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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 강해(32)
요담의 우화
본문 : 삿 9:7-21
어제 새벽에 말씀드린 대로
사단은 은혜(승리)의 뒷자리를 노립니다.
승리의 공상을 논할 때
사단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기드온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미디안 연합군과의 전쟁에서 이긴 것은
역사적으로 기록할만한 대단한 사건입니다.
문제는 승리 이후입니다.
사단은 그 뒷자리를 노리고
기드온을 공격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기드온과 그의 자손들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처음에는 그 유혹을 물리치는 듯 보였으나
그의 마음이 그만 흔들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 대신 왕의 자리에 오르는 것은
거절하였으나 왕처럼 대접 받기를 원했습니다.
그 마음이 황금 에봇을
만드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그 결과 40년 동안
그 땅이 평온하였지만(8:28)...
역설적으로 그 시간은 점점
하나님과 멀어지는 시간이었습니다.
<아비멜렉의 음모>...
그 대표적인 예가
많은 처첩을 둔 것이었습니다.
많은 유력한 가문과
사돈관계를 맺으면서 아들만
70명을 두었습니다.
물론 첩의 자식은 숫자에 넣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숫자에 들지 아니한
첩의 자식 가운데 ‘아비멜렉’이란
아들이 있었습니다.
세겜에 있는 첩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입니다.
이 ‘아비멜렉’이 못된 음모를 꾸몄습니다.
세겜의 외가 친척들을 찾아가
“기드온의 아들 70명이
다 너희를 다스리는 것이 좋으냐
아니면 한 사람이 다스리는 것이
좋으냐?”라고 묻고는,...
“나는 너희와 골육임을 기억하라”는
강력한 유혹의 말을 던집니다.
귀가 솔깃할만한 제안입니다.
‘아비멜렉’이 왕이 되기만 한다면
자신들은 순식간에 왕족이 되는 것입니다.
받을 권세와 이득이
머리에 그려지는 것입니다.
외가 친척들은 세겜 사람들이
귀에 이 말을 전하고 다녔고.....,
결국 세겜 사람들의 마음이
‘아비멜렉’에게로 기울었습니다.
“그는 우리 형제라”라고
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세겜 사람들은 ‘바알브릿 신전에서
은 칠십 개를 내어’ 그에게 주었습니다.
불법 정치 자금을 제공한 것입니다.
‘아비멜렉’은 이 돈으로
‘방탕하고 경박한’ 사람들을
용병으로 고용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기드온의 집 오브라로 돌아가
70명의 배다른 형제들을 모이게 하고
한 바위에서 모두 죽였습니다.
단 한 사람 막내아들 요담만이
몸을 숨겨 살아남았습니다.
이후 세겜 사람들은
‘아비멜렉’을 왕으로 선언했습니다(6절).
‘아비멜렉’은 아버지 기드온도
오르지 않았던 왕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영광의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왕이신 하나님을 배반하는
패역의 자리였습니다.
악한 자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할 뿐이었습니다.
안타깝지만 이 모든 원인이 한 때
믿음의 영웅이었던 기드온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기드온이 황금 에봇을 만들고
그것을 우상처럼 섬기는 것을 방치한데서
이 모든 비극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
빛나는 성공보다 중요한 것은
그 성공 뒤의 삶입니다.
성공보다는 그 뒤의 삶의 자리가
더 아름다운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요담이 그리심 산에 오르다>
오늘 본문은 가까스로 살아남은
요담이 우화를 통하여 세겜 사람들과
아비멜렉을 비판하는 내용입니다.
7절 “사람들이 요담 에게
그 일을 알리매 요담 이 그리심 산 꼭대기로
가서 서서 그의 목소리를 높여
그들에게 외쳐 이르되
세겜 사람들아 내 말을 들으라
그리하여야 하나님이
너희의 말을 들으시리라.”
