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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랑길 무안 24코스 제1부
봉오재-곡지마을-홀통유원지-신정마을 입구-현해로-가입마을-물암마을회관
20221109
1.탄도만 달빛 풍경과 함해만 일출의 장관
지난해 11월 9일 초겨울의 쌀쌀한 새벽 4시 40분, 무안군 현경면 용정리 봉오재마을 입구에서 서해랑길 24코스 탐방에 나섰다. 음력 시월 열엿샛날 새벽 하늘에 뜬 둥근달이 밝은 빛을 지상에 뿌리고 있지만, 지상의 물상과 풍경과 위치를 전체적으로 확인하기는 어렵다. 다만 분위기, 달빛과 달빛에 젖은 풍경의 분위기에 취해 탐방길을 흐느적거렸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붓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1930년대 이효석(李孝石, 1907~1942년)이 <메밀꽃 필 무렵>에서 표현한 이 빛나는 달빛 문장은 강원도 평창군 봉평의 여름밤 풍경과 분위기를 대표한다. 전남 무안군 현경면 탄도만 해안의 초겨울 새벽 달빛 풍경은 양파밭과 양배추밭에 부서지는 달빛이다. 검푸르스름한 양파 줄기잎과 양배추 넙적한 잎에 초겨울의 흰 서리가 내렸다. 불그스레한 달빛이 검푸르스름한 흰 빛에 스며들어 퍼진다. 실루엣을 그리는 산줄기, 탄도만 해안을 둥그스름하게 돌아가는 불빛들, 탄도만 바다 위에 높이 뜬 새벽달이 바다에 살포시 내려앉아 반사되고 달빛은 물결에 반짝인다. 이 은은한 달빛 풍경에 취하여 밝은 날빛 풍경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밀어내고 어둠 속의 탐방로를 따라 탄도만 해안을 돌아갔다.
하얀 달이 / 빛나는 숲 속에서 / 가지마다 / 우거진 잎사귀 사이로 / 흐르는 목소리 // 오, 사랑하는 사람아 // 깊은 겨울 / 연못에 드리운 / 버드나무의 / 검은 그림자는 / 바람에 흐느끼네 // 아, 지금은 꿈꾸는 때 // 별들이 / 무지개 빛으로 / 반짝이는 하늘에서 / 크고 포근한 / 고요가 내려오는 듯 // 아득한 이 시간 - 폴 베를렌(1844~1896)의 '하얀 달' 전문
홀통 해안으로 들어갔다. 드뷔시(1862~1934)의 피아노곡 '달빛' 선율을 따라 폴 베를렌의 시 '하얀 달' 구절들이 솟아난다. 해송숲에서 사랑하는 그대의 목소리가 흘러오고, 해송숲 소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사랑을 속삭인다. 드넓은 갯벌에 수많은 별들이 흩어져 무지개 빛으로 반짝인다. 탄도만 해안에 달빛이 빛나고 음악이 흐르고, 시의 구절들이 속삭이고, 별들이 빛난다. 새벽의 어둠 속 탄도만 해안의 이 풍경을 따라 홀통으로 들어갔다. 무안군 현경면 오류리 홀통은 특이하다. 홀쭉한 호리병 모양으로 바다에 돌출하여 곶(串)을 형성하며 양쪽으로 모래밭을 이루어 놓았다.
홀통 바닷가/ 물 빠진 갯벌, 잠시 겨울 햇살로 반짝인다./ 매일매일 이별하듯/ 삶이라는 게 붙잡아 둘 수 있는 것들이 없다./ 당신과 이별을 한다면 이곳에 와야지/ 홀로 홀통에 와서/ 당신을 내려놓고 짠 눈물이라도 흘려야지/ 우리가 걸었던 소나무 숲은 말이 없다/ 당신은 보이지 않는다/ 부질없다 부질없다 하면서/ 놓지 못하고 붙잡고 있는 것들/ 홀통에서는 모두 버리고/ 혼자가 될 수 있겠다. - 김경애의 시 '홀통' 전문
이 지역 출신의 시인 김경애는, 홀통 해안에서 이별의 슬픔을 승화하고 있다. 왜 홀통일까? 홀쭉해서일 것이다. 그래서 모두를 비우고 혼자가 될 수 있는 곳이 홀통이라고 말하고 있다. 홀통 해안을 걸어 나왔다. 과연 모두 버리고 혼자가 되었는가? 길손은 자신이 없다. 고독을 견디고 즐긴다고 큰 소리치지만, 내가 현실에서 혼자가 될 수 있겠다고 자신할 수 없다.
국도24호선 현해로로 나왔다. 이제 동이 터서 날이 밝다. 현해로는 서쪽 탄도만과 동쪽 함해만 사이를 가르는 도로이다. 함해만은 무안 남쪽으로 내려갔다가 함평과 영광 북쪽으로 올라와 넓은 서해 바다로 이어지는 해안이다. 탄도만은 무안군 탄도 섬을 중심에 두고, 무안군 운남면, 망운면, 현경면, 해제면이 에워싸고 있으며 신안군 바다로 나간다. 그래서 이 지역민들은 함해만은 함평만이라고도 이르지만, 탄도만을 서해 바다라고 일컫는 경향이 있다. 현해로에서 서쪽 탄도만 바다의 물바위(수암)가 보인다. 고기잡이 떠난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기다리다 지친 부인이 애기를 업은 채 돌이 되었다는 전설을 안고 있는 바위라고 한다. 홀통 해안에서 혼자가 될 수 있었다면 어부의 아내는 망부석(望夫石)이 되지 않는다. 홀로 고독을 견디며 이 거친 삶을 살아내야 한다. 놓지 못하고 붙잡고 있으며 모두 버리고 혼자가 되지 못하는 것이 어쩌면 인간 세상이 아닌가 싶다.
