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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얀 戰 爭 (전쟁)
작가: 이은집
1
<배정서>. 프린트 양식의 十六절지에 간단히 인적사항만 잉크로 휘갈겨 쓴 그런 것이었지만
그러나 그것은 이날의 나를 얼마나 감동시켰던가.
六년의 초등학교, 三년의 중학교, 다시 三년의 고등학교, 그리고 四년의 대학교 이어서 만 三四개월의 군대생활….
하고선 이제야 나는 저 사회 ──아니 이 사회에 첫 발을 내딛게 되었던 것이다.
제대말년의 초조롭던 나날들….
우연한 기회에 교사임용고시가 있다는 말을 듣고, 중대장을 졸라 겨우 三일의 휴가를 얻어 응시했던 일…
그리고 수천명과의 경쟁에서 합격되던 순간의 차라리 어이없던 기분….
허나 거의 석달이나 우이동 산골짜기의 삭월세 방에 자취를 하면서 기다려도 끝내 발령이 나지 않았을 때,
나는 그 즈음의 군대말로 <말짱 헛일>이 아닌가고 실의에 빠져 버렸던 것이다.
그러던 터에 나는 뜻밖의(?) 배정서를 받게 되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내가 감동한 것은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는 언젠가부터 교사가 되기를 꿈꾸어 왔다. 고작 교사가 꿈이었느냐고 비웃는 다면,
하기야 나도 아주 어렸을 때는 나의 부모님이나 동리사람들이 대통령감이라고 추겨주기도 했고,
내 자신 위대한 과학자나 예술가가 되겠노라고 마음속에 다짐 한 적도 있었다.
허나 나이가 들수록 그런 것들은 어쩐지 나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악세사리같은 부자연스러움이 뒤따랐다.
나는 나의 인생을 그 이상으로도 그 이하로도 살고 싶지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내가 그날 배정서를 받아쥐고 하늘을 바라보며 유쾌한 미소를 날렸대서 아무도 비웃을 까닭은 없는 일이었다.
아직도 늦추위가 싸늘한 바람을 앞세우고 온누리를 휩쓸어 댔지만,
그러나 나는 의연히 두 팔을 힘차게 내저으며 배정받은 ○○여자고등학교를 찾아갔다.
제대한지 꼭 두달하고 스무이틀밖에 되지 않았으니 여태 군대 기질이 남아있는 탓이었을까?
학교는 마포 아파트 못미쳐서 XX동 종점의 언덕받이에 우뚝히 서있었다.
앙상한 나목들이었지만 우선 교정을 감싸주는 숲이 나를 더욱이나 즐겁게 해주었다.
나는 수위에게 용무를 얘기하고 운동장 곁으로 뻗힌 교사로 통하는 길을 걸어 올라갔다.
이미 수업시간인듯 학생들은 보이지 않고,
각 교실의 유리창 밖으로 선생님들의 강의 소리가 조용히 혹은 크게 새어나오고 있었다.
『나도 이제는 저렇게 되겠지.』
그것은 상상만 해도 가슴이 뿌듯해지는 일이었다.
서무실에 배정서를 제출하자 담당계원은 곧 급사를 시켜 교장실에 연락을 했다.
이윽고 들어오라는 전갈에 나는 약간 긴장된 마음으로 교장실에 녹크를 한 후
五十쯤 돼보이는 여교장 선생님 앞으로 나아가 인사를 했다.
『배정을 받고 왔습니다. 성 지현이라고 합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만나게 돼서 반갑군요.』
벌써 시교위에서 연락을 받은듯 교장 선생님은 나에게 다정스레 쏘파에 앉기를 권하며 자신도 맞은편에 자리했다.
『네.』
나는 주저앉으며 주위를 잠시 훑어보았다. 여학교답게 모든 게시물과 비치물들이 제 자리에 잘 정돈돼 있다.
그것으로 나의 마음은 흐뭇할 수가 있었다. 역시 왁살스러운 남학교보다는 다정다감한 여학교가 나을 것 같다.
『저… 교직경력이 처음이시겠지요?』
교장 선생님은 아직 짧게 깎은 군대 헤어스타일의 나의 모습에서 직감했는지 약간 불안한 어조로 물었다.
『네! 군에서 제대한지 두달 좀 더 됐습니다.』
『그래요?』
하더니 교장 선생님은 나의 눈치를 더 살피다가
『그러면 내가 이런 얘기 한다고 오해는 말아주어요.
선생님같이 이렇게 젊으시면 여기는 여학교가 돼놔서 여러가지로 조심할 일이 많아요.』
하고 더 이상은 거북하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웃으며 교장 선생님께 대꾸했다.
『글쎄요. 제 딴에는 산전수전 다 겪었다고 생각합니다만….』
사실 고등학교 시절부터 가정교사로 돌며 나는 너무나 많은 괴로움 속에서 지내왔다.
따라서 나의 벗은 고독이었고, 그것은 나를 보다 넓게 그리고 깊게 해주었다.
『호호호! 그러시다면 안심하겠습니다. 그럼 오늘은 그냥 집에 가셨다가 월요일 아침 八시까지 나오세요.
직원과 학생들에게 신임인사랑 할테니까요.』
이로써 나의 오늘 일은 끝났다.
나는 휴식 시간인 듯 여학생들이 왁자지껄 떠들어대는 학교를 뒤로 하고 발길을 돌렸다.
운동장 동편의 아까시아나무 숲에서 서울 시내에서는 보기 드문 까치가 잘 가라는듯 사뭇 짖어대고 있었다.
2
어제 일요일에는 때 아닌 눈이 온누리를 뒤덮더니 오늘까지 잔뜩 흐려있다.
허지만 나의 마음은 지금도 역시 저 구름위에선 붉게 빛나고 있을 태양의 그것처럼 밝아 있었다.
더구나 완전한 사회인──아니 직장인으로서 직원조회에 인사를 마치고 좌석까지 배치받고 나니 더욱 설레일 따름이었다.
월요일은 운동장에서 승공조회가 있는 날이라,
나는 마침 나보다 며칠전에 부임했다는 J선생과 함께 신임인사 소개를 받게 되었다.
우리는 교장 선생님의 인솔하에 마이크가 한창 체육 선생의 구령을 뿜어내고 있는 운동장으로 내려갔다.
二천여개의 눈동자가 일제히 이미지의 교사들에게 집중공격을 가해왔다.
허나 그것은 호기심과 장난기가 섞여있을뿐,
三년전 논산 훈련소에 들어갔을 때 훑어보던 기간사병들의 눈초리와는 전혀 달랐다.
『오늘은 여러 학생들에게 기쁜소식을 말하게 됐어요.
그동안 공석이어서 수업에 막대한 지장을 가져오던 국어선생님께서 두 분이 오셨어요.
이쪽 분이 J선생님, 저쪽 분이 성 지현 선생님….』
하시며 교장 선생님은 전에도 늘 그랬을, 예의 좀 과장된 우리들에 대한 소개 말씀을 하셨다.
J선생보다 연조가 낮은 나는 우리를 대표하여 역시 상투적인
『여러분을 만나게 돼서 기쁩니다. 앞으로 서로 힘을 합하여 보람찬 생활을 합시다.』
라는 J선생의 신임인사 후에 꾸벅 경례만 하고 말았지만 그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새로운 각오와 결의를 다질 수 있었다.
