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라 8:1-20
찬송가 찬송가 213장 ‘나의 생명 드리니’
주전 538년, 스룹바벨이 이끈 1차 포로귀환이 있고, 80년이 흐른 주전 458년, 2차 포로귀환이 이루어집니다. 때는 페르시아의 아닥사스다 1세가 통치하던 시기입니다. 그동안 고레스 왕이 첫 번째 포로귀환과 성전 재건을 공표했고, 이어서 캄비세스 2세, 다리오 1세, 아하수에로 왕이 통치했습니다. 중간에 몇몇 왕이 있지만, 성경에서 거론되지는 않습니다. 에스더의 남편으로 잘 알려진 아하수에로를 뒤이어 왕이 된 아닥사스다 1세는, 조서를 내려 다시 귀환을 명령했습니다. 조서를 내린 뒷배경은 이러합니다. 아하수에로 왕이 암살당하고 나라가 불안정한 때 뒤이어 왕이 된 아닥사스다 1세는 거대 제국을 안정시켜야만 했습니다. 특히나 이집트가 반란을 일으키지 않도록,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 민족과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국제 정세와 사람의 일생을 주관하시며 하나님의 백성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셨습니다.
에스라와 함께 돌아온 백성들
함께 읽은 본문에서는 귀환한 자들의 가계별 대표자들과 동참한 인원을 알려줍니다. 그 인원을 더하면 남자만 1,775명입니다. 여자들과 어린아이를 더하면, 5천 명 정도 되었으리라 여겨집니다. 이는 1차에 귀환했던 인원에 비하면 4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 작은 규모입니다. 어쩌면 당연했을지 모릅니다. 1차 귀환이 이루어진 지 80년이 흐른 이 시기는 다시 말하면, 포로로 잡힌 지 150년이 지난 시점이기 때문입니다. 고향을 떠나 고향을 그리워했던 사람들은 1차 귀환 시기에 고향으로 향했습니다. 어릴 적 예루살렘에 대한 기억이 흐릿하게 남아있던 1.5세대도 거의 남아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현재 페르시아에 거주하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향은 예루살렘이 아닌 현재 있는 바로 그곳입니다. 삶의 모든 기반이 바벨론에 있었고, 더욱이 그들에겐 바벨론과 페르시아의 문화가 더욱 익숙했을 것입니다. 성전도 재건이 되었는데, 굳이 예루살렘으로 향할 명분과 이유도 없어졌습니다.
그들에게 귀향의 여정은 말뿐인 ‘귀향’이지 실상은 미지의 세계를 향한 모험과도 같았을 것입니다. 그런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가기로 했다는 건 뜻과 마음을 굳게 정했다는 것이며 삶의 모든 것을 포기하겠다는 결단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기에 1차 귀환에 비해 지극히 적은 인원이었지만, 에스라에게는 천하보다 귀하고 값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열 두절에 걸친 명단에는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한 단어가 보입니다. 바로 ‘함께’입니다. 1절에 ‘나와 함께 바벨론에서 올라온’을 포함해서 2절부터 14절까지 열 세 번이나 ‘함께’라는 단어가 반복됩니다. 에스라에게는 자기와 함께하는 동역자들에 대한 고마움뿐만 아니라, 감격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에스라는 소중한 동역자들을 1절에서 14절까지 세 그룹으로 구분하여 소개합니다. 제사장, 왕족, 일반인입니다. 하지만 그는 상류층에 대한 언급을 최소화하여 단 한 절로 축약합니다. 2절의 비느하스는 아론의 손자이며, 이다말은 아론의 아들로 제사장 계열입니다. 이어 다윗의 자손으로 핫두스를 거론합니다. 그리고 나서 3절부터 14절까지는 일반 백성으로 구분되는데, 에스라는 의도적으로 열두 집안을 부각시킵니다. 그건 열두 지파로 상징되는 하나님의 백성을 연상케 하기 위함입니다. 마치 새로운 출애굽을 떠올리게끔 말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출애굽이란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 날입니다. 이집트 노예라는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받은 날이었습니다. 에스라에게는 바벨론을 떠나 고국으로 돌아오는 이때가 제2의 출애굽과 같이 느껴진 것입니다. 새로운 시대를 여는 이 중대한 시점을 함께 한 동역자들의 명단을 적어 내려갔을 땐 마음이 웅장해졌을 겁니다. 특히나 이들은 어려운 삶의 기반을 포기하고 자기 곁에 서준 동역자들, 많은 어려움을 감수하기로 함께 떠나기로 결심하고 뜻을 정한 동역자들의 이름을 적을 땐 온몸에 감사와 감격의 전율이 흘렀겠지요.
