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송지희 기자의 보살의 길 / 명원 김미희
끝없는 불사 원력으로 불교 중흥 토대 다진 공덕 보살
재벌가 쌍용기업 안주인
전통 문화에 남다른 원력
깊은 불심으로 불사 도맡아
송광사·일지암 등 복원 주도
한평생 무주상 보시에 매진
서울 종로구 신문로에 위치한 집은 마치 부처님 품과 같았다.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찾아오는 이가 누구든 따스히 보듬었다.
부엌에는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찌개가 끓었고 밥솥엔 밥이 가득했다.
누구든지 따뜻한 밥 한끼 먹고 쉬어가라는 깊은 배려였다.
그래서 신문로 집은 늘 문전성시를 이뤘다.
어려운 일이 생기면 신문로 안주인을 찾아가라는 얘기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정치, 경제, 문화, 사회 등 각계 내로라하는 유명인사부터
동네 구두닦이와 청소부, 세파에 지치고 굶주린 이들까지
다양한 계층과 신분의 사람들이 온갖 사연을 가지고 이곳을 찾았다.
집안에 가득한 자비와 배려는 안주인
명원 김미희(1920~1981, 불국생) 보살의 남다른 심성에서 비롯됐다.
그녀는 무채색 고운 한복을 즐겨입는 단아한 여성이었다.
항시 머리를 단정하게 빗어 올린 채 온화한 미소로 손님들을 맞았다.
도움이 간절한 이에게 그녀는 관음보살님과 같았다.
어렵사리 말 꺼내지 않아도 한발 앞서 상황을 눈치 채고
가장 필요한 순간 도움의 손길을 내밀곤 했기 때문이다.
문턱을 기웃대는 거지 일가족에게 조용히 봉투를 건내는가 하면
활동 자금이 필요한 이에겐 격려금을,
가족이 아픈 이에겐 구하기 어려운 귀한 약을 선뜻 내줬다.
남편은 당대 손꼽히던 기업 쌍용의 김성곤 회장이었다.
그러나 김미희 보살은 재벌가 부인보다는 자비의 실천가이자
사람과 문화를 사랑한 후원자로,
또 한국 전통 차문화를 복원하고 확산을 이끈 차의 선구자로 더 유명했다.
사실 ‘유명했다’는 표현도 그리 적합하지는 않다.
나서는 것을 꺼리고 뒤에서 묵묵히 지원하는 것을 선호했던 성품 덕에
그녀의 다양한 활동들은 세월이 지난 후에야 지인들의 회고를 통해 알려졌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 묵묵하게 문화·예술, 여성, 사회복지 등 각 분야를 조용히 지지해 온
그 원력의 무게는 그녀가 떠난 뒤에야 알음알음 알려져 세상을 감동시켰다.
김 보살이 손님을 맞이하는 사랑방 화로에는 항상 찻물이 올려져 있었다.
찾아온 이가 누구든 정성으로 우려낸 차를 직접 대접했다.
그녀는 한국 차문화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민족의 수난기를 거치며 잊혀졌던 한국의 전통 다법이
그녀의 손끝에서 복원되면서 다시금 생명력을 되찾았다.
덕분에 신문로 집은 종종 국가적 행사에 초청된
외국 귀빈들을 접대하는 장소로 활용되는 등 한국 전통차문화의 산실로 운영되기도 했다.
김미희 보살의 남달랐던 불심,
그리고 불자로서 불교계에 기여한 숱한 업적들도 지인들의 회고로 뒤늦게 알려졌다.
워낙 신심 깊은 불자였던 까닭에 생전 각종 불사에 힘을 보탰다는 사실이 밝혀지긴 했지만,
그 규모나 내용들은 대부분 감춰져 있었다. 원체 상을 내지 않는 성향 때문이었다.
김미희 보살은 한국불교 중흥의 토대를 다진 대화주보살이었다.
특히 그녀가 행했던 숱한 불사들은 단편적인 재정 지원과는 그 맥을 달리했다.
김 보살은 무엇보다 전통 사찰의 복원 및 도심 포교당 건립, 경전 불사,
도제 양성 등 불교미래를 일궈낼 대작불사에 주력했다.
