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탄강과 임진강 도보(다섯 번째-2)
(적성면자장리∼탄현면성동리, 2022년 11월 26일∼27일)
瓦也 정유순
오후에는 지난번에 들르지 못한 호로고루성과 경순왕릉을 보기 위해 장남교를 건넌다. 호로고루성은 연천군 장남면 원산리에 있고, 경순왕릉은 가까운 곳인 고량포리에 있다. 한국전쟁 이전에는 장단군(長湍郡)이었으나 휴전선으로 장단군이 나누어지면서 연천군이 된 장남면(長南面)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고남면(古南面)의 원당리(元堂里)와 장서면(長西面)의 관송리(貫松里), 반정리(伴程里)를 병합하여 <장남면>이 되었으며, 당시 장남면의 면소재지는 한국전쟁 전까지 고랑포리에 있었다.
<연천군 장남면 지도>
<장남교>
장남면 원당리에 있는 호로고루(瓠蘆古壘)는 임진강의 자연지형을 이용한 고구려의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요새(要塞)였다. ‘호로고루’라는 명칭은 이 일대의 임진강을 호로하(瓠蘆河)로 부르는데서 유래했다. 성의 둘레는 401m이며, 남쪽과 북쪽의 현무암 절벽을 성벽으로 이용하고 평야로 이어지는 동쪽에만 너비 40m, 높이 10m, 길이 90m 정도의 성벽을 쌓아 삼각형 모양의 성을 만들었다.
<연천 호로고루>
호로고루 동벽은 평지로 이어져 적의 침입이 쉬운 성의 동쪽부분을 방어하는 성벽으로, 고구려가 처음 쌓았으나 668년 고구려가 멸망하고 이어 이어진 나당전쟁(羅唐戰爭)에서 신라가 승리하여 신라의 것이 되었다. 신라는 고구려성벽을 그대로 둔 상태에서 성벽을 덧붙여 쌓는 방식으로 보수하였는데, 고구려성벽은 신라성벽에 가려져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없었으나 한국전쟁 당시 성벽의 윗부분과 남쪽 부분이 크게 훼손으로 노출되어 알려졌다.
<호로고루 동벽>
6세기 중엽 이후 한강유역에서 후퇴한 고구려는 7세기 후반까지 약 120여 년 동안 임진강을 남쪽 국경으로 삼으며, 임진강 하류부터 상류 쪽으로 덕진산성, 호로고루, 당포성 등 10여개의 고구려성을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하였다. 그중 호로고루는 고구려 평양과 백제 한성을 영결하는 간선도로상에 있을 뿐만 아니라 말을 타고 강을 건널 수 있는 길목을 지킬 수 있어 남쪽 국경방위에 중요한 기능을 수행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호로고루 정상>
<호로고루 서쪽 평지성>
지금까지 수차에 걸쳐 발굴조사결과 성 내부에서 건물지와 수혈유구(竪穴遺構), 대규모 석축집수지, 우물, 목책 등 다양한 유구와 연화문와당, 치미, 호자(虎子), 벼루 외에도 많은 양의 고구려 토기가 출토되었다. 특히 기와가 나온 것은 화려한 기와건물과 이에 상응한 상당히 높은 신분의 지휘관이 호로고루에 상주하고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호로고루>
호로고루 입구에는 북에서 온 광개토대왕릉비가 서있다. 이 비는 2002년 북한에 소재한 국보급 유물 및 벽화고분을 북한에서 모형으로 제작해 제공한 남북사회문화협력사업의 결과로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되었다. 당시 이 사업을 주도하며 이 비를 소장하고 있던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민화협)가 2015년 연천군에 기증함에 따라 고구려의 기상을 되새기고 남·북의 통일과 화합을 기원하는 뜻을 담아 고구려유적의 대표지인 이곳에 비를 세웠다.
<광개토대왕릉비 전면>
광개토대왕릉비는 아들인 장수왕이 영토를 확장한 부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당시 수도였던 국내성 동쪽(현 중국 길림성 집안현 통구지역)에 능과 함께 비를 세웠다. 비석은 불규칙한 직사각형 모양의 커다란 응회암으로 4면에 44행 1,775자의 비문을 새겼으며, 높이는 6.39m, 너비와 폭은 1.35∼2m다. 비문의 내용은 앞머리에 시조 주몽에서부터 광개토대왕까지 계보와 업적이 적혀 있고, 본문은 광개토대왕의 정복활동 등이 기록되어 있으며, 끝머리는 능을 지키는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 있다.
<광개토대왕릉비 후면>
호로고루 동벽 강변에는 솟대가 세워져 있고, 서쪽 끝 삼각지점에는 망향단이 설치되었다. 솟대는 나무나 돌로 만든 새를 장대나 돌기둥 위에 앉혀 마을 수호신으로 믿는 상징물로 삼한시대의 소도(蘇塗) 유풍으로 인식하나, 긴 장대 끝에 오리모양을 깎아 올려놓아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신간(神竿) 역할을 하여 화재, 질병 등 재앙을 막아 주는 마을의 수호신으로 모셨다. 통일바라기 망향단은 이곳이 접경지역으로 실향민을 위한 배려로 생각된다.