요담은 아비멜렉을 피해
그리심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요담이 그리심 산으로
올라간 것은 언뜻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그리심 산은 축복을 선포하는
산이었기 때문입니다.
세겜은 두 산 사이에 있는 도시입니다.
북동쪽에 에발 산이 있고,
남서쪽에 그리심 산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가나안 땅에 들어가거든
“그리심 선에서 축복하고,
에발 산에서 저주를 선포하라”(신11:29)고 말씀하셨고,
실제로 여호수아가 그 일을 실행했습니다(수8:33).
지금 요담은 세겜 사람들과
아비멜렉을 축복하려고 올라간 것이 아닙니다.
저주하려 함입니다.
그런데 왜 에발 산이 아닌
그리심 산에 올라갔을까요?
어떤 주석가는
그리심 산에서 외치는 소리는
축복의 내용일 것이라고 기대하며
귀를 기울였는데
저주가 선포될 때 듣는 사람들이
더 충격적으로 받아들이게 되기에
그 산을 선택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미 하나님의 말씀이
무너진 시대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해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모세를 통해 말씀하셨던
두 산의 의미마저 희미해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즉 저주를 위해서는 에발 산에
올라야 한다는 사실조차
몰랐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무너진 시대
상황을 잘 보여주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호세아를 통해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호4:6)라고
탄식하신 바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해야 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모든 문제에 직접적인 답을
주지는 않지만 ...
우리가 가야 할 분명한 방향과
원리를 제시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늘 가까이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분명한 뜻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얻게 됩니다.
<요담의 우화>
그러면 그리심 산에 올라
한 요담의 우화는 어떤 내용입니까?
어느 날 어느 숲속에서
나무들이 자신들의 왕을 세우기로 하였습니다.
먼저 그들은 감람나무를 찾아가서
‘우리의 왕이 되어 주십시오’ 하고
요청하였습니다.
<8-9절>
8절 “하루는 나무들이 나가서
기름을 부어 자신들 위에 왕으로 삼으려 하여
감람나무에게 이르되
너는 우리 위에 왕이 되라 하매
9절 감람나무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게 있는 나의 기름은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나니
내가 어찌 그것을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우쭐대리요 한지라.”
이 요청을 받은 감람나무는
“내게 있는 나의 기름은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나니
내가 어찌 그것을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우쭐대리요”하면서 사양했습니다.
그러자 나무들은 두 번째로
무화과나무를 찾아가서
‘우리의 왕이 되어 주십시오’ 하고 요청하였습니다.
<10-11절>
10절 “나무들이 또 무화과나무에게 이르되
너는 와서 우리 위에 왕이 되라 하매
11절 무화과나무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의 단 것과 나의 아름다운 열매를
내가 어찌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우쭐대리요 한지라.”
이 요청을 받은 무화과나무는
“나의 단 것과 나의 아름다운 열매를
내가 어찌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우쭐대리요”하면서
사양했습니다.
나무들은 세 번째로 포도나무를 찾아가서
‘우리의 왕이 되어 주십시오’ 하고
요청하였습니다.
<12-13절>
12절 “나무들이 또 포도나무에게 이르되
너는 와서 우리 위에 왕이 되라 하매
13절 포도나무가 그들에게 이르되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내 포도주를 내가 어찌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우쭐대리요 한지라.”
포도나무 역시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내 포도주를 내가 어찌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우쭐대리요”하면서 사양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찾아간 것이
가시나무였습니다.
<14-15절>
14절 “이에 모든 나무가 가시나무에게 이르되
너는 와서 우리 위에 왕이 되라 하매
15절 가시나무가 나무들에게 이르되
만일 너희가 참으로 내게 기름을 부어
너희 위에 왕으로 삼겠거든
와서 내 그늘에 피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불이 가시나무에서 나와서
레바논의 백향목을 사를 것이니라
하였느니라.”
그런데 가시나무는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아무런 유익을 주지도 못하면서....
아니 가시를 통해
온갖 고통을 주면서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하고.....