학생들은 모두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생글거리고 있었다. 여학생들에게는 웃음이 헤푼 모양이었다.
이로써 일단 나의 모든 절차는 끝난 셈이었다.
다시 교무실에 들어왔을 때, 국어과 협의회가 있으니
교장실로 모여달라는 과주임의 지시가 있어 나는 곧 회의에 참석해야 했다.
『…에, 갑자기 이렇게 과협의회를 가지게 된 것은, 이제 우리 과가 인원이 모두 보충됐으므로,
학년별 과목과 시간배당을 협의하기 위해서입니다.』
하고 대머리가 훌렁 벗겨져 실제보다 너댓살이나 더 늙어 보이는 K선생이 서두를 꺼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므로 잠자코 듣기만 하는 편이었다.
국어과 총시간이 一〇八시간인데 과원이 五명이고 보니,
이리 찢고 저리 갈라도 똑같은 배당이 될 수는 없었다.
그러자 돗수높은 안경을 낀 홍일점 M선생이 신경질을 팍 내며 자신이 여자임을 유세로
시간 수를 줄여 줄 것을 내세우는 것이었다.
나는 그 순간 고작 일주일에 많아야 二二시간 차례가 오는데 왜 저렇게 왈가왈부하는가 싶어 이해되지 않았다.
적어도 교직에 있는 분들이 시간 수 하나 둘을 가지고 이 모양이라니….
해서 나는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저 二一시간씩 나누면 二四시간이 남는데 그건 저에게 주십시오. 경험삼아 많이 가르쳐 보겠습니다.』
그러자 M선생은 약간 비웃음을 담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성선생님은 아직 모르셔서 그렇지 한 달이 못가 후회하실 텐데요.』 했다.
나는 전혀 순수한 뜻이었기 때문에 솔직히 불쾌함을 참을 수 없었다. 해서
『그럼 후회될 때까지만이라도 하죠.』
하고 자신있게 대꾸했다.
사실 나는 그때 무모하리만큼 열의에 넘쳐 있었다.
내가 바라던 것이 교사가 아니었던가?
『아니…! 성선생님은 나를 비꼬시는건가요?』
M선생은 갑자기 얼굴이 붉어지며 나를 쏘아보았다.
내 딴에는 위트있는 대꾸라고 한 것이 一八〇도 핀트가 빗나간 모양이었다.
나는 당황하였다. 어떻게 더욱 위트있는 대꾸가 없을까?
허나 역시 전쟁에는 역전의 용사가 나았다. 과주임 K선생이 우리들 사이에 끼어들었던 것이다.
『하하하! 처녀 총각 때가 부럽습니다. 난 매인 몸이 되고 보니 싸움도 마음대로 못하겠는데….』
그제야 나는 삼십이 훨씬 넘어 보이는데도 M선생이 아직 처녀인 것을 알았고,
따라서 둘이는 다 같이 홍당무가 된 반면에 다른 선생들은 폭소를 터뜨렸던 것이다.
결국 나의 제안대로 나만 二四시간을 맡고 나머지 분들은 二一시간씩 돌아가게 되었다.
『자! 이것으로 국어과 협의회를 마치겠습니다.
그러면 이따가 퇴근길에 학교 앞 다방에 가서 차나 한 잔씩 들면서 신임 선생님의 신고를 받기로 합시다.』
K선생은 끝으로 또 이런 소리를 해서 모두에게 웃음으로 교장실을 나오게 했다.
나는 그때 엉뚱하게도 다시 한번 삼년전의 논산 제二훈련소 시절을 생각했다.
그리고 이제 오늘 내가 온 곳은──군대가 되기 위해서는 제二훈련소였지만──그러니까 제三훈련소가 아니냐는 것이었다.
그랬다. 어떤 의미에서 이곳은 제三훈련소였다.
3
국어 독본, 一학년 一반부터 三반까지 주당 四시간씩 도합 一二시간.
작문과 문법, 一학년 一반부터 六반까지 주당 一시간씩 도합 一二시간. 총계 二四시간.
이것이 내가 금학년도에 담당하게 된 정규시간이었다.
거기에 조조학습이라 해서 별도로 시간 수당을 받기는 하나 六시간,
특별활동이라는 것이 二시간, 그러다보니 실제로는 주당 三二시간, 하루 평균 五시간이 넘었다.
허지만 나는 새벽부터 밤까지 일하는 여러 종류의 직업을 떠올리며 그쯤이야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보다도 오늘 들어가게 되는 一학년 二반의 첫 시간을 어떻게 진행할까 하는 작전에 몰두하고 있었다.
이미 어제 나는 서점에 가서 고一 국어에 대한 각종 참고서를 너댓권이나 샀다.
그리고 첫 마디부터 끝에 할 소리까지 세밀히 생각해 보았다.
사람은 누구나 처음 인상이──아니 인상이라기보다 그 출발이 중요하다.
먼저 나의 인적사항부터 소개한다.
그러나 그것은 <나는 아무개요, 모 학교를 나왔고…> 식으로 하면 벌써 초단도 못되는 급수다.
좀 더 다른 유모러스하고 기발한 방법으로 대화를 전개시켜야 한다.
출석부 위에 교과서와 백묵통을 얹어들고 가는 나의 머릿속은 一학년 二반의 또어 앞에 섰을 때까지도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누군가 말했다.
<일이란 당하면 하게 마련이다>라고….
내가 들어서자 六○명 학생들의 시선이 일제히 촛점을 맞추어왔다.
『차렷! 경례!』 반장의 구령에 『안녕하세요?』하는 쏘프라노가 합장처럼 터져 나오는데
그 중의 하나가 『처음 뵙겠어요!』하고 외쳐댄다.
그 바람에 교실안은 웃음바다가 돼버렸다.
<이놈들 봐라! 정신 바짝 차려야겠는데….>
나는 속으론 긴장하면서도 오히려 여유만만하게 입을 열었다.
『운동장에서랑 나는 두번째 여러분을 보겠는데….』
역시 여학생들은 웃음이 하나의 습관인듯 또 한번 까르르 폭소들이었다.
『에, 먼저 오늘부터 내가 여러분들의 국어과목을 맡게 돼서 여러분들이 참으로
영광스럽다는 인사를 하게 된 것을 무척 기쁘게 생각합니다.』
나의 이 첫마디에 학생들은 약간 어리둥절했으나 곧 알아차린듯 다시 세번째의 웃음이 교실을 채웠다. 나는 계속했다.
『…왜냐하면 이자리에 서게 된 선생님으로 말하면 머지않은 장래에 아주 유명하게 되셔서 여러분들이 졸업을 하고 몇년쯤 됐을 때엔 감히 이름 석자 부르기도 황송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혹시 그렇게 안되드라도 그런 기분으로 나한테 공부를 배운다면
여러분들에겐 손해가 없을 테니까 마음대로 하기 바랍니다.』
『호호호…!』
학생들은 자신들이 가진 웃음의 재고량이 동이 날 정도로 계속 깔깔대었다.
이윽고 나는 저들이 눈물이 핑돌도록 웃음이 계속된 다음에
교탁을 한번 꽝 치며 지금까지의 태도와는 정반대로 엄숙하게 말했다.
『그러면 이제부터 내가 담당하게 된 국어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자 학생들은 쥐죽은듯 고요해지며 나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러나 나는 다시 입을 꾹 다물고 돌아서서 백묵으로 칠판에 군대시절에 익힌 차드솜씨를 발휘 하여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땅위에 몇개의 가지를 뻗치고 선 나무들이었다.
