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6월 5일 오후 2시경 춘천문화예술회관 전시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이 곳에서 전시중인 서예작품들을 감상하기 위해서 였다. 그 넓은 전시실은 여러 개로 구획되어 각기 다른 서예가들(여덟 분으로 기억됨)의 작품이 진을 치고 있었다. 전시장의 규모가 커 그 위용에 압도되는 듯 했다.
여러 작가 중에는 아는 분도 있었지만, 모르는 분이 태반이다. 전시장의 중간쯤을 지났는데도 내가 찾아온 작가의 전시실은 보이지 않았다. 내가 찾는 곳은 여현 황선희 작가의 전시실이었다. 이때만 해도 서예가 여현 선생과는 생면부지의 사이었다.
내가 오늘 이곳을 찾아오게 된 것은 처조카인 백종택의 권유와 인도에 따른 것이다. 그는 수십 년간 경찰에 몸담고 있다가 사북지서장을 마지막으로 얼마 전 퇴직했다. 여가선용과 취미활동을 위해 여현선생이 원장으로 있는 서예학원에 나가 서예지도를 받고 있었다. 그가 스승의 전시회를 축하하는 난분(蘭盆)을 사가지고 가는 길에 나보고 같이 가자고 연락을 한 것이다. 물론 내가 붓글씨를 좋아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전시실은 끝자리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여현선생은 외출 중이었다. 작품들을 일일이 감상하고 난 얼마 후 입구 쪽에서 한복을 화사하게 차려입은 중년 부인이 들어왔다. 개량 한복이 마치 잘 어울렸고, 머리 위에는 예쁜 장식품 같은 것이 얹혀 있었다. 잰걸음으로 걸어서인지 그 움직임은 평소 양장을 했을 때와 같이 발놀림이 리드미컬해 보였다. 걸어오는 자태에서 청초한 품위, 그리고 우아함이 묻어났다. 이 분이 바로 여현선생님이었다. 백경위의 소개로 수인사 후 작품 감상의 소감을 숨김없이 피력했다. 나 개인의 감상안으로 본 느낌은 분명 여러 전시장 중에서 이곳이 백미라고 생각되었다. 그리고 작품 중에서 특히 나의 시선을 끈 작품들을 놓고 얘기를 주고받았다.
그의 작품에 나온 글들은 사서삼경에서 따 온 구절이 많았고 비교적 다양했다. 특히 노자도덕경의 명구들이 많이 눈에 띠었다. 여현선생은 그때 노자 도덕경에 심취해 있는 듯 했다. 노자의 명구들을 설명하는 말은 이미 그 난해한 뜻을 자기 것으로 소화한 것이어서 청간수같이 맑게 흘러나왔다. 그는 훌륭하게 만들어진 본인의 도록에 정성껏 사인을 해서 나에게 건네주었다. 그 고마움에 답하기 위해 나의 저서 『금실지략육십년』을 보내겠다고 약속한 후 아쉬움과 여운을 뒤로 한 채 그 곳을 빠져나왔다.
며칠 후 나의 책을 받은 여현선생이 망외의 귀한 선물을 나의 아파트 우편물 함에 넣어 놓고 갔다. 그는 같은 아파트 바로 옆(110동)에서 교직에 몸담고 있는 부군과 장성한 아들들과 같이 안주하고 있다.
정성 담아 붓글씨로 쓴 귀한 편지, 서산 대사의 시를 뛰어난 예서로 여백을 조화롭게 매운 부채, 두 점 모두 나에게는 소중한 선물이었다. 편지는 곧 표구하여 거실 벽에 걸어놓고 거울 보듯이 보고 있다. 부채는 후일 아들에게 물러주고 싶다. 이 편지글이 나게게 두고두고 잔잔한 감동을 준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여현 황선희 선생이 저자에게 보낸 편지
얼마가 지난 후 그는 우리 집을 방문하고 싶다고 했다. 이 말을 전해들은 나는 물론 쾌락했다. 보람 있게 즐기며 살라고 애쓰는 노옹의 삶의 모습을 직접 보고 싶다는 뜻으로 짐작했다.
어느 날 그는 가까운 친구면서 제자인 두 여인과 같이 우리 집을 찾아왔다. 세 분 모두 세상의 맛을 이제 알게 된 지천명(知天命)의 나이의 중년부인들이었다. 노부부의 생활공간에 생기를 불어 넣기에 충분한 방문이었다. 그들은 수석과 분재에 물을 뿌려 보며 살아나오는 선명한 색감에 감탄하기도 하고, 수석에 대한 나의 설명을 듣고 머리를 끄덕이며 수긍하기도 했다. 같이 온 두 분 중 한 분(박복남)은 발랄하고 활기가 넘칠 뿐 아니라 유머가 있었다. 나와 농을 주고 받으며 가가대소하기도 했다. 또 한분(신점남)은 남편이 나와 같은 진주 강씨라며 정중하게 나를 대했다. 그는 차분한 성품이었다. 이때 여현선생의 진면목을 볼 수 있었다. 신실되고 지적이고 지혜가 있었다. 그리고 결곡 한 편이였다. 이렇게 세 분의 언행이 조화를 이루어 조용하기 이를 데 없던 우리 집이 활기에 넘쳤다. 시간이 자나 그들이 각자 삶의 터를 찾기 위해 문을 나섰다.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는 법정스님의 말이 떠올랐다.