현해로에서 동쪽의 현경면 가입리 가입마을로 넘어왔다. 가입마을은 함해만을 바라보고 있는 마을이다. 함해만 풍경이 아득하다. 저 남쪽 끝자락에 함해만의 남쪽 끝 함평의 돌머리 해안과 주포항이 있을 것이다. 가입마을 입구에 이르렀을 때 함해만 너머에서 해가 솟아오르고 있다. 이글거리는 붉은 태양이 찬란히 떠올라 이 땅의 모든 어둠을 굴복시킨다. 날빛의 밝음이 달빛의 어둠을 감싸며 함해만에 붉은 빛을 물들인다. 장엄한 일출 광경은 언제나 부활의 모습 같다. 죽음의 어둠 속에서 생명의 활력으로 싱싱하게 튀어오르는 삼라만상의 존재들, 그들이 어둠 속에서 부활하여 빛의 소리를 보낸다. 그 소리에 화답하듯 내 몸, 내 마음도 뜨겁게 달아올랐다. 도취와 환호의 빛을 그들에게 보낸다.
2.탐방 과정
전체 탐방 거리 : 20.72km 중 11.5km
전체 소요 시간 : 5시간 30분 중 2시간 43분
무안군 현경면 용정리 현해로 봉오재마을 입구 죽산 안씨 공원 앞에 서해랑길 무안 24코스 안내도와 이정목이 설치되어 있다.
서해랑길 무안 23·24코스 안내도 옆에 이정목이 세워져 있다. 20.5km, 7시간이라고 적혀 있다. 실제 탐방한 결과는 20.72km, 5시간 30분이 걸렸다. 어둠 속에서 무작정 걸었고, 트레킹 팀에서 제한한 시간에 맞추기 위해 속도를 낸 결과이다.
죽산 안씨 공원에 여러 기의 죽산 안씨 비석과 죽파정이 세워져 있다. 봉대마을은 운저리 보리밥의 태생지라고 한다.
"봉대는 용정5리에 속한 마을로 조선시대 봉화를 올렸던 봉대산(옹산, 봉오산이라고도 함) 아래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봉대 밑 또는 봉오재 마을이라고도 한다. 봉오재는 마을에서 오류리 사교 마을로 넘어가는 고개를 지칭하는 이름인데 왜 봉대재라 하지 않고 봉오재라 하는지 이유를 물었더니 아는 주민이 없었다. 단지 추측키로 봉대산 아래의 다섯 마을이 있어서 봉오재라 하지 않았는가 추정하고 있을 뿐이다. 또 다른 이유도 있다. 이 산에 벌[蜂] 집 형태의 명당이 있어 蜂宇山이라고도 불렀는데 봉우산이 변하여 봉오산으로 그리고 봉오재라 변했다 하나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이 마을은 봉오재 또는 저승재라 부르는 고개 아래에 있다.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길에 위치하다 보니 머무는 주민보다 나그네성 주민들이 많이 살아 마을로서 자리 잡기 어렵지 않았을까 여겨진다. 또한 주민들도 광복 이후에서야 비로소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보고 있다. 일제강점기 때 마을에서 넓은 농장과 주조장을 운영했던 일본인 사사끼가 일본으로 돌아가면서 당시 집사로 있던 두동 살던 안동규씨에게 자신이 소유하고 있었던 많은 토지와 주조장을 넘겼다. 광복 이후 적산 재산으로 분류되었던 일본인 소유의 토지들이 정부의 불하 조치로 합법화되어 개인들에게 등기 정리되면서 많은 토지를 불하 받았던 안동규씨를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현경면 송정리에서 마을로 넘어오는 길목에 토성목(土城목)이라는 지명이 있다. 이곳은 현해로를 사이에 두고 함해만의 바다와 서해 바다가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곳이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은 이곳을 파서 운하를 만들려고 하였다. 당시에 상당할 정도로 공사가 진행되었으나 광복이 되면서 이 공사는 중단되었는데 그때 퍼냈던 흙이 마치 성벽과 같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성벽은 한국전쟁 때 좌익 세력과 경찰과의 대치 전선이기도 하였다. 많은 사람이 이곳에서 죽기도 하였으며 한 경찰은 좌익의 총알을 맞아 부상을 입기도 하였다. 얼마 전까지 이곳에는 군부대가 주둔했었고 검문소가 있기도 하였다." - 무안문화원
죽산 안씨 죽파 안진규 선생을 기리는 정자루이다.
현경면 수양2리 석북마을에 감풀마을이 있다. 감풀마을에 대한 소개를 무안문화원에서 옮겨온다.