학생들은 점점 의아해져서 이제는 웃지도 않고 나와 칠판의 그림만 번갈아 바라볼 뿐이었다.
나는 나무마다에 영어, 수학, 사생, 과학, 예능, 가정…하고 국어만 빼놓고서 이름을 붙여 써 놓았다.
그리고는 학생들을 주욱 한번 훑어보고 나서 그제야 다시 입을 열었다.
『여러분! 이 나무가 무엇인지 아시겠지요? 바로 모든 과목들을 상징할 거예요.
그러면 국어라는 나무는 어디에 있느냐? 궁금할 겁니다. 허나 국어는 나무가 아니예요. 바로 땅이예요.』
하면서 나는 나무들이 서있는 아래에 커다랗게 고딕체로 <국어>라고 썼다.
『…그러니까 국어란 모든 과목의 바탕이 된다는 말입니다.
다시말해서 국어를 잘해야만 모든 다른 것도 잘 할 수가 있다는 것이예요.
생각해 보세요. 내 나라 말인 국어 실력이 없고서야 어떻게 다른 나라 말이나 다른 과목을 잘 할 수가 있겠어요?』
그리고는 잠시 숨을 몰아쉬었다가
『따라서 나는 여러분들에게 이처럼 중요한 국어이기에 두가지 관점에서 가르치겠습니다.
첫째 국어를 순수한 국어로서, 즉 지식적인 면에서와 둘째는 보다 폭 넓은 인간이 되기 위한 인간 교육의 면에서입니다.』
학생들은 완전히 무엇인가 공감되는 바가 있는지 숨소리 하나 없이 내 입만 계속해서 주시했다.
나는 숨가쁘게 상승되던 어조를 탁 누그러뜨리며 하던 말의 휘갑을 쳤다.
『사실 나는 아무런 경험도 지식도 없습니다.
단지 비바람속에서도 기어히 한송이 꽃을 피우는 들풀과도 같이 생명있는 열의로써
여러분과 함께 이 한 해를 보낼 것을 약속드릴 뿐입니다.』
4
전쟁에 이기려면 우선 장비가 현대화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을 제대로 운용하지 못한다면 소용없는 일이다.
같은 이치로 유능한 교사가 되려면 좋은 책들이 많아야 한다.
허지만 역시 책을 쌓아 놓고 구경만 한다면 무엇하겠는가?
다행히 학교라는 곳엔 장비 즉 각종 참고 서적을 무료로 아낌없이 공급해 주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여러 출판사의 외무사 원들이 어떻게 한 가지라도 채택 해달라는 명목으로
거기서 나오는 참고서적은 몇 종류던지 간에 가져다가 맡겨대는 것이다.
그 덕분에 나도 본의 아니게(?) 한 달이 못가서 국어과에 관한 참고서적이 무려 三○여권에 이르렸다.
나는 이 뜻하지 않은 장비현대화에 따라 그 운용법을 익히기로 했다.
우선 내가 담당하는 국어 독본과 문법 그리고 작문의 종류대로 책을 분류해 놓고 종합해서 나대로의 체계를 세우는 일이었다.
금방 깨달은 바이지만 참고서적들이란 별게 아니었다.
이책 저책을 찢고 오려서 순서만 바꾸어 묶어놓은 것이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나의 운용법이란 것도 그러한 범주에서 크게 어긋날 수는 없었다.
허지만 나는 <비바람 속에서도 기어히 한송이 꽃을 피우는 들풀과도 같이 생명있는 열의>를
학생들에게 다짐했던 순간을 상기하며 성심껏 욧점을 정리했다.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도서계를 겸하고 있는 과주임 K선생이 구내식당으로 점심을 먹으러가는 나를 불러 세웠다.
이제는 완연히 봄이 발꿈치까지 와서 아까시아가 소리라도 낼 것처럼
그 새싹을 터뜨리고 있는 속칭 이학교의 아베크길에서였다.
『성선생! 잠간 나 좀 봅시다.』
『왜 그러세요?』
나는 너무나 은밀히 건네오는 K선생의 어조가 왠지 불안스러운 느낌이 들어서 어리둥절한 채로 대답했다.
『이거 나중에 알게 되겠지만 받아 주어요. 학년초에 아이들한테 한문 펜습자책을 판건데….』
K선생은 이렇게 어물어물 나에게 금방 은행에서 빼어온 것 같은 파란 백원짜리들을 아랫 호주머니에 찔러주었다.
『아니 이게 뭔데 저를 주시는 거죠?』
사실 나는 그때까지도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하하하! 다 성선생을 생각해서 드리는 것이니까 받기나 해요.』
그러면서 K선생은 나보다 앞장서 구내식당으로 사라져 갔다.
나는 가던 발길을 계속할 용기가 없어졌다. 무언가 불안하면서도 마음속에 집히는 것이 있었다.
한글 전용을 내세우면서도 한자교육을 강화하라는 당국의 이율배반적인 지시에 따라(?)
이 학교에서는 어느 국어시간이던 五분간씩 한문 펜습자를 해오고 있었다. 그때 나는 멋도 모르고 아이들에게 열심히 쓰지 않는다고 심하게 독려를 했었다.
그 순간 몇몇 아이들의 얼굴에 번져가던 비웃음같던 미소! -∞에서 +∞까지를
백만분의 〇 · 一초에 오락가락한다고 자부하던 나의 센스가 웬일로 이제야 그 기능을 발휘해 주었다.
그 이름은 훨씬 후에야 알았지만 소위 <한 껀>으로 통하는 음성적 부교재 채택!
거기에 나는 모르게 알게 하나의 동지(?)가 돼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충격이 나를 강타한 것은 그날 퇴근때였다.
같은 과인 J선생이
『오늘은 일찍 끝났으니 차나 한 잔 합시다.』
하고 권유해온 것이다.
『네! 그릴까요?』
나는 성황당에서 주운 시루떡처럼 무언가 께름칙한 이 돈을 빨리 한푼이라도 써버리고 싶어
차값은 내가 내야지 하고 셈치며 학교앞 다방으로 발길을 돌렸다.
이윽고 J선생과 마주앉고 내가 선수를 쳐서 차를 주문하도록 권하고,
그리고 레지가 그것들을 날라 왔을 때 J선생은 나에게 단도직입적으로 이렇게 물어온 것이다.
『성선생은 얼마나 받았소?』
『네…?…아! 과주임 선생님한테 말이죠? 글쎄요. 아직 세어보지는 않았는데 한 二천원 될 것 같아요.』
나는 무슨 큰 죄라도 진 사람처럼 가슴이 쿵쿵 뛰는 것을 억누르며 당황히 대답했다.
그러자 J선생은 이미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혼잣말처럼 중얼이는 것이었다.
『흥! 五〇원짜리 책, 一五〇원에 팔아주었으면 자기도 양심이 있지!
三六〇명에 一〇〇원씩이면 三만六천원인데 신참이라고 二천원씩만 주다니…!.
二X四는 八이라, 二만八천원은 혼자 잡수시겠다는 뱃장아냐.』
나는 그날의 더 이상의 일들은 기억 할 수 없다.
다만 불쾌하고 내 자신 무언가 커다란 과오를 범했다는 자책뿐이었다.
