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요, 불교를 만나다] <2> 안치환의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노래의 온기 품고 사는 바로 당신 우린 참사랑”
정지원 시인이 국가보안법의 반민주적인 생각을 담아 쓴 시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에 가수 안치환이 가사를 조금 바꾸고
멜로디를 붙여서 만든 노래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앨범.
인간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살 것인가
필자가 몸담고 있는 전북불교대학에서는 12월 31일 저녁이 되면 제야의 밤 행사를 한다.
지나간 1년을 돌아보면서 새로운 한해를 맞이하자는 의도에서 기획된 법회다.
여기에는 108참회를 비롯한 다양한 프로그램이 준비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행사에 참여한 모든 학인이 삼배를 받고 삼배를 하는 과정도 있다.
‘중생이 부처’라고 말은 하면서,
정작 가까이 있는 사람을 존중하면서 살았는지 돌아보자는 취지에서 마련된 것이다.
사랑도 받아본 사람이 사랑할 줄 아는 것처럼,
존중도 받아본 사람이 상대를 존중하는 법이다.
삼배를 받으면서 자신이 존중받는다는 생각에 울컥하면서 눈물을 쏟는 학인도 있다.
어쩌면 우리는 그만큼 존중과 사랑에 메말라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오늘의 주제가 인간의 존엄성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과연 인간이란 무엇이며, 그 자체로 존중 받을 만큼 귀한 존재일까?
지난 글에서 살펴본 것처럼 인문학이 철학과 종교, 역사, 문화, 언어 등
아무리 다양하게 펼쳐지더라도 결국 ‘인간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두 가지 근본 물음으로 압축된다.
인간 존재의 물음에 대한 답변도 각 분야에 따라 매우 다양하다.
인간을 생물학적으로 정의하는 것에서 출발해서
사회적, 정치적, 종교적인 특성에서 그 본질을 찾기도 한다.
흔하게 들어온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라는 정의도 사유(思惟)의 힘에서
동물과 구분되는 인간만의 고유한 본질을 발견하는 시도라 할 것이다.
이 질문이 중요한 것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문제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지금은 상상할 수 없지만, 불과 몇 백 년 전만 해도
노예는 생물학적으로 인간일지 몰라도 사회적으로는
돈으로 사고 팔 수 있는 물건에 불과했다.
인간으로서 존엄성이 결여된 상품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사회에서 노예를 존중하며 산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반면 철학자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는
모든 인간은 신분이나 성별, 피부에 관계없이
무조건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인간은 조건만 맞으면 사고 파는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목적이기 때문에 서로 존중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대중가요 가운데 인간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 성찰하고 있는 노래가 있다.
바로 안치환의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라는 곡이다.
본래는 1997년 ‘꽃다지’라는 노래패가 발표한 곡인데,
이듬해 안치환이 훨씬 신나고 경쾌한 곡으로 리메이크해서 대중들의 많은 사랑을 받게 되었다.
이 노래에는 남과 북의 대치라는 우리의 아픈 현대사가 담겨있다.
노래패 꽃다지는 민족의 통일을 염원하면서
‘서울에서 평양까지’라는 노래를 만들고 이를 공중파 방송에서 부른 적이 있다.
그런데 이 일이 문제가 되어 국가보안법을 위반했다는 혐의를 받고
급기야 구속까지 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문민정부가 들어섰는데도 문화, 예술 분야에서 표현의 자유가 위축되는
반민주적 행태를 보인 것이다.
당시 이러한 행태를 비판하고 구속된 이들의 석방을 촉구하는 공연이 이어졌는데,
이를 지켜본 정지원 시인이 자신의 느낌을 담아 쓴 시가 바로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다.
그리고 가수 안치환은 가사를 조금 바꾸고 멜로디를 붙여서 지금과 같은 노래를 만든 것이다.
시와 음악이 만나 인간과 시대를 노래한 이 곡은
조항조, 알리를 비롯한 여러 가수들이 리메이크해서 부르고 있으며,
오늘에도 여전히 대중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다음은 안치환 버전의 노랫말이다.
“강물 같은 노래를 품고 사는 사람은 / 알게 되지 음 알게 되지 /
내내 어두웠던 산들이 저녁이 되면 /
왜 강으로 스미어 꿈을 꾸다 밤이 깊을수록 말없이 서로를 쓰다듬으며 /
부둥켜안은 채 느긋하게 정들어 가는지를 음 / 지독한 외로움에 쩔쩔매본 사람은 /
알게 되지 음 알게 되지 / 그 슬픔에 굴하지 않고 비켜서지 않으며 /
어느 결에 반짝이는 꽃눈을 달고 우렁우렁 잎들을 키우는 사랑이야말로 /
짙푸른 숲이 되고 산이 되어 메아리로 남는다는 것을 /
누가 뭐래도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 이 모든 외로움 이겨낸 바로 그 사람 /
누가 뭐래도 그대는 꽃보다 아름다워 /
노래의 온기를 품고 사는 바로 그대 바로 당신 바로 우리 우린 참사랑”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 이유
남성이 여성에게 사랑을 고백할 때 가장 많이 동원되는 것이 꽃이다.
그만큼 꽃이 아름답기 때문일 게다.
위트와 애교가 넘치는 여성은
자신과 꽃 가운데 누가 더 예쁘냐고 짓궂은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이때 남성의 대답에 한 치의 어긋남이 있어서는 안 된다.
자칫 농담이랍시고 꽃이 아름답다고 말하는 순간 그동안의 모든 노력은 허사가 되고 만다.
