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카페 프로필 이미지
저 강물에 달 뜨거던...
 
 
 
 

회원 알림

 

회원 알림

다음
 
  • 방문
  • 가입
    1. 붕붕아
    2. 유청산
    3. 별의미소
    4. 무심
    5. 채호준
    1. 보운 김달선
    2. hamlet
    3. 이종식T2UE
    4. 이종율
    5. 달마
 
카페 게시글
대구 경북 지방 스크랩 포항 법광사지 - 신라 진평왕의 원당사찰
普願 추천 0 조회 150 16.06.23 18:2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포항 법광사지 - 신라 진평의 원당사찰 

 

 

법광사지에 있는 불대좌

 

 

법광사지(法廣寺址)는 포항시 북구 신광면 상읍리 비학산 기슭에 있다.

해발 763.3m의 비학산(飛鶴山)은 '학이 알을 품고 있다가 하늘로 날아오르는 형상'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비학산에 묘를 쓰면 가문다는 이야기가 구전으로 내려오고 있다.

  

법광사(法廣寺)는 신라 26대 진평왕 때 원효대사가 왕명을 받아 창건했다고 전해지며. 진평왕의 조부인 23대 법흥왕의 법명을 따서 법광사라 명명하였는데, '불법을 널리 편다'는 뜻이며 진평왕의 원당사찰(願堂寺刹)이었다.  그 후 흥덕왕3년(828년) 향조와 원적이 재산을 희사하여 석가모니불 사리탑을 세우고 진신사리22과를 봉안하였다고 한다

창건 당시에는 갖가지 보배로 화려하게 장식하여 왕궁보다도 더 사치스러웠으며, 후일 불국사와 맞먹는 규모와 수준을 자랑했다고 한다. 진평왕은 여러 번 법광사 대웅전에 와서 직접 불공을 올렸으며, 대웅전에 걸었던 법광사라는 현판도 진평왕의 글씨였다고 전한다

 

.

발굴조사중인 법광사지

 

법광사지 내에 있는 '법광사 석가불사리탑중수비(法廣寺 釋迦佛舍利塔重修碑)'의 비문에 의하면 신라 24대 진흥왕 10년에 양나라 무제가 신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부처의 사리 22과를 보내오자, 진흥왕이 궁으로 맞아 들였다. 그 뒤 진흥왕의 손자 진평왕이 원효에게 명하여 법광사를 짓게 했다고 적혀있다.  

1747년 사리탑이 기울어 다시 쌓으면서 탑 앞에 법당을 지어 금강계단이라는 편액을 걸고 따로 향로전을 세워 예불을 드리는 곳으로 삼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 중수비문을 작성하던 당시(1750년, 영조 26)만 해도 약 5천여평 규모의 경내에  대웅전, 2층의 금당, 향화전 등 525칸의 건물이 있던 대찰이었으나 조선 철종 말년(1863년)  어느 촌부의 방화로 모두 전소하고  폐사가 되었다.

'신동국여지승람'과 '동경잡기' 등의 조선시대 문헌에도 사찰의 이름과 위치 등이 정확히 기재돼 있다

 

법광사지는 경북 기념물 제2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현존하는 유물로는 석가불사리탑인 삼층석탑과 불상연화대좌, 쌍귀부 등이 있다.  

 

 

현재의 법광사

 

법광사지의 서쪽으로 비학산에서 내려오는 골짜기의 개울가에는 작은 규모의 법광사가 있는데, 1936년 승려 벽허당장눌선사(碧虛堂蔣訥禪師)가 조성한 것이다.

경내에는 본전인 원통전(圓通殿)이 있고 원통전의 오른쪽에·산령각(山靈閣), 뒷쪽에 벽허스님의 진영을 모신 진영각(眞影閣)이 있다.

기단이나 계단, 탑 앞의 배례석 등 많은 석자재들은 옛 법광사지에 흩어져 있던 것을 수습하여 만들어졌다.

 

 

▶ 당간지주

 

 

 

당간지주의 간구

 

법광사지를 찾아가는 길 막바지에 이르면 길의 왼편에 법광사의 당간지주가 있다.

얼마 전 주변을 발굴한 뒤 그대로 방치되고 있어 잡초가 무성하여  가까이 가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잡초에 둘러쌓여있다.

 

지주의 아랫부분은 땅속에 묻혀 있고 윗부분만 160cm 정도 땅 위로 노출되어 있어 전체의 모습을 알 수 없었으나 발굴한 뒤 땅 위에 나와있는 부분의 크기가 발굴 전과 같은 것을 보아 아랫부분은 잘려나가고 없는 것 같다.

지주의 윗부분은 2단의 원호를 이루고 있으며, 지주의 안쪽면 윗부분에는 네모진 간구가 파여 있다.

지주의 마주보는 안쪽을 제외하고 바깥쪽의 3면에는 세로의 줄무늬를 새겨놓았다. 치석이 고르고 장식성을 가미한 예쁜 형태의 지주이다.