해서 이튿날 일찌거니 출근하자마자 나는 마침 벌써 혼자 나와있는
K선생에게 닥아와 어제 받았던 돈을 몽땅 도로 그의 호주머니에 밀어 넣어주며 미소와 함께 말했다.
『며칠전에 봉급탄 것이 아직 많이 남아 있습니다.』
『아, 그래요?』
그때 등뒤에서 도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나의 옆에 앉는 H선생의 독특한 목소리가 우리들을 재빨리 갈라서게 했다.
『어마! 총각선생님이라 역시 다르셔! 이 꽃 좀 보아요!』
과연 이제야 깨닫고 보니 나의 책상 위에는 어느 온실에서 자랐는지 계절을 무시하고 핀
새빨간 장미 세송이가 하얀 수반에 꽂혀 요염한 자태로서 나의 눈길을 현란시켰다.
『성선생님! 한 턱 내세요. 요즘 학생들 사이에 선생님 인기가 어느 정도인 줄 아세요?
당장 이걸 보아도 알겠지만….』
항상 교무실에서 말이 많은 H선생은 마침 오늘의 화제거리가 생겨 다행이라는 듯
수선스럽게 부러움 반 시새움 반인 어조로 나를 다구쳤다.
그러나 나는 묵묵히 있을 뿐이었다.
산 너머 산이라더니 파란 종이의 유혹을 물리치니까 이제는 붉은 꽃의 유혹이 교대를 해왔던 것이다.
5
오전 七시 三〇분의 조조 학습으로 부터 시작하여 정규수업이 하루 평균 四시간!
합하여 날마다 五시간 이상의 수업을 강행한 탓인지 요즈음 나의 콘디션은 말이 아니게 나빠졌다.
전에는 아무리 피곤하다가도 잠만 자고 나면 온 몸이 거뜬해지고 날을듯 상쾌했는데
어쩐지 아침부터 머리가 묵직하고 허리가 뒤틀리며 뼛속까지 으스스 한기가 솟아나는 것이었다.
약국에 가서 몇번이나 봉지 약을 지어다 먹어도 그것은 만성적인 증세로서 굳어져만 갔다.
『웬일일까? 전에 군대에 있을땐 아무리 힘든 일을 해도 이렇지는 안했는데….』
나는 이 풀 수 없는 수수께끼에 시달리면서도 그러나 집에 오면
내일의 강의를 위해서 참고 서적을 뒤지고 교과서를 통독해야 했다.
정말이지 학생들이 나처럼 공부를 한다면 누구나 우등생이 될 것이라 자부할만큼
나는 열심히 학습지도안을 연구하고 구상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정확하게 아이들한테 반영되었다.
풍부한 내용을 조리있게 엮어나가는 나의 강의솜씨에 저들은 H선생의 말마따나 인기로서(?) 보답해 왔던 것이다.
사실 내가 생각해도 독본의 경우 같은 1학년을 나누어 맡고 있는 J선생과 비교하면 전혀 다르게 결과가 나타났다.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의 책은 온통 새까맣게 주석이 붙어 있었다.
그러나 J선생 담당의 반 아이들은 여전히 새 책처럼 깨끗하다.
따라서 월말고사때가 되면 그쪽에서는 책을 빌려가느라고 내가 보기에도 야단들이다.
허지만 날이 갈수록 나의 마음은 왜 이리 무거워지고 몸은 피로에 지쳐 가는 것일까?
겨우 二개월도 되지 않아서 그것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성선생님, 요즘 피로해 보이는군요?』
내가 이 학교에 부임해 오고서 첫 과협의회때 시간 배당으로 약간의 트러블이 있었던 M선생이
그 동안엔 전혀 말이 없더니 오늘은 웬일로 나에게 먼저 말을 건네오는 것이었다.
『글쎄요. 정말 이상스럽게 몸의 콘디션이 나쁜데요.』
나는 전의 일에 아직도 미안한 감이 들어서 겨우 대꾸했다.
『호호호! 기계도 너무 과격하게 쓰면 고장이 난다지 않아요? 성선생님이 지나치게 무리를 하시는 까닭일거예요.』
『선배로서의 경험담입니까?』
그제야 나도 미소로서 응수했다.
『머리가 무겁구, 허리가 뻐근하구, 뼛속까지 으스스 하시죠?』
M선생은 숫째 나의 증상을 쪽집계로 가시를 뽑아내듯이 그대로 짚어내었다.
나는 하도 어이가 없어 눈을 크게 뜨며
『M선생님은 혹시 의과대학을 나오신게 아니예요? 그런데 어떻게 국어를 가르치게 되셨습니까?』
하고 물었다.
『호호호! 흔한 말로 서당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지 않아요? 모두가 경험의 소산이죠.』
『하하하! 그럼 저의 이 병은 언제쯤 낫겠습니까?』
마치 점장이가 자신의 처지만 일러내도 가슴이 후련한 것처럼 나는 조금 가벼운 기분이 되어 다시 물었다.
『그건…?』
M선생은 나의 눈치를 잠깐 살피고 나서 계속했다.
『…제가 전에 말씀드린대로 주당 시간을 너무 많이 맡았구나 하고 후회하실 때지요.』
그때 마침 급사가 수업 시작종을 울렸다.
M선생은 얼른 일어서며 말머리를 돌렸다.
『허지만 저의 처방이 선생님에겐 틀리기를 바라겠어요.』
『아! 그건….』
하다가 나는 말을 멈추었다. 그렇다! 내가 지금 이렇게 피로한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다.
무리한 수업량이 첫째 조건인 것이 사실이다!
종일 서있다시피 하니까 우선 허리가 아프고 따라서 온 몸이 노곤해지는 것이다. 그것이 자꾸 쌓인다.
한 방울의 물이 모여 강을 이루듯이 하루하루 몸이 그 중압에 짓눌린다.
허지만 나는 정말아지 M선생의 처방이 틀려야만 한다.
수업이 많다는 것을 후회하다니…!
나는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교사가 된 것이 아닌가?
그런데 이제 겨우 二개월이 못 돼서 그 뜻을 변질시키다니…!
정말로 후회되기 전에 어서 그 후회를 후회하자! 해서 새로운 다짐과 결의로써 그날의 일과를 마치고 하숙집에 돌아왔을 때,
나는 나의 방문 앞에 놓인 뜻밖의 학생 구두 한 켤레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맨 처음 이 학교에 발을 디뎠을 때에 교장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던 점을 생각하여
나는 일체 학생과 개인적인 교류는 회피해왔고 따라서 누구에게도 나의 하숙집을 가르쳐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누구일까?
『선생님! 아까부터 여학생이 찾아와서 기다리고 있어요.』
수다스런 하숙집 아줌마가 마당에 들어서는 나에게 속삭였다.
『네에!』
하고 나는 아무렇지않게 대꾸하고는 방문을 열었다.
『어머! 선생님, 이제 오세요?』
그 순간 활짝 웃음을 지으며 일어서는 것은 내가 부담임을 맡고 있는 一학년 六반의 四七번 학생 홍지향이었다.
『웬일이냐? 네가 여길 다 오구…?』
내가 의아해 하자
『아이 선생님두…! 제가 찾아오면 못쓰나요?』
옆으로 돌아서는 그녀의 목덜미가 빨갛게 물들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지향은 홱 책가방을 집어들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문밖으로 뛰어나가 버리는 것이었다.
나는 어이가 없어 멍하니 그 뒤를 바라볼 뿐이었다.
