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올해도 어김없이 자유로운 영혼처럼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3월이 돌아왔다. 산야에는 이미 매화, 산수유 등이 서로 앞 다투듯 꽃망울 피워내며 제각기의 색채로 봄 세상을 열어가고 있다. 봄소식이 어디 그 뿐이겠는가? 봄기운 닿는 양지 곳마다에는 봄 처녀 유혹이라도 하려는 듯 쑥과 냉이, 머위를 비롯하여 이름조차 모르는 야생초들이 피어나 온 세상 봄의 향연을 벌이고 있다. 그러고 보니 뭇 벌레와 개구리가 긴 겨울잠에서 깨어나 세상 밖으로 봄나들이 나온다는 경칩주간도 지났다. 뭇 생명들의 새로운 한해살이가 시작되는, 바야흐로 새봄이 돌아온 것이다. 작년 이맘때쯤 나 역시 발길 닫는 대로 이산저산 둘레길이며 들길강길 마음 닿는 대로 하염없이 떠돌던 기억마저 새록새록 하다.
그러나 올해는 나에게 그렇지 못할 사정이 생기고 말았다. 앞 다투며 피어나는 봄꽃 소식은 예나 다르지 않건만 이를 반기고자 등짐지고 문밖으로 훌훌 나설 수 없는 나의 처지가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봄을 함께 노래할 꽃동산 축제에 벌 나비가 초대받지 못한 서운한 마음이라고나 할까?
아무래도 아직 나의 봄은 오지 않았나 보다. 아무래도 내 마음속 봄꽃은 아직 피어나지 않았나 보다. 올해도 예년처럼 봄나들이 떠나리라 등에 짊어질 새 봇짐가방 사다둔 지 오래건만 손으로만 만지작거리다 이 봄이 다 지나고 말 것은 아닐까 그저 마음만 뒤설렌다.
한나라의 왕사성마저도 이렇듯 봄이 왔건만 봄을 누릴 수 없는 처지를 애달프다 여겨 “호지무화초, 춘래불사춘(胡地無花草, 春來不似春)“이라고 노래하지 않았던가? 어찌 이 고사성어가 오랑캐 나라, 흉노왕에게 볼모로 시집간 한나라 절세미인 왕소군의 안타까운 마음만을 헤아린 것이겠는가? 봄이 와도 봄 같지 않고, 봄을 함께 즐길 수 없는 불운한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고자 노래한 애사시가 아닌가 싶다. 내 마음 속에도 아직 그 봄이 오지 않았으니 ‘춘래불사춘’ 이라고 해야겠다.
그 마음마저도 잠시 내려놓는다. 꽃길 따라 새봄나들이 떠날 수 없는 것이 지금의 나의 처지라면 온 봄이 떠나기 전에 만춘(晩春)이라도 함께 할 수 있기를 그저 소망하여본다. 그러려면 먼저 재앙처럼 어느 날 갑자기 집사람 눈가로 찾아와 두 달이 지나도록 나의 봄 문턱을 가로막고 선 저 병마부터 물리쳐야 한다.
누구에게나 병마는 느닷없는 재앙처럼 어느 날 갑자기 찾아들 수 있다. 그 순간 대부분의 사람들은 왜 하필이면 나일까? 왜 우리 가족일까? 라는 심리적 저항부터 하게 된다. 나 역시 초기에는 그러한 마음이었다. 부질없는 망상과 근심은 이기심의 발로일 뿐 고통만 배가 할 뿐이다. 그 누군들 자기 삶을 최선으로 살아오지 않았겠는가? 그 누군들 병마를 그저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싶겠는가? 아무리 우연이라 할지라도, 아무리 운명이라 할지라도 현실은 받아들여야 한다. 오로지 하루라도 더 빨리 그 현실을 극복하도록 노력하고 이겨내야 할 뿐이다. 지금 나의 생각도 그렇게 변해간다. 그 불운한 우연도, 운명도 그동안 건강을 소홀히 하여온 필연의 결과일 수도 있다. 어쩌면 내 삶의 업보일 수도 있겠다며 스스로를 그렇게 달래본다.