"이 마을은 정부지원 사업을 많이 받았다. 처음 주변마을과 함께 정보화마을로 지정된 뒤 테마마을 - 한옥마을 - 행복마을로 지정을 받아 마을을 발전시켜 왔다. 특히 2007년 전통테마마을로 지정되면서 감풀마을이란 새로운 지명을 얻기도 하였다. 감풀이란 썰물 때에만 드러나는 넓고 평평한 모래벌판 즉 모래추를 말한다. 테마마을 지정 이전에도 주민들은 황등풀, 큰풀, 작은풀이란 지명을 갖고 있었다. 현재 한옥이 19채가 들어서 있고 정자가 3동이 있다." - 무안문화원
이곳에서 왼쪽 여성농어업인센터 방향으로 진행한다. 오른쪽 안내판 뒤 산봉이 봉대산이고 전봇대 뒤 산봉이 작은봉대산인 듯.
친환경 미생물 배양실 앞쪽으로 이어간다.
참사랑 노인전문 요양원 앞으로 이어간다.
왼쪽 승지축산 울타리를 따라 이어간다.
탄도만 용정리 해안의 방조제로 나왔다. 음력 10월 16일의 보름달이 밝게 빛나고 앞에 작은봉대산이 가늠된다.
용정리 방조제 맞은편 오류리 해안이 왼쪽 끝 홀통으로 이어지고 있다. 오른쪽은 작은봉대산, 중앙에 검무산이 가늠된다.
서해랑길은 작은봉대산 앞쪽으로 빙 돌아서 왼쪽 검무산 아래 현경면 오류리 곡지마을로 이어진다.
음력 10월 열엿샛날의 새벽달이 밝다. 멀구슬나무 푸른 열매들이 달빛과 헤드랜턴 빛을 받아 반짝인다.
탄도만 용정리 해안 방조제 원장들길을 따라가다 오른쪽으로 빙 돌아 언덕으로 올라가 왼쪽으로 나간다.
현경면 용정리에서 오류리로 넘어온 것 같다. 무안의 대표 농산물 양파를 재배하는 밭이 드넓다.
서해랑길은 언덕의 양파밭을 왼쪽으로 돌아 앞에 보이는 작은봉대산 방향으로 이어가다 왼쪽으로 꺾어간다. 달이 밝다.
작은봉대산이 맞을까? 왼쪽으로 꺾어 진행한다.
서해랑길 24코스 시점 1.7km, 종점 18.8km, 홀통해수욕장 5.4km 지점이다.
오류길을 따라 직진한다. 왼쪽의 해안 마을은 곡지마을일 것이다.
오류리 윗마실들 건너 불빛이 반짝이는 곳은 어은동마을과 삽다리마을일 것이라 가늠한다.
불빛 환히 빛나는 마을이 앞에 있다. 오류리 곡지마을이다.
"오류리(五柳里)는 현경면 소재지에서 북서쪽으로 8㎞ 정도 떨어져 있으며 검무산을 중심으로 마을들이 형성되어 있으며 서쪽은 간척지와 접해 있다. 또한 24번 국도를 경계로 마산리와 접해 있으며 서쪽의 간척지는 지식저수지와 오류저수지의 용수를 받아 경작하고 있다. 본래 목포부 다경면의 지역으로 1914년 행장구역 개편에 따라 사교리, 어은동, 곡지동, 신정리를 합하여 무안군 현경면에 편입되었다. 현재는 오류동, 어은동, 곡지, 신정, 삽다리 등 5개 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오류(五柳)’라는 지명은 다섯 그루의 버드나무가 있는 마을이라는 지명이 아니라, 중국의 유명한 시인 도연명의 호에서 비롯된 것이다. 조선시대 선비들이 초야에 은거하여 학문을 닦으며 즐겨 사용했던 지명이기도 하다. 우리 지역에는 해제면에도 오류촌이라는 지명이 있다." - 무안문화원
맞은편 왼쪽 불빛 반짝이는 곳은 탄도만 홀통유원지일 것이다. 서해랑길은 양파밭 건너 곡지마을로 이어진다.
곡지마을 오류길을 따라 이어간다.
"곡지마을은 오류3리에 속하며 앞으로는 서해바다가 있고 뒤로는 검무산이 받치고 있다. 곡지라는 마을이름의 유래는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마을의 지형이 여자의 젖꼭지 같다고 해서 ‘꼭지’라고 불렀으나 그 후 발음이 변하여 ‘曲支’라 했다. 두 번째는 원님이 붙여준 이름이다. 어느날 원님이 민정시찰차 이 마을을 찾게 되었다. 아무리 가도 굽이만 돌 뿐 마을이 나타나지 않았다. 상당한 굽이를 돌아가서야 이 마을을 만나게 되었다. 주민들에게 마을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주민들이 아직 짓지 않았다고 하자 굽이를 돌아 돌아서 오는 마을이기 때문에 ‘곡지’라 하는 것이 좋겠다 해서 곡지라 했다 한다. 조선조 말까지는 ‘曲池’라 썼다가 일제강점기에 들어오면서 현재 쓰고 있는 ‘曲支’로 바뀌지 않았을까 여겨진다. 또한 지명의 의미도 마을에 굽이 진 연못이 있었거나 해안가의 특성상 구미(바닷가나 강가의 곶이 길게 뻗고 후미지게 휘어진 곳.)가 있어 못[池]으로 보고 붙여진 이름으로 보인다.