한국 전쟁으로 황폐화된 송광사 복원 불사와
초의선사의 터전인 해남 대흥사 일지암 복원 불사, 신수대장경 간행 불사와
군포교 활성화를 위한 법당 건립 불사 등이 대표적이다.
그 중에서도 송광사 불사는 김 보살의 후원 없이는 시작부터 불가능했을 정도로 역할이 컸다.
그녀는 김부전(법련화) 보살과 더불어 송광사 불사를 이끈 양대 산맥이었다.
김 보살은 한국전쟁 직후인 1954년경 효봉 스님을 통해 송광사와 인연을 맺었다.
당시 송광사는 전쟁 후 피폐해진 몰골로 방치되다시피 한 가난한 사찰이었다.
송광사 방장 보성 스님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송광사는 탱화나 전각이 형편없이 부서져가던 가난한 사찰이었다.
어떻게 보수를 하려해도 가난한 사찰 재정으로는 엄두도 내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그때 김미희 여사가 500만원을 불사금으로 시주했다.
말이 500만원이지 요즘으로는 10억원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거액이었다.
불사는 3년간 이어졌고, 남은 불사금 또한 효봉 스님 문집 편찬 등 불사에 투입됐다.
김 보살과 송광사와의 인연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967년 효봉 스님의 제자인 구산 스님과의 인연으로
송광사 중창 프로젝트의 화주 보살로 재차 나선 것이다.
총림도감을 토대로 한 대규모 불사였으며,
김 보살은 내친김에 화엄전 복원 불사까지 전담했다.
구산 스님의 상좌 현호 스님은
“김미희 보살은 그렇게 큰 불사를 하고서도 상을 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사찰에 오가는 것조차 조용했다. 마치 밀행존자와도 같은 분이었다”고 회상했다.
이 뿐 아니다. 그녀는 보성 스님(현 송광사 방장)의 부탁으로
문경 봉암사 불사로 젊은 스님들이 공부에 전념할 수 있는 터전을 제공하는 한편,
서울 불광사와 대각사 룸비니 회관 건립에 시멘트와 철근을 무상 제공,
도심포교 활성화에도 기여했다.
팔릴 위기에 처한 남원 실상사를 조계종단의 품으로 돌려주기도 했다.
30년간 누적된 부채를 일시에 정리해 준 것은 물론,
도입로를 정비하고 전기를 가설하는 등 사찰로서 위상을 재정립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무엇보다 그녀는 한국불교의 역사적 성지를 유지·복원함으로써
한국불교 중흥을 이끌 토대를 마련하는데 남다른 원력을 쏟았다.
백제불교 초전법륜지인 서울 대성사 중창과
신라불교 초전법륜지 구미 도리사 부근 모례장자의 집터를 매입해 추진했던 성역화 사업,
가야불교 성지이자 구산선문의 하나인 창원 봉림사지와
경주 남산의 청룡사지 6만여평 확보하기도 했다.
‘무소유’ 법정 스님을 위해 송광사 내 불일암을 시주한 것도 바로 김미희 보살이었다.
당시 법정 스님은 사회문제를 반영한 날카로운 글과 법문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는데,
서울에 머무는 것이 어려워진 스님을 위해 김 보살이 불일암 건립기금을 시주했다.
오늘날까지 무소유의 상징으로 일컬어지는
불일암의 탄생 배경에 바로 김 보살의 무주상 보시 원력이 스며있는 셈이다.
경전 불사 등을 통해 불교학 발전에 기여한 공도 적지 않다.
특히 고려대장경을 모본으로 한 신수대장경 간행은
한국 불교학에 일대 공헌을 한 대표적인 불사로, 5만5000쪽 100질에 달하는 분량인 만큼
간행비용만 해도 어마어마한 수준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녀는 그렇게 출간한 신수대장경을
불교학 연구를 위해 필요한 전국 곳곳에 무상으로 보시했다.
이와 함께 ‘육조단경’, ‘금강삼매경’, ‘선문촬요’ 등
숱한 경전과 선어록들을 영인해 법보시하기도 했다.
더 많은 불자들이 경전을 가까이 접함으로서
불법의 진리에 다가서길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된 행보였다.
김 보살은 또 불교 외호라는 재가불자 본연의 역할에도 누구보다 충실했다.