“만일 너희가 참으로 내게 기름을 부어
너희 위에 왕으로 삼겠거든 와서
내 그늘에 피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불이 가시나무에서 나와서
레바논의 백향목을 사를 것이니라”....
라며 참으로 교만한 말을 합니다.
아니 가시나무에 무슨 그늘이 있습니까?
그리로 피하면 가시에 찔릴 뿐입니다.
그럼에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불이 가시나무에서 나와서
레바논의 백향목을 살라버리겠다’고
협박을 합니다.
레바논의 백향목은 팔레스타인에서
가장 크고 고상한 나무입니다.
사실 가시나무와는 비교대상도 아닙니다.
격이 다릅니다.
진짜 왕이 되어야 할 나무입니다.
그럼에도 가시나무는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하고
스스로 교만해져 .....
가장 고상한 나무마저 불살라
버리겠다고 위협을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
앞의 세 나무, 곧 감람나무와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는....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주신 소명,
곧 자신의 존재이유(목적의식)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에 충실한 것이 .....
나무들 위에 군림하고 우쭐대는 것보다
더 가치 있고 소중하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반면에 가시나무는 어떻습니까?
일말의 소명감이 보이지 않습니다.
가시나무라고 해서
전혀 무익한 나무는 아닙니다.
비록 큰 재목으로 쓰임 받지는 못하지만,
귀한 열매를 맺지는 못하지만
마지막 자신의 몸을 불살라
어둠을 밝힐 수는 있습니다.
저는 창3장을 읽다가 하나님께 쓰임 받은
한 나무를 기억합니다.
바로 가시떨기 나무입니다.
광야에서 40면 동안 모세가 양치기로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떨기나무 가운데 임재 하셨습니다.
<출3:1-5>
1절 “모세가 그의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 떼를 치더니
그 떼를 광야 서쪽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2절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3절 이에 모세가 이르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니 그 때에
4절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5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가시나무라고 해서 저주받은 나무는 아닙니다.
그 나무가 자신을 살라
마지막 소명을 다할 때
하나님은 그 가운데 임재 하셨습니다.
나무들이 와서 왕이 되어 달라고 했을 때,...
“안 돼 내 사명은 마지막에 불에 타서
어둠을 밝히고 사람들을 따뜻하게
해 주는 거야”라고 말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가시나무는 오히려
열등감과 적개심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자신을 왕으로 삼지 않으면
‘불이 가시에서 나와서 레바논의 백향목을
살라버리겠다’고 ..
협박을 한 것에서 잘 드러납니다.
자신보다 잘난 것들에 대한
열등감과 적개심으로 가득합니다.
가시나무의 열등감은 끝없이 높아지려는
욕심으로 표출되었고,
결국 자기뿐만 아니라 ...
다른 모든 것들도 함께 망하게 하는
불행을 가져오는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우화에 담긴 뜻>.....
요담이 이 우화를 통해
말하려는 것은 무엇입니까?
나무에 대해 말하려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세겜 사람들과 아비멜렉을 책망하기 위해
우화를 빌려 말한 것입니다.
즉 세겜 사람들과 아비멜렉은
가시나무와 같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 구체적인 책망의 내용은
16-18절에서 구체적으로 언급합니다.
<16-18절>
16절 “이제 너희가 아비멜렉을 세워
왕으로 삼았으니 너희가 행한 것이
과연 진실하고 의로우냐 이것이 여룹바알과
그의 집을 선대함이냐
이것이 그의 손이 행한 대로
그에게 보답함이냐
17절 우리 아버지가 전에 죽음을 무릅쓰고
너희를 위하여 싸워 미디안의 손에서
너희를 건져냈거늘
18절 너희가 오늘 일어나
우리 아버지의 집을 쳐서
그의 아들 칠십 명을 한 바위 위에서 죽이고
그의 여종의 아들 아비멜렉이
너희 형제가 된다고
그를 세워 세겜 사람들 위에 왕으로 삼았도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해 보아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요담이 세겜 사람들과
아비멜렉을 책망하는 기준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16절a “이제 너희가
아비멜렉을 세워 왕으로 삼았으니
너희가 행한 것이 과연 진실하고 의로우냐...”
