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음대를 졸업한 후 성악의 본고장인 이탈리아로 건너가서 10년의 오랜 세월 동안 발성 하나에 인생을 걸고 노력한 보람이 있어, 이탈리아에서도 인정받는 성악가로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성악가라면 누구든지 평생을 통해서 추구하게 되는“벨칸토(Bel Canto)"를 한국인으로서는 가장 정확하게 구사한다는 일반적인 평에 대하여 과분한 칭찬이라고 겸손해 하면서 “인간에 대해서는 혹시 교만하게 보이는 등 실수를 할 수 있으나, 음악에 대해서만은 솔직하고 겸허한 태도로 임해야 한다는 게 나의 지론”이라며 자세를 가다듬는다.
모든 성악가나 성악도들이 궁금해하는 벨칸토의 개념에 대하여 “발성의 터득을 위해서 소리를 코에다 꿰어보기도 하고, 후두강을 넓혀보기도 하고, 후두를 억지로 내려 소리를 갈아보기도 하고, 혀를 말아서 세워보기도 하고, 혀를 수건에 감아서 당겨보기도 하는 등 여러 가지의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서서히 깨달아지는 것으로, 말하듯이 자연스런 상태와 포인트에서 정확한 발음과 액센트를 동반하며, 호흡에 의하여 조금 세련되게 하면서 편안한 상태의 균형을 잃지 않는 발성”이라고 이야기하면서도 “벨칸토라는 용어 자체가 너무 평범한 이탈리아어인 만큼 그것의 구체적 이론화는 불가능하지 않겠느냐”고 싱긋이 웃어 보인다.
"성악가를 지망하는 성악도들은 발성 테크닉 연마에 아주 충실해야 한다. 젊고 힘이 있을 때는 테크닉이 조금 부족하여도 근육의 힘으로 밀어붙여서 소리를 어느 정도 낼 수 있으나, 근육이 늘어지고 혈기왕성한 힘이 빠지기 시작하는 40대 후반부터는 고도의 성악적 테크닉이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성악가로서의 제 구실을 하지 못하고 조로해 버린다. 국내에 이와 같은 전철을 밟는 성악가들이 의외로 많다. 정반대로, 나이가 들어서도 젊을 때 못지않게 소리를 잘 내는 세계적인 성악가들도 많은데, 그런 대가들은 완벽한 발성 테크닉 습득과 나이 변천에 따른 철저한 자기관리에 성공한 경우이다. 발성은 나이에 따라 조금씩 변천하는 것이다.
소리는 나이에 맞추어 알맞게 조절해야 한다. 20대 초반의 젊은 학생이 50대 선생님의 원숙한 소리를 흉내내는 것은 위험천만이다. 50대 선생님의 원숙하면서도 굵은 음색은 20대 때부터 진행된 젊고 싱싱한 소리가 제 나이에 맞게 잘 조절되었던 결과로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다. 한창 싱싱하고 예쁜 소리를 낼 20대 초반에 4,50대의 굵고 풍만한 소리를 추구하던 많은 성악도들이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사라지는 현실을 바로 직시해야 한다.”
성악가들 중에 운동 선수를 거쳤던 사람들이 많듯이 고성현도 스포츠에 남다른 관심과 재능이 있다. 어릴 적 육상 선수로 폐활량의 확장과 유연성에 많은 도움을 얻었던 경험에 비추어 성악을 공부하는 성악도들에게 꾸준한 스포츠 활동을 권장한다.
이탈리아에서 유학할 당시 그곳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축구부를 조직하여 '밀라노 두에'지역에 있는 운동장에서 매주 체력을 단련하며 즐겁고 유익한 시간을 보내곤 했다. “성악가에게 있어서 호흡은 생명과도 같은 것이다.
소리가 잘 날 수 있는 육체적인 조건 확충에 노력하지 않으면서 소리내는 것에만 매달리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라며 그 당시 즐겼던 스포츠가 성악공부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바리톤 고성현은 현재 한국 성악계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는 성악가 중의 한 사람으로 그가 출연했던 음악회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음악회는 “작년 1992년 이탈리아의 ‘풋치니의 호수에서 열렸던 ‘토스카’이다.