 

당간지주와 법광사지의 위치(발굴 전의 모습)

 

대개 일주문 앞에 당간지주가 위치한다고 보면 법광사의 당간지두와 금당과의 거리를 비추어볼 때 법광사의 규모가 엄청?음을 짐작할 수 있다

 

 

금당지 불상대좌

  

 

 

밭 한가운데 한변의 길이 약 20m, 높이 1m의 방형의 토단이 있고 그 위에 불상좌대가 있다

불상대좌는 지름 2.42m, 높이 약 2m로 9세기 전반에 창건된 사원의 불상 가운데 최대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법광사지 석가모니사리탑비에 의하면 대웅전과 별도의 2층 금당이 있었다고 하는데 대좌의 규모로 보아 이곳이 금당의 자리로 추정된다

 

 

하대석의 아래는 16개의 안상문이 조각되어 있다


하대석은 2장의 돌로 만들었으며 3단의 중대석 괴임은 연꽃무늬로 새겼다

 

불상의 광배를 세우기 위해 파놓은 홈

 

금당지에 남아 있는 불상대좌의 경우 지름 2.42m, 높이 약 2m의 대형으로 9세기 전반에 창건된 사원의 불상 가운데 최대규모를 자랑하며, 경주 장항리사지 금당지와 같은 구성요소를 이루고 있다.

불상대좌는 하대석과 중대석은 온전히 남아있으나 상대석은 깨어져 일부분만 뒤집힌채 옆에 놓여 있다

 

하대석 아래 안상문이 있는 부분은 16각이 아니고 8잎의 연꽃형태로 연꽃잎 1장에 2개의 안상이 있다

이 연꽃형태는 하대석, 중대괴임,중대석에 까지 이어진다

상대석은 가장자리가 모두 깨어져 알 수 없으나 중,하대석과 같은 연꽃형태일 가능성이 크다

 

 

중대석 괴임이 모두 연꽃인 하대석

 

 

하대석은 2개의 돌로 만들어져 있으며 전체의 지름리 242cm, 높이가 73cm로 아래에 16개의 안상을 새기고 그 위에 16잎의 복련이 새겨져 있는데 안상과 서로 어긋나게 배치하여 놓았다.

복련 위에 3단의 중대석괴임이 있는데 특이하게 8장의 연꽃잎으로 조각하여 한층 장식미를 가햐였다

 

하대석의 중대괴임의 한쪽면은 광배를 세우기 위하여 너비 약 40cm인 별도의 굄대를 설치하기 위해 홈을 파두었다

 

 

중대석

일반적으로 많이 하는 팔각석주에 우주를 새긴 것이 아니고

면의 가운데가 들어가고 모서리부분은 뾰족하게 나와

 중대괴임돌의 연꽃무늬를 따라 8잎의 연꽃형태으로 만들었음을 볼 수 있다

 

 

상대석

 

중대석은 지름 120cm, 높이 55cm로 위에서 보면 활짝 핀 연꽃모양이다

상대석은 중대석 옆에 놓여있으며 파손이 매우 심하여 문양이나 본래의 형태는 파악할 수 없다.

 

 

 

금당지의 주초석

 

불상좌대의 주변에는 외진주와 내진주 그리고 고막이돌을 갖춘 이중구조의 폐쇄적 건물로 사방으로 출입문과 계단을 갖춘 형태인데 북쪽과 남쪽의 계단돌이 일부 남아 있다.

이런 형태는 감은사 금당지 및 불국사 대웅전과 같이 통일신라시대(8~9세기)의 전형적인 건물구조를 보이고 있으며 “석가불사리탑” 비문에는 5칸 중층건물로 기록되어 있다.

 

불상좌대 동쪽에 약간의 거리를 두고 남북 일렬로 6개의 주초석이 남아 있으며, 주초석열 북쪽 끝에서 서쪽으로 꺾여 또 다른 주초석 2열이 놓여 있다.

이렇게 초석이 배치되어 있는 것을 보아  2중벽이 있었을 것이며 이렇게 안쪽과 바깥쪽에  2중으로 벽을 설치하는 2중벽 구조는 우리나라에서는 법광사에서만 볼 수 있는 고식 건축수법이라고 한다

 

불상좌대 주위 사방에는 고주를 받쳤던 초석이 남아있고 또 뒤쪽에는 고막이돌이 있어  불상 뒷쪽에 벽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안쪽의 주춧돌로 보아 정면 3칸, 측면 3칸이었으며 앞면과 뒷면에 신방석이 있는 것을 보아 별도의 문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바깥쪽은 정명, 측면 각 5칸으로 주춧돌과 고막아돌이 남북쪽에 온전히 남아있다

 

 

 

주위의 밭둑에도 주초석을 비롯한 많은 석물들과 녹유전조각이 흩어져 있다.

 

 

▶ 석가불사리탑 (釋迦佛舍利塔)

 

 

 

석가불사리탑

 

석가 불사리탑은 진흥왕 10년 양나라 무제가 보내온 부처사리 22과를 보관하고 있다가 흥덕왕3년(828년) 향조와 원적이 왕족의 혈통을 계승하여 삼국통일을 기원하기 위해 개인 재산으로 이 탑을 건립하고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하였다고 전해지는 탑으로 높이는 4.2미터이다

불사리탑은 탑비에 의하면 5층탑이었다고 하나 후일 원래부터 3층석탑임이 밝혀졌다,

 

846년(문성왕 8) 지금의 위치로 이건되었는데, 「법광사 석가불사리탑중수비(法廣寺 釋迦佛舍利塔重修碑)」에 보면 조선시대에 중수하면서 한 차례 사리장엄이 열려졌는데  “그날 밤 사리를 열자 서광이 하늘까지 이어져 비쳤으며, 닷새 동안 둘레를 온통 환하게 비추었다(其夜 瑞光亘天連五夜 草木欄洞 晃如晝).”고 한다. 그리고 그 이후로 이 고을을 신광현(神光縣)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하대기단

 

상대기단

 

몸돌과 지붕돌

(3층 몸돌과 노반석, 보주는 복원을 한 것이다)

풍탁공

 

 

영조 22년(1746)년 이 오층석탑을 중수할 때 1층 탑신에서 둥근 옥함이 발견되었고 그 안에 순은(純銀) 사리함이 들어 있으며 다시 그 속에 자수(刺繡) 놓은 비단으로 싼 사리 22기가 봉안되어 있었다'고 중수비는 적고 있다. 