우리 곁엔 예수님이 함께 서주셨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거룩한 무리, 성도의 명단에 감히 이름을 올립니다. 비록 연약하고 허물투성인 우리를 예수님께선 ‘함께’하는 동역자로 삼아주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신앙 공동체로 ‘함께’하는 동역자들에게 어떤 마음을 갖고 있으십니까? 여름 사역으로 부딪히며 드러낸 서로의 연약한 모습들, 부족한 구석들, 또 저마다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모습들이 있습니다. 동역자의 모습에 실망하고, 아쉽고, 서운하고, 섭섭하신가요. 하지만 그들 모두 신앙의 여정에 동참하기 위해 무언가를 포기했고, 무언가를 감수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 뜻을 정하고, 하나님 나라를 향해 창문을 연 사람들입니다. 저마다 뜻을 정하고, 무언가를 포기하고 감수하며 신앙의 모험에 동참한 공동체원을 소중히 여기는 우리 되기를 소망합니다.
에스라가 레위 사람을 찾다
이어 에스라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지체하지 않고 귀향을 준비합니다. 약 5천 명의 인원을 데리고 고국으로 귀환하는 대규모 이동을 준비합니다. 출발 전 아하와 강가에 사람들을 소집시키고 귀환자들을 파악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생겼습니다. 15절입니다.
(15절) 내가 무리를 아하와로 흐르는 강 가에 모으고 거기서 삼 일 동안 장막에 머물며 백성과 제사장들을 살핀즉 그 중에 레위 자손이 한 사람도 없는지라
돌아가려는 무리 중에 레위 사람이 없었던 것입니다. 레위 사람은 성전에서 봉사하고 수종을 드는 직무를 하던 사람들입니다. 사실, 1차 귀환 때에도 레위인은 341명에 불과했습니다. 4,289명의 제사장과 비교했을 때 지극히 적은 인원이었습니다. 그런데 2차 귀환 명단엔 레위인이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레위인들은 귀환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살펴보면 잘 알게 됩니다. 출애굽 후, 레위인에게 맡겨진 주된 역할은 성막과 성물 기구들을 이동하는 것이었습니다. 게르손 계열은 휘장이나 세마포와 같은 천들을 날랐고, 고핫 계열은 성소의 성물을 어깨에 매고 이동했으며, 므라리 계열은 성막의 널판 기둥과 같이 무거운 물품을 수레로 날랐습니다. 주로 막노동처럼 보였던 일들을 감당했습니다. 이들은 같은 지파이며 친척이었던 모세와 아론이 사람들을 이끌고 지휘하는 것과 자기에게 맡겨진 직무를 비교하며 시기했습니다. 그러다 제사장 그룹과 레위 자손들과 갈등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이에 모세는 ‘너희를 구별하여 가까이 하게 하사 여호와의 성막에서 봉사하게 하시며 회중 앞에 서서 그들을 대신하여 섬기게 하심이 너희에게 작은 일이겠느냐(민16:9)’며 그들을 책망하고 꾸중하기도 했습니다. 그들 스스로가 자기에게 맡겨진 일이 ‘작은 일’이라며 보잘것 없다고 생각한 데서 비롯된 불화였던 것입니다.
게다가 성전이 건축되면서 자연스레 레위 자손들의 역할은 여호와의 전에서 수종드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성전을 관리하고, 제사, 음악을 담당하고 문지기처럼 보초도 섰습니다. 재판과 같은 행정도 하고, 백성의 율법 교육도 담당합니다. 여러 방면에서 수고스럽고 힘든 업무를 감당했지만, 보수는 변변치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성전이 없는 포로 생활 중에 레위 사람들은 다른 직업으로 전환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그들에게는 예루살렘 귀환이 마냥 반가운 소식은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자기 가문과 혈통에 따라 주어진 막중한 임무를 감당하기 보다는 오랜 기간 정착해 잘 살던 곳에서 평탄하게 생을 이어가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귀향에 주저하고, 선뜻 동참하지 못했던 합리적인 이유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귀환하는 목적은 단순한 지리적인 이동이 아니었고, 조금 더 나은 생활을 찾아가는 이민도 아니었습니다. 에스라의 2차 귀향 목적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나님 말씀을 가르쳐,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으로 다스림 받는 신앙 공동체를 다시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말씀 위에, 말씀으로 세워진 공동체, 신앙 공동체 재건을 위해서는 백성의 율법 교육을 담당했던 레위인이 중추적인 역할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그렇기에 에스라는 출발을 지연시킵니다. 5천 명의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출발하지 않습니다. 에스라는 출발을 멈추고, 레위인을 찾고 모으기 위해 사람을 보냅니다. 16-17절입니다.
