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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관점⁹과 미적 지각의 유형
어느 관점에 의해서든, 그 관점에서 서서 대상을 수용하기만 하면 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대상을 시적 공간(작품)에 수용하는 과정이란 언어로 표현하는 행위이므로, 언어로 표현해놓은 다음에야 그것이 어떤 내용인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시인 → 시적 대상 → 시적 인식 → 시적 언술 → 시 작품이라는 과정의 결과를 보아야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창작 과정 속에서, 우리는 대상을 지각하는 몇 가지 유형을 추출해볼 수 있다. 이 지각의 각도, 즉 관점 속에 흔히 나타나는 몇 가지 미적 지각의 유형을 보자.¹⁰
이 유형은, 물론, 창작 과정에서 흔히 보이는 형태를 그 나름으로 정리한 것이다. 이것을 검토해보면 대상을 어떤 시각에서 접근하면 바람직한 것인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1. 피상적 지각과 기계적 지각
다음은 공원을 공통으로 시적 대상으로 하고 있는 작품들이다. 이 작품 속에 드러나는 위의 8가지 유형을 비교 검토해보자.
공원은 모두의 안식처
가난한 사람도
부자도 어린 아이도
누구나 찾아와
때묻은 영혼을 맑은 공기에
씻는다.
끝없이 무거운 나날의 짐을 내려놓고
고통을 잊으며
새로운 출발을 위해
이곳을 찾는다.
다가올 내일을 위해. -「공원·1」
「공원·1」은 '공원은 모두의 안식처'라는 식의 관념적 해석을 보여주고 있으나, 상식의 나열과 그 설명이라는 점에서 피상적 지각이다. 상식이란 누구나 알고 있는 흔한 지식이다. 그런 점에서 상식은 거죽 지식에 불과하고, 그 거죽 지식을 나열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피상적인 것이다. 피상(皮相)이란 낱말의 뜻이 거죽 겉모양. 겉면이라는 점을 상기해보면 더욱 분명해질 것이다.
작품 속에 나타나는 상식과 사실은 전혀 다르다. 특수한 경우(예를 들면 반어법)를 제외하고는, 작품 속의 상식은 작품 밖에 있을 때와 다름없는 거죽 지식이지만, 사실은 느낌feeling을 구체화하는 존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작품 속의 사실적 존재는 사실 그 자체가 아니라 작가의 미적 지각의 등가물이다. 다음을 보라.
a) 꽃은 아름답고 예술은 영원하다.
b) 꽃이 피어 있다.
두어 송이
a)는 상식, 즉 거죽 지식의 나열이다. b)는 그런 피상적 지식 대신 사실적으로 사물 현상을 가시화한다. 그 형상화된 사물 현상은 개개의 작품 공간에 어울리는 각각 다른 정서와 의미를 구성한다.
b-1) 해가 지는 서산
새들의 그림자가 설핏 기운다.
그곳에도
꽃이 피고 있다
두어 송이.
b-2) 꽃이 피고 있다.
두어 송이
새들이 날고 있다
서넛
봄 아지랑이 속.
b-1)의 꽃은, 닥쳐오는 어둠의 세계(해가 지는 서산, 기우는 새들의 그림자)와 대립하는 밝음의 세계(꽃)를 암시하는 존재이다. 그 꽃이 b-2)에서는 단순히 봄의 활기 (날고 있는 새, 아지랑이) 중의 하나가 되어 있다.
작품 속의 사실적 존재나 현상은, 그것들이 이미 허구인 예술 작품 속으로 공간 이동을 한 만큼, 사실 그 자체가 아니라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구체화하는 형상적 존재들이다. 작가는 이런 형상, 이런 형상화를 통해 말한다.¹¹ 상식의 나열과 부연 설명은 사고의 피상성과 상투성stereotype의 본보기이다.
혼자서 공원에 갔다.
나무들은 바람 따라 잎을 흔들고
잔디는 파란색으로
넓게 깔려 있었다.
사진사가 큰 소리로
‘사진 한 장 찍으시오’ 했지만
모른 척했다.
벤치에는 가끔 누워서
잠자는 사람들도 있었다.
아무도 없는 벤치에 앉아
담배를 피울 때
비가 후두둑 떨어졌다.
