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글 본문내용
|
다음검색
金泉 方面 文化探訪記 후당 전보규 아침 8시 30분에 반월당에서 관광버스가 출발하여 청라언덕과 성서 홈플러스에서 몇 명 더 태운 44명의 회원은 서대구 톨 게이트(toll gate) 빠져나와 동명휴게소에서 잠시 쉬고는 첫 기착지인 김천 직지문화공원을 향해 가는 마음은 가벼웠다. 김천(金泉)은 예부터 금(金)의 주산지로 이름이 나서 금천(金泉), 금산(金山), 금릉(金陵)으로 불렸다. 옛날에 금을 캐던 고성산 금광(현, 과하천 터)에 물이 고이면서 폐광되었고, 훗날 우물로 사용하면서 「금을 캐던 우물」이라는 뜻으로 금천(金泉)이라고 불렀다. 금천의 물은 차고 맑아 술을 담아 먹었는데 이것이 곧 이 고장을 대표하는 과하주(過夏酒)이다. 그 후부터 사람들은 금천을 일러 과하천(過夏川), 과주샘이 했고, 고려 초에는 이 고장을 대표하는 공동우물이었던 금천샘 아래에 역(驛)이 들어서자 역의 이름도 금천역이라 하였다. 금천역이 김천역으로 바뀐 것은 병자호란으로 조선을 짓밟은 청나라가 금나라의 후예라서 하여 이 고장의 선비들이 금(金)을 김(金)으로 바꾸어 부르다가 조선 후기 역 주변에 시장이 번성하여 인구가 급격히 늘어나면서 삼산이수(三山二水 : 황악산, 대덕산, 금오산, 직지천, 감천)의 고장으로 대표하는 지명인 김천으로 굳어졌다고 한다. 이번 답사에 참여한 회원 중에는 김천 출신이거나 이곳에 근무한 적이 있는 분들도 함께하여 그 의미가 더 깊다. 1. 김천 직지문화공원 김천 하면 떠오른 것은 천년 고찰인 직지사와 직지문화공원일 것이다. 대구와 가까운 거리라서 모두 한두 번은 다녀갔을 것이나 온고지신(溫故知新)이라고 하더니 이곳을 찾을 때마다 새롭게 느껴짐을 숨길 수 없었다. 직지문화공원은 전통 사찰인 직지사 주변의 무질서한 개발 행위를 막고, 절과 연계한 문화관광의 자원화를 위해 2001년 9월 21일 경상북도 고시(告示)하여 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예전에는 아카시아와 가시덩굴이 험한 계곡 구릉 21,400여 평을 2004년 4월까지 3여 년에 걸쳐 총사업비 160억 원을 투입해 가히 상전벽해(桑田碧海)라 할만큼 변해 지금은 경북의 대표적인 공원으로 조성되었다. 직지사 경내의 맑은 물을 그대로 유입되어 공원 내로 흐르는 작은 계곡과 각기 다른 모양의 정자와 파라고(야외 쉼터) 등 각종 편의시설과 유명한 조각가들의 작품 50점도 설치하였다. 특히 인공 폭포와 8각정, 소나무를 비롯한 고목류와 많은 수목과 관목류 초 목류가 심겨 있어 계절마다 색다른 아름다움을 느끼길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개장 초기에는 김천시에서 직접 운영하다가 2021년부터는 김천시시설관리공단에서 위탁 관리하고 있다. 직지문화공원 사업은 박팔용(朴八龍) 전 시장이 3연임 하면서 의욕적인 추진하면서 막대한 자본과 우수한 장비가 뛰어난 기획의 손길로 조경과 건축이 한대 아우러져 아름답고 조성된 공원이며, 김천 지방의 마을마다 크고 작은 공원을 수백 곳을 조성하여 쾌적한 환경으로 바꾸는 데 크게 공헌하기도 하였다. 여기서 후임 박보생(朴寶生) 3선 시장도 차츰 범위를 넓혀가며 새로운 콘텐츠를 개발하고 각종 기념관과 함께 소공원화를 꾀함으로써 직지문화공원의 진가를 발휘할 수 있었다. 이 공원의 압권은 중앙음악 조형 분수대로 음악에 맞춰 연출되는 웅장한 음향과 함께 야간 20분씩 펼쳐지는 화려한 분수 쇼는 문화공원의 대표하는 시설이다. 예전에는 낮에도 음악 분수가 운행되었는데 언제부터인지 6월부터 9월까지 야간 오후 8시와 9시에 한 번씩 운행함으로 오늘 탐방은 낮이라 볼 수 없어 아쉬움이 있었다. 김천 직지문화공원 세계도자기박물관은 재일교포 2세인 복전영자(福田英字) 씨가 서양자기, 크리스털 등 1천여 점을 김천시에 기증하면서 만들어진 박물관으로 세계적인 수준의 도자기를 만날 수 있었다. 