6
등 나 무
홍 지 향
운동장 귀퉁이에 등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그러나 교실에서 가자면 정구장을 거쳐 스탠드를 지나고도 삼백미터는 걸어야 하므로
십분간의 휴식시간엔 어느 학생 도와주지 않았다.
아니 사십분의 점심시간에도 모두들 교사 뒷동산 숲속으로 달려갈 뿐이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나혼자만이 이곳에 오는 습관을 가졌던 것이다.
시골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갑자기 인구로는 세계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든다는
서울생활을 하게 되자 얼른 적응을 못하는 탓인가 보다.
오늘도 四교시를 마치자 나의 발길은 어느듯 등나무를 찾아 움직이고 있었다.
여러개의 줄기가 새끼꼬인 등나무는 더욱 푸르고 싱싱한 잎사귀를 흔들어 나를 반겨준다.
굳은 이 땅속에서 엽록소의 원료공급을 위해 분주하고 있을 뿌리와,
이를 잎사귀로 운반하는 줄기의 작업에 행여 방해나 되지 않을까 하여,
나는 조용히 이미 설치된 ㅠ자 모양의 돌의자에 걸터앉았다.
쇠기둥의 엉성한 뼈대를 의지하여 감아올라간 등나무는 몇년이나 됐는지 끝만 빼놓고
두장씩 짝을 이루는 잎사귀가 모자이크처럼 푸른 하늘을 덮었다.
그리고 어느새 보라색의 꽃등까지 켜놓고 손님이 될 벌들을 부른다.
작은 꽃송이가 송알송알 모여서 하나의 꽃을 이룬 등나무는 혼자이면서 혼자는 못사는가 보다.
잎이나 꽃이나 모두서로 정답게 모여 있으니 말이다.
여럿속에 끼이기를 지독히 혐오하면서 결코 고독을 참지 못하는 나의 성미와 비슷하다고 할까?
이처럼 점심시간이면 남몰래 무슨 음모라도 꾸미듯 달려왔다가도 다음 시간이면 아주 익숙하게
교실속의 한 학생이 되어있는 나이니 말이다.
등나무는 나무라기보다 덩굴손이다.
프라타나스나 아까시아처럼 혼자 서 있지 못하고 반드시 의지가 되는 기둥을 세워주어야 한다.
그래서 누군가는 독립심이 없는 상징으로 등나무를 꼽았다.
허지만 나는 그 점이 오히려 나의 마음에 든다.
잘난체 혼자 건방지게 굴기보다는 차라리 흉허물없이 서로 터놓고 어울리는 것이 좋지 않을까?
어느날 식전에 나는 아주 일찌기 학교에 나온 적이 있었다.
시험이 있다는 핑계였지만 사실은 간밤의 세차게 몰아치던 비바람에 혹시 등나무에 상처나 없을까 싶어서였다.
관상대의 예보를 무시한 태풍과의 싸움에서 그러나 그는 용케도 이겨 있었다.
아니 오히려 더욱 신선한 초록으로 화장을 하고서 나를 기다렸던 것처럼 맞아주었다.
잎으로 꽃등이 꺼지지 않게 감싼 채 조금도 자세를 흩으리지 않고 있는 것이다.
저만큼 떨어진 곳에 있는 덩치큰 버드나무는 여러개의 가지를 부러뜨리고 있었건만….
남보기에는 여린듯 하면서 속으로 끈질긴 등나무의 모습에서 나는 새로운 마음 자세를 가다듬었다.
가만히 우럴으노라면 어느새 나의 귀는 새로운 문을 열고, 나의 눈은 새로운 빛을 받아 현실의 저쪽으로 빠져들어 간다.
누군가는 사람이 모두 잠든 깊은 밤에는 하늘의 별과 땅과 바람이 서로 속삭이며 숨을 쉰다고 했지만
난 등나무와 소리없는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그의 이야기는 정다운 친구의 그것처럼 언제나 나로 하여금 조용한 미소를 짓게 한다.
그는 야단스럽게 수선을 떨거나 실속없는 허세를 부리지 않는다.
가능성은 희박하나 아련히 지평선 하늘가에 떠오르는 미래의 나 자신을 보는 것 같은 뿌듯한 여운을 안겨준다고나 할까?
벌써 수업시간 오분전을 알리는 예비벨이 울린다.
이제 나는 등나무와 잠시 작별을 해야 한다.
그러나 싱그러운 꽃향기와 쇠기둥을 감는 강한 의지를 선물받은 나의 기분은 흐뭇할 뿐이다.
※ 추기=선생님! 이 글에 대한 비평을 해주시겠어요?
어저께 선생님 댁을 방문한 것은 이 때문이었어요. H올림
무심코 설합을 열었다가 웬 편지 봉투가 있기에 찢어보니
위와 같은 내용의 지향의 수필이 깨알같은 잔 글씨로 정성스레 쓰여져 있는 것이었다.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렇게 건강한 글을 쓰는 녀석이 어제는 왜 그런 식으로 행동을 했을까?』
一〇년 차이 정도의 비슷한 세대임에도 불구하고 나같은 풋나기 교사로서는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알 수 없는 일은 그뿐이 아니었다.
오늘따라 어느 반에 들어가도 아이들 이 갑자기 새침하여져서
『흠! 흠!』하고 헛기침만 매살스럽게 하며 전혀 수업에 반응이 없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무심히 넘겼으나 끝내 다른반도 마찬가지일 때 나는 드디어 의문을 느끼게 되었다.
해서 수업이 모두 끝난 방과후에 각 반 반장들을 불렀다.
헌데 이녀석들도 하나같이 입을 앙 다물고 마치 처음 보는 사람이나 대하듯 하는 것이었다.
나는 오늘도 새로운 것으로 바뀐 장미를 멀거니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너희들 나한테 무슨 오해가 있는게로구나?』
허지만 그것은 나로서도 모르는 오해였다.
『어저께 지향이가 혼자 선생님댁에 찾아갔대죠?』
『흥! 제까짓게 혼자 잘난체 하구….』
『얘! 혼자 좋아하게 놔두자.』
그제야 세 반의 반장들은 총알처럼 마구 쏘아댔다.
아하! 그래서 그랬었구나! 나는 웃음이 터져나왔다.
『하하하! 임마! 겨우 그일로 너희들이 수업시간에 그런거야?』
『허지만 선생님, 조심하세요! 여기는 여학교예요!』
평소에 제일 숫기가 좋던 一반 반장이 공격을 해왔다.
순간 나는 엉뚱하게 개미의 함정을 생각했다.
뜨거운 여름 날 먹이를 찾은 개미가 땀을 흘리며 물고 가다가 아차 순간에 빠져버리는 함정!
7
중간고사가 끝난 학교는 교무실의 선생님들이나 교실의 학생들이나 모두가 맥이 풀려버렸다.
아니 학생들은 그래도 교외지도 단속반에게 걸리는 한이 있더라도
미성년자 관람불가의 영화라도 볼 꿍궁이속들로 술렁거렸으나,
선생님들에게는 따분한 채점의 일만이 남아 있는 것이다.
과히 신통치도 않은 성적을 몇 백장 꼬누워 나가자면 그야말로 권태만이 쌓인다.
