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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6:25-34(9) “밤새워 고민할 일” 2019. 9. 1
어떤 회사에서 10년 동안 근속하면서 회사를 위하여 너무나 많은 수고와 열정을 아끼지 않았던 모범 사원 한 명을 뽑았습니다. 그리고 회사는 이 직원에게 2개월간 월급을 고스란히 주면서 휴가까지 더 해 주는 <유급 휴가>를 포상합니다. 회사 다니는 분들의 한결같은 소망이 바로 월급 다 받으면서 걱정 없이 쉴 수 있는 유급휴가 아닙니까? 이 분이 바로 이런 기분 좋은 유급휴가를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다음 날 2달 유급 포상휴가를 받은 이 직원은 회사로 다시 출근합니다. 그리고 회사에다가 “자신에게 돌아 온 유급휴가를 포기하고 다시 출근 하겠다”는 말을 합니다. 상사가 “왜 휴가를 가지 않고 반납하는가?”하고 물었습니다. 그 사원은 두 가지 이유 때문에 휴가를 포기하고 출근한다고 대답합니다.
1)“내가 없는 동안 회사가 잘 안돌아 가면 어떻게 하나?”하는 염려 때문이고,
2)“내가 없는 동안에도 회사가 정말 제대로 잘 돌아가면 나는 어떻게 하나?”하는 염려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 사람의 염려와 걱정은 우산장사와 소금장사 두 아들을 둔 어머니와 같은 심정입니다. 비가 오면 소금장사하는 아들이 걱정되고, 날이 좋으면 우산장사하는 아들이 걱정되는 어머니는 일 년 내내 걱정을 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화 같지만, 사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현대인들은 불안해하면서 각종 염려로 목이 말라가는 사람들임을 말해주는 이야기입니다.
지난 주간 감사헌금제목에서 박집사님께서 하윤이가 설사한 내용을 적은 것을 여러분들은 다 아실 것입니다. 제가 한 주간 하윤이를 위하여 기도를 하면서 “박집사님이 하윤이가 아픈 것에 대해서 적지 않은 자책감을 가지고 있구나”라고 느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자책감을 가질 필요도 없다는 말입니다.
이와 비슷한 상황이 20여년이 훌쩍 넘은 옛날에도 저희 가정에 있었습니다. 하루는 요섭이가 다니는 유치원으로부터 요섭이가 시력에 문제가 있을 것 같다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설마하고 집에서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시력 점검표를 사용하여 제가 아이 시력을 점검하니, 가슴에 망치로 얻어맞는 충격을 느꼈습니다. 제 눈에는 노란색으로 채워진 반원 모양의 형상이 요섭이의 눈에는 사각형으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몇 가지 간략한 테스트를 해 보니, 아이 시력에 큰 문제가 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습니다.
그 다음 날 바로 부산대학 어린이병원 안과로 달려가서 정밀 검사를 했습니다. 결과는 고도 복합 난시라는 말입니다. 담당 의사교수님은 교정 안경을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정상적인 시력을 잡기가 어렵다는 말을 합니다. 청천벽락과 같은 말을 듣고 가슴이 다 무너졌습니다.
집에 돌아와서 집사람이 제 보고 던진 말이 아직도 제가 다 기억합니다. “여보 미안해요. 요섭이 눈 나쁜 것은 내 나쁜 시력을 물려받은 것 같아서 미안해요”집사람이 안경을 쓰다 보니까, 자신의 나쁜 시력이 아이에게 전해진 것 같아서 제게 던진 말입니다. 요섭이가 태어날 때부터 시력이 좋지 않은 것이 집사람 잘못이 아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가 시력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였다고 하니, 엄마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잘못인 양 자책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후 꾸준한 검사와 시력 교정을 통해서 정상적인 모습은 아니지만, 일상 생활하는데 부족함이 없는 단계로 발전했습니다. 여러분도 다 아시다시피, 안경 쓰고 백마부대에서 군 생활 다 마치고 만기 전역했습니다.