그리고 석가불사리라고 적힌 옥패가 함께 출토되었으며 이 사리구들은 탑을 중수한 후 따로 동함을 만들어 그 속에 넣은 뒤 탑의 2층 탑신에 봉안하였다. 고종 24년 (1887)에는 3층만 남아있던 석탑을 보수하는 과정에서 1750년에 건립한 사리탑중수기가 발견되었다. 

 

 

석가불사리탑의 사리구

 

법광사지 탑지석

 

1968년 석탑이 도굴되어 사리장엄이 불법 반출되었다가 나중에 회수되었다. 이때 되찾은 사리장엄은 청동제 및 납석제 사리호 각 1개씩과 828년(會昌6년)명의 탑지석, 건륭12년(1747)명의 탑지석 2매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탑 속에 탑지석을 넣는 것은 드문일이다.

되찾은 납석제 사리호에는 사리 8과가 있었고 사리호 바깥 면에는 짙은 묵서가 그대로 남아 있다.

 

1968년경 도굴로 나온 탑지석, 사리 장치, 옥패 등은 지금 국립 경주박물관 미술실에 전시되어 있으며

부처님 진신 사리 22매는 이 탑에, 일부는 현 법광사 도량의 새 탑에, 일부는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예전에는 이 석탑의 수호를 위하여 탑계(塔契)가 조직되어 있었으며, 이 탑에 빌어 사내아이를 얻으면 모두 이름에 탑(塔)자를 넣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법광사 녹유전(벽돌)

 

 

국립경주박물관에는 법광사에서 출토된 녹유전(綠釉塼)이 소장되어 있다.

녹유전은 『아미타경』에 극락세계의 바닥은 유리로 되어 있다는 말에 따라 사찰에서 사용하기도 하였지만 보통의 절에서는 사용할 수 없었던 것이므로 이것을 보아 신라시대 법광사의 사격(寺格)을 알 수 있는 자료가 된다

 

 

 

석가불사리탑비(1750년 건립)기록의 오류가 빚어낸 산물

 

벽허스님이 5층으로 복원하였다가 내린 탑신과 옥개석

 

 

탑비 기록에 의하면

"1747년 법광사에서 오층석탑을 중수하였는데, 그때 탑을 해체하니...."라는 기록이 있다

오층석탑이란 지금의 삼층석탑을 말하는데, 당시 스님들이 석탑의 상하층 기단과 3층 지붕돌 위의 노반을 탑의 층수로 잘못 계산하는 바람에 생긴 오기(誤記)로 보인다.

 

이 탑비 기록을 근거로 1952년 법광사를 건립한 이벽허스님이  당시의  삼층석탑 중 2층 옥개석까지만 남아있던 탑을 중수하면서 오층석탑에 걸맞게 모자라는 탑신부와 옥개석과 상륜부를 만들어 올렸다.

즉 탑비 기록에 근거하여 오층석탑으로 복원하는 수고를 하였던 것이다.  

그 이후에 3층 옥개석이 발견되었다. 이를 정밀조사한 문화재전문가에 의해 이 탑은 원래부터 오층이 아닌 삼층석탑임이 판명되어 새롭게 삼층탑으로 복원이 이뤄졌고  이벽허 스님이 복원하였던 4,5층 탑신과 옥개석은 다시 분리되어  담장 안에 방치되고 있다.

 

 

 

▶ 석가불사리탑비 (釋迦佛舍利塔碑)

 

 

 

석가불사리탑의 탑비는 1750년에 새운 것으로 신유한이 글을 지은 것으로 되어 있다

신유한은 1671년에 태어나 1752년에 사멍한 사람으로 1713년(숙종39) 문과에 급제하여 제술관이 되었고 통신사 홍치중을 수행하여 일본에 다녀온 사람이다. 벼슬은 봉상시첨정(奉常寺僉正)까지 이르렀으며, 문장에 능하고 걸작시(傑作詩)가 많다고 한다. 

 

 

 

탑비는 지붕돌과 비신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데 현재 비신이 서 있는 좌대는 본래의 것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좌대에 뚫린 구멍의 크기와 비신의 크기는 전혀 맞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좌대는 두장의 돌을 이어 네모지게 만들었는데 원래 비신이 세워졌던 자리는 가운데 남아있고 탑비는 좌대의 뒷쪽에 시멘트로 접한 이은 흔적이 역력하다.

 

각자가 선명한 비문

 

 

비문의 옆면에는 여러 사찰의 이름이 있다. 확실이 알 수는 없으나 아마 이 탑을 중수할 때 도와준 사찰들이 아닐까 한다. <조연 : 동화사. 불왕(불국)사. 은해사. 기림사. 보경사. 원수사. 천곡사. 천룡사. 안국사. 거동사>

 

비신의 높이는 117cm, 너비 50cm, 두께는 18cm인데, 재질이 대리석으로 매우 단단하여 새긴 글씨가 아직도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이수(비석의 지붕돌)의 문양이 특이하여 눈길을 끈다. 이수의 전면에는 비늘이 뚜렷한 물고기 1마리가 가운데 가득 새겨져 있고 양쪽에는 국화무늬의 꽃 두 송이가 새겨져 있는데 비석의 지붕돌에서 이런 문양이 있는 경우는 처음보는 것 같다.