허지만 나는 겨우 시험 출제만 해놓고 아기를 낳게 되어 휴가에 들어간 담임인 G선생의 몫까지 합쳐
무려 一천 四백여장의 답안지와 씨름하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일일이 검토하며 정확하게 점수를 매겨 나갔다.
해서 내가 부담임 반인 一의 六반 전과목 종합성적전표까지 낸 것은 거의 일주일이나 지나서였다.
그날은 토요일이었고 방과후였으며 웬만한 선생님들은 모두 퇴근한 뒤였다.
담임도 아닌 내 옆의 H선생이 오늘 따라 퇴근도 않고 있더니,
이윽고 내가 종합성적표의 세로 가로 누계까지 맞추어놓고 나자
『저…성선생님, 나하고 얘기 좀 합시다.』
내가 고개를 돌리자 그녀는 나의 얼굴에서 무엇이라도 찾아내려는지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연다.
『성선생님, 조심하셔야겠더군요.』
『네? 조심하라뇨?』
순간 나는 며칠전 一반 반장이 하던 말을 퍼뜩 떠올리며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호호호! 뭐 내가 성선생을 비난해서 하는 말은 아니니까 고깝게 생각하실건 없구….
얘기를 들으니까 선생님 부담임 반의 모 학생과 어떤 관계라면서요?』
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도대체 누가 뭐라고 했기에 비록 남의 말이라면 도시락 지참하고 뛰어다니는 H선생이지만
이런 터무니없는 소문을 들이대는 것일까?
『그게 무슨 소립니까?』
내가 완연히 불쾌한 빛을 띠우니까 H선생은 전혀 나한테 감정을 나타낼 필요는 없는 일이라는 투로 지껄였다.
『어제 일요일에 선생님 반의 담임인 G선생 산후문안을 가니까 그러던데요.
성선생님이 마치 담임인 것처럼 날뛰고 다니더니 결국은 그렇더라구….』
『네에?』
나는 무엇에 한 대 꽝 뒷통수를 얻어 맞은 기분이었다.
『아이구! 몸이 불편해서…. 종례 좀 부탁해요.』
하며 항상 밸룩 내민 배를 뒤뚱거리며 종례는 물론
모든 학급 일을 맡겨오던 담임인 G선생이 설마 그런 말을 하다니….
그녀가 지각했을 때 조회를 해주고 교실청소와 환경미화와 무엇이든 시키는대로 발벗고 나서서 도와준 것이
이런 보답으로 떨어질 줄이야 미쳐 나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만큼 나의 마음은 착잡하게 헝클어져 갔다. 차라리 눈앞이 캄캄해 왔다.
하나의 성의가 무참하게 짓밟혀 버렸을 때 오는 허탈감!
나는 그때 너무나 세상의 때가 덜 묻어 있었으므로 그만큼 쉽사리 얼룩이 졌는지도 몰랐다.
내가 사뭇 얼굴이 붉어지며 어찌할 바를 몰라하자 H선생은 <참 안됐우>하는
측은한 얼굴로──아니 타인의 비참이 오히려 통쾌하게만 느껴지는 인간 공통심리의 잔인성을 감추지 못하며 위로를 해왔다.
『성선생! 이런 정도의 일은 교단에 선 사람이면 누구나 한번은 겪게 되는 일이니까
하나의 시금석으로 알고 너무 기분 나빠 하지 말아요. 그러면 내가 오히려 민망하지 않아요.』
그제야 나는 입술을 깨물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러믄요. 저는 워낙 아직 경험도 지식도 없는 병아리가 아닙니까?』
그리고 벌떡 일어서서 가방을 꾸려들고 교무실을 나왔다.
아직 해가 서산에 기울려면 멀었건만 그러나 나에게는 이 한낮이 오히려 어두운 밤처럼 느껴졌다.
이윽고 내가 운동장 동편 구석에 그 푸르고 싱싱한 잎으로 그늘을 만들고 있는 ──얼마 전에
지향이가 수필에 썼던──등나무 덩굴에 눈이 간 것은 현관앞 계단을 내려서 운동장으로 접어들었던 순간이었다.
그런데 그 등나무 아래에는 아주 낯익은 교복이 등을 돌리고 서있는 것이었다. 바로 지향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나의 발걸음은 나도 모르게 그리로 옮겨지고 있었다.
『선생님! 한번쯤은 와주실 줄 알았어요.』
이윽고 내가 다가서자 이미 나를 눈치채고 있었던듯 지향이가 돌아서며 고개를 숙인 채 혼자말처럼 중얼렸다.
『글쎄, 너의 수필을 읽은 후로 한번 구경오고 싶었지만 영 짬이 안나더구나.』
나는 억지로 명랑한 투로 말했다.
허나 지향은 여전히 침울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선생님! 죄송해요. 저는 다만 선생님한테 무엇인지 배우고 싶어서…
아니 무언가 함께 느끼고 싶었을 뿐이예요. 그런데 그걸 가지구 아이들이….』
나는 그녀가 더 말하지 않아도 그녀의 과거, 현재, 미래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은 비난할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흐르면 모든 것은 스스로 해결될 것이 아닌가?
『네가 쓴 수필 <등나무>처럼 살면 되는거야.』
나는 그 한마디를 전해주고 나서 다시 이 어두운 한낮 속을 걸이 나왔다.
8
혜성같은 신인 스타의 탄생!
수천대 一경쟁의 관문을 뚫고 단 한 사람 픽엎된 스타!
세상 사람들은 이 새로운 스타에게 호기심을 갖게 된다.
신인 스타는 그답게 신선한 연기자로서 관객을 매혹한다.
허지만 세월이 흘러 그의 인기가 절정에 이르면 여기에도 저기에도 겹치기 출연을 감행한다.
그러면 변덕쟁이 관객들은 언젠가는 식상을 일으키고 외면을 하게 되며 새로운 스타를 요구한다.
이것은 겹치기 출연을 하는 스타의 잘못이냐? 아니면 자꾸만 새로운 것을 바라 는 관객의 탓이냐?
언젠가부터 나는 이런 엉뚱한 생각을 머리속에 굴리고 있었다.
아니 잘 생각해 보면 그것은 환한 대낮이 아주 어둡게 느껴졌던 그날 이후부터 였다.
나는 내 자신이 하나의 스타라는 비유에 빠져버린 것이다.
사실 나는 교사임용고시에서 수천명과의 경쟁을 치뤘다.
그뿐인가? 여러 학생들 앞에서 신인 스타처럼 열의를 가지고 공부를 가르쳤다.
저들 역시 이 신선한 교사 초년생에게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새 우리들은 권태에 빠져버렸을까?
허나 한번 빗나간 화살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과녁과의 틈이 벌어질 따름이었다.
이 시간만큼은 수업을 잘 해보자고 다짐하고 들어가건만,
그러나 내 편에서 먼저 한 학생이 조금만 수업태도가 나빠도 울화가 치밀었다.
어제의 그 유쾌하던 기분은 어디로 갔는가? 아이들도 마찬가지일 수 밖에 없는 일인 듯 했다.
하품을 하며 조는 학생, 기껏 쳐다본다는 것은 두 눈이 마치 물 간 동태처럼 희미하다.
그나 그뿐인가?
조금만 틈이 있으면 마치 참새떼처럼 저들끼리 조잘거린다.
기가 찬 노릇이었다.
전에는 여전 웃음으로 대해도 찍소리 하나 없던 아이들이 마구 회초리로 손바닥을 후려쳐도 막무가내다.