며칠이면 집사람이 눈 수술한지 두 달째가 된다. 그 두 달이란 채움 시간은 환자의 희망 달력에 표기된 완쾌 목표기간 이기도 하다. 수술 후 재발우려를 염려하여 의사의 지시대로 엎드려 지내기를 한 달, 목욕한번 하지 못하고 집안에서 조심조심 고개 숙이며 지내기를 또 한 달, 그렇게 두 달여를 고통으로 보냈다. 그러나 이게 웬 시련인가? 집사람의 눈이 완쾌되기는커녕 재발우려를 걱정하고 있다. 지금도 가끔씩 수술 전 초기 증상이라고 여기던 작은 불빛이 눈가를 출렁이며 지나고 있음이다. 눈 속의 쓰라림과 머리진통까지 호소한다. 행여 수술이 잘못되어 일어나는 재발증세가 아닐까? 수술 후유증이라고 여기기에는 너무나 불안하여 그저 마음만 무겁다.
보호자인 내가 그런 마음일진대 당사자인 환자는 오죽할까? 어제 저녁부터 “예약날짜 당겨서 내일 병원 가볼까?” 부탁하듯 말하는 집사람의 근심스러운 표정이 안쓰럽기조차 하다. 나 역시 밤새 그 모습이 눈에 아른거려 잠 못 이루었다. 아내의 그 불안한 마음을 헤아려 오늘 아침, 일어나자 말자 내가 먼저 병원가보자고 졸랐다. 행여 응급처치 타이밍을 놓쳐 실명이라도 한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나마저 그런 상상으로 가슴이 떨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는 한계에 도달한 것이다.
예약된 다음 경과검진 날자는 4월2일이다. 아직도 한 달여가 남았다. 그러나 이미 마음이 흔들려 더 참을 수 없는 긴 고통의 시간일 뿐이다. 그런 절박함으로 3월 5일 수술한 대학병원을 무작정 다시 찾았다. 사실상 대학병원 등과 같은 3차 진료병원은 예약환자를 우선으로 진료하거나 수술하는 것이 시스템으로 정착되어 있다. 예약 날짜를 당기거나 임의로 조정하지 못한다. 하지만 다급한 표정으로 재발증세가 있는 응급사항이라며 접수처 간호사에게 사정사정하여 오후 진료를 받게 되었다.
환자들과 보호자들만 득실거리는 병원에 들어서면 품위와 권위, 체면 따위는 필요하지 않다. 그가 누구이던 내가 누구이던 그냥 똑같은 환자이거나 환자의 가족으로서 간절한 행동을 할 뿐이다. 아무도 그를 두고 꼴불견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저 애절할 뿐이다.
하지만 수술을 하였던 당시 전문의는 양산병원으로 자리를 옮기고 없어 다른 망막전문의로부터 재발여부 확인검진을 받았다. 그런데 이게 웬 청청벽력 같은 말씀인가? 그렇게 우려하고 불안해하던 재수술을 받아야 할 것 같다고 태연하게 말하지 않는가? 그 순간 우리 부부는 서로 할 말을 잊고 잠시 침묵하고 말았다.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듯 눈앞이 캄캄할 뿐이다. 정신을 가다듬고 나는 상세한 경과 설명을 부탁드렸다. 동공아래 쪽으로 물이 차고 있어 망막박리 재수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시 초기에 수술한 전문의가 재직하는 양산병원으로 가서 재수술 여부를 상의 하라고 권유도 한다. 담당 전문의에게는 사전 연락을 해놓겠다는 것이다. 시계를 보니 벌써 오후 3시가 넘었다. 망설일 이유도 시간도 없다. 한시가 급한 마음으로 망설임 없이 양산병원으로 내달렸다.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아 양산병원에 도착하여 수술한 그 의사를 찾았다. 오전진료 후 퇴근하였다는 의사를 전화로 긴급 호출하여 응급환자 만나듯 다시 상봉한 것이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양산병원은 비교적 환자수가 적고 한산하였기에 여유로운 상담이 가능하였다. 자초지종 설명 후 부산병원의 오늘 진료차트를 링크하여 관찰하고 곧장 정밀 재검사를 받았다.