해방 후 비구·대처 대립시 비구 스님들이
정화운동에 적극 나설 수 있도록 물심양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또 불교계가 각종 내홍으로 힘들었던 1955년에는
전국신도회 조직 활성화를 위한 재정 지원에 나서며
현 조계종 중앙신도회의 토대를 닦았다.
이후 선학원 여성재가불자모임 마야부인회와
정·재계 불자 부인들의 모임 관훈클럽을 창립해
불교를 중심으로 한 대사회활동에 나서기도 했다.
특히 관훈클럽은 공군사관학교, 육군사관학교를 비롯한
각 군 사령부 및 군부대 법당 건립 불사를 잇따라 펼쳐나가는 등
한국 군포교 역사에 새로운 획을 그은 모임이었다.
어쩌면 훗날 김 보살의 장녀 김인숙씨와 차녀 김의정씨가
각각 불교여성개발원장과 조계종 중앙신도회장을 역임,
재가불교 활동에 앞장선 것도 이같은 원력의 계승이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1975년 남편 김성곤 거사가 먼저 세연을 접은 뒤,
슬픔 속에서도 김 보살의 보시는 멈추지 않았다.
그녀의 보시행은 개인적인 상황이나 환경과 무관하게 당연히 임해야 할 책무 같은 것이었다.
남편을 떠나보낸 이듬해부터 대흥사 일지암 터 복원불사가 본격 진행됐다.
초의선사의 발자취를 더듬어 한국차의 성지를 일궈내는 의미있는 불사였다.
김 보살은 실질적인 공사비 지원은 물론,
몇 번이고 해남을 찾아가 터를 확인하고 일지암 설계의 원형을 찾아 제공하는가 하면
고증과 실사작업에도 세심한 관심을 쏟았다.
꼬박 4년이 소요된 쉽지 않은 여정이었다.
김 보살은 지병으로 쇠약해진 몸에도 살뜰히 일지암 불사를 챙겼다.
1980년 일지암 낙성식을 봉행한 이듬 해,
숱한 불사로 한국 불교를 반석위에 올려놓은 김미희 보살은
61세의 나이로 그리 길지 않은 인생 여정을 마무리했다.
김미희 보살은 아무런 조건 없이, 모든 분야를 넘나들며
한국불교 발전을 위해 유례없는 보시행을 몸소 실천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내 것을 타인에게 나누기란 결코 쉽지 않은 마당에
김 보살의 이런 끝없는 보시 원동력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김 보살을 아는 이들은 “바로 그녀의 깊은 불심에 기인한다”고 입을 모았다.
그녀는 아무리 바빠도 매일 두시간씩 사경을 하고 기도를 하며 수행정진했는데,
이 시간은 누구도 방해할 수 없는 혼자만의 시간이었다.
전국 사찰을 돌며 기도정진할 때에는,
누구인지도 밝히지 않은 채 법복차림에 바랑을 메고 법당을 찾아
며칠이고 정진하다 조용히 돌아갔다고 한다.
무엇이든 드러내거나 생색내지 않고 묵묵히 실천했던 삶의 행보와 꼭 닮은 모습이다.
“김미희 보살의 보시행은 불교 발전에 밑거름이 된다고 생각하는 순간 즉심으로 발현됐다.
이는 곧 일체 보살의 행화를 지녔기 때문이리라.
김 보살의 불사는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항시 부처님을 향한 마음이 작열하고 있기에 가능했다.”(목정배 동국대 명예교수)
“당시 대부분의 본사와 포교당이 김미희 보살의 후원으로 첫삽을 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녀는 한국 불교를 반석에 올려놓으신 재시보살과 같은 분이다.”(조정희 전 조계종 사회과장)
“재산은 사회로부터 얻은 것이므로 다른 이를 위해 보시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믿었고,
한평생 이 같은 지론에 따라 무주상 보시의 원칙을 지켜온 명원 김미희 보살.
그녀를 일컬어 한국불교 역사상 유례없는 공덕 보살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그녀의 보시행은 한번 옳다고 생각하면 일체의 의심 없이 이뤄졌으며,
어떠한 조건이나 상도 내세우지 않았다.
그녀를 향한 그리움과 존경이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생생히 전해지는 까닭은
아낌없는 보시행도 그렇겠지만 그 이면에 빛나는 드높은 정신 때문일 것이다.
2013. 08. 30
법보 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