마치 떠드는 일과 맞는 일은 별개문제라는 투다.
나는 차츰 수업에 흥미를 잃어갈 수밖에 없었다.
아니 그보다 어쩔 수 없이 시간을 때운다는 표현이 옳을지 몰랐다. 전에처럼 학습지도안 연구도 열심으로 하지 않았다.
이제 서너달을 하고 보니 그까짓 교재연구 안해도 말이 막혀 수업 못할 일은 아니었다.
허나 나와 아이들과의 사이가 악화되면 될수록 나는 왜 이리 괴로워지는가?
그리고 어제의 즐거웠던 일──아니 이제 생각하니까 그 순간엔 그런 것조차 미쳐 느끼지 못했다.
허지만 여하튼 다른 동료들의 부러움 반 질투 반 섞인 눈초리까지 받아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지금은 다른 동료들이 눈치챌까 보아 겉으론 표현하지 않지만 이다지도 괴로움 속에 보내고 있다.
『민족과 인류를 저 <역사의 함정>으로 부터 구해야 한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역사가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구렁 곧 국토는 양단된 채로 있고
세계는 양대 진영으로 갈리어 공포의 긴장속에 있는 오늘날의 역사적 상황을 은유한 말이 되겠읍니다.』
이렇게 노산 이 은상씨의 수필 <피어린 육백리>를 가르치고 있으나
나의 말은 무심히 입 속에서 튀어 나와 허공을 맴도는 느낌이었다.
나와 강의가 저 밑바닥에서부터 일치되어 맨 첫 시간에 학생들에게 선언했던 대로
<비바람 속에서도 기어이 한송이의 꽃을 피우는 들풀과도 같이 생명있는 열의>로서 부딪쳐야 할텐데
이건 숫째 속이 빈 강정만도 못한 공염불에 불과했던 것이다.
나의 오늘은 이처럼 처참하게 이즈러진 것이었다. 그러니 내일은 아예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내일은 커녕 어제마저 치욕으로서 물들여질 뿐이었다.
오늘의 과거가 어제가 되고, 오늘의 미래가 내일인데,
어제와 오늘과 내일은 항상 어깨동무를 하고 다니지 않는가?
결국 나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없는 나날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자꾸만 자포자기로 치닫고 있었다.
그러나 꺼지는 불은 깜박하고 밝아졌다가 스러지고 참새도 죽을 때는 짹 한다고 했다.
언제까지 내가 이 모양으로 지낼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나는 차례로 각 교실에 들어갈 적마다 적당한 트집을 잡아 여학생으로서는 좀 과격한
一〇분간 의자를 들고 서 있는 단체 기압을 준 후 최후의 힘을 모아 설득을 했다.
『여러분과 내가 이 자리에서 만난 것이 벌써 四개월째 접어 들었습니다.
그리고 처음 만나던 그때 그 순간은 나도 여러분도 즐거웠고 또 의욕에 불탔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나는 여러분에게 이런 벌을 주었고 여러분은 또 그 벌을 받았어요.』
나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도저히 두서가 잡히지 않았던 것이다.
이윽고 마음을 가다듬으며 나는 비장하게 외쳤다.
『…내나 여러분이나 이렇게 만나게 된 것이 불교에서 말하듯 인연이라 한다면
우리는 그 인연을 이다지도 비참하게 짓밟아야 하겠습니까?
사실 나는 처음에도 얘기 했지만 여러분을 가르칠만큼 경험도 지식도 풍부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비바람속에서도 기어이 한송이 꽃을 피우는 들풀과도 같이 생명있는 열의>로써 여러분을 대하겠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나에게 다시 한번 그렇게 할 수 있는 기회를 줄 수 없겠습니까?
9
교무실로 돌아온 나는 이제야말로 저들도 무슨 반성이 있겠지 하고 기대했다.
나는 학생들에게 방과후까지 전원 반성문을 써오라고 반장들을 시켜 지시했던 것이다.
아울러 나 역시 최후의 방어선이라 생각하며 학습지도안을 펼쳐놓고 그동안 밀렸던 부분을 메꾸었다.
동료들의 자리가 하나 둘 비어가서 대여섯분으로 뜸하게 남아 있었을 때,
드디어 각 반 반장들이 반성문을 모아 가지고 왔다.
나는 오늘따라 너무 신경을 쓴 탓인지 갑자기 열기가 온 몸을 휩싸와서 곧 가방을 참겨 하숙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불을 편 채 편안한 자세로 누워서 저들의 반성문을 읽기 시작했다.
<지난 일을 반성하라니 참으로 기막히다. 무엇을 반성하란 말인가?
지난 일이란 떠들고, 맞고, 울고, 웃고, 그런 일 밖에 또 뭐가 있겠는가?>
뭐라구? 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반성할 것이 없다니…? 어느 놈인가? 그러나 앞뒷장 모두 보아야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당장 실망을 넘어서 분개되는 것이 솔직한 나의 심정이었지만 그러나 나는 꾸욱 참고 다음 장을 넘겼다.
<처음 고등학교에 올라와서 국어 시간을 맞이했던 나! 원래 국어에는 취미가 없어서 조금 밖에는 기대를 걸지 않았다.
그런데 의외로 국어 선생님은 열의있고 재미있어 보였다.
그런데 요즘은 국어라는 과목이 점점 싫어지고 국어 선생님까지도…. 애들은 점점 떠들고,
선생님은 아이들을 가르치기가 힘들고, 이래서 국어 시간은 땡땡이! 나는 역시 지금도 국어 시간이 싫다.>
<처음에는 재미있던 국어 시간이 왠지 떠들기만 하고 엉망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나도 모를 일이다. 선생님께 꾸중도 많이 들었건만 소용없는 일이다.>
<학기초에는 희망과 기대에 가득찬 나날을 보낼 수 있었다.
특히 국어 선생님이 새로 취임하신 후부터는 더욱 희망찬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얼마되지 못한 꿈이었다. 국어 시간은 점점 혼란해지고 또 싫증을 느끼게 되었다.
학생들의 삐뚜러지는 학습 분위기를 잘 조정해 주지 못하는 선생님들이 점점 우습게만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옆 친구들과 잡담을 하게 된다.>
<나는 괜히 선생님께 대해 앙숙 원수같이 느껴질 때가 있다.
나의 자존심 때문일까? 선생님께서 이유없이 미워하는 것같이만 느껴진다.
정말 그래선지는 몰라도 그 시간이 점점 지겹기만 하다.>
<선생님의 요구로 안 쓸 수가 없어서 무거운 마음으로 쓴다. 지금 와서 생각한들 무엇하리!
그저 어쩔 수 없는 운명으로 돌려버릴 수밖에….>
<막상 쓸려고 하니 무엇부터 써야 할지? 자꾸 이상한 방향(?)으로 써지게 된다.
즉 인간의 감정에 대해서…. 그러나 참아야겠다. 생각나는 것은 없다.
그런데 이런 반성문을 쓰라는 것은 작문 공부를 시키려는 것인지 학생들의 마음을 알고 싶어 그러는지….>
<학생들이 고분고분하지 않는다고 선생님도 우리를 짜증으로 대할 수 있습니까?>
아니 이제는 별 희한한 질문까지 다 하는군! 나는 끝내 저들의 반성문을 다 읽을 수가 없었다.
거꾸로 치밀어 오르는 분통을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그래 그처럼 비장했던 나의 최후의 설득이 고작 이러한 반성문이 되어 돌아오다니….