 

 

 

석가불사리탑중수비 이수의 어문(魚紋)과 화문(花紋)

 

 

쌍귀부-비석받침대

 

귀부의 정면

 

 

귀부의 뒷면

 

귀부는 절터 뒤쪽 한 단 높은 언덕의 밭 가운데 있는데, 두 마리 거북이 등을 붙이고 나란히 엎드려 있는 쌍귀부이다

비신과 이수는 없어지고 귀부만이 남았으며, 이마저도 온전치 못하고 머리를 포함하여 몸 전체가 많이 깨졌으며 등에 새긴 거북무늬도 희미하다.

비신을 꽂는 비좌의 홈을 보면 비는 폭이 85cm, 두께는  약 10cm 정도일 것이다

 

 

귀부의 귀갑무늬와 꼬리


이러한 쌍귀부는 경주의 창림사터, 무장사터, 숭복사지 등에서도 볼 수 있다. 이는 이 사찰이 신라왕실과의 깊은 관련성을 말해준다.

숭안전의 서쪽 담장 옆에 있으며 현재는 주변이 발굴중이다.

 

 

숭안전(崇安殿)

 

법광사지의 동북쪽으로는 신라 제26대 진평왕 신위(神位)를 모신 숭안전(崇安殿)이 있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다포계 맞배지붕집이다

제사를 지낼 때 외에 평소에는 문이 잠겨 있어 내부를 볼 수 없다

 

 

배례석

 

근래에 세워진 법광사 석탑 앞의 통일신라 배례석

 

연화문과 안상

새로 지은 법광사의 원통전 앞에는  배례석이 1기가 있다. 지대석 위에 배례석이 얹혀 있는 모습인데 본래의 짝은 이닐 것이다. 배례석이 지대석 위에 있는 경우를 본 적이 있던가?

배례석은 윗면에 큼직한 한 개의 연화문이 아름답게 조각되어 있고 앞 뒷면에는 3개의 안상무늬가, 측면에는 2개씩의 안상이 조각되어 있다

주지스님의 말에 의하면 둘다 뒷쪽의 법광사지에서 옮겨온 것이라고 한다.

 

현재 법광사에는 원통전으로 올라가는 계단, 기단, 축대 등에서 법광사지에서 옮겨온 석물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으며 화사석과 옥개석이 없는 석등도 원통전 앞에 우뚝 서 있다

 

법광사지의 북쪽 산기슭에는 3기의 부도가 일부 교란된 상태로 남아 있다고 하는데 확인을 하지 못하였다

 

문화재청은 "법광사지는 신라 왕실사원으로서의 성격과 출토 유물들의 우수성 등을 감안할 때 여주 고달사지, 원주 법천사지 등에 견줄만한 학술적 가치가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고 한다

 

 

법광사

 

 

 

법광사의 본당인 원통전과 주불

 

법광사지에서 가지고 온 석재들로 쌓은 기단과 각종 석물들

 

법광사는 불교계의 어느 종파인지 사찰명에도 밝혀져 있지 않아서 알 수가 없다. 본당인 원통전과 창건주 벽허당의 초상이 걸려있는 진영각, 산신각 그리고 현대건축물로 지으진 요사채 2동이 있다

 

 

現 법광사 창건주 벽허당선사의 공덕비

 

벽허당선사의 사리탑비와 승탑 

 

 

법광사의 요사체

 

*********************************************************************************

 

 

법광사석가불사리탑중수비(法廣寺釋迦佛舍利?重修碑)

 

 

新羅故都。革爲慶州府。飛鶴山在府北八十里。山有法廣寺。最稱新羅大伽藍。與佛國寺等。

 

신라의 옛 도읍이 경주부로 바뀌었다. 비학산은 경주부의 북쪽 80리에 있다. 그 산에 법광사가 있는데, 신라의 대가람으로 불국사 등과 가장 먼저 일컬어졌다.

庚午4)春正月。沙門明玉自法廣遣其徒道覺致訊曰。世傳新羅王捨國以崇佛。是寺之七寶布施。侈於王宮。然今皆剝盡。只有大?殿五間與二層金堂五層石?。而世?遠。居僧樸魯。亦未聞?中所有

 

경오(영조26, 1750)년 봄 정월 명옥 스님이 법광사에서 그 문도 도각에게 편지를 주어 보내어 중수기를 써 줄 것을 요청하며 말했다5).

세상에 전해 오기를 신라왕이 나라를 기울여서 부처님을 존숭했는데, 이 절은 7보로써 보시하여 왕궁보다 호화로웠다. 그러나 지금은 모두 퇴락해버렸다. 다만 대웅전 5칸과 2층 금당, 5층 석탑6)이 남아 있다. 세월이 아득히 멀어지고 머무는 스님들이 배우지 못해 또한 탑 가운데에 간직하고 있는 바를 듣지 못했다.

