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절)
바울은 말의 지혜로 하지 않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전1:17)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를 훼손하지
않으려 했다는 말입니다. 저 같은 사람도 사실 목회를 할 때에는 설교를
말의 지혜를 사용했다 봅니다. 지금보다는 그때에 설교를 잘한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현재는 사람들이 듣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듭니다. 어렵다고요.
심지어 왜 사랑이 없느냐 하는 이도 있습니다. 그 사랑은 인정이나 칭찬이겠죠.
여러 강도들에게 보이스피싱을 당해 만신창이가 되었음에도 폼생폼사에 매달립니다.
저도 처음 진리의 말씀을 깨달았을 때에 과연 누가 이 말씀을 들을까 심한 갈등을
했습니다. 선교지에서 진종일 대화가 되는 사람을 하나 만나지 못할 때도 있고
현지 교회에 가서 설교를 해도 겨우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므로 여러분은
영생을 가졌습니다(요일5:11) 또는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죄와 사망에서 그리스도 안으로 옮겼습니다.
이런 기초적인 설교 외엔 할 수가 없었습니다. 참 무료하고 지루한 나날이었습니다.
그로 인해 카페를 통해 아침 글을 써 보내므로 영의 숨쉬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만일 예수 믿고 구원을 받아 천국에 간다고 믿거나 주님이 나팔소리와 함께
재림하시면 그때에 부활하여 공중에서 혼인잔치에 참여한다고 믿는 사람들은
허상에 사로 잡혀 천국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서 그 천국을 상상하게 되겠지요.
그런 믿음을 가진 사람들 중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셔서 천국지옥을 보여 주셔서
어리석은 믿음을 흔들어 깨우시는 징계를 하셔도 그게 뭔 특별한 대접인 줄 알고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간증하러 다닙니다. 나중에 큰 코 다칠 걸 모릅니다.
지금 현재 그리스도께서 내주하여 임재하시므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지 않는
사람이 하늘에 있는 천국만 바라보고 있다면 이 사람의 천국은 허상입니다. 환상이죠.
현재의 교회는 라오디게아 교회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밖에서 문을 두드리고
계시는 상황입니다(계2:20) 말세에 이를수록 아담 안에 있는 선악과의 독성이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적그리스도의 교회들이 되고 맙니다. 적그리스도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육체 안(in the flesh)에 계심을 부인하는 겁니다(요일4:2) 그리스도를 밖에 두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거기에 못 박히신 예수를 믿고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그가 상함 우리의 죄악,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가 평화,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사53:5)고 믿고 고백하는 것뿐입니다. 그리고는 육신의
볼륨을 높여 육신의 행함으로 인해 복을 받는다고 생각하고 계속 도전하는 겁니다.
그들이 육신에 속했다는 증거는 인사부터입니다. 인사가 육신에 대한 안부나 호의입니다.
우리가 살롬하며 인사하는 건 겉사람의 안부가 아니라 속사람에 대한 안부인사입니다.
그러나 건강 사업 직장 자녀 등의 관심사를 보이는 건 겉 사람에 빠진 증거입니다.
바울이 십자가의 도라고 한 말은 십자가의 메시지 곧 호 로고스, 그리스도이십니다.
십자가를 바라보자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십자가를 걸어 놓고, 아니면 목걸이나 배지를
만들어 달고 다니는 게 아닙니다. 십자가의 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사는 해산의
수고를 통해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역사하시므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겁니다.
반드시 성령세례로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는 새 언약이 이루어져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질 줄 아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목숨을 버리므로 새 생명을
얻는 일은 바로 주님께서 주시는 천국열쇠 자체입니다(마16:19) 땅에서 열면 하늘에서도
열립니다. 바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요나의 표적(마16:4)인데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다가
나온 요나가 변화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께서는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승천
하시므로 만왕의 왕이 되셨지만 우리는 보내주신 성령 안에서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데 많은 시간과 시행착오를 반복한 다음에 이루어집니다.
아브라함이 야곱 등의 예로 보면 말씀은 오래 전에 임하였지만 온전히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약속의 성취는 긴 시간이 걸린 다음입니다. 주님께서 아버지께
가시면 진리의 성령을 보내셔서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실 것을 말씀하시고 여기를
떠나자 하시고 포도나무와 가지가 연합이 되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집니다(요15장)
주님께서는 사흘 만에 이룩하셨지만 우리가 그 세례를 따라 가려면 해산의 수고가
따르게 됩니다. 예수를 밖에 두고 믿는다고 하던 사람이 그리스도를 안에 모시고
주로 모시려면 반드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에 합하여 죽고
다시 살아나는 해산의 수고가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고 예수를 믿고
천국에 간다는 환상에 빠진 믿음은 반드시 실상의 믿음이 되기 위해 흔들어
깨우시는 징계를 받습니다. 그 징계에 처한 사람들이 도처에 수도 없습니다.
아담 안에 선악과의 죄와 독성에 젖어 있는 인간은 선악의 지식에 눈이 밝아
생명나무이신 그리스도를 외면합니다. 자신의 육체의 진선미를 애지중지하면서
육체의 행위로 선한 일을 하므로 남의 인정과 칭찬을 받으려고 노력합니다.
그야말로 폼생폼사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십자가의 도를 미련하게 봅니다.
그 속엔 영적기근이 와서 타 들어가고 뇌가 썩어가며 사람들과는 티격태격 하는
관계 속에서도 선악에 대한 애착은 그칠 줄 모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몸에 손을
대실 때는 거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게 됩니다. 놀랍게도 이와 같이 마지막 숙제를
하는 나이 든 목회자나 장로들이 상상 외로 많은 숫자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지 못했거나 베드로와 제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을
보고도 주님을 배신한 후에 오순절이 될 때까지의 여정을 거치는 해산의 수고를
마다하고 넓은 길로 많은 이들과 함께 당을 지어 진리를 대적하는 신앙생활에
익숙해졌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고 조금 있으면
보리라 하시고 진리의 성령으로 임무교대를 하시고 우리 가운데 그 장막을 치고
계시는 새 언약을 믿음으로 수용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라고
주권을 이양교대를 해아 하는데 그 시간이 꽤 깁니다. 이 기간을 인내하지 못하여
그리스도의 도가 구원을 받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을 체험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구원을 다운 받는 곳은 십자가 앞이 아니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므로 그리스도 안에 발견이 된 자리에서 성령이 임하여
진리를 따라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를 향하여 주의 이름을 부를 때 받습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
할렐루야!