 가서 이야기를 들으면 모두가 내가 사야 할 것이고 필요한 것으로만 들렸다. 일행 중 일부는 한군데를 빼고는 가는 곳마다 물건을 샀으니 그 비용은 여행경비에 버금가지 않았을까 싶다. 나도 집을 나설 때는 어떤 물건도 안살 작정이었는데 두 군데서 물건을 조금 구입했다. 이러한 나의 현장 충동(?) 구매 행위는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다.
이러한 패키지여행의 경우 서로를 잘 아는 사람과 가는 것이 현명한지 하는 의문이 이번 여행에서 생겼다. 물건을 사는 것도 경쟁하는듯하고 저녁에는 늘 술판이어야 한다는 것이 그랬다.
우리는 백인들이 아메리카나 호주를 신대륙 발견이란 접근을 하고 우리도 그를 당연시 하고 있는데 그곳에서 살고 있던 원주민의 대량학살을 생각하면 세계사는 학살을 미화하는 강자의 논리로만 존재하는 문제가 있어 보인다.
우리의 주변에서 바뀌어져야 하는 것도 느꼈다. 여행 중 점심을 먹은 집 주인이 말한 대로 지금과 같이 자녀에게 주기만 하고 노후를 전혀 보장받지 못하는 구조는 한 번쯤 모두가 고민해 보아야 할듯하다. 그들이 그들의 노후를 자녀에게 의지하지 않는 대신 자녀가 20살이 넘으면 그들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도록 하는 시스템은 우리가 관가해선 안될 것이다. 우리가 60살이 넘도록 자녀를 위해서 살고 언제 자신을 위한 준비를 할 수 있겠는가? 호주나 뉴질랜드와 같은 기부문화나 국가의 복지시책이 자리 잡기 위해서는 우리가 자녀에게 올인 하는 자세는 쉬운 일은 아니나 바꿀 때가 된듯하다. 나아가 그들의 기부문화와 복지시책의 연원을 연구하고 받아들이는 노력도 강구해야 할것이다.
뉴질랜드가 외환위기로 IMF의 터널을 넘은 가이드의 이야기는 우리가 똑 같은 위기를 당할 때 미국의 음모론이 있었는데 이러한 사례가 있었기에 그러한 말이 일부는 설득력을 가졌던 듯하다. 우리는 그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의 기업을 헐값에 넘긴 것도 많고 국부의 유출이나 국민의 고통은 말할 수 없이 컸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 과정을 거치면서 글로벌경제에 진입하기 위해 필요한 비합리적인 개인이나 기업문화가 합리주의로 바뀐 부분도 많으니 수업료가 비싸긴 했으나 손해만 갔다고 할 수도 없을듯하다.
나는 많은 쇼핑들에 약간 걱정이 되었었는데 공항의 세관은 전혀 챙기지 않았다. 생각보다 외화는 펑펑 나가는 듯하다. 이번 여행을 통해 서양화에서 본 이해되지 않던 하늘과 산이 그냥 선으로 그려진 그림들 현장이 실제 존재함도 보았다. 뉴질랜드를 여행하면서 이런 곳에 살아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다른 나라가 좋다고도 한다. 그래도 나는 우리나라가 문제도 많고 쳐다보기 싫은 것도 없진 않으나 이번 여행을 통해서 다시 확인한 것은 그래도 우리나라가 가장 살기 좋은 땅이란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