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의 건배사 適中而止(적중이지·술 자리 중간에 적당히 그친다), 정조의 건배사 不醉無歸(불취무귀·취하지 않으면 돌려보내지 않는다)
세종의 '적중이지'… 술자리에서 절제력 있어 신하들의 충언도 제지 않고 끝까지 들어
1792년 어느 봄날이었다. 정조는 과거시험에 갓 합격한 성균관 유생들을 창덕궁으로 초대했다.
봄비가 내리는 가운데 창덕궁의 희정당에 모인 젊은 유생들을 당황하게 한 것은 희정당 한쪽에 가득 쌓인 술통들이었다. 전날 50대1의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합격한 것을 축하하는 자리라는 얘긴 들었지만, 이런 분위기에서 임금을 만날 줄은 몰랐다. 규장각과 승정원, 그리고 호조에 있는 술까지 모두 모아 놓은 상태에서 정조가 입을 열었다. "옛사람들은 술로 취하게 한 뒤에 그 사람의 덕을 살펴본다고 하였다. 오늘 취하지 않은 사람은 결코 돌려보내지 않을 것이니, 모름지기 각자 양껏 마시도록 하라."(정조실록 16/3/2).
정조의 술자리
'불취무귀(不醉無歸),' 즉 '취하지 않은 사람은 돌려보내지 않는다'는 정조의 이 말은 사실 심각한 붕당 간 대립을 완화해 보려는 고육지책이었다.
'당색이 다르면 조문(弔問)도 하지 않는다'는 사관의 기록처럼, 몇 차례의 환국(換局) 정치를 겪으면서 붕당들 사이의 불신은 극에 달하고 있었다. 주요 국책 사업이 무산되는 일도 빈번했다. 어떤 식으로든 갈라진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야 한다는 게 정조의 판단이었고, 술자리는 그렇게 해서 마련된 것이었다.
정조는 이날 노론의 신기에게 행배(行杯), 즉 술잔 돌리는 일을 맡겼다. 술잔은 규장각의 신하들이 사용하는 팔환은배(八環銀盃)를 사용하도록 하되 나이 든 사람은 작은 잔을, 젊은이는 큰 잔을 사용하게 했다. 술이 골고루 잘 돌아가는지를 감독하는 것은 소론의 서영보 등의 몫이었다.
한참 술잔이 돌던 중에 소론의 이만수가 정조에게 말했다. "이번에 합격한 오태증은 대제학 오도일의 후손인데, 집안 대대로 술을 잘 마십니다. 벌써 다섯 잔째인데도 전혀 취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정조는 껄껄 웃으며 "이곳 희정당은 오도일이 술에 취해 쓰러진 곳이다. 그의 할아버지를 생각한다면 어찌 술잔을 사양하겠는가. 큰 잔으로 연속해서 주어라."
결국 다섯 잔을 계속 마신 소론의 오태증은 술에 취해 쓰러지고 말았다. 정조는 그를 편히 눕게 한 다음 "술에 취해 누워 있은들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라며 그를 물리치려는 신하들을 만류했다.
국왕의 악취미처럼 보일 수도 있는 이 기록은, 사실 정조의 인사 탕평책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여러 붕당의 젊은 유생들을 한자리에 모이게 하여 왕이 친히 내린 술을 마시고 서로 어우러지는 계기를 만들려 했던 것이다.
세종의 술자리
그러나 이 일로 인해 붕당 간에 협력 분위기가 만들어진 것 같지는 않다. 그 후에도 대립과 알력은 여전했기 때문이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나는 정조가 희정당 술자리로 끝내지 않고, 다시 모여서 '세종식 술 마시기'를 했으면 어땠을까 생각해본다. '세종식 술 마시기'는 한마디로 '그칠 지(止)'의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태종에 따르면 세종은 술을 마시되, '중간에 적당히 그치는(適中而止)' 절제력이 있었다(태종실록 18/6/3). 양녕대군처럼 지나치게(過) 술을 마셔서 실수를 범하지도 않고, 효령대군처럼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해서 외국 사신들을 맞이하는 자리에 부족(不足)하지도 않은 '중용의 술 마시기'를 했다는 이야기이다.
세종은 즉위한 다음에 국정 운영도 '적중이지' 방식으로 하곤 했다. 어전회의에서 그는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라고 하여 신하들로 하여금 이야기하게 한 다음 중간에 끼어들고 싶은 유혹을 참고(止) 기다리곤 했다. 신하들이 충분히 마음속 이야기를 꺼내 놓으면 그제야 나서서 "경의 말이 참으로 아름답소"라고 하면서 좋은 의견에 힘을 실어주었다. 적절한 시점까지 기다렸다가 좋은 의견에 힘을 실어주는 '적중이지'의 화법 덕분에 그의 어전회의는 많은 창발적 의견이 쏟아져 나오는 아이디어의 산실이 되었다.
재위 중반에 공법이라는 세제 개혁을 추진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전국적인 설문조사 결과 '다수가 찬성'이었지만 밀어붙이지 않았고, 고위 신료들의 끈질긴 반대에도 중도에 포기하지도 않았다. 밀어붙임(過)과 중도 포기(不足) 사이에서 일정 기간의 기다림의 시간을 가져서 반대자들까지도 수긍할 수 있는 제3의 대안을 만들어냈다.
정조 역시 수원화성을 건설할 때 가뭄이 들고 반대 여론이 높아지자 중간에 기다리는 시간을 가졌고, 그것이 오히려 애초 계획보다 훨씬 기간을 단축해서 완성하는 힘이 되었다.
나는 생각해 본다. 정조가 만약 젊은 유생들을 모아 놓고 그들의 창의적 생각을 다 말해보라며 귀를 기울였더라면 어땠을까. 경연(經筵)이라는 세미나식 국정 회의를 개최해, 왕이 신하들을 가르치려 하지 않고 반대로 듣는 지혜를 가졌더라면 그의 시대가 얼마나 더 융성했을 것인가.
아무래도 올가을 술자리에서는 정조식 건배사인 '불취무귀(不醉無歸)'보다는 세종식 건배사인 '적중이지(適中而止)'를 해 보면 어떨까 싶다.
- 기고자 : 박현모 한국형리더십개발원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