날씨가 춥지 않아 다행이었다. -「공원.5」
관념적 관점의 「공원. 1」과 함께 생각해보아야 할 작품이 실재적 관점의 「공원·5」이다. 「공원. 5」는 기계적 지각의 좋은 보기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대상을 관찰하고 탐구하려는 흔적을 보여주지 않는다. 즉 사고의 흔적이 없다. 실재하는 풍경을 작품에 표현해놓기는 했지만, 그것은 탐구나 의도적 선택이 아닌 기계적인 옮겨놓기이다. 아래 작품과 비교하면 그 점이 더 분명해진다.
땅 위에 내려
조알을 세고 있는 새
손바닥만한 땅 위
조알을 하나씩
부리로 세고 있다
몇 개 조일의 힘으로
새는 하늘로 떠오르고
새를 따라 조알들은
허공에 흩어진다 -권혁진, 「遠景」¹²
이 시는 짧지만 많은 것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손바닥만한 땅”과 그 땅 위에서 날기 위한 조알 몇 개를 쪼고 있는 새와, 새가 날 때 흩어져버리는 조알들이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가를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특히 “몇 개 조알의 힘으로/새는 하늘로 떠오른다는 표현은 얼마나 놀라운가! 또 조알의 힘으로 새가 날 때, 나는 새들과 달리 남은 조알들이 허공에 흩어진다는 사실도 그냥 스쳐 지나가버릴 것이 아니다. 좁은 땅· 새 · 조알, 이 셋은 무작위적 옮겨놓기가 아니라 적극적인 탐구의 흔적이다. 그러나 「공원. 5」는 거죽 지식과 마찬가지로 기계적으로 옮겨놓은, 죽은 사고이다.
Ⅱ. 추상적 지각과 장식적 지각
잔디 위 곳곳에 뿌리박고
물결치는 영혼의 잎들이
넓은 우주를 유영하고
바람을 가르는 비상의 존재들
다투어 여기저기
꽃으로 날린다
꿈을 쫓는 발자국들은
그늘 속에서 하늘과 눈맞추고
싱그러운 향기는
그들을 감싼다 「공원·2」
「공원·2」는 추상적이다. 사실적인 측면에서 보면 “잔디 위 곳곳에 뿌리박”은 것은 나무들이다. 그 나무들은 ‘영혼’으로, 또 새들을 “비상의 존재”로, 공원을 거니는 사람들을 “꿈을 쫓는 발자국”으로 추상화시켜놓았을 뿐이다. 그러니까 이 작품을 사실적 지각에서 고쳐놓으면 다음과 같이 된다.
잔디 위 곳곳에 뿌리박고
물결치는 나무의 잎들이
넓은 하늘을 떠다니고
바람을 가르는 새들은
다투어 여기저기
꽃으로 날린다
꽃을 쫓는 사람들은
그늘에서 하늘과 눈맞추고
싱그러운 향기는
그들을 감싼다
작품으로 따진다면 이 사실적 지각의 것이 훨씬 설득력이 있다. 구체적인 사물이나 현상을 추상화시킨다고 해서 결코 깊이 있는 작품이 될 수가 없다. 이러한 말 바꾸기, 즉 나무 → 영혼, 하늘 → 우주, 비상의 존재 → 새 등과 같은 추상화란 일종의 현학적 말놀이puzzle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와 다른 측면에서 유사한 것이 「공원. 6」이다.
초록빛 물든 잎들이
태양을 향해 손을 흔들고
꿈처럼 싱그러운 바람이
벤치에 앉은 사람의
부드러운 머리칼을 날린다.
잔디는 파도처럼
햇빛 속에 물결치고
나란히 걷는 연인들의 발걸음이
정답다. -「공원·6」
「공원·2」가 아는 체하는 말놀이라면, 「공원·6」은 장식적 말놀이이다. 그러니까 장식적 지각의 산물이다.
초록빛 물든 ㅡ 잎들
꿈처럼 싱그러운 ㅡ 바람
부드러운 ㅡ 머리칼
파도처럼 물결치는 ㅡ 잔디
발걸음이 정다운 ㅡ 연인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일정한 사물 앞에 현상을 드러내는 수식어·수식구가 붙어 있지만, 모두가 상투화된 표현들cliché이다. 이런 낡은 표현들을 제외하면 남는 것이 거의 없다. 「공원· 2」가 구체적 현상을 아는 체하고 추상화한 까닭으로 사실적인 측면조차 모호해지고 있다면, 「공원·6」은 구체적 사실을 단순히 장식한 까닭으로 공허해져 있다. 시적 언술, 즉 시적 표현은 장식하는 데 있지 않고 가려져 있거나 벗어나 있거나 왜곡되어 있는 사물의 본질과 현상을 드러내는 데 있다.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이 말하는 '낯설게 하기'란 바로 관습과 왜곡을 벗겨내기 위한 시각 확보와 다르지 않다. 장식적 지각이란 대상에 또 하나의 외피를 덧씌우거나 화장을 하는 일밖에 되지 않는다.