지하 1층, 지상 1층의 3개 전시실과 1개의 영상실이 있고, 백자 청화 모란 문호, 청자상감 화초 문관을 비롯한 한국도자기와 유럽 도자기와 라리크 사자, 무라노 앵무새, 빅토리안 촛대를 포함한 크리스털 등 총 1,000여 점에 달하는 도자기 작품을 소장하고 있었다. 김천 세계도자기박물관 또 16세의 나이로 직지사에 출가하고 30세에는 주지를 역임한 사명대사를 기리기 위해 조성한 친환경 생태공원인 사명대사공원은 조성 당시 ‘하야로비공원’이라 하였는데, ‘하야로비’가 왜가리의 우리말이긴 해도 일본식 발음과 비슷하다는 여론이 일자, 할 수 없이 어린 나이의 사명대사가 직지사로 출가했음을 착안해 2020년에 ‘사명대사공원’으로 개칭하여 부르게 되었다. 사명대사공원 ‘사명대사공원 조성 사업’은 2010년 투자 심사를 통과해 총사업비 792억 원의 예산으로 42,200평의 부지에 김천시립박물관과 평화의 탑, 건강문화원 등의 시설도 갖추었다. 공원 내에는 솔향다원, 여행자 센터, 로비동, 체험동, 식당동, 물놀이장 등이 있어 숙박과 관람, 건강체험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연중 운영되고 있다. 친환경 생태공원을 표방한 사명대사공원은 백두대간 황악산을 배경으로 직지사와 직지천(直指川) 인근의 자연경관이 수려하고 교통이 편리하여 연중 많은 관광객이 찾는 곳이다. 사명대사공원 내 평화의 탑 또 친환경 생태공원은 파릇한 잔디밭과 선인장 온실, 생태 연못, 철쭉 동산으로 구성되어 햇살 좋은 날 여유롭게 쉬어가기 좋은 곳이었다. 공원에 들어서면 드넓은 잔디광장이 먼저 눈에 들어오고, 곳곳에 사막 도마뱀 조형물이 자리해 이색적인 풍경을 즐길 수 있었다. 온실 안에는 많은 선인장과 다육식물들이 심겨 있었다. 매년 봄이 되면 산철쭉과 백철쭉, 영산홍, 자산홍이 한데 어우러진 철쭉 동산은 황홀한 꽃밭을 이룬다고 한다. 그 옆에는 정겨운 장독대와 공원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망대와 이국적인 풍차가 볼거리를 더하여 가족이나 연인끼리 산책하기에 좋은 곳이기도 하다. 김천 직지사 대웅전과 천왕문 현판에 얽힌 이야기 이번 답사의 정규 코스는 아니지만, 직지문화공원과 한 바운드에 있는 직지사는 자유코스로 대한불교 조계종 제8교구 본사로 절의 창건설도 자못 흥미롭다. 신라 눌지왕 2년(418년)에 아도화상이 417년에 선산 도리사를 창건하고, 손가락으로 황악산을 가리키며, 저 산에도 좋은 절터가 있다고 해서 ‘직지(直指)’라는 사명(寺名)이 붙게 되었다는 설과 고려 태조 19년(936년)에 능여대사(能如大師)가 절을 중건할 때 자를 쓰지 않고 직접 손으로 가름하여 지었다고 직지사라 하였다는 설도 있다. 창건 당시의 절은 지금처럼 경내가 크지 않고 자그만한 절이었다. 또한 경북도 유형문화재 215호였던 직지사 대웅전은 임진왜란 때 전부 소실되었다가 인조 27년(1649)에 중창(重創 : 낡은 건물을 헐어 고쳐 다시 지음) 하였고, 영조 11년(1735)에 다시 중건(重建 : 낡은 건물을 보수하거나 고침)된 건물로 조선 후기 건축적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법당의 내ㆍ외부에 많은 벽화와 불단이 남아 있는 점 등이 높이 평가돼 문화재위원회 심의에서 2008년 9월에 보물 지정되었다. 현재 김천 직지사 대웅전(大雄殿)과 천왕문(天王門)의 현판에 대해 논란은 1927년 '구한말(舊韓末) 내각총리대신 비서관'이었던 김명수(金明秀)가 편집해 출판한 '일당기사(一堂紀事)'에서 비롯된다. '일당기사(一堂紀事)'에서 일당(一堂)은 매국노 이완용의 호이며, 기사(紀事)는 사실대로 기록한 것으로 즉 이완용의 일대기를 기록한 책이다. '일당기사(一堂紀事)'에는 직지사의 대웅전과 천왕문(天王門) 현판 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었다. 