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15장7절)
이 기도는 우리가 필요한 내용을 나열하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하는 기도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깁니다.
옛날 아르헨티나의 한 목사가 천국에는 쓰레기와
같이 기도가 쌓여 있다고 잘 못된 기도를 비꼰 적이 있습니다.
그가 기도가 뭔지에 대해 제대로 쓴 글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지적에는 동의합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구하라고
하신 이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의 대언이란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면,
그 이름이 우리 안에 거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이름을 주셨습니다(엡3:15)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면 생명의 진액이 우리에게 오고 또 옵니다.
주님의 성분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말씀을 그대로 대언해 버리라는 말입니다.
빛이 다가오면 빛, 생명이 다가오면 생명, 사랑이 다가오면 사랑을 구하라는 말이죠.
그러면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에 참 기도에 대해서 나오는 곳이 많은데 이 기도를 우리가 배워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 안에 내가 먼저 거하는 것이 순서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9절)
주의 사랑 안에 거하라고 하십니다.
이는 자식들이 부모가 해 주는 대로 순순히 받는 것과 같습니다.
그 분의 뜻을 받들어 그 안에 거하면서 그대로 받고 그대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주님의 공급을 받아서 그대로 표현하는 것 이것이 바로 가지의 운명입니다.
나무와 가지를 잘라보면 그 조직이 같습니다.
작은 가지도 큰 나무와 조직이 똑같은데 조직이 같아야 진액이 흐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머물고 있으려면 그건 영적인 싸움입니다.
생각하는 것이나 말하는 것이나 아니면 뜻을 세우는 것이나
계획하는 것이나 방법이나 그 조직이 주님과 같아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너희가 내 말 안에 거하는 것’의 의미입니다.
그와 같은 상태에서 무엇이든지 구하라 하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주와 한 영이 되어 조직과 성분이 같아지면
주께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하심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그 분 안에서 조직과 성분이 같아지길 힘써야 합니다.
바로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르는 일입니다.
이는 바울과 같이 날마다 죽노라 하는 산 순교입니다(고전15:31, 계2:10)
신앙이 좋아지면 좋아질수록 길길이 뛰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닮아갑니다.
조직이 주님과 닮아갑니다. 모든 구조가 주님을 닮아갑니다.
나도 모르게 그분께 설복되고, 항복되어 흡수 되어 갑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은 진리의 성령 안에서 주와 한 영이 되어 섞는 겁니다.
이렇게 주와 연합이 되어 섞이는 것이 바로 제대로 된 신앙입니다.
그런데 나무다운 역할은 나무 밑동이 하는 것이 아니라 가지가 하는 겁니다.
연결시키고 공급하시는 내면적인 일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 하시지만
거기에 붙어 조직과 성분을 일치시키는 그 역할은 가지가 다 해야 합니다.
그 역할이 바로 열매 맺는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수고인데, 이것을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내 속에 있는 그리스도께서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말미암아 영광을 주님이 받으십니다.
그 순간 열매 맺는 가지도 참으로 제대로 됐어 하고 영광을 같이 받습니다.
그 때에 주님의 기쁨이 흘러들어와 주와 같이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 의의 병기로 드리는 것입니다.
믿음은 나무로부터 가지가 공급을 받는 것이며 삶은 그 결과입니다.
여기서의 믿음은 나무로부터 공급을 받을 줄 아는 믿음입니다.
산 자의 하나님이란 믿음으로 생명을 얻으므로 산 자의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상태에서 사는 것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바로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우리를 향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하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믿음으로 살아라 하는 말은 맞는 말 같으나 잘못된 말입니다.
야고보서의 행함은 히브리서를 통해서 원리를 익혀 아버지로부터
공급을 받을 줄 아는 사람이 행함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어렵습니까?
그래서 그 행함을 보고, 행함이 없는 그 자체는 믿음이 죽은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죽은 믿음이란 행하려고 하는 열심의 유무가 아니라 하나님께
연결이 안 되어있는 것 아니냐 이 말입니다. 마른 가지가 아니냐고 묻는 겁니다.
주님으로부터 출발한 산 믿음이 아니지 않느냐는 말씀인 겁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다음에 야고보서가 기록이 되었습니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요15:10)
계명을 지켜 하시는 이 계명은 하나님의 뜻을 총괄한 어휘입니다.
그래서 그 계명의 궁극은 바로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입니다.
계명을 무조건 율법이라 생각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전체 뜻을 계명이라 생각해야 합니다.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하나님의 뜻이 바로 계명입니다.
그래서 새 계명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된다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시는 결과는 먼저
하나님께 기쁨이 되고 그 다음에 우리에게도 기쁨이 되어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교제(코이노니아)가 된 결과는
열매인데 이 열매가 지체의 역할로서 바로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 됩니다.
그 결과는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요15:11)
완전히 조직이 같아졌다 이 말입니다. 주님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 됩니다.
이 기쁨은 나에게도 주님께서 명하신 그 결과가 나타났다는 확증입니다.
주님이 공급하시는 생명의 진액의 그 효력이 나에게 나타나는 기쁨입니다.
우리가 열매를 맺으면 주님의 말씀이 이루어진다는 기쁨이 있습니다.
나무와 나무 가지의 조직일체가 그 분의 기준에 맞추는 것,
그분의 규격에 맞추는 그것이 바로 '내 말에 거하고, 내 사랑 안에 거하라'
이 말씀의 의미 전부입니다.
요15장 1절~11절 까지는 나무와 가지,
주님과 나와의 관계, 바로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라는 말씀입니다.
주님 안에서 주님의 조직과 맞추면 주님이 내게 사랑이 되면, 나도 사랑이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포도나무와 가지의 상태를 잘 만들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걸 못해요. 그래서 이렇게 하기 위해서
진리의 복음을 묵상하고 자신에게 적용되도록 기도를 많이 해야 합니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주님을 사랑하게 되면 애타게 부르짖게 됩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주님을 사랑하는 거기까지가 중요합니다.
그래야 사랑하고, 관용하고, 긍휼히 여기고 섬기며 살아지게 됩니다.
이런 영적시스템을 구축하지 않고 바로 남을 섬기려고 하니까
억지 춘향이가 된단 말입니다.
춘향은 이도령을 사랑해서 옥에 갇히게 됩니다,
암행어사인 이도령에게 어떤 대가를 바라고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암행어사를 만나서 결혼하여 출세하려고 억지로 감옥에 갇힌 것이 아니죠.
요즘 말로 하면 춘향이는 된장녀가 아닙니다.
춘향이가 감옥에 갇힌 것은 이몽룡이를 사랑하기 때문에,
죽기까지 이몽룡을 사랑하기 때문에,
갖은 수모와 고난을 이길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억지춘향과 같이 또는 고양이가 쥐 생각하듯 주님 사랑해요 하는 게 아닙니다.
내가 그 분 안에서 그 분이 공급하시는 생명에 의해 그분과 조직이
같아져 운명이 결정이 되었기 때문에, 누가 나를 인정해주던,
인정해주지 않던, 내가 주를 사랑 한다 이 말입니다.
어휴... 여기까지 치닫고 나니 울컥하고 눈물이 납니다.
내게 아무런 보상이 없다 할지라도 내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간절하게 고백하는 이 자리까지 이끄신 하나님 아버지를 찬양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여 그 분 안에 머물게 하시는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합니다.
할렐루야 삼위 하나님께서 영원토록 영광을 받으소서!!
첫댓글 아멘!
할렐루야!
좋은 신앙 글 감사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