<솟대>
<망향단>
이어 발길은 가까이에 있는 경순왕릉으로 이동한다. 경순왕(敬順王)은 신라 제56대 왕(927∼935 재위)이며 마지막 왕인 비운의 왕으로 연천군 장남면 고량포리 휴전선 남방한계선 철책 아래에 영면(永眠)해 있다. 경순왕은 신라 제46대 문성왕의 6대손이며, 이찬 효종(孝宗)의 아들이다. 이름은 김부(金傅)로 927년 후백제 견훤의 습격을 받은 경애왕이 시해되고, 견훤의 비호를 받으며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다.
<신라경순왕릉 입구>
경순왕은 931년 왕건을 만난다. 견훤은 성난 맹수 같은데, 왕건은 부드럽고 법도가 있는 사람으로 느낀다. 견훤의 횡포에 질린 신라인들은 왕건의 나긋나긋한 말에 호감을 가진다. 궁예를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왕건은 지방 호족들의 사위가 되어 주변을 관리한다. 후백제의 잦은 침공과 지방의 분열로 국권은 바닥을 치고 있었다. 경순왕은 “전쟁으로 인해 백성을 더 이상 다치게 할 수는 없다”며 일부 신하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왕건에게 항복한다.
<경순왕릉>
큰아들 마의태자는 “나라의 존망에는 반드시 천명이 있으니 힘을 다하지 않고 천년 사직을 가벼이 남에게 넘겨줄 수 없다”며 항복을 극구 반대했으나, 경순왕은 국서(國書)를 왕건에게 보내 항복하고 재위 9년 만에 왕위에서 물러났다. 과연 최치원의 예언인 “계림(신라)은 고엽(枯葉)이요, 송악(고려)은 청송(靑松)”이라 했던 말이 맞아 떨어진 것인가? 마의태자는 통곡하며 용문산을 거쳐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용문산 은행나무 - 2020년2월>
경순왕은 왕건으로부터 정승공(正承公)에 봉해지며 왕건의 딸(낙랑공주)과 다시 혼인하고 녹1천 석과 함께 경주를 식읍지로 받는다. 항복한 지 43년 만인 978년(고려 경종 3)에 세상을 떠나 경순(敬順)이란 시호를 받고 이곳에 묻혔다. 행방을 모르다가 조선 영조 때 김성운 등이 발견한 비에서 “시호 경순왕을 왕의 예우로 장단 옛 고을의 남쪽 8리에 장사지내다(諡敬順以王禮葬于長湍古府南八里)”라는 명문 때문에 800여년 만에 묘가 밝혀졌다.
<경순왕릉>
지금의 능에 세워진 <신라 경순왕의 능(新羅敬順王之陵)>비는 1747년(조선 영조 23)에 세워져 있어 능의 석조물도 이때 조성된 것 같다. 능(陵)이 소박하긴 하나 신라 왕릉에는 없는 곡장이 봉분을 감싸고 있으며, 봉분의 망주석과 장명등 등 석물은 조선시대 만들어진 것 같고, 비문(碑文)은 그동안 방치되어 마모가 심해 판독이 거의 불가능하다. 1975년 사적으로 지정되었지만 패망한 나라의 왕의 모습은 사람들의 발길이 뜸할 수밖에 없는 남방한계선 철조망 아래 망국의 한을 안은 채 쓸쓸이 누워있다.
<경순왕릉비>
참고로 경순왕릉이 있는 고량포구는 개성에서 자전거로 1시간 정도 밖에 안 되는 곳으로 한국전쟁 전까지는 한양(서울)과 개성의 물자가 교류되는 임진강의 최대 교역항이었다. 당시 경기도 연천, 강원도 철원, 황해도 금천 등 인근지역에서 생산되는 농·특산물의 집산지였으며, 상권이 왕성할 때는 화신백화점 분점이 있을 정도로 대규모 상업지역 이었다. 그 화려했던 고량포구도 파주 적성면과 연천 장남면을 잇는 장남교가 개통되면서 흔적 없이 사라졌다.
<1930년대 고량포구>
<장남교와 감악산 - 2017년2월>
다시 장남교를 건너 화석정 지나 문산읍 임진리 임진강으로 나간다. 임진리(臨津里)는 옛날 임진나루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문산읍(汶山邑)은 원래 파주목 칠정면(七井面)으로 기록되어 있었으나 1910년에 임진강의 이름을 따서 임진면(臨津面)으로 개칭되었다. 1973년에 임진면이 읍으로 승격되면서 면사무소가 위치한 문산의 이름을 따서 문산읍(汶山邑)이 되었다. 1996년 파주군이 시로 승격됨에 따라 현재는 파주시 문산읍이다.
<문산읍 지도>
임진강 건너 동쪽으로는 개성의 송악산이 오늘 따라 선명하다. 송악산(松嶽山, 489m)은 고려의 도읍인 송도(松都)의 진산으로 송악이라는 이름은 소나무를 심어 ‘그 명(名)이 체(體)를 표현한다.’는 풍수사상에서 유래한다. 산 전체가 주로 화강암의 큰 바위로 되어 있으며, 기암괴석·활엽수림의 조화가 뛰어나다고 한다. 송악산(松嶽山)은 곡령(鵠嶺)·문숭산(文崧山)·부소갑(扶蘇岬)이라고도 불리고, 경기 5악 중의 하나다.
<개성 송악산>
https://blog.naver.com/waya555/222948231062
첫댓글 잘보고 갑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