일당기사의 중 '연보'(年譜) 항목에는 「이완용 (李完用. 1858-1926)이 66세이던 다이쇼(大正 : 일본 천왕) 12년 1월 11일(양력 25일) 김천군(金泉郡) 직지사(直指寺)에 2종의 편액(扁額)을 서송(書送 : 글을 써서 보냄)한 것이 대웅전과 천왕문의 판액(板額)이다.」라는 문구가 발견되었다. 일당기사는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을 비롯한 국공립 주요 도서관 통합전산망인 국가전자도서관에서 텍스트 전체에 대한 원문 서비스가 제공되고 있으며, 관련 내용이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김천 직지사 대웅전 감정전문가들도 「1926년 9월 12일 자 동아일보에 실린 직지사 대웅전 현판 사진과 현존 현판 글씨를 비교하면 거의 같다."라면서 "아울러 이 연보에는 직지사 대웅전 외에도 서울 창덕궁 함원전을 비롯한 현판 10여 종의 글씨를 이완용이 썼다는 기록도 함께 있다.」라고 하였다. 직지사 천왕문 물론 이완용은 당대의 최고의 명필이었다 그러나 친일 행적으로 그의 글씨는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였으나, 당시 많은 글씨를 청탁받았다고 한다. 특히 서울시 서대문구에 있는 독립문(獨立門) 글씨가 그의 필적이라는 사실 또한 아이러니하다. 일당 이완용은 특히 행서와 초서가 뛰어났으며, 그의 작품은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고 한다. 직지사의 대웅전 천왕문 현판 당시 익명을 요구한 한 문화재위원은 사견임을 전제로 "현판이 건축물을 구성하는 일부분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 글씨를 이완용이 썼다고 밝혀진다 해서 해당 문화재의 보물 지정 여부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는 없다.」라고 했다. 그리고 대웅전 왼편의 사명각 현판은 1975년에 중창한 박정희 대통령의 글씨이다. 2. 김천 구성(龜城)의 방초정(芳草亭) 김천시에 있는 행정 구역인 구성(龜城)은 옛 지례현의 별호로, 이곳에 있는 작은 못에서 거북 모양의 바위가 나왔다고 하여 이 연못을 구연(龜淵)이라 하고, 연못 뒷산은 구산(龜山)이라 하였다. 신라 시대에 구산에 산성이 있어 구산성(龜山城)이라 하였는데, 이걸 줄여서 구성(龜城)이라 한데서 유래한 마을 이름이라 하였다. 이번 두 번째 답사지인 김천시 구성면 상원리 원터마을 입구에 있는 ‘방초정(芳草亭)’은 1625년(인조 3년) 이정복(李正馥. 1575-1637)은 선조 때 종4품 5위 부호군(五衛 副護軍)으로 조상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2층 누정(樓亭)으로 현재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정자 바닥 밑으로 구들을 놓아 불을 땔 수 있고, 많은 시인(詩人) 묵객(墨客)들이 정자에 올라와 주위의 아름다운 경치를 찬미한 시판이 많이 붙어 있었으나, 바쁜 일정에 자세히 살펴볼 여유가 없었다. 그리고 동남향인 ‘방초정’ 앞에는 오랜 세월을 견뎌온 고목을 품은 작은 연못이나 연못가의 배롱나무를 비롯해 목백일홍, 나리꽃 등이 어우러져 여름에 찾아가면 왜 이곳을 ‘방초(芳草 : 향기롭고 꽃다운 풀)’라고 부르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같다. 방초정은 오래전 경북 관광을 소개하는 책자의 표지 모델로 쓸 만큼 경관이 수려하여 경북을 대표하는 정자로 알려졌고, 방초정의 건물과 연못, 수목의 배치 등은 우리나라 정원 양식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고 한다. 김천 구성면 방초정 원터마을은 원래 연안이씨(延安李氏) 집성촌으로 김천을 대표하는 반촌(班村 : 양반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다. 