그 당시 의사선생님이 조선시대 이런 시력을 가지고 태어났다면 100% 눈 뜬 당달봉사가 되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당시 저와 제 집사람이 요섭이의 시력 회복을 위하여, 정말로 하나님에게 목숨 걸고 기도하듯이 기도한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드리고 싶은 말은 자녀를 위하여 기도를 해야 하는 것이 부모로서 당연한 모습이지만, 자녀가 겪는 아픔과 어려움 때문에 너무 과도하게 자책감을 가지면서 슬픔과 불안에 빠지지 말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거리를 나가서 지나치는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살펴보세요.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을 자세히 쳐다보면, 다들 수심과 근심이 가득 찬 모습을 지니고 있습니다. 아무런 걱정 없이 얼굴에 화한 미소를 띄고 있는 사람은 발견하기가 힘이 듭니다. 오늘 사람들은 겉은 멀쩡한데, 모두 속마음에는 별의 별 근심과 걱정들로 가득 쌓여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성도들에게도 예외는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라고 해서, 걱정과 근심이 없고, 아무런 염려가 발생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을 진실하게 믿고, 올바르게 신앙생활을 하려고 다짐하고 노력하는 성도에게, 도리어 더 많은 근심과 걱정이 밀려오는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올바로 섬기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불신앙>에서 오는 경우도 있지만, 어떤 경우에는 과도한 걱정 근심에 빠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걱정 근심 때문에 피곤한 삶을 살아가고, 염려함으로 식욕을 잃어버리고, 눈물로 밤을 지새우는 것은 현명한 모습이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주님은 “근심과 걱정을 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서 위로가 되는 교훈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1. 걱정은 쓸데 없는 일입니다.
27절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이 말씀을 두고 대부분의 성도님들은 걱정한다고 키를 한자나 더 할 수 없다는 뜻으로 해석을 합니다. 불가능한 것을 두고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는 이해하지만, 실제 원문의 뜻과는 조금 다른 내용입니다.
Who of you by worrying can add a single hour to his life? (당신의 걱정으로 그의 인생에 한 시간을 더할 수 있습니까?). 사람이 아무리 염려하고 걱정한다고 해도 자신의 키를 한자나 늘리지 못하고, 자신의 생명에 한 시간을 더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25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25절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예수님은 여기서 먹고 사는 것으로 인해서 고민하고 갈등하며 염려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정말로 본질적으로 염려해야 하는 것은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과 함께하고 있는 것인가를 연려해야 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나에게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는 것인가를 염려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멈추지 않고 계속 이어진다면, 먹고 입고 사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로 해결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해답을 보여 주는 말씀이 26절입니다. 26절을 보십시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창공을 날아다니는 새를 보고, 들판에 지천으로 피어나 있는 백합화를 보라. 다 스스로 나서 자라고 날라 다니는 것처럼 보이지만, 다 하나님이 입하시고 먹이시지 않느냐? 그런데 너희는 왜 걱정을 하느냐? 너희는 들판의 백합화보다 소중한 사람이고, 창공을 날라 다니는 새들보다 귀한 존재인데, 걱정과 염려하지 말라고 위로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근심하고 염려할 일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아무리 머리를 질끈 동여매고 근심하고 염려도 해 본다고 하더라도, 별로 효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근심과 염려의 끈을 놓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염려하지 말고, 걱정 근심 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 주시고, 하나님께서 먹이시고 입히시는데 무엇 염려하느냐? 너희는 오로지 하나님을 믿고 그 믿음의 길로 달려 나가라고만 말씀합니다. 걱정 근심, 염려를 묻어 버리고 믿음의 길로 달려 나가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축원드립니다.
왜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을 믿고 담대해져야 할까요? 걱정과 염려가 사람으로 하여금 골수가 병이 들 정도로 무서운 결과를 안겨주기 때문입니다. 정상적이고 이성적 판단을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염려하고 걱정하는 것이 정상적인 사람을 괴물로 만들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명박대통령이 당선된 뒤에 대한민국이 촛불로 뒤덮힌 적이 있었습니다. 어떤 문제로 발생한 것인가요? 미국산 소고기 수입문제였습니다. 그 당시까지 미국산 소고기가 잘 수입되었고, 대다수 국민들은 아무런 문제없이 미국산 소고기를 잘 먹었습니다.