그래도 나는 저들이 빈말이나마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어올 줄 알았다.
그런데 이건 빌기는 커녕 오히려 선생님을 우습게 아는 처사가 아닌가?
그렇잖고서야 감히 이따위 넋두리들을 반성문이랍시고 적어올 수가 없을 것이다.
아무리 진정하려 해도 나는 참을 길이 없었다.
언젠가 담임인 G선생한테 받았던 수모보다도 더욱 나를 격분시키는 것이었다.
나는 한동안 이불을 뒤집어 쓰고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지난 넉달 동안 몸과 마음을 바쳐 학생들을 가르쳐 온 것이 겨우 이 꼴이 되다니….
사랑하는 사람한테 배반당한들 이보다 더 비통할까?
나의 마음은 순간 미움으로 훨훨 불타올랐다.
좋다! 너희들이 그렇다면 나에게도 생각이 있다. 철저하게, 아주 철저하게 너희들과 대결해 주마!
이튿날 나는 수업시간에 들어가자 마자 눈에 불똥을 튀기며 아이들을 꼼짝 못하게 다루었다.
인간대 인간으로서는 통하지 않는 너희들이다. 좋게 대해 주면 바보 취급을 한다.
아닌게 아니라 군대에서도 못살게 구는 고참일수록 쫄병들이 끽소리 하지 못하고 말을 잘 들어 주었다.
나는 어제와는 전혀 一八〇도 다른 어조로 아이들에게 선고했다.
『나는 너희들이 무슨 생각과 어떤 타성에 젖어있는지를 알았다.
따라서 나는 오늘부터 나의 인생관을 바꾸기로 했다.
잘 들어두도록 해! 앞으로 내 말을 잘 듣고 공부를 열심히 하는 사람에게는 그만큼 대접해 주겠지만
그 대신 못되게 구는 사람에게는 용서하지 않겠다!
이제부터 나와 너희들은 전쟁을 하는거야. 교육 전쟁을…. 알겠어? 이것이 나의 선전포고란 말이야!』
10
그러나 학생들과 나의 전쟁은 시작도 하기전에 끝나버리고 말았다.
다음 하숙집에 돌아온 나는 기어히 몸살인지 감기인지 아니면 그 둘이 겹쳐졌는지 싶은 고열에 쓰러지고 만 것이었다.
마치 넘치고 넘친 저수지 뚝이 무너지듯 나의 몸은 걷잡을 수 없는 증세를 나타냈던 것이다.
나는 당장 헛소리를 치며 하숙방 한 구석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앓아누웠다.
하숙집 아줌마가 약을 사다 주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결국 하룻밤을 꼬박 뜬 눈으로 새우다시피 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에서야 겨우 조금 머주했다.
허나 머리가 핑핑 돌고 다리가 허둥거려서 도저히 출근을 할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몸이 아파 결근하겠다는 전화를 하숙집 아줌마에게 부탁하여
교감 선생님께 전갈시키고서 나는 계속 자리보존을 했다.
괘씸한 놈들! 끝내는 나를 이 지경으로 만들다니…!
나는 하염없이 천정을 바라보며 아이들을 원망하고 있었다.
정말이지 그 녀석들이 이렇게 나의 속을 썩여주지 않았던들 나는 병이 날 까닭이 없었다.
비록 건강한 몸은 아니더라도 얼마나 강단이 있은 나였던가?
생각할수록 아이들이 미워졌다.
허지만 만날 시간에서 단 몇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저들의 모습이 하나하나 떠오름은 웬일일까?
까불던 놈은 까불어서, 말 잘듣던 놈은 잘 들어서,
그리고 골치 썩이던 놈은 그러해서 모두가 생각나는 것이었다.
나는 지난 하룻밤과 이 아침의 몇 시간이 까마득한 세월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내 몸의 열이 점점 내림에 따라 무언가 나를 감싸고 있던 껍질들이 한 꺼풀씩 벗겨지는 것 같았다.
그것은 우리가 들판에 나섰을 때 한 눈으로는 전후좌우를 다 볼 수 없지만
그러나 들판은 그렇게 넓게 펼쳐져있는 것처럼 우리의 인생도 굉장히 폭 넓은 것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참으로 오랫만에 내 자신을 돌아 볼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저 까마득히 망각속에 파묻혀있는 유년시절부터 오늘의 이 순간까지 열심히 지나온 길들을 더듬는 것이었다.
오솔길, 고갯길, 들길, 산길, 비탈길….
그것은 나에게 참으로 가슴 짜릿한 기쁨과 연민을 동시에 안겨다 주었다.
이날 저녁때 뜻밖에 M선생이 혼자서 나의 병문안을 와주었다.
학교에서는 몰랐는데 막상 잡안에서 보니 M선생의 모습은 생각보다 훨씬 나이가 들어 보였다.
아니 그만큼 그녀 역시 인생의 의미를 깨닫고 사는 때문인지 몰랐다.
그녀는 스스럼없이 나의 방에 들어와 앉았다.
이미 나 역시 옛날의 미안했던 것은 잊은지 오래였다.
『성선생님께는 너무 빨리 오늘이 온것 같군요.』
M선생은 의미있는 말로서 나를 위로해왔다.
『네! 허지만 매도 먼저 맞는 것이 좋다고 하지 않았읍니까?』
『호호호! 아무튼 걱정이 되었어요. 그런데 상상보다 좀은 괜찮으신데요.』
『아니, 병문안 오셔서 괜찮다니 그 무슨 말씀입니까? 그럼 제가 아주 죽어야 했나요? 하하하!』
나는 참으로 오랫만에 가벼운 기분으로 웃으며 말했다.
『저나 성선생님이나 같은 길을 걷고 있읍니다만 아이들과 우리들의 관계란 그저 그런 것 같더군요.
미워하면서도 미워할 수 없는… 뭐랄까요?』
이윽고 M선생이 국어 선생답지않게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해 쩔쩔 매면서 나의 원조를 바라는 눈치였다.
나는 말없이 내가 읽었던 아이들의 반성문을 건네주는 것으로 그녀의 요청에 대신했다.
얼마후 M선생이 그것들을 다 읽었을 때 나는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역시 아이들은 순진하지요? 걔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아요. 싫으면 싫다, 좋으면 좋다 하고 말입니다.』
『호호호! 허지만 그만큼 눈치도 없는 거겠지요. 젊은 총각선생님을 이토록 아프 게 해드렸으니까….』
그리고 M선생은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하! 사실은 저도 그녀석들 하고 전쟁을 하려고 했었답니다.』
『전쟁이라뇨?』
M선생이 재미있다는듯이 물어왔다.
『전쟁은 전쟁이지만 하얀 전쟁이었지요. 싸우고 싸워봐야 서로가 깨끗한 그런 전쟁 ….』
나는 뜻하지 않게 <하얀 전쟁>이란 말을 불쑥 해놓고 나서 참으로 흐뭇한 기분이 되었다.
<하얀 전쟁>!
그것은 얼마나 많은 함축성을 지니고 저들과 나 사이를 연결시켜주는 말인가?
<비바람속에서도 기어히 한송이 꽃을 피우는 들풀과도 같이 생명있는 열의>를 가지고
내가 교단에 서는 한 학생들과는 언제나 「하얀전쟁」이 있을 뿐이겠기였다.
*등나무 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