조선 시대에 판서 8명, 부사 13명을 배출한 마을로 소문났고, 지금도 주민 대부분이 연안이씨일 정도이니 예나 지금이나 전형적인 집성촌의 면모를 유지하고 있다. 방초정은 처음 세운 곳은 도로 냇가 옆에 있었으나, 1689년 훼손되어 이정복의 손자 이해(李垓)가 중건하고, 1727년에 다시 보수했지만, 1736년의 큰 홍수로 유실된 것을 1788년 후손 이의조(李宜朝)가 수해로부터 안전하도록 지금의 위치로 옮겨 중수했다. 방초정 옆 정려각(旌閭閣)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 방초정의 건립과 관련된 아름답고 애틋한 사랑의 이야기가 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직전인 1591년 이정복(당시 17세)이 김천시 양천동 하로 마을 화순최씨 처녀(당시 16세)에게 장가들었다. 그러나 이듬해 전난(戰難) 중에도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죽더라도 시댁에 가서 죽겠다며 최씨 부인은 신행길을 나섰다. 이미 시가의 식구들은 피난 간 뒤라 수소문 끝에 선대의 산소가 있는 능지산에 있음을 알고, 그곳으로 가려 할 때 왜적이 마을을 급습하여 사람을 죽이거나 부녀자를 겁탈하고 재물을 빼앗는 등 온갖 만행을 자행하였다. 화순최씨 정려각(왼편)과 풍기진씨 열행각(오른편) 사태의 위급함을 느낀 새댁은 ‘살아서 겁탈을 당할 바에야 깨끗하게 죽는 것만 못하다.’라고 결심하고 몸종 석이(石伊)에게 자신이 입었던 옷을 벗어 부모님께 전해주기를 당부하고는 자기는 명의(明衣 : 죽은 사람이 입는 옷)로 갈아입고는 깊은 못에 몸을 던져 정절을 지켰다. 그러나 여종 석이도 주인을 뒤따라 함께 빠져 죽었다. 절부 부호군 이정복 처 증 숙부인 화순최씨 지려비 졸지에 어린 신부를 잃은 이정복은 부인을 그리워하며 여러 해 동안 웅덩이를 떠나지 못하고 울기만 하였다. 그러나 후사를 이어야 한다는 집안 어른들의 간곡한 뜻에 따라 재혼을 하게 돼지만 부인이 투신한 웅덩이를 확장해 못을 만들어 ‘최씨 부인의 연못’이란 뜻으로 ‘최씨담(崔氏潭)’이라 하였다. 그후 이 사연을 알게 된 인조임금이 어필을 내려 방초정 바로 옆에 화순최씨 정려각(旌閭閣)이 세워졌고 그 앞에는 같은 시기에 충노석이지비(忠奴石伊之碑)가 세워졌으나 행방이 묘현하였다. 그러나 1975년 방초정 못을 보수하면서 당시 정려각을 축조하면서 앞문에 묻혀 있었던 몸종 석이의 비석이 연못에 빠져 있는 것을 발견하여 여각(閭閣) 앞에 다시 세웠다고 한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점은 증 숙부인 화순최씨 정려라고 적혀 있는데 숙부인은 외명부의 품계에서 정3품 벼슬한 사람의 아내나 어머니에게 주어지는 첩지이다. 그러하다면 남편인 이정복도 증직되어서 화순최씨에게 정3품의 첩지가 내려져야 마땅한데 그런 기록을 찾을 수 없었다. 충노석이지비(忠奴石伊之碑) 정려각 옆에 비각이 하나 더 나란히 서 있다. 1937년에 세운 풍기 진씨의 열행비(烈行碑 : 열녀비)다. 풍기 진씨(1912~1935)는 이정복의 후손 이기영의 처다. 열여덟에 이기영과 혼인했으나 늑막염으로 고생하던 남편이 친정인 대구에 와서 치료를 받다가 복막염으로 도져 숨지자, 치료를 제대로 못 해준 자기 탓으로 여겼다. 진씨는 남편의 시신 옆에 가 반듯이 누워 일체의 음식을 거부하다가 결국, 그 방에서 굶어 죽었다. 그때의 그녀 나이는 24세였다. 전국 각 유림에서 애도문과 제문, 만사(輓章: 만장) 등을 보내왔으며, 이태 후에 정려를 세워 후세인의 본보기로 하였다는 게 <영남삼강록>과 <충의효열지> 열부 편에 전하는 내용이다. 3. 섬계선원(剡溪書院) 김천시 대덕면 조룡리의 섬계서원은 1802년(순조 2년) 김녕 김씨 문중이 건립했다. 1864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헐렸으나, 1914년에 백촌 김문기의 억울한 죽음과 높은 절개를 기리는 경의재(景毅齋), 세충사(世忠祠), 동별묘를 세웠다. 