이 마을은 탄도만의 기름진 바다를 앞에 두고 있어 먹고 사는 데는 크게 문제가 없었다. 해서 뚜렷한 성씨가 없는 각성 받이와 전국 각처에서 모여 이뤄진 마을이다. 마을이 성했을 때는 100세대가 훨씬 넘는 마을로 중촌(가운데 있는 마을이라 해서), 신촌, 아랫마을, 윗모실, 큰동네, 풍덩개(선창가 주막마을) 등 여러 개의 마을이 모여서 이뤄졌다. 마을의 주산인 검무산은 해발 100미터가 조금 못 되는 높이의 산이다. 제일 높은 곳은 무재봉이라 하며 그곳에서 재를 지내기도 하는데 아이를 못 낳는 집에서는 아이를 낳게 해달라는 기원을, 비가 오지 않을 때는 주민들이 비가 오게 해달라는 기우제를 지내기도 한다. 劍舞山은 예로부터 이 산의 기운을 받은 곳에서는 장군이 날 것이라는 말이 전해져 내려왔는데 자세히 보면 장군이 칼을 들고 웃는 형국이라고 한다. 다른 설에 의하면 산의 지형이 거미가 집을 지을 때, 가운데에 거미가 있는 것처럼 하고 있다 하여 거무산(거미산)이라고 했다 한다. 이 거무산이 한자어 표기에 의해 검무산으로 바뀌어 졌다는 것이다.
이 마을에도 조금나루(조석 간만의 차가 가장 작을 때 건널 수 있는 나루)의 지명이 있다. 주민들은 장보리라고도 부르는데 원을 막기 전에는 이곳에서 화렴(구운 소금)을 생산하기도 했다. 주민들은 이곳의 원이 막히면서 농지가 조성되어 비로소 주민들이 쌀밥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무안에는 세 개의 조금나루라는 지명이 있는데 가장 많이 알려진 망운면 송현의 조금나루를 포함해 이 마을의 조금나루와 월두마을의 조금나루가 그것이다." - 무안문화원
해안 방조제에서 오른쪽으로 돌아 언덕에 있는 대형 축산농장 앞을 통과한다.
대규모 축산농장인 농업회산법인 진성축산인 것 같다.
오른쪽 뒤 진성축산 앞을 거쳐 오면 곡지마을에서 떨어져 있는 외딴집이 언덕 위에 있다. 소나무와 어우러져 멋있다.
현경면 오류리 1102-5 지역으로, 홀통해수욕장 2.4km, 24코스 종점 15.8km 지점이다.
음력 시월 열엿샛날의 둥근달이 탄도만 바다를 환하게 비춘다.
맨 왼쪽 뒤의 산은 해제면 창매리 매령산(중매산), 바로 앞 등불 빛나는 곳은 홀통유원지일 것이라 가늠한다.
방조제 제방길을 따라간다. 불빛 빛나는 곳은 현경면 오류리 오류동마을일 것이라 추정한다.
해안으로 돌출한 곶(串) 언덕에 대형 축사가 있는 것 같다.
중앙에 돌출한 곳은 현경면 오류리 홀통이고, 마주보고 있는 왼쪽은 해제면 창매리 매령산(중매산)이다.
해안에서 해송숲 안쪽 들길 농로를 따라간다.
해안과 접해 있는 해송숲 안쪽 농로를 따라가다가 다시 해안으로 나간다.
해안으로 나가는 해송숲에 개인 주택인지 펜션인지 흰 건물이 있다.
흰 건물이 있는 곳은 사유지이므로 출입을 금지한다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뒤돌아보았다. 왼쪽에 검무산이 솟아 있다. 추측컨대 불빛 비치는 곡지마을, 오른쪽 진성축산, 해안으로 나와서 해안길을 걸어오다가 왼쪽 해송숲 앞 해안으로 오지 못하고 해송숲 들녘 쪽 농로를 돌아서 해안으로 다시 나왔다.
"검무산(劍舞山)은 해발 104.3m 높이의 산이지만 주변 마을의 주민들은 대단히 신성시 여기는 산이다. 제일 높은 곳은 무재봉이라 하며 그곳에서 재를 지내기도 하는데 아이를 못 낳는 집에서는 아이를 낳게 해달라는 기원을, 비가 오지 않을 때는 주민들이 비가 오게 해달라는 기우제를 지내기도 한다. 검무산(劍舞山)은 예로부터 이 산의 기운을 받은 곳에서는 장군이 날 것이라는 말이 전해져 내려왔는데 자세히 보면 장군이 칼을 들고 웃는 형국이라고 한다. 다른 설에 의하면 산의 지형이 거미가 집을 지을 때, 가운데에 거미가 있는 것처럼 하고 있다 하여 거무산(거미산)이라고 했다 한다. 이 거무산이 한자어 표기에 의해 검무산(劍舞山)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 무안문화원
홀통으로 이어지는 해안길이 정비가 안 되어 있는 것 같았다. 어둠 속 해안의 잡목길에서 헤맸다.
오류마을 1.2km, 홀통유원지 700m 지점이다. 서해랑길은 오류마을 외곽 해안길을 걸어왔다.
분명하게 알 수가 없었다. 지도를 살피니 홀통유원지 고인돌횟집과 민박집인 것 같다.
오류마을 1.9km, 가입마을 3.6km 지점이다. 서해랑길은 가입마을 표지 방향으로 이어지는데 잠시 홀통유원지를 살펴 본다.