그런데 이명박정부를 흔들려고 작정한 일부의 세력들이 미국산 소고기를 먹기만 하면, 광우병에 걸려 죽는 것으로 국민들을 호도하였습니다. 제대로 서지도 못하고 비틀거리는 미국소 동영상을 보여 주면서 광우병에 걸린 소고기를 먹으면 저렇게 될 것이라 암시하였습니다.
사실 광우병과 아무런 상관없는 질병에 걸린 소의 동영상입니다만, 그 동영상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은 “미국산소고기 먹으면 저렇게 될까 걱정과 두려움”을 가졌습니다. 뇌에 구멍이 송송 뚫여서 비참하게 죽는 것으로 염려하였습니다. 10년의 시간이 지난 뒤 돌아 보면, 다 속임수고 사기요, 기만이었습니다. 다들 어리석은 기우에 불과한 염려와 걱정이었습니다.
어느 연구조사에 의하면, 우리들이 하는 걱정내용은 80%는 일어날 수 없는 쓸데없는 것들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12%는 나와 상관없는 것이고, 8% 만은 걱정거리라고 합니다. 말이 8%지만 10개 중에 한 개도 되지 않는 걱정입니다. 그런데 그 한 개마저도, 그 8%까지도, 성경은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다 책임져 주시는 것이라 말합니다.
전 세계적으로 하루 밤에 1억 명 이상이 수면제를 복용해야 잠을 잔다고 합니다. 우리교회 성도님들 중에 수면제가 없으면,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분이 없는 것으로 저는 알고 있습니다. 비록 이런 저런 걱정과 근심이 있지만, 약의 힘을 빌려야만 잠을 잘 정도로 심각한 불면증과 무서운 걱정 염려는 없다는 말입니다.
이 모든 것을 하나님에게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비록 내가 걱정과 근심이 있지만, 밤에 잠을 잘 잘 수 있게 도와주신 하나님에게 감사하고, 걱정과 근심이 있지만, 그 걱정과 근심이 나를 삼키지 않음을 감사하십시오.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이 산길을 가다가 미끄러져 굴러 떨어지다 뻗어 나온 나무뿌리를 붙잡고 간신히 버팁니다. “자신이 지금 절벽이나 아주 골이 깊은 낭떠러지에 매달려 있다”생각합니다. 힘을 다해 매달려 있었지만 손에 힘이 빠져 나무뿌리를 손에서 놓아 버립니다. 그리곤 이제 죽는구나 하면서 아래로 툭 떨어지는데, 손을 놓는 순간 발이 땅에 닿은 것입니다. 그냥 손을 놓고 내려가도 될 높이지만, 앞을 보지 못한 소경인고로, 깊이를 짐작하지 못하고 떨어져 죽는다고 걱정하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걱정과 근심, 염려의 구덩이에 빠진 모습이 이 소경의 모습과 동일합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데, 나는 죽는다고 생각하면서 버팁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모든 것을 다 하나님에게 맡기고, 쓸데없는 걱정과 근심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을 누리기를 소망합니다.
2.하나님의 섭리를 먼저 믿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걱정과 근심을 대처하는 방법이 우리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과 많은 부분에서 차이가 납니다. 유비무환(有備無患)이란 사자성어가 잇습니다. 미리 준비하면 우환을 없앨 수 있다는 말입니다. 모든 면에 있어서 유비무환은 삶의 진리가 되는 말입니다. 있을 때에 더 아끼고 소중하게 사용해야, 나중에 없을 때에 궁핍함을 채울 수 있습니다. 높은 자리에 있을 때에 덕을 베풀고 사람을 귀하게 여기 줄 알아야, 나중에 내가 한직으로 밀려나더라도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 법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성도들도 유비무환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아끼고 저축하면서 궁핍할 경우를 대비해야 하고, 장래에 대한 설계도 하고, 미래에 대한 꿈도 가져야 합니다. 하지만, 유비무환의 자세에서만 머물러 버린다면,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 하등 차이가 없는 모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는 유비무환의 자세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은 믿음의 단계입니다. 믿음의 단계로 나아가야만, 내가 준비한 유비무환이 빛을 발휘하고, 그 진가를 드러낼 것입니다.