세충사에는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 순절한 백촌(白村) 김문기(金文起)를 주벽(主壁 : 방문에서 정면으로 바라보는 벽)으로 하고, 함께 순절한 맏아들 영월군수 여병재 김현석(如甁齋 金玄錫)이 배향하고 있다. 안탑갑게도 서원의 문이 잠기어 담 넘로 내부를 보는 촌극도 있었다. 김천 대덕 섬계서원 특히 경의재(景毅齋)의 기둥에 세 폭의 주련이 필자의 눈길을 끌었다. 이 글귀는 주자(朱子)의 경제잠(敬齊箴)에 나오는 글귀의 일부로 충남 논산의 돈암서원(遯巖書院) 양성당(養成堂)도 이 주련이 걸려있다. 주자는 경(敬)을 이렇게 정의하였다. 「일신(一身)은 마음이 주재하고 마음은 경(敬)이 주재하는 것이니 경은 바로 삶이고 생명이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필자도 이 주련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재미있게 의역(意譯)하면 이러하다. 足容必重 手容必恭(족용필중 수용필공) : 발가짐은 필히 정중하게. 손놀림도 필히 공손하게 正其衣冠 尊其瞻視(정기의관 존기첨시) : 의관은 반듯하게, 남을 보는 눈길은 존엄하게 出門如賓 承事如祭(출문여빈 승사여제) : 문(집) 나서면 손님처럼, 맡은 일은 제사 모시듯. 섬계서원 삼현별묘 세충사 동편의 동별묘는 삼현별묘(三賢別廟)로 김천 지례 출신으로 조선의 건국 과정과 왕자의 난에 실망하여 낙향한 반곡(盤谷) 장지도(張志道)와 그의 제자 절효 윤은보(節孝 尹殷保), 남계 서즐(南溪 徐騭)의 위패를 함께 모시고 있었다. 서즐과 윤은보는 특히 1434년(세종 16) 간행된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에 ‘은보감오(殷保感烏)’라는 제목으로 그 행적이 실려져 있을 정도로 효자였다. 이들은 아들이 없는 스승인 장지도를 위해 친부모의 예로 효행을 다했으며, 스승의 사후에도 3년간 시묘살이를 하는 등 효자로 유명했다. 필자도 김천에 근무할 당시인 2006년에 섬계서원의 춘향제례(春享祭禮)에 초헌관(初獻官)으로 선임되어 배례한 적이 있어 이번 섬계서원의 탐방이 감회가 남달랐다. 예전에는 이 마을 이름을 섬계리(剡溪里)라고 하였고, 서원도 이 마을 이름을 따서 섬계서원(剡溪書院)이라 하였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이 마을의 이름이 조룡리(釣龍里)로 바꿔졌다. 필자는 이런 오지에 섬계서원이 세워지게 된 연유와 마을 이름이 조룡리로 바꾸게 된 것이 궁금하였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이 마을은 예로부터 김녕김씨 집성촌으로 이곳과 가까운 옥천 출신인 백촌 김문기를 중시조(中始祖, 일명 中興祖)로 모시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여 한 가지 의문점을 풀 수 있었으나, 마을 이름을 조룡리(釣龍里)로 바꾸게 된 까닭이 있을 터인데, 예컨데 이 마을 부근에 큰 못이 있었을 것이고, 누군가 그 못에서 용(龍)을 낚았다는 고사가 있을뻔한대 그 점에 대한 의문점을 풀지 못해 아쉬움으로 남겨 두었다. 섬계서원 은행나무 김천 대덕면 조룡리 은행나무는 수령 약 500년 이상의 노거수로 섬계서원의 뒤뜰 담장 부근에 있다. 조룡리 은행나무는 마을의 유래와 역사를 간직한 향토 문화적 가치와 노거수로서의 생물학적 가치를 인정받아 1982년 천연기념물 제300호로 지정되었다. 울타리가 쳐져 있지 않아서 가까이서 볼 수 있어 다가갈수록 나무가 더 크게 느껴졌다. 전설에 의하면 임진왜란 당시 왜군의 방화로 인해 밑동에 불이 붙게 되었는데 이 불을 한 노파가 호미로 긁어서 껐다고 한다. 