?玆丙寅冬。寺僧以?有虧缺。將撤而新之。惟明玉曉軒二三比丘寔尸維那。十月7)十六日會衆。爰撤最下一層。石縫中得一玉?圓?。內有純銀盒益妙。中貯錦8)繡?一緘。傍有玉牌。長可四寸廣寸餘。一面刻釋迦佛舍利字。又有兩褶紙。一書本寺創立僧名年號。一書舍利分布記。紙朽而僅存。遂啓錦9)繡重諦審。舍利二十二枚。團團如菉豆。色微黃。瑩朗四照。有衆聚觀如堵。始知釋迦佛舍利所藏。莫不兢惶??。沐浴焚香設齋。移安於大?殿

 

비로소 이 병인(영조22, 1746)년 겨울에야 절의 스님들이 탑이 이지러져서 장차 철거하고 새로 세우려 하였다. 명옥, 효헌 등 2-3비구가 식시유나10)가 되고 10월 16일에 대중이 모였다. 이에 맨 아래 일층을 철거하려 하는데, 돌로 감싼 가운데에서 둥글고 깨끗한 옥함을 얻었다. 안에 들은 순은 합은 더욱 오묘하였다. 그 속에 수놓은 비단 주머니가 봉해져 있었고, 곁에는 옥패가 있는데 길이가 4촌이고 넓이가 1촌 남짓이었다. 한 면에 ‘석가불사리’라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또 구겨진 종이 2장이 있었다. 1장에는 본사를 창립한 스님 이름과 연호가 쓰여 있고, 또 1장에는 사리분포기가 써져 있다. 종이는 썩어서 겨우 남아 있다. 마침내 비단을 열고 거듭 살피니 사리 22알이 있는데, 동글동글하기가 녹두알 같고 빛깔은 미황색인데, 밝고 맑아서 사방을 비추었다. 대중이 담벼락처럼 둘러서서 지켜보았다. 그제서야 석가모니 부처님의 사리가 갈무리된 것을 알고 공경하고 삼가지 않는 자가 없었다. 모두 목욕 재계하고 향을 사루고 재를 베풀고 사리를 대웅전으로 옮겨 모셨다.

自其夜瑞光亘天連五夜。草木?洞晃如晝。衆譁然。急治石繕?。別鑄銅?。以盛玉?。純銀盒錦11)繡舍利二十二枚。封如前。本月二十四日。還安于第二層?中。又作玉牌。刻乾隆年月重修等字。?書12)古牌而置之13)銅?外左右

 

그날 밤부터 5일 밤을 상서로운 빛이 하늘에 뻗쳤는데 풀과 나무 바위가 있는 골짜기가 대낮같이 훤하였다. 대중이 왁자하니 소란스러웠다. 급히 돌을 다듬고 탑을 수선하고, 따로 구리함을 주조하여 옥함, 순은 함, 비단으로 사리 22알을 담아 전과 같이 봉하여 이달 24일에 다시 탑의 2층 속에 봉안하였다. 또 옥패를 만들어 건륭 년 월의 중수 등의 일자를 새기고 옛 패도 함께 구리함 좌우에 넣었다.

越明年丁卯二月十三日?事竣。更設齋告功。同年七16)月。建法堂于?前。扁曰金剛戒壇。又其下別起香爐殿。以爲禮佛之所。通度是倣

 

다음해 정묘(영조23, 1747)년 2월 13일에 탑 중수 일이 끝나고, 다시 재를 베풀어 부처님전에 그 일을 고하였다. 같은 해 7월에는 법당을 탑 앞에 세워 편액하기를 금강계단이라 하고 또 그 아래에 따로 향로전을 세워써 예불 공간으로 삼으니 통도사를 모방한 것이다.


嗚呼。?玆末後17)?梨18)。幸以宿緣獲覩精光於東來建?一千七百年之後。罔非大慈恩力。又諦本寺爲眞平王願堂。而元曉義相二尊宿 幹事之迹。至於五百二十五間 顆?19)沈沈矣。斯焉而不能20)表示於百? 永有信香。何以報佛恩。敢請居士一?管而張皇之。以壽我豊碑。

 

오호라! 아득한 세월의 이 끝에 아사리21)가 되어 부처님 진신의 정미로운 빛이 해동에 와 탑을 세운지 1천 7백년 뒤에야 다행스럽게도 숙세의 인연이 있어서 보게 되었다. 부처님의 대자대비로운 은혜의 힘이 아님이 없다. 또 살피자니 본사는 진평왕(579∼632)의 원당이 되었으며, 원효(617∼686), 의상(625∼702) 2존숙이 일을 주간한 흔적이 있고, 525칸의 당우들이 정말로 화려하여 궁궐처럼 높고 크고 심오하였다22). 이 어찌 백겁에 드러내어 길이 믿음의 향을 있게 하지 않을 수 있으며, 무엇으로 부처님 은혜에 보답할 수 있겠는가. 감히 거사23)의 한 붓끝으로 이런 일을 길게 쓰서 나를 복되게 하고 비석을 풍요롭게 해 주기를 청합니다.


余?曰善哉。辱諸君示此奇緣。與有幸矣。佛法之來東土已久。自新羅法興王 始興佛敎。其嗣眞興王十年己巳。爲梁武帝中大同四年。遣使新羅。送釋迦舍利。王率百官。奉迎入宮。剃髮被袈裟。自號法雲。王妃亦爲尼

 

내가 이에 말하기를 좋도다! 욕되게도 그대들이 나에게 이러한 기이한 인연을 보여주니 더불어 다행함이 있다. 부처님 진리가 해동에 전해 온 지 이미 오래되었다. 신라 법흥왕부터 비로소 신라에 불교가 일어나고 그 후사인 진흥왕 10년 기사년에 양나라 무제 중대동 4년24)이 되는 해에 신라에 사신을 보내어 석가모니부처님의 사리를 봉송하니 진흥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부처님 사리를 받들어 맞이해 궁궐로 들였다. 진흥왕은 왕위를 물려주고는 승려가 되어 가사를 입고 스스로 법운이라 이름하고, 왕비 또한 비구니 수행자가 되었다25).