바다로 돌출한 홀통, 그리고 홀통해안에 유원지가 조성되어 있는 것 같다.
"홀통(忽通)은 원래 호통(胡通)이었다. 중국 사람이 지나간 자리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는데 발음의 편의상 현재의 홀통으로 변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또 다른 의견도 있다. 해변 가운데에 홀로 튀어나온 뭍이 있어 '홀투이'라는 지명이 생겼다가 한국전쟁 이후 '홀통'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홀통의 지형이 호루병처럼 생겼다 해서 홀통이라 했다. 이처럼 홀통에 대한 지명 유래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주민들은 이곳을 갑자기 개발이 될 수 있는 곳으로 봤다. 실지로 10여 년 전에 해양 레저 스포츠인 윈드서핑의 최적지로 소문나 각종 대회를 유치하는 등 개발 붐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또한 민물장어가 많이 잡혀 큰 소득을 올리기도 하였다. 현재는 수산물이 풍부해 낚시의 최적지로 주목받고 있다." - 무안문화원
뻘낙지직판장 용심수산 앞을 거쳐 홀통길을 따라간다.
왼쪽은 현경면 마산리 홀통교차로로 이어지는 홀통길, 오른쪽은 현경면 오류리 신정마을로 이어지는 신정길이다.
무안군 현경면 오류리 신정마을로 이어지는 신정길이다. 신정마을에 대한 소개를 무안문화원에서 옮겨온다.
"신정(新亭)은 오류4리에 속하는 마을로 마을 이름의 유래가 뚜렷하지 않다. 무안군이 발행한 마을유래지에는 ‘마을의 남북면은 바다이고 지형은 매 형국이며 예전 마을 동편에 정자나무가 여러 그루 있었으나 고사되고 이후 마을이 새롭게 형성되자 신정이라 불렀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주민들은 원래 마을 이름이 新井이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마을의 존재가 샘과 관련이 있었기 때문이다. 원래 마을은 배 형국으로 당산골이라 하는 곳에서 송씨와 주씨들이 자작일촌을 이루며 살았다.
이 마을은 이목정, 신정, 약나뭇골, 들독거리, 수영목, 홀통으로 이루어졌다. 마을 뒤에는 마산, 앞에는 홀통산, 오른쪽에는 탄도만이 있으며 왼쪽에는 검무산이 자리하고 있다. 마을 옆에는 자연적으로 형성된 간척지인 대원평이 있으며 그 너머에 오류동 마을이 있다. 행정구역상으로 넓은 지역에서 여러 세대가 살고 있다. 梨目亭은 배나무정이라고도 불리는데 현해로에서 마을로 들어오는 입구에 있다. 배나무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라는데 자세한 유래는 모르고 있다. 약나뭇골은 약초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은 개발이 많이 되어서 약초를 발견할 수 없으나 주변이 산림으로 우거져 있을 때는 약초가 많았다고 한다." - 무안문화원
홀통은 호리병처럼 삐죽하게 튀어 나온 땅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바닷물이 빠지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드넓은 갯벌이 드러난다. 홀통해변은 천혜의 휴양지로 울창한 해송과 긴 백사장이 장관을 이루고 있어 해수욕과 야영, 바다낚시를 동시에 즐길 수 있다. 물이 맑고, 수심이 낮고, 파도가 잔잔하여 윈드서핑과 같은 해양스포츠를 즐길 수 있으며, 마치 호수에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솔숲에서는 캠핑과 산책을 즐길 수 있다. 해넘이가 이름다운 홀통은 남도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담고 있다.
탄도만 해안이 현 위치 현경면 오류리에서 왼쪽으로 현경면 마산리와 가입리를 거쳐 해제면 유월리로 이어진다.
탄도만 해안이 오른쪽 해제면 용학리와 천장리를 거쳐 왼쪽 창매리로 이어진다.
왼쪽은 홀통의 홀통산인 듯. 홀통산 오른쪽 뒤가 해제면 창매리의 매령산(중매산)이다. 하늘의 둥근달이 탄도만 바다에 빛난다.
바다 쪽으로 돌출한 홀통의 산봉을 홀통산이라 이르는 듯. 홀통해수욕장에서 모래밭이 길게 이어지고 있다.
"신정마을 주변은 물길의 흐름에 따라 자연적으로 형성된 모래톱이 두 곳에서 마을을 이롭게 만들어주고 있다. 홀통은 원래 섬이었다. 그런데 조류의 영향으로 모래톱이 쌓이더니 현재처럼 육지와 연결된 것이다. 마을 옆에 있는 대원평도 자연적으로 형성된 모래톱의 영향으로 간척이 이루어진 것이다. 뿐만 아니라 1960년대 70년대에 돔바위 주변에서 이뤄진 바닷모래 채취사업은 이 마을 모래의 진가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당시에 이뤄졌던 모래의 무분별한 채취는 주민들의 진한 아쉬움을 사고 있다. 지금까지 모래가 남아있었다면 유명한 해수욕장이 되어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당시 홀통 주변의 모래는 그 질이 좋아 유리의 원료뿐 아니라 건축용 모래로서는 최고의 평가를 받았다. 해서 제주도뿐 아니라 일본까지 홀통 모래가 팔려 나갔다." - 무안문화원
삽다리-오류동마을-홀통해수욕장-홀통해변-가입마을-물암마을-무안생태갯벌랜드, 9km 거리의 구간을 이른다.