그 후에 이 은행나무의 소유권을 두고 다른 문중과 섬계서원 간의 분쟁이 벌어졌다. 일반적으로 입목(立木)은 땅에 귀속되는 소지주의(屬地主義)다. 예전에 그 땅이 그들의 문종의 땅인지는 알수 엇으나, 지금은 섬계서원의 소유이며, 특히 은행나무는 향교나 서원의 교육 시설과 관련이 있다는 김녕김씨 문중의 의견이 받아들어져 섬계서원의 소유로 판결이 났다고 하는 헤프닝도 알게 되었다. 김천 대덕면 조룡리 섬계서원 은행나무 백촌 김문기(白村 金文起)의 아리송한 이야기 백촌 김문기는 조선 초기 문신으로 충청북도 옥천 태생으로 본관 김녕(金寧). 자 여공(汝恭). 호 백촌(白村). 시호 충의(忠毅). 1426년(세종 8) 식년문과에 급제하였으나, 부친상을 당하여 3년간 시묘하였다. 1430년 예문관검열(檢閱)·정언(正言)·함경도 관찰사를 역임하고 공조판서(1455)에 이르렀다. 1456년(세조 2년) 공조판서로 성삼문 등과 함께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 순절했다. 그 후 1731(영조 7)에 복위됐다. 그러나 1980년대의 어느 날 사육신의 한 사람으로 현창(顯彰 : 밝게 나타냄)되고, 동작동 사육신묘에 그의 가묘(假墓 : 임시로 만든 묘)가 안장되어 논란이 되었다. 김문기는 1778년(정조 2)에는 충의(忠毅)라는 시호가 내려졌고, 1791년(정조 15) 2월에 절의(節義) 숭상(崇尙)의 범위를 더 넓혀 단종 제전에 충성을 바쳐 절의를 지킨 신하들을 정단(正壇) 32명과 별단(別壇) 198명 계230명의 배식 인명이 『어정배식록(御定配食錄)』에 편정(編定)하였다. 어정배식록(御定配食錄)에서는 김문기를 삼중신(三重臣, 단종 복위 때 순절한 3재상)에 포함하였고, 김천의 섬계서원과 사육신공원의 의절사 등에 제향 되었다. 또한,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화정동에 건립된 오정각(五旌閣,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7호)에는 충신, 효자, 열녀 등을 기리기 위해 표창하여 동네에 정문(旌門)을 세웠는데, 김문기와 아들 김현석의 충신 정려각, 김충주(김문기의 손자)·김경남(김문기의 증손)·김약전(김문기의 현손)의 효자정려각 등 5대에 걸친 충효정려각이 있는 명문가였다. 영월 장릉에 배식단을 세우고 추향할 사람을 정한 어정배식록은 정조가 육조와 홍문관에 명하여 단종 복위 사건으로 죽임을 당한 신하들을 세조실록 등 조정의 참고 문헌을 널리 고증받아 벼슬 위차(位次) 서열(序列)에 따라 제사음식을 분배하기로 정한다는 국가적인 의전이었다. 여기에서 사육신이 오랜 기복(起伏)을 거듭한 끝에 국가의 공식적인 인정을 받아 오늘에 이르러 국민에게 숭앙의 대상이 되어 왔다. 어정배식록(御定配食錄) 정단의 순서로는 육종영(六宗英: 안평대군을 비롯한 6인의 종친) · 사의척(四懿戚: 단종 비의 부원군 송현수宋玹壽를 비롯한 4인의 외척) · 삼상신(三相臣: 황보인 · 김종서 · 정분 등 3정승) · 삼중신(三重臣: 민중(閔仲) · 조극관(趙克寬) · 김문기 등 3재상) · 양운검(兩雲劒: 성승 · 박쟁 등 2무장) · 육신부(六臣父 형조판서 박중림: 박팽년의 아버지), 육신(六臣: 성삼문 · 이개 · 유성원 · 박팽년 · 하위지 · 유응부 등 6인), 육신자(六臣子 증사헌부지평 하박: 하위지의 둘째 아들), 탁절신(卓節臣: 좌참찬 허후 · 수찬 허조 · 증이조참판 박계우 · 순흥부사 이보흠 · 도진무 정효전 · 영월호장 엄흥도 · 증이조판서 권절 · 증이조참판 이수형) 등 총 32명을 순차(順次)적으로 선정하여 편찬되었다. 그러나 1977년에 김녕 김씨 문중에서 어정배식록의 기록이 오류가 있었고, 유응부의 행적이 김문기의 것과 같다며 유응부 대신 김문기가 삼중신보다 순서가 낮은 사육신에 해당한다는 이상한 주장이 제기되자 서울시, 문교부, 문화공보부, 국사편찬위원회 등이 심도 있는 연구와 논의를 하였다. 