여현 선생은 부채에 서산대사의 시를 써서 저자에게 선물로 보내주었다.
나는 몇 달이 지난 후 그가 서예지도를 하고 있는 서예교실(평생교육정보관)을 찾았다. 한 두 시간이라도 여현선생이 운필(運筆)하는 것을 직접 보고 싶어서였다. 제자에게 체본을 써주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았다. 기필(起筆)에서부터 행필(行筆), 수필(收筆)할 때까지의 붓놀림을 보는 것이 나에게는 귀한 산교육이었다. 여현선생의 필력은 숙련되어 있었다. 나는 이런 기회를 허락해 준 여현선생이 고마웠고 여현선생은 나 같은 노골이 그래도 글씨를 배울 의욕을 버리지 않고 찾아준 것이 반가웠을지도 모른다. 그때 여현선생은 글씨 한 폭을 써 기념으로 나에게 주었다.
여현선생은 30여 년 전에 서예에 입문한 후 좌고우면 함이 없이 일로 매진했다. 시백 안종중, 구당 여원구, 남천 정연교 등에 사사받으며 필력을 키웠다. 그가 연마하는 쪽을 굳이 따지면 한문성PWhr이다. 그런데 오체(五體)를 두루 잘 쓴다. 전시회에 출품하여 탄 상은 수도 없이 많다. 언젠가 대개의 서예가들이 특히 잘 쓰는 체가 있는데 어떻게 오체를 다 잘 쓰느냐고 했더니 그게 바로 나의 장점이면서 약점이기도 하다고 했다. 그 뜻은 여러 체를 쓰다 보니 어느 한체에 몰입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즐기면서 글씨를 쓰고 글씨를 쓰면서 즐긴다. 그래서 여묵락진(與墨樂進)을 서예가로서의 좌우명으로 삼고 있다고 했다. 이 말은 여현선생이 노자에 나오는 ‘미자인심지소진락야’(美者人心之所進樂也)라는 말에서 진락(進樂)을 따 여묵락진(與墨樂進)이라 지은 것이다. 즉 먹과 더불어 즐기며 인생을 살아가겠다는 뜻이다. 그야말로 서예를 인생일락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존경받는 참된 서예가로서 그 자리를 지키려면 필력을 연마하는 한편 학문에도 정진해 고매한 인품을 길러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현선생은 학문적 정진도 게을리 하지 않고 있다. 요즈음은 한자의 고저장단을 옥편을 찾아가며 한시 공부도 열심히 익히고 있다. 그가 몰입하고 있는 문인화의 화제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으니 금상첨화라 할 수 있다.
여현 선생의 문하생들로 구성된 ‘소소서우회’(掃素書友會)의 회원들이 여묵락진전(與墨樂進展)이라는 이름으로 전시회(2011.10.29)를 열었다. 나도 초청을 받아 감상하는 기회를 얻었다. 여현선생은 제자들의 작품전시회를 축하하고 기리는 글씨 한 폭을 써서 걸었다. 그의 글씨는 예서로 단아하고 고담스러웠다. 그런데 이 한시(漢詩)를 여현선생이 작시한 데 놀랐다. 그 시는 아래와 같다. 특히 낙구(落句)가 마음을 끈다. (p.263)
여현 황선희 선생이 지은 『여묵락진전』축하시 (漢詩)
나는 서예가로서의 그를 멀리서 지켜보면서 반드시 대성하리라 믿어 왔다. 나의 예측은 빗나가지 않았다. 그는 2011년 제30회 대한민국미술대전(서예부)에서 우수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얻었다.
이상은 서예가들의 선망의 대상이다. 우수상은 대상 다음의 큰 상이라 강원서단의 쾌거라 할수 있다.
여현 황선희 선생이 지은 [여묵락진전] 축하시 (漢詩)
지금까지 강원도에서 우수상을 수상(서예부)한 분이 있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다. 신문에도 그렇게 보도 되었다. 이제 그는 국전 초대 작가가 되었다. 내 나이 그와는 30여세의 차이가 난다. 셋째 딸과 같은 나이다. 그러나 나는 서예에 있어서 그를 스승으로 생각하고 그리고 그의 기품(氣品)을 존경한다.
(2011년 10월)
p257 ~ p2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