홀통교차로 이어지는 홀통길을 따라 홀통해안을 바라보며 걷는다.
물암바위가 왼쪽에 있으며, 탄도만은 현경면 오류리, 마산리와 가입리를 거쳐 해제면 유월리와 용학리로 이어진다.
현경면 오류리에서 마산리로 넘어왔다. 홀통이 바다로 돌출하고, 중앙에 해제면 창매리의 매령산이 솟아 있다.
서해랑길은 왼쪽 현경면 가입리 방향으로 이어진다.
국도24호선 현해로 아래 마산리 마을길을 따라가다가 현해로로 올라선다.
국도24호선 동쪽 함해만 쪽(왼쪽)에 현경면 마산리 마산마을이, 그 서쪽 탄도만 쪽(오른쪽)에 오류리의 신정마을이 자리한다.
현해로로 진입하여 현경면 가입리 가입마을 입구까지 현해로를 따라간다.
현경면에서 해제면과 신안군 지도로 이어지는 현해로는 왼쪽의 탄도만과 오른쪽의 함해만 사이를 가르는 도로이다.
넋바위(魂巖)라고도 불리는 물바위(水巖)가 탄도만 바다에 있다. 물바위 전설을 무안문화원에서 옮겨온다.
"행정구역으로는 현경면에 속하지만 보통 해제 물바우라 부른다. 고기잡이 떠난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기다리다 지친 부인이 애기를 업은 채 돌이 되었다는 전설을 안고 있는 바위다. 망부석의 애절한 사연이 깃들어 있다. 하여 주민들은 이 바위를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의 혼이 바위가 되었다 해서 넋바위[魂巖] 또는 물바위[水巖]라 불렀다. 60년대까지만 해도 주변 마을의 아낙네들이 많이 찾아와서 이 바위에 치성을 드려 왔다. 부부간의 情이 시원치 않거나 恨이 많은 아낙네들은 이 바위를 찾아와 넋두리를 하거나 쓰다듬으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었다 한다. 또한 이 바위는 이상스러운 힘이 있어 나라에 큰 변고가 있을 때에는 바닷물이 바위를 삼켜 버린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와, 1950년 6월 25일의 한국전쟁 때 각각 물에 잠겨버렸는데, 그 이후로는 한 번도 물에 잠긴 적이 없다 한다. 평상시에는 바위의 7부까지만 바닷물이 차올라 마치 먼 바다를 향해 합장하고 있는 불심 깊은 스님의 형상으로 보이기도 한다. 막상 다가가서 보니 둘레가 9.7m나 되고 길이는 1.9m가 넘는 큰 바위이다. 예전에는 모래 속에 많이 묻혀 있어서 아이들이 바위 위에 쉽게 올라가서 놀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다 점차 모래가 씻겨 나가면서 주민들은 바위가 자라고 있다고도 했다. 썰물 때 조금 떨어진 곳에서 보니 마치 아낙네가 편안하게 앉아서 굴을 까고 있는 모습이다."-무안문화원
왼쪽 뒤에 해제면 창매리의 매령산(중매산)이 솟아 있고, 바다에 물바위(수암)가 있다.
현경면 마산리에서 가입리로 넘어왔다. 앞에 보이는 산은 안산으로 명당지라고 알려져 있다.
국도24호선 현해로 가입리 버스정류소에서 오른쪽 현경면 가입리 가입마을로 이어간다. 정면에 보이는 산이 안산인 듯.
"가입마을 입구인 안산에 속칭 해제 8명당 중 하나인 花蟹弄珠(화해롱주, 게가 구슬을 희롱하는 명당)의 형국이 있다. 산의 지세가 마치 게의 형국으로 앞 섬인 은복도를 구슬로 보고 희롱하는 형국이다. 이 명당은 장성(長城) 출신으로 황주 변씨인 망암 변이중 선생의 사패지로도 유명하다. 이곳은 선생이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임진왜란 시 전라도 소모어사를 할 때 지나가면서 봐 두었던 명당으로 죽을 때 이곳에 자신의 묘를 쓸 것을 아들에게 유언으로 남겼던 명당지이다." - 무안문화원
현경면 가입리 산46-20 지역으로, 24코스 시점 9.8km, 종점 10.7km 지점이다.
이 고개가 작은토클넘일까? 바다에 물바위가 보이고, 맞은편 정면에 해제면 창매리 매령산(중매산)이 확인된다.
"안산을 넘어오는 재를 뜻하는 작은 토클넘, 큰 토클넘이 있고, 앞고지, 진다불등이 있다. 또한 날등과 너몰 마을이 있었며 놉밧재, 뒷개, 마갑산, 백두뿔, 뱀목, 뱀목들, 엄섬, 자라목, 진등 등의 지명도 있다. 이중 엄섬은 은섬이라고도 하는데 마을 입구의 은복섬을 말한다. 또한 말구시통의 형상으로 해제 8명당 중 하나인 송석리의 천마시풍과 관련이 있다." - 무안문화원
가입마을 가는 고개에서 동쪽으로 함해만을 바라보았다. 언덕에 드넓은 농지가 펼쳐져 있고, 그 아래에는 함해만 해안이 현경면 가입리에서 마산리로 이어지고 있다.