그 결과 서울시에서는 국사편찬위원회의 합의사항을 참조하여, '유응부의 사육신 지위를 그대로 유지하고, 김문기를 사육신과 같은 충신으로 배향'하는 것으로 최종적으로 결론을 내렸다. 당시 국의 고위(?) 권력을 가진 후속의 압력이 작용했는 설도 있었으나, 아마 초등학교의 교과서에 삼중신에 관한 내용은 거의 나오지 않아도 사육신은 빠짐없이 나오니 이마 사육신의 충절을 더 높이 여겼던 것이 아니지 필자도 아리송하다. 김천 지례마을 지명 유래의 사연 김천 지례(知禮)는 김천 서부권의 5개 면인 감천면, 조마면, 대덕면, 부항면, 구성면을 모두 아우르는 중심지로 조선 초기에는 구례현으로 5일 장이 서는 곳이다. 이 마을이 이렇게 유명한 것은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때문이다. 삼강행실도는 1428년(세종 10) 진주에서 김화(金禾)라는 사람이 자기 아버지를 살해한 사건이 발생하자, 세종은 집현전 직제학 설 순에 명하여 우리나라와 중국의 서적에서 군신, 부자(父子), 부부간에 모범이 될 충신, 효자, 열녀들을 각각 35명씩 뽑아 그 행적을 그림과 글로 엮는 책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사람으로는 효자 4명, 충신 6명, 열녀 6명이 실려 있다. 이 책은 세종 14년(1432)에 간행되었으며, 성종 12년(1481)에는 한글로 풀이한 언해본이 간행되었다. 이 책은 백성들의 교육을 위해서 만들어지므로 단원 김홍도와 안견이 그린 그림을 통해 글자를 모르는 백성까지 그 내용을 알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그 중 삼강행실도 효자편에는 서즐(徐騭)과 윤은보(尹殷保)의 이야기를 ‘은보감오(殷保感烏 : 은보의 효심에 까마귀도 감동하다)’라는 제목으로 그림(김홍도 그림)과 함께 행적이 실려 있다. 그들의 스승은 바로 장지도(張志道 :1371~ ?)였다. 삼강행실도의 은보감오(殷保感烏) 장지도는 김천시 지례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절의가 굳고 효성이 지극하였다. 공민왕 때 향시에 급제하고 곧이어 문과에 급제하여 명망을 얻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는 1395년(태조 4) 종4품 교서소감(校書少監)으로 『정관정요(貞觀政要)』를 교정하는 중책을 맡았으나, 왕자들의 권력 싸움으로 골육상쟁의 정치에 염증을 느껴 벼슬을 버리고 김천 지례현으로 낙향해 은거하면서 부모님을 지극히 모셨을 뿐만 아니라 후진 양성에 진력하였다. 바로 이 지역 출신 윤은보(尹殷保)와 서즐(徐騭) 등의 훌륭한 제자를 길러 지례현의 문풍(文風)을 떨쳤다. 하루는 윤은보와 서즐이 이야기를 나누다가 “예로부터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하였는데 우리 스승은 아들이 없으니 우리가 끝까지 봉양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서로 다짐했다. 그 후부터 맛있는 것이 생기면 스승에게 먼저 드리고, 명절이면 술과 반찬을 준비해 어버이와 같이 섬겼다. 장지도가 돌아가시자 두 사람은 아버지에게 여묘살이 할 것을 청하니, 두 아버지 모두는 갸륵하게 여겨 허락했다. 이들은 이내 상복을 입고 묘 옆에서 살면서 몸소 음식을 만들어 제사를 지냈다. 김천 지례면 소재지 윤은보의 아버지가 병이 드니 곧 돌아가 약을 올렸는데 이때도 상복을 벗지 않았다. 달포가 지나서 윤은보가 이상한 꿈을 꾸었는데 이상하게 여기고 급히 집에 돌아가 보니 아버지가 병이 들어 열흘이 되지 않아 별세했다. 윤은보는 새벽부터 저녁까지 곡을 하면서 자리를 뜨지 않았다. 장례를 치른 후, 아버지 무덤에 여막(廬幕)을 지었다. 하루는 회오리바람이 크게 일더니 향로가 날아가버렀다. 얼마 후에 까마귀가 무엇을 물고 날아와 무덤 앞에 두었는데 살펴보니 잃어버린 향합이었다. 