(16-17절) 이에 모든 족장 곧 엘리에셀과 아리엘과 스마야와 엘라단과 야립과 엘라단과 나단과 스가랴와 므술람을 부르고 또 명철한 사람 요야립과 엘라단을 불러 가시뱌 지방으로 보내어 그 곳 족장 잇도에게 나아가게 하고 잇도와 그의 형제 곧 가시뱌 지방에 사는 느디님 사람들에게 할 말을 일러 주고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섬길 자를 데리고 오라 하였더니
일곱 족장 뿐만 아니라, 명철한 사람을 불러서 파견합니다. 가시뱌 지방은 바벨론 북부 지역에 위치한 성읍으로, 이스라엘 자손, 특히 레위 사람들의 집단 정착촌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곳에 레위인을 찾아가 설득하고 권면합니다. 아마 그 내용은 에스라가 결심했던 것, 앞서 모인 사람들이 뜻을 정했던 바로 그 내용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다운 백성을 세우기 위해선 말씀과 율법, 하나님의 뜻을 가르치고 교육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섬길 자를 적극적으로 찾고 강력히 권고했던 에스라에 의해 레위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18-20절입니다.
(18-20절) 우리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고 그들이 이스라엘의 손자 레위의 아들 말리의 자손 중에서 한 명철한 사람을 데려오고 또 세레뱌와 그의 아들들과 형제 십팔 명과 하사뱌와 므라리 자손 중 여사야와 그의 형제와 그의 아들들 이십 명을 데려오고 다윗과 방백들이 레위 사람들을 섬기라고 준 느디님 사람 중 성전 일꾼은 이백이십 명이었는데 그들은 모두 지명 받은 이들이었더라
하나님의 손은 국제 정세나 일생을 주관하시기도 하지만, 하나님 자녀들의 마음도 어루만지십니다. 에스라의 강권에 레위 사람 38명과 또 그들을 섬기는 느디님 사람 220명이 따라나섭니다. 앞서 말했듯 선뜻 따라나서기 쉽지 않았을 터이지만 그들은 지도자들의 권면 속에서 하나님의 부름과 지명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들 모두를 가리켜 ‘지명 받은 이들’이라 소개합니다. 하나님께서 지정하고 선택하여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비록 전체 규모에 0.02%에 불과한 수였지만, 이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들었고, 그 부르심에 순종으로 응답하여 자기 자리로 돌아왔습니다. 수고스럽지만 만족스러운 대우도 받지 못하는 자리이니 주님이 부르신 그 자리, 직임을 다하는 제자리로 돌아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백성을 바로 세우는 일이 준비되게 됩니다.
주님께선 손수 우리 한 명 한 명을 모아 100주년기념교회로 불러주셨습니다. 주님은 한 사람 한 사람을 우리 부서로, 우리 구역으로 함께 하게 하셨습니다. 혹여 기준에 미치지 못하여도, 미흡하고 아쉽더라도 주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으로 모였음을 신뢰하며 지금 함께하는 공동체의 일원을 소중하게 여깁시다. 나아가 내게 맡기신 일이 초라해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사람, 성전을 세우는 일에는 꼭 필요한 일임을 알아 충성을 다합시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성전을 섬기는 일, 곧 그리스도 안에서 맺어진 형제와 자매를 세우는 일에 부르셨습니다. 현재도 하나님께서는 찾고 부르며 모집하십니다. 어린 영혼에게 말씀을 먹이고 사랑을 주는 교사로, 구역원을 돌보고 기도하는 구역장과 권찰로, 교우의 예배를 돕는 성가대와 안내와 친교팀, 주차팀으로 함께함으로 주님의 부름에 응답하는 하루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말씀으로 하루를 시작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에스라는 동역자를 소중히 여겼고, 동역자를 힘써 찾으며 주님께서 맡기신 일에 헌신하였습니다. 주님의 기준에 한 참 미치지 못하는 우리를 성도라 불러주시고 말씀 위에 함께 서가는 일 맡겨주셨습니다. 맡기신 일 비록 작아 보일지라도 충성을 다하게 하시고, 지금도 우리를 지명하여 보내시는 자로 순종하며 주님 부르심에 응답하게 하옵소서. 늦더위에 지치지 않도록 교우님들의 건강을 지켜주시고, 또 다가오는 2학기 주님의 부르심따라 구역과 봉사의 자리로 나아가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구역과 봉사팀 안에서 ‘함께’하기 어렵고 꺼려지는 지체가 있나요? 그가 신앙을 가진 배경과 그가 그 자리까지 나아오기까지 포기하고 감수해야 했던 것을 헤아려 봅시다.
2. 작은 일이지만, 충성을 다했더니 하나님을 가까이하게 되었고, 교우를 세웠던 경험이 있었나요? 반대로 작은 일이라 터부시 여기고 손 놓았다가 하나님과 멀어지고 삶이 신앙생활이 해이해졌던 경험이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3. 2학기,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봉사와 섬김의 자리는 어디인지 귀 기울여 듣고 결단해 봅시다.
(작성: 김 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