안산 자락 끝을 넘어 내려가면 가입마을이 나온다.
왼쪽에 폐교된 수암국민학교 건물이 보인다. 서해랑길은 앞에서 왼쪽 농로로 진입하여 해제면 유월리 수암마을로 향한다.
"가입리는 현경면에서 가장 북쪽에 위치한 지역으로 해제면 유월리와 경계에 있으며 서로는 탄도만, 동으로는 함해만을 접하고 있다. 조선시대 중기 문헌인 호구총수에는 마을 이름이 나오지 않으며 20세기 들어서야 목포부 다경면의 지역으로 가입이라는 지명이 나온다. 이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무안군 현경면에 편입되었다. 현재는 가입과 너물, 두 마을이 있다. 가입마을은 상주 주씨의 집성촌이며 너물은 2000년에 가입에서 분리된 마을로 진주 강씨들이 많이 살고 있다. 1996년에 폐교된 수암국민학교가 있다.
가입이라는 지명은 더드리에서 비롯된다. 이 지역은 현경면에서 현경로를 따라 봉오재를 지나 해제면과 경계 지점 직전에 오른쪽으로 꺾어들면 만날 수 있다. 지명의 유래는 조금 더 들어가면 볼 수 있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더드리를 한자로 표기 한 것이 지금의 가입리이다. 지금도 주민들은 더드리라는 예전 이름을 사용하기도 한다." - 가입리
현경면 가입리 가입마을 앞에서 서해랑길은 왼쪽으로 꺾어 유월리 수암마을 방향으로 이어간다. 갈림길에서 오른쪽 가입길을 따라가면 가입리 너물 마을이 나오는데, 서해랑길 33코스에서 너물 마을을 통과하여 함해만 해안으로 나간다.
"가입마을은 가입1리에 해당하는 마을로 무안에서는 유일하게 상주 주씨 집성촌이다. 가입이라는 지명은 더드리에서 비롯된다. 이 마을은 현경면에서 현경로를 따라 봉오재를 지나 해제면과 경계 지점 직전에 오른쪽으로 꺾어들면 만날 수 있다. 지명의 유래는 조금 더 들어가면 마을을 볼 수 있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더드리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 지금의 가입리이다. 지금도 주민들은 더드리라는 예전 이름을 사용하기도 한다.
마을은 뒷산이라 부르는 산을 주산으로 하고 오른쪽에 안산, 왼쪽에 앞 잔등을 두고 있으며 마을 앞으로는 함해만이 펼쳐져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이 마을에 다경면사무소가 있었다. 또한 이 마을 출신 주영욱(자-맹렬, 호-성헌. 1886-1922)이 다경면 초대 면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면사무소는 마을회관 아래에 있었다. 다경면이 현경면으로 바뀔 때 더드리도 가입리로 마을 이름이 바뀌었다. 백두뿔은 모래사장으로 형성된 부리이다." - 무안문화원
오른쪽 함해만 쪽으로 가서 찬란한 해돋이 광경을 감상하였다.
왼쪽은 해제면 유월리 수암마을 방향, 오른쪽은 현경면 가입리 너물 마을 방향이다. 서해랑길은 왼쪽 방향으로 이어진다.
홀통유원지 3.6km, 무안생태갯벌센터 2.7km 지점이다. 정면의 산은 안산으로 명당지로 알려져 있다.
무안의 주 농산물 중의 하나인 양배추밭이 펼쳐져 있고, 뒤쪽에 폐교된 수암국민학교 건물이 있다. 대안학교로 개교하였는가?
"가입마을 뒷산에 수암국민학교가 있었다. 주씨 문중에서 땅을 희사하여 건축된 이 학교는 1969년 현경초등학교 수암분교로 개교하여 1974년 수암국민학교로 승격하였으며 주민 수 감소로 1996년 해제초등학교로 통합되었다. 초창기에는 해제면 유월리 주민들이 학생들을 보내지 않아 작은 갈등도 있었다. 지금은 외지인이 폐교된 학교 부지를 불하받아 대안학교 개교를 준비하고 있다."
- 무안문화원
무안군 해제면 유월리 무안황토갯벌랜드가 맞은편 오른쪽에 보이고, 그 뒤에 용산 마을, 왼쪽 뒤에 유투 마을이 보인다. 중앙 뒤에 니성산이 솟아 있다. 서해랑길 33코스는 무안 황토갯벌랜드 앞에서 출발하여 바로 아래 현경면 가입리 함해만 해안을 거쳐 현경면 마산리로 이어진다. 해제면 유월리(柳月里)에 대한 소개를 무안문화원에서 옮겨온다.