서즐 또한 스승의 기일에 폭설로 길이 막혀 제물을 구하지 못해 통곡하자 그 효성에 탄복한 호랑이가 노루를 물어다 주어 제사를 지낼 수 있었다는 정성 고개의 주인공이었고, 삭망(朔望 : 음력 초하루와 보름)이 되면 스승인 장지도의 무덤에 성묘를 하며, 서즐과 함께 삼년상을 마쳤다. 그 후 장지도와 제자 윤은보, 서즐의 행실이 칭송하여 대덕면 섬계서원의 동별묘에 배향되었고, 김천 지례면 교리 마을 입구에 삼효정려비와 비각이 유허비와 나란히 있다. 이후로는 예(禮)를 아는 사람들이 사는 고을이라 하여 알 지(知)에 예도 예(禮)자를 쓴 지례(知禮)의 지명이 전국적으로 명성을 떨쳤다. 김천 지례의 삼효정려각 특히 조선 시대는 유학을 중시하여 충효 열녀를 국가가 장려하고 전국으로 확산시키기 위한 노력으로 유교의 기본이 되는 삼강(三綱)을 몸소 실천한 백성 중에서 모범사례를 선발해 표창하고 각종 혜택을 제공했는데 이것이 정려각(旌閭閣)이다. 정려(旌閭)의 정(旌)은 임금이 백성들의 사기를 북돋우거나 신임의 증표로서 내리는 깃발을 말하며, 여(閭)라는 것은 마을 입구나 길에 세운 문을 뜻한다. 4. 김천 부항댐 김천시 부항면에 건설된 다목적댐으로 낙동강 수계지역의 기상 이변으로 인한 감천의 홍수 피해를 줄이고, 김천시와 구미시 지역에 안정적인 용수를 공급하고자 2006년에 착공하여 2011년에 완공되었다. 부항댐은 김천 8경의 하나로 댐의 높이 64m, 길이 472m의 콘크리트 표면 차수벽형 석괴댐(밑으로는 돌을 괴어 위로는 콘크리트로 조성한 댐)으로 총저수량은 5,430만㎥이다. 댐 하류에 산내들 공원이 있으며, 주변 시설물로는 부항댐 출렁다리와 김천 부항댐 물문화관이 있다. 출렁다리에서 하차한 회원들은 마침 비가 조금 내려 우산을 쓰고 다리를 밟기도 하였다. 김천 부항댐 이번 부항댐 탐방은 물문회관(김천시 지례면 도곡리 1005-5)이 주가 되었다. 물문화회관에서 상설전시실과 기획전시실에서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으며, 전망대에서 부항댐의 경치도 즐길 수 있다. 또 물문화관에는 댐과 물에 대한 이해를 돕는 전시물뿐만 아니라 과학적인 화법과 특수칠을 하여 평면의 그림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지도록 입체적으로 그림을 그려서 관람객이 체험하게 할 수 있는 전시물(트릭아트)과 재미있는 조형물이 있어 사진 찍기에 좋은 곳으로 사진작가들의 발길이 끊기지 않는다. 김천 부항댐 물문화관 부항댐을 마지막으로 김천 탐방을 마치고 대구로 향하는 필자는 많은 의미가 있다, 평소 사찰과 향토사에 관심이 있었던 관계로 김천에서 근무하면서 집필진을 구성하여 「김천향토교육사료집」을 발간하여 일선 학교에 보급한 적이 있어 이 지방의 향토 사료는 어느 정도 이해가 높았다고 자부했건만, 일신일신 우일신(日新日新 又日新)이라더니, 지속적인 연구와 탐방을 통하지 않고는 지자체나 문화공보부에서 새로 발굴하고 보완하며 날로 발전하는 문화 유적에 접근하기가 그리 쉬지 않음을 느꼈다. 대구로 가는 길에 집행부의 배려로 저녁을 먹고 가리로 하고, 김천에서 지방도로로 증산을 거쳐 만수에 찬 성주댐을 지나 고령 도곡도로 입구 부근인 쌍림휴게소에서 청국장으로 해결하였다. 끝으로 늘 수고가 많은 집행부에게 긴히 당부드리고 싶은 것은 대구 경북의 지방은 모두 한 두 차례 탐방하였으니, 타 시군으로 확대하였으면 좋겠고, 매월 답사마다 시간에 쫓겨 보는 둥 만 둥 스치며 지나가는 경향이 있었다. 이왕 그날 하루는 답사에 투자하기로 한 이상 조금 일찍 출발하여 늦게 돌아오더라도 한 곳이라도 더 찬찬히 보고 가슴에 담아오는 답사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 이렇게 건의코져 한다.▣ |
첫댓글 김천 지방 문화 탐방기는 필자가 보고 들은 내용 중심으로 기술한
내용이나 사실과 다소 차이가 있을 있으니 양해을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