Ⅲ. 감각적 지각과 사실적 지각
나무들 사이로
한 무리의 비둘기가 외출에서 돌아와
새로 돋은 풀 냄새를 쫓는다.
겨우 걸음마를 배운 아이 하나
나비 따라 길을 혼자 아장거리고
공원 사진사가 스냅사진 한 장처럼
나무 아래 서 있다. -「공원·7」
「공원.7」은 감각적 지각에 입각해 있다. 장식적 지각과 감각적 지각의 차이는, 전자가 대상을 인식의 대상으로 삼기보다 장식하는 대상으로 보고 있는 데 반해, 후자는 지배적인 인상을 통한 대상의 파악이라는 점이다. 그런 감각적 인식은 “한 무리의 비둘기가 외출에서 돌아와/새로 돋은 풀 냄새를 쫓는다”든지 “공원 사진사가 스냅사진 한 장처럼/나무 아래 서 있다”는 등의 표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렇게 감각화된 인식은 우리의 정신 속에 ‘관념화된 감각ideated sensation’¹³으로 인각된다. 다음을 비교해보라.
a-1) 한 무리의 비둘기가 내려와
풀밭을 거닌다
a-2) 한 무리의 비둘기가 외출에서 돌아와
새로 돋은 풀 냄새를 쫓는다
b-1) 공원 사진사가 나무 아래 서 있다
b-2) 공원 사진사가 스냅사진 한 장처럼
나무 아래 서 있다
a-1)과 a-2), b-1)과 b-2)의 차이는 단순히 축어적 묘사와 비유적 묘사라는 수사적 차이만이 아니다. 그 차이는 언어를 매개로 ‘관념화된 감각’인가 아닌가, 다른 말로 하면 ‘형식화된 감정’¹⁴인가 아닌가 하는 엄청난 차이이다. 그 형식화된 감정이란 무의식적 충동과 감정 그 자체가 아니라, 예술적 표현 속에 살아 있는 객관화된 사고의 구체적 모습이다.
구겨진 신문지 한장
벤치의 다리를 감고 있다.
바람도 아니 부는데
어디서 토사물의 냄새가
공원의 잔디 위로 몰려오고
껌팔이 아주머니의 굽은 등 뒤
길 잃은 아이의 울음 소리가
내 귀를 후려친다.
내 몸 위로 덮치는 나무들을
후려친다. -「공원·8」
「공원.8」은 물론 사실대로 쓴 것이 아니다. 우리들은 사실을 완벽하게 기술할 수는 없다. 우리들 그 누구도, 그 누구의 세계관도 세계 속의 모든 것을 포괄할 만큼 그렇게 큰 폭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을 잘못 해석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사실을 다 기술할 수는 없는 것이다.¹⁵ 작품 속의 사실은 그러므로 배제와 선택의 사실이며, 그것도 사실대로가 아니라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배제와 선택 그 자체가 인식인 것은 이와 같은 연유에서이다. 「공원·8」은 그런 의미에서의 사실적 지각이다.
「공원.8」의 선택된 사실들은 공원 속에서 드러나는 부정적 측면의 것들이다. 긍정적인 측면이 전적으로 배제되고 있다는 점이 그것을 예증한다. 사실적 지각의 작가는 선택과 제시를 통해 그 사실적 국면이 직접 말하도록 한다.
IV. 풍자적 지각과 해석적 지각
공원의 잔디 위에는 집 나온
한 마리 개의 곤한 꿈이 자고
벤치 위에는 서울에서 돈 벌겠다고
시골에서 상경한
여관비가 떨어진 청년의 몸이 자고
발로 뛰다 지친 월부장수의
건수가 자고
뒷골목에서 쫓겨 나온
바람의 혼이 잔다
그 옆에서
아무도 숙박비를 요구하지 않았다 -「공원·3」
「공원·3」은 사실적 지각과 닮은 구석이 있다. 공원의 잔디 위에서 자는 개, 벤치에서 자는 시골 청년, 월부 장수, 그리고 바람, 이 모두가 사실적 존재들이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그러한 사실적 존재들은 관념화되어 있다. 즉 한 마리 개는 “한 마리 개의 곤한 꿈”으로, 청년은 “청년의 몸”(이때의 몸이란 표현 속에는 마음은 깨어 있다는 숨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으로, “월부 장수는 “월부장수의/건수”로, 바람은 “바람의 혼”으로 각각 관념의 감각화된 형태로 바뀌어 있다. 그런 만큼 사실적 지각과는 다르다.