30절 보십시오. “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하반절에서 예수님이 던지는 질문이 있습니다. 무엇이 적은 자들이라고 책망하십니까? “믿음이 적은 자들이라” 말합니다.
이 부분을 유심하게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믿음이 없는 자들”이라 말하지 않고, ‘믿음이 적은 자들이라’ 말합니다. 이런 표현은 아주 색다른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믿음에 관계되어 책망하실 때에, 대부분 “믿음이 없는 자들아”라는 표현을 사용하셨습니다. 믿음이 없기 때문에 책망을 받고, 믿음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믿음이 없기 때문에 축복을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이것이 일반적인 문구였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믿음이 없다”라고 말하지 않고, “믿음이 적다”라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은 믿음이 없는 사람들입니까? 아니면 믿음이 적은 사람들입니까? 믿음이 없다는 말은 불신자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당연히 이들은 믿음이 없는고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이 적은 자”는 누구일까요? 하나님을 믿는 성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세상 걱정과 근심 앞에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는 세상 것을 의지하려고 겉눈질 하는 성도들을 향하여 예수님이 던지는 말씀이 “믿음이 적은 자들아”하는 말입니다.
여러분들은 적은 믿음을 가지고, 세상으로 겉눈질 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굳세게 앞으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걱정과 근심을 훌훌 날려 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영국 소설가인 <제임스 힐튼>이 1933년 출판한 “잃어버린 지평선(Lost Horizon)"에서 지상 낙원으로 묘사된 곳으로 <샹그리라>라는 마을이 등장합니다. 이후 사전에도 등재되면서 샹그릴라라는 말은 이상향, 천국을 의미하는 일반 통용어로 사용됩니다.
몇해 전 중국은 옛 티베트 땅인 <중텐>의 행정명칭을 “샹그리라”로 바꾸었습니다. 늙는 것과 병드는 것이 없고 죽음이 없다는 신비의 땅이 바로 샹그리라입니다. 이렇게 명칭을 바꾼 것은, 티베트 땅을 점령한 중국의 고도의 상술이 깔려 있었는데, 히말리야를 관광 수입으로 삼아 돈을 벌고, 그리고 티베트 독립을 가로 막으려는 술책이었습니다.
중국의 청두에서 리장까지 5,000여리 길을 지프로 돌고 돌아가는 험난한 길입니다. 해발 4,000-5,000미터 높은 봉우리를 넘어야 하고, 차가운 설산을 넘어야 하며, 고산병으로 고생하고, 그야말로 모진 고생길이 낙원으로 가는 샹그릴라 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세계에서 여행자들이 이 길로 몰리고 있다고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낙원이란 단어가 주는 이상향의 의미 때문입니다. 지상낙원 샹그릴라로 가게 되면, 현실에서 힘든 어려움, 걱정, 눈물에서 벗어날 것 같고, 한숨, 이런 것들을 다 뒤로 날려 버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사람들은 몰리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히말리야를 배경으로 만들어진 지상낙원이라는 샹그리라로 가면, 걱정이 사라지고, 근심과 슬픔이 모두 달아나 버릴까요? 잘 알아야 합니다. 지구상 그 어떤 곳도 진정한 낙원은 없습니다. 장소가 낙원으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비록 내가 지금 고난과 고통의 눈물 중에 있다고 하여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면, 바로 그곳이 낙원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무엇이 지옥에서 천국으로 바꾸어버립니까? 바로 하나님의 임재요,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고민하면서 갈등하는 시간에 하나님에게 한발 더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걱정과 스트레스를 날려 버리고, 믿음의 평온함을 누리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