眞平王以法雲之孫。事佛惟謹。其曰命元曉創是寺。奉舍利建?。自爲願堂。此在信史。顧諸僧不察耳。眞平之世。文獻蔑如。薛弘儒崔文昌皆未及出世。今得於?中者。其文如蟲涎鳥跡。所稱年號亦用本邦一時私記。余惡乎證

 

진평왕은 진흥왕의 손자로서 부처님을 섬김에 정성을 다했는데, 원효 스님에게 명하여 이 절을 짓게 하고26), 부처님 사리를 받들어 탑을 세웠으며 스스로의 원당으로 삼았다. 이런 일은 역사에 있으나 여러 승려들이 살피지 않았을 뿐이다. 진평왕 시대에는 글이 지리멸렬하였고 홍유 설총(655-?)이나 문창후 최치원(857-?)이 모두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지금 탑 속에서 얻은 것은 그 글이 벌레 침이나 새 발자국 같으며 연호 또한 중화 질서와 다르게 우리나라가 한 때 사사로이 쓴 것27)이니 내가 증명하기에 힘들다.

道覺復言佛舍利還安時。計數則亡其一。倉黃莫測。寺僧?眼敬拾於大?殿?石間。自云夜夢神告如此。

 

도각이 다시 말하였다. 부처님 사리를 다시 봉안할 때 수를 헤아리니 그 하나가 없어져서 창황하기 이루 헤아릴 수 없었는데, 절의 승려 총안이 대웅전 계단 돌 틈에서 삼가 주웠다. 그가 스스로 말하였다. 어제 밤 꿈에 신이 이와 같이 말했다.

又有一?者乞食於寺。寺僧戱謂汝誠心助?役。佛應使汝言。?者如指竭力。一夜忽大叫曰夢見一老僧持金刀截吾口。自是揚言善唱歌。佛之靈昭昭也。余笑而應曰。奚獨於斯。八萬大藏經所敎福德因果。無一非誘人爲善。善則徵

 

또 한 벙어리가 절에서 얻어먹고 있는데, 절의 승려가 우스개 소리로 너는 성심껏 탑 중수하는 일을 도와라 그러면 부처님이 너로 하여금 말하게 하는 감응이 있으리라. 벙어리가 지시 받은 양 힘을 다했다. 하루 밤에 홀연히 큰 소리로 말하였다. 꿈에 한 노스님을 뵈었는데 황금 칼을 들고서 내 입을 갈랐다. 이로부터 그는 드날려 말하고 노래를 잘하였다. 부처님의 신령스러운 밝고 밝음이다. 내가 웃으며 대답해 말하였다. 어찌 이것만이겠는가. 팔만대장경이 가르치는 바가 복과 공덕의 인과이니 하나라도 사람을 달래어 착한 일 하게 하지 않는 것이 없으니, 선행을 한 즉 모두 그 징험이 있는 것이다.


銘曰

시로 이 일을 새겨 노래한다.

 

於惟舍利。疇辨之詳。

六籍攸闕。一理靡彰。

사리의 일을 생각함에 경계의 분별이 상세하고,

6적28)이 온전치 못해도, 한 이치가 휩쓸어 드러나네.

 

惚?有象。聞諸伯陽。

玄珠象罔。信者蒙莊

‘황하고 홀한 그 가운데 모양이 있네’29), 이 말은 노자30)에서 들었는데,

도리의 진면목을 상망이 얻었음을31) 믿은 자는 장자32)이었네.

 

孰火其軀。示現精光。

我誦佛書。?33)行金剛。

누가 부처님 몸을 화장하여, 사리의 정미로운 빛을 나타내었나.

나는 불서를 읊조리고, 금강 같은 청정한 수행을 한다네.

 

四相旣戒34)。六塵若亡。

菩提般若。結爲寶藏。

4상35)이 이미 사라지고, 6진36)이 없어진 것 같지만,

반야 지혜는, 맺혀 보배가 되어 갈무리되었다네.

 

如百千燈。布耀熒煌。

是其靈明。?滿十方

백천의 등불 같아, 사리의 빛나고 밝음이 사방에 퍼졌고,

그 신령스러운 밝음이, 시방세계에 충만하였다네.

 

西來慧珠。東照?桑。

石?嵬?。浩?空蒼。

서방에서 지혜의 구슬(사리)이, 전해와 동방에 해처럼 비춰지고,

석탑은 넓고 푸른 하늘에 치솟아 있다네.

 

誰其啓者。禪37)玉斯臧。

衆目具瞻。薦以華香

부처님 사리를 열어본 이 그 누구이던가,

명옥(明玉)스님이 이를 갈무리 하고,

뭇사람 두 눈으로 모두 보고, 꽃과 향으로 재를 지냈다네.

 

五層突兀。億代禎祥。

刻詩貞珉。傳告法?38)

오층탑39)은 우뚝하여 억대의 상서로움이 되었고,

깨끗한 옥돌에 시를 새기니, 진리의 도량에 전하여 알리네.

 

毋求色相。以瀆眞常。

卽心卽佛。妙覺津梁

색상40)을 구하여 참된 세계를 더럽히지 말지라.

마음이 곧 부처님이고 오묘한 깨달음의 나루터일지니.

 

靑泉居士申維翰謹志 立41)

청천거사 신유한 삼가 적음. 세움

 

-禮州 申維翰 周伯 著 靑泉集 卷之五 碑

 

*신유한 <申維翰 1681∼1752(숙종 7∼영조28)>

자는 주백(周伯), 호는 청천(靑泉). 본관은 영해(寧海). 1713년(숙종 39) 증광문과에 갑과장원 급제하였다.