"무안군 해제면 유월리(柳月里)는 니성산을 주산으로 각 마을이 자리 잡고 있으며, 해제면소재지로부터 현경면 방면으로 2㎞ 정도 떨어져 있다. 남으로 현경-해제를 잇는 24번 지방도로가 지나고 있다. 본래 유월리는 조선시대에는 함평현에 속했다가 조선조 말에는 목포부 해제면에 속한 지역이었다. 이후 1914년 오류동, 물암리, 월암리, 어은동을 합하여 무안군 해제면에 편입되었다. 오류와 월암의 이름을 따서 유월리라 불렀으며 지금은 오류, 용산, 물암, 언창, 월암, 유투 등 6개 마을로 이루어졌다. 유월리는 1980년대만 하여도 왕족인 전주 이씨 영풍군 후손 50여 세대가 거주하였다. 영풍군 후손은 전국적으로 107세대인데 이중 50여 세대가 이곳에 거주함으로써 가장 많은 세대가 거주한 곳이 되었다. 주산인 니성산에는 영풍군의 단과 배위 군부인 순천 박씨의 묘가 있으니, 전남에서는 유일하게 왕자의 단과 군부인 묘소가 있는 곳이다. 里의 주산인 니성산에는 여러 개의 금광이 있었으며 황금박쥐가 서식하고 있다." - 무안문화원
무안군 현경면 가입리 에덴교회 앞을 통과하여 현경면 가입리에서 해제면 유월리로 넘어간다. 밭에 양파를 재배하고 있다.
현경면 가입리에서 해제면 유월리로 넘어간다. 앞의 유월리 물암마을은 당난구지 마을과 한뿌리 마을로 이루어져 있는데, 앞에 보이는 마을은 당난구지 마을이다. 무안의 대표 농산물 양파를 재배하는 밭이 넓다.
"물암마을은 해제면소재지로부터 현경면 방면으로 3km 정도 떨어져 있으며 유월3리에 해당하는 마을이다. 당난구지와 한뿌리[一根] 마을로 이루어졌으며 24번 도로를 사이에 두고 자리 잡고 있다. 當難求地 또는 唐難求地는 24번 도로 오른쪽의 함해만 쪽으로 자리하고 있는 마을이다. 당난구지(當難求地)는 마땅히 어려움을 구할 수 있는 땅이라는 의미로 알려졌다. 먹고 살 수 있는 길지라는 것이다. 당난구지(唐難求地)는 당나라 사람이 이곳으로 피난을 와 구함을 받았다는 땅이다. 한국지명총람에는 동동구리, 동동고지라고도 부르며 난을 당해도 인명을 구할 수 있는 자리일 뿐 아니라 동서 양편이 북과 같이 생겼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했다. 마을의 위치도 함해만에 접해 있어 이름처럼 먹고 사는 것에 크게 어려움이 없어 보이는 지역이다.
이 마을은 현경면과 해제면의 경계지점에 있다. 또한 지리적으로 자라목 지형으로 동서로 바다가 접해 있어 육지면이 가장 좁은 지역이다. 해서 후일 운하로 함해만과 서해안이 연결될 가능성이 높은 지역이다. 또한 해제 사람들이 무안에 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기 때문에 마을 주민들의 행패도 심했다. 잿등을 포함한 주변에는 주막이 세 개나 있었다." - 무안문화원
해제면 유월리 물암마을은 함해만과 탄도만에 끼여 있다. 서해랑길은 유월3리 물암회관 앞을 거쳐 한뿌리 마을로 내려간다.
물암마을은 당난구지(當難求地, 마땅히 어려움을 구할 수 있는 땅) 마을과 한뿌리(一根) 마을로 이루어져 있는데, 길 건너 아랫마을이 한뿌리 마을이다. 앞에 탄도만 바다가 드넓게 펼쳐져 있다. 앞의 쉼터정자에서 아침을 먹고 출발한다.
"한뿌리는 서해안을 바라보고 위치해 있다. 예전에 마을 뒤에는 소나무가 우거진 잿등이라는 고개가 24번 도로를 가로질러 있었는데 그 잿등의 맥이 서해안을 향해 하나로 쭉 뻗어 있었다. 이 마을은 그 맥을 등지고 형성되었는데 한뿌리라는 마을 이름은 그곳에서 유래한 것이다. 다른 유래도 있다. 마을의 지형이 한 발로 찧는 방아 형국의 땅이어서 불려졌다는 것이다. 실지로 주민들이 방에 누워있을 때 ‘쿵 쿵’ 하는 방아 찧는 소리를 자주 듣는다고도 한다. 하지만 옆 마을인 기룡마을에서는 다르게 해석하고 있다. 기룡 마을 주민들이 물암 마을에 농지가 있어 경작을 해왔는데 물이 한 곳에 나온다 해서 한뿌리라 불렀다. 물암은 이 두 개의 마을이 합쳐서 이루어졌는데 이름의 유래는 좀 다르다. 원래는 한뿌리 마을 앞에 물바위가 있어 수암 또는 수바위라고 했으나 공식적으로 쓰이는 행정지역명은 한자어로 물암(勿岩)이다. ‘勿岩’에서 ‘水’가 아닌 ‘勿’이라 쓴 이유는 특별한 원인이 있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으며 단지 물암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음에 맞는 한자를 찾아 붙인 것으로 여겨진다." - 무안문화원
24코스 시점 11.5km, 종점 9.0km 지점이다. 서해랑길은 현해로를 건너 한뿌리(一根) 마을을 거쳐 탄도만 해안으로 나간다.
마을 쉼터정자에서 아침을 먹고 출발한다.
물암마을 버스정류소 옆에 마을 표석이 세워져 있다. 서해랑길은 길을 건너 한뿌리마을을 거쳐 탄도만 해안으로 나간다.
국도24호선 현해로를 건너 한뿌리(一根) 마을 입구에서 당난구지(當難求地) 마을을 뒤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