어떤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말하려면 명확한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요담은 그 기준을 명확하게 제시합니다.
“너희가 행한 것이 과연
진실하고 의로우냐”는 것입니다.
이 질문은 우리 모두가
훗날 하나님께 들을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물어야 할 질문입니다.
내가 하는 일이 ‘진실한지’,
‘의로운지’ 항상 물어야 합니다.
비록 내게 손해가 되더라도 말입니다.
그러나 잠시는 내게 손해가 되는 것 같아도
결국은 내 삶을 성공으로 이끄는
지름길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비결입니다.
잠시 받는 고통이나 손해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은 분명히 약속합니다.
‘진실하고 의로운 자’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임한다는 사실을 약속하십니다.
시62:12(다윗) “주여 인자함은 주께 속하오니
주께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심이니이다.”
호4:9b(호세아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
“...내가 그들의 행실대로 벌하며
그들의 행위대로 갚으리라.”
마16:27(예수님)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사람들의 평가나
눈앞의 이익에 따라 판단할 것이 아니라 항상...
하나님의 진리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을 기억하며
‘진실하고 의로운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요담의 저주>
요담은 세겜 사람들과
아비멜렉의 최후를 예언합니다.
<19-21절>
19절 “만일 너희가 오늘 여룹바알과
그의 집을 대접한 것이 진실하고
의로운 일이면 너희가 아비멜렉으로 말미암아
기뻐할 것이요 아비멜렉도 너희로 말미암아
기뻐하려니와
20절 그렇지 아니하면
아비멜렉에게서 불이 나와서
세겜 사람들과 밀로의 집을 사를 것이요
세겜 사람들과 밀로의 집에서도
불이 나와 아비멜렉을 사를 것이니라 하고
21절 요담이 그의 형제 아비멜렉 앞에서
도망하여 피해서 브엘로 가서
거기에 거주하니라.”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은
서로 죽이고 죽이다 종래에는
공멸의 길을 갈 것임을 예언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거짓되고
불의한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이 예언은 삼년 후 성취되었습니다
(57절 “또 세겜 사람들의 모든 악행을
하나님이 그들의 머리에 갚으셨으니
여룹바알의 아들 요담의 저주가
그들에게 응하니라.”).
성도님들!
부메랑을 아시지요.
던지면 다시 돌아오는 놀이 기구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부메랑과 같습니다.
진실함을 던지면 구원과 축복으로 돌아옵니다.
불의함을 던지면 저주와 파멸로 돌아옵니다.
예수님은 “칼을 가지는 자는
칼로 망한다”(마26:52)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6:7)고 말씀하셨습니다.
<맺는 말씀>
오늘 요담의 우화를 통하여
우리는 중요한 교훈을 얻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소명을 깨닫고
그 소명대로 사는 것이 얼마나
복된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삶의 목적을 발견하고
그 뜻을 이루는 삶이 얼마나 복된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주신 소명(은사)은
다 다르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떤 은사를 받았느냐가 아니라
그 받은 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
요담이 말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이 세상에서 성공하고 잘되는 것은
얼마나 머리가 좋고 수단이 많으냐에
달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소명을 깨닫고,
그 소명을 이루기 위해 얼마나 충실한
삶을 사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소명을 깨닫고
그 소명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삶이 진정으로 성공한 삶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고
축복하시는 삶입니다.
바라기는 저와 성도님들의
삶이 감람나무와 같이, 무화과나무와 같이,
포도나무와 같이...
자신에 주어진 소명을 제대로 깨달아
그 소명을 완수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그것으로 참된 만족과 기쁨을 누리시는
삶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금산교회 김화준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