1719년 제술관으로 통신사 홍치중(洪致中)을 수행하여 일본에 다녀왔으며, 기행문인 《해유록(海遊錄)》을 지었다. 가계(家系)가 서류(庶流)였으므로 말직을 전전하다가 봉상시첨정(奉常寺僉正)에 이르렀다.

시와 사(詞)에 두루 능하였다. 지은책으로 '해유록' '청천집' '분충서난록' 등이 있다.

영조 21(1745)년 연일 현감(延日 縣監)이 되었고 영조 25 (1749)년 6월 벼슬을 그만두고 고령(高靈)으로 돌아갔다. 영조 26(1750)년 경오년에 최치원(崔致遠)을 경모하여 향리에 경운제(景雲齋)를 짓고 가야초수(伽倻樵?)로 호를 삼았다.

친구 최성대에게 보낸 글에서는 변방의 적막한 시골 관리 생활에서 오로지 '금강영(金剛經)' 한 책만을 읽고 있다는 독백을 하고 있는데, 이 외에 '청천집' 권4의 염불계서(念佛契序)'와 같이 불교에 관심을 보인 글을 미루어 보면 저자가 특히 만년에 불교에 깊히 심취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고령에서 거처하던 집을 정관제(靜觀齋)라 한 것도 거사(居士)로서 불교를 수행했던 것에서 비롯한다.

 


 

1) 비석에는 ‘釋迦佛舍利塔碑’이라고 篆字로 題額되어 있다.

2) 신라시기 이래로 본래 ‘法光寺’라 하였는데, 조선 후기의 자료들에서는 ‘法廣寺’로 부르고 있다. 법광사 터는 포항시 신광면 비학산에 있는데, 9세기에 조성된 3층 석탑, 2층 금당터의 석연화불좌대, 회랑터, 진평왕 원당터, 대웅전터, 향로전터, 금강계단터, 부도, 석불 2구, 석탑 2기 등의 유물이 전하고 있다.

3) 비석은 현재 포항시 북구 신광면 상읍리 비학산 기슭의 법광사터 석가불사리탑 옆에 있다. 신유한의 이 비문과 글자의 오차가 약간 있으며, 이 비문에 나오지 않는 탑중수 협력자들과 사찰 이름이 비석의 좌우면에 새겨져 있다.

4) 비석에는 ‘是年’이라 새겨져 있다. 

5) 아래의 2자료는 이 비문을 지을 때의 정황을 보여준다.  

①春初。法廣寺僧。持盛札而到。力懇碑文。吾雖病謝筆硯。?起?拙。手草而貽之。計其歸日。必値從者西笑之後。故是以無書。然渠之所料。必以登石之筆。屬望於左右。吾意亦然。勿煩他手。不審近間或已得其文目涉否。願以暇日躬進禪刹。臨石而書。且以居士撰進士書。幷托不朽。幸之幸也(靑泉先生續集卷之二  書 與崔上庠 天翼 200_394d)

②法廣寺碑刻事。仲春。月城尹過此。語及營將書之。必是僧輩之所請。而彼以討捕使。不欲書識姓名固也。後之人以文與筆爲一人。亦何妨乎。枉駕之?。以明春爲期。而安知不蹉?也。只希照亮(靑泉先生續集卷之二  書 答崔上庠 200_395b) 

6) 지금 법광사 터에 있는 석가불사리탑은 2중 기단부를 가진 3층 석탑인데 이 글에서는 5층탑으로 잘못 생각하고 있다.

7) 비석에는 ‘九月’로 새겨져 있다.

8) 비석에는 ‘綿’자로 새겨져 있다.

9) 비석에는 ‘綿’자로 새겨져 있다.

10) 寔是는 의미를 모르겠다. 維那는 범어 karmadana로 ?磨陀那라 음역. 유는 綱維, 나는 갈마타나로 授事로 번역하며, 자세히는 都維那이다. 도는 統都. 寺務의 大綱을 통솔하고 僧衆의 잡무를 관장하는 이. 사찰의 여러 가지 일을 담당하는 사람을 임명하는 소임. 또 勤行 法要때 선도하는 役. 三綱은 寺中의 사무를 맡은 3인의 役僧. ①上座, 寺主, 都維那 상좌는 범어로 sthavira, 法臘이 높고 덕망이 있는 자가 이 임무를 맡아 대중을 統領. 사주는 vihara-svamin, 절을 만든 이를 뜻했으나 寺主는 사내의 造營이나 관리 등의 (住持)일을 맡음. ②寺主, 知事, 維那 또는 상좌, 유나, 典座를 말할 수도 있는 등 명칭의 변화가 있었다. ③已講, 內供, 阿?梨를 칭한 이후에는 上座, 寺主, 都維那를 權三綱이라 함 ④우리나라에서는 住持, 首僧, 書記(<<韓國佛敎學大辭典>>, 弘法院, 2001, 715쪽.).11) 비석에는 ‘綿’자로 새겨져 있다. 

12) 비석에는 ‘與’자로 새겨져 있다

13) 비석에는 ‘於’자로 새겨져 있다. 

14) 현 법광사삼층석탑의 위쪽 기단부.

15) 청나라 건륭제의 연호(1736-1795). 

16) 비석에는 ‘五’자로 새겨져 있다.

17) 비석에는 ‘浚’자로 새겨져 있다. 