스칼라 최고의 테너인 쟈코미니와 함께 무대에 올라 악역인 스카르피아로 분장하여 유명한 상대역인 소프라노 디미트로바를 감동시켰는데, 공연을 위하여 처음 만났을 때의 디미트로바는 나에게 아주 냉담한 태도를 취하였다.
조그만 동양인이라고 얕보는 것 같아 자존심도 많이 상했다. 그러나, 같이 리허설을 하고 난 이후의 디미트로바의 태도는 완전히 바뀌었다. 오페라 공연 후 신문에 난 나에 대한 평이 ‘잠자는 디미트로바를 깨운 스카르피아’이었다.
이탈리아의 대가들과 함께 공연하면서 느낀 것은 이탈리아인들의 오페라에 대한 진지함이었다. 연습시간에도 목을 사리지 않고 실전처럼 열연하는 그들과 소리내는 것에 아주 인색한 한국의 성악가들이 오버랩되며 지나갔다.”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많은 오페라단이 있으나 오페라를 오페라답게 공연해 낸 단체는 얼마되지 않는다고 하자 고개를 끄덕이며 “능력도 없으면서 대작 오페라에만 매달리는 이유는 알지만 이러한 현실은 오페라 발전과 오페라 저변 확대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예산이 적게 들면서도 노하우를 쌓아갈 수 있는 멋있는 소품 오페라가 많이 있는 만큼 소규모 오페라 운동이나 소극장 운동을 지나친 관객 의식 없이 꾸준하게 추진해 나가야 한다.”고 대답한다. 한국에는 예술가곡이 없다고들 한다.
작곡가들에게도 책임이 있지만 연예인으로도 분류될 수 있는 오페라 가수 일변도로만 달려가는 한국의 성악 풍토와 아리아를 부르는지 가곡을 부르는지 분간을 할 수 없도록 무대 위에서 혼돈의 음향 세계를 조성하는 성악가들에게도 책임이 있다.
리트(Liet)라 불려지는 독일의 예술가곡 속에서 오히려 예술의 높은 감동을 맛볼 수 있는 경우를 한국가곡에서와 국내에서는 찾아보기 아주 힘들다. 이런 면에서 바리톤 고성현은 절제를 통하여 가곡을 가곡답게, 아리아를 아리아답게 소화해낼 줄 아는 드문 성악가 중의 한 사람이다.
간혹 성악가들 중에는 한국말이 노래하기에 부적합하고 한국노래를 많이 부르면 발성이 나빠진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많다고 하자, “모짜르트가 성악을 위한 언어로서는 모두가 부적합하다는 독일어를 가지고 훌륭한 오페라를 많이 만들어내었고, 세계적인 테너 프릿츠 분덜리히는 이탈리아어로 작곡된 수많은 오페라의 아리아를 독일어 번역으로 원어 못지않게 잘 불렀다.”는 이야기로 예봉을 피하였다.
한양대학교 음대교수이기도 한 고성현은 “전문연주자로서 학생을 가르치는 교수를 겸임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다.
학생들이 적극적인 자세로 수업에 임할 때는 큰 보람을 느끼나, 세수하지 않은 듯한 멍청한 얼굴로 수업에 임하는 학생들을 볼 때마다 성대의 피로도는 급상승한다. 본의아니게 내지르는 고함 소리로 인해 목을 상할 때도 많다.
외국에서 꽤 잘하던 성악가들이 국내에 교수로 정착하면서 발성이 급격히 나빠지는 경우를 자주 대하게 될 때마다 긴장하게 된다. 외국에서는 소리를 잘 내는 성악가의 경우 교수직을 부탁하여도 일언지하에 이를 거부한다.
연주자로서의 할 일이 태산같이 많은데 외도를 왜 하느냐는 식이다. ‘교수는 성악가다’라는 이상한 공식이 통하는 우리나라의 현실이 배우 안타깝다”고 말한다.
고성현은 피아노를 잘 치면서 발성에 대한 식견이 뛰어난 부인 배성희여사의 덕을 아주 많이 본 사람이다. 미술을 전공하여 미에 대한 주문이 꽤나 까다로운 부인과의 슬하에 국교 3년생인 씩씩한 남자아이 '남희’가 기대주로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