검사결과가 이번에는 천만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아직 재수술 할 만큼 위험한 상태가 아니라고 한다. 순간 안도감이 들기는 하였지만 이내 검진의 신뢰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교수님, 부산병원에서 재수술이 요한다는 소견으로 한걸음에 달려 왔는데요?” 라고 말하니 차근차근 촬영기록사진을 보며 다시 설명한다. 눈에 물이 조금 차있는 것은 사실이나 아직 재수술 단계는 아니라는 것이다. 수술한 곳의 망막은 아직 잘 붙어 있다고 수술부위를 지적해가며 흔들리는 환자의 마음을 진정하게 하였다. 재수술 후의 환자고통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의사의 의학적 결심이라 여겨졌다.
그러나 우려되는 현상은 눈 속에 고인물이 다른 쪽으로 움직이고 있고, 어디선가 미세하게 수분이 흡수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출렁임 현상이 곧 불빛 비침 증상이라는 논리다. 불빛은 보일 수 있으나 수분이 계속 눈 속으로 유입되어서는 안 된다며 초기수술 한곳 외의 망막박리 의심부위를 확대하여 레이저에 의한 접합수술을 추가로 하자고 한다. 입원하지도 않고 또다시 고개 숙여 한 달 이상을 보내지 않아도 되는 수술 방법이다.
청천벽력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기분이랄까? 삶의 안테나에 수신된 절망의 메시지가 다시 희망의 메시지로 변한 것이다. 마치 요즈음의 일기예보에 미세먼지 ‘매우 나쁨’이 ‘보통’으로 바뀌듯 오늘 집사람의 눈 건강지수 또한 오전의 ‘매우 나쁨’ 에서 오후에는 ‘보통’ 으로 바뀐 것이다.
의사는 오늘 1차 레이저 수술을 받고, 2주 후 경과 관찰 후 2차 레이저 수술을 추가하자고 한다. 의심부위를 광범위 하게 치료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걱정을 하지 말라고 하면서도 눈 관리에는 최선을 다하라고 당부한다. 아직 완치 결과를 지금으로는 장담할 수 없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경고라 여겨진다. 그러나 아직 실명위기의 긴급 상황이 아니고, 재수술 없이 후속 치료가 가능하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저 고맙고 감사할 뿐이다.
이제 2주 후인 3월 20일 재검 받고 추가 레이저 수술을 하면 된다. 한 달여 정도만 더 참고 기다리면 완쾌되리라는 새로운 희망이 생긴 것이다. 왠지 귀가하는 마음도, 발걸음도 가볍게 여겨진다. 마치 지옥에서 탈출한 기분이다. 순간 나는 하늘같이 넓고 높은 혜량의 마음이 스스로 용솟음친다. 이 또한 나의 삶의 과정일 뿐이다. 이러한 처지에 놓여 동병상린을 하는 사람이 어찌 이 세상에 나뿐이겠는가? 어찌 병들어 누운 사람 앞에서 그 누가 감히 봄을 노래한단 말인가? 온갖 아픈 상처에 시달리며 투병중인 사람 두고 봄나들이가 웬 말인가 싶다.
창밖의 봄 향연을 남의 일처럼 여기며 ‘춘래불사춘’의 마음으로 다시 눈감아 본다. 그리고 마음속 깊이 기도하여본다. “이 또한 곧 내 곁을 지나가리다. 비록 만춘의 시기일지라도 다시 눈뜨면 나 역시 남은 봄을 아내와 함께하게 되리다.” (달재, 2019. 3. 11.)
첫댓글 오빠. 같이 걱정이 되네요.
그래도 오빠 같은 남편을 둔 언니는 행복하다 싶습니다.
몸에 병 없기를 바라지 말고 살아가는 데 근심 없기를 바라지 말라고 했습니다.
항상 겸손한 마음으로 근신하면서 살아가라는 의미겠죠.
고생 많으셨네요. 오빠의 정성에 언니도 감동했을 겁니다.
아름다운 부부애, 부럽습니다.
다녀야 할 길, 가야할 곳은 항상 오빠를 기다리고 있으니까
서두르지 않으셔도 되고요. 기도 많이 하세요.
이 참에 참 신앙인이 되어 보시는 건 어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