설령 이렇게 감각화된 관념들로 바뀌어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즉 그냥 그대로 ‘한 마리의 개’ 또는 ‘월부장수’ 등으로 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이 작품속의 사실적 존재들은 「공원·8」의 그것과는 다르다. 사실화된 관념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표현은 “아무도 숙박비를 요구하지 않았다”이다. 이 구절은 금전만능주의의, 돈이 없으면 죽기도 겁이 나는 현실의 단면을 간접적으로 풍자하고 있다. 풍자는 사실적 지각에 의한 직접적인 제시의 세계가 아니라 기지·반어·냉소·조롱의 방법적 수용에 의해 빗대어 공격하는 정신의 세계이다. 이 풍자의 세계에 들어온 사실적 존재들은 풍자를 구성하는 풍자적 또는 우화적 요소(사실적 요소가 아닌)로 변모하여 사실적인 가면을 쓴 관념이 된다.
혼자 있는 자가
아름다운 순간이 있다.
서두르지 않는 발자국이
그림자를 환하게 밝히고
길과
벤치에
침묵이 솜사탕처럼 달콤할 때,
오라 혼자인 영혼이여
구하는 자는
혼자일 때
그림자도 넉넉하리니. -「공원·4」
「공원·4」는 처음부터 관념적으로 접근한다. 공원을 구체적 실체로 보지 않고 우리에게 그것은 어떤 의미인가를 탐구한다. 같은 관념적 관점의 「공원·1」, 「공원·2」와 다르게, 즉 상식적이고 아는 체하는 현학취로 대상을 파악하여 불투명하게 하고 있지 않다. 이 작품 속의 공원은 구하는 자는 마땅히 혼자 있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그것을 반가워해야 하며, 그러한 혼자 있을 수 있는 공간의 하나로 공원을 노래한다. 그런 점은 공원을 “서두르지 않는 발자국이/그림자를 환하게 밝히고/길과/벤치에/침묵이 솜사탕처럼 달콤”한 곳의 하나로 해석해놓은 구절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이러한 의미의 공간은 본래 공원이 전적으로 그러한 것이 아니라 작가가 공원의 그러한 국면을 추출해내고 해석한 것이다. 다음을 살펴보라.
a-1) 공원의 여기저기
혼자 앉아 있는 사람들
a-2) 혼자 있는 자가
아름다운 순간이 있다
b-1) 긴 그림자를 끌고가는
서두르지 않는 발자국
b-2) 서두르지 않는 발자국이
그림자를 환하게 밝힌다
a-1), b-1)은 사실적 지각이며, a-2), b-2)는 해석적 지각이다. 사실적 지각은 사물과 현상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하는 데 초점이 모아져 있지만, 해석적 지각은 사물과 현상의 의미를 파악하는 데 집중되어 있다. 이것이 두 지각의 극적 차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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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여기에서 관점은 'a view'의 의미이다. 그러니까 인생관a view on life, 세계관a view of the world처럼 하나의 관(觀)을 암시한다. 이와 달리 시점은 'point of view'의 의미이다. 그러니까 관점 속의 시각들이다.
10 이 미적 지각의 유형은 시점과는 다르다. 묘사나 진술에 나오는 시점은 수사적 측면(표현)의 분류 개념이고, 여기에 나오는 미적 지각의 유형은 인식적 측면(사고)의 분류 개념이기 때문이다.
11 Theodor Adorno, 앞의 책, p. 216.
12 권혁진, 프리지아꽃을 들고, 문학과지성사, 1987, p. 68.
13 Virgil C. Aldrich, 앞의 책, p. 33.
14 G. T. Wright, 시인의 얼굴 The Poet in the Poems, 김준오 옮김, 이우사, 1984, p. 281.
15 같은 책, p. 265.
『현대시작법』 오규원
2024. 9. 19
맹태영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