무조건 당신이 꽃보다 아름다워야 한다.
그런데 가수 안치환은 사랑하는 여성이 아니라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고 노래한다.
왜 그럴까? 이를 불교적인 시선과 연결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 이유는 단순하다.
인간은 그 자체로 존엄하기 때문이다.
이를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붓다의 탄생일게다.
알려진 것처럼 붓다는 태어나자마자 일곱 발자국을 걸으면서
‘하늘 위, 하늘 아래 나 홀로 높다(天上天下 唯我獨尊)’는 사자후를 외쳤다 한다.
오해가 많이 풀렸다고 하지만,
여전히 이 말은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 잘났다는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여기서 아(我)는 개별적인 내가 아니라 보편적 인간성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인간은 신분이나 성별, 피부에 관계없이 모두가 존엄(尊)하다는 뜻이다.
붓다는 남녀차별과 카스트라는 신분제 속에서 신음하고 있던
인도 사회에 모든 사람은 평등하고 존엄하다는 소식을 전한 것이다.
인간을 존중하는 이러한 태도는 대승불교에 이르러 꽃을 피우게 된다.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붓다의 성품을 갖추었다는
불성(佛性), 여래장(如來藏) 사상이 대표적이다.
사람이 현실에서는 중생이라고 폄하되고 있지만,
본래는 불성을 머금은 존엄한 존재라는 것이다.
불교를 신앙하는 이들을 불자(佛子)라고 하는데,
이는 붓다의 아들과 딸이라는 뜻이다. 자식이 부모를 닮는 것은 당연하다.
DNA가 같으니까 말이다. 이처럼 중생도 부모인 붓다의 불성이라는 유전자를 물려받은
고귀한 존재라는 것이 대승의 입장이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 이유가 충분히 있는 셈이다.
이뿐만 아니라 <법화경>에 등장하는 상불경보살(常不輕菩薩) 이야기에서도
인간을 중시하는 태도를 확인할 수 있다.
이 보살은 이름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항상(常) 모든 사람을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不輕).
그는 만나는 사람마다 당신을 존중한다고 말했다 한다.
때론 미친 사람 취급도 당했지만, 그의 인간 존중은 멈추지 않았다.
<화엄경>에서도 “마음과 부처, 중생 이 셋은 차별이 없다(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고 선언한다.
이 얼마나 놀라운 선언인가! 그렇게 형편없이 보이는
중생이 사실은 부처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이 역시 사람은 본래부터 존엄하다는 불교의 인간관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가르침이다.
이처럼 인간은 현실에서는 탐욕과 성냄, 어리석음으로 살아가지만,
본바탕은 붓다와 같은 위대한 성품을 지닌 존재다.
박노해 시인은 ‘너의 때가 온다’에서 이렇게 노래하였다.
“너는 작은 솔씨 하나지만 / 네 안에는 아름드리 금강송이 들어있다 /
너는 작은 도토리 알이지만 / 네 안에는 우람한 참나무가 들어있다”
여기에서 솔씨와 도토리 알은 작게 보이지만,
실은 아름드리 금강송이나 우람한 참나무로 자랄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존재다.
우리 안의 불성 또한 붓다라는 위대한 성자(聖者)를 머금고 있는 작은 씨앗이다.
다만 우리가 이러한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중생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불성이라는 꽃씨를 심고 잘 가꾸기만 하면 얼마든지 붓다로 살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면 노랫말처럼 어느 결엔가 반짝이는 꽃눈을 달고
우렁우렁 잎들을 키우며 아름드리나무로 성장할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주변을 온통 짙푸른 숲과 산으로 멋지게 장엄할 것이다.
이때 나오는 말이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찬사다.
우리는 노래의 따뜻한 기운을 품고 있지만,
현실에서는 지독한 외로움에 쩔쩔매면서 살아가는 존재다.
그럼에도 인간은 밤이 깊을수록, 어려운 상황이 지속될수록
오히려 서로를 부둥켜안으면서 깊이 정들어 간다.
그 과정에서 온갖 슬픔과 아픔에 굴하지 않고 푸르른 잎들을 키워내기도 한다.
우리의 역사만 보더라도 지옥과 같은 35년간의 일제강점기와 군사독재,
IMF 외환위기도 이겨내지 않았던가.
꽃씨의 생명력을 잃지 않는 한 그 어떤 어려움이 닥쳐와도 이겨낼 것이며,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노래 역시 계속 이어질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붓다의 근본교설부터 대승의 다양한 가르침에 이르기까지
모든 인간은 존엄하다는 것이 불교의 일관된 입장이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니 성별이나 지역, 신분, 피부가 다르다는 이유로
사람을 차별하는 것은 붓다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일이다.
불자라는 이름으로 이런 행위를 하지 않았는지 스스로를 돌아볼 일이다.
경기 침체, 경제 위기라는 말이 심상치 않게 회자되고 있는 요즘이다.
소득과 자산은 줄어드는데 높은 금리와 물가 속에서 쩔쩔매는 사람이 늘고 있다.
그러나 지독한 한파와 외로움 속에서도 꽃씨는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
머지않아 그 꽃씨가 따뜻한 온기와 사랑을 만나 활짝 필 것이다.
아름다운 장미는 거센 비바람과 폭풍우를 만나면 쉽게 꺾이지만,
사람은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꿋꿋이 살아남는다. 꺾이지 않으니까 희망인 것이다.
그걸 놓지 않고 사니까 꽃보다 아름다운 것이다.
힘을 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는 셈이다.
2023. 01. 21
이일야 전북불교대학장
불교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