18) 비석에는 ‘黎’자로 새겨져 있다.

19) 비석에는 ‘顆?’자로 새겨져 있다. 

20) 이상이 비석의 前面.

21) 아사리(阿?梨)의 줄임말로 범어 acarya. 제자의 행위를 교정하며 그의 사범이 되어 지도하는 큰 스님(<<佛敎學大辭典>>,弘法院, 649쪽).22) ‘果多? 涉之爲王 沈沈者’(<<史記>> 권48 <陣涉世家> 제18)‘정말 화려하구나! 진섭이 왕이 되니 궁전이 높고 크고 심오하구나!’23) 靑泉居士 申維翰(1681∼1752)은 1745-1749년에 延日 縣監으로 재직하다 퇴직하고 高靈 良田洞에 머물고 있었다. 그는 서얼로서 과거에 장원급제한 당대 최고의 문인이었고, 통신사 일행에 조선을 대표하는 문장가로 선임되어(製述官) 일본에 다녀온 일이 있다. <<海遊錄>>. 그는 유, 불, 도에 조예가 있고 불심이 깊었다.

24) 549년. 중대동 연호는 중대동 1년으로 끝나고 太淸 연호가 이어져 중대동 4년은 정확히 태청 3년에 해당한다.25) <<三國史記>> 卷4 新羅本紀 第4 眞興王條, <<三國遺事>>卷3 第4 塔像篇 前後所將舍利條. 

26) 진평왕이 죽은 해에 원효는 15세, 의상은 7세이니 두 스님이 법광사 창건과 주지를 맡았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 丁時翰의 <<山中日記>>(金成讚 譯註, 國學資料院/신대현 역, 혜안)에 義湘庵이 절 뒤편 비학산에 있다는 기사가 나오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의상과 관련이 있는 듯하고, 이 탑을 중수하는 이 무렵에 법광사에서 <<화엄경>>을 강론하는 법석이 있었다.

27) 신라 법흥왕 때는 ‘建元’, 진흥왕 때는 ‘開國’,  진평왕 때는 ‘福建 ’이라는 연호를 썼다. 

28) 禪宗의 <<大般若經>>, <<金剛經>>, <<維摩詰經>>, <<楞伽經>>, <<圓覺經>>, <<楞嚴經>>(諸橋轍次, <<大漢和辭典 권2>>, 大修館書店, 66쪽.)

29) ‘惚兮恍兮 其中有象’(홀하도다! 황하도다! 그 가운데 형상이 있네!)(<<老子>> 21章). ‘恍惚, 無形不繫之歎’(황홀이란 구체적 형체가 없고 한군데 얽매이는 것이 없다는 모습에 대한 탄식이다.)(王弼 注) 김용옥, <<노자와 21세기(下)>>, 통나무, 259-260쪽. 

30) 伯陽은 老子의 字

31) 玄珠는 도가의 말인데, 도의 본체. 象罔은 형상이 뚜렷하지 않은 無心의 경지를 말함. 黃帝遊乎赤水之北 登乎崑崙之丘. 而南望. 還歸, 遺其玄珠. 使知索之而不得. 使離朱索之而不得. 使喫?索之而不得也. 乃使象罔得之. 黃帝曰. 異哉. 象罔乃可以得之乎. (<<莊子>> <天地>) 知(지라는 사람, 寓言으로 人智로는 진실을 알기가 어려움을 말한다.), 明(이주는 사람 이름으로 시력이 뛰어났다함. 시력이 좋아 거기에 의존하는 인간을 이르는 寓言.), 辯(喫?는 言辯을 의인화한 우언) 따위의 재능이 부정되고 無心(象罔으로 의인화)의 경지를 예찬한 우화. 사물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보고 받아드이는 이러한 무심의 경지에 오히려 참된 세계가 펼쳐진다는 것이다. 상망이 현주를 찾아냈다는 것은 곧 무심 속에 혼연일체의 도가 있다는 뜻이다(안동림 역주, <<莊子>>, 315쪽). 흑백으로 작동하는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불교의 중도사상-연기 진리-반야 사상-공사상-중관사상과 흡사하다. 중국문명은 불교를 노장사상으로 格義하여 이해하였다. 격의불교. 申維翰은 儒?佛?道 3교에 조예가 깊은 사람으로 속세의 진리를 초월하는 불교를 노장사상으로 이해하고 있다. 

32) 蒙莊: 莊周는 蒙縣 사람이다. 莊子를 부르는 말.

33) 비석에는 ‘淨’ 자로 새겨져 있다. 

34) 비석에는 ‘泯’ 자로 새겨져 있다.

35) 생기고(生) 유지되고(住) 변하고(異) 사라지는(滅) 것을 이름. 

36) 6가지 감각기관(6根)이 접하는 6가지 대상(境)인데, 색(色)?소리(聲)?냄새(香)?맛(味)?감촉(觸)?마음의 대상(法)이다. 6근이 6경을 접하여 6가지 마음(6識: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이 생긴다. 6근, 6경, 6식을 합하여 18界가 된다.

37) 비석에는 ‘明’ 자로 새겨져 있다. 

38) 비석에는 ‘場’ 자로 새겨져 있다.

39) 지금 법광사 터에 있는 3층 석탑을 이름. 이 탑은 김균정이 828년 7월에 세운 원탑으로 그 손자 문성왕이 846년 9월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세웠다(탑에서 나온 塔誌石). 

40) 5온 중 물질?몸(色蘊)의 모습.

41) <<청천집>>에는 없고 비석에만 있는 구절.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